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문흠(宋文欽) 1710년(숙종 36)~1752년(영조 28)
閒靜堂集卷之七 / 記 / 數樹亭記
이인상(李麟祥) 1710년(숙종 36)~1760년(영조 36)
沙斤之驛。居方丈之趾。環數十里。峯巒巖壑。多瑰奇之觀。驛館帶藍溪拱花山。竹樹淸幽。田園靚曠。元靈來爲丞。居之三歲。政閒馬良。適遠近如意。數十里之內。登臨搜剔旣遍矣。自大嶺以南。炎海以北。名山大川。樓臺寺觀之盛。島嶼之怪。風濤之咢。與夫都邑興亡。忠臣烈士之跡。十且得其七八焉。元靈平居鍾情山水。以家貧無僕馬。不能出門爲憂恨。今所以酬其志者。如此之富。殆亦足以樂矣。顧以遠游羇宦。不得于心。書疏詠歎。必道其幽愁壹鬱。而至其登嶺悲歌。則有足令人感歎而流涕者矣。夫君子之用情也。憂樂不相奪。趣舍不相瘉。故理定而心泰。物遷而身安。苟使居而憂乎游。出而憂乎家。卒不能全一日之樂。則其神之不滑者幾希。君子殆不然也。元靈闢驛館之東。攘榛莽治池沼。倚林爲亭。名之曰數樹之亭。葢取乎王維之語而自道其謙也。元靈讀書求道二十年。初試小吏。無以見其蘊。然愛人爲國。政譽四流。經世之務。猶可爲之兆焉。吾不欲與其自謙而阿爲之辭。吾聞莊周氏之爲吏也。以其大放寄于微官。然而一彼此齊憂樂。其視漆園。猶濠濮之間也。元靈其以是取諸數樹之義可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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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1741~1793)는 종실(宗室) 무림군(茂林君 정종(定宗)의 아들로 이름은 선생(善生))의 후예인 성호(聖浩)의 아들로, 자(字)는 무관(懋官), 호(號)는 아정(雅亭)인데 이 밖에 형암(炯庵)ㆍ청장관(靑莊館) 또는 동방일사(東方一士)라고도 자호(自號)하였다. 청장(靑莊)은, 신천옹(信天翁)과 같이 해오라기 종류의 수금(水禽)으로서 앞에 닥치는 먹이만을 먹고 사는 청렴한 새라고 한다. 즉 이로써 호를 삼은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그의 성격을 상징한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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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장관전서 제68권 / 한죽당섭필 상(寒竹堂涉筆上)
李德懋 | 1741 | 1793 | | | 全州 | 懋官, 明叔 | 靑莊館, 蟬橘堂, 炯菴, 端坐軒, 注蟲魚齋, 學草木堂, 香草園, 槑宕, 雅亭, 四以齋居士, 鶴上村夫, 寒竹堂, 以菴居士 |
수수정(數樹亭)
능호(凌壺) 이인상(李麟祥)이 사근역 찰방이 되었을 때에 설치(設置)한 것이 많고 마음가짐을 공명하고 염직(廉直)하게 하여 관리들을 단속하였다.
내가 늙은 아전에게 50~60년 내려오는 동안 어떤 관원이 가장 훌륭하게 다스렸느냐고 물으니 그 아전이 능호라고 대답하였다.
대개 서화(書畫)와 문사(文詞)에 종사하는 사람은 거의가 사무(事務)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 많으니, 미전(米顚 미불(米芾)의 별칭)과 예오(倪迂 예찬(倪瓚)의 별칭) 같은 사람이 그러하였다.
그러나 능호는 이치(吏治)를 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관아의 동헌에 건 한죽당(寒竹堂)이라는 편액을 대전(大篆)으로 팠는데 자못 강하고 굳세게 보였다. 마루 동쪽 모퉁이에 두충(杜沖)ㆍ홍매(紅梅)와 고송(古松)ㆍ수죽(脩竹) 등속이 심겨져 있으며, 능호가 조그마한 기와 정자를 나무 사이에 세웠는데 동쪽으로 하당(荷塘)을 내려다보아 소연(蕭然)한 풍치가 있으며, 그 정자에 걸린 수수정(數樹亭) 세 글자의 편액은 문의 현령(文義縣令) 송문흠(宋文欽)이 쓴 팔분체(八分體)였다.
그리고 북쪽 기둥에는 능호의 자서(自書)를 걸었는데 글은 다음과 같다.
