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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끗하게 되었더라 (열왕기하 5:9-15)
2023.10.15 주일예배
9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10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11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12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
13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
14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15 나아만이 모든 군대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의 앞에 서서 이르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청하건대 당신의 종에게서 예물을 받으소서 하니
지난 주 고쳐주소서 하면서 저희들의 아픔을 올려드렸는데 많은 치유가 일어났죠? 매주 아무리 기도해도 우리는 영혼이 아프다. 날마다 기도해야한다.
작년 2월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대대적인 침략으로 시작된 전쟁이 아직도 계속되는 가운데 중동에서도 이슬람 테러집단이 하마스와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왜 전쟁이 일어나냐면 서로가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는데, 그 성전을 탈환하기 위해서 일어난 것이다. 사우디의 메카도 평생 한번 가보는게 소원이라고 하잖아요. 성전에서 예배드리는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아시는가? 성전을 탈환하려고 한치의 양보가 없는, 성전을 뺏길 수 없는. 온라인예배 드리시는 분들은 다 성전에 와서 예배드리는게 인생의 목표가 되셔야한다.
대만도 언제 중국이 침략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대만은 전쟁 시뮬레이션을 하고있다고 한다. 지도자들이 국민이 몇명이 죽든 상관이 없다. 자기 권력만 쟁취하면 되니까. 우리 남북관계도 정전 70년이 지나도록 시한폭탄같다. 잃을 것이 없으면 침략할 수 있잖아요. 온 국민이 아사상태에 빠졌으면 침략해보고 죽는다, 이런것들을 읽어야한다.
가정 거리 직장에서도 늘 갈등과 다툼이 이어지는 인생이지만 세계 도처에서 무기를 사용하는 전쟁이 일어나고 끔찍한 전쟁 범죄가 이어지니까 무엇때문에, 누구때문에 이렇게 사람을 마구 죽여대는지. 100% 인간이 얼마나 악한 존재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상황을 주님께서 고쳐주시고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더러움을 깨끗하게 해주시길 기도한다. 온 교회가 회개하며 기도해야하겠다. 이 간절한 기도를 담아 오늘 말씀을 함께 생각하면서 우리 모두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의 인생이 되길 축복한다.
1. 내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나아만을 고치기 위해서 어린 소녀가 안주인에게로, 안주인이 나아만에게로, 나아만이 아람왕에게로, 아람왕이 이스라엘 왕에게로, 그리고 엘리사로 이어지는 우연같은 만남이 이어진다. 이것은 준비된 인연이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장중아래 있다. 내 인생은 모두 하나님의 작품이다. 여기 내 생각이 들어갈 틈은 없다. 그러나 이 땅에서 무언가 이룬 사람들은 그 악한 내 생각이 하나님 자리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 믿기가 가장 어렵다고 한다. 자신이 하나님인데 어떻게 하나님을 믿겠는가. 그러니 하나님은 나아만에게 하나님을 알리는 것부터 해야한다. 그러면 양육을 해야겠죠.
9절
나아만이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렀다고 한다. 여호람 왕에게 갈때는 은 10달란트 금 6천개 의복 열벌을 가지고 갔다고 했잖아요. 도움을 청하는 모습으로 겸손한 모습으로 갔다. 그런데 엘리사를 찾아가는 나아만의 모습은 이스라엘을 침략했던 점령군 사령관의 모습으로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선지자의 문 앞에 섰다. 이 세계적 지도자인 나아만은 벌써 사람을 차별하고 하나님 자리에서 하나님을 자기 병이나 고쳐주는 분으로 오해하는, 내 생각이 있다.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같이 된대요! 라는 내 생각이 바로 이것이다. 나아만은 말을 탄채 이리오너라 하면서 대문 앞에서 버티고 있다.
어떻게 엘리사가 대하는가?
