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신 숲의 전설
(사진 1/1) 영강변의 영신 숲, 산책길이다. 이 길로 죽 가면 「영강체육공원」이 나온다. (2020.7.7.화)
용머리와 이공린의 꿈 이야기가 난 김에 문경시의 「영신 숲」에 대한 전설을 소개한다. 이 전설에도 용이 나오고 꿈이 나온다. 영신 숲은 영강潁江 변에 있는 공원으로 영순면으로 가는 길에 있다. 사람들이 「영신 숲」이라고 말해도, 「영순 숲」을 잘 못 말하는 줄 알았다. 「영강체육공원」이 있어 더 그랬다. 어느 날 「영강체육공원」에서 「영신공원」쪽으로 가다보니까 간판에 「영신 숲」이라고 되어 있었다. ‘이거 뭐 잘못 된 거 아닌가? 이상하네,’ 하고 생각했다. 알고 보니 「영신 숲」이 맞았다. 영신 숲에 대한 전설이 있어서 그렇게 명명한 것을 알게 됐다. 짤막한 전설에 군살을 좀 붙여 이야기를 풀어 가면 이렇다.
영신에는 신비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영신도령과 영신들에 관한 전설로,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이야기는 자못 흥미롭다. 옛날 ‘미지니’ 란 마을에 최 씨라는 아주 큰 부자가 살고 있었는데, 그 부잣집에 「영신」이라는 머슴이 살고 있었다. 그는 얼굴이 못생기고 무식했지만 성실하고 힘이 세서 한 때는 상주까지 소문이 나기도 했던 인물이었다.
그가 어느 여름밤, 곤히 잠을 자고 있을 때였다. 향긋한 바람이 이는가 싶더니 미모의 여성이 홀연히 나타나 자기에게 오더니 납죽 엎드려 절을 하는 게 아닌가. 비록 꿈이었지만 깜짝 놀랐고, 어찌할 바를 몰라 벌떡 일어나 반듯이 좌정을 했다.
그렇게 당황하고 있을 때, 미모의 여인이 살포시 고개를 들며 말하길, “소녀의 청을 들어주시면 저도 영신 총각의 소원을 풀어 드리겠사옵니다.” 했다. 그녀의 속삭임은 더 없이 감미로웠고 마치 주문처럼 들렸다. 입을 뗄 때마다 형언할 수 없는 향기가 총각의 주위를 감돌았다. 그녀의 뽀얀 얼굴과 아리따운 자태에 빠져 그는 한참을 멍한 채로 눈만 껌뻑거렸다.
도대체 이게 무슨 조화란 말인가. 세상에 이런 일도 다 있나, 정신이 혼미했다. 내가 이래면 안 되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이 말이 아니었다. 마음을 녹이는 애절한 노랫소리였다. 게다가 미모의 소원이라,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나. 그녀가 제안하는 것에 찬밥 더운밥을 가릴 새도 없었다. 한 마디로, ‘이게 웬 떡이냐?’ 였다. 덮어놓고 “좋다” 하고 흔쾌히 수락을 해버렸다. 머슴 주제에 이런 미모를 어디서 볼 것이며, 나 같은 머슴에게 부탁을 해? 꿈도 이런 꿈은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혹시나 박시나, 자기와 결혼이나 해 줄까, 아니면 머슴이라도 벗어나게 해 줄까? 뭐 이런 김치 국물을 속으로 홀짝홀짝 마시고 있었다.
그랬더니 그 미모가 말하기를, “소저는 사람이 아니고 송정소에 사는 암룡 입니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담이 센 그도 머리가 주뼛 섰고, 소름이 돋아 등짝엔 땀이 배어났다. 겁먹은 내색을 하지 않은 채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저는 저의 신랑 숫룡과 내내 사이좋게 지내오던 중 갑자기 다른 못의 암룡이 들어와 저의 낭군에게 꼬리를 치고, 애교를 떨어 그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 뿐만 아니오라 그녀의 교태에 홀딱 빠진 신랑이 끝내 소저를 저버리려 하니, 이런 원통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며 한 숨을 푹 쉬었다. ‘용들의 세계에서도 꼬리치면 넘어가는 구나! 수컷이란 다 그래!' 듣고 있으니 괘씸했다.
‘아이고, 야~, 이렇게 이쁜 색시를 두고 딴 눈을 팔아, 이 놈의 수컷용, 내가 결단을 내버려야지!’ 의리의 사나이 「영신」은 그 소리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흥분은 했지만, 음성을 가다듬고 의젓하게 한 마디 했다.
