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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숙종실록 65권, 숙종 대왕 행장(行狀)
숙종 대왕 행장(行狀)
행장(行狀)에 이르기를,
"국왕(國王)의 성(姓)은 이씨(李氏), 휘(諱)는 순(焞), 자(字)는 명보(明普)로 현종 대왕(顯宗大王)의 적사(嫡嗣)이며 효종 대왕(孝宗大王)의 손자이다. 어머니는 명성 왕후(明聖王后) 김씨(金氏)로 영돈녕부사 청풍 부원군(領敦寧府事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의 따님이다. 효묘(孝廟)께서 일찍이 꿈에 명성 왕후의 침실(寢室)에 어떤 물건이 이불로 덮여 있는 것을 보고 열어 보시니, 바로 용(龍)이었다. 효묘께서 꿈을 깨고 나서 몹시 기뻐하며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원손(元孫)을 얻을 좋은 징조이다.’ 하고 미리 소자(小字)를 용상(龍祥)이라고 지어 기다렸는데, 과연 숭정(崇禎) 기원(紀元) 34년 신축년104) 8월 15일 신유(辛酉)에 경덕궁(慶德宮)의 회상전(會祥殿)에서 왕(王)을 낳으셨다.
다섯 살 때 명성 왕후가 산병(産病)이 있자, 왕이 매양 꿇어앉아 미음을 올리며 근심하는 빛이 안색에 드러나니, 명성 왕후가 억지로 드시며 말하기를, ‘네가 권하니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하셨다. 기르던 참새 새끼가 죽자 묻어주도록 하였다. 내국(內局)에서 우락(牛酪)을 취하는데, 그 송아지가 비명을 지르자, 왕이 듣고 불쌍히 여겨 우락을 들지 않았으니, 그 인효(仁孝)한 성품이 어려서부터 이와 같았다. 현묘께서 몹시 사랑하여 특별히 조신(朝臣) 중에서 선발하여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김좌명(金佐明)·김수항(金壽恒) 등을 원자 보양관(元子輔養官)으로 삼았다. 현종께서 송준길을 인견(引見)하고 내시(內侍)에게 명하여 왕(王)을 불러 나오게 하니, 왕이 송준길을 향하여 재배(再拜)하였다. 송준길이 현묘께 절하며 하례하기를, ‘원자의 읍양(揖讓)과 궤배(跪拜)가 정확하게 법도에 맞으니 만약 하늘이 낸 것이 아니라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종사(宗社)와 신민(臣民)의 복입니다.’ 하였다.
정미년105) 정월(正月)에 책봉(冊封)하여 왕세자(王世子)로 삼았다.
기유년106) 정월(正月)에 어가(御駕)를 따라 태묘(太廟)에 참배하고 8월에 입학례(入學禮)를 행하여 선성(先聖)을 전알(奠謁)하였다. 이어 박사(博士)에게 나아가 학업을 청하였는데, 예를 차린 용모가 씩씩하고 엄숙하며 강(講)하는 음성이 크고 맑으니, 뜰에 둘러서서 보고 듣는 자가 모두 뛰며 기뻐하였다.
경술년107) 3월에 관례(冠禮)를 행하고, 신해년108) 4월에 가례(嘉禮)를 행하였는데, 왕비(王妃) 김씨(金氏)는 광성 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의 따님이었다. 이때 왕이 바야흐로 어린 나이였는데 궁료(宮僚)를 자주 접견(接見)하며 부지런히 강마(講磨)하여 문리(文理)가 크게 통달(通達)하고 예덕(睿德)이 날로 향상되었으며, 빈사(賓師)를 대우함에 있어 은혜와 예의가 모두 지극하였다. 찬선(贊善) 송준길이 갑자기 죽자, 하령(下令)하기를, ‘내 마음이 슬픔에 싸여 실로 스스로 안정(安定)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전날의 은근한 가르침을 생각하니, 나도 몰래 목이 메어 소리가 막힌다.’ 하며 궁관(宮官)을 보내어 조제(弔祭)하게 하였다.
갑인년109) 에 현종께서 병환이 나시자 왕은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근심하고 애태우며 옷을 입은 채 띠를 풀지 않았고, 대점(大漸)이 되자 대신(大臣)과 중신(重臣)들을 나누어 보내어 종사(宗社)와 산천(山川)에 경건히 기도하게 하였다. 8월 18일 기유(己酉)에 현종께서 승하하시자, 왕이 우수(憂愁) 속에 상주(喪主) 노릇을 하시며 수장(水醬)조차 들지 않고 반호(攀號)하고 가슴을 치고 뛰면서 통곡하니, 모시는 자가 차마 고개를 들고 쳐다보지 못하였다. 예관(禮官)이 사위(嗣位)하는 절목(節目)을 올리니 도로 내리며 말하기를, ‘하늘이 무너져 망극(罔極)한 가운데 또 이런 말을 들으니, 오장이 찢어지는 듯하여 스스로 진정할 수가 없다.’ 하며, 근신(近臣)과 삼사(三司)에서 여러번 청해도 허락하지 않다가 대신(大臣)이 백료(百僚)를 거느리고 정청(庭請)하며 세 차례 청한 뒤에 비로소 허락하였다.
23일 갑인(甲寅)에 왕이 여차(廬次)에서 걸어 나오는데, 울며 곡하는 소리가 끊어지지 않았고, 눈물을 비오듯 흘렸다. 그리고 빈전(殯殿)에 나아가 대보(大寶)를 받으면서 곡하고 절하였다. 이어서 연영문(延英門)으로부터 걸어 나와 인정문(仁政門)의 계단 위에 이르러 오랫동안 서서 어좌(御座)에 나아가지 않았다. 승지(承旨)와 예관(禮官)이 달려가 나아가기를 권유하니, 왕이 따르지 않고 소리내어 울 뿐이었다. 여러 대신들이 합사(合辭)하여 간청하니, 왕이 어좌에 올라가 곡했는데, 눈물이 흘러 얼굴을 뒤덮었다. 뜰에 가득한 신료(臣僚)들이 모두 다 목이 메어 울면서 눈물을 흘렸고, 위졸(衞卒)이나 이예(吏隷)들까지도 눈물을 씻지 않는 자가 없었다. 예(禮)를 마친 후에 걸어서 여차로 돌아왔는데, 울어 곡하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으며, 언제나 신료(臣僚)로서 처음 보는 이를 대하면 곧 곡하였다. 조용히 대신(大臣)에게 말하기를, ‘내가 어린 나이로 이런 대위(大位)에 올라 사리(事理)가 어떠한 것을 알지 못하니, 무릇 여러 가지 정령(政令)에 있어 혹시라도 망령되고 그릇된 것이 있을까 두렵다. 다만 대신이 잘 인도해 주기를 바란다.’ 하였다.
왕은 보위(寶位)에 오른 이래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공경하고 두려워하며 한결같이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걱정하는 것을 임무로 여겨, 상방(尙方)이 연시(燕市)에서 무역(貿易)하는 것을 특별히 정파(停罷)하도록 명하였다. 뒤에 대신(臺臣)의 말로 인해 또 태복시(太僕寺)에서 말을 사들이는 것을 정파하였다. 새 능의 석물(石物) 공사가 매우 거창했는데, 왕이 자교(慈敎)를 받들어 영릉(寧陵)의 옛 석물을 옮겨다가 씀으로서 백성들의 힘을 덜어 주었다.
이때 인선 왕후(仁宣王后)의 상(喪)이 채 연상(練祥)110) 이 되지 않았는데, 예관(禮官)이 ‘왕이 대신 복(服)을 입는 예(禮)’를 계의(啓議)하니, 왕이 대신(大臣)의 의논을 따라 졸곡(卒哭)한 뒤에 조전(朝奠)111) 으로 인해 복(服)을 입었다. 이는 대개 고인(古人)의 ‘장사를 지내기 전에는 살아계신 것을 본뜬다.’는 뜻을 적용한 것이다.
왕은 흉년든 해에 민생(民生)의 고달픔을 깊이 진념(軫念)하여 더욱 심한 고을의 군포(軍布)의 절반을 경감해 주었고, 신해년112) 이전 환상(還上)으로 지적해 징수할 곳이 없는 것과 함경도(咸鏡道)의 임자년113) 이전의 미처 봉납(捧納)하지 못한 것 등을 모두 탕감(蕩減)해 주도록 하였다.
12월 임인(壬寅)에 현종 대왕(顯宗大王)을 숭릉(崇陵)에 장사지냈다. 발인(發靷) 때 왕이 돈화문(敦化門) 밖에서 공경히 전송했고 반우(返虞)114) 때는 교외(郊外)에서 맞이해 곡하였다.
을묘년115) 인선 왕후(仁宣王后)의 연제(練祭)를 지낸 뒤 대신(大臣)의 의논을 따라 경사전(敬思殿)의 삭망(朔望) 배제(陪祭) 때 신료(臣僚)들이 지금 착용하고 있는 백포(白袍)·백모(白帽)·백대(白帶)로 제례(祭禮)를 행하도록 하였다.
여름에 가뭄이 들자 왕이 친히 사직단(社稷壇)에 기도를 드렸다. 가을에 산릉(山陵)을 참배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백성들의 기쁨과 근심은 수령(守令)에게 달려 있다.’ 하고 수령이 사조(辭朝)할 때 반드시 인견(引見)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방도에 대해 하문(下問)하였으며, 또 입을 벌리기를 좋아하거나 명예를 노리지 말도록 하였다. 간혹 그 적합하지 않은 자를 살펴 체직시키기도 하며, 하교(下敎)하기를, ‘「수목(守牧)은 적임자를 얻지 못하면 전조(銓曹)에서 잘못 의망(擬望)한 죄를 무겁게 진다.」는 것을 일찍이 이미 엄하게 신칙(申飭)하였는데, 봉행(奉行)하는 것이 정차 해이해져 능히 가려서 임명하지 못한 나머지 근래에 방백(方伯)이 아뢰어 파직시키는 일과 대각(臺閣)의 탄핵하는 일이 자주 있으니, 별도로 거듭 밝힌 뜻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 전관(銓官)을 추고(推考)하여 경칙(警飭)하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옛날에 당 태종(唐太宗)이 말하기를, 「오늘이 나의 생일이다. 세속에서는 모두 즐거움으로 여기지만 짐(朕)에게 있어서는 도리어 서글픈 느낌을 이루니, 어찌 연락(宴樂)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자로(子路)는 일찍이 백리(百里) 밖에서 쌀을 져다가 부모(父母)를 봉양했는데, 부모가 죽자 항상 쌀을 져오던 날을 생각하였다. 지금 나는 바야흐로 상중에 있으니, 어찌 편안하게 그대로 탄일(誕日)의 방물(方物)과 물선(物膳)을 평일처럼 봉(封)할 수 있겠는가? 그만두도록 하라.’ 하였다.
일찍이 공인(工人)에게 명하여 주수도(舟水圖)를 제작하게 했는데, 친히 글을 짓고 그 위에 써서 좌석 옆에 걸어놓고 스스로 경계하였다. 어느날 보필하는 신하들에게 내보이며 말하기를, ‘임금은 배와 같고 신하는 물과 같다. 물이 고요한 뒤에 배가 편안하고, 신하가 현명(賢明)한 뒤에 임금이 편안하니, 경(卿) 등은 마땅히 이 그림의 의미를 체득하여 보필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여러 도(道)의 방백(方伯)에게 하유(下諭)하기를, ‘나의 백성을 위하는 일념(一念)은 자나깨나 느슨해지지 않는다. 언제나 밥 한 술을 뜰 때마다 늘 쌀 한 알 한 알이 신고(辛苦)임을 생각하고, 옷 한 벌을 입을 때마다 늘 방적(紡績)의 노고를 생각한다. 근년의 기근(飢饉)은 8도(八道)가 모두 다 그러한데, 기전(圻甸)·양서(兩西)·영서(嶺西)·영북(嶺北)이 더욱 시급하다. 반드시 미리 요리(料理)한 연후에야 불쌍한 우리 백성들이 거의 구렁에 떨어지는 근심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십행(十行)의 천찰(天札)에 말뜻이 애절하니, 중외(中外)에서 그것을 듣고 감읍(感泣)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음홍(淫虹)이 해를 꿰뚫음으로 인해 하교(下敎)하여 자신을 책망하고 여러 신하들을 칙려(飭勵)하였으며 널리 직언(直言)을 구하였다.
