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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 지향의 디카시학
―김청미의 디카시 읽기
오민석(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
18세기 이후 근대 시민 계급이 집단성의 그늘에서 해방되었을 때, 근대적 개인들은 프라이버시와 인권이 보장된 동굴에서 맘껏 행복을 구가할 줄 알았다. 개인들은 각기 사적 공간의 자유를 누리며 타자들의 삶을 침해하지 않으려 했으며, 주체들 간의 이 적절한 거리가 사람들 사이의 소모적인 분란을 막아주고 개체의 자유와 행복을 보장하리라 믿었다. 그러나 이런 발상은 애초부터 오산이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든 분리된 개인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근대적 개인들은 해가 뜨면 공통의 일터로 기어 나왔으며 협업을 통해 소위 근대 사회를 만들어 나갔고, 자신들이 만든 거대한 체제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그들이 봉건 시대의 직접적 집단성에 해방되었다고 해서 개체-관계의 최종적 확장인 시스템으로부터까지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일터에서 나와 사적 개인의 동굴로 돌아왔을 때 느낄 수 있었던 자유는 시스템이 조직화한 칸막이 안에서의 자유였다. 그들은 그 칸막이들을 넘나들지 못했지만, 시스템은 그 모든 칸막이들을 관통하며 시스템의 유지와 발전에 최적화된 개인들을 조직적으로 생산했다. 20세기의 양차 세계 대전은 개인들의 동굴을 경멸하듯 파괴하며 무차별의 폭력을 행사했다. 이제 근대적 개인들은 다시 광기 어린 집단성의 희생자가 되었으며, 그들이 만든 프라이버시의 칸막이가 얼마나 무력한 환상이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후기 자본주의는 자본의 효과적인 흐름과 전 지구적 지배를 위하여 소위 ‘세계화’의 발판에 올라섰다. 세계화란 “국가 간의 교통·통신 수단 및 정보·통신 기술의 비약적인 발달이 뒷받침되어 국가 및 지역 간에 존재하던 상품·서비스·자본·노동·정보 등에 대한 인위적 장벽이 제거되어 사회·경제적 생활 공동체의 범위가 국가를 초월하여 확대되면서 전 세계가 하나로 통합되고, 상호 의존성이 증대되는 현상”을 의미한다. 세계는 유사 이래 가장 좁아졌고, 사적인 정보는 개인들의 칸막이를 뚫고 각종 미디어에 노출되었으며, 지역의 사건이나 변화는 곧바로 세계의 사건이나 변화로 이어졌다. 최근의 팬데믹 사태는 지구가 역사 이래 최대로 좁아졌고, 개인들이 숨어 있을 어떤 공간도 이제는 더 이상 없으며, 지구의 모든 생명이 하나의 공동의 운명 앞에 놓여있음을 보여준다. 이제 골방에 갇혀 세계를 사유하던 시대는 지났다. 근대적 개인주의 이래 줄곧 희석화되었던 공동체적 사유 혹은 타자 지향의 윤리학이 다시 절실하게 필요한 시대가 도래하였다.
김정미 시인은 이미 역사의 이 도도하고도 긴 흐름 위에 안착해 있다. 그녀의 디카시들은 벌써 골방을 넘어 광장을 향해 있다. 그녀는 폐쇄적 자아의 동굴 안에 갇혀 있지 않으며, 가족주의의 칸막이에 자신을 가두지 않는다. 그녀의 시선은 늘 타자를 향해 있다. 그녀는 자아에서 타자로, 타자에서 다시 자아로 이어지는 시선을 통하여 자아와 타자의 건강한 관계를 설정한다. 모든 자아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며, 모든 타자는 그 자체 자아인 타자이다. “인간은 문자 그대로 정치적인 동물이다. 단지 무리를 짓는 동물일 뿐만 아니라, 오로지 사회의 한 가운데에서만 개체성을 발현하는 동물이다.”(칼 마르크스) 타자 없는 자아 혹은 자아 없는 타자를 설정할 때, 존재에 대한 모든 이해는 왜곡되거나 피상적인 것이 된다. 이런 점에서 존재는 개인성과 사회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겹존재double being’이다. 겹존재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겹눈 혹은 잠자리 눈의 ‘겹사유double thinking’를 필요로 한다.
