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홍시가(早紅柹歌) 해설/ 유준호
이 시조를 지은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 : 1561년(명종 16)〜1642년(인조 20) 수문장, 선전관, 만호, 용양위부호군을 지낸 문신)는 82세까지 살아 당시에는 장수인에 속했다. 그는 송강(松江), 고산(孤山)과 더불어 조선조 시가(詩歌)의 삼대가(三大家)이다. 그의 생애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반생(前半生)이 임진왜란에 종군한 무인으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졌다고 한다면, 후반생(後半生)은 독서와 수행으로 초연한 선비요, 문인 가객(歌客)으로서의 면모가 지배적이었다. 이 작품은 후반생에 쓴 작품이다.
이 작품은 일반적으로 조홍시가(早紅柿歌)로 불린다. 1601년(선조 34)에 지은 연시조로 모두4수인데 그 중 첫수가 “盤中(반중) 早紅(조홍)감이〜”하는 시조이다. 작자의 문집인 『노계집(蘆溪集)』 권3에 실려 있고, 『청구영언』·『해동가요』 등에도 전한다.
「조홍시가(早紅柿歌)」박인로가 성리학을 배우기 위해 장현광(張顯光 : 후기의 주자학자. 도덕정치의 구현을 강조했으며, 이색적이고 독창적인 학설을 주장했다.)을 찾아갔을 때인 1600년경 장현광이 홍시(붉은 감)를 대접하고 그것을 소재로 박인로에게 시조를 지어보라 하여 지은 것이라 전한다. 일반적으로 박인로가 이덕형을 찾았을 때 대접하기 위해 내어놓은 홍시를 보고 이미 돌아가시고 안 계신 어버이를 그리워하며 다하지 못한 효성이 불현듯 생각나서 쓴 작품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덕형이 이미 지어진 앞의 「조홍시가(早紅柿歌)」를 보고 1601년 박인로에게 단가(短歌) 세 수를 더 짓게 하였고, 그 후 『노계선생문집』을 간행하면서 4수를 묶어 「조홍시가」라는 명칭을 붙이면서 혼란이 생기게 된 것이라 한다.[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전본(前本) 〈조홍시가〉 총1수와 이덕형이 관여한 후본(後本) 〈조홍시가〉총3수가 순차적으로 형성되어 총 4수로 된 작품이 「조홍시가(早紅柿歌)」이다. 전본 〈조홍시가〉는 육적회귤의 고사를 활용한 것으로 원술과 육적의 관계를 장현광과 박인로의 관계로 비유하여 효의 실천 정신을 말하고 있다. 이들은 이 노래를 통해 성리학적 근본으로서 효의 의미를 확인했다고 할 수 있다. 후본 〈조홍시가〉는 이덕형에 의해 전본에 3장이 추가된 총4수의 노래로, 제1수는 효행의 당연함을 말하고 있으며, 제2수에서는 왕상, 맹종, 노래자, 증자 등 『이십사효』의 주인공들을 통해 제1수에서 보인 경화된 효를 더욱 강화하고 효의 지평을 개인적 차원을 넘어 사회적 역사적 차원으로 넓혀 놓았다. 제3수에서는 불가능한 상황을 설정하여 부모의 장수를 기원하고 있다. 이러한 과도한 비유가 이 작품에서 어울릴 수 있었던 것은 제1수와 제2수에서 이미 과함이 있었고, 공리적이면서 교화적 효용성에 비중을 두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제3수까지 효의 대상을 생전과 사후 부모를 포함하여 사친지성(事親至誠)을 강조함으로써 ‘효’를 보편적이면서도 윤리적인 경직성을 지닌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제4수의 까마귀는 동아시아 문학 관습에서 효조(孝鳥)로 규정된 바 있고 『이십사효』 별집에 까마귀가 의오(義烏)로 기능하고 있으며, 이덕형과 박인로가 함께 관여한 〈사제곡〉에서도 까마귀(烏鳥)를 반포지효로 그리고 있어 〈조홍시가〉의 까마귀는 효조(孝鳥)·의조(義鳥)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효’가 가장 가치 있는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후본 〈조홍시가〉에서 ‘효’는 개인적 차원을 넘어 역사적 사회적으로 존재하는 경직된 규범이자 보편적 가치라 할 수 있다.
