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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헌공(敬憲公) 조선 초기 문신 이계손(李繼孫, 1423~1484)의 시호이다.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인지(引之)이다. 1469년(예종1)에 함길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뒷수습하고 학문을 진흥시켰다. 원문 주의 이 상서(李尙書)는 5대손인 이상의(李尙毅)인 듯하다.
최립(崔岦) 1539년(중종 34)~1612년(광해군 4)
간이집 제9권 / 희년록(稀年錄)
경헌공(敬憲公)의 관북(關北) 사당에 대한 일의 기록
이 경헌공(李敬憲公 이계손(李繼孫))이 성묘조(成廟朝) 기축년(1469, 성종 즉위년) 연간에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어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로 나가서 잘 다스린다는 칭송을 크게 받았다. 그러다가 공이 죽은 뒤에 근신(近臣)이 사명을 받들고 본도(本道)에 갔다가 회계(回啓)하기를, “이모(李某)는 정사를 행할 적에 특히 문교(文敎)를 우선으로 삼았습니다.” 하면서, 도내(道內)의 제생(諸生)이 제술(製述)한 사장(詞章)을 위에 올려 문교의 효과를 증거하였다. 이에 상이 매우 가상하게 여긴 나머지 이 안건을 유사(有司)에게 내려 공을 표창할 방도에 대해서 의논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공에게 특별히 정헌대부(正憲大夫) 의정부좌참찬 겸 예문관대제학(議政府左參贊兼藝文館大提學)이 추증되는 동시에, 관원을 보내 공의 묘소에 제사를 올리게 하는 은전이 내려졌다.
대체로 본도는 북쪽으로 오랑캐와 접경하고 있는 관계로, 백성들의 풍속 역시 활 쏘고 말 타는 것이나 알 뿐 학문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상태였으므로, 본도에 부임한 감사(監司)들도 변방을 단속하고 군대를 훈련시키는 일 이상의 것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하지를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공만은 유독 학교(學校)에 대한 일을 급선무로 삼고는, 조정에 요청하여 경적(經籍)을 군현(郡縣)에 배포하고 문신(文臣)을 교관(敎官)으로 가려 보내도록 하는 한편, 장부에 누락된 난신(亂臣)의 장획(臧獲 노비)을 쇄환(刷還)하여 학교에 소속시켜 주도록 건의하였다. 그리고 그 지방의 총명한 자제들을 뽑아서 자기가 직접 가르침은 물론이요, 도회소(都會所)의 제도를 마련하여 사시(四時)로 과시(課試)를 보임으로써 제생들을 격려하며 이끌어 주었다.
지금 그 학교의 범례(凡例)가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다시 자세히 알아볼 수가 없지만, 한 해가 지나고 두 해가 지나는 사이에 한 지방이 크게 교화된 결과, 관북(關北)의 향시(鄕試)를 거치고 나서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하는 자들이 줄을 이어 나왔고, 또 점차로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관직으로 현달(顯達)하는 사람까지 나오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그 지방 사람들이 공을 마치 부모처럼 떠받들어 사랑하는 마음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줄어들지 않는 가운데, 급기야는 공의 사당을 세워 향사(享祀)하며 그 은혜에 보답하려고 한 것이다. 이에 공의 4대손인 지금의 이판공(吏判公)이 이 일과 관련하여 나에게 한마디 말을 부탁하기에, 내가 기꺼이 수락하면서 공경하는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경헌공이야말로 왕자(王者)를 보좌하여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이룰 수 있는 인재라고 말할 수 있다. 옛사람 가운데 왕자를 보좌할 학문에 종사한 사람이 있는데, 맹자(孟子)가 바로 그 사람이다. 지금도 그 책이 남아 있어서 책장만 넘기면 그의 주장을 알아볼 수가 있는데, 그가 말할 때마다 으레 이야기하는 내용을 들어 보면, 그저 선왕(先王)의 정사를 회복하자는 것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그런데 그 선왕의 정사라고 하는 것도 원래 높고 멀어서 행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라, 예컨대 “살아 있는 사람을 먹여 길러 주고, 죽은 사람을 장사 지내는 데에 유감이 없게 하는 것이, 바로 왕도의 시작이다.[使民養生喪死無憾 王道之始]”라고 하는 것이고, 그런 다음에 “학교의 교육을 엄하게 실시하여 효성과 우애의 뜻을 되풀이해서 가르친다.[謹庠序之敎 申之以孝悌之義]”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목적도 알고 보면 정미(精微)해서 알기 어려운 도(道)를 터득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요, 다만 “머리털이 반백이 된 사람이 길에서 짐을 지거나 이고 다니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頒白者 不負戴於道路]”라고 하는 것이다.
