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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동성당과 순교자
전동성당의 유래
전동성당은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복자 권상연 야고보가 1791년 12월 8일에 참수되어 순교한 곳으로 한국 최초의 천주교 첫순교터이다.
1801년 10월 24일에는 복자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와 복자 윤지헌 프란치스코, 유관검이 이곳에서 능지처참형으로 순교했고, 이어 김유산 토마스와 이우집은 참수로 순교하였다.
1889년 봄인 5월 성당이 설립되어 프랑스인 보두네 신부가 첫 본당신부로 부임하였고, 1891년 이곳의 집과 터를 매입하여 본격적인 전주지역 사목활동을 펼쳤다.
1892년에는 성인 새 영세자 19명을 배출하는 등 다양한 복음화가 이루어졌다.
1908년 보두네 신부는 이곳에 성전건립을 시작하였는데, 성전의 설계는 서울 명동성당의 건축 경험이 있었던 프와넬 신부가 하였다. 성전을 짓는 과정에서 재정난을 비롯해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1914년에 성전건축이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성전 내부의 전례에 필요한 시설과 성물 등의 설치가 다 이루어 지지 못해 축성식은 갖지 못하고, 축복식만 진행하였다 (이후 축성식은 1931년 6월 18일에 진행). 1915년 8월 24일에는 종 축성식을 가졌다.
성전의 주춧돌로는 전주성의 성벽 돌이 사용되었는데, 일부 돌은 참수된 순교자들의 머리가 성벽에 매달렸을 때 피가 스며든 돌인 것으로 추정된다. 보두네 신부는 당시 당국에서 신작로를 개설하는 과정에서 성벽을 허물면서 버리던 돌을 구입하였다. 성전 건축에 사용된 목재는 주로 치명자산(승암산)의 나무들이고, 벽돌은 공사를 담당한 중국인 기술자 100여명이 직접 구워 만든 것이다.
건축 양식
전동성당의 성전은 호남 지방에 최초로 건립된 서양식 건물로서 그 종교적 가치뿐만 아니라 문화예술적 차원에서도 매우 귀중한 유산으로 인정받고 있다.
먼저 성당 정면 아치를 보면, 벽돌로 장식한 부분이 보이는데, 이것을 아키볼트(장식 창도리)라 한다. 정면 중앙에는 높이 솟아 있는 고탑과 좌우 계단탑이 있는데, 고탑 밑에는 종탑이 있고, 종탑 밑에는 미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장미창이 있다.
그리고 보통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은 성당을 받치던 아치가 바닥까지 내려오거나 기둥머리까지 내려오는데, 전동성당의 아치는 채광창이 있는 벽에서 멈추고 색깔을 바꾸어 붉은 벽돌로 기둥머리까지 오도록 하여, 전반적인 따뜻함과 포근함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내부를 보면, 붉은 벽돌 띠가 제대의 뒷벽을 포함해 모든 곳을 감싸고 있는데, 이 역시 내부 공간 전체에 따뜻함을 주면서 동시에 내부의 수직성과 수평성을 균형있게 잡아주고 있다. 참으로 탁월한 조형이며 미의 완성이라 할 수 있다.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
전동성당은 한국천주교회의 공식적인 첫 순교자들인 윤지충, 권상연의 순교터 위에 세워진 성당으로, 대한민국 순교의 역사적인 기념터이자 뿌리깊은 신앙의 성지이다.
윤지충(바오로)와 권상연(야고보)은 지체높은 양반가의 자제들로, 일찍부터 학문에 정진하였으나, 천주교 신앙에 대해 알게 된 후, 스스로 교회 서적을 구해 읽기 시작하였다.
이로부터 자신들이 찾고자 했던 진리에 대한 해답을 얻고, 3년 뒤 윤지충은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권상연은 그로부터 천주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그러던중 1790년경 북경의 구베아 주교로부터 제사 금지령이 전달되었는데, 이로 인해 수많은 조선의 양반들이 충격을 받고 신앙을 버리게 되지만, 윤지충과 권상연은 끝까지 신앙을 지키기로 결심한다.
1791년 여름 윤지충이 모친상을 당하여, 권상연과 함께 어머니의 유언대로 유교식 예를 쓰지 않고 신주를 불살라 버렸는데, 이 소식이 조정까지 전해진다.
그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에 피신해 있던 그들을 대신해 숙부를 감금하자, 이들은 진산 관아에 자수하였고, 전락 감영에 압송되어 온갖 문초와 배교하라는 권고를 받았으나, “천주를 아버지로 받아들이고 난 뒤에는 그분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라는 말로 자신들의 믿음을 당당히 드러내었다.
시대와 배경을 고려해 볼 때 이는 놀라운 신앙 고백이자 선언이었고, 이에 그들에게는 군문효수형이 언도되었다.
그렇게 순교로써 자신들의 신앙을 증거한 윤지충의 나이는 33세, 권상연의 나이는 41세였다.