10절
이런 나아만을 특별대우하지 않고 여전한 방식으로 사자, 곧 비서 게하시를 보낸다. 한마디로 나아만의 내생각에는 문전박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푸대접을 했다. 그런데 더 나아가서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번 씻으라고 한다. 그러면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고 한다.
이 말을 듣고 나아만이 어떻게 하는가?
11-12절
나아만은 분노했다. 엘리사의 집 문에서 몸을 돌이켜 떠난다. 나아만의 하나님 자리에 앉아있는 내 생각은 모든 것에 분노를 가져온다. 자기가 이룬 것이 많을수록 분노를 가져온다. 어디에 분노했을까? 세가지쯤 찾아보겠다.
첫번째 이유, 선지자 자신이 직접 자기 앞에 나타나지 않아서 화가났다. 아람의 총 사령관인 나아만이 누구 집 문앞에서 기다려보았겠는가. 어쩌다 기다리는 일이 있더라고 곧 집주인이 직접 나와 ‘아이고 장군님’ 영접하지 않았겠는가? 이스라엘 왕도 자기가 왔을 때 탄식은 했지만 어쨌든 쩔쩔맸다. 이스라엘 왕도 아닌 선지자가 큰 저택도 아닌 산 속 작은 집에 사는 사람이 종을 보내 처방만 내리니 나아만 장군의 자존심이 확 상했다. 이것이 선한 것이 없는 내 생각이다.
두번째 이유는 선지자의 처방도 너무 성의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병을 고치기 위해 아람에서 안해본 주술과 시술과 요법이 없었겠죠. 그러니 나아만은 여러가지를 경험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는 적어도 자기 여호와께 치료를 구하는 화려한 의식도 벌이고 손을 상처 위에서 흔드는 것 같이 신비한 술법을 쓰며 온 정성을 다해 자기를 치료해주리라 기대했다. 그런데 선지자란 인간이 자기 종 한명을 띡 보내더니 강물에 가서 씻으면 나을거다 말 한마디 툭 던지고 마니 어처구니가 없다.
세번째 이유는 처방의 내용도 찌질했기 때문이다. 나아만이 요단강을 너무 잘 안다. 북쪽 갈릴리 호수부터 남쪽 사해까지 흐르던 강의 길이가 360킬로미터 정도로 꽤 긴데 그 물은 흙이 많이 섞여서 색이 누렇다. 더러워보일 뿐만 아니라 신비하거나 영험할 것 같은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반면 나아만의 고향, 아람의 수도 다메섹에 흐르는 아바나와 바르발은 서쪽 산지에서 흘러나오는 강이라서 매우 맑고 깨끗하다. 전체 길이는 요단보다 짧아도 훨씬 생명력이 있어보이는 강이다. 그러니 나아만 입장에서는 나병을 치료하기 위해 요단강에 들어가는게 전부라면 굳이 적국 깊숙한 곳까지 올 필요가 없잖아요. 자기 집 옆에있는 아바나와 바르발이 요단강과 비교할 수 없이 깨끗하고 좋기 때문이다. 그러니 요단에 들어가면 나을 것이라는 처방은 나아만에게 너무너무 초라한 치료법이다.
하나님 자리에서 하는 내 생각은 분노만 일으킨다. 그래서 떠나버리는 것이다. 말들과 병거들이 상징하는 나아만 장군의 자존심과 자부심이 있다. 나아만은 내 생각으로 특별히 꽉 차서 거만할 수 밖에 없는 군대장관이다. 이런 거만한 나아만에게 엘리사의 태도나 그가 전한 말씀은 속을 뒤집어지게하는 공격일 뿐이다. 도저히 봐줄 수도 들어줄수도 없는 얘기다. 내 생각이 꽉 차있으면 들어야 할 말씀이 들리지 않죠. 요단강에 가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될것이라는 말씀은 나아만의 병을 고쳐줄 말씀이다. 그런데 이 말을 전하는 사람이 어떻고 태도가 어떻고 내용이 어떻고.. 판단하는 내 생각이 강하게 있다. 내가 맞는데, 내 방식이 옳은데, 당신이 뭘 알아, 선교사라고 해도 세계를 알아 정치를 알아 하는 것이다. 내 방식이 옳은데 여기 왜 못맞추냐 하는 확신이 가득찬 것이다. 이것이 거만한 내 생각이다.