또 그 책의 뒷부분을 들추다 보면 “도라는 것은 가까운 데에 있는데도 그것을 멀리서 찾으려 하고, 해야 할 일은 쉬운 데에 있는데도 그것을 어려운 데에서 찾으려고 한다. 사람들마다 자기 어버이를 어버이로 제대로 섬기고 자기 어른을 어른으로 제대로 받들기만 한다면 천하가 태평해질 것이다.[道在邇而求諸遠 事在易而求諸難 人人親其親長其長而天下平]”라는 내용이 나오고, 다시 그 앞부분을 들추다 보면 “어질면서도 자기 어버이를 버리는 자는 있지 않았고, 의로우면서도 자기 임금을 뒤로 돌리는 자는 있지 않았다.[未有仁而遺其親者也 未有義而後其君者也]”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 본다면, 자기 어버이를 어버이로 섬기고 자기 어른을 어른으로 받들도록 가르쳐서, 백성들이 윗사람을 어버이처럼 친근하게 여겨 어른을 위해서 죽을 수 있도록 교화시키는 것[親上死長]이야말로, 변방 백성들에게 우선 먼저 베풀어야 할 절실하고도 충분한 대책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어리석은 나의 소견으로도, 경헌공이 함경도에서 행한 정사는 참으로 당면한 급선무를 알았다고 할 것이요, 함경도 사람들이 공을 위해서 사당을 세운 일 역시 참으로 뒤에 부임하는 감사들을 권면하기에 충분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역사책을 상고해 보니, 문간공(文簡公) 김종직(金宗直)이 성묘(成廟)에게 “이모(李某)의 사람됨을 보건대 재상(宰相)의 체모를 얻었다고 할 것입니다. 그가 함경도에서 학교를 일으켜 인재를 양성한 결과 지금도 과거에 급제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라고 아뢴 내용이 눈에 띄었다. 대저 문간공과 같은 유선(儒先)도 재상의 체모를 얻었다고 일컬었고 보면, 이 역시 왕자(王者)를 보좌할 인재로 인정한 것이 어찌 아니겠는가.
다만 과거에 급제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 것을 가지고 인재를 양성한 효과로 인용한 것을 두고, 그 도(道)가 이렇게 작을 수 있느냐고 의심할 수는 있을 법하다. 그렇긴 하지만 《예기(禮記)》의 학기(學記)에도 “조그마한 기예라도 성취하면서 흥미를 느끼게 하지 못한다면, 즐거운 마음으로 학문의 길에 나아가게 할 수가 없다.[不興其藝 不能樂學]”는 말이 나오니, 이러한 점은 삼대(三代)의 학교에서도 원래 생략할 수 없었던 것을 알 수가 있고, 준사(俊士)와 조사(造士)를 사도(司徒)와 사마(司馬)에게 천거하는 내용을 또 논하고 있고 보면, 이는 또한 주(周)나라 때부터 이루어진 제도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단지 고금(古今)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로서 꼭 같을 수는 없다고 할 것이니, 내 생각으로는 경헌공의 그 정사 역시 옛 시대와 비교해서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공의 행장(行狀)을 또 얻어서 살펴보건대, 일찍이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를 가지고 수 강원도 관찰사(守江原道觀察使)로 나갔을 적에, 구황 정책(救荒政策)을 잘 행해서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로 오른 가운데 백성들의 청원으로 임기를 넘겨 1년 동안이나 더 머무르기도 하였는데, 그 뒤에 상이 내전(內殿)으로 공을 불러 만나 보고는 강원도 한 지방을 아예 공에게 위임하여 편의종사(便宜從事)하게 하는 은혜를 내리려고까지 하였다. 그러고 나서 얼마 뒤에는 평안도에 유민(流民)이 많이 발생하자 그 지방에 가서 순무(巡撫)하라는 명을 받고 가의대부(嘉義大夫)의 품계로 올랐으며, 서두(序頭)에서 언급한 바 함경도에서 행한 공의 정사가 조정에 보고된 뒤에는 또 평안도 관찰사로 임명되었는데, 몇 개월이 지나는 사이에 감옥에 죄수가 없게 되었다는 보고가 올라가자 또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하였다고 한다.
공은 또 평양(平壤) 감영(監營)에 귀후소(歸厚所)를 설치하여 관곽(棺槨) 등을 많이 갖추어 놓고는 공사(公私) 간에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내가 일찍이 이 제도가 원래 만들어지게 된 아름다운 그 뜻을 찬탄하면서, 이는 그야말로 왕도(王道)를 실현하기 위한 첫 번째 사업으로서 백성들이 죽은 사람을 장사 지내는 데에 아무런 유감이 없게끔 하는 실질적인 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지방에 귀후소가 설치된 것이 바로 공의 시대부터 시작되었다는 말을 또한 이를 통해서 충분히 확인할 수가 있었다. 그러고 보면 경헌공은 실제로 왕자(王者)를 보좌할 수 있는 기량을 갖추고서 그런 사업을 추진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근실하게 쌓은 업적이 이처럼 아름답게 드러났는데도 불구하고, 생전에는 그저 병조 판서(兵曹判書)의 직위 정도로 만족해야 했고, 정헌대부(正憲大夫)의 품계도 죽은 뒤에야 미치게 되었고 보면, 군자가 조물자에 대해서 혐의를 두지 않을 수가 없을 듯도 하다.