그렇게 1791년 한국 교회의 최초 순교자 윤지충, 권상연의 순교 현장, 또 1801년 호남의 사도 유항검과 동료 순교자들의 능지처참과 참수의 현장 위에, 성인들의 순교를 지켜본 성곽의 돌로 성당이 지어짐으로써, 이곳이 순교지일뿐 아니라 ‘신앙의 증거‘, 신앙의 요람’임을 드러냈다.
공사기간동안 전주 시내 신자들은 물론 진안, 장성 등지의 교우들이 밥을 지어먹을 솥과 양식을 짊어지고 와, 손에 굳은 살이 어깨에는 혹이 생기도록 자원 부역을 했다. 그러한 노력 끝에 공사를 시작한지 7년 만인 1914년 외부공사를 마쳤는데, 이듬해 초대 주임 보두네 신부는 성당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56세의 나이로 선종한다. 그 뒤를 이어 받은 제2대본당 주임인 라크루 신부의 주도로, 17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내부공사를 진행하여 마침내 1931년, 착공한지 23년만에 성당을 완성한다.
윤지충(바오로), 권상연(야고보)는 같은 날 참수당했으며, 초연한 자세로
마지막까지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어서 목을 베라고 할 정도로 의연하게 죽음을 받아들였다고 전해진다.
전동성당을 방문하는 순례자들이 이들의 순교와 신앙의 참된 의미를 깨우치는 놀라운 경험과 묵상이 되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가. 윤지충 바오로 – 정교 교리를 주장한 순교자
윤지충 하면 많은 이가 제사문제로 순교한 분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윤지충은 한국 초대교회에서 적어도 다음과 같은 점에서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귀중한 순교자로 기억되어야 한다.
첫째, 윤지충은 조선정부의 공식적인 사형판결을 받고 순교한 우리 나라 최초의 순교자라는 점이고, 둘째는 한국 초대교회 평신도 가운데 선각자적 지식인으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적 신앙인으로 조선정부의 정교합일적 통치원리에 저항하여 정교분리의 원리를 주창한 순교자라는 점이다.
그는 비록 제사문제로 사회적인 측면에서 첨예한 충돌을 일으킨 주인공이기도 하지만 그것 때문에 더 의미있는 또 다른 의의를 묻어버리고 단순히 제사를 거부한 순교자로만 기억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윤지충 바오로(1759-1791년)는 전라도 진산군 장구동(현 충남 금산군 진산면)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래 그의 조상들은 전라도 해남에 살았는데 아버지 윤경이 의원을 생업으로 삼고 살다가 결혼하고 진산으로 옮겨와 살게 되었기에 윤지충은 그곳에서 태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윤지충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품행이 단정했으며 학문으로 일찍부터 평판을 얻었는데, 25세가 되던 해인 1783년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자 명성이 더욱 높아졌다.
진사가 된 이듬해에 윤지충은 서울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천주교 서적 두 권을 발견하고는 그 책들을 필사하였다. 그는 이 때 천주교 교리를 대상 짐작은 했지만 실천하지는 않았다. 이 일이 있은 다음 3년이 지난 뒤에 그의 사촌인 정약종에게서 천주교 교리 전반에 대해 배우고 나서야 비로소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일어났는데 그는 겁이 나서 가지고 있던 천주교 관련 서적들을 불살랐지만 신앙생활만큼은 얼밀히 실천하였다. 그가 다른 교우들과 접촉하거나 드러나게 교회활동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그의 신앙생활이 얼마나 깊고 단단했던가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엿볼 수 있다.
이때 한국교회는 제사문제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는데 초대교회 건설 공로자들인 양반 지식인들도 제사문제로 교회를 떠나는 일들이 많았다. 바로 이런 때 윤지충은 교회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여 집안에 모셨던 신주를 불살랐다. 그의 올바른 신앙생활은 1791년 봄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상례를 치르게 되면서 사람들 앞에 드러났다. 윤지충은 모친의 상을 입고 지극치 애통해 하며 효성을 다해 모든 상례 절차와 예식을 정성으로 지켰다. 그러나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서 상례에 따른 제사는 지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천주교를 반대하는 세력의 한 선봉인 홍낙인이 그를 고발하여 진산군수 신사운에게 체포당하고 만다.
