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삼문의 『수양산 바라보며』
首陽山 바라보며 夷齊을 恨하노라
주려 죽을진들 菜薇도 하난것가
비록애 푸새엣 것인들 긔 뉘 따헤 났다니
【주제】죽음을 각오한 굳은 절의와 지조
【감상】
수양산을 바라보며 백이숙제를 원망 하노라. 굶어 죽을지언정 고사리를 캐어 먹는단 말인가. 아무리 보잘 것 없는 풀이기로서니 그것이 누구의 땅에 났더냐.(그 풀은 그대들이 섬길 수 없는 주나라 무왕의 땅에 난 것이 아닌가.)라는 시조로 백이와 숙제가 주나라 무왕을 그 근본부터 부정하였으나, 결국 그가 무왕의 천하에서 고사리를 캐어먹고 살았다는 오점이 안타깝다는 것이 이 시조의 주된 뜻인데 이것은 불의의 왕 세조 치하의 일체를 부정하는 성삼문의 의지가 나타난 말이며, 사물을 바라보는 그의 세계관이기도 하다. 초장의 '수양산'은 백이숙제가 은거한 산 이름이지만 세조의 대군 때의 이름과 일치하므로 중의적인 표현으로 세조를 가리킨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종장의 '고사리' 와 종장의 푸새는 세조가 내리는 녹을 나타낸 것이라고 보면 이 시조의 뜻은 더욱 분명해 진다. 곧 굶어죽어도 세조가 주는 녹은 먹지 않겠다는 뜻이다. 결국 성삼문은 백이, 숙제보다도 더 절의를 가슴에 품고자 스스로 다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시조를 절의가(絶義歌), 충의가(忠義歌)라고 부른다.
성삼문(成三問1418-14560)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근보(謹甫), 호는 매죽헌(梅竹軒). 개성유후(開城留后) 성석용(成石瑢)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성달생(成達生)이고, 아버지는 도총관(都摠管) 성승(成勝)이다 집현전 학사로서 시문에 능하였으며 훈민정음 창제 시 음운을 연구하기 위하여 요동에 귀양와 있던 황찬을 열세번이나 찾아갔었다 한다. 벼슬이 승지에 올랐으나 후일 단종복위 실패로 39세의 나이에 세조에 의해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그의 외가인 충남 홍성군 홍북면이 출생지로 유허비가 있다. 태어날 때 하늘에서 낳느냐고 세 번 물어 삼문이라 지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