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건 부제의 상해 도착과 서품
역사의 연구는 사료가 있어야 한다. 사료가 없이는 역사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사는 사료만 가지고 서술할 수는 없다. 그 사료에 대한 해석이 역사의 주요한 부분을 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사가 사료와 해석으로 구성된 것이라면 사료는 역사의 요한 일부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 연구자들은 새로운 사료의 발견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한국 교회사의 경우에도 새로운 사료의 발굴을 위한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
이 노력의 일부로 김대건 신부 관계 사료의 추가 발굴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여기에서 김대건 부제가 1845년 5월 거친 바다를 항해하여 중국 상해에 도착한 직후 김대건과 조선인 신자들을 보호했던 고틀랑 신부의 증언을 발췌해서 제시하고자 한다. 여기에 제시된 자료는 그가 1845년 7월 8일에 쓰기 시작하여 9월 12일에 완료하여 예수회 총장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 편지는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서도 신자 일행의 고해성사 장면이 부분적으로 인용된 바 있다. 그런데 이 편지의 전문은 프랑스어 4,212 단어로 되어있다. 이 편지를 모두 한글로 번역하면 원고지 67매가 되며, 이 가운데 36매 정도의 분량으로 김대건과 조선 교회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 이 조선 교회에 관한 기록 중에서 전체 맥락을 살려가면서 그 내용의 4분의 1 정도를 번역하여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김대건 일행의 상해 도착
(전략) 전에는 저녁 9시부터 새벽 4시까지 고해성사를 주느라고 밤을 새웠습니다. 누구들의 고해성사인지 맞추어보십시오. 조선인들의 성사였습니다. 가엾은 조선은 여전히 박해의 칼날 밑에 있고 순교자들의 용기는 초대 교회의 신앙 자체를 빛내리라는 것을 아시고 계시지요. 지난해 벨린느의 주교이며 조선 감목 대리구의 감목 대리인 페레올 주교는 마카오에서 공부한 젊은 조선인 부제를 이 불행한 나라에 보냈습니다. 주교는 벌써 삼 년도 더 전부터 자신의 사랑하는 선교지 국경에서 그곳에 들어갈 희망도 가지지 못한 채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김 안드레아[Andre Tsin, 김대건]는 이 젊은이의 이름입니다. …
페레올 주교는 이 대담한 부제에게 배를 준비하고, 할 수 있다면, 교우들을 모아 선원으로 삼아 상해로 그를 찾으러 오라고 시켰습니다. … 안드레아는 주교의 지시를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그는 쪽배 한 척을 샀습니다. 그런데 어떤 배였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차라리 한 짝의 나막신이었습니다. … 그는 이 초라한 편주에 의지하여 바다로 나아갔습니다. 그들은 25쌍띰(centimes; cents) 나가는 나침반에 의지하고 자기 고향 산천을 떠났습니다.… 휘몰아치는 폭풍이 우리 경험 없는 선원들을 삼키려 했습니다. 폭풍은 돛과 키를 부러뜨려 배를 침몰 상태로 몰아넣었습니다.
이 위험에 직면하여 모든 선원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모두 안드레아만을 쳐다보았습니다. 굽힐 줄 모르는 우리 젊은이는 그가 그 선원들이 가지고 있는 두려움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보여야 한다는 것을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스스로 두려움을 극복해 내고 그리고 침착한 태도와 말로 그들을 안심시켰습니다. 그는 성모 마리아의 성화를 보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 우리를 보호하고 있는 성모 마리아를 보십시오. 조금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상해에 도착할 것이며, 그리고 우리 주교님을 뵐 것입니다.”
