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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학당] 『마하반야바라밀경』에서 은밀하게 전하는 구공의 핵심_A982(56:44)
00:00 <『마하반야바라밀경』 철학특강 시작>
반갑습니다. 오늘은 마하반야바라밀경 특강 진행하겠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경은 2만5천송 반야경이라고 하는데요 대품반야경. 8천송 반야경은 8천송 내려오는 거는 소품반야경. 마하는 이제 크다는 뜻이죠. 마하반야바라밀경은 대품반야경을 의미합니다. 이제 그렇게 번역해서 한역해서 제목을 붙였고요. 구마라집(鳩摩羅什)의 번역이고 서기 2세기경 작품으로 보는데요. 8천송 반야경보단 뒤고 화엄경 나온 뒤에 나온 반야경이다 보니까 화엄경에 있는 10지 체계 같은 거를, 8천송 반야경에 없던 10지 체계들이 더 들어가 있어요. 그래서 8천송 반야경이 뭔가 법공에 더 강조를 뒀다면 마하반야바라밀경은 구공에 강조를 둔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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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반야바라밀경에서 구공 부분을 좀 더 부각해서 오늘 좀 살펴보려고요. 그때 이걸 했어야 되는데 마하반야바라밀경 지금 올라가고 있는 그 강의 신촌 토즈에서 했던 강의에서 마지막 하이라이트에 이걸 하려다가, 이거 하려고 자료 정리하다가 이게 진여와 열반이라는 자료로 부풀어져 버린 거예요. 그래서 바로 결론을 못 내드리고 진여와 열반으로 강의가 넘어가게 됐어요. 그래서 마하반야바라밀경만 들으신 분들은 뭔가 마지막에 딱 화룡점정이 안 되고 강의가 끝난 느낌을 느끼실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크게 느낀 바라 오늘 이걸로 마하반야바라밀경 강의의 마지막을 마무리하게요. 지금 강의 올라가고 있는 강의의 결론 부분입니다. 그래서 “마하반야바라밀경 법공에서 구공으로”라는 제목으로 한번 해 볼게요.
02:08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만법이 텅 비어 있음>
지금 올라가는 마하반야바라밀경 최신 강의 들으신 분들은 그대로 이어져요. 그래서 마지막 핵심이 나오는 부분입니다. 교재 다운 받으실 수 있어요. 다운 받아서 보시고요. 보살마하살은 한번 읽은 구절일 텐데요. 한번 다시 보시면 마하반야바라밀경 저기 교재에 보시면 1번이요. [1.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무분별지, 공성의 직관)을 행할 때 만법 자체의 형상이 ’텅 비어 있음‘(공성ㆍ청정ㆍ진여ㆍ열반)에 들어간다(법공法空).] 보살마하살 마하는 크다는 뜻이죠. 보살 마하살은요 보살 중에 큰 보살. 그래서 이제 보통 1지 이상 10지 체계 안에 들어온 보살을 말합니다.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무분별지, 공성의 직관)을 행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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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법 자체의 형상이 텅 비어 있음(공성ㆍ청정ㆍ진여ㆍ열반)을 알고 그 텅 비어 있음에 들어간다(법공). 텅 비어 있음에 들어간다. 만법의 본성 자성이 텅 비어 있더라. 만법이라고 할 때 이 법은요 만법이라고 할 때 이 법은 법은 법칙이란 뜻이에요. 법칙 어떤 자성. 그래서 법칙과 자성을 지니고 있으면서 이 법이라는 건요 우리 마음속에 일정한 개념을 형성시키는 걸 법이라 그래요. 법칙과 자성을 지니고 있으면서 개념을 형성시킵니다. 그래서 우리는 컵은 컵이라는 자성이 있어서 법칙이 있어서 컵이라고 따로 개념을 세우죠. 컵이라는 개념을 따로 세우죠. 요거는 펜, 컵과 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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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칙이 다르고 자성이 다르죠. 그래서 개념이 다르게 된 겁니다. 이걸 법이라 그래요. 모든 존재들을 말합니다. 모든 존재들 그래서 이런 법칙과 자성을 지니면서 일정한 개념을 형성시키는 모든 존재들. 그래서 지금 우리 14조, 홍익보살 실천지침 14조에서도 존재라고 하는 거예요. 존재의 진리 그런 거 만법의 진리를 말하는 겁니다. 요 만법이요. 그럼 결국 이 만법이라는 거 대표적으로 뭐죠? 우리가 경험하는 천지만물의 모든 존재들이 다 만법에 해당되겠지만 이거 어떻게 구분할 거냐에 따라서 6근으로 부처님은 구분하셨어요. 6근 결국 수많은 만법이 존재하지만 사실은 오감과 생각 감정의 마음 작용 밖에 아니다. 그래서 6근 또는 5온. 색수상행식. 여기서 색은 오감을 대표하고요. 5온의 나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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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행식은 마음을 대표합니다. 그래서 저 같은 경우는 만법을 생각 감정 오감 이렇게 나눴습니다. 그래서 생각 감정을 하나로 해 가지고 마음으로 치면요 요 마음과 나머지 오감 작용을 결합해서 보는 게 이제 6근이니 5온이니 하는 거고요. 요걸 저는 요즘식으로 생각 감정 오감이라고 표현해 봤습니다. 그래서 만법, 존재하는 모든 법은 불교 경전에서요 6근이거나 5온이거나 우리가 지금 이해하기 쉬운 생각 감정 오감일 뿐입니다. 생각 감정 오감이 아닌 법이 있어요? 수많은 개념이 나뉘고 존재가 펼쳐져 있지만 결국 오감 작용으로 우리한테 정보가 들어오거나 그리고 생각 감정으로 개념화된 거 거기에 이제 뭔가 우리 감성이 더 붙어서 우리 법계에서 각각의 존재로서 존재하는 거죠. 자 그래서 이 반야바라밀이라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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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냐?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만법 자체의 형상이 텅 비어 있음에 들어간다는 건 반야바라밀 행하지 않을 때는 만법이 텅 비어 있다는 걸 모른다는 거죠. 제가 지금 풀이하는 방식은 저기 티벳불교 중관파 특히 겔룩파 달라이라마의 학파에서 풀이하는 그 마하반야바라밀경 풀이랑 달라요. 왜냐하면 이 마하반야바라밀경 풀이를 자기 식대로 해보려고 노력한 분이 용수보살이고요. 용수보살의 가르침을 계승하는 게 지금 티벳이거든요. 티벳 불교거든요. 특히 티벳 불교 제일 핵심 교파가 겔룩파인데 거기가 이제 모든 걸 장악한 거죠. 우리 조선시대 때 노론처럼 거기가 이제 모든 여러 4대 문파를 장악해 가지고 권력을 쥐고 있다는 거예요. 권력을 쥐고 끌고 오다 보니까 다른 논의들은 제대로 자유롭게 다뤄지지가 않습니다. 중관파 중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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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류논증 중관파랑은 특수한 입장으로만 용수보살을 제일 제대로 계승했다고 자체 평가하는 그 학파의 가르침 주로 보다 보니까 이 마하반야바라밀경을 용수식으로 풀면 언어의 논리와 개념으로만 풉니다. 언어의 개념. 일체는 존재하는 건 개념뿐이다. 그래서 개념 간의 논리를 논리의 모순을 찾아내 가지고 일체가 공하다는 걸 입증하는 방식입니다. 저는 절대 그 방식을 추천하지 않습니다. 자명하지도 않고요. 지금 여러분 보시기에 그 논리들이 절대 자명한 논리가 아니에요. 전통문화 수호 차원밖에 안 돼요. 여러분이 현재 체험과 개념으로 확인하셔야 돼요. 체험과 개념을 충돌시켜서 확인할 수 있는 거여야 돼요. 법이 이렇다 하는 건 여러분도 누구나 아실 수 있어요. 법이 뭔지. 이런 법을 연구하세요. 여러분이 여러분 마음에 들어와 있는 만법을 실제로 연구하셔야 돼요. 그리고 반야바라밀도 실제로 하세요. 반야바라밀 핵심은 반야지(般若智)라는 거예요. 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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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반야지는 무분별지가 제일 본체인데 무분별지는 뭐냐? 무분별지는 뭐냐? 6근의 마음에서 정광명심, 청정광명한 정광명심에 접속해야 돼요. 정광명심 상태가, 정광명이 무분별지 상태입니다. 제가 참나 접속하라고 하죠. 6근의 마음으로 참나를 접속해야 돼요. 여기는 초의식 자리입니다. 초의식, 초의식이에요. 무의식도 아니고 의식도 아니에요.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는 이 6근의 세계에요.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넘어서서 초의식. 