홀로서기 그 심오한 말
나는 아직도 홀로서기를 배우고 있다!
"너 자신이 되어라! 이것이 토미즘 윤리학의 마지막 언명이다!" -에티엔느 질송-
나는 아직도 홀로서기를 배운다. ‘홀로서기’라는 말은 내가 대학 초년생일 당시 에리히 프롬의 <존재냐 소유냐>를 읽고 동아리 학생들과 담론을 하면서 들은 이야기였다. 당시는 군부독재와 대모시대로 혼란한 사회상과 맞물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질 알 수가 없는 모호하고 암울한 시기였기 때문에 ‘홀로서기’라는 말이 매우 유행한 시기였다. 당시로는 이 홀로서기라는 말이 ‘주체성을 가져라!’ ‘비굴하지 말고 당당하게 자신의 신념대로 행동하라!’는 등의 의미로 많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이 말은 나의 삶의 의미에 크게 무게 있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런데 시대적 상황 때문인지, 요즈음에 와서 다시 이 말이 나의 삶에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듯하다. 홀로서기는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 말이다. 우선 첫 번째 의미는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를 판별하는데 있어서 나 스스로의 이성과 양심을 통해서 진실을 파악한다는 인식론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데카르트는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확고한 것을 알기 위해서 ‘의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의심해보고 나아가 이렇게 확보된 확실한 것만을 진리로 간주하고 자신의 학문적 행위를 하고자 하였다. 매체나 인터넷 통신망이 너무나 발달하여 매일 다양한 정보들이 홍수같이 쏟아지는 시대에는 무엇이 진실인지 허위인지 분별하기 매우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홀로서기가 되어 있지 않고, 막연하게 대중의 믿음이나 매체들의 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의식은 허상으로 가득 차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이나 진실 혹은 진리를 파악하는데 있어서 홀로서기가 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결코 참된 행위 진실한 행동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실과 진실을 잘못 알고 있다면 내가 아무리 선한 의도로 행동한다고 해도 그 행동은 잘못된 행동이 되고 말 것이며, 선의로 행한 것이 오히려 오해를 낳고 타인에게 피해를 줄 수가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의미는 어떤 사태나 사건에 대해 가지는 가치 판단의 문제에 있어서 오직 내 양심에 있어서 판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우 항상 내가 나 스스로에게 있어서 떳떳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참으로 나약하여 평소에는 매우 선하고 의로운 사람인 것 같이 행동하지만, 한 단체나 공동체에 조금만 어려움이 닥치고 피해상황이 발행하면 문제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 파악하고, 단체나 공동체를 위해 최선의 해결책을 찾기 보다는 우선적으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하고자 하는 이기적인 행동을 한다. 이는 문제해결을 위한 수고를 피하고 자신의 안위를 지키고자 하는 보호본능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모두가 이렇게 행동한다면 결국 문제해결을 위한 해결책은 어디서도 발견할 수가 없을 것이며, 서로가 서로를 증오하고 미워하면서 공동체는 와해될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누구도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진실하지 않았다는 것에 있다. 문제의 원인이 사고나 우연 혹은 외부의 어떤 힘에 의한 것이거나 혹은 모두가 조금씩 책임이 있음에도 누군가 ‘십자가’를 지울 사람을 찾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 홀로 선다는 것은 참으로 힘겹다. 왜냐하면 홀로서기를 하자면 자신이 곧 그 십자가를 져야하는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당하지 않거나 의롭지 않거나 혹은 사악한 것에 결탁하여 자신의 안위를 보존하게 된다면 이미 ‘진리를 추구한다’거나 ‘참되게 산다’거나 ‘선한 사람이 돤다’거나 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고 이후 자신이 말하는 진리나 정의의 말들은 모두 위선이 되고 말 것이다. 만일 이 같은 삶이 일반적인 나의 행동원칙이 되어 버린다면 내가 철학을 하든지 종교를 믿든지 모든 것은 생존을 위한 방편이 되어 버리고 나의 인생은 위선 그 자체가 되어버릴 것이다.
세 번째 의미는 행동함에 있어서 ‘나’나 ‘우리’를 위해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올바름, 정의 혹은 진리를 위해 행동한다는 것에 있다. 이는 가장 어렵고 최고의 수준에 이르는 홀로서기가 아닌가 싶다. 베르그송은 의무감 이상으로 행동할 때 ‘도덕적’이라고 말하였다. 다만 양심에 따라 떳떳하고, 양심에 따라서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양심이 말하는 것 이상을 자신의 신념이나 가치관에 따라서 최고의 선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곧 홀로서기의 의미이다. 다시 말해 상황 속에서 가장 이상적이고 최선의 가치를 추구하려고 하는 것, 진정으로 타인을 위해서 혹은 진리를 위해서 자신의 노력과 시간 그리고 이익을 양보하려고 하는 진정한 의미의 ‘사랑의 행위’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 만일 두 번째 의미의 홀로서기가 타인들과 나 자신에게 떳떳함의 의미라고 한다면 후자는 일종의 진리 앞에서 혹은 신 앞에서 떳떳함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전자가 세상의 정의라고 한다면, 후자는 신의 정의라고 할 만한 것이다. 내가 타인들을 위해 전혀 희생하지 않았다면 즉 사랑의 행위를 하지 않았다면, 나 스스로 떳떳하게 살았다고 해도 신 앞에서는 떳떳할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정의이다. 그래서 키르케고르는 진리를 산다는 것은 매순간 신 앞에 홀로 나서는 ‘단독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홀로서기를 한다는 것의 마지막 의미는 결국 ‘진정으로 진리를 산다’는 것이 될 것이며, 이것은 거의 모든 종교에서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과 같은 것이다. 불교에서도 “길을 가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라는 말이 있고, 성서에서도 “진리로 들어가는 문은 좁다”고 하였다. 홀로서기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어쩌면 인간이라면 누구도 ‘홀로서기를 배워야 한다’는 이 진리를 피해갈 수는 없을 것이다. 이슬람의 명언에는 “망자들의 묘가 모여 있는 공동묘지에는 ‘사회’가 없다!”라는 명언이 있다. 이는 누구나 예외 없이 언젠가 한번은 혼자가 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죽음에 마주하여 혼자되었을 때는 더 이상 홀로서기를 배울 수가 없다. 홀로서기는 여럿이 함께 하는 가운데서만 배울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