병진년116) 에 수의(繡衣)를 나누어 보내어 수령(守令)들의 착하고 착하지 않음을 살피도록 하였다. 빈사(儐使)의 장계(狀啓)로 인해 한 현리(縣吏)가 치적(治績)이 없는데도 지나치게 포상을 준 것을 알고 마침내 어사를 처벌하였다.
개성부(開城府)에 화재(火災)가 나서 5백여 가호(家戶)가 불에 타자, 특별히 주진(賙賑)하도록 하였다.
8월에 현묘(顯廟)의 대상(大祥)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나서 8일 정축(丁丑)에 산릉(山陵)을 전알(展謁)하였다. 10월에 담제(禫祭)를 거행하고 12월에 친히 편전(便殿)에서 대정(大政)을 거행하였다.
정사년117) 에 태학(太學)에 거둥하여 선성(先聖)을 배알(拜謁)하고 돌아오는 길에 춘당대(春塘臺)에서 문무(文武)를 시험하여 뽑았다.
혜패(彗孛)118) 의 재앙 때문에 직언(直言)을 구하고, 대신(大臣)과 여러 재신(宰臣)들에게 명하여 빈청(賓廳)에 모여 재앙을 그치게 하는 대책을 적어 올리게 하였다. 시절이 오랫동안 가뭄이 든 것을 걱정하여 친히 사직단에 기도하고, 정전(正殿)을 피하고 상선(常膳)을 감하며, 음악을 중지하고 술을 금하였다. 영희전(永禧殿)을 중수(重修)하고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무오년119) 에 왕이 병환을 앓으시다가 한 달이 지나서야 나았다. 예관(禮官)이 태묘(太廟)에 고하고 진하(陳賀)할 것을 청하니, 왕이 말하기를, ‘내 병이 오랫동안 낫지 않아 자성(慈聖)께 근심을 끼쳐 드려 마음이 몹시 황송했는데, 어찌 칭경(稱慶)하는 일에 안심(安心)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대신(大臣)이 극력 청하니 비로소 허락하였으나, 그래도 외방(外方)에서는 단지 하전(賀箋)만 올리고 방물(方物)은 바치지 말도록 하였다.
여름에 가뭄이 들자 왕이 말하기를, ‘내가 왕위를 욕되게 한 후로 한재와 수재가 서로 연속되어 오늘날에 이르러서 극도에 달하였다. 양맥(兩麥)120) 이 타서 말라 죽고 온 들판에 푸른 식물이 없는데, 우박과 천둥, 얼음덩이의 변이 여름철에 계속 발생하니, 조용히 그 허물을 생각해 보건대, 실은 그 책임이 나에게 있다.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먹으나 쉬나 편안하지가 않다. 오늘부터 정전을 피하여 더욱 경외(敬畏)를 더할 것이니, 아! 그대들 대소(大小) 신공(臣工)들은 각각 서로 공경과 화합을 다하여 조금이나마 하늘의 견책에 답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 상선(常膳)을 감하고 음악을 중지하고 술을 금할 것을 명하였다. 또 양국(兩局)과 병조(兵曹)에 명하여 아약(兒弱)을 충정(充定)한 경우 물고자(物故者)에게 군포(軍布)를 징수하는 종류를 분명히 조사하여 변통하도록 하였다. 몸소 종묘(宗廟)에 기도하고 다시 하교(下敎)하여 직언(直言)을 구하기를, ‘오늘의 이 한발(旱魃)은 예전에 없던 것이다. 혹 정령(政令)과 시조(施措)가 천심(天心)에 합하지 않은 것은 아닌가? 전조(銓曹)에서 사람을 쓰는 것이 공도(公道)를 따르지 않은 것은 아닌가? 옥송(獄訟)이 공정하지 않은 것은 아닌가? 궁금(宮禁)이 사치스러운 것은 아닌가? 언로(言路)가 막히고 수령(守令)이 백성을 구휼하지 않은 것은 아닌가? 뇌물이 공공연히 횡행하고 일을 꾸미기 좋아하는 자가 많은 것은 아닌가? 과매(寡昧)한 나의 득실(得失)과 백성들의 곤고(困苦)를 각각 다 진술하여 숨김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기미년121) 에 인조조(仁祖朝) 공신(功臣)의 아내로서 서울에 있는 이를 호조(戶曹)로 하여금 월름(月廩)을 주게 하고, 시골에 있는 이는 본도(本道)로 하여금 주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돈은 한 나라의 통화(通貨)이고 백성들 역시 즐겨 사용하니 계속해서 주전(鑄錢)하여 성과를 구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나 동철(銅鐵)은 국내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므로 작업을 정지하는 날이 많다. 이제 동철 1백 근(斤)을 내리니, 주전에 보태는 자료로 삼으라.’ 하였다.
승도(僧徒)를 조발하여 강도(江都)에 돈대를 쌓았다. 하교하기를, ‘강도는 나라의 보장(保障)이니, 돈대를 설치한 것은 사전에 대비하는 데서 나온 것이다. 다만 바야흐로 봄을 맞이하여 기아(飢餓)에 허덕이는 백성들이 비록 징발되어 부역에 나가는 일이 없다 해도 침범하여 어지럽히고 농사를 방해하는 우환이 없지 않을 것이니, 내가 매우 가엾게 여기는 바이다. 이제 근시(近侍)를 보내어 진휼(軫恤)하는 뜻을 선포하고 금년의 전조(田租)122) 를 하사하도록 하라. 그리고 또 1만 명에 가까운 승도가 멀리서 부역하니, 쌀 1석(石) 3승(升)을 나누어 주도록 하고, 만일 함부로 소란을 떨며 시골 마을에 폐해를 끼치는 자가 있을 경우 군율(軍律)로 다스리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대간(臺諫)은 군주(君主)의 이목(耳目)이므로 하루라도 잠시 비워둘 수가 없는데, 근일 대간(臺諫)이 혹은 추고(推考) 때문에 인피(引避)하기도 하고, 또는 벼슬을 임명한 지 오래 되지 않았는데 곧바로 사직 단자(辭職單子)를 올리기도 하여, 아침에 임명했다가 저녁에 체직(遞職)되니 매우 고례(古例)에 어긋난다. 이제부터는 실지로 병이 있는 자가 아니면 사직 단자를 올리지 못하도록 하고, 또한 조종조(祖宗朝)의 고사(故事)에 따라 양사(兩司)에서 서로 감추(勘推)하도록 하라. 조관(朝官)의 부모가 연로(年老)하면 식물(食物)을 하사(下賜)하는데 유독 종척(宗戚)·의빈(儀賓)에 대해서는 추은(推恩)의 은전이 없으니, 나이 70 이상이 된 사람에게는 의자(衣資)와 식물을 똑같이 넉넉하게 주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근래에 격쟁(擊錚)123) 이 분운(紛紜)한 것은 반드시 방백(方伯)과 수령(守令)이 사정(私情)에 끌리고 형세에 구애되어 잘못된 줄을 알면서 그릇 판결한 소치에 말미암은 것이다. 이와 같다면 백성들이 어찌 원통하지 않겠는가? 추조(秋曹)124) 의 사송(詞訟)이 적체(積滯)된 경우가 오늘날보다 더 심한 적이 없다. 간혹 사사로운 뜻에 견철(牽掣)되어서 세월을 지연시키며 곧바로 회계(回啓)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진실로 한심스러운 일이다. 이제부터는 종전의 버릇을 답습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며, 다시 법령(法令)을 준수하지 않는 자가 있을 경우 중죄(重罪)로 논할 것이다.’ 하였다.
가을에 노량진(露梁津)에 나아가 대열(大閱)125) 하고, 강(江)가에 있는 성삼문(成三問) 등 육신(六臣)의 묘소(墓所)를 수리할 것을 명하였다.
흉인(凶人) 이유정(李有湞)이 이름을 숨기고 돈대를 쌓는 일에 대해 투서(投書)하였는데, 말한 바가 몹시 불측하므로 체포하여 처형하였다. 여기에 연루된 사람은 법을 시행함에 차등이 있었다. 종실(宗室) 이혼(李焜)·이엽(李熀) 형제가 이름이 흉서(凶書)에 들어가 있었으므로, 마지못해 여러 사람의 의논에 따라 제주(濟州)에 안치(安置)하였는데, 늠료(廩料)와 의자(衣資)를 후하게 주고 부리는 사람을 정해 주었다. 그 어린 나이에 형제가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을 가엾게 여겨 같은 곳에 송치(送置)하였고, 어머니와 아내로 하여금 따라가는 것을 허락하였으며, 의원(醫員)을 보내 구호(救護)하고, 현관(縣官)은 차례로 말을 주고 먹을 것을 주도록 하였다. 뒤에 양이(量移)126) 를 명하였고, 갑자년127) 에 자의 왕대비(慈懿王大妃)의 주갑(周甲) 때 있었던 반사(頒赦)로 인해 특별히 방유(放宥)를 명하였다.
왕은 유교(儒敎)가 폐이(廢弛)되었다며 경상(慶尙)·전라(全羅) 양도(兩道)에 4명의 계수관(界首官)과 제독관(提督官)을 다시 설치했고, 친히 춘당대(春塘臺)에 나가서 관무재(觀武材)를 하고 겸하여 문신(文臣)의 정시(庭試)를 행하였다.
하교하기를, ‘백관(百官)의 녹봉(祿俸)은 마땅히 구례(舊例)에 따라 돈을 더 지급해야 하지만, 돈이 지금 부족하여 형세가 장차 계속하기 어려우니, 6품 이상의 감(減)한 녹봉에 대하여 먼저 채워 주도록 하라.’ 하였다.
10월에 천둥과 번개가 치니 하교하기를, ‘천둥과 번개가 치는 재변이 순음(純陰)의 달에 나타났으니, 조용히 나의 허물을 생각하건대, 차라리 죽고 싶은 심정이다. 내가 마땅히 더욱 경척(警惕)을 더할 것이나, 대소(大小) 신공(臣工)들은 당동 벌이(黨同伐異)하는 습관을 말끔히 없애고 서로 공경하여 화합하는 도리에 힘써 조금이나마 하늘의 견책에 답하도록 하라.’ 하였다.
어사(御史)를 제주(濟州)에 보내어 약간인(若干人)을 시험하여 뽑았다.
왕이 말하기를, ‘내가 이제 홍범(洪範)의 글을 강(講)하는데, 기자(箕子)는 무왕(武王)에게 도(道)를 전하여 이륜(彛倫)을 펴게 했고, 동방(東方)에 봉해지자 크게 교화(敎化)를 밝혀 예악(禮樂)과 문물(文物)이 찬연하여 기술할 만하게 하였으니, 우리 동국으로 하여금 지금까지 관대(冠帶)를 하고 능히 오상(五常)을 밝혀 소중화(小中華)의 칭호를 얻도록 한 것은 기자의 힘이다. 문장을 주관하는 신하에게 각별히 제문(祭文)을 짓도록 하고 도승지(都承旨)를 보내 기자묘(箕子廟)에 치제(致祭)하게 하라.’ 하였다. 이윽고 승지에게 명하기를, ‘특별히 승지를 보내는 것은 그 일을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이니, 경(卿)은 부디 공경을 다하여 제사를 거행하고, 묘우(廟宇)나 무덤에 만일 무너진 곳이 있으면 낱낱이 서계(書啓)하여 수즙(修葺)하는 바탕으로 삼게 할 것이며, 자손(子孫) 가운데 녹용(錄用)에 적합한 자 또한 방문(訪問)토록 하라.’ 하였다. 승지가 아뢰기를, ‘단군(檀君)·동명왕(東明王)의 사당도 또한 그곳에 있어 세종조(世宗朝) 때부터 봄·가을로 향(香)과 축문(祝文)을 내렸으니, 마땅히 똑같이 제사를 거행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먼저 기자(箕子)의 사당에 제사지낸 뒤 또한 택일(擇日)하여 치제(致祭)하도록 하라.’ 하였다.
