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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장 오오! 사풍객(死風客)
①
동백산(桐柏山)은 선홍의 꽃으로 붉게 불타오르는 듯했다. 두견화(杜鵑花)며 척촉화( 花)가 꽃봉오리를 잔뜩 터뜨리기 시작한 까닭이었다.
이제 완연한 봄이었다. 마침내 사월은 봄을 몰고 온 것이었다.
지난 겨울은 참으로 잔인하였다. 사풍객의 혈륜대겁은 중원천하를 꽁꽁 얼어붙게 만들지 않았던가 말이다.
마침내 엄동의 겨울은 지나갔다. 없는 것 같이 있는 세월의 순환성이 마침내 겨울을 몰아낸 것이다. 그러나 겨울은 완전히 물러간 것이 아니었다. 꽃샘추위라는 것이 있듯이 말이다.
천장대(天丈臺).
동백산의 천장대는 바야흐로 무림천하의 촛점이 되었다. 그것은 바로 공전절후의 정사 두 고수가 생사를 가름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천장대 주위는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고 있었다. 중원전역은 물론이거니와 사해팔황으로부터 수많은 인파들이 모여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희대미문(稀代未聞)의, 역사적인 일전을 구경하기 위해 천리길을 마다하고 모여든 것이다.
이미 천장대 주위는 발디딜 틈이 없었다. 주변뿐만이 아니었다. 동백산 초입은 밀려드는 인파로 말미암아 난장을 방불케 했다.
천장대는 몹시 특이한 지형이었다.
동백산 서쪽의 끝머리에는 산세가 뚝 끊어지며 백 장(百丈) 넓이 가량의 공간이 있었다.
그 공간 건너편에 천장대가 솟아 있었다. 천장대 아래는 그야말로 만장절예였다. 그곳은 사시사철 운해로 뒤덮여 있었다.
결국 천장대로 오르는 길은 백 장의 공간을 날아넘는 방법밖에 없었다.
정오였다.
사월의 따사로운 태양이 천장대의 중천에 떴다. 새털구름 한 무리가 유유로히 푸른 하늘에 떠 있었다.
"와아!"
군웅들의 함성이 동백산을 뒤흔들었다. 하늘을 무너뜨릴 듯한 함성이었다. 천장대 아래 모여든 군웅들의 수는 수만에 달하고 있었다.
이때였다.
휘익!
비조(飛鳥)처럼 한 가닥 백영이 군웅들의 머리 위로 솟구쳐 올랐다.
파파팟!
인영은 단숨에 백 장의 공간을 날아넘어 천장대로 쏘아갔다.
"와!"
"절묘한 어풍승영비(御風昇影飛)다!"
"과연 신주제일룡이다!"
백영은 바로 사유성이었다.
사유성은 수만 군웅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단 한 번의 도약으로 천장대를 뛰어 넘었다.
이어 그는 천장대 한가운데 우뚝 섰다.
한 줄기 세찬 바람이 산봉을 솟구쳐 올라왔다. 바람은 사유성의 백삼을 표표히 날리고 있었다.
그는 등에 천추신검을 꽂고 있었다. 검의 손잡이는 보옥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사월의 따사로운 햇살 한자락이 천추신검의 손잡이에 떨어졌다.
파르르르!
무지개빛 광채가 오색 영롱한 빛을 반사하며 천장대 주위로 뻗어나갔다. 그것은 참으로 눈부신 광경이었다.
사유성은 태양을 마주보고 섰다.
"......!"
드디어 결전의 날이 도래한 것이다. 사유성은 격동하는 마음을 금치 못했다. 그는 자신이 있었다.
태양을 마주보고 선 그는 격동하는 마음을 진정시키듯이 자신을 향해 속으로 이렇게 외쳤다.
마침내 도래했다.......
나 사유성의 운명을 시험하고자 스스로 택한 날이다......
후후훗......
하늘은 높고도 맑다......
나 사유성은 이제 거대한 붕이 되어 하나의 날개로 중원천하를 뒤덮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신(神)이 안배한 일......
보라......
저 많은 군웅들의 존경에 찬 시선을......
사유성아......
이제 너는 영세제일인으로 첫 날개를 휘젓는 거다......
마음껏......
날개를 휘젓는 거다......
그때였다.
"우!"
군웅들 사이에서 뜻밖의 신음성이 터져나왔다. 그것은 불안과 공포가 가득찬 신음성이었다. 뒤를 이어 엄청난 소요가 군웅들을 휩쓸었다.
그들은 제일 먼저 희미한 파공성을 들었다. 그리고 보았던 것이다.
스스스슷.......
한 괴영이 허공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괴영은 천장대를 향하고 있었다.