그렇긴 하지만 이판공(吏判公)과 모관(某官)으로 있는 그의 아우가 모두 세신(世臣)의 명경(名卿)으로서, 왕자를 보좌하려고 한 선조의 뜻과 사업을 장차 이어받으려 하고 있다. 그리하여 옛날의 방백(方伯)이요 연수(連帥)라 할 관찰사(觀察使)와 절도사(節度使)의 직책과 관련하여, 두 분 중에 한 분은 벌써 넉넉하게 촉망을 받고 있고, 또 한 분은 차례로 재질을 발휘하면서 끝없이 발전하고 있는 중이다. 지금 국가의 안위(安危)를 생각할 때 가장 급선무로 여겨야 할 일은 바로 세 방면의 변방에 관한 일이라고 할 것인데, 임금이 돌아보며 근심하는 걱정을 계속 끼치고 있으므로 식자들이 한심하게 여기고 있는 터이다. 그러니 두 분의 입장에서 볼 때, 선조인 경헌공의 아름다운 공적을 완수하기 위해서라도 어찌 그 책임을 자신이 떠맡지 않을 수 있겠으며, 큰 계책을 세워 동참할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아, 단혈(丹穴)에서 나오는 봉황의 어린 새끼는 하나의 터럭만으로도 상서로운 세상을 표상하고, 소를 통째로 집어삼킬 기상을 지닌 범의 어린 새끼는 안개를 헤치고 나올 적에 모두 아름다운 반점(斑點)을 보여 주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판공의 윤자(胤子)인 응교군(應敎君) 역시 이 시대의 총애받는 학사(學士)로서, 변방을 안정시킬 계책을 글로 올려 이미 자신의 빼어난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한 데다 지금은 또 조정의 의논을 가지고 해상(海上)에 사신으로 나갔으니, 돌아와서는 반드시 임금의 뜻에 걸맞게 복명(復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경헌공에게 바람직한 후계자가 끝없이 나와 왕자를 보좌할 인재라는 말이 무색해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내가 재삼 확인하면서, 이씨(李氏)들이 진정 대를 이어서 이 학문을 가업으로 이어 가리라고 감히 단언하는 바이다.
사당이 예전에 함경도의 중심지인 영흥(永興)과 안변(安邊) 등지에 세워져 있었으니, 이는 본도가 영안도(永安道)로 일컬어지던 때의 일이다. 그러다가 시대 상황이 급변하면서 병화(兵火)를 두 번이나 당하는 바람에 중간에 없어지는 화를 면하지 못하였다. 이에 그 지방의 사자(士子)들이 문헌(文獻)의 고장임을 입증할 길이 없어진 것을 통분스럽게 여긴 나머지, 서로 꾀하지 않고도 같은 마음이 되어 자재를 모으고 힘을 합쳐 함흥(咸興) 문회당(文會堂) 동쪽에 중건을 하고는, 그동안 소홀해졌던 의례(儀禮)를 행할 방도를 더욱 강구하고 있으니, 참으로 가상한 일이다.
최립은 삼가 절하고 이 글을 적는다.
