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덕왕
통일신라 최고의 전성기는 35대 경덕왕이 다스리던 때라고 평가하는데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불국사의 다보탑과 청운교백운교, 석굴암 등의 정교하면서도 우아하고, 기묘한 과학을 담은 예술성이 뛰어난 불교문화 유적에서 나타나는 화려한 문화예술은 지금도 흉내내기 어려울 정도로 뛰어나다.
경덕왕의 충담스님과 대화에서 나타나는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려는 왕의 마음은 역사적으로 훌륭하게 조명되고 있다. 불국사와 석굴암 건축, 월정교 설치, 성덕대왕신종 제조 등의 통일신라 전성기를 만들었던 노력도 경덕왕의 훌륭한 업적으로 손꼽는다. 경덕왕 당시의 화려하게 꽃피운 문화와 다르게 왕의 아들을 낳기 위한 지나친 욕심과 어린 아들에게 물려준 왕위로 인해 신라가 몰락의 길로 접어드는 계기를 만드는 아이러니의 주인공이 됐다.
삼국유사는 경덕왕이 표훈대덕을 통해 천제에 부탁해 아들을 점지해 달라고 빌어 없던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이 8살에 혜공왕으로 즉위해 24살 되던 해에 시해를 당하고 신라는 왕권전쟁의 혼란 속으로 빠져들며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대부분 역사서는 경덕왕의 이름은 헌영이며 효성왕의 동생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경덕왕은 효성왕과 이복 형제였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경덕왕의 첫 번째 왕비는 김순정의 딸 삼모부인이지만 아들이 없어 내쫓고 둘째 왕비를 맞았다. 둘째 왕비는 서불한 김의충의 딸인 만월부인이다. 만월부인도 아들이 생기지 않아 경덕왕이 표훈대사를 통해 천제에 부탁해 늦게 아들을 낳았다. 경덕왕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지방 군현을 정비하고 지명을 고치는 한편 관직의 명칭을 변경하는 등 제도를 정비하며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불교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불국사, 석굴암, 삼랑사 등의 절을 짓게 하고, 스님이 될 수 있게 길을 열어 훌륭한 승려들이 배출되기도 했다. 이때 신라에 충담을 비롯해 월명, 경흥스님, 표훈대덕 등의 고승들이 등장했다. 또 경덕왕은 스스로 나라 안의 절을 찾아 법문을 듣기도 하고 법회에 참가해 많은 시주를 하기도 했다. 절을 지으면서 불상과 탑을 안치하는 과정에 건축기술은 물론 미술, 조각, 과학, 문학 등 종합문화예술과 전반적인 산업이 크게 발달했다. 이러한 문화의 발달을 통해 백성들의 의식수준도 성장하고, 나라가 안정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경덕왕이 아들 낳기에 공을 들여 성공했으나 어린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나라가 혼란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경덕왕의 뒤를 이어 아들 건운이 8살에 신라 36대 혜공왕으로 등극했다. 어머니가 내정을 다스렸지만 귀족들의 권세에 휘둘려 신라의 국운은 패망으로 기울기 시작하는 비운을 맞았다. 덩달아 신라 최고의 전성기를 맞았던 문화예술조차 쇠퇴의 길을 걸어 불국사와 석굴암의 아름다운 예술작품들은 더이상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쇠퇴의 길을 걸었다.
표훈대덕
경덕왕은 옥경의 길이가 8촌이나 되었다. 왕비가 아들을 두지 못하자 폐위하고 사량부인으로 봉했다. 후비는 만월부인이다. 시호가 경수태후이며 김의충 각간의 딸이다. 왕이 하루는 표훈대사를 불러 명을 내렸다.
“짐이 복이 없어 후사를 얻지 못하고 있으니 바라건대 대사께서 상제께 청하여 아들을 얻었으면 하오.”
표훈이 상제께 아뢰고 돌아와 왕에게 “상제께서 딸은 되지만 아들은 마땅치 않다고 말씀하십니다”고 답했다. 왕은 다시 “딸을 바꾸어 아들이 되게 해 주시오”라고 청했다.
표훈이 다시 상제께 이를 청하자 “한다면 할 수 있노라. 그러나 아들이 되면 나라가 위태로워진다”고 경고했다. 이어 “하늘과 사람은 어지러워져선 안 되느니, 지금 그대가 마치 이웃마을처럼 오가면서 천기를 누설하였노라. 이제 이후로는 다시 통하지 못할 것이야.”
표훈이 와서 상제의 말씀을 전하자 왕이 “나라가 비록 위태로워진다 한들 아들을 얻어 뒤를 잇는다면 충분하오”라고 말했다. 곧 만월왕후가 태자를 낳았다. 왕은 무척 기뻤다. 여덟 살이 되었을 때 왕이 죽고 태자가 자리를 이었는데 이가 혜공왕이다. 매우 어리므로 태후가 섭정했지만 조리가 고르지 못하고 도적이 일어나 나라가 어지러웠다. 표훈의 말이 증명된 것이다.
어린 왕은 여자아이일 것이 남자가 되었으므로 돌부터 왕위에 오르기까지 늘 부녀자들의 놀이를 하였고, 비단 주머니 차기를 좋아했다. 이윽고 나라에 큰 변란이 일어 마침내 김양상과 김경신에게 죽임을 당했다.
표훈대사 다음으로 신라에는 성인이 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