나아만이 나병이라는 고난이 있으니 자기 집 여종이 전한 말을 들었고 왕에게 부탁했고 직접 이스라엘 왕에게 왔다. 또 그가 알려주는대로 엘리사의 집까지 왔다. 하지만 여기까지가 그가 낮아질 수 있는 내 생각의 한계였다. 내 생각은 한계가 있다. 내 병을 고칠 수 있다는데, 이까짓거 못참냐 한번 더 참지 하면서 참고참고 엘리사 집까지 왔다. 엘리사가 자기를 맞는 태도를 보고 지금까지 참았던 화가 압력솥 터지듯 한번에 폭발했다. 부부간에도 참고 참다 더이상은 못참겠다 하면서 성품으로 하면 터질 때가 온다. 누르고 눌러도 눌리지 않는 내 생각의 거만함 때문이다. 금그릇이 아무리 낮아지려고 해도 한계가 있다. 그렇지만 거만함은 잘난 사람들만 갖는 태도이다. ‘내가 남보다 낫다’고 여기는 마음이 다들 종류별로 있다. 나아만의 거만함은 ‘나만 잘났어’ 하는 생각이잖아요. 그런데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한다. 빌립보 교회 개척멤버는 옷감장사 루디아, 귀신들렸던 여종, 감옥을 지키는 간수 아닌가? 빌립보는 로마의 인정받는 대단한 도시였지만 거기서 바울의 전도를 듣고 교회를 세운 사람들은 전혀 대단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런 사람들이 빌립보 사회의 무시와 조롱을 받으며 교회를 키웠지만 결국 이들도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지 못해 문제가 발생했다는게 빌립보서 내용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인간은 누구든 본성으로 내가 남보다 낫다 하는 거만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10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되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사람이 잘하는 것은 나아만의 한계이다. 나병이 아니면 나아만의 한계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니 내 생각은 어디서나 있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남보다 낫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하는 분들도 계시지요? 물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 생각 자체가 우리가 얼마나 교묘하게 자신을 남보다 높이려고 하는 존재인지를 증명해주는 생각이다. 그것이 가장 자신을 남보다 낫다고 여기는 교만함의 끝판왕이다. 목장에서 나누는걸 보고 찌질하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교만이다.
내 생각의 거만함을 인정해야한다. 이 거만함은 부인할수록 커진다. 거만함은 말씀을 들을 수 없게 하고, 말씀을 듣지 못하면 결코 깨끗하게 될 수 없다. 영적인 복의 첫째가 그러므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야 한다. 나아만은 괜찮은 사람이다, 충성심 있고 권세있고 아내 말 들을 줄 알고 계집종의 말까지 듣는 그야말로 최고의 리더십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것이 내 생각의 한계인 자기 성품이다.