윤지충이 그의 유일한 동지인 사촌 권상연과 함께 옥고를 치르며 심문을 당하는 과정과 당당히 순교의 길로 나아간 모습은 여러 경로를 통해 널리 알려졌지만, 그가 옥중에서 직접 기술한 공술서를 통해서 볼 수 있는 또 다른 진면목을 여기서 잠깐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우선 한국에서의 제사문제는 중국의 경우와 쟁점이 다르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곧 중국에서 제사문제는 하느님의 호칭에 대한 문제와 함께 대두된 것으로 공자를 숭배하고 조상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 순수한 종교적인 의식인가 아니면 순수한 민간의식인가에 있었다. 이에 반해 우리 나라는 하느님이 제사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와 신주를 조상처럼 모시고 제사 지내는 것이 왜 불가피한가에 관심의 초점을 두고 있었다. 이 가운데 신주를 조상처럼 모시고 제가를 지내면 안되는 까닭을 윤지충은 그의 공술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천주교의 십계명 중에 제4계가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 부모가 신주 안에 계신다면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신주를 공경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주들은 나무로 만든 것이고 그것은 저의 살이나 피나 목숨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들은 저를 낳고 기르는 수고에 아무런 몫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영혼은 일단 이 세상에서 나가면 그런 물질적인 것에 붙어 있을 수가 없게 됩니다. 부모의 명칭은 아주 위대하고 매우 존경받을 만한 그 무엇인 만큼, 어떤 일꾼이 만들고 꾸민 물건을 감히 가져다가 제 부모로 사고 또 실제로 그렇게 부를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도 바른 이치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제 양심은 그것에 승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비록 그 때문에 양반 칭호를 박탈당한다 해도 하느님께 대하여 죄인이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윤지충은 지극한 효성의 발로로 드리는 제례를 무조건 미신이라고 하지 않았다. 다만 나무토막에 불과한 목수의 제작물인 신주를 부모처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고 부모의 홈이 신주에 붙어있을 수가 없음을 지적했다. 그럼에도 그 법을 지켜야 하는 것이 양반의 법도라면 차라리 양반의 법을 버릴지언정 양심상 하느님의 올바른 법을 어기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잠드신 부모님께도 음식을 드리지 않는 법인데 하물며 돌아가신 부모님께 음식을 대접하듯 하는 것은 허식이요 가식적인 것이라 했을 뿐이다.
이제 윤지충의 공술서는 이 모든 이치를 떠나서 한 개인이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든 말든 그것은 개인적 사생활의 영역으로 국가가 관여할 일이 아니며 또 실제로 조선 법에도 그런 규정이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 "신주를 모시지 않는 서민들이 그렇다고 하여 정부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과 또 가난하기 때문에 모든 제사를 규정대로 지내지 못하는 양반들도 엄한 책망을 당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여 주십시오. 그러므로 제 생각으로는 신주를 모시지 않고 죽은 이들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서도 제 집에서 천주교를 충실히 신봉하는 것은 결코 국법을 어기는 것이 아닌 듯합니다."
윤지충은 여기에서 두 가지 점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첫째 일반 서민이 신주를 모시지 않는다고 해서 정부를 반대하는 것이 아닌데 왜 양반인 내가 신주를 모시지 않는 것이 반정부의 죄가 되는가 하는 것이고, 둘째는 신주를 모시거나 그렇지 않거나 또 제사를 드리거나 드리지 않는 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종교적 신앙생활로 국법에 어긋남이 없는데 왜 국법으로 다스리는가 하는 것이다. 이는 유교가 분명 양반들만의 전유물이며 유교를 국교의 위치에 놓고는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지 않는 정부의 '정교합일'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정교가 분리되지 않았던 유교 국가에서는 종교가 국가권력의 도구가 되었다. 실제로 조선정부에서 정치와 종교는 혼동되었고 이 현상은 천주교에 대해 한결같이 적대적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당쟁에도 종교를 빙자한 정적 타도의 구실로 척사를 논하여 당쟁인지 척사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
윤지충은 이러한 문화적 정치적 배경에서 그의 순수한 신앙을 고백했고, 그는 결국 정승인 최제공의 청으로 정조의 명을 받아 참수형을 당하는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1791년 12월 8일 오후 3시에 사형은 집행되었고, 그때 그의 나이 33세였으며, 권상연은 41세였다. 그가 죽은 형장의 피에 얽힌 수많은 기적으로 조선 신자들의 손수건에 그 피가 적셔져 북경에 보고되기도 했다. 윤지충 바오로는 선각적 지식인들이 제사문제로 교회를 떠날 때 외롭게 남아 참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한국교회를 지킨 위대한 순교자이다.
[경향잡지, 1999년 10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나. 윤지충 바오로(1759-1791년)와 권상연 야고보(1751-1791년)
윤지충(尹持忠) 바오로는 1759년 전라도 진산 장구동에 거주하던 유명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자는 ‘우용’이며,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전주에서 순교한 윤지헌 프란치스코가 그의 동생이다.
본디 총명한 데다가 품행이 단정하였던 윤 바오로는 일찍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1783년 봄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또 이 무렵에 고종 사촌 정약용 요한 형제를 통해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되었으며, 다음해부터는 스스로 교회 서적을 구해 읽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3년 동안 교리를 공부한 그는, 1787년 인척인 이승훈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후 윤 바오로는 어머니와 아우 윤 프란치스코, 외종사촌 권상연 야고보에게도 교리를 가르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하였다. 또 인척인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와 자주 오가면서 널리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권상연(權尙然) 야고보는 1751년 진산의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디 그는 학문에 정진해 오고 있었으나, 고종사촌인 윤지충 바오로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운 뒤에는 기존의 학문을 버리고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입교하였다. 그때가 1787년 무렵이었다.
1790년 북경의 구베아(A. Gouvea, 湯士選) 주교가 조선 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윤 바오로는 권 야고보와 함께 이 가르침을 따르려고 집 안에 있던 신주(죽은 사람의 위패)를 불살랐다. 또 이듬해 여름, 윤 바오로의 어머니(곧 권 야고보의 고모)가 사망하자 유교식 제사 대신 천주교의 예절에 따라 장례를 치렀다. 이는 어머니의 유언이기도 하였다.