경신년128) 에 하교하기를, ‘조종조(祖宗朝)의 묘정(廟庭)에 대신(大臣)을 배향(配享)하는 일이 없었던 세대가 없었다. 그런데 선왕(先王)의 묘정에만 유독 대신이 없으니, 선왕의 하늘에 계신 혼령이 생각건대 반드시 불만족하게 여기실 것이다. 내가 어찌 감히 하루인들 마음에 편안할 수 있겠는가? 세종조에 태종(太宗)께서 태상왕(太上王)이 되셨는데, 남은(南誾)·조준(趙浚)·조인옥(趙仁沃)을 태조(太祖)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하려고 하니, 여러 사람의 의논이, 「남은은 국가 자손 만세(萬世)의 원수」라고 하였으므로, 마침내 그를 빼버렸다가 뒤에 태종의 하교(下敎)로 인해 결국 추배(追配)하였다. 고려(高麗) 시조묘(始祖廟)의 네 신하129) 도 또한 추배하였는데, 그때 당 태종(唐太宗)의 고사(古事)를 인용하여 언급하였다. 이 일은 비록 고례(古例)가 없다 하더라도 의리로 할 수가 있는 것인데, 이미 선조(先朝) 때 시행한 성전(成典)이 있고, 또 당조(唐朝) 고사(古事)의 분명한 증거가 있으니, 빈청(賓廳)으로 하여금 권점(圈點)하여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빈청에서 영의정(領議政) 정태화(鄭太和)로 권점하였다. 처음에는 여러 신하들이 정태화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조경(趙絅)·병조 판서(兵曹判書) 김좌명(金佐明)으로 배향(配享)을 의정(議政)하였는데, 뒤에 대계(臺啓)로 인해 정태화를 빼버렸다가 이때에 와서 추배하였다. 뒤에 또 대계로 인해 조경을 빼버렸다.
하교하기를, ‘재이(災異)가 연달아 닥쳐 어려움과 근심이 눈에 가득하고, 와언(訛言)이 물끓듯 하여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단서가 많으니, 연곡(輦轂)130) 의 친병(親兵)131) 의 장수는 나라의 지친(至親) 중에서 지위가 높은 자에게 맡기지 않을 수 없다. 광성 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를 즉시 훈련 대장(訓鍊大將)에 제수하여 곧 그날로 병부(兵符)를 받아 임무를 살피도록 하고, 또 신여철(申汝哲)을 총융사(摠戎使)에 제수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염파(廉頗)와 인상여(藺相如)132) 는 전국(戰國)의 선비였으나, 오히려 국가의 위급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사적인 원수를 뒤로 미루었다. 과인(寡人)의 여러 신하들은 사당(私黨)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국가는 뒤로 미루어 공도(公道)는 상실되고 사의(私意)가 크게 유행한다. 주의(注擬)하는 즈음에 오로지 한쪽편의 사람들만을 등용하여 권세(權勢)가 편중되고 교만하고 방자함이 날로 심해지니, 결코 태아(太阿)133) 의 자루를 거꾸로 쥐어주어 임금의 형세는 위에서 고립되고 당여(黨與)는 아래에서 더욱 치열하게 만들 수 없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원정(李元禎)을 우선 먼저 삭탈 관작하고 문외(門外)로 출송(黜送)하라.’ 하였다.
여러 역적들을 토벌하고 보사공(保社功)을 녹훈(錄勳)하였다. 왕이 사복(嗣服)한 초기에 여러 소인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왕실(王室)을 위태롭게 하려고 꾀하여 친경(親耕)과 친잠(親蠶)을 건청(建請)하였다. 대개 친잠을 하면 마땅히 빈어(嬪御)를 갖추어야 하기 때문에 오정창(吳挺昌)의 딸을 들여보내 중궁을 동요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이미 길일(吉日)을 가려 장차 거행하려 하였는데, 하늘에서 크게 천둥이 치고 비가 내렸으니, 바람에 단선(壇墠)134) 과 장막이 마구 흔들려 부수어지고 찢어지니, 왕이 두려워하여 그 일이 드디어 중지되었다. 역종(逆宗) 이정(李楨)·이남(李柟)·이연(李㮒) 형제는 모두 효묘와 현묘 양조(兩朝)의 권애(眷愛)를 받아 궁중에 출입하며 한도가 없었는데, 점차 더욱 교만하고 음란해졌다. 현묘의 대상(大喪)이 처음 났을 때 남(柟)이 또 대전관(代奠官)으로서 빈전(殯殿)에 기거하면서 양궁(兩宮) 사이를 엿보며 바라서는 안 될 것을 넘겨다보았는데, 제구(諸舅)135) ·형제·빈객(賓客)들이 조정에 포열(布列)하여 우익(羽翼)이 되었다.
허적(許積)의 얼자(孼子) 허견(許堅)은 교만하고 방자하여 오랫동안 딴 뜻을 품어왔는데, 그 간교하고 기만적인 일이 드러나자 크게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부자가 더욱 급하게 계책을 꾸며서 체찰사(體察使)에 제수되어 군무(軍務)를 통괄할 것을 도모하고, 유혁연(柳赫然)과 서로 교분을 맺어 멋대로 사병(私兵)을 만들려고 했다. 드디어 여러 불령(不逞)한 무리들과 함께 밤낮으로 모의하여 화(禍)가 조석(朝夕)에 닥쳤다. 왕이 깊이 생각하고 조용히 처리하여 먼저 병권(兵權)을 빼앗는데, 한 두 폐부(肺腑)의 신하가 그 얼굴을 찡그리며 신음하는 것을 살폈으므로 적(賊)이 감히 발동하지 못하였다. 이에 정원로(鄭元老)가 상변(上變)하여 남(柟)과 허견(許堅)을 고발(告發)하니, 자백을 받아 허견이 처형되었다. 왕이 특별히 종친(宗親)를 후대(厚待)하는 의리를 미루어 남(柟)은 경전(磬甸)되었다. 즉각 시신을 거두어 장사지내 줄 것을 명하였다. 허적과 유혁연이 차례대로 처형되었다. 또 이원성(李元成)이 추가로 고발한 것으로 인해 흉얼(凶孼) 중에서 법망(法網)을 빠져 나갔던 오정창·최만열(崔晩悅)·정원로 등이 복법(伏法)되었다. 책훈(策勳)하여 김석주(金錫胄)·김만기(金萬基) 등에게 보사 공신(保社功臣)의 칭호(稱號)를 하사하였다.
김수항(金壽恒)이 왕에게 아뢰기를, ‘송준길(宋浚吉)은 오랫동안 서연(書筵)의 반열에 있으면서 지성으로 보도(輔導)하였고, 허적(許積)의 사람됨을 소론(疏論)하며, 「이필(李泌)이 노기(盧杞)를 논한 일」136) 을 인용해 비유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지금 허적의 죄악이 밝게 드러났으니, 그의 말이 과연 증명이 된 것입니다. 송준길이 비록 매얼(媒孼)137) 하는 자가 죄를 얽어 물리친 것 때문에 끝내 〈벼슬을〉 추삭(追削)당하기는 했지만, 성심(聖心)이 이제 이미 개오(開悟)하셨으니, 마땅히 그 작의를 추복(追復)하고 사제(賜祭)하여 위로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처음에 빈신(儐臣) 오시수(吳始壽)가 통관(通官)의 거짓 공갈로 인해 거기에 구어(口語)를 더 보탰는데, 말이 선조(先朝)를 침범했다. 명성 왕후(明聖王后)께서 이 말을 듣고 몹시 마음 아프게 생각하여 수상(首相)에게 명해 통관(通官)의 말이 나온 곳을 가서 힐문하도록 하자, 빈신이 빙자해 환혹(幻惑)시킨 단서가 모두 폭로되었다. 또 국구(國舅) 김우명(金佑明)이 이정(李楨)·이연(李㮒)이 궁인(宮人)과 교란(交亂)한 정상을 소론(疏論)하니, 흉당(凶黨)이 급히 구대(求對)하여 캐물으며 반좌(反坐)138) 하려고까지 하였다. 명성 왕후께서 대신(大臣)을 발[簾] 앞으로 불러서 격절(激切)하게 교유(敎諭)하니, 유사(有司)가 비로소 정·연의 죄상을 신문하였으나, 반드시 동조(東朝)를 동요시켜 간계(奸計)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윤휴(尹鑴)가 이에, ‘자성(慈聖)의 동정(動靜)을 조관(照管)한다.’는 말을 연중(筵中)에서 공공연히 말하니, 나라 사람들이 가슴 아프게 여기지 않음이 없었다. 이에 이르러 왕이 오시수와 윤휴를 죄주고 모두 사사(賜死)하였다.
강도(江都)·남한(南漢)의 신해년139) 이전의 환상(還上)으로 봉납(捧納)하지 못할 것을 탕척(蕩滌)하였다.
연신(筵臣)이 아뢰기를, ‘선조조(宣祖朝)의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찬(撰)해 올린 《성학집요(聖學輯要)》는 《대학(大學)》에 근본하고, 《연의(衍義)》에서 요약하여 거세(巨細)와 정조(精粗)가 모두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선조(宣祖)께서 크게 칭상(稱賞)하셨습니다. 만일 소대(召對)할 즈음에 수시로 강론(講論)하고 또 한가하신 가운데 예사로 즐겨 찾아보신다면 그 공효가 어찌 적겠습니까?’ 하니, 왕이 말하기를, ‘선조(先朝) 때 본관(本館)에서 올린 《대학연의(大學衍義)》는 내가 일찍이 그 권질(卷帙)이 방대하여 펼쳐 보기 어려운 점을 병통으로 여겼는데, 이제 들건대, 《성학집요》가 진실로 절실하다고 하니, 즉시 써서 올리라.’ 하였다.
대신(大臣)과 원임(原任) 2품 이상, 삼사(三司)의 장관(長官)을 인견(引見)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밤에 서운관(書雲觀)의 초기(草記)를 보았더니, 「어떤 별이 태미 서원(太微西坦) 밖으로 들어갔는데, 꼬리 부분의 자취가 있는 듯하다.」고 하였다. 이는 매우 두려운 일이므로 경(卿) 등을 불러서 재앙을 방지할 방도를 듣고자 하는 것이다.’ 하고 밤이 깊어서야 자리를 파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내가 덕이 부족한 몸으로 외람되게 큰 기업을 계승하여 정령(政令)과 시조(施措)가 천심(天心)에 부합되지 못하니, 인애(仁愛)스러운 하늘이 이런 재앙을 내렸다.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아픔이 몸에 있는 듯하니, 승지(承旨)는 나를 대신해 교서(敎書)를 초(草)하여 널리 직언(直言)을 구하고, 대소(大小)의 여러 신하들은 능히 자신의 직무를 다하여 조금이나마 하늘의 견책(譴責)에 답하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26일 신해(辛亥)에 중궁(中宮)이 승하(昇遐)하니, 시호(諡號)를 ‘인경(仁敬)’이라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흉역(凶逆)이 갑자기 생겨났다. 그 기염(氣焰)이 하늘을 뒤덮던 시기를 당하여 혹은 형세를 조성(助成)한 자도 있었고 또한 사론(邪論)에 붙었던 자들도 있었으니, 이런 무리들은 이미 사방의 변방으로 추방하여 악(惡)을 징계하는 형벌을 분명하게 보였다. 이 밖의 나머지 사람들로 능히 스스로 퇴파(頹波)140) 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들을 또한 어찌 족히 무겁게 처벌할 수 있겠는가? 이제 경중의 구별이 있으니, 처분(處分)이 이미 결정 되었다. 양(陽)에는 펼치고 음(陰)에는 참담하며 봄에는 살리고 가을에는 죽이나니, 인주(人主)는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큰 권한을 가졌다. 이처럼 재이(災異)가 빈번히 발생하고 인재(人才)가 아주 적은 시기를 당하였으니, 즉시 경중에 따라 거두어 서용(敍用)하도록 하라.’ 하였다.
