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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長城)
필암서원(筆菴書院) 만력 경인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김인후(金麟厚) 인종 때의 명신(名臣)
모암서원(慕巖書院) 전조(前朝) 때 세웠는데 인조 무자년(1648,인조26)에 중수(重修)하였다. : 서능(徐稜) 고려 시중(侍中)을 지냈으며 절의(節義)와 효도가 지극하였다. ㆍ조영규(趙英圭) 군수를 지냈다. 앞에 있다. ㆍ조정로(趙廷老) 영규(英圭)의 아들인데 별검(別檢)에 증직되었다. ㆍ최학령(崔鶴齡) 호는 율리(栗里), 진사이다. ㆍ정운룡(鄭雲龍) 호는 하곡(霞谷), 왕자사부(王子師傅)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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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梁山) 송담서원(松潭書院) 정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백수회(白受繪) 호조 참의에 증직되었다.
충렬사(忠烈祠) 병자년에 세웠다. : 조영규(趙英圭) 군수를 지냈고, 참판에 증직되었다. 임진년에 순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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遜齋先生文集卷之八 / 行狀 / 松巖奇公行狀 *奇挺翼 1627 1690 幸州 子亮 松巖, 店漢
趙梁山英圭亦邑人也。爲其父子忠孝。不合泯沒而無傳也。倡卛同志。通諭士林。並享於慕巖祠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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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준(申景濬) 1712년(숙종 38)~1781년(정조 5)
旅菴遺稿卷之六 / 祝文 / 徐節孝書院。配享金秋潭告由文。辛丑(1781,정조5)
維歲次辛丑五月十四日丙戌。後學某敢昭告于節孝徐先生。伏以秋潭金先生。學闡形上。自灑掃始。將老萉寇。逖矣東蘂。奔走顚踣。滫瀡克備。前後堊室。偯偯淚血。十有二年。其如一日。羣宵幽國。獨扶倫彝。刀鋸簪組。不怵不移。晝日寄詩。詔子處義。父子君臣。二十字裏。一釖壘和。天將色動。以遏剽𦧟。莫京斯勇。王命錫爵。再縻再辭。哂彼榮涂。而壤壤爲。旣濬行源。逢諸左右。衆甫難選。厥惟大者。存養沒哀。斯以孝名。不爲時移。乃節之淸。恭惟往哲。繄誰之似。月照秋潭。一心千禩。俎豆並享。公議允同。芬芬苾苾。祀事無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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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급(金友伋) 1574년(선조 7)~1643년(인조 21)
秋潭先生文集附錄 / 墓誌銘[洪良浩]
영조 34 1758 무인 乾隆 23 ― 長城의 慕巖書院에 배향되다.