윤 바오로와 권 야고보가 신주를 불사르고, 전통 예절에 따라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는 소문은 얼마 안 있어 널리 퍼지기 시작하였다. 결국 그 소문은 조정에까지 전해져 그곳을 온통 소란스럽게 하였다. 그리고 ‘윤지충과 권상연을 체포해 오라’는 명령이 진산 군수에게 내려졌다.
체포령 소식을 들은 윤 바오로는 충청도 광천으로, 권 야고보는 충청도 한산으로 피신하였다. 그러자 진산 군수는 그들 대신 윤 바오로의 숙부를 감금하였고, 이러한 사실을 전해 들은 그들은 곧바로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진산 관아에 자수하였다. 그때가 1791년 10월 중순경이었다.
진산 군수는 먼저 그들을 달래면서 천주교 신앙을 버리도록 권유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천주교가 진리임을 역설하면서 ‘절대로 신앙만은 버릴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여러 차례의 설득과 회유가 있었음에도 그들의 태도가 조금도 변하지 않자, 진산 군수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그들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고 생각하여 전주 감영으로 이송토록 하였다.
전주에 도착한 윤 바오로와 권 야고보는 이튿날부터 문초를 받기 시작하였다. 전라 감사는 그들에게서 천주교 신자들의 이름을 얻어 내려고 갖은 방법을 다 썼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신앙을 굳게 지키면서 교회나 교우들에게 해가 되는 말은 절대로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특히 윤 바오로는,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면서 제사의 불합리함을 조목조목 지적하였고, 이에 화가 난 감사는 그들에게 혹독한 형벌을 가하도록 하였다.
윤 바오로와 권 야고보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천주를 큰 부모로 삼았으니, 천주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이는 결코 그분을 흠숭하는 뜻이 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전주 감사는 할 수 없이, 그들에게서 최후 진술을 받아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내 조정은 다시 한 번 소란스러워졌고, ‘윤지충과 권상연을 처형해야 한다’는 소리가 드높게 되었다. 결국 임금은 이러한 대신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그들의 처형을 허락하였다. 당시 전라 감사가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유혈이 낭자하면서도 신음 소리 한마디 없었습니다. 그들은 천주의 가르침이 지엄하다고 하면서, 임금이나 부모의 명은 어길지언정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다고 하였으며, 칼날 아래 죽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사형 판결문이 전주에 도착하자, 감사는 곧 윤 바오로와 권 야고보를 옥에서 끌어내 전주 남문 밖으로 끌고 갔다. 이때 윤 바오로는 마치 잔치에 나가는 사람처럼 즐거운 표정이었으며,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교리를 설명하였다. 그들은 ‘예수, 마리아’를 부르면서 칼날을 받았으니, 그때가 1791년 12월 8일(음력 11월 13일)이었다. 먼저 칼날을 받은 윤 바오로가 32세였고, 권 야고보는 40세였다.
윤 바오로와 권 야고보의 친척들은 9일 만에 관장의 허락을 얻어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둘 수 있었다. 이때 그들은 그 시신이 조금도 썩은 흔적이 없고, 형구에 묻은 피가 방금 전에 흘린 것처럼 선명한 것을 보고는 매우 놀랐다. 이후 교우들은 여러 장의 손수건을 순교자들의 피에 적셨으며, 그 가운데 몇 조각을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당시 병으로 죽어 가던 사람들이 이 손수건을 만지고 나은 일도 있었다고 한다.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2014년]
다. 한국교회 최초 순교자 윤지충, 권상연 학술 심포지엄
천주 신앙과 순교 사건 시대적 조명
한국교회 최초 순교자 윤지충(바오로, 1759~1791)과 권상연(야고보, 1751~1791)의 천주 신앙과 순교 사건을 시대적으로 조명하면서 그들의 신앙과 순교가 미친 영향을 살펴보는 학술 심포지엄이 7~8일 전주교구청 4층 강당에서 열렸다.
김진소(호남교회사연구소장) 신부는 심포지엄 기조강연에서 "윤지충과 권상연은 하느님을 속정 깊고 체온을 느끼는 부모님으로 받아들여 믿음의 토대를 닦았다"면서 이 두 순교자가 보여준 깊고 튼튼한 믿음의 뿌리가 오늘의 한국 천주교회를 존재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김 신부는 나아가 윤지충은 유교에서 천주교로 전향했지만 "자신이 성장한 문화, 특히 유교 윤리의 최고 가치덕목인 효 사상과 한국인의 정서를 하느님 신앙과 합성해 하느님께 대한 효로 승화시켰다"면서 "한국의 정신문화를 바탕으로 하느님 신앙을 주체적으로 수용한 윤지충의 믿음은 한국교회의 자긍심"이라고 밝혔다.