신유년141) 에 하교하기를, ‘방백(方伯)은 명령을 받들어 교화를 베푸는 자이다. 한 도(道)에 강기(綱紀)를 세워서 다스리고 군(郡)·읍(邑)을 총괄하여 살피니, 그 책임이 생각하건대 중대하지 않겠는가? 비록 좋은 법과 아름다운 정사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받들어 시행할 줄 알지 못한다면 조정[朝家]의 은택이 시행되지 않을 것이고, 비록 순리(循吏)나 오관(汚官)이 있다 하더라도 등용과 축출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고적(考績)142) 의 정사는 무너지게 될 것이다. 현재 여러 도(道)의 방백을 신중히 가리지 않는 것은 아니나, 재망(才望)과 위중(威重)을 가지고 그 직책을 다한 자가 드물어서 내가 매우 개탄(慨歎)스럽게 여기고 있다.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자급(資級)과 이력(履曆), 그리고 일찍이 있었던 죄루(罪累)를 물론하고 별도로 초천(抄薦)·저양(儲養)하여 악목(岳牧)을 위임하는 뜻을 다하도록 하라.’ 하였다.
고려(高麗)의 충신(忠臣) 정몽주(鄭夢周)와 척화(斥和)한 세 신하 오달제(吳達濟)·윤집(尹集)·홍익한(洪翼漢)의 사당을 세우고, 그 자손(子孫)을 녹용(錄用)할 것을 명하였다.
환(鰥)·과(寡)·고(孤)·독(獨)으로 의지할 곳이 없는 부류에게 연역(煙役)143) 을 감해 주고 나이 80세가 된 자들에게는 식물(食物)을 하사하였으며, 각양(各樣)의 신포(身布)는 구제(舊制)를 따라 5승(升) 35척(尺)으로 법식을 정하였다.
영부사(領府事) 송시열(宋時烈)이 차자(箚子)를 올리고 물러나 귀향(歸鄕)하니, 중신(重臣)을 보내어 머무르는 곳에 전유(傳諭)하게 하였다.
2월 병오(丙午)에 인경 왕후(仁敬王后)를 익릉(翼陵)에 장사하고, 고양군(高陽郡)의 춘수미(春收米)를 특별히 감해서 면제해 주라고 명하였다.
여름에 가뭄이 드니 소결(疏決)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정상과 죄질이 모두 무거운 자는 경솔히 의논할 수 없겠지만, 죄상은 무겁고 정상은 가벼운 자는 반드시 광탕(曠蕩)의 은전을 베푼 뒤에라야 깊을 원한을 풀어주고 하늘의 노여움을 돌이킬 수 있다. 비록 그렇지만 경중을 따지지 않고 혼동하여 석방한다면 요행을 바라는 무리들이 희망하는 마음이 없지 않을 것이니, 모름지기 정상과 죄범(罪犯)을 참작하고 적당히 헤아려 잘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영소전(永昭殿)에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였다.
5월 2일에 민씨(閔氏)를 책봉하여 왕비(王妃)로 삼았으니, 여양 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의 따님이다. 이때 오랫동안 가뭄이 드니 왕이 사직단(社稷壇)에 비가 내리기를 기도한 뒤 대신(大臣)·경재(卿宰)·삼사(三司)를 명소(命召)하여 재앙을 그치게 할 대책을 물었고, 하교(下敎)하여 자신을 책망하고 널리 직언(直言)을 구하였으며, 여러 신하들을 칙려(勅勵)하였다.
홍문관(弘文館)에서 논하기를, ‘중궁(中宮)의 상(喪)에 연제(練祭)가 없을 수 없습니다.’ 하니, 대신(大臣)과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널리 의논하게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영부사(領府事) 송시열(宋時烈)의 의논 가운데 「폐각(廢却)하고 거행하지 않는 것은 자못 예(禮)를 사랑하여 양(羊)을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144) 는 설이 옳다. 대저 11개월 만에 연제(練祭)를 지내고 13개월 만에 대상(大祥)을 지내며 15개월 만에 담제(禫祭)를 지내는 것은 고금(古今)에 바꿀 수 없는 제도이다. 지금 만일 변제(變除)하는 절목이 없다는 핑계로 연제를 거행하지 않는다면 정리상 그리고 예의상 부족함이 있다. 비록 이미 상복을 벗었으니 3년의 의리를 완전히 폐(廢)할 수는 없으니, 연제와 담제의 절목을 즉시 마련하여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연제를 지내는 날 드디어 혼전(魂殿)에 친림(親臨)하여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근래에 국가에 일이 많고 또 흉년(凶年)을 만났기 때문에 원릉(園陵)을 전알(展謁)하지 못한 지 이제 이미 5년이나 되었으니, 내 마음에 부족함이 있다. 이제 경릉(敬陵)을 전알하고 이어서 새 능을 참배하여 슬픈 심회를 풀고자 하니, 도로나 교량(橋梁)을 절대로 대단하게 수리(修理)하지 말라. 또한 식거(植炬)145) 도 하지 말고, 도성(都城)에 머무는 군병(軍兵)을 징발(徵發)하지 말도록 할 것이며, 기보(圻輔)는 상번(上番) 어영군(御營軍)으로 숙위(宿衞)하게 하라.’ 하였다.
야대(夜對) 때 강(講)을 마치자 왕이 강관(講官)에게 말하기를, ‘야대는 비단 밤의 기운이 고요할 뿐만 아니라 강론(講論)이 재미가 있다. 한 당(堂)에서 술잔을 나누는 사이에 애연(藹然)히 가족과 부자(父子)의 의리가 있기 때문에 일찍이 효묘조(孝廟朝) 때는 자주 야대하시고 술을 권하며 즐거워하셨다. 그대들은 지금 각각 안심하고 주량(酒量)대로 술을 마시라.’ 하였다.
태학(太學)에 거둥하여 선성(先聖)을 배알(拜謁)하고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춘당대(春塘臺)에 들러 문과(文科)와 무과(武科)를 시험하여 뽑았다. 왕이 말하기를, ‘근래에 학교의 행정이 폐이(廢弛)해졌으니, 모름지기 닦아 밝힌 뒤에야 사습(士習)을 바로잡고 인심(人心)을 착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사성(大司成)으로 하여금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지은 《학교모범(學校模範)》을 가져다가 오늘날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을 참작해 강정(講定)하고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 궁중에 불경(佛經)을 유치(留置)한 일이 있었다. 우의정(右議政) 민정중(閔鼎重)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성상께서는 분명 이교(異敎)에 유의(留意)하시지 않겠지만 외부 사람들은 생각건대 혹시 의심을 두기도 할 것이니, 마땅히 내어주셔야 합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그렇다. 내가 경(卿)에게 내어주고자 한다.’ 하였다.
연신(筵臣)이 아뢰기를, ‘군상(君上)은 높은 자리에 계시니, 어찌 능히 민간 일의 고생과 어려움을 다 알 수 있겠습니까?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숙(李䎘)의 집에 옛 화병(畫屛)이 하나 있는데, 우리 나라 민간(民間)의 사시(四時) 농공(農功)을 자못 상세히 그렸습니다. 마땅히 홍문관(弘文館)으로 하여금 모화(摹畫)해 들여오도록 하여 예람(睿覽)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빈풍(豳風)146) 의 화병을 만들어서 보았는데, 이제 듣건대, 이 병풍은 우리 나라의 농공을 그렸다고 하니 더욱 보고 살필 만한 것이다. 대내(大內)로 들이도록 하여 본 뒤에 이모(移摹)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임술년147) 에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으니 왕이 보신(輔臣)에게 말하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하늘의 재앙이 거듭되는데, 이제 무지개의 재변이 또 이와 같으니 먹으나 쉬나 편안하지가 못하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지 못하겠다.’ 하고, 이어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각각 재앙을 그치게 할 대책을 진달하도록 하였다. 이때 여러 신하들이 백골(白骨)·인족(隣族)·아약(兒弱)에게 군포(軍布)를 징수하는 폐단을 많이 말하여 호포(戶布)를 시행하기를 청하였는데, 의논이 오랫동안 결정되지 않으니, 대신(大臣)·비당(備堂)·삼사(三司)로 하여금 회의(會議)하게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지금 신역(身役)의 편중(偏重)이 가장 고질적인 폐단이 되어 있으니, 균역(均役)으로 폐단을 구제하는 것으로 진실로 호포법(戶布法)만한 것이 없다. 그런데 절목(節目)이 결정되기도 전에 듣는 사람들이 먼저 놀라고, 민정(民情)이 소란스러우며 조의(朝議)가 떠들썩하니, 아무리 양법(良法)·미정(美政)이 있더라도 형세상 과단성 있게 시행할 수가 없다. 지금 우선 정지하여 부의(浮議)를 눌러 민심(民心)을 안정시키는 바탕으로 삼고, 연사(年事)를 천천히 보아서 조용히 다시 의논하도록 하라.’ 하였다.
대신(大臣)이 진백(陳白)하기를, ‘올해의 흉황(凶荒)은 기호(圻湖)가 더욱 극심합니다. 기전(圻甸)은 이미 대동(大同)을 감(減)해 주었는데, 이제 만일 호서(湖西)까지 감해 주는 것을 허락한다면, 해청(該廳)의 수용(需用)이 바닥이 날 것이니, 이 점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만일 경비(經費)를 염려하여 전혀 견감해 주지 않는다면, 이는 자못 백성을 구휼하는 뜻이 아니니, 더욱 극심한 고을 다음가는 고을에 대해서 똑같이 1두(斗)씩 감해 주라.’ 하였다.
평양(平壤) 민가(民家)에 화재(火災)가 발생하여 3백 40여 가호(家戶)가 불에 타자, 특별히 쌀 5백여 석(石)을 하사하여 나누어 진휼(賑恤)하게 하고, 그 신역(身役)을 감해 주게 하였다.
오랫동안 가뭄이 들다가 비가 내리자 ‘희우시(喜雨詩)’란 시제(詩題)를 내어 승지(承旨)·옥당(玉堂)에 명하여 지어 올리도록 하였다. 춘당대(春塘臺)에 친림(親臨)하여 관무재(觀武才)하고, 어사(御史)를 남한(南漢)에 보내어 시재(試才)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군제(軍制)를 변통해야 함을 전후로 진달(陳達)하니, 왕이 말하기를, ‘지금은 형세상 갑자기 크게 변경하기 어렵다.’ 하고, 이에 별대(別隊)와 정초(精抄)를 합설(合設)하여 금위영(禁衞營)을 만들었다. 이는 대개 병조 판서(兵曹判書) 김석주(金錫胄)의 의논을 채용한 것이다.
문묘(文廟)의 사전(祀典)을 수정(修正)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종향(從享)된 분 가운데 수장후(壽長侯) 공백요(公伯寮)·난릉백(蘭陵伯) 순황(荀況)·기양백(歧陽伯) 가규(賈逵)·부풍백(扶風伯) 마융(馬融)·사공(司空) 왕숙(王肅)·사도(司徒) 두예(杜預)·임성백(任城伯) 하휴(何休)·언사백(偃師伯) 왕필(王弼)·임천백(臨川伯) 오증(吳澄)을 출향(黜享)하고, 문등후(文登侯) 신장(申棖)·치천후(淄川侯) 신당(申黨) 중에서 첩향(疊享)으로 인해서 신당을 빼버렸으며, 건령백(建寧伯) 호안국(胡安國)·화양백(華陽伯) 장식(張栻)·포성백(蒲城伯) 진덕수(眞德秀)·숭안백(崇委伯) 채침(蔡沈)은 서열(序列)이 잘못되었다 하여 위치(位置)를 개정하였고, 송조(宋朝)의 장락백(將樂伯) 양시(楊時)·문질공(文質公) 나종언(羅從彦)·문정공(文靖公) 이동(李侗)·문숙공(文肅公) 황간(黃幹)과 본조(本朝)의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을 새로 성무(聖廡)에 배향하였다. 이이와 성혼을 종사(從祀)해야 된다는 주청(奏請)은 인조조(仁祖朝) 을해년148) 부터 시작되었는데, 선조(先朝) 무신년149) 무렵에는 성균관(成均館)과 사학(四學) 유생들이 다시, ‘송조(宋朝)의 3현(三賢)을 함께 배향해야 된다.’는 의논을 냈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장보(章甫)150) 가 누차 호소하니, 왕이 예관(禮官)에게 명을 내려 다 함께 승배(陞配)하게 하였다. 또 김석주(金錫胄)의 의논으로 인해 대신과 유신(儒臣)에게 의논하게 하여 한결같이 명(明)나라 제도에 의해 산출(刪黜)하고 개정하도록 했다.