新羅之季。王子興光。知國將亂。遯于光山之野。麗朝革命。卽其地賜食邑。子孫因貫焉。爲東方甲族。與麗相終始。連十二世爲平章事。人稱其居爲平章洞。入我朝。有曰崇祖以文章鳴世。官至司諫。子曰紀二十登第。選入弘文典翰。年三十四而卒。士流惜之。是爲公曾祖也。祖諱景愚工曹佐郞。贈司僕寺正。有二子。長諱大成。以孝贈左承旨。次子諱大振。亦贈左承旨。有六子。公其第二子也。承伯父之後。
諱友伋字士益。以萬曆甲戌生。幼而端秀。異於凡兒。長而力學。文章夙詣。天性孝友。不擇險夷。年甫弱冠。遭丁酉亂。陪親入關東。有避亂士女數千。號哭嶺下。不敢進。公問其故。聞天將扼嶺上。遊騎攔道㥘掠。卽仗劒詣軍門。抗言于天將曰。將軍奉皇命救屬國。奈何不戢士卒。害生民。天將聞之大驚。卽斬亂魁。懸首轅門。道路遂無梗。於是公名聞遠邇。亂定。宣祖丙午。登上庠。光海時赴擧至漢京。時賊臣爾瞻用事。館儒發廢母論。將投疏受公名。公大書紙背曰。生於母者。不宜應此。凶徒大嫉。削公泮籍。及對策居魁。拔其名。自是不復應擧。癸亥仁祖光御。館儒交章薦之。除穆陵參奉。暫拜命歸鄕。又除不復就。專心爲己之學。當丙子亂。遣子翰林汝鈺。奔問于南漢。以詩誡之曰。昔爲吾父子。今作爾君臣。恩義兼難盡。臨危莫愛身。其忠義之所蘊如此。晩年學益精業益進。士友翕然尊之。從學者甚衆。自號曰秋潭居士。兄弟六人。湛樂唱酬。待宗族訓子弟。一循於義軌。方公應擧在京也。夫人聞時有凶論。千里馳書曰。無倫之世。不可暫留太學。其平日刑家之化又如此。癸未三月五日。考終于第。享年七十。葬於長城府南珠丘山。道內儒林。合辭腏享于
慕巖徐節孝書院。配瑞山柳氏甲戌生。將仕郞景進之女。林錦湖亨秀之外孫也。癸酉六月十四日卒。享年六十。後以長子汝鈺貴。贈兵曹參判。夫人贈貞夫人。葬與公同原。有三男三女。長汝鈺平安監司。止大司憲。次汝鏛,汝鐧。皆通德郞。女歸牧使林㙐,金重五,李翀。公之耳孫尙烈。千里繭足來。請誌堋之辭。余旣慕公之義。又感其誠。遂按狀而銘之曰。空拳而抗三軍之帥。勇也。一言而扶萬世之倫。義也。之勇之義。配道於氣。官非我榮。學以求志。移孝爲忠。貽厥良嗣。廟食南土。式此多士。
崇祿大夫行吏曹判書兼判義禁府事知經筵春秋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豐山洪良浩撰。耳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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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양호(洪良浩) 1724년(경종 4)~1802년(순조 2)
耳溪集卷三十四 / 墓誌銘 / 秋潭金公墓誌銘 幷序
新羅之季。王子興光。知國將亂。遯于光山之野。麗祖革命。卽其地。賜食邑。子孫因貫焉。爲東方甲族。與麗相終始。連十世爲平章事。人稱其居爲平章洞。入我朝。有曰崇祖。以文章鳴世。官止司諫。子曰紀。二十。登科。選入弘文典翰。甫踰三十而卒。士流惜之。是爲公曾祖也。祖諱景愚。工曹佐郞贈司僕寺正。有二子。長諱大成。以孝贈承旨。次諱大振。亦贈左承旨。有六子。公其第二也。承伯父後。
公諱友伋。字士益。以萬曆甲戌生。幼而端秀。善事父母。從林錦湖亨秀學。文識夙詣。甫弱冠。遭丁酉亂。護親入關東。有避亂士女數千。號泣嶺下。不敢進。公問其故。聞天將扼嶺上。遊騎攔道刦掠。公卽仗劒詣軍前。抗言于天將曰。將軍奉皇命救屬國。奈何不戢士卒而害生民。天將聞之大驚。卽斬數人。懸首轅門。道路遂無梗。於是公名聞遠邇。亂定登上庠。光海時。赴擧至漢京。時賊臣爾瞻用事。館學儒發廢母論。將投疏。受公名。公大書紙背曰。生於母者。忍爲此耶。凶徒大嫉之。削儒籍。及對策居魁。拔其名。自是不復應擧。癸亥。仁廟光御。館儒交章薦之。除穆陵參奉。暫拜命歸鄕。又除不復就。專心爲己之學。當丙子亂。遣子翰林汝鈺。奔問于南漢。以詩誡之曰。昔爲吾父子。今作爾君臣。恩義兼難盡。臨危莫愛身。其忠義之所蘊如此。晩年。學益精業益進。士友翕然尊之。從學者甚衆。自號秋潭居士。兄弟六人。湛樂唱酬。待宗族訓子弟。一循於義軌。方公應擧在京也。夫人聞時有凶論。千里馳書曰。無倫之世。不可暫留。其平日刑家之化又如此。癸未三月五日。考終于第。葬于長城府南珠丘山。道內多士合辭。腏享于