전주교구 윤지충 권상연 학술 심포지엄 주요 내용
순교 개념, 한국종교문화에 새로 등장
7~8일 전주교구청에서 열린 윤지충ㆍ권상연 학술 심포지엄에서는 △ 윤지충ㆍ권상연의 죽음을 불러온 1791년 진산 사건의 성격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 폐제분주(廢祭焚主,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사름) 후 죽음조차 마다하지 않은 윤지충ㆍ권상연의 천주 사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윤지충ㆍ권상연의 순교가 한국종교문화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 한국천주교회 순교 일번지인 전동성당에 대한 자리매김을 어떻게 할 것인가 등에 관심의 초점이 모아졌다. 심포지엄에서 언급된 내용들을 중심으로 이런 문제들을 정리한다.
1) 진산 사건의 성격
진산 사건이란 1791년 진산 윤지충과 그의 이종사촌 권상연이 유교사회에서 신앙처럼 돼 있는 조상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운 사실이 드러나 관아에 체포되고 마침내 전주 남문(풍남문) 밖에서 목이 잘려 죽음을 당한 사건을 가리킨다.
조상제사 문제를 둘러싼 천주교와 유교의 사상적 충돌로 이해되고 있는 이 사건은 천주교에서는 첫 순교자를 낳은 사건으로 중요시해 왔다. 그렇지만 '정조대 후반 탕평정국과 진산 사건의 성격'에 대해 발표한 허태용 박사는 이 사건이 당시 정국 주도권 다툼 과정에서 정조의 신임을 받고 있던 남인 체제공 계열을 무너뜨리고 정조의 정치력을 흔들기 위해 일어난 사건이라는 견해를 개진했다.
이에 대해 이선아(전북대) 교수는 논평을 통해 교황청에서 조상제사 금지령을 내리지 않았더라면 진산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며 진산 사건을 단순한 정치적 사건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를 경계했다.
그렇다면 진산 사건은 제례를 둘러싼 천주교와 유교의 충돌에 더해 정국 주도권을 둘러싼 정파 싸움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으리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이 당사자인 윤지충과 권상연의 입장이다.
2) 윤지충과 권상연의 천주 사상 혹은 천주 신앙
금장태 교수는 윤지충과 권상연이 「천주실의」와 「칠극」 같은 보유론(補儒論)적 교리서를 통해 천주교 신앙에 입문했지만 이 교리서들 속에서 유교 전통과는 다른 새로운 천주교 신앙의 고유한 세계를 만나게 됐고 보유론적 단계를 넘어서는 초유(超儒) 혹은 탈유(脫儒)론적 단계로 나아감으로써 천주교 신앙을 확고히 굳히게 됐다고 봤다.
1790년 북경 교회에서 조상 제사를 금하자 천주교 신앙집단에서 이탈한 정약전 정약용 등과 달리 윤지충 권상연 등은 오히려 유교 사회의 교화 체제를 떠나 천주교 신앙에 귀의하게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금 교수는 그러나 윤지충과 권상연이 "폐제분주의 실천으로 조선사회 법에 따라 처형됐지만 교회의 명령에 따라 죽었다는 의미보다는 진리에 대한 자신의 확고한 신념에 따라 죽었다는 의미에서 '순도'(殉道)요 순교(殉敎)의 성격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밝혔다.
단지 천주교에서 금하기에 수동적으로 따른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와 관련해 천주교의 영혼관에 대한 확고한 깨달음이 있었고 효의 근본 의미보다 형식에 얽매이는 유교제례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기에 폐제분주를 감행하고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3) 윤지충 권상연의 순교가 한국 종교문화사에 미친 영향
조현범 박사는 19~20세기에 걸친 한국종교문화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두 사람의 순교가 지니는 의미를 네 가지로 제시했다. △ 천주교와 전통 문화 특히 조선의 지배 이념이었던 유교와의 관계가 단절됐고 △ 천주교는 핍박받는 종교집단으로서 종교적 정체성을 형성했으며 △ 제사를 폐지하는 대신에 이를 대신하는 상장예식 곧 '연도'(煉禱)라는 독특한 의례문화가 천주교 안에서 생겨났고 △ 윤지충과 권상연을 매개로 순교 개념이 한국종교문화에 새롭게 등장했다는 것이다.
조 박사는 윤지충ㆍ권상연의 순교가 "자신에게 닥친 고난을 온 몸으로 통과함으로써 자신의 신앙을 증거하고, 또 '지금 여기'만이 유일무이한 현실이 아니라 참된 세계가 저 너머에 존재한다는 것을 일깨우는 결단이었다"며 따라서 그들의 순교는 "한국종교문화에서 새로운 삶의 형식을 제시하는 일대 사건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밝혔다. 나아가 "그들의 순교를 역사 기록의 한 단락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교회 쇄신의 위기 상황에서 늘 반추해야 하는 정신적 그루터기로 간직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4) 순교일번지 전동성당의 자리매김
윤지충ㆍ권상연의 피가 남문 밖에 뿌려진 지 100년이 지난 1891년 전주본당(현 전동본당) 초대주임 보두네 신부는 완주군 소양면 대성리에 있던 본당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그리고 1908년 성당 공사를 시작해 1914년에 현재의 성당 외형을 준공했다.
