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의 모든 시조 : 이우걸 시인 ♣
-2018년 10월 31일 수요일-
모란
피면 지리라
지면 잊으리라
눈 감고 길어 올리는 그대 만장 그리움의 강
져서도 잊혀지지 않는
내 영혼의
자줏빛 상처
비
나는 그대 이름을 새라고 적지 않는다
나는 그대 이름을 별이라고 적지 않는다
깊숙이 닿는 여운을
마침표로 지워버리며
새는 날아서 하늘에 닿을 수 있고
무성한 별들은 어둠 속에 빛날 테지만
실로폰 소리를 내는
가을날의 기인 편지
하수구
시월 하늘에 흰 구름 떠가고
혈관마다 은은히 종소리 번져날 때도
생활의 바닥 깊숙이
검은 물은 흐른다
가장 아름다운 사랑을 가꾸기 위해
한 잔의 커피를 놓고 우리가 마주할 때도
생활의 바닥 깊숙이
검은 물은 흐른다
하수구는 어쩌면 우리들 꿈의 운하
영원으로 가득한 내일을 가꾸기 위해
미지의 바다를 향해
목선을 띄우는 곳….
링
와지마 고이찌를 아는 이는 별로 없다
그를 무너뜨린 유재두도 마찬가지다
시간은 지난 영웅을 까맣게 지워버린다
그러나 도처에 사각의 링이 있다
쉴 새 없이 팔을 내밀어 자신을 지키거나
의외의 펀치를 맞고 쓰러지는 경우뿐인,
오늘 또, 준비 없이 링 위에 올라야한다
나를 옥죄어 오는 피치 못할 옵션 때문에
생애의 스파링이란
가파르기 검과 같다
♠ 나누기 ♠
이우걸 시인의 시조 네 편을 보내드립니다.
그는 1970년대 초반 이영도 선생의 천거로 시조문단에 등장했습니다. 일찍부터 평필을 들기 시작하여 1977년 무렵 전봉건 선생이 주재하던 월간 시전문지《현대시학》지에 시조 월평을 연재하였습니다. 그동안 촌철살인의 필력으로 시조이론서를 여러 권 발간했고, 특히 젊은 후진들의 시조 세계 조명에 남다른 애정과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또한 유수한 문학평론가들에게 시조 평론을 쓸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왕성한 시조 담론 생산에도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그의 시조는 출발부터 여느 시인들과는 확연히 다른 목소리를 보였고, 시조가 멋진 시의 갈래가 될 수 있음을 작품으로 증명해 보였습니다.「세계는 갑자기」에서‘세계는 갑자기 투쟁의 눈을 버리고’라는 구절과「지금은 누군가 와서」에서‘지금은 누군가 와서 돌아가는 바람이 분다’와 같은 대목이 그 점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그의 시각은 현실 문제를 직시하고 시조로 풀어낸 점입니다. 시대정신과 환경문제를 제기하고 육화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모란」이 주는 울림은 큽니다. ‘피면 지리라// 지면 피리라’라는 초장이 그 모든 세상사를 축약하고 있군요. 피고 지는 일의 무수한 되풀이가 인생이요, 세상일이라는 뜻일 테지요. ‘눈 감고 길어 올리는 그대 만장 그리움의 강’은 무엇을 말하는 대목일까요? ‘만장’은 죽은 사람을 애도하여 지은 글을 천이나 종이에 적어 깃발처럼 만든 것인데‘그대 만장 그리움의 강’을 눈 감고 길어 올린다고 합니다. 처연한 아픔입니다. 그리하여 ‘모란’은 ‘져서도 잊혀지지 않는// 내 영혼의// 자줏빛 상처’가 됩니다. ‘영혼의 자줏빛 상처’는 긴 여운을 안겨주는군요. 사람마다 몇 십 년을 살다보면 이러한 상처는 하나둘이 아닐 테지요. 김영랑의「모란이 피기까지는」과 일맥상통하면서 다른 이미지를 직조하여 좀처럼 눈길을 떼지 못하게 만듭니다. ‘내 영혼의 자줏빛 상처’라고 연신 입속으로 흥얼거리게 합니다.