慕巖徐節孝書院。配瑞山柳氏。將仕郞景進之女。林錦湖之外孫女也。後以長子貴。贈兵曹參判。夫人贈貞夫人。葬與公同原。擧三男三女。男長汝鈺。文科兵曹參判。次汝鏛,汝鐧。皆通德郞。女歸林㙐,金重五,李翀。汝鈺二男四女。男再光,一光。女歸高斗紀,徐文起,奇挺翼,尹拭。汝鏛二男一女。男重光,世光。女歸柳値。汝鐧三男。鼎光,啓光,弘光。曾玄多不盡記。公之耳孫尙烈。千里繭足來。乞志堋之辭。余旣慕公義。又感其誠。遂按狀而銘之曰。
空拳而抗三軍之帥。勇也。一言而扶萬世之倫。義也。之勇之義。配道於氣。官豈我榮。學以求志。移孝爲忠。貽厥良嗣。廟食南土。式此多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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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보(徐榮輔) 1759년(영조 35)~1816년(순조 16) 竹石館遺集
죽석관유집 제3책 / 묘지(墓誌) / 학생 김공 묘지〔學生金公墓誌〕
공은 휘가 세광(世光)이고, 자는 덕수(德叟)이다. 김씨의 보계(譜系)는 신라의 왕자 흥광(興光)에서 나왔고, 고려의 태조(太祖)가 광산(光山)을 봉해 주어 자손들이 집안을 이루었다. 그 후 고려조에서 이름난 분으로는 대광(大匡) 휘 길(吉), 문정공(文貞公) 휘 책(策), 문안공(文安公) 휘 양감(良鑑), 문숙공(文肅公) 휘 주정(周鼎), 충숙공(忠肅公) 휘 심(深), 한림학사(翰林學士) 휘 정(精), 원수(元帥) 휘 종연(宗衍)이 있다.
우리 조선에서 현달한 분으로는 전한(典翰) 휘 숭조(崇祖)가 있는데, 그의 아들 휘 기(紀)도 전한이었다. 세 세대 후
증 참판(參判) 추담(秋潭) 휘 우급(友伋)은 포의(布衣)의 신분으로 광해군(光海君) 때에 상소하여 항의하였는데, 인묘(仁廟)께서 반정(反正)하시자 추천으로 침랑(寢郞)에 제수되고, 절효(節孝)로 일컫는 서릉(徐稜)의 서원에 배향되었다. 이분이 통덕랑(通德郞) 휘 여상(汝鏛)을 낳았다. 이분은 형 대사헌(大司憲) 미산(薇山) 휘 여옥(汝鈺)과 함께 모두 명성이 있었고 효도를 다하였다. 이분이 공의 아버지이다. 문화 유씨(文化柳氏)를 아내로 맞았는데, 생원(生員) 의남(義男)의 따님이고 택당(澤堂) 이식(李植) 공의 생질녀이다.
공은 성품과 행실이 매우 독실하여 9살에 어머니를 여의었는데 어른처럼 애통해하고 매우 엄격하게 소식(素食)하여 그릇을 따로 갖추어 음식을 받아 다 먹고 난 뒤에는 다시 그릇을 챙겨서 생선이나 고기를 담을 수 없게 하니,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통덕공(通德公)이 장수하였는데 공이 지성으로 봉양하였다. 집안이 가난해서 공이 몸소 그물을 만들고 매를 길들여 짐승을 잡아 고기 요리를 해 드렸다. 통덕공 말년에 공도 이미 노년에 접어들었으나 늙고 쇠약해졌다고 해서 조금이라도 모시는 데 게을리하지 않았고 통덕공의 병세가 악화되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내서 며칠 더 연명시켜 드릴 수 있었다. 죽을 먹으며 상을 치르다 몸을 해쳐서 결국은 병이 났고, 탈상한 지 수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니, 태어난 경오년(1630, 인조8)으로부터 52년이 지난 때였다. 장성(長城) 석박산(石朴山) 손좌(巽坐) 언덕에 모셨다.