옛 사람은 거만한 관리가 아니었는데 / 古人非傲吏
스스로 세상 경영하는 사무를 빠뜨렸네 / 自闕經世務
우연히 하나의 미관에 기탁되어 / 偶寄一微官
두어 그루 나무 아래 거닐고 있네 / 婆娑數株樹
마힐(摩詰 왕유(王維)의 자) 시의 뜻을 취하여 정자의 이름을 지었다. 숭정(崇禎) 재기사년(1749, 영조 25) 늦봄에 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승창 (역) |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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數樹亭
李凌壺麟祥。爲沙斤察訪。多所設置。持心公廉而又束吏。余問老吏。五六十年來。何官最善爲政。吏擧凌壺以對。葢書畫文詞之人。例多不識事務。若米顚倪迂者。是也。凌壺能兼吏治。衙軒揭寒竹堂扁。劈窠大篆。頗遒偉。軒東隅。有杜冲紅梅古松修竹之屬。凌壺構一笠瓦亭於樹間。東臨荷塘。有蕭然之致。數樹亭三字。宋文義文欽。所書八分。北棟揭凌壺自書。
古人非傲吏。自闕經世務。偶寄一微官。婆娑數株樹。取摩詰詩意以名亭。崇禎再己巳季春。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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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棟揭凌壺。自書古人非傲吏。->北棟揭凌壺自書。古人非傲吏。오언절구 왕마힐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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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정(崇禎) 기사년(1629, 인조 7) 늦봄에 쓴다.崇禎再己巳季春。書。
->숭정(崇禎) 재기사년(再己巳年, 1749,영조25)
이인상(李麟祥) 1710년(숙종 36)~1760년(영조 36)
능호집(凌壺集)
영조 24 1748 무진 乾隆 13 39 8월, 晉州 矗石樓로부터 시작하여 錦山, 音聲窟 등을 유람하다. ○ 沙斤道 察訪이 되다.
숭정(崇禎) 기사년(숭정2년,1629,인조7)
숭정후 기사(1689,숙종15)
숭정후 再己巳(1749,영조25)
숭정 再己巳는 숭정후 再己巳의 뜻
김윤수, <泰仁坊刻本 《詳說古文眞寶大全》과《史要聚選》> , 書誌學硏究 5`6, 1990 崇禎紀年法 참조
수수정은 함양 사근도 찰방 능호 이인상이 건립한 것이다.<凌壺構一笠瓦亭於樹間> 수수정 현판은 이인상 친구 같은해 부임 수령 文義縣令 宋文欽(1710~1752)이 팔분체로 쓴 것이다. 왕마힐의 오언절구 시는 이인상이 정자 이름을 왕마힐 시에서 취한 것임을 밝힌 것이다. 영조 23년(1747)에 사근도 찰방 부임하고 세운 수수정에 영조 25년(1749)에 친필로 써서 게판한 것이다.
승정원일기 1016책 (탈초본 55책) 영조 23년(1747) 5월 29일 무오 14/37 기사 1747년 乾隆(淸/高宗) 12년
○ 吏批, 李麟祥爲沙斤察訪,
*이렇게 친절하게 설명했는데도 연대오류를 안 고치고 방치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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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장관전서 제12권 / 아정유고 4(雅亭遺稿四) - 시 4 / 한가로이 소일하며 遣閒
벼슬길에 떠도는 자취 부평(浮萍) 같으니 / 宦跡飄飄一點萍
두류산에서 어느덧 두 여름 맞았네 / 頭流再見草爲螢
공부하느라 돋보기 눈에 걸치고 / 工程眼羃靑硝鏡
청아한 마음으로 백자기(白磁器) 술 서로 권하네 / 雅契膓澆白墡甁
푸른 대 성기니 연기로 얽어매고 / 碧篔簹疏煙補綴
붉은 장미 시드니 비가 깨워주누나 / 紅薔薇困雨提醒
역승이여 솔 사이에서 시 읊기를 계속하고 / 丞哉不廢松間咏
종일토록 수수정(數樹亭)에서 거니노라 / 竟日婆娑數樹亭
남쪽 하늘 세 차례나 갔다왔으니 / 三度天南往復來
어디엔들 망향의 대 없을쏜가 / 望鄕何處不宜臺
서둘러 전원을 둘러보니 죽순이 바야흐로 솟아나고 / 急先巡圃方抽筍
늦게 아문으로 돌아오니 매화 이미 졌구나 / 差晩還衙已落梅
편의를 독차지했으니 원래 복된 땅이지만 / 獨占便宜元福地
번뇌 못 없애면 시름이 곧 따르리 / 未除煩惱卽愁媒
그러나 한 물건만은 용납 못하니 / 雖然一物容難得
우레소리 같은 모기 떼를 쳐부수누나 / 撲破蚊群鬧作雷
ⓒ 한국고전번역원 | 정지상 (역) |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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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일토록 그늘진 정자에서 거니노라 / 竟日婆娑數樹亭 ->수수정에서 서성이노라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청장관전서 제68권
한죽당섭필 상(寒竹堂涉筆上)
청장관전서 제68권 / 한죽당섭필 상(寒竹堂涉筆上)
수수정(數樹亭)
능호(凌壺) 이인상(李麟祥)이 사근역 찰방이었을 때에 지은 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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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 24 | 1748 | 무진 | 乾隆 | 13 | 39 | 8월, 晉州 矗石樓로부터 시작하여 錦山, 音聲窟 등을 유람하다. ○ 沙斤道 察訪이 되다. ○ 馬政에 힘쓰기 위해 그동안 그렸던 그림들을 불태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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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24 1748 무진 乾隆 13 39 8월, 晉州 矗石樓로부터 시작하여 錦山, 音聲窟 등을 유람하다. ○ 沙斤道 察訪이 되다. ○ 馬政에 힘쓰기 위해 그동안 그렸던 그림들을 불태우다. ->영조 23 1747 5월 ○ 沙斤道 察訪이 되다.