비국(備局)을 인견(引見)할 때 우의정 김석주가 말하기를, ‘지난 경인년151) 무렵에 조정에서 사람을 뽑아 등주(登州)의 군문(軍門)에 자문(咨文)을 보냈는데, 그뒤 명나라 조정에서도 또한 사람을 보내와서 선천(宣川)에 머물며, 이어 더불어 교역(交易)하였습니다. 뱃사람 중에 서(徐)씨 성을 가진 자가 시종 왕래하면서 통신(通信)하였는데, 청(淸)나라 사람이 사문(査問)할 때 그 사람이 혹독한 형벌을 받으면서도 끝내 단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죽었기 때문에 우리 나라가 다행히 무사하게 되었으니 포상(褒賞)의 은전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천한 사람으로 무식하지만 능히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으니, 그 충성이 칭찬할 만하다. 그의 자손 중에 등용할 만한 자는 녹용(錄用)하고, 역(役)이 있는 자는 그 역을 면제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인조조(仁祖朝) 때 남한 산성(南漢山城)에 호종(扈從)152) 한 군병으로 나이 70 이상 되어 가자(加資)한 자에게 요미(料米)를 주었다.
혜성(彗星)이 견기(見幾)153) 하였다가 두 달 만에야 사라졌다. 이보다 앞서 왕이 말하기를, ‘옛 사람 말에 「천하(天下)를 가지고 그 어버이에게 아끼지 않는다.」고 하였다. 근래에 해마다 연이어 흉년(凶年)이 들었으므로 풍정(豊呈)의 성대한 예식을 아직까지 거행하지 못하였기에 내 마음에 부족함이 있다. 마땅히 다시 어떻게 하여야 하겠는가? 금년 농사 또한 풍년이 들지 못한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처럼 나라가 조금이나마 평안한 때에 위로 두 분 자전(慈殿)을 받들고 새해에 장수(長壽)를 비는 축원을 올린다면, 이것이 어찌 풍형 예대(豊亨豫大)하여 그런 것이겠는가? 이는 전적으로 자식으로서 애일(愛日)154) 하는 지극한 정에 말미암은 것이다. 풍정에 대한 절목(節目)을 조속히 마련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하교하기를, ‘진연(進宴)의 절목은 자전(慈殿)의 하교에 따라 간략하게 하려고 노력하였는데, 지금 하늘이 경계를 보여 재이(災異)가 이와 같으니, 정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경연(經筵)에 나아가 하교하기를, ‘금년의 풍재(風災)는 태고적부터 없던 것이다. 일기(日記)155) 를 살펴보면 을해년156) 과 신묘년157) 의 풍재(風災)가 실로 기왕의 분명한 증험이다. 그 응험이 반드시 그때와 같을는지 비록 알 수 없으나, 지금의 근심스러운 단서(端緖)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만일 위급한 사태가 발생할 경우 양향(糧餉)이 가장 시급한데, 강도(江都)와 남한(南漢)의 저축이 텅 비어 있으니 매우 염려스럽다. 듣건대, 호조(戶曹)에서 저축해 놓은 포목(布木)이 있어 그 수량이 꽤 넉넉하다고 하니, 이것을 돌려 쌀로 사들이든가 혹은 다른 방법으로 조치하라는 뜻을 대신에게 이르도록 하라.’ 하였다. 또 경기(京畿)의 대동미(大同米)와 삼남(三南)의 월과미(月課米)를 합한 1만 석을 강도(江都)에 수송할 것을 명하였다. 훈국(訓局)의 포보(砲保)158) 와 공조(工曹)의 장포(匠布) 역시 쌀로 바꾸어 수송하도록 하였다. 강원도(江原道)의 진상품인 인삼(人蔘)은 특별히 절반을 감해 주도록 하였다.
김환(金煥)이 상변(上變)하여 허새(許璽)·허영(許瑛) 등이 처형되었다. 바야흐로 설국(設鞫)하는 날 김중하(金重夏)와 전익대(全翊戴)가 유명견(柳命堅)·수윤(秀胤) 등의 일을 은밀하게 어영 대장(御營大將) 김익훈(金益勳)에게 말하니, 김익훈이 계달(啓達)하였다. 국문해 보니, 일이 허황하고 거짓된 것이 많았으므로, 김중하와 전익대는 사형(死刑)을 감하여 유(流) 3천 리에 처하였다.
지사(知事) 이단하(李端夏)의 진백(陳白)에 의해 각릉(各陵)의 기제(忌祭)에 쓰이는 채화(綵花)159) 를 줄였다. 어사(御史)를 삼남(三南)과 북도(北道)에 나누어 보내어 진정(賑政)을 겸하여 살펴보게 하였다.
겨울에 천둥이 쳤다 하여 하교하여 자신을 책망하기를, ‘정령(政令)의 시조(施措)가 점차 끝까지 잘된 결과를 거두지 못하는 것인가? 언로(言路)가 열리지 아니하여 곧은 말이 들리지 않는 것인가? 실질적인 혜택이 아래까지 미치지 아니하여 백성들이 곤궁한 것인가? 사치가 풍속을 이루어 쓸데없이 허비함이 너무 많은 것인가? 등용하고 버림이 공정하지 못하여 사의(私意)가 제멋대로 전파되는 것인가? 기강(紀綱)이 무너지고 해이해져 백관들이 직무에 태만한 것인가? 옥송(獄訟)이 정체됨이 많아서 원망과 억울함이 풀리지 않는 것인가? 바른 말을 널리 구하여 혹시라도 숨김이 없도록 하라. 대소(大小) 신료(臣僚)들은 맑고 깨끗한 한 마음으로 자기의 직무에 부지런하고, 자기 한 사람의 사심(私心)을 끊어 조금이나마 하늘의 견책에 답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대신(大臣)과 육경(六卿)·삼사(三司)의 장관들에게 인재(人才)를 천거하도록 하고, 내수사(內需司)의 호초(胡椒)·단목(丹木)·백반(白礬)·호피(虎皮) 등의 물품을 특별히 내려주어 진휼 자금에 보태 쓰도록 하였다. 내국(內局)160) 에는 청대죽(靑大竹)을, 내농포(內農圃)에는 가출마(加出馬)를 감하여 주었고, 훈국(訓局)·군기시(軍器寺)의 월과(月課)와 내궁방(內弓房)의 활 만드는 일을 정지하게 하였다. 주방(酒房)의 주미(酒米)를 경감하고, 반사(頒賜)하는 이엄(耳掩)과 초피(貂皮) 또한 절반으로 감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내가 일찍이 한유(韓愈)의 글 가운데 하번(何蕃)의 전기(傳記)를 읽어보고, 또 송(宋)나라의 진동(陳東)·구양철(歐陽澈)의 사적(事蹟)을 보았는데, 천 년이 지난 뒤에도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존경심을 자아내게 한다. 무릇 국가에서 선비를 양성하는 것이 어찌 다만 그들로 하여금 글이나 짓고 녹(祿)이나 구하게 하려고 하는 것일 뿐이겠는가? 내 생각에는 이들 세 사람을 성균관(成均館) 곁에 작은 사당을 따로 세워 제사지내고 여러 유생들로 하여금 보고 느끼는 바가 있게 만들었으면 하니, 예관(禮官)을 시켜 대신(大臣)과 유신(儒臣)에게 물어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계해년161) 에 태묘(太廟)에 참배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그전부터 종묘(宗廟)의 영녕전(永寧殿)을 참배할 때 계단 아래서 배례(拜禮)를 행하고 물러나왔는데, 정리상 몹시 부족함을 느꼈다.’ 하고, 이에 배례를 마치자 그대로 영녕전 안으로 나아가 봉심(奉審)하였다.
비국(備局)을 인견(引見)할 때에 대신(大臣)이 새해들어 면계(勉戒)한다는 뜻으로 진달(陳達)하니, 왕이 말하기를, ‘경계하여 가르침이 간절하고 지극하니 체념(體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만 임금과 신하의 사이에는 정과 뜻이 서로 진실한 것이 중요한데, 근래에 밖으로는 옥송(獄訟)이 공평하지 못하고 안으로는 논의가 서로 부딪치게 되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서로 공경하여 화합하고 착하게 되게 하십시요.」라고 하였으니, 오늘 입시(入侍)한 여러 신하들이 사의(私意)를 버리고 다함께 서로 공경하여 화합하는 도리를 생각한다면, 나도 또한 희망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여름에 오랫동안 가뭄이 드니, 하교하기를, ‘한발(旱魃)의 참상이 갈수록 더욱 혹독해지니, 며칠 안으로 만약 비가 흠뻑 적시는 은택을 얻지 못한다면 장차 천리(千里)가 적지(赤地)162) 가 됨을 면치 못하여, 한 사람도 살아남는 백성이 없을 것이다. 말을 하다 이에 미치니, 차라리 스스로 몸을 불살라 하늘의 견책에 답하고 싶다. 내가 마땅히 나의 몸으로 희생(犧牲)을 대신하여 친히 태묘(太廟)에 기도드릴 것이니, 인구(引咎)·자책(自責)하는 뜻으로 각별히 말을 만들어 제문(祭文) 가운데에 첨가해 넣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나를 수행하여 제사에 참여하는 집사관(執事官) 이하는 부디 나의 뜻을 체념(體念)하여 그 몸을 목욕하고, 그 의복을 깨끗이 씻은 뒤 경건하게 재숙(齋宿)163) 할 것이며, 혹시라도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또 말하기를, ‘궁궐 안팎 각처의 더럽고 지저분한 물건들을 각별히 깨끗이 청소하라.’ 하고, 드디어 태묘에 비를 내려 주기를 기도하였다. 또 백성들에게 효유(曉諭)하기를, ‘내가 덕이 없어서 하는 일이 착하지 못한 것이 많았기에 하늘이 재앙을 내리게 만들었다. 수재(水災)·한재(旱災)·풍재(風災)·상재(霜災)가 너희들의 화곡(禾穀)을 해쳐 나의 아무런 죄도 없는 백성들로 하여금 구렁에 떨어지게 만들었다. 생각이 이에 미치니 나의 심장이 칼로 베는 듯하고 너희들의 위에 임할 면목이 없다. 다만 바라노니, 너희들은 배고픔과 추위를 참고 아내와 자식들을 보전하여 혹시라도 유랑(流浪)하거나 이산(離散)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내가 바야흐로 입고 먹는 것을 깎고 줄여 너희들을 구해 살릴 계책을 마련하고 있으니,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고 여기지 말라. 아! 너희들은 나의 적자(赤子)가 아니냐? 부모가 비록 혹 가난하여 제 자식을 양육하지 못할지라도 어찌 그 자식으로서 부모를 버리고 떠나가는 자가 있겠는가? 그리고 또 간혹 굶주림에 몰려 도적이 된 자가 있다 하더라도 또한 어찌 그것이 본심(本心)이겠는가? 실로 내가 너희들의 생업(生業)을 마련해 주지 못한 데서 말미암아 이미 항심(恒心)이 없고 또 평소의 교화(敎化)가 없어 이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이니, 이것이 바로 내가 밤낮으로 마음을 썩이며 눈물을 흘리는 까닭이다. 너희 할아비와 너희 아비부터 우리 조종(祖宗)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그 전리(田里)를 보전하며 편안히 생활하고 즐겁게 일해 온 지 이제 3백 년이 되었다. 지금 비록 곤궁하고 급박하더라도 어찌 차마 나를 버리고 유랑하여 이산할 수 있겠는가? 또한 어찌 착하지 않은 마음을 싹틔워 스스로 위험한 곳으로 빠져들 수 있겠는가? 그리고 또 생각건대 경대부(卿大夫)들의 충성스럽고 의로운 마음은 스스로 보통 백성과는 같지 않을 것이니, 그대들은 각기 이웃 마을에 권유하여 혹시라도 유랑하여 이산하거나 절도(竊盜)하는 일이 없도록 하며, 자급 자족(自給自足)하고 만약 서로 도와줄 형편이 되면 함께 서로 나누어 먹고 혼자만 살려 계획하지 말라. 서명(西銘)164) 에 이르기를, 「백성은 나의 동포(同胞)요, 만물은 나의 동류(同類)이다.」 하였다. 어진 사람의 마음은 물(物)에 대해서도 도리어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데, 하물며 동포에 대해서이겠는가? 내가 백성들을 스스로 보전하지 못하고 이러한 애통한 말을 꺼내니, 마땅히 나를 가엾이 여겨 생각을 돌려야 할 것이다.’ 하였다. 또 여러 도(道)의 감사(監司)와 수령(守令)들에게 선유(宣諭)하기를, ‘아! 그대 방백(方伯)들은 혹시라도 편안히 앉아 있지 말고, 여러 고을을 순력(巡歷)해 그 고을 수령을 직접 만나 함께 흉년을 구제할 대책을 의논하고, 아전과 백성들을 만나 조정의 힘써 구휼하려는 뜻을 효유(曉諭)하여 그들로 하여금 원한을 품고서 유랑하여 이산하는 지경에 이르지 않게 하라. 내가 주자(朱子)가 절강성(浙江省) 동쪽의 구황사(救荒使)가 되었을 때 그 문인(門人)이 기록한 것을 보았더니, 이르기를, 「공(公)이 백성의 괴로움을 캐내고 찾아 묻기를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않아 잠자는 일과 먹는 일까지 폐하기에 이르렀고, 깊은 산골짜기까지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매번 나갈 때는 반드시 가벼운 수레를 탔고, 따라다니는 수행원들을 물리쳤으며, 자신에게 소용되는 물품은 스스로 싸가지고 다니니, 관할 구역 안에서도 그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하였다. 관리(官吏)는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경계하고 신칙해 늘 사자(使者)가 경계 안으로 들이닥치는 듯 여기니, 이 때문에 살아난 사람이 매우 많았다. 그후 입견(入見)하였을 때 효종(孝宗)이 맞이하여 위로하기를, 『절동(浙東)에서 애쓴 수고를 짐(朕)이 아는 바이다.』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이것이 어찌 오늘날의 마땅히 본받을 바가 아니겠는가? 병사(兵使)·수사(水使)·수령(守令)·첨사(僉使)·만호(萬戶)·찰방(察訪)과 같은 경우에도 또한 각기 소속된 군사와 백성이 있으니, 각각 백성들의 굶주림을 자기의 굶주림처럼 여기고, 백성들의 죽음을 자기의 죽음처럼 여기는 마음을 먹는다면, 어찌 서로 구제할 방도가 없겠는가?’ 하였다.