[주-D001] 예컨대 …… 것이다 : 《맹자(孟子)》 양혜왕 상(梁惠王上)에 위의 내용이 모두 수록되어 있다.[주-D002] 또 …… 나온다 : 앞의 인용문은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나오고, 뒤의 인용문은 양혜왕 상에 나온다.[주-D003] 자기 어버이를 …… 것 : 《맹자》 양혜왕 하(梁惠王下)에, “임금께서 인정을 행하시면 백성들이 윗사람을 친근하게 여기면서 자기 어른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게 될 것이다.[君行仁政 斯民親其上 死其長矣]라는 말이 보인다.[주-D004] 준사(俊士)와 …… 내용 : 주(周)나라의 학제(學制)를 설명한 대목 중에 나오는 내용인데, 《예기(禮記)》 왕제(王制)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향학(鄕學)에서 사도(司徒)에게 천거된 뒤에 다시 국학(國學)으로 천거되어 오르는 자를 준사(俊士)라고 하고, 그중에서 학업이 뛰어나 사마(司馬)에게 천거된 뒤에 장차 등용될 자를 조사(造士)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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星湖先生全集卷之六十二 / 墓碣銘 / 八世祖妣貞夫人烏川鄭氏墓碣銘
烏川之鄭。傳代旣遠。有卓曾祖。厥號圃隱。宗誠及保。兩世其名。于歸李氏。系出驪城。諱曰繼孫。大司馬位。有子之任。餘出繼妣。五世彌顯。貳相尙毅。秋峴南岡。銘石示裔。
李尙毅 1560 1624 驪州 而遠 少陵, 五湖, 西山, 巴陵 翼獻 驪興府院君
차천로(車天輅) 1556년(명종 11)~1615년(광해군 7)
五山集卷之一 延城車天輅復元著 / 詩○七言古詩
敬憲公祠宇詩 爲吏部李尙書作
鐵嶺之外古朔方。靺鞨鄕連肅愼氏。天傾西北白頭山。地限華夷黑龍水。鳥道幾層劍閣重。鯨海一邊暘谷邇。分州政得二十餘。去國相懸數千里。俗參蠻貊事弓刀。民雜羯夷略文字。朝廷幸借敬憲公。棨戟初爲觀察使。謂言漢祖豐沛邑。乃是周家岐豳地。名敎尤宜重庠序。詩書耐可化窳啙。傳稱不學卽將落。聖曰有敎元無類。掄簡還收子弟員。聚辨盡作衣冠士。藏修遊息豈無所。切磋琢磨良有以。麗澤渾如蛾子述。入學爭厲皷篋志。坐令聾瞽旋鑿開。竟使螟蛉式穀似。適越非關章甫資。遊雎咸善藻繢事。柳民樂承子厚經。潮士敬服昌黎義。從此遷喬北方學。庶幾矯翼南溟徙。聯翩點額望風雷。取次明經拾靑紫。易俗由來先以身。牗民不啻若提耳。也知公是千人豪。非但才堪一方吏。德宇何曾有町畦。度量不敢窺涯涘。紫燕騄駬凡馬空。大呂黃鍾八音始。足踐台斗未爲榮。器合廟堂方可倚。自公一去雪山輕。此邦千秋景行止。爲立仁祠俎豆之。若見英靈陟降只。甘棠長切召伯思。峴首幾墮羊公淚。宸心寵奬有哀贈。詞伯揄揚非溢美。遺廟應難覔兵燹。餘烈唯看在人誄。先生五世澤不斬。後死幾多思未已。掲虔聊且卜龜食。結構不爲如鳥跂。高名直與白日懸。盛德眞堪百世祀。文翁守蜀尙儒化。常袞鎭閩斆書史。成就馬卿擅文章。導廸歐生奮泥滓。至今偉績不可泯。從古高人乃如此。不有君子能戩穀。豈得遐荒識義理。西巴廟食尙巍然。北土祠宇寧徒爾。德聲不廢三淸流。仁聞兼將白雲比。何况公後盛簪纓。所以卿材多杞榟。天官尙書玄曾孫。地望雅量英雄弭。見啣儐命來鴨塞。欲把歌聲傳繭紙。廣求作者映當時。何意散才蒙不鄙。非緣一日始登龍。定謂十年曾附驥。依紅縱未得泛綠。拜塵亦從頻望履。祗限言語少葳蕤。却愧文詞甚骫骳。把筆那知右手枯。被酒詎信雄心死。良由盛意未可孤。莫怪曼辭無所擬。敢言明月闇投人。獨向長風吐豪氣。
오산집 제1권 / 칠언고시(七言古詩)
경헌공(敬憲公)의 사당(祠堂)에 쓴 시 이부(吏部)의 이 상서(李尙書)를 위하여 지었다.