특히 전동성당 자리인 남문 밖은 윤지충과 권상연 외에도 1801년 신유박해 순교자들인 유항검과 윤지헌 등이 순교한 곳이기도 할 뿐 아니라 성당을 지을 때에 이들의 순교 현장을 말없이 지켜봤던 남문 밖 성벽 벽돌이 성당의 주춧돌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래서 전동성당은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한 역사의 현장으로, 또 한편으로는 유교적 가치관과 천주교 가치관이 충돌하는 가치 충돌의 상징으로 인식돼 왔다.
하지만 이번 심포지엄에서 토론자로 나선 홍성덕(전주대학교) 교수는 특히 해방 이후 전동성당이 천주교 신자들만의 공간이 아니라 모든 전주시민들의 공간으로 확대돼 왔음을 주목하면서 한옥마을의 시작점에 또 조선왕조를 세운 이성계의 어진이 있는 경기전과 마주하고 있는 전동성당은 이제 가치 충돌의 상징에서 상생의 공간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해야 할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평화신문, 2010년 5월 16일, 이창훈 기자]
라. 윤지충 바오로(1759-1791년) 순교열전
천주께 죄 지을 수 없다... 한국 천주교회 첫 순교자
△ 너는 신주(神主)를 그대로 묻었느냐, 아니면 불살라서 묻었느냐.(전라 감사)
"불살라서 묻었습니다."(윤지충)
△ 네가 그것을 부모처럼 공경했다면, 땅에 묻는 것은 혹 그렇다 치더라도 어찌 불사를 수 있단 말이냐.
"제가 그것을 부모처럼 공경했다면 어떻게 그것을 불사를 마음을 먹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 신주에는 제 부모의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아주 분명히 알기 때문에 불사른 것입니다. 그것을 땅에 묻던 불사르던 먼지로 돌아가기는 마찬가지입니다."
△ 네가 매를 맞아 죽어도 천주교를 버리지 못하겠느냐.
"살아서건 죽어서건 가장 높으신 아버지를 배반하게 된다면 제가 어디로 갈 수가 있겠습니까."
△ 네 부모나 임금님이 너를 재촉한다면 그 말씀을 따르겠느냐.
"……"
△ 너는 부모도 모르고 임금도 모르는 놈이다.
"저는 부모님도 임금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죽어도 아버지 배반할 수 없어"
윤지충(尹持忠, 바오로)이 옥중에서 쓴 「죄인지충일기」(罪人持忠日記)에 나오는 내용으로, 신주를 불사르고 제사를 지내지 않은 죄목으로 1791년 10월 전주에 있는 전라 감영으로 잡혀온 윤지충이 전라 감사에게 문초를 당하는 대목이다. 「정조실록」(권33, 정조 15년)에 기록된 윤지충의 발언은 다음과 같다.
"사대부 집안에서 신주를 세우는 것이나 죽은 사람 앞에 술과 음식을 올리는 것은 천주교에서 금하는 것입니다. 서민들이 신주를 세우지 않는 것을 나라에서 엄하게 금지하는 일이 없고, 곤궁한 선비가 제향을 차리지 못하는 것도 엄하게 막는 예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신주를 세우지 않고 제향도 차리지 않았던 것인데, 이는 단지 천주의 가르침을 위한 것일 뿐으로 나라의 금법을 범한 일은 아닌 듯합니다."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운 윤지충의 폐제분주(廢祭焚主)는 유교가 지배하던 당시 사회체제에 대한 정면도전이었다. 유교에서 절대적 가치를 지니는 상례(喪禮)를 거부한 것은 전통과 질서에 대한 반역이자 양반을 중심으로 한 권력구조에 대한 저항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를 국가에 대한 반역으로 받아들인 조정은 천주교 신자들을 사회 반동세력으로 몰아 박해를 가하기 시작했다. 결국 윤지충은 한국교회 첫 번째 순교자가 된다.
윤지충은 자신의 행위가 문제가 될 것임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윤지충은 왜 목숨을 걸고 이 같은 일을 벌였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사에 관한 당시 교회 입장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16세기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여러 수도회 가운데 예수회는 중국 유교문화에 수용적 태도를 취하면서 조상제사를 조상에게 효를 다하는 미풍양속으로 간주했다. 반면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는 조상제사를 미신행위로 여겼다.
선교회 간 견해 차이로 100여 년간 지속되던 제사논쟁은 1715년 교황 클레멘스 11세와 1742년 교황 베네딕토 14세 교황령으로 일단락됐다. 두 교황은 조상제사를 미신행위로 보고 엄하게 금했다. 따라서 신자들은 제사에 참례하거나 신주 또는 신위(神位)라고 써붙인 위패를 집안에 둘 수 없었다. 시신에 절하는 것 역시 금지됐다.
교황의 이런 가르침은 1790년 북경을 통해 우리나라에 전해졌다. 유교를 숭상하던 당시 조선사회에서 제사를 금한다는 천주교 가르침은 일반인들은 물론 천주교에 갓 입교한 신자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적지 않은 이들이 천주교를 떠나기도 했다. 그러나 굳은 신앙을 가졌던 윤지충은 그럴 수 없었다. 순교의 칼날을 자초한 것이다.