11월에 왕이 천연두에 걸렸다. 하교하기를, ‘이번에 걸린 질환이 며칠 안 가서 바로 나았으니, 이는 실로 천지(天地)와 조종(祖宗)의 몰래 도우신 데 힘입은 것으로, 특별한 위열(慰悅)의 행사가 없을 수 없다. 더구나 이 얼어붙는 계절에 죄수들이 오랫동안 감옥에 갇혀 있으니,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서울과 지방의 사형수 이하는 모두 석방하라.’ 하였다. 그 뒤에 왕이 말하기를, ‘대개 「사(赦)」란 소인(小人)에게 요행이 되는 것으로 옛 사람이 「삼가 사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그 임금에게 진계(陳戒)하였다. 세도(世道)가 떨어지고 풍속이 나빠져 인심(人心)이 각박하고 악한 때는 더욱 전에 없는 광탕(曠蕩)의 은전을 베풀어 간사한 사람들의 요행을 바라는 마음을 열어 주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데 지난번 위중한 병이 조금 나았을 때 다만 위열(慰悅)이 급한 줄로만 알고 뒷날의 폐단이 한없으리라는 것은 생각하지 못하여 경솔하게 뒤섞어 석방하였으므로, 뒤에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 지금 비록 다시 가두고 추핵(推覈)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만약 혹시라도 일시적인 특교(特敎)로 인해 뒷날 전례로 끌어다 응당 행하는 근거로 삼는다면 그 폐해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절대 전례로 끌어대지 말도록 할 일을 영원히 정식(定式)으로 삼으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내가 생각하건대, 나라를 망하게 하고 몸을 잃는 화(禍)가 진실로 한 가지 길이 아니지만, 고금(古今)서 찾아보면 술에 빠진 나머지 그 덕(德)을 뒤집어 엎은 데서 말미암지 아니함이 없었다. 이런 까닭에 우리 조종(祖宗)께서 깊이 근심하고 먼 장래를 생각하여 간곡하게 효유(曉諭)하셨는데, 근일 대소(大小) 신료(臣僚)들이 다만 모여서 술마시는 것만을 일삼아 위로는 나라일을 치지 도외(置之度外)하고, 아래로는 부모와 형제들에게 근심 걱정을 끼치니,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지금처럼 하늘이 노여워하고 백성들이 원망하는 날은 군신(君臣) 상하가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부지런히 노력해도 오히려 구제하지 못할까 두려운데, 감히 술에 빠져 일을 폐할 수 있겠는가? 아! 그대 신하들은 능히 이 뜻을 체념하여 모여서 술마시는 일을 경계하고, 그대들의 직무에 정성껏 부지런히 힘써 시대의 어려움을 널리 구제하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5일에 왕대비(王大妃)가 승하(昇遐)하니, 시호(諡號)를 ‘명성(明聖)’이라 하였다. 갑자년165) 4월 명성 왕후를 숭릉(崇陵)에 부장(祔葬)하고, 양주(楊州)의 대동미(大同米)를 2두(斗)를 감해 주라고 명하였다. 천연두를 앓을 적에 무녀(巫女)가 대궐로 들어가 기도하였는데, 호조 참판(戶曹參判) 박세채(朴世采)가 상소하여 논했다. 그래서 유사(攸司)로 하여금 조사하여 다스리도록 하였는데, 형벌을 가해도 승복(承服)하지 않았다. 왕이 말하기를,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갑옷 만드는 사람은 다만 사람이 다칠까 두려워하고, 무당과 관(棺) 만드는 목수도 또한 그러하다.」고 하였다. 무녀가 궁중에 들어와 기도하고 축원한 것은 참으로 지극히 불경스러운 일로, 비록 항양(桁楊)166) 아래 죽는다 하더라도 조금도 아깝게 여길 것이 없다. 하지만 어리석고 무식한 무리들이 만약 스스로 「남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다가 죽었다.」고 생각한다면, 이것도 또한 좋지 않을 일일 듯하다. 사형을 감면하여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라.’ 하였다.
4월 3일에 왕대비(王大妃)의 상(喪)을 발인(發靷)하였다. 왕이 돈화문(敦化門) 밖에서 지송(袛送)하였고, 반우(返虞)할 때에는 흥인문(興仁門) 밖에서 공경히 맞았다. 하교하기를, ‘올해는 바로 자의 왕대비(慈懿王大妃)의 주갑(周甲)이다. 일찍이 따로 풍정(豊呈)을 베풀어 경하를 표시하려고 하였으나, 생각하건대, 내가 이러한 도독(荼毒)167) 을 당해 애일(愛日)의 정(情)을 펼 수 없어 기쁨과 두려움이 한꺼번에 닥치니, 나의 감회가 어찌 한있겠는가? 여염집의 경우로 말한다 해도 만약 이런 경사를 만나면, 비록 상중(喪中)에 있더라도 반드시 별도로 위열(慰悅)하는 행사가 있을 것이다. 이번 자의전(慈懿殿)의 탄신일(誕辰日)에는 대내(大內)로부터 장차 설공(設供)하는 일이 있을 것이며, 궁중의 시어(侍御)하는 사람들에게도 또한 모두에게 반사(頒賜)하는 은전이 있을 것이니, 진상(進上)하는 물건을 평년(平年)에 비하여 더 진상(進上)하도록 하고, 반사(頒赦)도 또한 즉시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봉조하(奉朝賀) 송시열(宋時烈)의 의논으로 인해 진하(陳賀)를 거행하지 않았다.
좌참찬(左參贊) 이단하(李端夏)가 선조조(宣祖朝)의 보감(寶鑑) 다섯 책(冊)을 올리니, 우악한 비답을 내려 가상(嘉尙)하게 여기고, 이어 구마(廐馬)를 하사하였다. 한재(旱災) 때문에 대신(大臣)과 2품 이상의 관원, 삼사(三司)를 부르라고 명하고 재앙을 그치게 할 계책을 하문(下問)하였다.
하교하기를, ‘요사이 선비들의 풍습이 날이 갈수록 더욱 들뜨고 경박해지니, 그 허물은 전적으로 부형(父兄)들에게 있다. 집안에 엄격한 부형이 없고 조정에 훌륭한 스승과 선비가 없으면 인재를 양성할 수 없을 것이니, 훗날에 입신(立身)하더라도 장차 어디에 쓸 것인가? 지금부터 이후로 대사성(大司成)은 반드시 문학(文學)이 있고, 전중(典重)하며 과묵(寡默)한 자를 골라 차임(差任)하여 선비의 풍습을 크게 변화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을축년168) 에는 특별히 내수사(內需司)의 쌀과 면포(綿布)를 내려 진자(賑資)에 보태게 하고, 청백리(淸白吏)를 가려 뽑을 것을 명하였다. 또 음관(蔭官) 중에서 곤임(閫任)에 적합한 자와 무신 당상(武臣堂上)을 골라 효종조(孝宗朝)의 고사(故事)에 따라 개강(開講)할 때 번갈아가며 입시(入侍)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옥(獄)이란 천하의 큰 명맥이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공경할진저 공경할진저! 오직 형벌(刑罰)은 신중히 다룰지니라.」 하였고, 《논어(論語)》에 또한 말하기를, 「만약 그 실정을 알아내면 애처롭고 불쌍하게 여기고 기뻐하지 말라.」 하였으니, 주언(奏讞)할 즈음에 상세하고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보건대, 한(漢)나라 선제(宣帝)는 자식이 부모를 숨겨준다거나 아내가 남편을 숨겨준다거나 손자가 조부모(祖父母)를 숨겨주는 등의 송사는 다스리지 말도록 하였으니, 이것은 참으로 전대(前代)의 아름다운 뜻이었다. 그리고 또 법률(法律)을 상고해 보니, 또한 「모반(謀叛)과 반역(反逆) 외에 자손·처첩(妻妾)·노비(奴婢)가 그 부모나 가장(家長)을 고발한 경우는 교형(絞刑)에 처한다.」는 조문(條文)이 있다. 그런데 근래 외방(外方)의 형옥 문안(刑獄文案)을 보건대, 사건이 그다지 중대하지 않음에도 간혹 자손으로 하여금 그 부모나 조부모를 증거대게 하거나 처첩에게 그 가장을 증거대게 하는 경우가 있으니,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일이라 신칙(申飭)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부자가 함께 죄를 범했다거나 처첩이 모두 나쁜 짓을 한 경우는 똑같이 추치(推治)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또 외방에 지체된 옥사(獄事) 중에는 심지어 여러 해를 경과한 경우도 있다 하는데, 만일 의옥(疑獄)으로서 처결하기 어려운 것이라면, 감사(監司)가 즉시 계문(啓聞)하여 재처(裁處)할 것을 청하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모름지기 조속히 처결할 일을 각도(各道)에 신칙(申飭)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천원옥력(天元玉曆)》의 글은 하늘과 땅, 해와 달, 바람과 구름, 별 등의 재앙과 상서에 대해서 갖추어 실리지 않은 것이 없다. 비록 기상(氣象)을 관측하고 점(占)을 치는 것과는 다른 점이 있을지라도 시대적으로 멀고 가까운 차이점이 있으니, 똑같이 운대(雲臺)169) 에 비치(備置)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제 한 건(件)을 내리니, 혹은 사들여 오고 혹은 잘 베껴 써서 보관해 두라.’ 하였다.