철령 너머는 고대의 삭방이고 / 鐵嶺之外古朔方
말갈의 고장이 숙신씨와 연달았지 / 靺鞨鄕連肅愼氏
하늘은 서북쪽 백두산으로 기울었고 / 天傾西北白頭山
지역은 흑룡강이 중국 조선 갈라놨지 / 地限華夷黑龍水
몇 층의 험한 길은 검각보다 심하고 / 鳥道幾層劍閣重
바다의 한쪽 가는 양곡과 가깝다네 / 鯨海一邊暘谷邇
분할한 고을은 이십여 개 되었고 / 分州政得二十餘
국도와 수천 리나 떨어져 있었지 / 去國相懸數千里
풍속은 만맥 답습 활과 칼 익히었고 / 俗參蠻貊事弓刀
백성은 말갈 혼합 문자가 서툴렀지 / 民雜羯夷略文字
조정에서 다행히 경헌공을 임명하니 / 朝廷幸借敬憲公
계극 따라 처음에 관찰사로 부임했지 / 棨戟初爲觀察使
비유하면 한 고조의 풍패와 같고 / 謂言漢祖豐沛邑
주나라의 기빈과 같다고 하겠지 / 乃是周家岐豳地
유교는 더욱더 학교를 중시하니 / 名敎尤宜重庠序
시서가 게으름을 변화시키고 말았지 / 詩書耐可化窳啙
경전엔 안 배우면 떨어진다 말하였고 / 傳稱不學卽將落
성인은 가르치면 부류 없다 말하였지 / 聖曰有敎元無類
자제들을 선발하여 한곳에다 모아 놓고 / 掄簡還收子弟員
각자 재질 분변하여 모두 선비 만들었지 / 聚辨盡作衣冠士
배우고 휴식할 그 장소가 없겠는가 / 藏修遊息豈無所
갈고닦는 그 이유가 정말로 있으이 / 切磋琢磨良有以
벗들과는 개미처럼 수시로 학습하고 / 麗澤渾如蛾子述
입학하자 앞다투어 고협 뜻 다지었지 / 入學爭厲鼓篋志
앉아서 귀와 눈을 트이게 하더니 / 坐令聾瞽旋鑿開
결국엔 무뢰배가 어진 이로 변했지 / 竟使螟蛉式穀似
월에 가서 장보관 판 것과 관계없고 / 適越非關章甫資
수에 놀아 자수를 모두 다 잘하였지 / 遊睢咸善藻繢事
유주 백성 자후의 교육을 좋아했고 / 柳民樂承子厚經
조주 선비 창려의 의리에 감복했지 / 潮士敬服昌黎義
이때부터 북방의 학문이 높아지니 / 從此遷喬北方學
나래 펴고 남해로 떠날 수 있었지 / 庶幾矯翼南溟徙
줄줄이 폭포 향해 이마를 부딪히다 / 聯翩點額望風雷
명경과에 이르러 합격 쉽게 하였지 / 取次明經拾靑紫
자신 먼저 실행하여 풍속을 바꾸니 / 易俗由來先以身
백성을 너무나도 간절하게 지도했지 / 牖民不啻若提耳
알겠으이 공은 바로 천명 중 호걸이라 / 也知公是千人豪
겨우 일방 감당할 관리 재목 아니로세 / 非但才堪一方吏
인품은 너 나를 가린 적이 없었고 / 德宇何曾有町畦
도량은 그 한계를 엿볼 수 없었지 / 度量不敢窺涯涘
자연 녹이 다 뽑히니 보통 말만 남았고 / 紫燕騄駬凡馬空
대려 황종 연주되니 팔음이 시작됐지 / 大呂黃鍾八音始
고관대작 올라가도 영광으로 안 여기니 / 足踐台斗未爲榮
묘당에 앉을 그릇이면 의지할 수 있었겠지 / 器合廟堂方可倚
공 한번 떠나자 설산이 경해지니 / 自公一去雪山輕
그 고장 천추토록 우러러 추모했지 / 此邦千秋景行止
공을 위해 사당 세워 제사를 지내니 / 爲立仁祠俎豆之
영령이 강림한 것 보이는 듯했었지 / 若見英靈陟降只
감당에선 언제나 소백 생각 간절했고 / 甘棠長切召伯思
현산에선 수없이 양공 위해 흐느꼈지 / 峴首幾墮羊公淚
사후에 임금이 추증하여 권장하니 / 宸心寵奬有哀贈
사백이 찬양한 바 과장되지 않았지 / 詞伯揄揚非溢美
전란 끝에 사당을 찾아볼 수 없었으나 / 遺廟應難覓兵燹
남은 공덕 사람들의 애도문에 보이었지 / 餘烈唯看在人誄
선생 은택 오세 동안 끊기지 않으니 / 先生五世澤不斬
후생들 사모함이 오랫동안 마지않네 / 後死幾多思未已
사당터를 잡으려고 거북점을 쳤지만 / 揭虔聊且卜龜食
건물은 새 날듯이 드높이 안 지었지 / 結構不爲如鳥跂
고명이 곧바로 태양처럼 드날리니 / 高名直與白日懸
그 성덕 정말로 백세 제사 감이었지 / 盛德眞堪百世祀
문옹은 촉에 가서 선비 교화 펼치었고 / 文翁守蜀尙儒化
상곤은 민에 가서 경서 사기 가르치니 / 常袞鎭閩斅書史
마경은 성취되어 문장으로 이름났고 / 成就馬卿擅文章
구생은 지도받아 진흙탕서 벗어났지 / 導迪歐生奮泥滓
위대한 업적이 지금까지 전해지니 / 至今偉績不可泯
예로부터 고명한 이 그렇게 하였지 / 從古高人乃如此
선으로 이끌었던 군자가 없었다면 / 不有君子能戩穀
변방에서 어떻게 의리를 알았겠나 / 豈得遐荒識義理
서파에는 사당이 아직도 드높은데 / 西巴廟食尙巍然