〈조홍시가〉와 ‘효’의 의미는 장현광과 이덕형, 박인로가 공유하는 면이 있으면서도 지향점은 약간 달리 하고 있다. 장현광과 이덕형은 성리학적, 정치적으,로 영향력이 있었던 인물들로 장현광은 전란 이후 효를 통해 성리학적 지배질서를 재구축하고 향촌 질서를 회복하려 했으며, 이덕형은 도체찰사로서 민심 안정과 수습을 위해 ‘효’를 노래하도록 하였다.친족들로 이루어진 향촌 공동체의 안정화는 수직적 질서를 강조한‘효’가 주효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박인로 또한 이들과 의식을 공유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 전후 국가질서 회복을 국왕에 중심을 두어'충으로의 확장을 위한 '효'에 비중을 두었다고 할 수 있다.그가 ‘충-효’의 관념을 중요하게 가졌던 이유는 전후 복구 과정에서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권력의 집중이 국가 유지와 안녕을 위한 현실적인 타개책으로 보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결국 박인로가 〈조홍시가〉에서 말하려고 했던 ‘효’는 국가 위기를 현실적으로 타개하기 위한 군주 중심의 정치적 ‘충’으로서 효치천하(孝治天下)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早紅柹歌에서 ‘효’의 의미 / 김명준]
1/4
盤中 早紅감이 고아도 보이나다
柚子 아니라도 품을 직도 하다마는
품어 가 반기리 업슬 새글노 설워하나이다
이덕형(李德馨)이 도체찰사로서 영천에 이르렀을 때에 홍시를 보고 그 자리에서 박인로에게 이미 그가 지은 이 시조에 단가 3장을 더 짓도록 하였는데 어머니를 생각하는 지성에서 나온 작품이다. 진본 청구영언(靑丘永言) 주서(注書)에 「漢陰見盤中早紅 使朴仁老命作三章 蓋出於思親至誠」라고 되어 있다. 이 작품의 주제는 효성이며, 중국 삼국시대에 육적(陸績)의 회귤(懷橘)의 고사를 연상하고 지은 것이다. “원본을 손으로 베껴쓴 고사본(古寫本)에는 “盤中(반중)에 노흰 早紅(조홍) 두려움도 두려울사 비록 橘(귤)이 아니나 품엄즉하다만은 품어도 듸릴 데업사이 글로 셜워하노라.”로 되어 있어 이것이 우리가 아는 위 작품보다 더 원작에 가깝다. 여기서 두려움은 홍시가 먹음직스럽지만 부모보다 먼저 입에 대선 안 된다는 두려움이라고 이해된다.
[육적회귤(陸績懷橘)]고사(故事)
이 이야기는 《삼국지(三國志) · 오서(吳書) 〈육적전(陸績傳)〉》에 나오는, 육적이 어머니께 드리기 위해 귤을 품에 넣은 고사이다.
육적이 여섯 살 때 구강(九江)에서 원술(袁術)을 만났는데, 원술이 귤을 주자 그중 3개를 품에 넣고 작별 인사를 하다가 귤을 떨어뜨렸다. 원술이 “육랑(육적)은 손님으로 와서 왜 귤을 품에 넣었는가?”라고 물었다. 육적은 무릎을 꿇고 대답했다. “돌아가 모친께 드리고 싶었습니다.” 원술은 이를 기특하게 여기었다.(績年六歲, 於九江見袁術. 術出橘, 績懷三枚, 去, 拜辭墮地. 術謂曰, 陸郞作賓客而懷橘乎. 績跪答曰, 欲歸遺母. 術大奇之.)」
<해설> 소반(쟁반)에 놓인 붉은 홍시가 곱게도 보인다. 비록 유자가 아니라도 품고갈 수 있지마는 품속에 품고가도 반가워하실 분이 안 계시니 그것을 서러워하노라.
※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하는 지은이의 효심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즉 교훈적인 시가로 조홍감(홍시)을 시상의 매체로 하여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과 풍수지탄(風樹之嘆)이 나타나 있다. 특히 종장에서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는 작가의 진실한 효심을 느낄 수 있다. 단시조로 교훈 시가이다.
2/4
王祥의 鯉魚 낙고 孟宗의 竹筍 것거
감던 멀리 희도록 老萊子의 오슬 입고
一生에 養志誠孝를曾子가치 하리이라
<해설> 왕상이 얼어붙은 물속에서 잉어를 낚아 잡아 병든 계모를 살려냈듯이, 맹종이 한겨울에 대숲에서 죽순을 꺾어다가 늙은 어머님 입맛을 돋아나게 했듯이, 나이 70에 노래자가 살아계신 부모님을 즐겁게 해드리고자 때때옷 입고 어리광을 부렸듯이 나도 한 평생 부모님 뜻을 받들어 정성껏 효도를 다하여 효자로 이름난 증자처럼 하겠나이다.
◉왕상(王祥, 184년 ~268년)은 중국 삼국 시대, 서진 시대의 관료로, 자는 휴징(休徵)이며 서주 낭야국 임기현 사람이다. 효성이 지극하여 계모 주씨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음에도 극진히 모셔, 많은 일화를 남겼다. 왕상은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계모 밑에서 자랐다. 겨울에 계모가 병이 들어 신선한 생선을 먹고 싶다고 하자 그는 강으로 나갔다. 추운 날씨 탓에 강물은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왕상이 울부짖으니 하늘이 도와 얼음이 녹고 물속에서 잉어 세 마리가 튀어나왔다. 이를 잡아다가 계모에게 다려드려 계모의 병이 나았다고 한다.
