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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완다, 키베호 성모발현 성지
개요
키베호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유일하게 성모님 발현이 지역 주교에게 공인받은 성지이다. 1962년 르완다는 벨기에로부터 독립하였지만, 정부의 만연한 부패와 군부의 쿠데타, 반정부 단체의 무력 투쟁으로 20년 동안 혼란과 분열이 계속되었으며, 그만큼 가톨릭교회도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때 르완다의 가난한 오지 마을 키베호에서 성모님이 발현하셨다. 성모님은 앞으로 다가올 더 큰 불행을 예언하시며 이를 막기 위해 사랑과 용서를 실천하라고 말씀하셨지만, 불행히도 1994년 르완다 대학살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리고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어 내며 르완다 국민들은 가톨릭 신앙으로 돌아왔다.
성모님의 발현
알퐁신
1981년 11월 28일
토요일 12시 35분 르완다수도 키갈리로부터 남서쪽으로 120km 정도 떨어진 작고 가난한 마을 키베호에서 성모님이 발현하셨다. 당시 키 베호에는 3명의 수녀가 운영하는 한 전문학교가 있었는데, 그 학교 식당에서 점심 급식 봉사를 하고 있던 고등학교 1학년 소녀가 “나의 딸아, 나의 딸아!”라고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저 여기 있어요”라고 답하며 복도로 나갔다. 복도에는 기도하는 자세로 두 손을 가슴 위에 합장하고 흰옷에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내려오는 파란 베일을 쓴 아름다운 여인이 서 있었다. 피부색은 정확히 표현하기 어렵지만 유색 인종에 가까웠다.
그 17세 소녀 알퐁신은 무릎을 꿇고 성호를 그은 다음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신가요?" 여인은 그 지역 언어로 “나는 말씀의 어머니이다”라고 당신의 신분을 밝히고서 알풍신 에 게 어
떤 종교를 선호하는지 물었다. 알풍신은 이내 그 여인이 성모님이심을 알아채고 “저는 하느님을, 그리고 우리를 구원할 구세주를 주신 하느님의 어머니를 사랑합니다”라고 답하였다. 성모님은 “내가 너의 기도를 들었다. 너의 친구들이 믿음이 많이 부족하니, 나는 그들도 믿음을 갖기를 원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성모님이 떠나려 하시자 알풍신은 “성모님을 찬양하라. 오소서, 성령님”이라고 찬미하였고, 이에 성모님은 미소를 지으며 하늘로 올라가셨다.
이어 알품신은 무려 15분 동안 탈혼 상태에 빠져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알품신은 깨어난 후 수녀와 교사에게 자신에게 벌어진 일에 관해 설명하였으나 아무도 믿어 주지 않았다. 오히려 미쳤다고 조롱하며 알풍신이 키베호 출신이 아니라서 특별해 보이려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1981년 11월 29일 이후
다음 날도 발현이 일어났으며, 12월에는 매주 토요일마다 성모님이 발현하셨다. 알풍신이 성모님을 만날 때마다 탈혼 상태에 빠지자 학생들과 교사들은 알풍신에게 성냥불을 갖다 대거나 바늘로 찔러 보았지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첫 번째 발현이 낮 시간 학교 식당에서 일어났다면, 그 이후 발현은 저녁에 기숙사와 학교 교정, 알풍신의 방에서 일어났으며, 성모님이 다음에는 언제 발현하실지 알려 주시고는 하였다. 성모님의 발현 소식은 르완다 전역으로 빠르게 퍼졌고, 사람들은 성모님이 알려 주신 발현 날짜에 키베호로 몰려들었다.
1982년 3월 20〜21일
알풍신은 “내가 죽은 것처럼 보이겠지만 두려워하지 말고 무엇을 묻지도 마세요”라고 말했다. 알풍신의 신비로운 여행은 18시간 동안 지속하였으며 신부와 수녀, 적십자사 의료진 모두가 알풍신이 깊은 잠에 빠진 모습을 보았다. 알풍신의 몸은 곧게 누워 있었는데 상당히 무거워 들어 올릴 수 없었고, 모아 쥔 두 손도 분리시킬 수 없었다. 성모님은 알풍신이 신비로운 여행을 하는 동안 지옥과 연옥, 천국을 보여주셨다.