극심한 한발 때문에 궁인(宮人) 25명을 내보냈다. 이때 여름부터 가을이 되기까지 가뭄이 더욱 혹독해졌으므로 여러 차례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 왕이 말하기를, ‘얼마 전의 제문(祭文)에다 나 자신에게 죄를 돌리고 책망하는 말이 몹시 소략하였으므로, 도로 내주어 고쳐 짓도록 하였다. 그러나 혹시라도 수향(受香)이 조금 늦어질까 염려스러워 관례에 따라 계하(啓下)하였으므로 마음이 매우 불안했다. 이제 삼각산(三角山)에 대한 제문(祭文)을 보니, 나 자신을 책망하는 말을 약간 언급했지만, 간절하고 급박하게 슬피 호소하는 뜻이 전혀 없으니, 다시 고쳐지어 들여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여 자신을 책망하고 죄수를 소결(疏決)하였으며, 친히 사직단(社稷壇)에 기도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최복(衰服)을 벗고 임시로 길복(吉服)을 입은 채 희생(犧牲)을 대신하여 기도한 것은 실로 부득이한 조처에서 나온 것인데, 성의(誠意)가 천박(淺薄)하여 천심(天心)을 돌리지 못하고 대단한 가뭄은 갈수록 심해져 논밭이 텅텅 비었다.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허둥지둥하며 고통이 내 몸에 있는 듯하니, 이제 막 직접 기도했다 하여 한가하게 기다리고 있을 수 없다.’ 하고, 대신(大臣)과 중신(重臣)들을 보내어 남교(南郊)와 여러 산천(山川)에 기도하게 하였다. 제문(祭文)은 대제학(大提學)으로 하여금 지어 올리게 했는데, 자신에게 죄를 돌리고 책망하는 뜻을 각별히 덧붙여 넣게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이번 가뭄은 옛날에 없던 것이다. 만약 며칠이 더 지나도록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남아 있는 곡식조차 장차 다 버리게 될 것이다. 내가 애타게 근심한 나머지 어떻게 구제해야 할지 몰라 구언(求言)의 교지(敎旨)를 내린 지 이미 30일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잠잠하게 있을 뿐이다. 진언(進言)을 해도 써 주지 않는다면 군상(君上)의 잘못이지만, 구언을 해도 말하지 않는 것은 책임이 군하(群下)에 있다. 그러나 이는 모두 내가 기쁘게 받아들이는 도량이 좁아서 그런 것이다. 옥당(玉堂)은 논사(論思)하는 지위에 있으면서 이미 광구(匡救)하는 말이 없고, 양사(兩司)에서도 또한 한 마디 말이 없으니, 어찌 내가 함께 큰 일을 할 능력이 없다고 여겨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몹시 부끄럽고 한탄스럽다.’ 하였다.
민충단(愍忠壇)170) 및 전사(戰死)한 사람과, 경신년171) ·신유년172) 에 굶어 죽은 사람 등에게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내리고, 폐문(閉門)·천시(遷市) 등의 일 또한 즉시 거행하였다. 대신(臺臣)이 아뢰기를, ‘외간(外間)에서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금중(禁中)에서 새로 몇 개의 괴석(怪石)과 깎은 돌을 얻어 세워놓고 있다.」고들 합니다. 이처럼 어렵고 걱정스러운 날 자질구레한 노리개에 마음을 쓴다는 것은 성명(聖明)께 바라던 바가 절대 아닙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이 말은 사실 지나친 점이 없지 않으나, 옛 말에 「과실이 있으면 고치고 과실이 없으면 더욱 노력하라.」고 하였으니, 체념(體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번에 예원(隷院)의 단자(單子)를 보았더니, 송사(訟事)를 접수한 지 3년이 되도록 판결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태만한 습관을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당랑(堂郞)을 추고(推考)하라. 여러 관사(官司)의 관원들이 묘사 유파(卯仕酉罷)하는 것이 법전(法典)에 실려 있고, 계하 공사(啓下公事)를 3일 만에 복계(覆啓)하는 것도 또한 수교(受敎)가 있는데, 백관(百官)들이 직무를 게을리하여 완급(緩急)을 살피지 않고 대부분 지체시키니, 아울러 신칙(申飭)하라.’ 하였다.
8월에 숭릉(崇陵)을 전알(展謁)하였다. 슬픈 안색과 애절한 곡읍(哭泣)에 보고 있던 여러 신하들이 감탄하지 않음이 없었다.
12월에 친히 명성 왕후(明聖王后)의 대상제(大祥祭)를 행하였다.
병인년173) 2월에 몸소 담제(禫祭)를 행하였다. 3월에 태학(太學)에 거둥하여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고 장차 선비들을 시험하려 했는데, 짓밝혀 죽은 거자(擧子)가 6, 7명이나 되었다. 왕이 놀라 슬퍼하여 춘당대(春塘臺)에서 시험을 물려 보였다. 연신(筵臣)이 궁금(宮禁)이 엄중하지 못함을 진백(陳白)하니, 왕이 말하기를, ‘항상 신칙(申飭)을 더하는데도 대궐 안의 말이 밖으로 새어나가는 것이 근래에 더욱 심하니, 참으로 한심스러운 일이다. 별도로 과조(科條)를 세워 만약 무단 출입하며 대궐 안의 말을 전파하는 자가 있다면 연설(筵說)을 누설한 죄와 똑같이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4월에 자의 대비전(慈懿大妃殿)에 풍정(豊呈)을 올렸다. 왕이 말하기를, ‘삼가 상수(上壽)의 예(禮)를 거행해 자손들이 모두 모여 밤이 다하도록 잔치를 벌이고 술잔을 들어 장수를 경하하여 화기(和氣)가 무르녹으니, 이는 실로 보기 드문 행사이다. 어찌 기쁨을 금할 수 있으랴? 지존(至尊)의 주갑(周甲)보다 더 큰 경사가 있을 수 없으니 휘호(徽號)를 받들어 올리는 일을 그만둘 수 없다.’ 하고, 5월에 ‘강인(康仁)’이란 존호(尊號)를 올렸다. 왕이 무오년174) 에 심하(深河)의 전투에서 죽은 이애경(李愛卿)의 아들이 나이가 지금 83세인데, 효행이 탁이(卓異)하다는 말을 듣고, 특별히 정려(旌閭)하라고 명하였다.
8월에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자 하교하기를, ‘예사롭지 않은 재앙이 끊이지 않고 거듭 나타나니, 근심스럽고 두려워 날이 갈수록 전전 긍긍한다. 비록 보통 해일지라도 절약해서 쓴 뒤에야 백성들을 사랑할 수 있다. 더구나 이러한 흉년에는 더욱 마땅히 절약하고 줄여야 한다. 호남(湖南)의 삭선(朔膳)을 내년 가을까지 한정하여 덜어내어 줄여주고, 삼명일(三名日)175) 의 진상(進上)도 또한 정지하도록 하라. 여정(餘丁)에게서 거두는 포(布)를 정파(停罷)하고 첩가미(帖價米)를 없애며, 신해년176) 의 전례에 의거하여 어공(御供)을 재량하여 줄이도록 하라. 그리고 소금 5백 석(石)을 제주도(濟州島)에 보내어 구휼품에 보태도록 하라.’ 하였다.
정묘년177) 에 대신(大臣)의 청에 따라 성묘(聖廟)에 종향(從享)한 여러 현인들의 자손을 모두 녹용(錄用)하고 그 벼슬을 대대로 물려받게 하는 것을 정식(定式)으로 삼았다. 사유(師儒)의 말에 따라 연산(連山)·남포(藍浦) 두 고을의 세미(稅米)로서 전란을 겪은 뒤 지부(地部)로 귀속시켰던 것을 다시 양현고(養賢庫)에 보냈다.
서도(西道)에 별과(別科)를 베풀었다. 법전(法殿)에 나가서 친림(親臨)하여 여러 종친(宗親)의 전강(殿講)을 행하고, 강릉(康陵)을 전알(展謁)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사단(射壇)에서 군용(軍容)을 관람한 뒤 다섯 대장(大將)에게 구마(廐馬)를 하사하고, 군병(軍兵)들에게는 상(賞)을 내려 주었다. 만수전(萬壽殿)에 불이 나서 종묘(宗廟)·영녕전(永寧殿)에 위안제(慰安祭)를 지냈다. 하교하기를, ‘만수전의 화재(火災)는 실로 전사(前史)에 보기 드문 재변이다. 조용히 그 허물을 생각해 보니, 진실로 내가 재덕(才德)이 천박하고 정령(政令)과 시조(施措)가 아주 천심(天心)에 맞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이런 예사롭지 않은 재앙을 초래한 것이다. 미앙궁(未央宮)의 재앙178) 은 한(漢)나라 역사에 기록되어 있고, 옛 말에 이르기를, 「사치의 해독은 하늘의 재앙보다 심하다.」 하였다. 말이 여기에 미치니 두려움이 갑절이나 더하다. 마땅히 정부(政府)에서는 널리 바른 말을 구하여 나의 부족함을 바로잡아야 할 것이고, 대소 신료는 서로 공경하여 화합하며 부지런히 힘써서 조금이나마 하늘의 견책에 보답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장릉(長陵)을 전알(展謁)하였다. 언젠가 술사(術士)가, ‘장릉의 택조(宅兆)가 이롭지 않다.’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산릉(山陵)을 옮기는 것은 일이 지극히 중대하니, 반드시 봉심(奉審)한 다음 결정하고자 한다.’ 하였다. 이때에 와서 하교하기를, ‘50년이나 된 능침(陵寢)을 하찮은 결점이 있다 하여 단지 풍수설(風水說)만 믿고 경솔하게 옮길 수는 없다.’ 하였다. 그 뒤로 그에 대한 의논이 마침내 정지되었다. 특별히 고양(高陽)과 파주(坡州)의 금년 세태(稅太)179) 를 감해 주었다. 왕이 말하기를, ‘옛부터 왕위를 이은 임금의 기원(紀元)은 반드시 즉위한 다음해부터 시초(始初)로 삼았으니, 옛 역사를 두루 보더라도 모두 그러하다. 그런데 이번 전시(展試)의 책제(策題)에다 「이제 14년이 되었다」 하였다. 그러므로 개점(改點)하여 내려 준다.’ 하였다.
야대 때 강관(講官)에게 술을 대접하면서 이르기를, ‘이 술은 주량(酒量)대로 마시고 사양하지 말라. 하지만 술의 해독을 내가 상세히 알고 있다. 부모가 있는 사람은 부모에게 걱정을 끼쳐드리고, 또 그 자신에게도 이롭지 못하며 직무에도 피해가 있으니, 엄중히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드디어 시(詩) 한 절구(絶句)를 내려 계칙(戒勅)하는 뜻을 보이고, 여러 신하들에게도 화합해 올릴 것을 명하였다.
친히 대정(大政)을 행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국가의 치란(治亂)은 훌륭한 인재를 얻느냐 얻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고, 등용하고 퇴진시키는 권한은 전조(銓曹)에 있다. 세상이 잘 다스려져 태평 무사할 때의 늘 하는 주의(注擬)일지라도 오히려 면려(勉勵)해야 마땅한데, 하물며 지금처럼 나라일에 어려움이 많아 임금과 신하가 한자리에 모여 정의(情意)를 유통시키는 때이겠는가? 반드시 자기의 사의(私意)를 떨쳐버리고 공도(公道)를 넓히고, 절의(節義)를 포창하고 덕행(德行)을 숭상하며, 청렴한 관리를 등용하고 벼슬길이 막힌 사람을 틔워 줄 것을 생각하고 용동(聳動)시키고 진작(振作)시키는 방도로 삼도록 하라. 관안(官案)을 살펴보고 결원이 있는 대로 의망(擬望)하여 들이고 의망한 대로 점하(點下)한다면, 한 사람의 정관(政官)이면 충분할 것이다. 어찌 친히 대정(大政)을 행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대정을 파한 뒤 선온(宣醞)하였다.