북변의 사당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 北土祠宇寧徒爾
덕망이 안 없어져 삼청까지 퍼지었고 / 德聲不廢三淸流
어진 소문 같이 나 백운에 비유됐지 / 仁聞兼將白雲比
더구나 공의 후손 벼슬아치 많으니 / 何況公後盛簪纓
이게 바로 경재에 기재가 많은거지 / 所以卿材多杞榟
현손과 증손이 이조 판서 지내니 / 天官尙書玄曾孫
명망과 아량으로 영웅이 복종했지 / 地望雅量英雄弭
접반사 하명받아 압록강에 나왔다가 / 見銜儐命來鴨塞
노래 지어 종이에다 전하려고 하였지 / 欲把歌聲傳繭紙
작자를 널리 찾아 그때를 빛낼 일에 / 廣求作者映當時
나 같은 둔재가 선발될지 몰랐었지 / 何意散才蒙不鄙
하루아침 용문에 올라간 것 아니라 / 非緣一日始登龍
일찍이 십 년 전에 천리마에 붙었지 / 定謂十年曾附驥
붉은 등불 아래서 술 마시진 못했으나 / 依紅縱未得泛綠
수레 티끌 절할 때 여러 번 바라봤지 / 拜塵亦從頻望履
한스럽게 언어가 미려하지 않은 데다 / 秖恨言語少葳蕤
문장마저 너무나 껄끄러워 부끄럽네 / 却愧文詞甚骪骳
집필하자 오른손 힘없는 것 몰랐었고 / 把筆那知右手枯
술기 돌자 웅심이 죽은 걸 못 느꼈지 / 被酒詎信雄心死
성의를 저버릴 수 없어서 쓴 것이니 / 良由盛意未可孤
찬사가 비유할 데 없다고 괴이 말게 / 莫怪曼辭無所擬
사람 몰래 명월주를 던졌다고 말하겠나 / 敢言明月闇投人
내 혼자 바람 향해 호기를 토해 냈지 / 獨向長風吐豪氣
[주-D001] 경헌공(敬憲公) : 조선 초기 문신 이계손(李繼孫, 1423~1484)의 시호이다.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인지(引之)이다. 1469년(예종1)에 함길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뒷수습하고 학문을 진흥시켰다. 원문 주의 이 상서(李尙書)는 5대손인 이상의(李尙毅)인 듯하다.[주-D002] 철령 …… 삭방 : 철령은 안변(安邊) 이북의 지대이고 삭방은 북부 지방이다.[주-D003] 말갈(靺羯)의 …… 연달았지 : 말갈은 퉁구스계의 한 부족이다. 삼한(三韓) 시대에 생긴 이름으로 시베리아, 만주 북동 지방, 함경도에 걸쳐 살면서 속말(粟末)ㆍ백돌(伯咄)ㆍ안거골(安車骨)ㆍ불열(拂涅)ㆍ호실(號室)ㆍ흑수(黑水)ㆍ백산(白山) 등의 7개 부족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숙신(肅愼)은 고조선(古朝鮮) 때 만주 동북 지방에서 수렵 생활을 하던 퉁구스족이다.[주-D004] 검각(劍閣) : 잔교 이름이다. 지금 사천성(四川省) 검각현(劍閣縣) 동북쪽 대검산(大劍山)과 소검산(小劍山) 사이에 있는데, 제갈량(諸葛亮)이 설치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는 천협(川陜) 사이의 주요한 통로로서 군사적 요새지이다. 《元和郡縣志 劍閣道》[주-D005] 양곡(暘谷) : 해가 뜨는 곳을 말한다. 《書經 堯典》[주-D006] 계극(棨戟) : 붉은 비단으로 싼 나무창인데, 고대에 관리들이 사용한 의장으로서 출행할 적에 앞에서 길을 인도하였고 후세에도 문 앞에 세워 놓았다.[주-D007] 한 고조(漢高祖)의 풍패(豐沛) : 한 고조가 패현(沛縣) 풍읍(豐邑) 사람이었으므로 풍패를 왕자(王者)의 고향으로 비유한다. 여기서는 함경도 지역이 조선 태조의 고향임을 말한 것이다.[주-D008] 주나라의 기빈(岐豳) : 기산(岐山)과 빈(豳)인데, 모두 주나라가 천자국이 되기 전에 기반을 다졌던 지역이다. 여기서는 함경도 지역이 조선의 발상지임을 말한 것이다.[주-D009] 경전엔 …… 말하였고 : 《춘추좌씨전》 소공 5년 조에 “학문하는 것은 마치 싹이 자라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배우지 않으면 싹처럼 곧바로 말라서 떨어진다.” 하였다.[주-D010] 성인은 …… 말하였지 :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가르치면 부류가 없어진다.”