가겠다고 울었다
아니라고 도리질하며 말려도
아프면 아픈 곳으로
더 다가가는 삶
―「길을 찾아서」 전문
17세기 영국 시인 존 던J. Donne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For Whom the Bell Tolls」라는 시에서, 인간은 섬이 아니며, 각각의 사람들은 대륙의 일부이고, 따라서 “바닷물에 흙 한 덩이가 씻겨가면/ 그만큼 대륙이 더 작아진다”, “내가 인류의 한 부분이므로/한 사람 한 사람의 죽음이 나를 줄어들게 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죽음을 알리는 조종은, 그에 의하면, 다른 누구도 아닌 (모든) “그대를 위하여 울린다.” 근 400여 년 전의 영국 시인은 개체의 사회성 혹은 타자 지향성을 이렇게 노래했다.
김청미의 위 작품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가겠다고 울었다”는 첫 번째 문장은 화자가 현재의 ‘나’가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의 상태)를 향한다는 점에서 타자 지향적이라고 읽어도 된다. 설사, 화자의 지향 대상이 어떤 공간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지금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타자 지향적이다. 사진의 식물은 다른 존재, 다른 공간을 향하여 메마른 콘크리트 바닥을 오체투지로 기고 있다. 사진 속의 콘크리트 바닥과 “아프면 아픈 곳으로”라는 문구는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그런 움직임, 그런 이동의 고통과 치열성을 더욱 강렬하게 만든다. 시인에게 있어서 문학의 올바른 “길”은 아플수록 더 “아픈 곳으로/ 더 다가가는 삶”이다. 시인이 이렇게 하나의 ‘아픈 상태’에서 ‘더 아픈 상태’의 타자성을 찾아갈 때, 겹주체에 대한 겹사유의 꽃이 활짝 피어난다. 김청미의 디카시들은 이렇게 아픈 주체가 더 아픈 주체를 향해 오체투지를 하는 과정에서 생겨난다. 식물의 탱탱하도록 푸른 줄기와 덩굴은 타자 지향적인 삶의 (괴롭지만) 강력한 생명성을 느끼게 해준다.
팔다리 뭉개지고 잘려 나가도
기꺼이 다 드릴게요
무어라도 쓸모있는 것 남아 있다면
온전한 행복이예요
―「헌신」 전문
타자 지향적인 삶은 언제나 자기희생을 전제로 한다. “아픈 곳으로/ 더 다가가는 삶”은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는다. 프레드릭 제임슨F. Fameson은 “역사는 늘 우리를 해친다History hurts”고 하였다. 혁명운동에 헌신했다가 혁명의 성공을 보지 못하고 죽어간 모든 파티잰partisan들에게 역사는 상처이다. 역사는 정의와 진리를 외치는 자들에게 항상 성공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선한 일에도, 사랑의 일에도, 상처와 쓰디쓴 미래가 있다. 그러나 타자 지향의 윤리학은 고통과 배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힐 참혹한 미래를 알면서도 가련한 죄인들을 위하며 모든 것을 던졌다. 위 작품의 사진은 팔다리가 여기저기 잘려 나가고도 푸른 잎새를 폭죽처럼 뿜어 올리는 나무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사진은 괴테의 그 유명한 전언, “모든 이론은 회색이고, 푸르른 것은 오로지 생명의 황금 나무다”를 연상시킨다. 게다가 저 두꺼운 나무의 몸통은 나무가 매우 오랜 생명의 ‘역사’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팔다리가 잘려 나간 단면조차도 최하 수십 년의 세월을 안고 있다. 나무의 몸통은 그것보다 훨씬 긴 세월, 모르긴 몰라도 수백 년의 세월을 거치며 그 상처를 보듬고, 아파하고, 위로해왔을 것이다. 저 나무는 도대체 무슨 힘으로 저 끔찍한 세월을 견뎌냈을까. 위 작품은 이 질문에 “헌신”이라고 답한다. 이 나무에게 유일한 관심사는 타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기꺼이” 바치는 것이다. 나무는 “무어라도 쓸모있는 것 남아 있다면” 타자에게 바치겠다는 조건 없는 “헌신” 속에서 “온전한 행복”을 읽는다. 이 온전한 사랑이 나무의 몸통을 더욱 굵게 하고, 이파리들을 더욱 푸르게 하며, 절단의 고통 속에서도 절정의 녹음綠陰을 이루게 한다.