승정원일기 1016책 (탈초본 55책) 영조 23년1747 5월 29일 무오 14/37 기사 1747년 乾隆(淸/高宗) 12년
○ 吏批, 以柳善養爲司饔主簿, 李明吾爲敦寧主簿, 李敬天爲義盈主簿, 曺命協爲宗簿直長, 元景輿爲繕工奉事, 洪欽輔爲司饔奉事, 金宇槩爲監察, 李德顯爲載寧郡守, 尹翼東爲溫陽郡守, 趙漢弼爲狼川縣監, 李錫履爲咸悅監察, 李瑗爲槐山郡守, 趙世選爲藍浦縣監, 洪若水爲鳳山郡守, 金宗爀爲碧沙察訪,
李麟祥爲沙斤察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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偶寄一微官,婆娑数株树。
出自唐代王维的《漆园》
古人非傲吏,自阙经世务。
偶寄一微官,婆娑数株树。
译文
庄子并不是傲吏,他之所以拒绝楚威王以相位相招,是因为自己缺少经国济世的本领。
庄子偶然做了个漆园吏不官,不过是借这里寄存形骸,其实如那“婆娑数株树”,精神早已超脱了。
注释
漆(qī)园:本是辋川一景。这里的“漆园”还和历史故事有关。
古子:这里指庄子。傲吏:庄周,战国时宋国蒙人,曾为漆园吏。
阙(quē):欠缺。
经世务:经国济世的本领。
偶寄:偶然寄身于。
一微官:一个低微的官职。
婆娑(suō):树木枝叶扶疏、纷披盘旋的样子。
赏析
此诗是王维《辋川集》中的一首诗。此诗的着眼点不在描绘漆园的景物,而在通过跟漆园有关的典故,表明诗人的生活态度。
郭璞《游仙诗》“漆园有傲吏”,侧面赞美庄子的品性。诗中“古人非傲吏,自阙经世务”,是诗人反其意而用之,说庄子并不是傲吏。庄子之所以不求仕进,是因为自觉缺少经国济世的本领。这也是一种赞美,不过换了个角度罢了。诗人是借古人以自喻,表白自己的隐居,也决无傲世之意,颇有点看穿悟透的味道。
王维(701年-761年,一说699年—761年),字摩诘(jié),号摩诘居士。汉族,河东蒲州(今山西运城)人,祖籍山西祁县,唐朝诗人,有“诗佛”之称。苏轼评价其:“味摩诘之诗,诗中有画;观摩诘之画,画中有诗。”开元九年(721年)中进士,任太乐丞。天宝年间,拜吏部郎中、给事中。唐肃宗乾元年间任尚书右丞,世称“王右丞”。王维是盛唐诗人的代表,今存诗400余首,重要诗作有《相思》《山居秋暝》等。王维精通佛学,受禅宗影响很大。佛教有一部《维摩诘经》,是王维名和字的由来。王维诗书画都很有名,多才多艺,音乐也很精通。与孟浩然合称“王孟”。► 439篇诗文 ► 585条名句
王维在漆园写下一首小诗,身心如一,咏古写己,自甘淡泊不傲世
明月减清辉
2023-03-13 00:19 湖北
周显王二十九年(公元前340年)前后,庄子在宋国为漆园吏。
三十年,楚威王派遣大夫前往见庄子,想要聘请庄子为相,庄子不答应,反而对使者说,“子亟去,无污我”。
此即为后人所称道的“漆园傲吏”典故。
王维却对此事另有看法,写下了《漆园》一诗。
漆园
王维
古人非傲吏,自阙经世务。
偶寄一微官,婆娑数株树。
辛夷坞附近是漆园,园子里种满了漆树。作为辋川二十景之一,漆园很美。
面对美景,王维不描绘景物,而是传达自己的人生理念。
在王维眼中,“古人非傲吏”,庄子拒绝楚威王,是因为知道“自阙经世务”。他赞美庄子有自知之明,精神上超凡脱俗。
“偶寄一微官,婆娑数株树”是指庄子还是王维自己?应该都有吧。
那么同理,我隐居,也不是傲世愤俗。
为什么还要做漆园吏这样的“微官”呢?因为“我”要身心如一,借微官来偶寄形迹。
做个漆园吏,隐逸在漆园,与树相伴,与大自然亲密接触,不也很好吗?
树影婆娑,树木已经没有生机。我呢,就和树一样,放浪形骸,纵情自适。
此情此景,不正是另一种形式的“梅妻鹤子”吗?我与树相伴,真正享受闲散安逸的生活乐趣,身心统一,内心不必太疲惫。
隐居于此,逍遥于此,终老于此,复有何求?
庄生晓梦迷蝴蝶,久而久之,我也成了“婆娑一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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