나와 남이 없고 시공도 없고 항상 스스로 빛나고 있는 의식 상태가 있어요. 이 초의식 상태에 접속해야 달라이라마도 인정하시는 그 지극히 미세한 마음 지극히 미묘한 마음이라 그래요. 이 마음 자체는 인정해요. 이 정광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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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무상한 마음이라고 설명하려고 하니까 우리랑 입장이 달라집니다. 근데 원래 불경에는 그런 말이 없어요. 이 초의식 상태에서, 이 정광명 상태에서요. 자 이 정광명 상태는 뭐냐? 정광명은요 초의식 상태고요. 이 초의식 상태의 핵심은 뭐냐면요? 반야지 상태라는 거예요. 무분별지라는 건요 분별이 없어요. 생각 감정 오감이 멈춰 있는데 알아요. 그러니까 이때 아는 거 뭐냐? 직관이에요. 직관. 뭘 직관하느냐? 공성을 직관하는 상태입니다. 공성 이 뭐냐면 아공 법공을 총괄한 공성, 만법의 본질이 공이에요. 만법의 본질이 공이에요. 만법이, 지금 생각 감정 오감이, 6근이 꽉 차서 내 우주를 형성하고 있고 내 법계를 채우고 있는데 이놈들의 본질이 사실은 이 정광명 상태에 들어가서 보면 청정 광명 상태에서 보면 텅 비어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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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 상태죠. 이 초의식이라는 거는 불교적으로 공적 텅 비어 있는데, 영지 텅 비어 있는데 알아차리는 자리입니다. 요게 정광명이에요. 청정광명한 빛나는 의식, 스스로 빛나는 이 영원히 빛나는 의식 상태에 들어가야 이 초의식 상태는 주객이 없어요. 시공도 없어요. 체험해 보세요. 시공도 없고 주객도 없습니다. 이 자리에 시간성 공간성 이원성 인과성이 없어요. 그런데 무슨 생멸이 있겠어요. 근데 이 귀류논증 중관파는 자꾸 여기다가 생멸이 있다고 붙이려고 하거든요. 6근하곤 다른데 이놈도 분명히 나름 생멸은 있다. 왜? 정광명이 영원불변한 그 의식이라고 해버리면요 참나라고 불리는 영원한 실체가 돼 버릴까봐 두려워합니다. 그냥 공성을 직관하는 지혜. 여기까진 동의해요. 제가 왜 귀류논증파를 예로 드냐면? 마하반야바라밀경 해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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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랑 제가 해석하는 거랑 제일 그게 저 반대 극에 있어서 그래요. 청정광명심이 그대로 불성입니다. 그대로 진여고요. 이게 마하반야바라밀경 입장이에요. 8천송 반야경에서부터 일관된 입장이 이 정광명 자리가 이 공의 자리가 텅 비어있는 공의 자리가 그대로 진여요 정광명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무분별지 지혜예요. 그리고 반야예요. 그래서 반야바라밀을 강조할 수밖에 없는 게 반야바라밀 상태라는 게 참나 각성, 정광명 각성을 통해서 이 정광명 안에서 우리 안에 있는 공성의 진리를 직관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 공성이라는 거는 그러니까 진리죠. 진리. 만법의 근원이 되는 이 진리, 만법의 본질이 되는 진리를 이 공성을 영지로 신령한 지혜로 직관하고 있는 상태라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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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판이 좁아서. 반야하면 이제 외우세요. 반야하면 외우세요. 이거 나중에 제가 진여와 열반 강의 때 또 자세하게 해 드릴게요.
12:10 <정광명의 반야지로 공성(空性)을 직관>
자 공성에는요 세 가지 공이 있습니다. 세 가지 공성. 아공, 자아가 공하다. 법공, 만법이 본래 공하다. 구공, 그런데 그 공 안에 육바라밀이 꽉 차 있다. 이 구공이라는 거 불공이에요. 공하지 않은 공함이에요. 왜냐하면 텅 비어 있는데 그 안에 꽉 차 있대요. 진리가 육바라밀이 진리가 꽉 차 있대요. 이게 공성의 극치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이 어려운 부분이에요. 아공 법공은 텅 비어 있다에 집중하는데 구공은요 그런 중에 공하지 않다. 여기에 사랑과 정의와 모든 지혜와 정진과 인욕의 덕목이 꽉 차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공성을 자 보세요. 이 공성이 직관하는 겁니다. 뭐가 직관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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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이제 정광명이에요. 정광명의 반야지로 정광명의 반야지가 직관하는 겁니다. 공성을 직관해요. 직관한다는 건요 나와 남이 없다는 거예요. 시공도 없다는 거. 시공 있고 나와 남이 있으면 직관이 아니라 분석이 돼버려요. 분석이 돼요. 분석과 추론이 되는데. 이때는 깊은 참나 접속 상태, 저희 학당에서는 이걸 뭐라고 하죠? 참나 접속, 참나 각성 상태에서 여기는 공성 진리나 공성을 직관하는. 직관하고 있잖아요. 이게 지금 반야바라밀의 실체입니다. 해서 반야바라밀이라는 건요 정광명과 공성이 둘이 아니거든요. 애초에 둘이 아니라 하나이기 때문에 가능해요. 정광명 상태 안에 사실은 육바라밀의 진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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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 있는 거예요. 정광명의 의식으로. 왜냐하면 보세요. 이 정광명이라는 게 다른 이름으로 공적영지인데 공적영지가 애초에 공성인데 영지 말고 공성이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신령한 알아차리는 그 빛나는 의식 자체가 사실은 공 덩어리에요. 자기가 자기를 보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를. 그래서 여러분은 노력하지 않아도 자기가 자기를 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일체를 몰라 하고 나와 남이 없고 시공이 없어지려면 간단하게 몰라라고 해주시면 돼요. “몰라”라고 선언한 다음에 정광명 참나 접속에 들어가면 이 정광명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아 자아가 공하구나. 내 에고도 공하구나. 만법도 공하구나. 공 안에 육바라밀의 진리가 꽉 차 있구나” 하는 거를 아실 수 있어요. 여기까지 아시면 보살마하살이 돼요. 1지 보살에 들어갑니다. 여기까지가 체험과 개념이 만나서 완전히 자명해지면 1지 보살에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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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진리밖에 없기 때문에 1지 보살은 그대로 이미 부처라고 해주는 거예요. 부처랑 하나다. 그래서 여래의 집안에 태어났다고 해주는 거고 여래의 종자가 되었다라고 해주는 거예요. 여래 집안에 태어났다는 건 이미 여래의 어린 모습이라는 거죠. 자라기만 하면 된다. 연륜이 부족해서 그렇지 지혜는 똑같다. 부처가 얻은 반야지나 1지 보살이 얻은 반야지나 똑같아요. 왜? 정광명에서 공성을 본 거거든요. 공성 직관을 한 이 마하반야바라밀 위대한 반야바라밀에 대한 찬양이 반야경 600권 반야경에서 계속 노래되는 거예요. 금강경도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고 왜 하겠어요? 금강이라는 건 여기서 금강저거든요. 저기 금강저 좀 주실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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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저 금강저 금강반야바라밀경. 강의장에 제가 못 가져가니까 여기서 밖에 보여드릴 수가 없네요. 이게 금강저예요. 금강반야바라밀경 요게 금강입니다. 원래 금강반야바라밀경 금강은 다이아란 뜻이 아니에요. 금강저를 말하는 거예요. 금강이라는 게 다이아몬드 뜻도 있죠. 불변하는 깨지지 않는 그런 무기. 이 금강저를 왜 얘기했냐면요? 이 금강저는요 벼락을 치는 무기입니다. 벼락 나가겠어요. 불보살들이 이걸로 벼락을 칩니다. 벼락을 상징해요. 원래 금강반야바라밀경은 벼락바라밀이에요. 벼락, 바라밀 벼락을 치는 겁니다. 사실 말만 해도 벼락이에요. 진리의 벼락이에요. 진리의 날벼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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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보면 나중에 예수님이 오면 마구니들을 어떻게 물리치는지 아세요? 