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임씨(晉州任氏) 시조(始祖) 임형(任衡)의 친교인물(親交人物)
임형(任衡,1360~1428년)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전주(全州) 출생으로 초명은 충(衝)이며 호(號)는 죽곡(竹谷),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부지런하고 몸을 닦으며 충효입지하여 문충공(文忠公) 포은(圃隱) 정몽주(鄭圃隱)와 문안공(文安公) 사천(沙川) 남을진(南乙珍), 翼成公(익선공)과 방촌(厖村) 황희(黃喜)와 더불어 친교를 지내며 홍무을사(洪武乙巳)에 翼成公(황희)과 같이 급재하여 문하성이조정랑헌납(門下省吏曹正郞獻納) 벼슬을 하시고 조선조가 세워지고 얼마 후에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이라며 고향인 全州로 와서 몸을 숨기셨다가 진주 수양산로 옮겨 은거하다가 별세하였다.
諱임형(任衡)의 친교인물(親交人物)로 정몽주(鄭夢周, 1338년~1392년) 고려 경상도 영천 출생으로 본관은 연일(迎日)이고 초명은 몽란(夢蘭), 몽룡(夢龍)이며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남을진(南乙珍, 1331년~1393년) 고려 말기의 문신이자 조선초기의 인물로 1368년 의 현량과에 합격하여 참지문하부사에 이르렀으며 본관은 의령이고 호는 곡은(谷隱), 다른 아호는 병재(丙齋), 사천(沙川)이며. 시호(諡號)는 문안(文安)이다.
황희(黃喜,1363년~1452년) 고려 개경 출생으로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문신, 재상이다. 본관은 장수(長水). 초명은 수로(壽老), 자(字)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厖村)이다. 현명함과 냉철한 판단력으로 세종대왕 치세기간 중 역대 영의정 중 최장수로 18년간 영의정에 재임한 인물이다.
太祖(이성계) 登極후에 태조 이성계는 학문과 능력이 아깝다고 생각하며 황희(黃喜)를 보내 벼슬을 제의하고 여러차례 불으시되 맞침내 가지않으시니 上(임금)이 폐백을 보내고 翼成公(尨村 黃喜)이 같이 벼슬을 하자고 하며 말하기를 어디를 섬기면 임금이 아니며 어디를 부리면 백성이 아니리요 하자 임형(任衡)이 대답하기를 충신(忠臣)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이라 하시니 翼成公(황희)이 말하길 주나라 무왕은 열 번 다스리되 의가정란에 해됨이 없다하니 임형(任衡)이 가로되 백이숙재(伯夷淑齋-천만년의 거친 물결속에서도 세월을 이겨내고 변하지 않는 모습) 어찌하였는가 묻는 말에 익성공이 어쩔 수 없이 물러 가시며 글을 지어 임금이 부르지 못한 신하가 있으니 백이숙재 후에 또 한 사람이라 하였다.
고려 때 좌윤(左尹)을 지낸 諱을일(乙馹)이 부친이고 문하시중좌복사(門下侍中左僕射)를 지내고 진주군(晉州君)으로 봉해진 諱덕생(德生)이 조부이며 첨의평리(僉議評理)를 지내고 1등공신 서하군(西河君)으로 봉해진 諱자송(子松)이 증조부이다. 사후에 충정(忠貞)의 시호를 내렸으며 공이 진주(晉州) 수양산에 은거함으로써 자손들이 진주(晉州)를 관향으로 하여 진주임씨(晉州任氏) 시조로 삼고있다. 諱임형(任衡)의 墓는 전주시 완산구 정여립로 석산에 모셔져 있으며 묘소 입구에 진주임씨(晉州任氏) 후손들이 건립한 선모재(先慕齋)에서 매년 한식일에 향사를 하고 있다.
晉州任氏28世孫和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