괴영의 신법은 참으로 신출귀묘했다. 그는 발을 움직이거나 팔을 젓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구름에 달가듯이 백 장의 허공을 가로지르는 것이었다.
그것은 유운요일(流雲繞日)이라는, 극도로 평범하면서도 신묘한 신법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마침내 백 장의 공간을 가로지른 괴영은 천장대에 올라섰다. 그는 흑의에 흑립을 쓰고 있었다. 흑립은 생각보다 커서 괴영의 얼굴을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
수없이 많은 중인들의 숨소리가 한순간에 멎었다. 그들은 시선을 천장대 위의 괴인에게 집중시켰다.
슥!
괴영이 손을 들어 흑립을 벗었다. 바로 그때였다.
"사... 사풍객이다!"
비로소 공포에 질린 군웅들의 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들은 참혹하게 일그러진 입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 이제야 사풍객의 진짜 얼굴을 볼 수 있다니... 그... 그런데......!"
"오오! 저럴 수가!"
그들은 공포 속에서 더더욱 눈살을 찡그리고야 말았다.
천하의 대살객(大煞客)인 사풍객. 그의 얼굴은 참으로 흉측했다. 그것은 도저히 인간의 얼굴이라고 믿을 수 없었다. 그것은 바로 악마의 얼굴이었다.
그의 얼굴은 정녕 사풍객다웠다. 이리의 심장과 독사의 이빨을 가지고, 마(魔)의 저주를 품은 자의 얼굴이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으으으!"
중인들은 처절한 신음성을 토해냈다. 이어 그들은 얼굴을 있는대로 찡그렸다. 어떤 자는 눈을 감으며 얼굴을 돌리기도 했다. 정말이지 사풍객의 얼굴은 흉악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눈에서는 피보다 붉은 혈광이 뚝뚝 흘렀다. 얼굴 가득 드러난 핏줄은 굵기가 손가락마디만 했다. 그뿐인가? 시퍼런 입술은 창백한 얼굴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중인들은 그의 얼굴이 꿈 속에 나타날까봐 두려웠다. 그의 얼굴은 정녕 악마의 얼굴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
눈빛!
두 쌍의 눈빛은 격렬하게 십 장 공간을 두고 부딪혔다.
그 순간 사유성의 검미가 꿈틀거렸다. 그는 한순간에 사풍객이 역용술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 순간 사유성은 보았다.
사풍객의 시뻘건 혈광 속에 숨어 있는 진짜 눈빛을. 그 눈빛은 무심했다. 그리고 얼음처럼 차디찼다.
"사풍객... 와주어 고맙다!"
사유성은 먼저 입을 열었다.
"......."
사풍객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유성은 사풍객의 눈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내처 말했다.
"이것으로 그대가 마웅임을 온 천하가 알았다. 물론 나 사유성도 그 사실을 인정한다!"
사유성의 낭랑하면서 기도에 찬 음성은 백 장 밖 군웅들의 귀에 똑똑히 전달되었다.
"......."
그러나 사풍객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대는 너무도 많은 피를 흘려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자리에서 그 피값을 치루어야 할 것이다."
"......."
"천하인들이 보는 앞에서... 만일 그대가 스스로 죄값을 치루기 위해 자결(自決)을 한다면 허락하겠다!"
그때였다. 처음으로 사풍객의 입이 열렸다.
"크크크..., 너무 말이 많다고 생각지 않느냐?"
"......!"
사유성의 안색은 한순간 굳어졌다. 그는 잠시 사풍객을 쏘아보더니 침통하게 말했다.
"석대가(石大家) 사건 이후 너를 다시 만나게 되는 날 기필코 승부를 가리겠다고 결심했다. 오늘 그것이 이루어져 기쁘다."
"크크크... 빨리 춤을 추자. 바보들이 지루해 하고 있지 않느냐?"
느닷없는 사풍객의 말에 사유성은 안색이 변했다.
"춤을 추자고?"
"크크... 그렇다. 춤을 추어야 바보들이 즐거워할 것이 아니냐?"
"건... 방진 놈!"
찰나지간 사유성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차... 앙!
동시에 그의 등에서 검이 뽑혔다. 천추신검(天樞神劍)의 검광이 십 장을 폭사했다.
"자! 어서 덤벼라! 대마인 사풍객!"
사유성은 외쳤다.
그 음성은 참으로 낭랑했다. 사유성의 목소리는 천장대를 뒤흔들 듯이 퍼져나가며 중인들의 고막을 파고 들었다. 능히 기선을 제압하는 음성이었다.
"크크크... 좋다. 바보들이 좋아하도록 춤을 시작하마!"
사풍객의 기소가 그 뒤를 쫓아 나갔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꽈꽈꽈... 꽝......!