“어허, 그것 참, 듣고 보니 너무나 안타깝소. 꼬리가 없는 남자로서 부끄럽소이다. 그래, 내가 어떻게 해주면 되겠소?”
하며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미모의 암룡이 입술을 꼭 다물더니, 결심을 한 듯, “부디, 그 여우같은 암룡을 죽여주시기 바라옵니다.” 하면서,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고 야, 꼬리 달린 여인네들이 무섭구나!’ 그가 무슨 말을 붙이기도 전에, “내일 새벽이 되면, 뒷산에 암룡이 내려와 제 서방과 놀고 있을 겁니다. 그때, 이 칼과 잿봉지를 사용하여 즉시 그녀를 처치하여 주시면 그 은혜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섬뜩한 말을 남기고는 뿅 하고 사라졌다. ‘이런 일이 다 있나!’
비몽사몽간에 들은 이야기치고는 엄청난 것이었다. 소원을 말 할 새도 없었다. 꼬리치는 암룡의 인상착의라든지, 무슨 옷을 입었는지, 머리는 어떤 모양인지, 꼬리가 아홉 갠지, 어떤 향수를 뿌리고 다니는지,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고 가시다니, 참으로 큰일이었다. 과연 내가 용이란 영물을 처치할 수 있을까. 구름을 타고 노닌다는 용을 죽일 수 있을까. 후회가 막심했다. 뭘 좀 물어보기도 전에 미모의 암룡은 자기 할 말만 하고 훌쩍 가버렸으니! 이런 싸가지가 있나. “헛, 그 참!” 하면서 입맛을 쩍쩍 다시다가 앞에 놓인 칼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시선이 잿봉지로 옮겨갔다. 긴 칼이야 알겠지만 잿봉지는 뭣에 쓰는 것인지도 몰랐다. 또한 말로만 들은 그 여우같은 암룡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도 몰랐다. 자세한 안내 말씀도 없이 궁금증만 안겨준 채 가버린 암룡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버스 떠난 뒤라 할 말이 없었다.
영신 총각이 비 맞은 중처럼 중얼거리며 깨어 보니 실재 머리맡에 칼과 잿봉지가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괴이한 일도 다 있나.’ 어리벙벙해진 그는 예리한 칼과 풀이 죽어 주저앉아 있는 잿봉지를 뚫어지게 바라 봤다. 찢어진 창호지 문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에 칼날이 번쩍이고, 잿봉지만 웃묵에 보리자루처럼 놓여있었다. 아까부터 ‘이놈의 잿봉지는 어디 쓰는 물건인고’ 하면서 오랫동안 생각했건만, 꼬리치는 암룡과 잿봉지의 관계를 알 수가 없었다. ‘잿봉지라, 잿봉지라.’ 허 그참! 그렇게 골똘히 생각을 하자 옛날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지, 팔, 다리에 팥을 갈면 흙을 뿌렸었지, 맞아, 흐르는 피를 막고 암룡의 잘린 목이 다시 붙지 않게 재를 뿌리는 것일 거야.’ 그제야 잿봉지의 용도를 알고서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제 지체할 수가 없었다. 해뜨기 전에 나서야 했다. 장부 일언 중천금, 사나이와 아녀자의 약속이었다. 아니, 미모의 암룡이지. 미모, 미모,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었다. 오로지 그녀의 아리따운 자태와 뽀얀 얼굴을 떠올리며, 그길로 칼과 잿봉지를 집어 들고 뒷산으로 올라갔다. 이제 새벽만 기다리면 되었다.
바로 그 때였다. 갑자기 푸른 하늘에서 번갯불이 번쩍거리더니만 두 마리의 용이 홀연히 나타났고, 누가 있나 싶어 주위를 선회하고선 산꼭대기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리고는 파티가 시작되었다. “용용 죽겠지, 나 잡아봐라!” 하면서 용들의 사랑놀이가 벌어졌다. 그네들이 스쳐갈 때마다 용 비늘이 불꽃을 튀기며 공중으로 솟아올랐고, 땅에 닿을 때마다 용의 발자국이 움푹 움푹 파이곤 했다. 영신 총각은 눈이 부셔 바로 볼 수가 없었다. 화려한 불빛이 쏟아지는 서울의 밤처럼 마냥 어지럽기만 했다. 그의 눈엔 그 용이 그 용 같았다.