예수님이라는 그 위대한 불보살이 와서 어떻게 물리친다고 묘사되어 있냐면 요한계시록 보면 요한계시록 불교식 느낌으로 설명 드리면 온갖 마구니들을 입에서 칼이 나와서 진리의 날벼락으로 다 제압해요. 그거 보면요 그 아마겟돈이라는 그 영적 대전쟁이 일어났을 때 뭐 예수님이 완전 불보살 군단 천사군단 데리고 가서 싸우는데 불보살들이 뭘 하지 않아요. 예수님 입에서 나간 칼로 다 죽어요. 그냥 이게 시체 수습만 합니다. 나머지 천사들은. 똑같은 거예요. 불교에서는 진리의 날벼락 팩트 폭격 어마어마한 팩트 폭격을 하는 거예요. 이 금강반야바라밀 이게 이거예요. 그래서 반야지에 들어가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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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광명 상태에서 청정광명. 여기는 6근의 마음이 아니에요. 6근 마음이 아닙니다. 6근 마음을 초월한 몰라를 통해서 6근 마음을 초월해서 시공을 초월한 의식 상태, 초의식 상태, 의식 무의식을 다 초월한 상태, 의식을 초월했기 때문에 고요하고요 무의식을 초월했기 때문에 멍하지 않아요. 무의식은 우리가 의식 못 해야 되잖아요. 의식을 하고 있어요. 정광명은요 또렷하게 의식이 되는데 잡념이 없는 상태예요. 그래서 의식 무의식을 초월했다는 거고요. 무의식을 초월했으니까 영지, 신령하게 알아차리고 있고요. 의식을 초월했기 때문에 공적합니다. 고요해요. 그 공적영지라는 게 의식 무의식을 초월했다는 거예요. 공적은요 의식 초월, 영지는 무의식 초월, 그래서 청정광명 상태에서 진리를 직관하고 있어요. 진리랑 한 덩어리가 된 상태입니다. 원래 나니까. 내가 나를 보고 있는 상태예요. 정광명이 진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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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있는 건요 내가 나를 보는 거랑 같아요. 한 덩어리입니다. 여기서 나와 남이 없고 시공도 없어요. 이런 체험을 하셔야 돼요. 그게 반야바라밀 상태예요. 금강반야바라밀 상태입니다. 이 반야바라밀이라야 모든 무지와 아집을 다 박살낼 수 있어요. 벼락을 쳐 가지고. 잊지 마세요. 이게 금강저입니다. 금강반야바라밀이에요. 이제 이 구절 보실까요? 제가 사전 설명 다 해드렸어요. [1.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무분별지, 공성의 직관)을 행할 때 만법 자체의 형상이 ‘텅 비어 있음’(공성ㆍ청정ㆍ진여ㆍ열반)에 들어간다(법공法空).]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공성의 직관, 깊은 초의식 상태에서 에고가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구나. 아공. 만법 생각 감정 오감 6근이 모두 고정 불변의 실체가 없고 이 정광명의 작용일 뿐이구나. 법공. 그 다음에 마지막 구공까지 나아가면 일체 육바라밀의 그 근본 종자가 이 공적한 중에 다 갖춰져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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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걸 보고 있을 때 보고 있는 게 반야바라밀이고. 그럴 때 만법의 형상이 텅 비어 있음에 들어간다 하는 것은 아공 법공 구공 중에 법공을 강조해 놓은 거죠. 그래서 제가 법공이라고 따로 표시해 놓은 거구요. 만법이 본래 공하구나. 요거 풀어 놓은 게 반야심경입니다. 지금 이 구절을 자세히 풀어놓은 게 반야심경이에요. 만법이 어떻게 공인 줄 알았는지를 쭉 풀어놓은 게 반야심경. 이 한 구절에 반야심경이 다 들어 있어요.
20:28 <(귀류논증)중관파가 빠진 오류>
세존이시여. 두 번째 볼까요? [2. 세존이시여, 만약 일체의 법에 자성이 없다면, ‘초발심보살’(1지)은 어떠한 방편력으로 능히 ‘보시바라밀’을 행하여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고 ‘중생’을 성취시키며, 능히 ‘지계바라밀’ ‘인욕바라밀’ ‘정진바라밀’ ‘선정바라밀’ ‘반야바라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런데 의문이 나죠. 이렇게 텅 비어 있는 공성이라는 게 강조되다 보면요 이 공성은 공이란 얘긴데. 이 구공의 세계를 모르고 아공 법공만 특히 법공을 강조하는 게 반야심경이라고 그랬죠. 만법이 공하다만 얘기를 하면 어떤 의문이 나와요? 보세요. 이게 지금 중관파가 빠진 오류예요. 중관파는 만법이 모두 언어유희 개념일 뿐 공하다는 거예요. 자 보세요. 귀류논증 중관파 입장은요 용수 보살 논리에 충실해서 이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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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펜이라는 거는 존재한다. 현상적으로는 존재하지만, 연기를 통해 존재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자성이 없다는 거예요. 영원불변한 펜이 있겠냐는 거예요. 영원불변한 펜이 있겠냐? 이 펜은 분명히 시공간 안에서 어떤 인연을 통해서 형성된 거지 영원불변의 펜이 있겠냐?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공하다는 거예요. 이게 만법 법공. 그래서 일체 존재하는 건 펜이라는 언어뿐이라는 거예요. 보세요. 연기는 시공 안에서 계속 연기해 갈 뿐인데 그걸 딱 우리가 고정시켜서 펜이라고 이름 지어 놨기 때문에 펜이 있는 줄 안다는 거예요. 이것도 그냥 변화하는 연기상(緣起相)일 뿐인데 펜이라고 이름 지어서 펜이 있다는 거예요. 따라서 이 펜이라는 거는 존재하는 건 이름뿐이라는 거예요. 개념. 펜이라는 개념 때문에 우리가 영원히 다른 것과는 구별되는 자성을 지닌 펜이 있는 거 같지만 개념의 장난이고 알고 보면 자성이 없다는 거예요. 근데 자성이 없다면 왜 펜과 이 컵이 구별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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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설명 못 합니다. 엉터리예요. 자성이 있어요. 다만 자성은 현상계에 없어요. 이 공성이 자성이에요. 공성 안에 모든 만법의 진리가 다 들어있어요. 이게 구공의 영역인데 구공의 영역을 설명 못 하고 법공에서 끝내니까 만법이 공하다에서 끝내 버리니까 펜도 컵도 다 구분이 없어지는 겁니다. 연기하는 거 맞아요. 만법은 연기하는 게 맞는데 연기하는 중에 왜 사람은 사람이고 원숭이는 원숭이고 개는 개고 소는 소고 왜 컵은 컵인지? 요게 자성을 빼고 설명이 안 돼요. 자성은 있습니다. 그 자성의 세계가 구공의 세계예요. 그래서 공성의 극치에 가면 만법의 자성이 공성에서 나온다는 것까지 알아야 되는데 만법이 공하다에서 끝내 버린다고요. 지금 티벳 불교의 한계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조계종이나 천태종이나 태고종이나 우리나라 불교가 저는 이걸 좀 밀어붙여야 된다고 보는데 선불교는 자성을 부정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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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광명 안에 만법이 구족해 있다가 선불교거든요. 우리나라 불교는요 만법이요 우리 청정광명, 참나 안에, 주인공 안에 애초에 다 들어있다고 보는 불교라고요. 티벳과 달라요. 이걸 밀고 나가야 돼요. 왜 중관파 논리에 끌려가 가지고 만법을 부정하는 데서 만족해요. 만법을 다시 세우는 게 대승기신론이고 대승기신론부터 강조해요. 우리 진여 안에 참나 안에는 만법이 헤아릴 수 없는, 갠지스강의 모래알보다 더 많은 만법이 들어 있다라고 나와요. 이 대승기신론 강조한 게 누구죠? 원효예요. 원효스님 이래로 우리는 계속 우리의 청정광명, 공적영지, 한마음 안에는 만법이 구족해 있다고 배웠습니다. 근데 그 만법이 모두 텅 비어 있다는 이론에만 집착하는 중관파 논리에 끌려가지 마세요. 근데 그들의 교과서를 제가 공격하는 거예요. 그들이 최고의 바이블로 삼는 마하반야바라밀경에서조차 뭐라고 나오냐고요? 용수가 잘못 해석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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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부분적 자명에 빠져서 그렇지. 보세요. 물론 용수 보살은 이것도 방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하도 인도에서 논리로 공격해오니까 논리로 막다가 너무 논리의 자기가 빠졌다라고 말씀할 수는 있지만 저는 원경의 의도는 아니라는 겁니다.