라고 하였는데, 그 주에 “사람의 성품이 모두 선하지만 선한 부류와 악한 부류의 차이가 있는 것은 습관에 물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르치면 사람들이 모두 선으로 돌아가 다시금 악한 부류를 논할 것이 없게 된다.”라고 하였다.[주-D011] 벗들과는 …… 학습하고 : 고서(古書)에 말하기를 “개미들이 수시로 진흙을 물어 나르는 것을 학습해야만 큰 개밋둑을 이룰 수 있다.”라고 하였다. 《禮記 學記》[주-D012] 입학하자 …… 다지었지 : 고협(鼓篋)은 북을 친 다음에 책 상자를 여는 것인데, 옛날 입학할 때 치르는 일종의 의식이다. 《예기》 〈학기(學記)〉에 “먼저 북을 쳐서 학생을 소집한 뒤에 책 상자를 여는 것은 학생으로 하여금 학업을 대할 적에 공순히 하도록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주-D013] 월(越)에 …… 관계없고 : 장보관(章甫冠)은 선비가 쓰는 모자이다. 송(宋)나라 사람이 장보관을 장사 밑천으로 삼아 월나라로 갔더니 월나라 사람들은 머리를 깎고 문신을 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莊子 逍遙遊》[주-D014] 수(睢)에 …… 잘하였지 : 진림(陳琳)이 조홍(曹洪)을 위해 위 문제(魏文帝)에게 보낸 편지에 “고당(高唐)을 지나간 사람은 왕표(王豹)의 노래를 본받고 수환(睢渙)에 노니는 사람은 자수를 배운다.”라고 하였다.[주-D015] 유주(柳州) …… 좋아했고 : 자후(子厚)는 유종원(柳宗元)의 자인데, 유주 자사(柳州刺史)를 지냈다. 한유(韓愈)가 지은 〈유자후묘지명(柳子厚墓誌銘)〉에 “형상(衡湘) 이남에서 진사(進士)가 된 사람은 모두 자후를 스승으로 삼았다. 자후의 강론과 가르침을 받아 문장을 지은 사람은 모두 법도가 있어 볼만하였다.”라고 하였다.[주-D016] 조주(潮州) …… 감복했지 : 창려(昌黎)는 당(唐)나라 문장(文章)의 대가(大家)인 한유(韓愈)이다. 그가 일찍이 조주 자사(潮州刺史)로 부임하였을 적에 악어(鰐魚)가 나타나 사람과 가축에 해를 끼치자 〈악어문(鰐魚文)〉을 지어 제사를 지내면서 타일렀는데, 악어가 자취를 감추니, 백성들이 모두 감복하였다. 《舊唐書 卷160 韓愈列傳》[주-D017] 줄줄이 …… 부딪히다 : 이는 잉어가 용문(龍門)을 올라가려고 도약하다가 석벽(石壁)에 이마를 찧는 것을 말한다. 《수경주(水經注)》 〈하수(河水) 4〉에 “다랑어가 공혈(鞏穴)에서 나와 3월이 되면 용문으로 뛰어오르는데, 올라가면 용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이마만 찧고 돌아온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는데, 후세에 이마를 찧는 것을 낙방한 것에다 비유하였다.[주-D018] 대려(大呂) …… 시작됐지 : 대려와 황종(黃鍾)은 십이음(十二音)의 악률(樂律)인 육률(六律)과 육려(六呂)의 첫 번째 것인데, 육률은 황종ㆍ태주(太簇)ㆍ고선(姑洗)ㆍ유빈(蕤賓)ㆍ이칙(夷則)ㆍ무역(無射)이고 육려는 대려ㆍ협종(夾鍾)ㆍ중려(仲呂)ㆍ임종(林鍾)ㆍ남려(南呂)ㆍ응종(應鍾)이다. 팔음(八音)은 금(金 종(鐘))ㆍ석(石 경(磬))ㆍ사(絲 현(絃))ㆍ죽(竹 관(管))ㆍ포(匏 생(笙))ㆍ토(土 훈(壎))ㆍ혁(革 고(鼓))ㆍ목(木 축어(柷敔))이다.[주-D019] 설산(雪山)이 경해지니 : 경헌공(敬憲公)이 떠나자 북변의 위상이 가벼워졌다는 것이다. 두보(杜甫)의 〈증좌복야정국공엄공무(贈左僕射鄭國公嚴公武)〉에 “공이 오자 설산이 중해지고 공이 떠나자 설산이 경해졌네.〔公來雪山重 公去雪山輕〕”라고 한 데에서 유래한다.[주-D020] 감당(甘棠)에선 …… 간절했고 : 주(周)나라 문왕(文王) 때 남국(南國)의 백성들이 소백(召伯)의 선정(善政)에 감사하는 뜻에서 그가 머물고 쉬었던 감당나무를 소중히 여겨서 “무성한 감당나무를 자르지도 말고 베지도 말라. 소백께서 그 그늘에 쉬셨던 곳이니라.〔蔽芾甘棠 勿剪勿伐 召伯所茇〕”라고 노래하였다 한다. 