아무래도 꼬리치며 앞서 가는 용이 암룡 같아 보였다. 앞으로 지나가기만 하면 장검으로 내려 칠 뿐이었다. 칼을 꼭 쥔 손바닥에서 땀이 나고 있었다. 아뿔싸! 이게 어찌된 일이냐. 빙빙 도는 바람에 어느 용이 선두 주자고, 어느 용이 후발 주자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이어달리기가 떠올랐다. 꼴찌주자가 일등 주자 앞을 가는 형국이 되었다. 꼴찌가 일등인지, 일등이 꼴지 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날은 점점 밝아 오고 마음은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안 되겠다고 생각을 했을 때, 마침 꼬리를 치며 코앞을 지나가는 용이 암룡 같이 보였다. 에라. 안 되겠다 하며, 단칼에 베어 버렸다. 말이 쉽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담력과 용맹을 겸비한 영신 총각도 감당하기엔 벅찼었다.
어디보자, 암룡인지! 순간, 뒤따르던 용은 죽어 자빠져 있는 용을 보고는 혼비백산하여 줄행랑을 쳤고, 피를 흥건히 쏟으며 쓰러져 있는 용이 꼴까닥 숨을 넘기면서 하는 소리가, “아, 난 숫룡인데!”, 그의 단말마 같은 말 한마디는 바람 소리에 묻혀 들리지도 않았다. 임무를 완수하고 허겁지겁 내려온 그날 밤이었다.
미모의 여인이 머리를 풀고 다가왔다. 귀신이었다. 통곡을 하면서 하는 말이 “총각이 죽인 것은 암룡이 아니고 내 낭군이니 이 일을 어떻게 한단 말이오.” 졸지에 과부가 된 암룡은 서럽게, 서럽게 눈물을 쏟아냈다.
유구무언의 영신총각은 정말 드릴 말씀이 없었다. 졸지에 과부를 만들어 놓았으니, 무슨 말을 하겠는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암룡이 말하길, “약속은 약속이니 지킬 겁니다.” 하고 총각에게 소원을 물었다. 무슨 체면에 소원을 말할 수 있을까마는, 종살이를 하던 그였기에 자기 땅이나 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기를 내어 말했다. “음, 그러니까 난, 최 부자처럼 땅을 좀 가져봤으면 여한이 없겠소.” 혹시나 못 들었으면 어쩌나 싶어, 다시 한 번 “땅만 있으면 더 바랄게 없소!” 하고 못을 박았다.
미모의 암룡은 그의 말을 귀담아 듣고는, 영신에게 이르기를 “지금부터 문종이와 지릅대(삼 껍질을 벗긴 대)로 영신이란 글자를 쓴 깃발을 많이 만드시오. 조금 있으면 큰 비가 내릴 것이니, 비가 그칠 때까지 뒷산에 올라가 기다렸다가 물이 빠지면 들판이 새로 생길 것이오. 그 들판에 이 깃발들을 꽂아 표시를 하시요.” 명령을 하듯이 지시를 하곤 뒤도 안보고 금세 사라졌다. 용들의 세계는 알 수가 없네. 뿅, 하고 사라지고, 뒤도 안보고 금세 사라지고, 뭐가 이럴까!
‘이 맑은 하늘에, 비는 무슨 비? 아무리 용이지만, 비가 입맛대로 내릴까.’ 내심 반신반의했다. 뭘, 아이고, 하늘이 어두워지고, 정말 얼마 있지 않아 멀쩡했던 하늘에서 갑자기 천둥이 치고, 번개가 번쩍이고, 괴이한 바람이 휘휘 불더니, 또 한 번의 천둥에 하늘 뚫린 듯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이고, 야! 이게 무슨 날 버락 인가, 그 날부터 줄곧 보름 동안이나 큰비가 쏟아졌다. 온 천지가 물바다로 변했고, 점촌에서 함창으로 흐르던 물줄기가 영신 앞으로 지나가면서 그 높던 뒷산을 깎아내려 뒷산이 돈짝만큼 작게 되어버렸다. 그때부터 작게 된 뒷산이 ‘돈달산’이 되었고, 그때 떨어져 나간 작은 봉우리가 송정소 앞의 딴봉이 되었다.
그는 암룡의 신통함에 몸을 떨면서 암룡이 시키는 대로 깃발을 만들기로 하였다. 비가 그치자마자 영신 총각은 산에서 내려왔다. 홍수가 쓸어간 땅엔 경계가 없어졌고 땅은 한도 없이 넓었다. 그는 자기가 경작할 만큼의 땅에다가 깃발을 꽂아 자기 땅을 만들었다. 처음으로 자기 땅을 가진 그는 홍수로 황폐한 들판을 부지런히 가꾸고 또 가꾸어 옥토로 만들었다. 사람들은 그때부터 넓은 들을 ‘영신들’이라고 불렀고, 지금은 그 땅 어느 한 부분이 영신 숲이 되어 시민의 휴식처가 되고 있는 셈이다. 끝. 2020.8.1.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