24:17 <공성(空性)에 6바라밀의 종자가 있다>
두 번째 보세요. 이 질문이 나와요. 세존이시여 만약 만법에 자성이 없다면 초발심 보살은 1지 보살입니다. 처음 진정한 보리심이 발심했다고 해서 초발심이거든요. 왜 초발심인지 아세요? 구공을 깨달아서 초발심이에요. 우리 마음 안에서 육바라밀의 마음이 늘 터져 나오거든요. 즉 공성만 알아도 구공이라, 공한데 불공이라, 공하지 않기 때문에 공성만 직관해도 공성 안에서 육바라밀이 터져 나와야 돼요. 원래 공이 육바라밀 덩어리기 때문에 이 말 이해 못 합니다. 귀류논증 중관파는 이거 이해 못 합니다. 티벳식 중관파는 이거 이해 못 합니다. 텅 빈 공 안에서 육바라밀이 터져 나온다는 건 왜? 그 안에 육바라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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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성 종자가 있기 때문이에요. 불변의 자성 종자가 있기 때문에 공성만 깨달으면 여러분 육바라밀이 터져 나오게 돼 있어요. 실제로 체험해 보세요. 깊은 반야지 상태, 공성 직관 상태에 들어가시면요 탐욕의 마음이 나누는 마음, 보시의 마음으로 바뀌게 돼 있고요. 기본값이 바뀌기 때문에. 기본값이 갖춰져 있다니까요. 저는 공성 안에는 기본값이 있다는 거예요. 디폴트값이 있다. 그래서 우리가 공성에 접속만 하면 무지에서 지혜가 나오고요. 탐욕에서 나눔이 나오고요. 산란함에서 선정, 깨어있음이 나오고요. 참지 못 함 성냄에서 인욕이 나오고요. 바뀌게 돼요. 오염된 마음에서 청정한 마음이 나옵니다. 나태한 마음에서 정진력이 나와요. 나오나 안 나오나 보세요. 나오면 제 얘기가 맞는 거예요. 무조건 나옵니다. 왜? 공성 안에는 육바라밀의 근본 종자가 갖춰져 있기 때문에. 만법도 갖춰져 있지만 만법 중에 제일 대표인 6바라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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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춰져 있기 때문에. 자 그래서 초발심 보살은 무슨 방편으로 보시를 행하고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고 중생을 성취시키며. 자 이게 소승과는 다른 점이에요. 소승 아라한들은 이런 짓을 안 합니다. 대승보살만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고 중생을 성취시킵니다. 보살은 중생을 다 성취시키는 걸 목표로 해요. 아라한도 중생 성취시켜주고 도와주거든요. 그건 뭔가요? 아라한은 그런데 그 생이 끝이에요. 윤회 안 한다는 주장이기 때문에 영원히 중생을 책임지고 성취시켜주진 않아요. 자기한테 허락된 시간만큼 밖에 성취를 안 시켜줘요. 따라서 아라한과 다른 보살의 특징은 뭐냐면? 영원히 중생을 성취하기 위해서 윤회를 합니다. 즉 아라한과 달라요. 윤회 때문에 중생 성취를 포기하지 않아요. 윤회를 안 하는 거보다 중생성취가 더 커요. 그래서 윤회 탈출을 하지 않고 윤회계를 돌면서 계속 중생을 성취시키고 중생이 깨어나면 그곳이 뭐가 돼요? 불국토가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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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토 건설을 목표로 하면서 영원히 윤회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면서 뭘 해요? 무슨 방편으로? 육바라밀이라는 방법을 써서 중생을 구제하고 불국토를 성취시켜요. 여러분은 그냥 육바라밀만 하면 여러분은 중생을 성취시키고 불국토를 건설하는 게 되는 거예요. “나 오늘 불국토를 어떻게 건설하지?” 여러분 마음이 불국토고 여러분 마음이 정토가 돼야 돼요. 여러분 마음이 뭔데요? 6근이요. 여러분이 경험하는 생각 감정 오감의 세계가 지금 이 반야지로 인해서 굴러가고 있나요? 그 반야지에서 나오는 육바라밀이 법이 돼 가지고 여러분 법계를 굴리고 있나요? 이것만 보시면 돼요. 중생 성취에 꽂히시면요 본질을 놓치게 돼요. “중생을 위해서 봉사해야지 중생이 나한테 화를 내도 참아줘야지. 그래서 이 세계가 막 불국토가 되게 절을 많이 지어야지.” 외적인 것에 치우치면 절대로 불국토는 건설이 안 되고 중생은 구제가 안 됩니다. 내 법계를 육바라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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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하는 게 정토예요. 이게 유마경 핵심입니다. 정토는 어디서 이루어지는가? 네 마음. 정토는 마음속에 있는 거죠. 내 마음이 육바라밀로, 진리로 화해야 내가 사는 세계가 정토가 됩니다. 그래야 중생을 도와줄 수 있고 다른 중생의 법계도 정토로 화하게 할 수 있고 그럴 때 불국토가 건설되는 거예요. 그래서 1지 보살은 무슨 방편으로? 아니 만법이 자성이 하나도 없다면, 자성이 없다는 거에만 집착해서 공병(空病)에 빠지면 왜 보시를 행하냐고요? 만법의 자성이 없는데 보시는 왜 해야 되죠? 지계는 왜 해야 돼요? 선정은 또 왜 해야 돼요? 이유가 없어요. 자성이 없는데. 그래서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고 중생 구제는 또 뭘로 하죠? 어떻게 능히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반야바라밀을 하는 거죠? 충분히 제기할 만한 의문이죠. 뭐라고 둘러댈 수 있을지 모르지만 반야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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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올 수 있는 답은요 청정광명심에서 나올 수 있는 답은 그게 진실한 자성이고 진리여서 그렇습니다. 영원불변한 자성 진리여서 이 공에서, 공에 그 진리가 갖춰져 있기 때문에 공을 깨달은 이상, 아공 법공을 깨달은 이상 구공의 세계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 나아간 이들만 1지 보살을 맛볼 수 있어요. 초발심 보살에 들어갈 수 있어요. 육바라밀의 마음이 계속 발심되는 경지가 초발심 경지예요. 부처만큼의 발심은 아니어도 계속 솟구치고 있기 때문에 초발심 보살이에요. 중생은 안 솟구치느냐? 그건 아니에요. 중생도 본연의 불성이 없는 사람이 없고 정광명의 마음이 없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계속 육바라밀이 솟구칩니다. 유교에서 누구나 사단이 있다고 하듯이. 측은지심 수오지심 시비지심 사양지심이 육바라밀의 마음이에요. 유교랑 충돌시켜보면 유교도 주장했잖아요. 중생이면 누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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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바라밀의 솟구치는 마음이 있다고요. 그게 사단이에요. 측은지심, 보시바라밀의 마음입니다. 시비지심, 반야바라밀의 마음입니다. 사양지심, 인욕바라밀의 마음입니다. 수오지심, 지계바라밀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늘 깨어 있는 게 선정이고 여기에 있어서 최선을 다하는 게 정진일 뿐이에요. 다른 바라밀이 있는 게 아니에요. 이 육바라밀이 계속 솟구치고 있는 경지. 중생도 다 솟구치고 있지만 몰라요. 의식적으로 솟구쳐야 돼요. 솟구치고 있다는 걸 알고 솟구쳐야 돼요. 알면 더더더 솟구칩니다. 그 경지가 초발심 보살이에요. 그래서 계속해서 보리심이 터져 나오는 경지가 초발심보살이고 육바라밀이 계속 터져 나온다는 건 공성의 본질이 뭐라는 거예요? 육바라밀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보세요. 3번 [3. 수보리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무분별지, 공성의 직관)을 실천할 때, ‘초발심보살’(1지)에서 ‘최고의 올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여래의 깨달음, 불지佛地)에 이르기까지, ‘만법의 본성’1)을 잘 배운다. ‘만법의 본성’(염정染淨의 분별이 모두 ‘구공俱空’이되 정법淨法을 ‘구족具足’함)을 배우는 것을 ‘최고의 올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의 도’라고 부른다. 이 도는 능히 ‘6바라밀’을 두루 갖추고(구공具空), ‘중생’을 성취시키며,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수보리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이라는 무분별지, 공성 직관을 얻었을 때 초발심보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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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1지에서 초발심 보살의 경지에서 최고의 올바르고 원만한 깨달음 즉 불지에 이르기까지 1지부터 저 10지 너머 불지의 가기까지 뭘 하느냐? 만법의 본성을 잘 배운다. 만법의 본성을 잘 배운다. 만법의 본성이요 텅 비어 있는 중에 육바라밀이 꽉 차 있다는 걸 배운다는 뜻이에요. 여기서 만법의 본성을 잘 배운다는 건요 단순히 만법의 본성이 없다는 것만 배워서는 안 나오겠죠? 지금 질문 자체랑 답이 안 맞잖아요. 