1982년 4월 2일
성모님이 알풍신에게 사람들의 회개와 죄의 극복을 위하여 묵주기도를 바치라고 권고하셨다.
1983년〜1989년 11월 28일
성모님이 “나의 아들이 머지않아 다시 돌아올 것이므로, 너의 영혼은 그의 재림을 준비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으며, 첫 번째 발현 후 정확히 만 8년이 되는 1989년 11월 28일에 마지막으로 발현하시어 위정자를 향해 메시지를 남기셨다. “권력을 장악하고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들은 국민들의 압제자가 되는 대신 국민들을 구원하여라.” 그리고 성모님은 알풍신에 게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내가 발현한 것은 네가 원했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나탈리
1982년 1원 12일
교사들과 학생들이 “성모님이 알퐁신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나타나신다면 발현을 믿을 것입니다”라고 기도하자, 성모님이 응답하여 20세 나탈리에게 나타나셨다. 나탈리도 탈혼상태에 빠졌다.
1982년 3월 2일
키베호에는늘 물이 부족하였다. 1월과 2월에 기숙사에서 악마와 관련한 이상한 일이 생기자 수녀들은 그 불가해한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루르드 성수를 사용하였는데, 더는 성수가 남아 있지 않았다. 이에 성당과 마을에 물이 꼭 필요한 상황에서 수녀들은 성모 님에게 요청하여 축복받은 물을 얻자고 나탈리에게 말하였다. 3월 2일 나탈리는 발현하신 성모 님에게 축복받은 물을 요청하였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물의 원천을 달라고 말씀드렸다. 성모님이 특별한 행동을 취하시진 않았지만, 성당 언덕 아래에 있는 샘에서 물이 충분히 나오자 사람들은 이를 축복받은 물이라 여겼고 교구에서도 다시 축복하였다.
1982년 8월 5임
성모님은 나탈리에게 “너에게 말한다. 내가 너를 부르지만 너는
귀머거리 상태로 있을 뿐이다. 내가 너에게 요구하는 것들을 언제 할
것이냐? 너는 발현 장소에 두 개의 성전을 짓도록 하라는 나의 말에 무
관심하다. 나는 표징을 주는데 너는 믿지 않고 그대로다”라고 말씀하셨다. 나탈리가 교회 당국에 이 메시지를 전하였지만, 아무것도 진행되지 않았다. 성모님은 나탈리에게 ”83년 12월 3일까지 발현하셨다.
마리 클레어
1982년 3월 2일
성모님은 21 세 마리 클레어에 게도 나타나셨다. 마리 클레어는 불신을 가장 많이 보여 준 학생 중 하나였다. 마리 클레어는 모범적이지 않았고 신앙생활도 특별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알풍신을 바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럼에도 성모님은 당신의 메시지를 전하시고자 회개가 필요한 마리 클레어를 선택하셨고, 그녀는 신비한 힘에 사로잡혔다.
1982년 4월 2일
성모님은 마리 클레어에게 “회개하여라, 회개하여라. 이 시대의 사람들은 모든 것의 진정한 의미를 상실해 버렸다. 잘못을 저지른 자들이 자신이 잘못한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라고 하시며 죄의 회개를 위하여 성모칠고 묵주기도를 바치라고 권고하셨다.
1982년 5월 31일
성모님이 마리 클레어에게 말씀하셨다. '예수의 수난과 그 어머니의 슬픔을 묵상해야 한다. 회개의 은총을 얻기 위해 매일 묵주기도와 성모칠고 묵주기도를 암송해야 한다.”
1982년 9월 15일
성모님이 “성모칠고 묵주기도를 바쳐야 한다.”라고 하시며, 마리 클레어에게 전 세계에 성모칠고 묵주기도를 알리라는 사명을 주셨다.
마리 클레어에게는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인 그날이 성모님을 목격하는 마지막 날이 되었다.
세 시현자가 본 환시
1982년 8월 15일
성모님이 발현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군중이 점점 더 늘어났다. 그들은 학교 운동장에 모여 발현에 참여하였으나 성모님의 말씀을 직접 듣지는 못하였고 시현자를 통해서만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이
시현자
들이 전하는 성모님의 말씀을 잘 들을 수 있도록 스피커가 설치되었고, 멀리서도 시현자들의 모습이 보이도록 연단이 설치되었다. 그러다가 8월 15일 성모승천 대축일이 되자 무려 2만 명의 군중이 모였다.