그가 말한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잠시 뒤 그들은 중국배를 보았는데, 그 배 주인은 퍽 많은 돈을 지불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목적지로 그들을 데려다 주기로 했습니다. 바로 이 배의 예인을 받아 조선배는 지난 5월 28일 상해 앞 바다에 이르렀습니다. 조선배가 오송에 도착한 것은 사건이었습니다. …
간신히 이 섬에 도착하게 되자, 안드레아는 영국 영사를 방문했는데, 영사는 사람으로서는 더 이상 할 수 없는 최대의 환대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안드레아를 가마에 태워서 한 교우 가정으로 보냈습니다. 바로 거기서 안드레아는 자기가 도착했음을 알리려고 서둘러 저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저는 마카오에서 그를 알게 되었는데, 그가 조선으로 가려고 강남을 지날 때에도 만났습니다. 저는 그가 묵고 있는 교우 집으로 급히 달려갔습니다. …
조선인 신자들과 김대건의 서품
저는 부랴부랴 그들의 배로 이 용감한 선원들을 만나러 갔습니다. 총장 신부님, 거의 대부분이 순교자의 아버지이거나 아들 또는 순교자의 부모인 사람들 12명 사이에 둘러싸였을 때 제가 맛본 위로를 판단하실 수 있으시지요. … 첫 대면부터 고해성사가 문제되었습니다. 그러나 안드레아는 우선 제가 배에서 미사를 드릴 수 있도록 급한 대로 배를 손질하기를 원했습니다. 배가 준비되자 사람들은 저에게 알려왔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밤을 지내고 다음날 미사를 드리기로 하고 저녁에 다시 그곳에 갔습니다. 그러나 우리 용감한 조선인들은 그들이 간절하게 원해왔던 고해부터 해야 했습니다.…
이 고해성사는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시간을 차지했습니다. 모두가 경탄을 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진지하게 그리고 열성적으로 자기 죄를 고백했습니다. 안드레아는 그들의 양심의 가책을 가라앉히고 그리고 신학적인 공부를 조금 했을 뿐인데도, 놀라우리만큼 예민하게 그들의 생각을 명확히 밝혔습니다. 저는 전날 밤에 시작했는데, 거의 미사를 드릴 시간이 되어서야 끝냈습니다.…
저는 우상으로 가득 찬 커다란 도시 가까이에서, 아주 작은 배 위에서 경건한 미사를 올렸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못하고 있던 성사에 참여할 수 있게 되어 그럴 수 없이 열성적이고 행복해 하는 신자들에게 둘러싸여서 말입니다.…
지금은 9월 12일입니다. 김 안드레아가 지난 8월 17일 일요일 상해 근처의 교우촌[金家巷]에서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조선 감목 대리구의 감목 대리인 페레올 주교가 집전했습니다. 그는 이 귀한 사명에 합류하려고 다블뤼 신부와 함께 마카오에서 다시 왔습니다.
안드레아는 성직을 위해서 키워졌던 첫번째 조선인입니다. 그는 8월 24일 일요일 왕당의 신학교에서 다블뤼 신부의 보좌를 받으면서 첫번째 미사를 올렸습니다. 그 다음 주 일요일 8월 31일 페레올 주교와 그의 동료는 자기 선교지로 가려고 조선 쪽배의 갑판에 올랐습니다. 자기 선교지는 오늘날 교우들을 법으로 보호하지 않는 나라입니다. 얼마나 장하고 위대한 용기입니까!
[경향잡지, 2001년 8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다시 조선을 향해
이제 다시 조선으로 향하는 일이 남았다. 페레올 주교는 자신이 타고 갈 배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배를 보는 순간, 두려움이 앞섰다. 그는 이렇게 편지에 남겼다.
"이 빈약한 조선 배를 처음 보았을 때 저는 공포심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배로 어떻게 바다를 항해할 수 있을까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인들은 모두 즐거워하였고 바다와 파도를 무릅쓸 각오가 돼 있었습니다.…그들은 주교와 함께 있으므로 이후 모든 위험을 면할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순진함을 축복하시기를!…"
조선의 교우들은 그랬다. 그 교우들이 이제 상해를 떠나 조선으로 출발했다. 그들의 주교를 모시고 조선 첫 사제를 모시고 출발했다. 1845년 8월 31일이었다. 배에는 선교사 또 한 사람이 동승했다. 김대건 신부 서품식과 첫미사에 함께 한 다블뤼 신부였다. 배 이름은 라파엘, 크기는 길이 25자(7.57m), 너비 9자(2.72m), 깊이 7자(2.12m)였다.
라파엘 호는 숭명도를 거쳐 중국 배를 모선으로 삼아 산동반도 쪽으로 항해했다. 잔잔하던 바다는 다시 거센 파도로 라파엘 호를 집어삼킬 듯 위협했고, 배는 조선에서 상해로 건너올 때 못지않은 풍파를 겪어야 했다. 난파된 배가 조류에 떠밀려 표류하다가 마침내 한 섬의 해변에 도착했는데 제주도 용수리 포구였다. 제주도를 떠난 지 15일 만인 1845년 10월 12일 배는 강경 포구에서 약간 떨어진 외딴 곳에 도착했다. 나바위였다.
[평화신문, 2010년 7월 11일, 이창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