왜 텅 비어 있는데 육바라밀 하나요? 또 텅 비어 있는데 중생은 왜 구제하나요? 텅 비어 있는데 왜 불국토는 건설하나요? 불국토라는 것도 자성이 없고 중생도 자성이 없는데, 자성이 없는데 누굴 구제하며, 자성이 없는데 육바라밀을 왜 하나요? 1지부터 10지까지 공부하는 거는 이 세 가지, 3공인데 특히 구공이 핵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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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공이라는 거는 만법의 진실한 본성이죠. 그 본성을 잘 배운다. 만법의 본성을 배우는 것을 최고의 올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이 도라고 한다. 만법의 본성을 배워야 된다 그래요. 만법의 본성이 단순히 없다고 안 한다고요. 지금 본성을 배우라고 해요. 이 도는 능히 육바라밀을 두루 갖추고 중생을 성취시키며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만법의 본성을 정확히 알면 공성이 만법의 본성인데 여기서는 원래 공성이라고 해서 무자성만 강조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공성인 중에 이 도는 능히 육바라밀을 두루 갖추고 있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갖췄다 해서 구공이에요. 제가 주장한 갖출 구(具)자, 공성 안에 육바라밀이 갖춰져 있다는 것을 알아서 그 육바라밀을 가지고 중생을 성취시키고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는 거다. 또 네 번째 볼까요. [4. 사리불이여,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무분별지, 공성의 직관)을 행할 때, ‘모든 바라밀’을 두루 갖춘다(구공具空, 정법구족淨法具足).] 사리불이여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공성 직관, 초의식 상태에서 공성 직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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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할 때, 선정 속에서 지혜를 닦을 때 정혜쌍운이죠. 선정 속에서 지혜가 돌아가는 거죠. 정광명은 선정이면 공성을 직관하는 것은 지혜죠. 정혜쌍운을 닦는 중에 모든 바라밀을 두루 갖춘다. 육바라밀이 꽉 차게 된다. 이게 구공이에요. 그러니까 육바라밀이 공성 직관, 명상만 해도 즉 공성 직관은 아무래도 명상 쪽이죠. 명상 속에서 진리 직관하는 거죠. 한 생각 일으키지도 않아요. 한 생각 내려놓고 몰라 괜찮아 하면서 자명해 하고 몰라 괜찮아를 통해 정광명에 접속해서 자명해라는 거는 공성을 직관하고 있으니까 자명한 겁니다. 진리를 보고 있으니까 자명해요. 진리가 아니고는 자명하지 않거든요. 몰라 괜찮아 자명 상태에 들어있는 요 무분별지 상태에서 육바라밀이 터져 나오는 거예요. 공성에만 들어가면 터져 나와요. 원래 터져 나오는데 터져 나온 줄을 알게 되는 거예요. 내 기본값이 뭔지 알게 되는 거예요. 그게 초발심보살, 1지 보살이에요. 이 이상 더 설명해 드릴 방법이 없네요.
34:05 <상주불변(常住不變)의 자성>
그런데 지난 강의 때 제가 마하반야바라밀경 막 비판한 거 기억하세요. 뭔 경이 이렇게 일관성이 없냐? 그때 현장에 있던 분들 제가 막 비판하는 거 들으셨죠. 올라온 강의 들으시면 아시겠죠. 그걸 좀 설명해 드릴게요. 5번 6번과 대승기신론 요 세 가지를 보면요 충격적인 비밀이 드러납니다. 마하반야바라밀경 제가 지난번에 까기만 했잖아요. 수습을 못 해 드리고 끝내서 제가 미안해서. 경전을 비판만 했단 말이에요. 근데 이 경전을 이게 이 경전을 쓰신 분의 하나의 수수께끼 같은 화두였다면 이 화두를 풀어보여야 이 경전을 쓰신 분이 좋아하겠죠? 마하반야바라밀경 경전을 쓰신 분이 던진 화두가 있습니다.
35:00
넋 놓고 따라가다가는 보이지 않는 화두가 있어요. 이거를 제가 오늘 풀어드립니다. 자 5번 보시면요. 자 보세요. 요거 그려 볼까요. 자 6바라밀. 여기 우리 제 주장대로라면 육바라밀 공성 안에 뭐가 들어 있어야 돼요? 보시 지계 인욕 정진의 이 근본 자성 종자가 있어야죠. 왜냐면 보세요. 그 중관파가 제일 그 헤매고 있는 근거가요 뭐냐면요? 제가 근거가 있어요. 헤매고 있다고 제가 말할 수 있는 근거. 중관파는 자성이라는 건 영원불변의 세계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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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성이라는 건 근본적으로 진여의 세계입니다. 진(眞) 참되고 여(如) 특히 여, 여라는 거는 여여(如如) 늘 똑같아야 돼요. 이건 상주불변이거든요. 그러면 최소한 자성이라는 것을 중관파는 영원불변한 거라고 정했어요. 그래서 현상계에 영원불변한 펜이 없다는 거잖아요. 현상계는 시공은 이원성의 세계고 주객의 세계고 시공의 세계이기 때문에 인과의 세계이기 때문에 영원불변한 게 없어요. 그냥 논리로 따지기 전에 없어요. 온갖 뭐 난잡한 논리를 구사할 필요가 없다고요. 현상계에는요 현상계는 연기로 굴러가고 인과법으로 굴러가고요. 영원불변한 게 없어요. 영원불변한 펜은 현상계에서 찾으면 없어요. 이 펜의 영원불변한 본성은 어디서 찾아야 돼요? 초의식 정광명 상태에서 찾아야죠. 정광명 안에 공성 안에 어떤 정보가 있길래 기본값이 갖춰져 있길래 이 펜이 만들어졌을까? 펜은 펜으로써 다른 존재랑 구별될까? 이걸 연구해야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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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바라밀의 상태에서 연구하지 않고 그냥 논리와 분석으로만 연구하면요 무분별지에 기반한 반야바라밀이 아니면요 이 상주 불변의 영원한 세계를 어떻게 알아요? 이게 다 진여의 세계입니다. 모든 이 육바라밀도 그러니까 현상계에서 인과로 우리가 구현하는 육바라밀 있고요. 선정 반야라고 하는 불변의 진리의 종자. 유식학에서 본유종자라고 하는 거.. 본래부터 갖춰져 있는 영원불변한 종자가 아니면요. 이게 사실상 자성이에요. 유식학에서 이거 자성이라고 말하는 걸 두려워합니다. 불변의 종자라는 말만 해요. 이게 자성인데 자성을 자성이라고 못 해요. 왜 자성을 자성이라고 해버리면 불교가 아닌 게 돼 버릴까 봐. 이 자성을 두려워한단 말이에요. 영원불변의 자성이 왜 없어요? 텅 비어 있는 공성 그리고 이 정광명의 마음이라는 게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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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광명하다는 거가 이미 자성이에요. 영원불변하다고 영원불변히 빛난다니까요. 이게 자성이에요. 상주 불변. 진여라는 말을 쓰는데 진여란 말이 자체가 자성을 의미해요. 영원불변한 자성이 있다는 거예요. 이걸 이해 못 하시고 중관파식으로 먼저 불교를 접해 버린 분들은 이런 자성 얘기만 나와도 바르르 떱니다. 그러든지 말든지 아무튼 상주 불변의 세계가 여(如)다. 자성은 진여의 세계인데 진여 아닌 것, 6근에서 자성을 찾으면 있겠어요? 그러니까 플라톤도 울고 가겠죠. 플라톤이 아니 분명히 동굴에 비유에서도 우리가 경험하고 사는 거는 이데아의 그림자, 불변한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한 변화하는 세계에 있는 존재라고 얘기했는데 그 동굴 속에서 플라톤 비유로 얘기하면요 중관파가 하는 짓거리는 동굴 속에서 동굴 속에서 뒤지고 있는 거예요. 영원불변한 이데아가 없다고 아무리 자기들끼리 논리적으로 외친들 동굴 밖에 나와 본 사람은 밖에 나와 보니까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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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나무 있다. 동굴 속에서 그림자로 본 나무 보고 인과의 세계에서만 연구해 가지고 진짜 나무 없다고 얘기한 거는, 자성 없다고 얘기하는 건 옳으냐는 거예요. 중관론 연구하신 분들은요 플라톤 철학을 한번 연구해 보세요. 이데아를 모르면 진여의 세계도 이해 못 해요. 그런데 텅 빈 공성, 진여의 세계 말고는 자성이 있을 곳이 없고요. 당연히 6근의 세계에는 자성이 없어요. 당연히. 그래서 법공도 맞지만 구공까지 가야지 “근데 왜 펜은 펜이고 개는 개고 소는 소고 사람은 사람인가? 왜 생각은 생각이고 감정은 감정이고 오감은 오감인가?”에 대해 설명할 수 있다고요. 중관파는 이거 설명 못 합니다. 무수한 연기로 굴러갈 뿐이라고 하지 왜 그런데도 생각은 생각이고 감정은 감정인 걸로 구별되는지 설명 못 합니다. 생각도 감정도 연기일 뿐 연기는 고정불변한 게 없고 상호 연기 작용으로만 존재하니까 영원불변의 자성이 없다. 땡. 입증 끝. 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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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음. 이데아 없음. 끝. 현상계 안에서 아무리 설명해 보세요. 동굴 속에서 노는 거예요. 동굴 밖으로 나오세요. 동굴 밖에 나오면 이렇게 자성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청정광명심 안에 자성이 있습니다.