부인 부안 김씨(扶安金氏)는 휘 단(湍)의 따님이다. 아들 셋을 두었는데, 장남 회정(會精)은 백부의 후사가 되었다. 둘째는 회서(會瑞)이고, 셋째 만영(萬英)은 공의 백부인 대헌공(大憲公)의 아들 일광(一光)의 후사가 되었다. 두 딸은 고세준(高世俊)과 신정화(辛鼎和)에게 시집갔다. 회서는 아들 천필(天必), 천길(天吉), 천일(天逸), 천척(天隲)을 두었고 딸들은 임류(林瑠), 임백창(任伯昌)에게 각각 시집갔다. 천필은 아들 상효(尙孝), 상언(尙彦), 상권(尙權), 상건(尙建)을 두었고, 천일은 아들 상렬(尙烈)을 두었다. 내외 증손, 현손이 여럿 있다. 상렬이 나에게 행장을 가지고 와서 명을 부탁하니 그 성의가 매우 간절하여 글재주가 없다고 사양할 수 없었다.
명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사람에게 본성〔衷〕을 내리니 / 天降衷于民
이를 받아 온전히 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린 것이네 / 受而全之在人
명문 광산 김씨 집안은 / 惟光山華胄
멀리 문정공, 문안공으로부터 / 遠自文貞文安
충성하고 효도하고 / 爲忠爲孝
공업을 성취하고 문장으로 뛰어났네 / 爲烈爲文
만나는 상황마다 이 본성으로 하였으니 / 隨遇以之
이 본성을 따름이 본래 그러한 것이었네 / 率時其本然
공에 이르러 / 式至于公
유독 효로 명성이 높으니 / 獨以孝聞
대개 벼슬에 나아가고 나아가지 못한 차이는 있지만 / 蓋用舍之異施
그 하늘이 내린 본성을 온전히 지킴은 같도다 / 而全其降衷也均
[주-D001] 우급(友伋) : 1574~1643.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사익(士益), 호는 추담(秋潭)ㆍ추담거사(秋潭居士)이다. 1612년(광해군4) 임자(壬子) 식년시(式年試)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다. 1618년 성균관에서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하는 논의가 일자, 이에 반대하여 서명지의 뒷면에 “어머니에게서 나온 자라면 이에 응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라고 썼다가 이이첨(李爾瞻)의 노여움을 사서 유적(儒籍)에서 삭거되었다. 대책문(對策文)이 수석을 차지하였으나 방(榜)에서 삭제당한 이후 과거를 보지 않았다.
변이중(邊以中)의 문인이고, 기처겸(奇處謙)ㆍ이익(李瀷) 등과 교유하였다. 문집으로 《추담집(秋潭集)》이 있다. 목릉 참봉(穆陵參奉)으로서,
모암서원(慕巖書院)에 배향되었다.[주-D002] 서릉(徐稜) : ?~? 본관은 이천(利川)이고, 전라도 장성현(長城縣) 사람으로 고려 시대 유명한 효자이다.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벼슬을 하지 않았으며, 어머니의 병환을 낫게 하려고 한겨울에 개구리를 구했는데, 그의 정성에 하늘이 감응했는지 살아 있는 개구리가 나무에서 떨어져 약탕기에 들어갔다는 설화가 있다. 고려 고종이 절효(節孝)라는 시호를 내렸다. 《고려사(高麗史)》 〈효우열전(孝友列傳)〉에 실렸다.[주-D003] 서릉(徐稜)의 서원에 배향되었다 :
