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다발성골수종 투병으로 힘들어하실 때, 아빠의 가장 큰 문제는 늘 ‘통증’이었고, 나는 어빠의 통증이 어느 수준인지를 이해하려 무던히 노력을 했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 당시 읽었던 논문 가운데, 통증은 ‘최근’에 발생했던 ‘최악’의 통증을 기반으로 늘 그 평가기준이 달라진다는 내용이 깊게 인상에 남았다. 사람은 늘 ‘최근’의 기억을 중심으로 탐색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러므로, 아빠의 통증은, 아빠가 느꼈던 최근의 통증 가운데서 최악의 통증을 기반으로 평가기준이 상시 개편되고 있다는 사실을 얼추 추론해 볼 수 있었던 기억이 있다.
통증의 말기 국면에서 가장 약화되는 것은 감각이 아니라 비교의 체계다. 병원에서 흔히 사용하는 1–10점 스케일은, 임상적 통증의 초입에서는 유용한 분류법처럼 보이지만, 말기 국면에 접어들면 스케일의 기준이 고정되지 않은 채 붕괴한다. 환자의 통증은 더 이상 '절대적 최악'의 경험을 가리키지 않고, '최근에 경험한 최악(recent worst)'으로 재설정된다. 비교는 과거의 스케일이 아니라 최신의 스케일에 의존한다. 요컨대 통증은 감각이 아니라 시간적 인접성에 의해 측정된다.
이 재설정 과정은 통증뿐 아니라 기억과 인식 전체에 적용될 수 있다. 인간은 판단할 때 절대적 기준을 호출하지 않는다. 인간의 상상, 계획, 후회, 희망, 반성 등 대부분의 능력은 '최근성(recency)'의 변형물이다. 이는 단지 심리학적 편향이 아니라 인식론적 조건이다. 최근의 경험은 척도가 되고, 과거의 경험은 최근의 경험을 통해 재서열화된다. 따라서 상상은 무경험의 영역이라기보다 재경험(re-experiencing)의 변종이다.
이 지점에서 질문은 상상의 정의로 넘어간다. 만약 상상을 그저 과거 경험의 재생(reproduction)이라고 본다면, 인간은 항상 상상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상상이라는 이름으로 기대하는 것은 단순한 재생이 아니라 생산(production)이다. 칸트는 상상을 재생적(imaginatio reproductiva) 상상과 생산적(imaginatio productiva) 상상으로 구분했는데, 전자는 기억에 의존하며 후자는 기억의 형식을 재구성한다. 생산적 상상은 기억의 프레임을 깨는 방식의 상상이다. 그러나 문제는 생산적 상상에 도달하는 인간의 사례가 드물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항상 '나라는 서사'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아빠가 가시고 난 뒤에, 나는 아빠의 투병의 기억들와 내 간병을 기억들을 여러 방식으로 정리하는 중에 있는데, 그 과정에서 난처하게 그리고 가장 강력하게 다가오는 경험이 ‘상상의 불가능성’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다. 아니, ‘인간에게 상상은 가능한가’라고 하는 더 단순한 문제로 귀결이 될지도 모르겠다.
‘몸’이라는 매체와 ‘생각’이라는 매질을 통해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인식이, 실은, ‘최근’에 발생해던 ‘최악/최선’에 대한 기억을 기반으로 늘 재조형된다는 사실은, 달리 말해, 인간의 사고는 늘 인접한 과거를 기반으로 부풀어지거나 졸아지거나 한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인간이 ‘상상’을 한다면서 풀어내는 많은 망상과 희망, 대범한 계획과 소심한 반성 따위가, 모두 한달 혹은 한 분기 내에 ‘나’에게 일어난 일들에 소소한 반추의 결과물이나 다름이 없다는 말인 셈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지적인, 미학적인, 윤리적인 진공상태와 근접해 있는 ‘상상’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과 마주하게 되면서, 나는 ‘상상의 불가능성’ 앞에서 어찌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해 난감하였다. 상상할 수가 없다니. 아니, 상상하는 나를 구속하고 있는 나를 부숴버리지 않은 채로는 상상의 흉내도 낼 수가 없다니.
문제는 ‘나’이다. ‘나’는 경험의 저장고이자 스케일링의 수행의 agent이다. ‘나’의 지속이란 곧 경험간 비교 스케일의 지속이며, 이 지속은 상상을 재생적 상상으로 환원한다. 그러므로 상상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를 해체해야 한다. 이 해체는 자아의 소멸이 아니라 비교 스케일의 소멸이다. 비교하지 않기 위해서는 기억의 서사를 일시적으로 중단해야 하고, 서사가 중단되어야만 경험은 비교의 대상이 아니라 현상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자아의 지속성은 단단하여, 해체는 결코 의지적인 결단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여기서 바로 소공님의 토템이 등장한다. 토템은 자아를 해체시키는 도구이자 장치다. 토템은 어떤 특별한 상징이 아니라, 자아가 습관적으로 집결하는 것을 방해하고 분산시키는 기제다. 토템은 나를 분쇄하고, 분쇄된 나 위에서야 비로소 생산적 상상이 개입할 틈이 열린다. 생각하는 동물로써의 인간에게 허여된 유일한 진화적 가능성이 ‘상상’을 통한 자기발전 혹은 종족발전에 있다면,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상상’을 하기 위한 선결조건으로서의 ‘자기해체’를 공글려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자기해체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목줄을 하고 있는 개가 대문 주변을 얼쩡거릴지, 아니면 대문 바로 옆에 피어있는 민들레 주변을 얼쩡거릴지의 선택지 정도를 두고, 그 손바닥 한 장의 차이를 향해 이제 깨달았다는 둥, 드디어 계몽되었다는 둥, 하는 요상한 소리를 늘어놓게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요점은, 다시 ‘토템’이다. 부지부식간에 ‘나’를 헝클어트리고, ‘나’가 습관적으로 뭉치지 못하도록 습관적인 해찰을 유도하는 수밖에 없다.
해변의 모래와 같이 고운 형태로 풀어진 ‘나’ 위로 오가는 파도와 바람 등의 인연을 따라 무언가가 끄적여질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상상’일 것이고, 누군가를 이를 향해 ‘자유의지’라는 이름을 붙여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상상 전에 자기해체고, 자기해체 전에 토템이고, 토템전에 10번이다.
10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