40:16 <『마하반야바라밀경』의 구공(具空)>
자 그런데 제가 왜 그때 마하반야바라밀경을 비판했는가? 보시죠. [5. ① 세존이시여, ‘보시바라밀’은 ‘반야바라밀’입니다. 사리불이여, 아끼고 탐냄이 없기 때문이다(인색을 얻을 수 없음). ② 세존이시여, ‘지계바라밀’은 ‘반야바라밀’입니다. 사리불이여, 파계가 없기 때문이다(파계를 얻을 수 없음). ③ 세존이시여, ‘인욕바라밀’은 ‘반야바라밀’입니다. 사리불이여, 인내와 인내하지 못함이 없기 때문이다(인내하지 못함을 얻을 수 없음).] 세존이시여 보시바라밀은 반야바라밀입니다. 보시도 이 반야지에서 나옵니다. 사리불이여 아끼고 탐내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 ‘왜 우리 안에서 보시바라밀이 나오는가?’에 대해서, ‘공성을 꿰뚫어보면 왜 보시바라밀이 나올 수밖에 없는가?’를 설명하는데 보세요. 아끼고 탐내는 탐욕이 없대요. 탐욕이 없어서래요. 탐욕이 없기 때문에 우리 청정한 이 공 자리에는 탐욕이 없으니까 보시바라밀, 반야지 상태에서는 탐욕이 없으니까 밖으로 남한테 탐욕이 없으니까 나와 남을 둘로 보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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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이라는 보시를 펼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좋죠. 이거 이거는 좋아요. 보세요. 탐욕이 없다는 얘기는요 탐욕이란 것만 부정했지 무욕을 부정하진 않았죠? 만법이 다 자성이 없다는 병에 빠지다 보면요 탐욕도 없는 거고 보시도 없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여기서는 탐욕만 부정했단 말이에요. 자 세존이시여 지계바라밀은 반야바라밀입니다. 사리불이여 파계가 없기 때문에. 자 지계에서도 뭐가 없다 그랬어요? 파계가 없다 그랬어요. 죄짓는 게 없기 때문에 밖으로 반야지 상태에서 밖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지계, 반드시 나눔을 구현하듯이 지계, 밖으로 반드시 이 절제된 행위를 한다는 겁니다. 계율을 지킨다는 거. 청정한 행위를 한다는 거예요. 나눔과 이 베풂을 펼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보시를 한다는 겁니다. 자세히 써봤지만. 인욕도 똑같아요. 그런데 보세요. 세존이시여 인욕바라밀은 반야바라밀입니다. 왜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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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반야지 상태에서는 인내도 인내하지 못함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도 맞아요. 자 보세요. 청정광명한 정광명 상태에서 참나 상태에서는 성내니 마니가 없단 말이에요. 그 측면만 말하면 성내니 마니가 없으니까 만법에 자성이 없다는 측면에서는 맞는데, 법공 차원에서 맞는 얘기지만 구공 차원에서는 뭐가 문제가 생겨요? 근데 왜 내가 인욕을 해야 되죠? 인욕도 인욕 아닌 것도 다 자성이 없는데 왜 내가 굳이 인욕을 해야 될 근거가 없어요. 이렇게만 설명해 버리면 구공에서 부족점이 나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경전 일관성 없다고 비판한 거예요. 자 그런데 지금 그러면 인욕 부분은 설명이 안 되죠? 인욕도 성냄도 없다는 얘기만 하는 거예요. 이 말도 맞아요. 텅 비어 있다는 측면에서 맞는데 텅 비어 있지 않다는 측면에서는 탐욕이 없고 파계가 없듯이 어떻게 설명이 되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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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냄이 없으니 밖으로 인욕바라밀이 나가야 된다고 말을 해야 될 거 아니에요. 자성이 본래 성낸다는 게 없으니까 진리의 상태에서는, 자 보세요. 진리의 상태에서는 이원성이 없다는 점에서는 탐욕도 보시도 파계도 지계도 없는 거예요. 하지만 청정 자성의 측면에서는요 탐욕은 없지만 베품이라는 나눔이라는 건 이 반야지 상태가 이미 나와 남을 나누지 않기 때문에 보시가 있어요. 나눔이, 나와 남을 나누지 않음이 있어요. 자 파계니 지계니 하는 이원성은 없지만 이 청정광명한 상태에서는 룰을 어기지 않기 때문에 청정하기 때문에 청정한 지계가 있는 거예요. 이미 구현되고 있는 자성이 있다니까요. 정광명 상태에서는 이미 빛난다는 게. 보세요. 반야도 여기서는 무명이 없겠죠. 어둠이 무지가 없겠죠. 왜? 이미 청정 광명하니까. 광명하다는 게 이미 지혜거든요. 어리석음은 무명이고 어둠이고 지혜는 밝음이잖아요. 그럼 광명하다는 건
44:00
지혜가 있고 무지가 없다는 걸 이미 보여주잖아요. 자 이원성이 없다는 측면과 정광명 상태에서 구현되고 있는 진리, 갖춰져 있는 진리라는 거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이게 구공의 영역이에요. 구공의 영역이고 이데아의 영역이에요. 이데아 차원에서도 인욕이라는 게 이미 구현되고 있다는 거예요. 참나도 이미 인욕하고 있다는 거예요. 여기에 참나 자리에 성냄이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는 지금 인내도 인내하지 않음도 없습니다라고 해버렸으니 제 식으로 얘기하면 구공 얘기하다 법공 얘기를 한 거예요. 제가 밑줄 친 것만 읽어 보세요. 근데 제가 재밌는 거를 설명해 드리려는 거예요. 제가 밑줄을 왜 쳤을까요? 밑줄 친 것들은요 자성을 정확히 설명하고 밑줄 안 친 거는 일체가 자성이 없다는 것만 강조합니다. 법공 측면만 강조했지 구공은 얘기 안 한 거예요. 자 보세요. [④ 세존이시여, ‘정진바라밀’은 ‘반야바라밀’입니다. 사리불이여, 나태나 정진이 없기 때문이다(나태를 얻을 수 없음). ⑤ 세존이시여, ‘선정바라밀’은 ‘반야바라밀’입니다. 사리불이여, 고요함과 산란함이 없기 때문이다(산란을 얻을 수 없음). ⑥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은 ‘반야바라밀’입니다. 사리불이여, 어리석음과 지혜로움이 없기 때문이다(무지를 얻을 수 없음). (구공具空의 반야바라밀 안에 6바라밀의 근본종자가 두루 갖추어져 있음)] 4번도 밑줄 안 쳤죠. 이제 짐작하시죠. 정진바라밀은 반야바라밀입니다. 여기에는 나태도 없고 정진도 없습니다. 둘 다 없다고 부정하고 끝냈어요.