눈 깜짝할 사이에 천장대는 빛과 폭풍, 뇌전(雷電)에 뒤덮이고 말았다.
"오오!"
"시... 신들의 대결이다!"
백 장 밖의 군웅들은 그만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그들은 이제껏 보지도 듣지도 못한 엄청난 싸움에 넋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파르르르릇... 콰웅!
천번지복(天飜地覆)이 따로 없었다.
사유성과 사풍객의 싸움은 격렬했다. 다시 한 차례 더 그들이 맞부딪쳤다.
콰콰쾅!
천장대는 허물어질 듯이 크게 흔들렸다.
검광이 하늘을 갈랐다. 강기( 氣)가 일으키는 운무가 천장대를 에워쌌다. 그 가운데 하늘과 땅을 뒤흔드는 굉음과 진동이 계속되었다.
"......?"
군웅들은 누가 누군지조차 구별할 수 없었다. 그들의 눈에는 자욱한 운무 속에서 번뜩이는 검광만 보일 뿐이었다. 그것은 두 마리의 신룡이 여의주 하나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자욱한 운무 속에서.
그런 가운데 해가 기울고 있었다.
②
콰르르르......!
천장대는 무너질 듯 뒤흔들렸다.
어느새 밤이 왔다. 천장대 위로 누애의 눈썹과도 같은 편월(片月)이 떠올랐다.
두 청년은 마주섰다.
파앗!
서로를 노려보는 두 쌍의 눈은 불꽃을 튕겼다. 하지만 그 눈빛은 이미 현기를 잃고 있었다. 참으로 오랜 싸움이었다. 그러나 승부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그들은 허탈할 대로 허탈해져 있었다. 이제는 두 사람 모두 한식경도 버틸 힘이 없었다. 하나의 숲 속에 두 마리의 사자는 존재하지 않는 법이었다.
결국 두 사람 중에 한 사람만이 승자가 되어야 했다. 바야흐로 최후의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사풍객... 마지막 일검을 ... 받으라!"
사유성은 무겁게 말했다. 이어 그는 최후의 공력을 끌어 모으며 천추신검을 수평으로 뻗었다.
사풍객도 마찬가지였다.
"ㅋㅋㅋ... 사풍인이 너의 심장을 찢어주마!"
위잉!
사풍객의 몸이 회전했다. 바로 그때였다.
츠츠츠츳......!
하나의 검기가 사유성의 손에서 뻗어나갔다. 그것은 푸른 빛으로 섬전처럼 빨랐다. 검기는 일직선으로 뻗으며 사풍객의 가슴을 꿰뚫을 듯했다.
"차앗!"
찰나지간 사풍객은 혼신의 힘으로 땅을 박찼다. 그의 신형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사풍객은 혈마충소신법(血魔充素身法)을 전개했다. 그는 한순간에 백 장을 솟구쳤다.
츠츠츠츠츳......!
그러나 검기는 눈이라도 달린 듯 했다. 사유성의 손을 떠난 검기는 푸른 빛을 폭사해내며 사풍객을 따라 솟구치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심령제어검술(心靈制御劍術)이었다. 사유성은 바로 심령제어검술을 전개한 것이다.
"오오!"
군웅들은 입을 딱 벌렸다. 그들은 듣도 보도 못한 절학에 한순간 넋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때였다.
"핫핫핫핫... 사풍객! 이제 끝이다!"
사유성의 입에서 낭랑한 대소가 메아리치는 순간,
번쩍!
"푸... 학!"
단말마의 신음소리가 허공을 울려퍼졌다. 동시에 허공에서 맹렬히 회전하던 사풍객의 몸이 딱! 멈추는 것이었다.
촤... 아......!
그와 동시에 피(血)의 우박이 천장대를 향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뒤이어 사풍객의 입에서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으으... 악!"
놀라운 일이었다.
사풍객의 오른쪽 가슴으로부터 등까지 천추신검이 길게 관통해 있는 것이 아닌가?
"크... 아... 아... 악......!"
끊이지 않는 처절한 신음소리가 동백산 너머로 퍼져나갔다. 곧바로 사풍객은 산적 꿰듯 천추신검에 관통당한 채 아래로 맹렬히 떨어졌다.
그는 까마득한 천장대 아래의 어두움 속으로 떨어져 내려갔다.
휘이이익.......
허공을 가르는 파공성이 아득한 절애 아래로부터 들려왔다.
"와... 아.!"
"신주제일룡의 승리다!"
수만의 군웅들은 그때서야 무슨 일이 있어났는지를 알았다. 그들은 비로소 일제히 동백산이 무너질 듯한 함성을 내질렀다.
"사풍객이 죽었다!"
"와아!"