명례방서 '천주실의' '칠극' 접해
윤지충은 1759년 전라도 진산 장구동에 살던 명문 양반가에서 맏이로 태어났다. 6대조가 윤선도(尹善道)이며, 윤두서(尹斗緖)가 증조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품행이 단정했던 윤지충은 과거에 뜻을 두고 학문에 정진한 끝에 1783년 봄 진사시험에 합격했다. 1784년 겨울 서울로 올라온 윤지충은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당시 천주교인들이 자주 모이던 명례방 김범우 집을 찾아갔다. 그는 그곳에서 「천주실의」(天主實義)와 「칠극」(七克) 등 천주교 서적을 빌려 연구와 묵상을 거듭하다가 1786년 정약전에게 기본교리를 배운 뒤 이듬해 정약전을 대부로 친척인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다.
집으로 돌아온 윤지충은 어머니와 동생 지헌(持憲)은 물론 자신의 명성을 듣고 각지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천주교 교리를 가르쳤다. 윤지충은 또 이웃에 살던 외사촌 권상연(權尙然, 야고보, 1751~1791, 하느님의 종 125위에 포함)에게도 자신이 읽던 천주교 서적을 빌려주고, 신앙에 눈뜨게 했다. 권상연은 윤지충에게 세례를 받았다.
1790년 윤유일이 중국 북경에서 가져온 구베아(Gouvea) 주교 사목서한에 조상제사 금지 조항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윤지충은 교회 가르침에 충실하고자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워 그 재를 집 뜰에 묻었다. 신주를 넣었던 빈 궤(櫃)만 사당에 세워 놓았다.
1791년 음력 5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윤지충은 장례절차를 고민하다 상주로서 예의를 갖춰 장사를 지냈다. 그러나 어머니 위패를 만들지 않았고, 제사도 지내지 않았으며, 음식도 차리지 않았다. 권상연도 그의 결정에 따랐다.
윤지충의 제사폐지 행위를 목격한 친척과 친구들은 그를 천륜을 어긴 죄인이라 비난했고, 이 사건은 조정에까지 알려지게 됐다. 조정은 진산 군수에게 윤지충과 권상연을 체포할 것을 명령했고, 체포령 소식을 들은 윤지충은 충청도 광천으로, 권상연은 충청도 한산으로 피신했다. 진산 군수가 그들 대신 윤지충의 숙부를 감금하자 두 사람은 숨어있던 곳에서 나와 진산 관아에 자수했다. 1791년 10월 중순께였다.
진산 군수는 먼저 그들을 달래면서 천주교 신앙을 버리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그들은 천주교가 진리임을 역설하면서 절대로 신앙만은 버릴 수 없다고 대답했다. 여러 차례 설득과 회유에도 그들이 태도를 바꾸지 않자 진산 군수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그들 마음을 돌릴 수 없다고 판단해 전주 감영으로 이송했다.
전주 감영에서 전라 감사는 신주를 모시지 않고 부모 제사를 지내지 않는 일은 짐승보다 못한 짓이라고 꾸짖고, 이는 국가에 대항하는 행위라고 추궁했다.
그러나 윤지충은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면서 당당하게 자신의 신앙을 증거했다. 화가 난 전라 감사는 혹독한 형벌을 가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결국 정조 임금은 두 사람을 처형해야 한다는 대신들 뜻을 받아들여 이들의 처형을 허락했다. 전라 감사는 당시 윤지충을 이렇게 묘사했다.
"형문을 당할 때 피를 흘리고 살이 터지면서도 찡그리거나 신음하는 기색을 얼굴이나 말에 보이지 않았고, 말끝마다 천주의 가르침이라고 하였습니다. 심지어 임금의 명을 어기고 부모의 명을 어길 수는 있어도 천주의 가르침은 비록 사형의 벌을 받는다 하더라도 결코 바꿀 수 없다고 하였으니, 확실히 칼날을 받고 죽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뜻이 있었습니다."(「정조실록」 권33, 정조 15년)
즐거운 얼굴로 담대히 칼날 받아
사형 판결문이 전라 감영에 하달되자 전라 감사는 집행을 서둘렀다. 1791년 12월 8일 윤지충은 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잔치에 나가는 사람처럼 즐거운 얼굴로 군중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설교하면서 씩씩하게 나아갔다. 모진 태형으로 초죽음이 된 권상연은 "예수, 마리아"만 되뇌며 걸어갔다.
윤지충은 전주 풍남문 밖 형장에서 참수됐다. 참수 당하기 전 그는 목침 위에 머리를 고이고 "예수, 마리아"를 여러 번 부르며 태연하게 칼을 받았다. 그의 나이 33살이었다.
친척들은 9일 만에 두 사람 시신을 거둘 수 있었다. 그들은 시신이 조금도 썩은 흔적이 없고, 형구에 묻은 피가 방금 전에 흘린 것처럼 선명한 것을 보고 놀랐다. 교우들은 여러 장의 손수건에 순교자 피를 적셨으며, 그 가운데 몇 조각을 북경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기도 했다. 당시 죽어가던 사람들이 이 손수건을 만지고 나은 일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가 순교한 터에는 후일 성당이 세워졌다. 현 전주교구 전동주교좌성당이다.