둘이어서, 여럿이 함께여서
잡은 손 놓치지 않고
흔들리지 않게 꿈 꿀 수 있는
―「뿌리의 힘」 전문
저 옹골진 대와 뿌리의 억센 힘을 보라. 앞에서 살펴본 두 편의 디카시에서도 살아 있는 힘은 오로지 강렬한 초록이었으며, 그것들은 모두 타자를 향한 사랑과 헌신의 열정에서 오는 것이었다. 이 작품에서 저 푸른 생명의 힘은 그 자체에서 오면서 동시에 타자와의 연대에서 온다. 저들은 홀로 강하지만 “여럿이 함께여서” 더욱 강하다. 그들의 연대는 고통의 현재를 이기게 할 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낙관적 전망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들이 미래에 대하여 “잡은 손 놓치지 않고/ 흔들리지 않게 꿈 꿀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연대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 선언』의 마지막 문장을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로 끝낸다. 타자와의 연대 없이 세계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랑은 연대를 낳고 헌신은 변화를 낳는다. 위 작품의 “여럿이 함께”는 특히 “뿌리의 힘”으로 명명됨으로써 시사하는 바가 있다. 그것은 상부 권력의 연합이 아니라, “뿌리”가 암시하는 ‘밑바닥’의 연대이며, 그 밑바닥의 사회적 표현인 ‘민중 연대’로 해석해도 큰 무리가 없다. 이 작품은 얽혀 있는 억센 뿌리의 사진과 그 뿌리의 힘을 “여럿이 함께”로 해석한 시인의 문자가 합쳐지면서 디카시 특유의 방식으로 전압을 올린다. 식물의 억센 뿌리에서 강력한 민중 연대를 읽어낸 것은 이청미 시인의 독특한 ‘푼쿠틈punctum’이다. 이청미 시인이 가지고 있을 사회적 혹은 지역적 경험은 사진의 특정한 지점을 아프게 찌르며 시인만의 고유한 ‘사진 읽기’를 만들어낸다.
* 푼크툼
사진작품을 감상할 때 관객이 작가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작품을 받아들이는 것
본문
프랑스의 구조주의 철학자이자 비평가인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가 <카메라 루시다>에서 내세운 개념으로, 「찌름」을 뜻하는 라틴어 「punctionem」에서 비롯됐다.
푼크툼은 똑같은 작품을 보더라도 일반적으로 추정ㆍ해석할 수 있는 의미나 작가가 의도한 바를 그대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지극히 개인적으로 작품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푼크툼은 「찌름」이라는 의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신의 경험에서 오는 강한 인상이나 감정을 동반한다.
한편, 바르트는 푼크툼과 함께 스투디움(studium)의 개념도 정의했는데, 이는 사진을 볼 때 사회적으로 공유되는 공통된 느낌을 갖는 것, 작가가 의도한 바를 관객이 작가와 동일하게 느끼는 것을 뜻한다.
이태원 좁은 골목에서 멈춘 청춘들도
가족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그대들도
―「대못」 부분
디카시는 카메라를 의도적으로 지참하고 피사체가 생겼을 때 카메라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 초점을 맞추고 찍는 전통적인 사진 촬영의 복잡한 과정을 완전히 건너뛴다. 디카시는 이제 특별한 의도도 없이 항상 소지하고 있는 휴대폰 카메라의 즉시성에서 시작된다. 누구나 아무 때나 소지하고 있는 휴대폰의 카메라(디카)는 피사체가 감각의 촉수를 건드리는 순간 (그것을) 바로 잡아낸다. 대상이 디카에 포착되는 순간 디카시인의 머릿속에서 디카시는 이미 절반쯤은 쓰였다고 보아도 된다.