이스라엘 초대 총리 벤구리온은 청년 리더 시몬 페레스를 눈여겨 보면서 1년만 도와달라고 했는데 그를 20년 가까이 잡아두고 의지했다. 사람들이 물었다. 왜 그 청년을 그토록 믿어요? 그의 대답은 항상 같았다. 세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 거짓말하지 않고 둘째, 결코 다른 사람을 흉보지 않고 세번째, 내 방에 올때마다 대부분 새로운 아이디어를 갖고 찾아왔다고. 한 사람의 위정자를 위해 기도하는데 바로 이런 시몬 페레스 같은 사람을 말할 것 같다. 이 사람은 이스라엘을 벤구리온의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바꾼 사람이다. 그리고 일생을 테러 위협에 시달리면서도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이에 오슬로, 평화협정을 맺어 노벨상까지 받은 사람이다. 그 한사람의 아이디어때문에 이스라엘이 건재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잘 모르겠지만 그분은 정말 하나님의 생각처럼 보인다. 총리를 열번하고 대통령을 두번하고 92살인가에 가셨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 봐도 어쨌든 내 생각을 버리고 남을 낫게 여기니까 거짓말하지 않겠죠. 그리고 남을 낫게 여기니까 흉보지 않겠죠. 고집을 버리니까 새로운 아이디어가 샘솟는 것이다. 모두가 내 생각을 부르짖는다. 피해의식으로, 권세로, 혹은 집착으로, 혹은 옳고그름으로. 다들 내 생각을 부르짖기 때문에 부부간이고 교회고 집이고 나라고 죽자고 싸우는 것이다. 이걸 생각하면 이스라엘은 정말 대단하다. 그러나 참 또 이스라엘은 여기까지이다. 아직도 나라적으로 선민의식이 대단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예수님을 믿지 않고있다. 그래서 고난이 오는 것이다. 중동 지방에서 유일하게 잘 사는 나라이다. 인구 천만이 전세계를 리더하고있다. 뭔가 보여주고있지만 그사람들이 금그릇이다. 전쟁중에도 침착하다. 저는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세계 판도가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여튼 큐티하면 하나님이 누구신지 찾고 하나님께 질문하는 것은 내 생각을 버리는 훈련이다. 다들 문제가 안풀리면,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말씀하실까요?’ 하면서 다같이 큐티하며 질문하기에 우리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는 것이다. 내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으로 모아진다.
적용
내 생각으로 분노하고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세상에서의 자존심 자부심 특별대우 등
더 나가서 말씀을 듣고 분노해서 예배나 목장의 자리를 박차고 떠났던 적은 없습니까?
‘나는 적어도 거만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하는 나의 고등 거만이 있을까요?
가족을 향해 “내게 이 정도는 해줘야 하는데…” 라며 거만하게 기대하는 내 생각은 무엇입니까?
2. 벌떼처럼 나아와 해석해 주는 지체들의 말을 잘 들어야 합니다.
13절
말들과 병거들을 몰고온 나아만 행렬은 분노해서 왔던 길을 돌아가고 있다. 나아만은 지금 너무 열받았다. 천하보다 귀한 자신의 힘과 시간을 들이면서 온 길인데 병을 고치지 못하고 헛걸음을 했으니 너무 속이 상해 집에 돌아가자마자 어린 소녀를 잡아죽이려고 했을 것이다. 수행하던 종들도 잔뜩 분노하신 장군님 눈치보느라 아무 말도 못하고 갔을 것이다. 종들은 장군님 눈치보느라 당장은 아무 말도 못했지만 돌아가는 길에 이건 아니다 생각했다. 장군의 부하 중 제일 높은 사람 한명이 혼자 말씀 드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오늘 ‘종들이’ 라고 복수형으로 말한다. 종들 여럿이 함께 벌떼처럼 장군에게 나아가는 것이다. 여기서 나아오다 는 가까이 간다는 뜻이 아니라 아래사람이 윗사람에게 공손한 태도로 나아간느 것을 말한다. 기분이 많이 안좋은 장군님을 잘 설득하려고 기분이 상하시지 않기를 바라면서 꼭 들으셔야 하는 말씀을 올리려고 그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생각을 많이 하고 나아가는 것이다. 아마 벌떼처럼 나아와서 장군 앞에 납작 엎드렸을 것이다. 그러면서 장군을 장군님이라고 하지 않고 주인이라고도 하지 않고 내 아버지여 하고 불렀다. 주인을 향한 최고의 존경과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다. 지금 이 종들이 잔뜩 굳은 나아만의 마음을 녹이는 아이스브레이킹, 마음열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목장에서도 아이스브레이킹을 잘 해야한다.
