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일련정종이 그렇게 좋은 종지(宗旨)라면
왜 사회 사람들에게 널리 수용되지 않는가? ☞음성으로듣기☜
질문의 내용은 여러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렇게 좋은 종지(宗旨)라면」
① 좀 더 예전부터 널리 퍼져 있었을 것이다
② 좀 더 많은 사람이 신앙했을 것이다
③ 더 많은 학식자나 저명한 사람에게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④ 더 단기간에 퍼졌을 것이다
등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이 의문들에 대해 한데 모아 설명해 보겠습니다.
석존은 법화경(法華經)에 「이 법화경(法華經), 가장 난신난해(難信難解)하니라.」(법사품(法師品) 제10・개결(開結) 325)라 설하였는데, 법화경(法華經)은 수자의(隨自意)라 하여 중생의 기근에 구애되지 않고 부처가 깨달은 법을 그대로 설한 것으로 교의(敎義)가 심원(深遠)하기에 난신난해(難信難解)하며, 더욱이 정법(正法)을 믿을 때는 반드시 대난(大難)이나 장마(障魔)가 일어나기에 난신난해(難信難解)한 것이라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특히 말법은 중생의 기근도 사악한 시대이며 출현하신 부처도 홍통(弘通)하시는 교법(敎法)도 한층 더 선명하게 파사현정(破邪顯正)을 제일로 여기기 마련이므로 박해나 비방이 신명(身命)에 이르게 되어 홍교(弘敎)는 곤란함이 극에 달할 것이라고 석존은 예언했습니다.
석존의 예언대로 말법의 어본불 니치렌 대성인의 생애는 입정안국(立正安國)과 중생제도(衆生濟度)의 대자비(大慈悲)를 관철하셨고, 동시에 사악한 대난(大難) 장마(障魔)와의 싸움의 연속이기도 하셨습니다.
일련정종(日蓮正宗)은 니치렌 대성인의 가르침대로 법(法)의 정사(正邪)를 엄격히 구별하는 절복(折伏)의 종지(宗旨)이며, 개개 인간에게 활력을 주고 현실 생활의 향상을 설하는 종교이므로 봉건주의 시대에는 민중을 억압하여 체제 유지를 꾀하는 위정자(爲政者)로부터 탄압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련정종의 본격적인 포교는 신앙의 자유・포교의 자유가 인정된 후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절복 홍교가 진척됨에 따라 그 반동(反動)으로 갖가지 중상(中傷)과 방해도 일어났습니다. 그중에는 애써 일련정종의 이야기를 들어도 「일련정종은 신흥종교다」 「장례식 부의(賻儀)를 모두 가져가 버린다」 「아픈 사람과 가난한 사람의 모임이다」 등의 악질적인 유언비어에 현혹되거나 세간의 이목이 신경 쓰여 입신하지 못했던 사람도 많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정사(正邪)를 확실히 하는 것에 저항을 느끼는 사람, 신앙하는 것보다 노는 것이 더 즐겁다고 말하는 사람, 조석 근행이라는 말을 듣고 뒷걸음질 치는 사람 등 입신하기 힘든 사람도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와중에 인생을 진지하게 생각하여 선조(先祖)로부터 내려오던 종교를 바꾸어 일련정종에 귀의(歸依)한 것은 실로 용기 있는 일이며, 매우 힘든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련정종의 신도는 현재 일본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널리 활약하고 있습니다.
갖가지 장해(障害) 속에서 이처럼 발전한 것은 정종(正宗) 승속의 절복 홍교의 노력에 의한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무엇보다도 일련정종의 불법(佛法)이 정통(正統)이며, 어본존에게 위대한 공덕력이 엄연히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세간에는 학식자나 유력자, 저명인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이들 중에는 일련정종의 신앙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 이 종교에는 전혀 무지(無知)한 사람, 세간의 평이나 보신(保身)이 신경 쓰여 신앙할 수 없는 사람 등 다양합니다.
그러므로 학식자나 저명인이 신앙한다, 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종교의 필요성과 정사(正邪)를 판단하는 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습니다. 또 “왜 짧은 시간에 널리 퍼지지 않는 것인가”라는 점인데,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에 대공덕이 있다 해서 1년이나 2년 만에 바라는 것이 모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과거세(過去世)로부터 가지각색의 숙업(宿業)이 있어, 꽃도 때가 되지 않으면 피지 않듯이 신앙의 공덕이 개화(開化)하는 시기는 사람마다 다른 것입니다. 또한 현명한 부모는 아이가 갖고 싶어 하는 것을 말하는 대로 사주지 않는 것처럼 눈앞의 소원을 이루어주는 것만이 부처님의 자비는 아닙니다.
어떠한 경우라도 정법(正法)을 견지(堅持)하고 생명력을 발휘하여 인생을 유유히 걷는 인간으로 전환되어 가는 곳에 정법의 진실한 공덕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의 공덕은 타인의 눈으로 보아 손쉽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신앙으로 어본존의 공덕을 실천하고 체험한 사람들의 환희와 확신이, 현재 많은 사람들을 정법으로 이끌고 진실한 행복으로 향하는 인생을 걷게 하고 있습니다.
난신난해(難信難解)한 정법을 이야기하고 그 공덕의 훌륭함을 전하기 위해서는 착실한 노력과 시간을 거듭 쌓는 것이 필요함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당신이 만약 정말로 “일련정종은 사회에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라 믿고 있다면 그것은 무인식(無認識)으로 인한 오해이며, 그렇지 않으면 편견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더 많은 사람이 신앙하지 않는다면 나는 신앙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라는 의도로 모두(冒頭)의 질문을 하신 것이라면, 그것은 마치 “좀 더 많은 사람이 법률을 지키지 않는다면 나도 법률을 지킬 마음이 없다”라는 것과 같아서, 양식(良識) 있는 어른이 할 말은 아닙니다.
타인이 어떻든, 주위로부터 어떻게 평가되든, 올바른 길을 알고 있다면 확신을 갖고 스스로 매진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실로 용기 있는 사람이며 총명한 사람이라고 말해야 하겠지요.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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