45:00
5번도요 선정바라밀도 반야바라밀입니다. 고요도 산란도 없습니다. 일체를 부정하기만 했어요.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이 반야바라밀입니다. 반야지 상태에서는 반야바라밀입니다. 왜냐? 어리석음도 지혜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해되세요? 그래서 제가 욕했다고요. 욕할 만하잖아요. 왜 경전이 일관성이 없어. 구공을 얘기하려면 구공을 얘기하고 법공을 얘기하려면 법공만 얘기해야지 왜 두 개를 섞어서 얘기하냐는 거예요. 일관성 없다고 비판했어요. 그런데 6번을 보세요. [6. 사리불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이 어찌하여 ‘보시’를 할 때, 이것이 ‘지혜의 방편력’ 때문이며 ‘보시바라밀’ 나아가 ‘반야바라밀’을 두루 갖추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① ‘베푸는 사람’ ‘받는 사람’ ‘재물’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능히 ‘보시바라밀’을 두루 갖추는 것이다(인색을 얻을 수 없음). ② 죄와 죄가 아님을 얻을 수 없기에 응당 ‘지계바라밀’을 두루 갖추며(죄를 얻을 수 없음), ③ 마음이 요동하지 않기에 응당 ‘인욕바라밀’을 두루 갖추며(동요를 얻을 수 없음), ④ 심신이 정진하여 나태하지 않기에 응당 ‘정진바라밀’을 두루 갖추며(나태를 얻을 수 없음), ⑤ 산란하지 않고 탐내지 않으니 응당 ‘선정바라밀’을 두루 갖추며(산란을 얻을 수 없음), ⑥ 일체의 법을 얻을 수 없음을 알기(텅 빈 중에 무한하게 알아차리는 빛나는 의식임, 무분별지)에 응당 ‘반야바라밀’을 두루 갖추고 있다(무지를 얻을 수 없음).] 근데 두 가지 일관성 없음이 다르게 일관성이 없어요. 그럼 두 개를 충돌시키면 어떻게 될까요? 밑줄 친 거 보세요. 밑줄 안 친 거 먼저 볼게요. 자 베푸는 사람 받는 사람 재물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그러니까 보시를 할 때 베푸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베푸는 그 재물도 일체가 공하니까 보시바라밀을 두루 갖춥니다. 만법이 본래 공하니까 보시바라밀이 됩니다. 뭔가 설명이 옹색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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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근데 왜 보시해야 되냐고요? 이 설명이 없어요. 여기는 밑줄 안 쳤죠. 다 부정만 했으니까. 그래서 두 번째 볼까요? 죄도 죄 아님도 없으니까 지계바라밀을 갖춥니다. 이것도 이상하죠? 파계도 지계도 없대요. 그래서 밑줄을 안 쳤어요. 근데 아까 탐욕과 파계는 아까 이미 밑줄 친 데서 얻었죠(5. ① ② 참조). 우리가 자성을 얻었죠. 인욕부터 가볼까요? 마음이 요동하지 않기에 인욕바라밀을 갖출 필요가 없다. 여기서 갑자기 또 일관성이 없죠. 요동도 요동하지 않음도 없으면 이래야 되는데 청정광명 상태에서는 요동하지 않음만 없대요. 따라서 인욕 챙겼죠. 그래서 밑줄 쳤죠. 그 다음 정진 가볼까요? 심신이 정진하여 나태하지 않기에. 여기서는 정진한대요. 이제 여기서는 구공을 얘기한 겁니다. 정진 갑니다. 나태 없대요. 또 자성 하나 챙겼어요. 3박자 사고입니다. 마하반야바라밀경에 일관성 없는 두 설명을 충돌시켰더니 일관성이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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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란하지 않고 탐내지 않으니. 산란이 없대요. 그럼 고요하다는 얘기죠. 그러면 선정 챙겼어요. 고요함 챙겼어요. 일체 만법이 얻을 수 없음을 알기에 아니까 응당 반야바라밀을 갖추고 있다. 그러니까 무지를 얻을 수 없는 거죠. 안다는 거죠. 자명한 법공의 진리라 하더라도, 법공의 진리라도 안다는 게 포인트입니다. 알고 있으니까 반야바라밀이다. 아는 것도 무지도 없다고 안 했어요. 무지가 없는 거고 아는 건 있는 거예요. 반야에서는 무명, 무지가 없는 겁니다. 아는 거 챙겼어요. 자 두 개를 충돌했더니 우리 공성 안에 갖춰져 있는 청정 진리가 나왔습니다. 영원불변의 자성, 이데아가 나왔어요. 여러분 내면에 이 자성, 이데아가 있기 때문에 여러분은 공성에 그냥 몰라만 괜찮아만 해도 자명이 나와 버립니다. 여러분은 육바라밀이 뭔지 모르고 몰라만 했고 공성, 일체 만법을 몰라 하고 이원성을 다 부정만 했는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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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성을 초월한 자리에서 청정 진리가 나와서 이데아가 나와서 다르마의 명령, 다르마의 본성이 나와 가지고 여러분 삶을, 이 법계를 불국토로 만들어 버리고 중생을 구제시키고 육바라밀이 밖으로 터져 나오게 됩니다. 나태가 없으니 정진이 터져 나옵니다. 산란이 없으니 선정이 터져 나옵니다. 무지가 없으니 지혜가 터져 나옵니다. 자명이 터져 나옵니다. 이 터져 나오는 상태가 늘 터져 나오면 초발심이에요. 어쩌다 터져 나오면 이제 공부하는 초발심 그 아래의 보살이지만, 급수의 보살이지만, 늘 터져 나오면 유단자입니다. 태권도 검은띠의 보살이 돼요. 태권도랑 비교하면 딱 맞아요. 초발심보살이 1단이란 말이에요. 1단 이상은 이 기본기는 갖췄어요. 6바라밀의 기본값을 갖췄어요. 그래서 이제 몰라만 해도 자명이 터져 나오는 경지가 초발심 보살입니다. 퍼펙트하게 우리 안에는 진리의 형상이 갖춰져 있다. 이건 영원불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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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무리 못 되게 살았어도 이 육바라밀의 진리의 불변의 본성은 진여 안에 상주하고 있기 때문에 늘 터져 나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아무리 인생을 육도를 돌면서 그동안 추잡스럽게 막 살았어도, 부끄럽게 살았어도 몰라 하는 순간 햇빛이, 빛이 천년의 어둠을 없애듯이 여러분 천년의 그 어둡게 살아온 무명의 마음도 빛이 들어가면요 육바라밀이 가동됩니다. 육바라밀이 작동합니다. 몰라만 잘하셔도 육바라밀은 터져 나오게 돼 있어요. 그리고 양심성찰을 해주시면 육바라밀이 더더더 신나서 내 법계를 바꿔 놓습니다. 기독교에서 칭의가, 성령 각성이 이 정광명 각성에 해당된다면, 성화 거룩해지는 건 육바라밀이 나를 내 삶을 인도할 때,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이 진리가 내 삶을 인도할 때 나도 하나님처럼 예수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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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해 가거든요. 그게 성화거든요. 이 성화가 육바라밀이 터져 나오는 작업입니다. 돈오는 정광명 각성, 점수는 육바라밀이 터져 나오는 거. 육바라밀이 내 삶에서 점점 점점 터져 나오는 거. 점차 점차 터져 나와서 점수예요. 자 마하반야바라밀경에서 구공 법공에서 구공까지 찾아내 봤죠.