그리고 나아만을 설득한다. 선지가가 어려운 일 하라고 말했다면 그대로 하셨을 것 같은데요, 에베레스트 산에 올라가라고하면 잘 하셨을 것 같은데, 올라가서 떠오르는 해를 보고 빌어라 하면 하셨을텐데요, 그런데 선지자가 하라고 말한 것이 너무 쉬워서 우습지요, 말이 안돼요, 흙탕물 같은 요단강에 내려가서 씻으라니 말이 됩니까, 그래도요 여기까지 오셨으니 속는셈 치고 한번 해보시는게 어떨까요. 그렇게 얘기하니 저도요 저도요 하면서 칼날 위의 물방울처럼 조심하며 벌떼처럼 설득했다. 구원을 위한 이런 태도가 너무 중요하다. 나아만에게 엘리사가 처방하는 방식과 내용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마음이 높아 그 말씀이 들리지 않고 튕겨져 나가잖아요. 나아만이 내 생각으로 귀가 막혀 듣지 못하는 말씀을 그의 종들은 들었다. 종들은 선지자가 시키는대로 하면 고침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장군보다는 비천한 환경에 있는 종들이 말씀을 들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마음이 낮았기 때문이다. 말씀을 쉽게 받아들이고 쉽게 순종할 수 있는 낮은 환경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에 대한 칭송을 하지 마셔야한다. 하나님이 그 환경을 만드셨다. 왜냐하면 평소 당한게 많기 때문에 분노하는 주인도 이해가 된다. 종들은 요단강에 들어가기도 쉽다. 그래서 벌떼같이 나와 외치는 것이다. 그 말씀은 그게 아니에요, 화를 내실 일이 아니에요, 절대 손해보는 일이 아니에요, 이혼하는게 뭐가 급해요, 눈 딱 감고 말씀대로 한번만 해보시라고. 어려운 선지자의 말씀을 한목소리로 회석해서 외쳐준다.
이렇게 벌떼처럼 나아와 해석해주는 지체가 있을 때 물에 들어가기가 쉽게된다. 우리가 이혼하고싶고 자살하고 싶은 생각 안드는 사람이 어딨겠는가. 하나님이 없는 인생은 겉으로 아무리 거만해보여도 속으로는 살 수가 없이 힘들다. 우리가 아무리 겉으로 강해보여도 속은 연약하다. 이 곤고함을 홀로 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이 벌떼처럼 해석해서 나아와서 말씀을 해석해주는 공동체 안에 있을 때 이혼하고 자살하고 싶은 마음 그대로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혼도 막아지고 자살도 막아지는 것이다. 우리는 다 연약하지만 우리를 한 공동체로 불러주신 하나님이 전능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강한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다 이상하지만 청년부에서 이혼을 안하잖아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적용
말을 잘 듣는 편입니까, 일단 “아니”부터 하는 편입니까?
벌떼처럼 나아와 외치는 지체들의 말을 들었더니, 어느덧 깨끗함을 얻은 경험이 있습니까?
아니면 이 공동체를 맹신주의라고 생각됩니까?
지체들과 함께 나아가 공감해 주고 해석해 주어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벌떼처방을 소개해드린다. 목장에 잘 참석하지만 회개하지 않고 처방에도 순종하지 않는 집사님 부부를 권면하는 목장나눔이다. 3년이나 됐는데 큰 사고가 났다. 벌떼 처방은 이럴 때 하는 것이다.
상으로 받은 와인병에게 화풀이하며 깨려는 아내를 막으려 몸싸움을 하다가 그 병에 아내가 다쳤다. 그래도 목장에는 다 왔다.
목자님: 집사님은 대체 왜 처방했는데 속이고 세상모임에 갑니까. 죽는걸 알면서 나가는 집사님은 공동체의 권면이 두렵지 않으시는가. 장모님께 보내는 카톡은 부인집사님과 상의하셔서 합의된 내용을 분별하며 보내길 바라겠다. 공동체에 나오는 이유와 사명이 무엇인지 그렇게 말씀드려도 모른다하시면 안된다. 예배를 회복하여 회개하시라 하지 않았는가. 두분이 변함이 없다. 공동체에서 들으라 했는데 각자 산다고 하신다.