◉ 맹종(孟宗, ?~271) 삼국시대 오나라의 문관으로 강하군 출신이며, 자는 공무(恭武). 맹자의 18대 손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 홀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모셨는데 한 번은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있던 그의 모친이 한겨울 죽순을 먹고 싶다고 하자 맹종은 눈이 쌓인 대밭으로 갔지만 죽순이 있을 리 없어, 죽순을 구하지 못한 맹종은 눈물을 흘렸다. 이에 하늘이 감동해 맹종의 눈물이 떨어진 곳에 눈이 녹고 죽순이 돋아나 맹종이 그것을 끓여 모친에게 대접하자, 어머니의 병환이 말끔히 나았다고 한다. 이것이 맹종읍죽과 맹종설순이라고 불리는 고사이다.
◉ 노래자(老萊子)는 초(楚)나라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에게 맛있고 부드러운 음식으로 봉양했는데, 나이 70에도 부모가 생존해 계셨다. 노래자는 늘 알록달록한 때때옷을 입고 부모님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재롱을 피웠으며, 늙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부모님께 드리려고 음식을 가지고 마루 위에 오르다가 발을 헛디뎌 넘어지자 노래자는 엎어진 채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노래자의 극진한 효성에 대해 주위의 칭찬이 자자하였다고 한다.
◉ 증자(曾子 BC505〜436) 중국의 철학자. 이름은 삼. 공자의 문하생이며 〈대학〉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유가에서 강조하는 '효'를 재확립하는 데 힘썼는데, "부모를 기리고, 부모를 등한시하지 않으며, 부모를 부양한다"라고 하여 효를 3단계로 열거했다.
※ 살아계신 부모님을 잘 봉양하고 삶에 즐거움을 드리겠다는 효심을 다짐하고 있는 작품이다.
3/4
萬鈞을 늘려내야 길게 길게 노흘 꼬아
九萬里 長天에 가난 해를 자바매야
北堂의 鶴髮雙親을 더듸 늘게 하리이다
<해설> 만균(萬鈞 삼십만 근) 쇠를 늘여내서 길게 끈을 꼬아, 머나 먼 하늘에 떨어지는 해를 잡아매어두고, 양친이 거처하는 곳의 백발의 부모님을 되도록 하루라도 더디 늙으시게 하고 싶구나.
※ 살아계신 부모님의 늙으심을 안타까워하며 부모님이 늙지 않게 하겠다는 효심을 표출하고 있는 작품이다. 불가능성을 가능성으로 가정하여 표현하고 있다.
4/4
群鳳 모다신 듸 외가마기 드러오니
白玉 사힌 곳에 돌 한아 갓다마는
두어라 鳳凰도 飛鳥와 類새니 뫼셔논들 엇더하리
<해설> 여러 봉황이 모여 있는 데에 까마귀 한 마리 들어오니, 백옥이 쌓인 곳에 돌 하나 있는 것과 같다마는, 두어라 봉황도 새 중의 하나이니 모셔논들 어떠하리.
※ 현인군자(賢人君子)(봉황)와 교류하는 스스로(외가마기)를 효의 상징물로 환치하여 표현함으로써 그 자긍심(自矜心)을 부모님께 보여드리고자 하는 효심어린 작품이다.
이상(以上) 사수(四首)는 사친가(思親歌)라 할 수 있다.
이 조홍시가를 살펴보느라니 문득 나무가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樹欲停而風不止], 자식이 효도하고자 하나 어버이는 기다리지 않는다.[子欲養而親不待]라는 말이 생각난다. 효행은 마음을 다하여 부모를 정성껏 잘 섬기는 도리로서 이는 동서고금을 뛰어넘는 인륜의 근본 덕목이다. 윌리엄 블레이크(1757~1827 영국 시인 겸 화가, 신비주의자)는 순수의 전조(前兆)란 시에서 「한 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의 공간을 쥐고/ 순간 속에서 영원의 시간을 붙잡는다.」고 하였는데, 한 알의 모래알에서 세계를 조명하고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는 신비로운 환상력을 발휘하였는데, 노계는 홍시를 보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리는 효심을 노래하고 있다. 노계는 10년이 지난 다음 <莎堤曲>과 <陋巷詞>를 지을 때도 안빈낙도(安貧樂道)하며 현실을 초연하게 살았지만 가난 때문에 효(孝)를 접지 않았다. 공자(孔子)는 말하기를 요즘 효(孝)라 하면 부모를 먹여 살리는 것만 뜻하는데, 개(犬)와 말(馬) 까지도 다 먹여 살리는 사람이 있으니 공경하지 않는다면 짐승을 기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고, 맹자(孟子)도 부모를 버리는 어진 사람은 없다고 했다. 공자 맹자를 찾으니 고리타분하다고 할지 모르나 인륜의 근본은 효에서 출발한다. 효성이 지극하면 돌 위에 꽃이 핀다는 말도 있지 않던가. 효는 곧 사람 삶의 근본이다.
다음검색
저작자 표시 컨텐츠변경 비영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