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삼근왕
한편 신라로 군원병을 청하러 갔던 문주는
겨우 군사 만명을 얻어 가지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러나 고구려군은
이미 왕을 죽이고 성을 파괴하고 돌아간 후였다.
왕자는 땅을 치고 통곡했으나 이미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눈물을 흘리며 왕위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백제 21대 임금이 된 문주왕(文周王)은 마음이 어질고 백성을 극진히 사랑했다.
그러나 그의 결함은 마음이 약하고 과단성이 없어서 신하들에게 휘둘리는 점이었다.
"지금 서울은 적에게 여지없이 파괴되어 복구하자면
백성들의 고통이 격심할 것이오니 멀리 천도하는 것이 옳을 줄로 압니다."
"특히 사나운 고구려 땅에서 멀지 않으므로 언제 또 지난번과 같은 참사를 당할는지 알 수 없습니다."
신하들 중에는 이렇게 말하며 남쪽 웅천(熊川=公州) 땅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말하자면 혹독한 국난으로 피폐한 나라를 바로잡고 재건하려는 의욕은 없고
일시적으로 안전한 도피처를 찾아가려는 망국적인 주장이었다.
그러나 마음 약한 왕은 그 주장에 귀가 솔깃했다.
그 해 10월 마침내 웅천으로 천도하고 말았다.
비교적 안전한 지역으로 도읍을 옮기자 왕은 더욱 안일한 길을 택하게 되었다.
힘들고 복잡한 정사는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들과 산을 쏘다니며 사냥이나 일삼았다.
☆☆☆
즉 2년 9월에는 해구(解仇)를 병관좌평(兵官佐平)으로 삼아 병마의 실권을 맡겨 버렸으며
3년 4월에는 왕제 곤지(昆支)를 내신좌평(內臣左平)으로 삼아 내정에 관한 일체를 맡겨버렸다.
국운이 피폐하고 왕권이 쇠약해지면 강신(强臣)이 대도하는 것이 고금에 흔히 보는 현상이다.
특히 병관좌평이 되어 군사적 실력자가 된 해구는 야심이 만만한 인물이었다.
기회만 있으면 왕을 없애고 정권을 전담하려고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전횡(專橫)을 방해하는 내신좌평 곤지의 존재로 말미암아
일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다가 곤지가 우연히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자 마침내 거사할 것을 결심했다.
문주왕 3년 9월,
왕은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멀리 사냥 길을 떠났다.
때는 왔다고 생각한 해구는 몇몇 심복에게 밀명을 내려 왕을 따라가게 했다.
해구의 심복들은 왕을 따라 사냥을 하는 척 들과 산을 달리다가 거처를 보아 왕을 쏘아 죽이고 말았다.
문주왕이 뜻하지 않게 세상을 떠나자 그의 맏아들이 왕위를 계승하여 즉위했다.(西紀 477)
곧 제 22대 삼근왕(三斤王)이다.
새 왕은 이때 나이 겨우 13세였으므로 모든 국권은 좌평 해구에게 맡겨졌다.
그러나 해구는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스스로 명실공히 임금이 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이듬해 봄 연신(燕信)이라는 자와 더불어 대두성(大豆城)에 의거하여 반기를 들었다.
왕은 아직 나이 어리고 모든 권력이 자기에게 집중해 있으므로
한 번 거사하면 쉽게 성공하리라고 해구는 생각했던 것이다.
해구가 신하로서 국권을 전담할 때는
그의 위세에 눌려 아무 말도 없던 사람들도 그가 공공연히 모반을 하자 의외로 크게 반발을 보였다.
"역적을 소탕하자!"
"선왕을 죽이고 그것도 부족해서 이제 모반을 하다니?"
정의의 인사들은 어린 왕을 중심으로 굳게 결속했다.
그리고는 우선 좌평 진남(眞男)에게 군사 2천명을 맡겨 해구 등이 의거한 대두성을 치게 했다.
그러나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모반한 역도들의 세력은 만만치 않았다.
진남의 군사는 오히려 크게 패하여 쫓겨오고 말았다.
"이대로 가다간 해구가 이번엔 우리 왕성으로 쳐들어 올 모양인데 어떻게 하면 좋겠소?"
어린 왕은 겁에 질린 눈으로 신하들을 둘러봤다.
그러자
"어찌 신하의 몸으로 도적의 무리가 왕성을 침범하게 버려두겠소?"
우렁찬 음성으로 이렇게 외치며 나선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덕솔 진로(德率眞老)였다.
"그러나 쓸 만한 군사가 이번 싸움에 모조리 상했으니 무엇으로 도적을 토벌하겠소?"
한 늙은 신하가 한숨을 짓자
"도적을 토벌하는데 반드시 많은 병력이 필요한 것은 아니오.
도적의 허를 찌른다면 불과 수백 명으로도 족할 줄 아오."
진로는 이렇게 호언하고 남은 군사를 긁어모았더니 겨우 5백명이 되었다.
그러나 그 5백명은 해구의 반역을 기를 갈며 미워하는 결사의 정병들이었다.
☆☆☆
진로는 진남과는 달리 5백명 결사대를 이끌고 아무도 모르게 간도로 대두성을 향했다.
대두성에서는 크게 잔치를 벌리고 있었다.
진남의 토벌군을 격퇴시킨 해구는 벌써 왕성을 함몰하고 왕위에 오르기라도 한 것처럼 기고만장했다.
그리고 그의 심복들도 각각 높은 벼슬들을 내약 받아 기쁨에 취해 있었다.
이때였다.
갑자기 함성이 높이 올랐다.
성밖에 숨어서 기회만 엿보고 있던 진로 등 결사대가 쳐들어 온 것이다.
불의의 습격을 받은 군사들은 미처 대오를 갖추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가 모조리 격살되고
해구도 마침내 진로 등의 손에 잡혀 참살되고 말았다.
이렇게 왕에게로 돌아갔으나 어린 왕은
힘에 겨운 대사를 겪느라고 심려가 심했던지
그 이듬해 11월, 재위 불과 3년만에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