목원: 전 하루만 쉬고싶어도 오늘 쉬면 내일을 걱정해야하기에 너무 힘들다. 그런데 여기서 제일 잘먹고 잘사는 환경의 두분이 왜그리 싸우시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또한 죽을 것 같아서 나는 가게도 하나 더 해보려하지만 목장에서 하지 말라고 권면하시기에 일주일을 목장에 와서 듣는 적용 하나로 버틴다. 왜 싸우시면서 목장은 나오세요. 예배는 잘 못드리시면서 기도만 해달라고 하시는지 그것도 잘 모르겠다. 그렇게 안듣고 안되면 안나오시고 하지말고 이혼하시고 떠나셨으면 하는 마음이 너무 크다. 두분은 잘살기만 하면 되는데 왜그리들 싸우시는가. 목장에서 답을 다 알려드리는데 일부러 그러는 것도 아니고 왜이렇게 말을 안들으십니까
목원2: 목장이 행복해서 즐기려고 나오는 분들 한분도 없다. 여기와서 나누지 못하고 듣지 못하면 죽을 것 같은 절박함에 여기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내신 공동체에서 말씀으로 권면하고 기도하는데 왜 듣지 않고 구원이 뭔지 회개가 뭔지 모르겠다고 날마다 그러세요, 목자님이 정신과 가라는 말은 믿음이 없어 들을 힘이 없으니 일단 병명이라도 인정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 첫걸음이 나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이다. 그래서 치료받으라고 하는 것이다. 목자님 처방대로 약드세요. 3년을 미루셨으면 이제 들을때 되셨다. 내일 당장 약드세요. 우리는 공동체 누구라도 놓치고 싶지 않다. 우리 안에서 변하시는 두 분 보고싶다. 두분이 회개하는 목장이 되게해주세요.
집사님: 네 알겠습니다 듣겠습니다.
목자님: 우리들교회에서 변화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변화가 안되면 결국 말씀이 안들리니까 떠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사건이 변하는건 없다. 내가 말씀듣고 변해야한다. 모두들 말씀 안에서 변화하는 우리 공동체가 되어가십시다.
저는 이런 목장식구들만 있으면 소도 잡고 말도 잡을 것 같다. 목장식구들 너무 귀엽다. 그리고 진짜 사랑하지 않는가? 이런 얘기 듣고 떠나면 나아만이 분노해서 떠나는 것과 똑같다. 감히 나한테, 내가 제일 잘사는데 하면서 떠나는것과 똑같다.
어떤 부목자님은 행복강의로 유명한 하버드 탈 벤 샤하르 교수님을 포럼에서 비대면으로 만났고 질의응답할 기회가 있었다. 행복핵심요소 는 돈에 좌우되지 않고 육체적 건강을 바탕으로 강한 유대관계감이 중요하다고 하더라. 이런 관계는 육체적 건강까지 좋아지게 한다고 한다. 유명한 강의를 들어보면 목사님 설교에 이미 다 나와있는 얘기이다. 성경말씀에 근거했기 때문에 더 논리적이고 우리를 살리는 말씀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벌떼목장이 최고의 명품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우리들교회는 나아만에게 복음을 소개했던 어린 소녀들이 많기때문에 벌떼목장이다. 이렇게 해석하는 목장식구들 너무 매력있고 귀하다.
3.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14-15절
나아만은 못이기는척하고 아람으로 가던 발걸음을 돌려 요단강 쪽으로 내려간다. 종들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사람의 말에 순종한다. 내 생각에는 할때는 분노했는데 내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하니까 내려가는 것이다. 공동체가 얼마나 중요한가. 적용하도록 도와서 내려가게한다. 그래서 낮아지게 된다.