경기(京畿)·공홍(公洪)180) ·강양(江襄)181) ·황해(黃海)·함경(咸鏡) 5도(道)의 세태(稅太)의 절반을 제감(除減)해 주고, 여러 도(道)의 춘수미(春收米)를 재실(災實)을 구분하여 차등있게 면제해 주거나 경감해 주었다.
무진년182) 정월 초하루에 왕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군신(群臣)의 조하(朝賀)를 받은 뒤에 또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조참(朝參)을 거행하였다. 삼사(三司)의 금란(禁亂)·징속(徵贖)183) 의 제도를 개정할 것과 서로(西路)의 성지(城池)가 무너진 곳을 허물어지는 대로 즉시 보수할 것을 명하였다.
금루군(禁漏軍)이 대궐문이 닫힌 뒤 담을 넘어 들어왔으므로 병조(兵曹)에서 법에 따라 일죄(一罪)184) 로 처단할 것을 청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우매하고 용렬한 군사를 굳이 심하게 다스릴 필요가 없으니, 종중(從重)하여 곤장으로 다스리라.’ 하니, 승정원(承政院)에서 법(法)으로 간쟁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법은 비록 이와 같지만 정상을 보면 용서할 만하다.’ 하고, 따르지 않았다.
왕이 장차 영릉(寧陵)을 전알(展謁)하려 하자, 우의정(右議政) 이숙(李䎘)이 차자(箚子)를 올려, ‘흉년에 백성을 소란스럽게 하고 또 전염병이 많다.’며 뒷날로 물려 행할 것을 청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옛적에 동한(東漢)의 명제(明帝)가 원릉(園陵)을 참배하려 할 때 밤에 선제(先帝)와 태후(太后)가 평상시처럼 즐거워하는 꿈을 꾸고 비통에 잠겨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래서 책력을 살펴 좋은 날을 가리고 곧바로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능(陵)에 올라가 참배하였다. 내가 일찍이 꿈에 효묘(孝廟)를 뵈니 효묘께서 손을 맞잡고 기뻐하시며 옥음(玉音)이 정녕(丁寧)하셨다. 깨어나니 눈물이 흘러서 양볼을 적셨으며 추모하는 마음이 갑절이나 간절하여 실로 스스로 억누르기 어려웠다. 신도(神道)를 생각해 본다면 사람의 정리를 벗어나지 않고 지극한 정리가 있는 곳에는 하늘도 반드시 가엾이 여겨 용서해 줄 것이다. 그런즉 저들이 지극히 어리석지만 신령한 백성들이니, 어찌 이번의 행차가 마지 못한 데서 나온 것인 줄을 알지 못하겠는가?’ 하고 마침내 영릉에 거둥하였다. 광주 산성(廣州山城)의 행궁(行宮)에 머물면서 왕이 말하기를, ‘인조(仁祖)께서 병자년185) 에 주필(駐蹕)186) 하셨던 곳을 이제 마침 와서 보니 슬픈 감회를 가눌 길이 없구나!’ 하고, 양주(楊州)·광주(廣州)·여주(驪州)·이천(利川) 네 고을의 봄철 대동미(大同米)를 면제해 주었으며, 여주 지역 안에 나이 70 이상이 된 사람들에게는 음식물을 제급(題給)하였다. 온왕(溫王)187) 의 사당과 영창 대군(永昌大君)과 명선(明善)·명혜(明惠)·명안(明安)·숙정(淑靜) 네 공주(公主)와 여양(驪陽)·광성(光城) 두 국구(國舅)와 완풍 부원군(完豊府院君) 이서(李曙)의 묘소에 제사를 지내고, 또 쌍수(雙樹)와 험천(險川)의 전투에서 사망한 장졸(將卒)들과 신해년188) 에 굶어죽은 사람들을 매장한 곳에 사제(賜祭)할 것을 명하였다. 왕이 쌍수령(雙樹嶺)을 지나다가 어가(御駕)를 멈추고 묻기를, ‘이곳이 싸움터인가? 민영(閔栐)·허완(許完) 등이 천리(千里)의 먼 길을 달려 근왕(勤王)하고 여기에서 싸우다 죽었다. 지금 이곳을 지나자 더욱 슬픔이 복받친다. 두 사람의 자손들을 녹용(錄用)하라.’ 하였다. 서장대(西將臺)에 올라가서 오랫동안 슬픔에 잠겨 있다가 전사(戰死)한 신성립(申誠立)과 전공(戰攻)이 있는 서흔남(徐欣男)의 자손을 수용(收用)할 것을 명하였다. 성(城)이 포위되었을 때 관속(官屬)으로서 생존한 자에게는 음식물을 제급하고, 가자(加資)하지 않은 자에게는 특별히 가자하라고 명하였다.
태조 대왕(太祖大王)의 수용(睟容)189) 을 전주(全州)로부터 받들고 와서 강가에 도착하니, 왕이 나루에 나아가 맞이하였다. 그리고 자정전(資政殿)에 봉안하고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이를 모사(摹寫)한 신본(新本)이 완성되자 영희전(永禧殿)에 봉안하였다. 화상을 모시고 지나온 각 고을의 봄 대동미를 재량하여 감면해 주고, 민전(民田)으로서 연로(沿路)에 떼어져 들어간 곳이나 각 고을의 주전(廚傳)에 지공(支供)한 것은 모곡(耗穀)으로 보상해 주도록 하였다.
자의 대비(慈懿大妃)의 증세가 위독해지자, 대신(大臣)과 중신(重臣)들을 보내어 묘사(廟社)190) 와 여러 산천(山川)에 기도를 드렸고, 역옥(逆獄)이나 강상(綱常)에 관계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형수들까지 모두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8월 26일 자의 대비가 승하(昇遐)하니, 시호(諡號)는 장렬(莊烈), 휘호(徽號)는 정숙 온혜(貞肅溫惠), 전호(殿號)는 효사(孝思), 능호(陵號)는 휘릉(徽陵)이라 하였다.
어떤 술사(術士)가 투소(投疏)하여, ‘쌍유 병결(雙乳並結)의 혈(穴)을 구하거나 아니면 일강 상하(一岡上下)의 땅을 골라 장릉(長陵)을 옮겨 모시어 두 능(陵)이 구역(區域)을 같이하는 계획을 세울 것’을 청하니, 왕이 말하기를, ‘직접 살펴보고 단정(斷定)할 일이며 지금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다.’ 하였다. 뒤에 대계(臺啓)로 인해 그 사람을 처벌하였다.
상원(祥原) 사람이 상소하여 궁가(宮家)에서 절수(折受)하는 폐단을 낱낱이 아뢰니, 즉시 폐지할 것을 명하였다.
소의(昭儀) 장씨(張氏)의 어미가 옥교(屋轎)를 타고 대궐을 출입하니, 대관(臺官)이 그 교자(轎子)를 불사르고 그 하인들을 추치(推治)하였다. 왕이 ‘그들에게 출입(出入)하라는 분부가 있었는데, 논계(論啓)도 하지 않고 멋대로 형벌을 가했다.’고 하여 내수사(內需司)로 하여금 금리(禁吏)와 소유(所由)191) 를 죄주게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많이 간쟁하니, 왕이 말하기를, ‘당초 형신(刑訊)하게 한 것은 대개 한때의 지나친 행동에서 나온 것인데, 지금 들으니 두 사람이 모두 목숨을 잃었다 한다. 이제 와서 돌이켜 생각하건대, 후회스러워 실로 불쌍하고 측은한 생각이 든다. 휼전(恤典)을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뒤에 다시 헌신(憲臣)의 상소에 답하기를, ‘칠정(七情) 가운데서 쉽게 발동하여 제어하기 어려운 것은 생각건대 분노가 가장 심하다. 나의 병통은 언제나 여기에 있고, 지난번의 일 또한 한때의 분노를 참지 못하여 이런 전에 없는 과오를 초래한 것이다. 이는 실로 함양(涵養) 공부에 미진함이 있어서 그러한 것으로, 나 자신을 반성하고 부끄러워하고 있다. 가만히 스스로 생각하기를, 「여백공(呂伯恭)192) 은 한낱 필부(匹夫)였지만 문득 성인(聖人)의 가르침에 각성하여 이에 그 기질(氣質)을 변화시켰다.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이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 일을 할 능력이 있는 자는 또한 이와 같이 될 것이다. 반드시 본원(本源)이 되는 곳에 뜻을 더하여 능히 존양(存養)의 공부를 이룬 뒤에라야 거의 거칠고 사나운 병통을 떨어버리고 빈번한 후회가 없게 될 것이다.」 하였다. 이것으로써 내 마음에 스스로 경계하는 바이나, 어찌 밖으로 뉘우치는 단서를 보이면서 안으로 분노를 품어 사람들에게 도량이 넓지 못함을 보일 수 있겠는가?’ 하였다.
12월 15일 자의 대비(慈懿大妃)의 발인(發靷)이 있었고, 16일에 반우(返虞)하였는데, 왕이 동교(東郊)에서 곡하며 전송했고 곡하며 맞이하였다.
기사년193) 정월(正月)에 원자(元子)의 위호(位號)를 정할 것을 명하였다. 원자는 소의(昭儀) 장씨(張氏)의 소생이다. 장씨를 봉하여 희빈(禧嬪)으로 삼았다.
왕이 ‘과거(科擧)는 선비들이 출신(出身)하는 첫길인데, 근래 과거를 치른 뒤에 언제나 사람들의 말이 있다.’ 하고 시관(試官)을 승정원(承政院)에 불러오게 하여 ‘공정(公正)하게 사람을 뽑으라.’고 신칙(申飭)하였다.
하교하기를, ‘이제 봄바람이 불어 얼음이 풀리고 흙의 맥박이 막 움직이니, 권농(勸農)하고 진대(賑貸)하는 뜻을 여러 도(道)의 감사(監司)에게 하유(下諭)하라.’ 하였다.
5월에 인현 왕후(仁顯王后)를 사제(私第)에 물러가 있도록 하고, 희빈(禧嬪) 장씨(張氏)를 올려 왕비(王妃)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가뭄 때문에 소결(疏決)하였다.
경오년194) 에 서흥현(瑞興縣) 일대에 전염병이 크게 번지니, 왕이 친히 제문(祭文)을 짓고 예관(禮官)을 보내 본현(本縣)의 사단(社壇)과 경내(境內)의 명산(名山)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6월에 면복(冕服)을 입고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왕세자(王世子)를 책봉(冊封)하였다. 10월에 장렬 왕후(莊烈王后)를 종묘(宗廟)에 부제(祔祭)하였다.
삼남(三南) 지방과 경기(京畿) 각 아문(衙門)의 무진년195) 이전의 결딴난 증미(拯米)196) 6천여 석을 탕감(蕩減)해 주었다.
야대(夜對) 때 강(講)을 마친 다음 선온(宣醞)을 명하고, 손수 사운시(四韻詩)를 써서 여러 신하들에게 보였는데, 이르기를, ‘막막한 천지 한이 없는데,[天地茫無垠] 이 한 몸은 너무나도 작구나.[眇然有一身] 타고난 성품은 본래 착한 것,[秉彝本自善] 물욕이 유혹해서 진성(眞性)을 잃게 되네.[物誘乃亡眞] 마음잡고 놓는 것은 호리(毫釐)에서 판가름나고,[操舍毫釐判] 성인(聖人)과 미치광이는 잠깐 사이에 이루어지네.[聖狂俄頃臻] 사심(邪心)을 막는 것은 경(敬)만한 것이 없고,[閉邪莫若敬] 사욕(私慾)을 극복하면 날마다 덕이 새로워진다.[克己日維新]’ 하였다. 이어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화답(和答)해 올리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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