《詩經 甘棠》[주-D021] 현산(峴山)에선 …… 흐느꼈지 : 진(晉)나라 양호(羊祜)가 양양(襄陽)에 주둔하여 덕을 베풀었기에, 그가 죽은 뒤에 현산의 그가 생전에 노닐던 곳에다 백성들이 비석을 세웠는데, 그 비석을 보는 사람들은 모두 그를 사모하는 마음에서 눈물을 흘렸으므로 두예(杜預)가 그 비석의 이름을 타루비(墮淚碑)로 붙였다. 《晉書 卷34 羊祜列傳》[주-D022] 문옹(文翁)은 …… 펼치었고 : 한(漢)나라 경제(景帝) 말엽에 문옹이 촉군 태수(蜀郡太守)가 되어 관리들 가운데 재주가 있는 자를 선발하여 장안(長安)에 유학을 보내고 학업을 마친 자를 중용하였으며, 또 성도(成都)의 시중에다 학교를 지어 놓고 입학하는 사람은 부역을 면제해 주고 성적이 우수한 사람은 고을의 관리로 삼았다. 이로 인해 촉군의 문풍(文風)이 크게 진작되어 교화가 흥기하였다. 《漢書 卷89 循吏傳》[주-D023] 상곤(常袞)은 …… 가르치니 : 상곤은 당(唐)나라 덕종(德宗) 때 사람으로, 즉위하자 조주 자사(潮州刺史)로 좌천되었다가 건중(建中) 초기에 복건 관찰사(福建觀察使)가 되었는데, 그때 민(閩) 지역의 사람들이 학문을 몰랐으므로 상곤이 향교(鄕校)를 설립하여 가르치자 문풍(文風)이 비로소 진작되었다. 《懷麓堂集 卷67》[주-D024] 마경(馬卿)은 …… 이름났고 : 마경은 사마상여(司馬相如)인데, 촉(蜀)의 성도(成都) 사람으로 자는 장경(長卿)이다. 한 무제(漢武帝)에게 부(賦)를 지어 바쳐 벼슬을 받을 정도로 문장에 능하였다. 《史記 卷117 司馬相如列傳》[주-D025] 구생(歐生)은 …… 벗어났지 : 구생은 구양첨(歐陽詹)이다. 《회록당집(懷麓堂集)》 권67에 “민(閩) 지역은 진한(秦漢) 이래로 사서에 드러난 사람이 없었다. 당(唐)나라 상곤(常袞)이 그곳의 관찰사(觀察使)로 부임하여 비로소 문학을 가르치자 구양첨 같은 무리들이 비로소 진사(進士)가 되었다.”라고 하였다.[주-D026] 경재(卿材)에 기재(杞榟)가 많은거지 : 훌륭한 선조 밑에 훌륭한 자손이 많이 나온다는 뜻이다. 초(楚)나라 영윤(令尹) 굴건(屈建)이 귀생(歸生)에게 묻기를 “진(晉)나라 대부(大夫)와 초나라 대부를 비교할 경우에는 어느 쪽이 더 훌륭한가?”라고 하니, 귀생이 대답하기를 “진나라의 경(卿)은 초나라 경보다 못하다. 초나라 대부는 훌륭한 재목이 매우 많아 전부가 경의 재목이다. 이는 마치 기재와 피혁(皮革)이 초나라에서 보급되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春秋左氏傳 襄公5年》[주-D027] 용문(龍門)에 올라간 것 : 유명한 사람에게 접대를 받고 칭찬을 받아 자신의 가치가 높아진 것을 비유한 말이다. 《후한서》 권6 〈이응열전(李膺列傳)〉에 “이응이 자신의 기풍을 홀로 간직하고 명성으로 자신을 높였으므로 그의 접대를 받은 사람을 용문에 올랐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주-D028] 천리마에 붙었지 : 다른 사람을 의지해 명성을 이룩하였다는 뜻이다. 《사기(史記)》 권61 〈백이열전(伯夷列傳)〉에 “안연(顔淵)이 비록 학문에 독실하였으나 공자(孔子)라는 천리마의 꼬리에 붙어서 가는 바람에 더욱 이름이 드러났다.”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주-D029] 수레 …… 때 : 고귀한 사람을 전송하는 것을 말한다. 진(晉)나라 때 반악(潘岳)과 석숭(石崇)이 가밀(賈謐)이 나가는 것을 기다렸다가 수레의 티끌을 바라보고 절을 하며 전송하였다. 《晉書 卷55 潘岳列傳》[주-D030] 사람 …… 던졌다 : 《사기》 권83 〈추양열전(鄒陽列傳)〉에 “신은 들으니, 명월주나 야광벽(夜光璧)을 행인의 앞에다 몰래 던질 경우 누구나 막론하고 칼을 뽑아 들고 노려본다고 하는데, 이는 이유 없이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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