종들의 말과 모든 처방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것을 실제로 실천하기는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처음 몇번은 몸을 씻을 수도 있다. 까짓거 밑져야 본전인데. 그런데 한두번 했을때 몸이 조금이라도 변하면 확신을 가지고 조금씩 순종할 것 같은데 일곱번이 될때까지 아무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영적진실성의 결과는 인내니까. 이렇게 되면 대개의 사람들은 그 말에 대한 진실성에 의심 품고 하던 일을 중단하기가 쉽죠. 좋은 강에 들어가서 고친다면 이게 주술과 다름이 없죠. 그런데 말씀대로 순종해서 치유가 일어난 것이다. 강에 들어가서 치유되는 것이 아니다. 그동안 수많은 재앙과 편지등 오고갔지만 실제 치료는 너무 간단하게 끝마쳐진다. 열왕기의 기자는 나아만이 어떻게 치료를 받았는지에대해서는 관심이 하나도 없는 것 같다. 요단강 물 속에 자신을 완전히 잠글 정도로 내려갈 뿐 아니라 그 일을 일곱번 반복한다. 아울러 성경에서 물에 잠기는 것은 주로 죽음을 상징한다. 이 죽어지는 순종은 십자가의 겸손을 의미하고, 회개를 의미하고 거룩으로 나가는 것이다. 물속에 몸을 전부 집어넣는다, 잠근다 이것이 타발동사인데요. 10절 엘리사가 명령했을 때는 라하츠 를 썼다. 나아만이 엘리사가 명령한 동사보다 타바르, 더 철저하게 몸을 씻었음을 보여준다. 몸을 잠그다라는 말의 의미 타발은 성경에 열여섯번밖에 쓰이지 않은 단어인데 제사의식이나 정결의식에서 피나 물에 몸을 담그는 행동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7은 완전함을 나타내는 완전수이다. 레위기 14장에 나타난다. 오늘 14절 마지막 깨끗하게 되었더라 는 어렵지만 들어보셔라. 계속적 와우의 깨끗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타하르의 미완료형이 결합된 형태이다. 해석하면 나병에 걸린 나아만의 흉측한 피부가 마치 어린아이의 피부처럼 깨끗하게 된 일이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진행된게 아니라 요단강에 일곱번 몸을 잠근 직후에 바로 단번에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여리고때 열세바퀴 돌때까지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다가 마지막에 여리고가 무너진 것처럼. 본문에 타하르는 병의 치유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데, 이 단어는 제사의식이나 정결의식에서 많이 사용되는 단어이다. 레위기 14장 문맥에서 타하르는 단지 깨끗하다 라는 의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의미가 있다. 그만큼 나아만은 엘리사가 명령한 것보다 더 진심으로 기대치보다 회개를 했고 그러므로 단순히 나아만을 육적으로 치료하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차별없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신 것이다. 병낫기보다 이게 목적이 되어야한다. 엘리사의 말에 순종한 결과 그 살이 어린아이처럼 되었다는 것은 나아만도 2절의 어린 소녀가 가졌던 믿음을 똑같이 가졌음을 의미한다. 이같은 회복을 체험한 후에 15절, 엘리사에게 되돌아온다. 이 슈브? 동사는 거의 대부분 영적인 회심을 수반하는 특징을 가진다. 나아만은 신체적으로나 영적으로 모두 하나님께 돌아왔다. 궁극적으로 나아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치료받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을 살리는 능력을 가지고있다. 결국 깨끗한 자는 살아난 자이고 살아난 자는 겸손한 자이고 겸손한 자는 남을 낫게 여기는 자, 이것이 깨끗한 자이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이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아시겠습니까?
적용
병 낫기가 목적입니까, 하나님의 백성 되는 것이 목적입니까?
여러분의 병에 날마다 애통이된다. 당연히 하나님의 뜻이면 낫게하실줄 믿는다. 그러나 그것보다 하나님의 백성되는 것이 목적이어야한다.