가톨릭과 조상제사
20세기 들어 제사 금지에 관한 교황 가르침은 바뀌었다. 교황 비오 12세는 1939년 '중국 의식(儀式)에 관한 훈령'을 통해 제사에 대해 관용적 조치를 취했다. 200년 전과 달리 조상제사를 미신이나 우상숭배가 아닌 사회 문화적 풍속이라고 전향적으로 해석한 까닭이다.
이에 따라 한국교회는 시신이나 무덤, 죽은 이 사진(영정)이나 이름이 적힌 위패 앞에서 절을 하고 향을 피우고 음식을 차리는 행위 등은 허용했다. 하지만 위패에 '신위' 또는 '신주'라는 글씨는 쓰지 못하도록 했다. 참된 신은 하느님 한 분뿐이기 때문이다. 「한국 천주교 사목지침서」는 제례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제사의 근본 정신은 선조에게 효를 실천하고, 생명의 존엄성과 뿌리 의식을 깊이 인식하며, 선조의 유지를 따라 진실된 삶을 살아가고, 가족 공동체의 화목과 유대를 이루게 하는 데 있다. 한국 주교회의는 이러한 정신을 이해하고 가톨릭 신자들에게 제례를 지낼 수 있도록 허락한 사도좌의 결정을 재확인한다"(제134조 1항).
[평화신문, 2011년 8월 28일, 남정률 기자]
권상연(야고보) 순교자 전
권상연(權尙然, 야고보)은 안동 권씨의 양반 가문 출신으로,1751년 윤지충과 같은 곳에서 아버지 권세학(權世擇)과 어머니 전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일찍 이 부모를 여의었다. 권상연의 집안 역시 남인으로 권근의 후예였다. 그의 집안은 조상 대대로 공주 탄방에서 살다가 대사간을 지낸 고조부 권기가 당쟁에 휘 말리면서 진산 땅으로 이사 온 듯하다. 그의 할아버지 권기징은 딸 다섯을 두었는데, 맏딸은.윤지충의 아버지 윤경에게,둘째 딸은 유항검의 아버지 유동근에게 시집보냈다.
그래서 권상연에게 윤지충과 유항검은 고종 사촌이 된다.
윤지충은 가문의 전통대로 유학에 힘썼고, 과거 준비에 몰두하여 스물다섯 살이 되던 1783년 봄 증광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그런 그가 천주 신앙을 갖게 된 데에는 교회의 초기 지도자들이었던 인척들의 영향이 컸다.
정약전,약종 . 약용 형제는 고종 사촌이고,이승훈은 고종 사촌 매형이며, 유항검은 그의 이종 사촌이다. 또 이벽은 그의 누이가 정씨 형제들의 이복형인 정약현에게 시집갔으므로 윤지충과는 사돈간이 된다.
정 약전의 영향으로 1784년에 천주교에 입교한 윤지충은,3년 동안《천주실의》(天主實義)와《칠극》(七究)을 공부하여 천주교의 기본 교리를 안 뒤 1787년에 정약전을 대부로 하여 이승훈에게 바오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어머니와 동생 윤지헌에게 교리를 가르쳤고,지헌에게는 프란치스코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주었다. 또한 윤지충은 개인 성화(聖化)에 힘쓰는 한편, 자기의 명성을 듣고 홍성 . 고산 . 고창,무안 등지에서 찾아온 사람들에게 힘껏 교리를 가르쳤다.
한편 권상연은 이웃에 살던 윤지충과 친밀히 내왕하며 지냈다. 그러던 중 윤지충이 1784년 서울에 갔다 온 뒤《천주실의》와《칠극》을 탐독하자,권상연도 그 책들을 빌려 보고 신앙에 눈뜨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뒤 윤지충으로부터 야고보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체포령을 피해 한동안 숨어 있던 권상연과 윤지충은 윤지충의 숙부가 감금됐다는 소식에 관아에 자수했다. 진산 군수는 자신의 힘으로는 두 사람을 회유할 수 없다는 판단이 들자 전주 감영으로 이송토록 했다.
전주 감영에서 두 사람은 갖은 문초를 겪으면서도 신앙을 굽히지 않자 전라감사는 조정에 장계를 올려 두 사람에 관해 보고했으며 조정에서 두 사람을 처형해야 한다는 소리가 커지자 결국 임금은 처형을 윤허했다.
권상연은 1791년 12월 8일(음력 11월 13일) 전주 남문 밖 현재 전동성당 자리에서 윤지충에 이어 참수 순교했다. 그의 나이 40살이었다.
윤 바오로와 권 야고보의 친척들은 9일 만에 관장의 허락을 얻어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둘 수 있었다. 이때 그들은 그 시신이 조금도 썩은 흔적이 없고, 형구에 묻은 피가 방금 전에 흘린 것처럼 선명한 것을 보고는 매우 놀랐다. 이후 교우들은 여러 장의 손수건을 순교자들의 피에 적셨으며, 그 가운데 몇 조각을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당시 병으로 죽어 가던 사람들이 이 손수건을 만지고 나은 일도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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