50:22 <『대승기신론』의 구공(具空)>
그러면 대승기신론 읽어 볼까요. 제가 지금 한 작업이요. 제가 처음 한 작업이 아니라는 증거가 있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경에서 법공만 읽어내면 중관파 논리로 빠져 버리는데 구공까지 읽어낸 분들은 대승기신론을 씁니다. 대승기신론을 쓰신 분은 방금 제가 했던 작업을 똑같이 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왜 그런지 보세요. [① ‘진리의 본성’(참나의 본성)은 탐욕이 없음을 본체로 삼음을 이해하였기에, 진리의 본성에 순응하고 따라서 ‘보시바라밀’을 닦으며, ② ‘진리의 본성’은 오염되지 않아 5욕의 허물에서 벗어나 있음을 이해하였기에, 진리의 본성에 순응하고 따라서 ‘지계바라밀’을 닦는다.] 이 진리의, 진여 자리, 한마음. 대승기신론에서는 정광명을 한마음이라고 하죠. 청정한 한마음, 이 정광명의 한마음 안에 진리의 본성을 직관해 보니 진리의 본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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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이 없음을 본체로 하여 탐욕이 없음이 본체라는 건 영원불변의 자성이죠. 본체로 삼음을 이해했기 때문에 이 진리의 순응해서 보시바라밀을 닦으며. 진리의 본성은 오염되지 않고 오욕의 허물에서 벗어나 있다는 건 파계가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본성에 순응하여 지계바라밀이라 하며. 즉 본성이 지계니까 순응해서 한다는 말을 해요. 이게 구공이에요. 본성이 다 자성이 없단 얘기만 해버리면 구공이 나올 수가 없다고요. 그런 논리로는 육바라밀을 해서 큰 보살이 못 돼요. 1지 보살 못 갑니다. 1지 보살 갈 양반들은요 내 안의 기본값이, 진여의 기본값이 육바라밀이라는 걸 명확히 알아야 돼요. 이 얘기를 못 하면 가짜입니다. [③ ‘진리의 본성’에 고뇌가 없어서 성냄과 번뇌를 벗어나 있음을 이해하였기에, 진리의 본성에 순응하고 따라서 ‘인욕바라밀’을 닦으며, ④ ‘진리의 본성’에 몸과 마음의 형상이 없어서 나태함을 벗어나 있음을 이해하였기에, 진리의 본성에 순응하고 따라서 ‘정진바라밀’을 닦는다.] 진리의 본성에 고뇌가 없어서 자 성냄이 없다는 거, 성냄과 번뇌에서 벗어나 있다. 진리의 본성은요 성냄에서 벗어나 있다는 걸 아니까. 왜냐하면 청정광명 상태에서 무슨 탐욕이 있으며 탐욕이 없으면 보시바라밀의 종자가 있는 거고요. 청정 광명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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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오염된 파계가 있겠어요? 그러니까 지계바라밀이 그 안에 종자로 이미 구현되고 있는 거, 이미 구현되고 있는 겁니다. 청정광명 상태 안에 단순히 잠재되어 있는 게 아니에요. 이미 구현되어 있으면서 잠재되어 있는 거예요. 왜 더 펼칠 수 있으니까 잠재되어 있다는 거고 이미 구현돼 있다는 겁니다. 왜냐? 청정광명은요 이미 인욕하고 있어요. 조화롭단 말이에요. 청정광명이 성내고 있는 청정감이 있겠어요? 그러니까 성냄이 없고 인욕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청정광명을 시공간 안에 펼칠 때도 인욕바라밀을 해야 되는 거예요. 이렇게 밖으로 터져 나오는 보리심을, 바라밀을 상대적 보리심이라고 하고 이 안에 갖춰져 있는 보리심을 절대적 보리심이라고 합니다. 영원히 불변하거든요. 이건 시공간 안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펼쳐져요. 남과 나눈다는 것도요 내가 나눠줄 게 있느냐? 없느냐? 상대방이 누구냐? 따라서 다양한 모습으로 펼쳐집니다. 상대적 보리심. 상대적 양심이죠. 자 지계, 진리를 지킨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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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모습으로 구현됩니다. 상대적이죠. 시공간 안에서 내 역량껏 상황껏. 하지만 본질은 부처랑 똑 같아요. 절대적 보리심에서는 부처랑 똑 같습니다. 자 여기 참나가 나태함이 있을까요? 참나는 지극히 정성스러운 자리지 한 순간도 멈추지 않는 자리인데 영원불변히 빛나는 자리인데 그 자리가 정진력 아니에요. 그래서 나태가 없다는 거예요. 지금 진리를 다루는 차원이 다릅니다. 절대적 보리심 그리고 근본 진리의 본성에서는요 성냄이 없다. 그리고 나태가 없다. 4번. 그다음 5번요 [⑤ ‘진리의 본성’이 항상 안정되어 있어서 어지럽지 않음을 본체로 삼음을 이해하였기에, 진리의 본성에 순응하고 따라서 ‘선정바라밀’을 닦으며, ⑥ ‘진리의 본성’이 광명함(진리의 본성은 무한하게 알아차리는 빛나는 의식임, 무분별지)을 본체로 삼아 어두움을 벗어나 있음을 이해하였기에, 진리의 본성에 순응하고 따라서 ‘반야바라밀’을 수행하는 것이다.] 진리의 본성은요 지극히 고요하지 참나 정광명 상태가 산란하겠어요. 산란하지 않죠. 그러니까 선정바라밀이 이미 구현되고 있어요. 이미 구현되고 있는 선정바라밀을 밖으로도 펼쳐내라는 거예요. 그러면 상대적 보리심 차원에서 육바라밀이, 선정바라밀이 구현됩니다. 그리고 여섯 번째 진리의 본성이 광명하다는 말이에요. 이미 광명한 의식이에요. 그러니까 여기는 무명이 없어요. 근데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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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나는 지혜로운데 너는 지혜롭지 않냐는 거예요. 6근의 세계에서도 연기의 세계에서도 반야를 펼쳐야 되는 거예요. 마하반야바라밀경의 주장과 제 주장이 다를까요? 그동안 제가 주장해온 구공의 핵심요결이 여기 다 들어 있죠. 제가 맞아요. 제가 맞다는 건 아니죠. 진리가 맞는데 제가 보는 진리의 관점이 전 맞다고 확신합니다. 더 자명한 결론이 있으면 전 따르겠습니다만 제가 현재까지 30년 이상 연구해본 결론은 마하반야바라밀경과 대승기신론의 입장과 제 입장은 맞다는 겁니다. 다만 귀류논증파의 중관파 논증, 중관파 입장과는 다르다는 겁니다. 저는 용수보살의 주장과는 다르다는 거예요. 귀류 논증파를 떠나서 모든 중관파의 시조인 용수 보살 입장과 저는 다르다 그 양반이 마하반야바라밀경을 푼 거는 지극히 논리적인 인도 특유의 논리의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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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에 빠져 있고 논리 싸움에서는 도움이 됐을지 모르나 진리를 온전히 이해하는 반야바라밀을 설명하는 데는 부족했다는 거. 진짜 반야바라밀은 바로 그냥 반야바라밀경 원전에서 답을 찾으시는 게 더 맞다는 겁니다. 그러면 아공 법공 구공밖에 없다는 겁니다. 정광명심 상태에서 제가 체험적으로 수없이 명상을 통해서 실험해본 결과. 저는 끝없이 정광명심에 접속해 있습니다. 매일매일 점검합니다. 다른 공성의 진리가 있나? 아공 법공 구공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정광명에 계속해서 날마다 저는 차크라 에너지를 대줍니다. 태식한지가 저는 96년에 태식을 했기 때문에 단전이 스스로 숨을 쉬면서 온몸에 차크라를 다 연 게 96년이란 말이에요. 꽤 됐죠. 오랜 세월 동안 에너지를 대주면서. 청정광명심에, 티벳밀교식으로 말하면 지극히 미묘한 마음인 청정광명의 마음에 지극히 미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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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를 대줘서 진정한 정광명의 상태를 계속 닦아가면서 연구해 본 겁니다. 밀교적으로 현교적으로 아무리 연구해도 다른 답을 못 찾았어요. 그래서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마하반야바라밀경의 본질도 이겁니다. 두 개를 충돌시키니까 답이 나오죠. 그 답이 대승기신론에 나와 있는 육바라밀의 설명과 똑같죠. 이건 이미 대승기신론을 쓰신 분도 마하반야바라밀경을 연구해서, 거기서 그 공종의 대표 경전인 마하반야바라밀경을 연구해서 거기서 진리의 종자들을 캐낸 그 결과물이기 때문에 이렇게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뭐 다른 답이 있을까요?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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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녹취) [홍익학당] 『마하반야바라밀경』에서 은밀하게 전하는 구공의 핵심_A982(56:44) (홍익학당) | 작성자 수호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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