「비」는 그의 재기가 잘 드러난 시편입니다. 별안간‘비’를 두고 ‘나는 그대 이름을 새라고 적지 않는다/ 나는 그대 이름을 별이라고 적지 않는다’라고 진술하면서 참신한 발상을 제시합니다. 그것은‘깊숙이 닿는 여운을/ 마침표로 지워버리’게 하는군요. ‘새는 날아서 하늘에 닿’고‘무성한 별들은 어둠 속에 빛날’때 ‘비’는 화자의 눈에‘실로폰 소리를 내는/ 가을날의 기인 편지’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남다른 언어감각으로 빚은 물기어린 서정시편이군요.
「하수구」는 화자의 시선이 어느 쪽을 향하고 있는지 극명히 보여줍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한 어두운 면을 적극적으로 들추어내어 노래하고 있지요. ‘시월 하늘에 흰 구름 떠가고/ 혈관마다 은은히 종소리 번져날 때도/ 생활의 바닥 깊숙이/ 검은 물은 흐’르고 있음을 대부분의 사람은 생각하지 않고 삽니다. 하지만 그 점을 애써 밝히고 있군요. 우리의 일상은‘가장 아름다운 사랑을 가꾸기 위해/ 한 잔의 커피를 놓고 우리가 마주할 때’가 많은데 그 때도 ‘생활의 바닥 깊숙이/ 검은 물은 흐’릅니다. 셋째 수에서 시의 의도하는 바가 잘 드러납니다. ‘하수구는 어쩌면 우리들 꿈의 운하’일 수 있기에‘영원으로 가득한 내일을 가꾸기 위해/ 미지의 바다를 향해/ 목선을 띄우’고자 하지요. ‘하수구’를 통해 삶을 자정하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을 봅니다.
「링」은 복싱 선수를 등장시켜 삶과 세계에 대한 성찰을 흥미진진하게 그려 보입니다. ‘와지마 고이찌를 아는 이는 별로 없다/ 그를 무너뜨린 유재두도 마찬가지다’라고 하는 첫머리가 인상적입니다. 요즘 세대는 전혀 알 수 없는 권투 선수이지만 이들이 활약하던 그 당시 두 사람은 명승부를 펼쳤습니다. 비록‘시간은 지난 영웅을 까맣게 지워버’렸지만, 아직도 그 경기를 기억하는 사람은 적지 않지요.
그리고 ‘그러나 도처에 사각의 링이 있’어서 ‘쉴 새 없이 팔을 내밀어 자신을 지키거나/ 의외의 펀치를 맞고 쓰러지는 경우뿐인’사례를 화자는 예시합니다. 지키는 일의 어려움을, 당하기 쉬운 세상살이를 담담히 표출합니다. 끝으로‘오늘 또, 준비 없이 링 위에 올라야’하는 까닭은‘나를 옥죄어 오는 피치 못할 옵션 때문’이라고 말하면서‘생애의 스파링’은‘가파르기 검과 같다’라고 맺고 있군요. 우리 모두 인생의 전장, 사각의 링 안에 내던져진 존재지요. 어쨌거나 평소 맷집을 키워서 링에 오를 준비를 하지 않으면 연전연패를 끊을 길이 없겠지요. 이렇듯「링」은 인생사를 함축하여 노래하고 있는 이채로운 시편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링에 올랐습니다. 눈을 크게 뜨고 가볍게 푸드 워크를 하며 부지런히 팔을 뻗어야 하겠습니다. ‘짓밟혀서 돌아오는 어두운 사내를 위해’ 따뜻한 저녁이 있는 시간은 마련될 터이니까요.
2018년 10월 31일 <세모시> 이정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