일곱 번 물에 잠기는 죽음에 이르는 순종은 세상에서도 주인의식을 가지면 하게된다. 회사가 힘들어지면 사장은 못할 일이 없다. 그렇게 주인들은 죽음에 이르는 겸손의 순종을 하게된다.
광해군때문에 반정을 일으킨 인조왕과 광해군을 비교하면 광해군은 오히려 그많은 실정을 뛰어넘는 실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거길 잘못했다고 개혁을 일으킨 인조 때는 왕이 되자마자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끊임없이 내우외환이 있었다. 아이러닉컬 하다. 그래서 인조때 우리나라가 없어질뻔 했다.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는 지경에서 인조가 도망을 가니 백성들이 도망가지 말라고 배를 숨겼다고 한다. 저는 조선 왕들을 어렸을때부터 외웠다. 조선의 왕이 3D업종 중 최고인 것 같다. 왕이 되고 모든걸 처리하다가 다 일찍 죽는다. 인조는 왕을 하고싶어하지도 않았다. 드디어 인조가 그렇게 피해다니고 조선왕조에서 전무후무한 대국민사과를 했다. 외로운 성에서 포위당한 채 봄을 맞았다고 한다. 자식을 사랑하고 돌보는 마음은 천성인데 나는 지금 두 아들과 두 며느리를 모두 북쪽 청나라로 떠나보냈다. 얼마나 비굴하게 나라를 지켰는가. 청나라에 아홉번을 절하고 올라가서 살려달라고 했다. 부하들이 유교적인 나라에서 나라가 죽던 살던 이 사람들은 절 못한다. 그래서 더 힘든 일이 생겼다. 사과를 못한다. 돌아보건대 백성을 기르는 자리에 있으면서 나 한사람의 죄때문에 모든 백성에게 화를 끼쳤다. 군사들은 전장의 원혼이 되게 했고 죄없는 백성들은 모두 포로가 되게 하여 아비는 자식을 보호하지 못하고 지아비는 지어미를 보호하지 못하게 하여 가슴을 치고 하늘에 호소하게 하였다. 백성의 부모가 되어 이 책임을 누구에게 돌릴 것인가. 이때문에 고통과 괴로움을 머금고 오장이 메이는듯 하여 뜬 눈으로 밤을 새운다.
이렇게 스스로를 낮추고 나의 죄를 운운하면서 백성들에게 머리를 숙인 자는 전에도 후에도 없었다. 왕으로써 사과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진짜 한 사람이 중요하다. 청나라 황제를 놓고 신하들이 배례를 하지 않아서 전쟁이 커졌다. 다 바보같다. 우리만 잘나면 남이 알아주는가? 그 전에 선조도 임진왜란때 백성들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그런데 인조가 얼마나 낮아졌으면 이런 사과를 했겠는가. 그정도로 여러분들이 생각하고 날마다 사과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그렇게 사과하는게 얼마나 대단한지 지금까지 남아있다. 우리의 사과는 천국에서도 모든 자손들에게 영원히 남아있을 것 같다. 인조가 그다음엔 너무 힘들어 미치기 시작했다고 한다. 권력 앞에선 예외가 없어서 8년이나 청나라에 보냈던 소현세자가 돌아오니까 소현은 청나라의 문물을 배워 나라를 개혁하고 바꿔봐야겠다고 하니 그 아들을 견제해서 독살했다는 설이 있다. 이렇게 권력 앞에서는 그 누구도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사람을 의심하라는게 아니고 내 자신에게 속지 말라는 것이다. 적어도 끊임없이 하나님의 생각으로 분별해야한다. 그것이 회복되어 깨끗케되는 비결인줄 믿는다. 말씀대로 살아가면 적어도 내가 바보처럼 그렇게 속고 당하고 하지는 않는다. 욕심을 내려놔야한다. 깨끗해야 가능한 일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