발현이 끝날 무렵 시현자들의 군중을 축복해 달라고 성모 님께 요청했고 이내 시현자들은 탈혼 상태에 빠졌다. 시현자들은 탈혼 상태에서 꽃을 보았다. 성모님이 꽃에 물을 주라고 하시며, 싱싱한 꽃은 마음을 하느님께 돌린 사람이고 시든 꽃은 마음이 세속의 일에 빠진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
1982년 8월 19일
성모님은 앞으로 일어날 전쟁을 예언하시며 이 끔찍한 전쟁을 피하고자 회개와 기도, 고행과 금식을 권고하셨고, 8시간 동안 시현자들에게 비극적인 장면을 환시로 보여 주셨다. 환시에서는 피의 강과 불타 버린 나무들, 서로를 죽이는 사람들, 머리가 잘려나간 몸통, 버려진 시체들이 있었다. 세 시현자는 르완다가 하느님께 돌아가지 않는다면 피의 강을 이룰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 환시와 예언에 대하여 처음에는 단순히 끔찍하고 놀라운 것이라고 여겼지만 12년 후 1994년에 내전이 터지며 불과 3개월 만에 시현자가 환시에서 목격한 대로 약 80만 명이 살해되어 피의 강에 버려졌다.
발현 장소
키베호는 르완다 제2의 도시 부타레에서 버스를 타고 비포장도로로 1 시간 30분을 가야 하는 오지 마을이다. 이러한 마을에 베네비키라 자매회에서 봉사하는 본당과 학교가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성모님은 아프리카에서 가장 위태롭고 혼란스러운 국가 르완다에서 가장 가난한 마을 중 하나지만 가톨릭의 명맥이 그나마 남아 있는 키베호를 선택하신 것이었다.
당시 3명의 수녀가 운영하고 있던 전문학교에는 교사 6명. 학생 120명이 있었다. 성모님 발현은 1981년 11월 28일 학교 식당 복도에서 처음 일어났고, 그다음부터 1982년 1월 16일까지는 기숙사에서만 일어났다. 그 후로는 기숙사와 학교 운동장에서 발현이 일어났는데, 성모님이 기숙사에서 발현하실 경우 시현자와 학교생활에 대해 사적인 대화도 나누었다고 한다.
성모님이 특별히 발현 시간을 예고하신 경우에는 많은 군중이 몰려왔고 학교 운동장에서 발현이 일어났다. 그럴 경우에는 가톨릭 신자들만 아니라 비신자들도 그 자리에 함께하였고, 언론계와 의학계, 신학계 관계자들도 참석하였다. 시현자들은 성모님과 대화를 나누고서 이를 그대로 군중에게 전하였다. 성모님의 말씀을 직접 들을 수 없던 군중은 시현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이를 기록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성모님을 특별히 공경하는 5월 성모 성월이 되면 키베호를 찾아오는 순례객이 급증하였다. 이에 1993년 기숙사 중 하나를 임시 경당으로 봉헌하여 사용하다가, 2007년 재보수하여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성모님이 발현하신 기숙사는 현재 발현 기념 경당과 주임신부 집무실과 본당 사무실, 다목적 회합 실로 변경되어 있다. 경당은 중앙에 위치하며 우측에는 본당 사무실과 주임신부 집무실, 좌측에는 회합 실이 있다. 성모님의 발현 당시 순례자들이 모여들었던 학교 운동장이 이 건물 바로 앞이다. 현재 발현 광장으로 불리는 이곳에는 발현 성모상을 중심으로 미사와 기도를 바칠 수 있도록 의자가 배치되어 있다.
시현자
조사 위원회가 최초 보고서를 제출하고 1년 후인 1983년 11월에는 성모님 발현을 목격하였다는 시현자가 무려 14명이나 되었으며, 성모님만 아니라 예수님도 보았다고 주장하는 시현자도 있었다. 그러나 2001년에 20년 동안 진행해 온 조사를 마무리하며 오직 3명만이 성모님 발현과 관련이 있다고 결론을 내렸고, 주교도 단 3명만을 시현자로 확정하여, 그해 6월에 성모님 발현을 공인하였다.
알풍신은 1965년 출생하여 12세에 세례를 받았다. 1981년 10월 키베호 전문학교에 입학, 1989년 7월 고등학교 교육 과정을 마쳤다.