디카시의 이런 성격은 사건 현장의 즉시 포착과 그것을 온라인으로 널리 알리는 일에도 매우 유용하다. 발터 벤야민W. Benjamin이 기계 복제 시대에 아우라를 상실한 예술작품들이 바로 그 복제성 때문에 다수 대중의 손에 들어갈 수 있었고 그래서 ‘정치의 영역’으로 옮겨졌다고 한 지적은, 디카시의 경우에 더 적확하게 더 잘 적용된다. 디카시는 사회적 사건 현장을 순간에 포착하여, 가장 많은 대중에게 가장 빠른 속도와 가장 예술적인 표현으로 전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매체이다. 벤야민이 「기계 복제 시대의 예술작품」(1935)을 쓴지 근 80년이 지난 지금, 복제 기술은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이 더 고도화되었으며, 그것의 배포 속도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졌다. 이런 점에서 기계 복제를 넘어 인터넷 복제의 시대에 예술작품은 더욱 강력하게 정치의 영역으로 이동했다고 보아도 좋다. 위 작품은 세월호 추모 현장의 시사적인 사진을 최근의 이태원 참사와 연결하며 사회적 안전망이 사라진 한국 사회의 지속적인 문제를 가슴 아프게 고발한다. 사진의 윗부분에 매달린 무수한 노란 리본들은 노란색 고유의 경쾌함을 완전히 잃고 눈물과 한숨에 푹 젖어 있는 것처럼 무겁다. 300여 명의 사람이 한순간에 바다에 매몰되는 그 끔찍한 과정을 티브이 화면의 생중계로 목격하는 것은 그 자체 온 국민에게 가장 잔인한 고문이었다. 그 사건이 채 뇌리에서 사라지기도 전에 이번에는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150여 명의 사람이 축제의 와중에 압사했다. 두 사건 모두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져야 할 ‘국가의 부재’ 때문에 발생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그것은 당사자들의 가족만이 아니라 모든 국민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일이었다. 타자 지향의 시인이 이 끔찍한 사회적 사건을 외면할 리 없다. 사진 중앙에 있는 고인들의 생생한 영정 사진은 “청춘들”, “그대들”이라는 호명과 연결되면서 비극적 현장을 더욱 생생하게 살려낸다.
정상까지 올라가 보니
흙 묻히며 굴러다닌 세상사가
하찮고 시시해 보이지
―「그만 내려와」 전문
사진 속 호랑나리의 배경은 푸른 하늘이다. 그리고 그 꽃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 사진을 찍은 시인은 자신을 낮추어 로우 앵글 숏low angle shot으로 호랑나리 꽃을 가장 높은 곳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질문을 던진다. 꼭대기(“정상”)에 올라가 보니 이 밑바닥 생활이 “하찮고 시시해 보이”냐고. 꽃을 가장 높은 곳에 올려놓은 시인은 이제 그 꽃을 보고 “그만 내려와”라고 말한다. 시인에게 중요한 것은 높고 외로운 초월의 세계가 아니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흙 묻히며 굴러다닌 세상사”이다. 이런 대목 역시 일관되게 타자 지향의 시학을 견지하고 있는 시인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시인의 시선은 저 높은 곳이 아닌 저 낮은 곳의 타자들을 향해 있다.
김청미 시인은 타자들을 디카 앞으로 당겨서 찍고, 그들에게 말을 걸고, 그들과 연대한다. 그녀의 디카와 언어는 초월적 관념의 세계가 아니라 궁핍한 시대의 현실을 향해 있다. 그녀의 시는 타자를 지향할수록 더 큰 생명성을 뿜어내는 황금 나무 같다. 그녀의 타자 지향의 시학은 나를 살리고, 너를 살리며, 우리를 살리는 것을 지향한다. 그리고 그녀가 볼 때 이 모든 ‘살림’은 오로지 관계적 삶 속에서만 가능하다.
오민석충남 공주 출생. 1990년 《한길문학》 등단,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시집 『기차는 오늘 밤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다』 외. 문학평론집 《몸-주체와 상처받음의 윤리》 외. 시와경계 문학상 외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