《여암유고(旅菴遺稿)》 권6에 〈서절효서원배향김추담고유문(徐節孝書院配享金秋潭告由文)〉이 실려 있다.[주-D004] 경오년 : 백부인 김여옥의 생몰년이 1596~1662년인데, 부친 김여상은 장수했다고 하니 그 이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경오년은 1630년(인조8)으로 추정되고, 김여상과 김세광이 사망한 때는 1681~1682년으로 추정된다.[주-D005] 대헌공(大憲公) : 대사헌(大司憲)을 지낸 김여옥(金汝鈺)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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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귀(李廷龜) 1564년(명종 19)~1635년(인조 13)
月沙先生集卷之五十二 / 行狀 下 / 先府君行狀
李𡹘 1528 1593 李𡸙 延安 景瞻
公諱𡹘。字景瞻。初名𡸙。避宣廟潛邸舊諱改之。
丁亥(1587,선조20)。不肖孤妻父權公克智。爲本道監司。
以婚避。換授長城縣。治以明敎化爲先。首行養老宴。民之窮不克婚葬者。官爲之資。在長城。設學堂於霞谷。以縣中遺逸鄭雲龍爲學長。又縣地有
慕巖。水石甚佳。乃高麗節孝徐稜之宅。
遂建鄕賢祠於其墟。跨水構閣爲講堂。幷選學徒。以爲藏脩之所。暇日命駕往來。或講論經史。勸以忠孝。或試課文藝。賞其才異。或觴詠遣興。與野老爭席。
爲文表著徐公行蹟。揭之講堂。俾民有所興感。民有兄弟訟田者呼使前。諭以骨肉天倫秉彝之至情。民垂淚而退。讓其田於兄。敎化之效。有如此者。戊子己丑(1589,선조22)年間。鄭汝立在全州。遙執朝論。一時儕類。推奬太甚。問遺輻輳。府君常心惡之。一日。忽貽書於府君。要得祭需。遍及列邑。有若分定者。府君笑曰。吾與此人無一日之雅。豈容致書求索。至於定數責徵。尤爲無理。此人使氣如此。必不善終矣。吾豈可受渠凌駕。遂謝病不答。招鄭雲龍語之曰。此人所爲如此。曾聞君相識。盍絶之。雲龍曰。此人博學好議論。李潑兄弟亟稱於我。我亦一再見之矣。近觀其居家處事。多有兇詭之狀。今聞此言。果與近聞相符。不絶此人。必有後禍。當竝絶李潑云。其年汝立伏誅。宣祖閱汝立家文書。得鄭雲龍絶交書。下敎嘉奬。特拜王子師傅。雲龍每曰。此皆我公先見善誨之恩云。辛卯(1591,선조24)。考滿還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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秋潭先生文集附錄 / 配享慕巖書院告由祝文[申景濬]
學闡形上。自瀛掃始。將老萉寇。逖矣東蘂。奔走顚踣。滫瀡克備。前後堊室。偯偯淚血。十有五年。其如一日。羣宵幽國。獨扶倫彝。刀鋸簪組。不怵不移。晝日寄詩。詔子處義。父子君臣。二十字裏。一劒壘和。天將色動。以遏剽踏。莫京斯勇。王命錫爵。再縻再辭。哂彼榮塗。而壤壤爲。旣濬行源。逢諸左右。衆甫難選。厥惟大者。存養沒衷。斯以孝名。不爲時移。乃節之淸。恭惟往哲。繄誰之似。月照秋潭。一心千禩。俎豆並享。公議允同。芬芬苾苾。祀事無竆。
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申景濬製。
여암유고(旅菴遺稿) 신경준(申景濬)생년1712년(숙종 38)몰년1781년(정조 5)자순민(舜民)호여암(旅菴)본관고령(高靈)
旅菴遺稿卷之六 / 祝文 / 徐節孝書院。配享金秋潭告由文。辛丑 *정조 5 1781 신축 乾隆 46 70 5월 21일, 졸하다. ○ 7월, 盤龍崗에서 장사 지내다.
維歲次辛丑五月十四日丙戌。後學某敢昭告于節孝徐先生。伏以秋潭金先生。學闡形上。自灑掃始。將老萉寇。逖矣東蘂。奔走顚踣。滫瀡克備。前後堊室。偯偯淚血。十有二年。其如一日。羣宵幽國。獨扶倫彝。刀鋸簪組。不怵不移。晝日寄詩。詔子處義。父子君臣。二十字裏。一釖壘和。天將色動。以遏剽𦧟。莫京斯勇。王命錫爵。再縻再辭。哂彼榮涂。而壤壤爲。旣濬行源。逢諸左右。衆甫難選。厥惟大者。存養沒哀。斯以孝名。不爲時移。乃節之淸。恭惟往哲。繄誰之似。月照秋潭。一心千禩。俎豆並享。公議允同。芬芬苾苾。祀事無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