알풍신은 신앙심이 깊었고 성모님을 공경하는 마음도 대단하였으며 미사도 꼬박꼬박 참례하는 학생이었다. 1994년에는 콩고로 피난을 하러 가는 등 온갖 어려움을 겪었으나 교구의 지원으로 장학금을 받아 계속 학업을 이어 갔다. 그렇게 교리교육 전공으로 신학을 공부한 후, 2003년 6월 성 클라라수도회에 들어가서 2006년 7월 수녀가 되었다.
현재는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탈리는 1964년 출생하여 4세에 세례를 받았다. 키베호 전문학교를 4학년까지 다니고, 더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 1982년 6월 24일 성모님이 키베호에 머물라고 말씀하신 뒤로 계속 키베호를 지켰으며, 심지어 1994년 르완다 대학살이 일어났을 때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안전을 염려한 교구의 조치로 그해 7월 키베호를 떠났다가, 1996년 12월 다시 돌아와서 순례자를 환대하고 성지를 관리하는 활동에 계속 헌신하고 있으며, 키베호 성모상 제작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마리 클레어는 1961년 출생하여 5세에 세례를 받았다. 1983년 7월 키베호 전문학교에서 고등학교 교육 과정을 마쳤다. 1983년 9월부터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4년 후 1987년 9월부터는 키갈리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87년 국무총리실에서 일할 정도로 전도유망한 청년과 결혼하였으나 자녀는 없었다. 르완다 대학살 때 남편이 잡혀가는 것을 막다가 불행히도 살해당했으며 남편도 납치된 후 살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지 소개
키베호 성지는 고통의 성모 성당과 발현 기념 경당, 발현 광장, 야외 제대 등 미사 봉헌과 관련한 건물들과 묵주기도의 길, 십자가의 길, 순례자 숙소 등의 기타 시설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성지 바로 옆에는 당시 시 현자들이 다녔던 키베호 전문학교와 수녀들이 살았던 수녀원 건물이 지금도 그대로 있다. 현재 키베호 전문학교는 성모님이 직접 알려 주신 그분의 호칭을 따서 말씀의 어머니 학교로 이름을 바꿨다.
고통의 성모 성당은 성모님이 발현하여 요청하신 바에 따라 마땅히 건립되어야 했으나 지체되었다. 1992년 11월 발현 11주년을 기념하여 초석을 놓았지만, 르완다 대학살이 벌어지며 공사가 중단되었다
가, 2001년 성모님 발현이 공인을 받은 후 다음 해 공사가 재개되어, 2003년 5월 봉헌되었다. 제단 쪽에 있는 7개의 창과 입구 쪽에 있는 장미 창을 포함한 7개의 창은 성모칠고를 표현하고 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유일하게 공인받은 성모님 발현 성지이기에 성모님과 관련한 축일에 많은 신자가 순례 오는 것을 대비하여 야외 제대와 6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야외 공간을 마련해 놓았다.
성지와 조금 떨어져 있는 곳에는 골고타 언덕이 조성되어 있는데, 십자가의 길로 연결되어 있어 각 처를 묵상하며 천천히 올라가면 키베호 성지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또한, 성모님이 성모칠고 묵주기 도를 바치고 널리 알리라고 권고하셨기에 성모칠고 묵주기도의 길도 만들어 놓았다. 고통의 성모 성당과 발현 경당 사이에 나 있는 길로 내려가면 성모칠고 묵주기도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
성지에서 운영하는 순례자를 위한 숙소로는 레지나 파티스 센터와 팔로틴 히우스등이 있으니 하룻밤 묵으며 성지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할 것을 권한다.
그리고 고통의 성모 성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성모님이 키베호에서 발현하시어 시현자들에게 전해 주신 메시지를 정리해 놓은 현수막이 걸려 있다. 키베호 발현은 오랜 시간 여러 사람에게 일어나서 자칫 메시지가 혼란스러울 수도 있는데, 12가지 항목으로 요약되어 있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 12가지 항목의 메시지는 앞선 15곳의 발현 장소에서 성모님이 우리에게 전해 주신 메시지를 한데 모아 놓은 종합 편으로 보인다.
[자료: 세계의 성모발현 성지를 찾아서. 분도출판사. 최하경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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