군웅들의 함성은 그칠 줄을 몰랐다. 그때였다. 천장대 위에 서 있던 사유성의 입에서 돌연 신음이 터져나왔다.
"끄... 끄윽... 사풍인(死風刃)이......."
사유성은 느닷없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뒤이어 그는 술에 취한 듯이 비틀거리는 것이었다. 감싸안은 그의 가슴팍이 시뻘겋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쿠... 웅!
마침내 사유성은 쓰러졌다.
그는 하늘을 보고 누웠다. 사유성의 오른쪽 가슴에는 타원형의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것은 바로 공포의 사풍인이 박히면서 생긴 상처였다. 그곳에서는 날카롭게 반짝이는 파편들이 악마의 이빨처럼 빛나고 있었다.
"......!"
사유성은 감았던 눈을 떴다. 그의 눈 속에 편월이 들어왔다.
편월은 소멸을 향해 스러져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만월을 향해, 절정의 완성을 위해 차오르는 달이었다.
그 순간 고통으로 일그러졌던 사유성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져갔다.
후후......
이겼어......
이 사유성은 이겼어......
상처를 입었지만 결국은 이긴 거야......
사풍객... 너는 강했지......
하지만 결국 최후의 승자는 이 사유성이지......
후후후......
가슴에 구멍이 뚫렸어도 나는 살아난다......
나는 불사조(不死鳥)이기 때문에......
자아! 사유성......
날자, 날자, 날자꾸나......
저 높은 천공으로......
후후후아하핫핫.......
③
오월이었다.
신록이 중원의 산하를 황홀한 춘색으로 뒤덮었다.
오월. 푸르른 오월은 그야말로 황금의 계절다웠다. 어둠이 깊을 수록 새벽은 더욱 빨리 온다는 말은 틀림없었다.
새로운 계절인 오월. 중원 무림은 그 어느 때보다 더욱 평화로웠다. 그들은 수 년 이래 이런 평화를 맛 본 적이 없었다. 이유는 바로 사풍객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악의 화신인 사풍객은 제거되고 말았다. 마침내 혈풍은 종식된 것이다.
엄청난 마의 폭풍을 일으키며 결성된 대혈륜궁조차도 전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백만마도(白萬魔道)가 모였다는 대별산(大別山)도 그지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정녕 하늘의 축복이었을까? 사풍객이 쓰러진 이후 대자연은 자신의 질서를 되찾은 듯했다.
농사철이 되자 하늘은 알맞은 햇볕과 비를 내려주었다. 불어오는 바람도 더없이 부드러웠다.
사람들은 오랜만에 평화로운 마음으로 땅을 갈았다. 그리고는 씨를 뿌렸다. 풍요로운 삶을 기원하면서. 아니 영원한 평화가 중원무림에 깃들기를 바라며.
광명회(光明會).
그런 이름이 당금 무림을 환희에 휩싸이게 만들고 있었다.
이름 그대로 빛이 가득찬 모임인 광명회를 만든 것은 천하 정도인들이었다. 그들은 구파일방을 주축으로 하여 무림구대세가와 천하에 산재한 백도제파(白道諸派)들이었다.
그런 광명회를 이끌어 가는 자는 바로 신주제일룡 사유성이었다. 그것은 이미 예견되어 있던 일이다.
사유성은 수만의 군웅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무림의 공적인 사풍객을 쓰러뜨렸다. 가히 천하 백도의 태양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새로이 태동된 광명회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하늘의 주인인 태양을 품 속에 모시고 있는데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당금 신주제일룡 사유성은 과거 천무 이래로 새로운 천하제일인으로 추앙받고 있었다. 그의 오른쪽 가슴에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커다란 타원형의 흉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바로 사풍인의 자국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에게 찬란한 명예를 안겨 주었다. 그야말로 영광의 상처(傷處)인 셈이었다.
무림은 조용했다. 다시 말해서 무림의 오월은 부드러운 바람과 따사로운 햇볕처럼 평화로왔다.
인생을 물어 무엇하리오?
삶이란 구름같이 믿지 못할 것......
용(龍)도 되었다가, 뱀(蛇)으로 화(化)하기도 하는 것......
미(美)를 물어 무엇하리오?
미는 추(醜)보다 더 추한 것.
미추(美醜)의 차이는 종이 한 장이라는 것을 아시오?
사랑(愛)을 물어 무엇하리오?
사랑은 증오보다도 오히려 쓴약.
내 생애 쓴 약을 삼키듯 살았으면 그만이지, 또 무슨 약을 삼키겠소?
바람이 불면 구름이 모이고, 구름 뒤에 천둥이 치고
그 다음에 비가 오듯이,
그렇지, 인생에 대해
새삼 무엇을 물으리오?
죽은 듯이 살면 될일 일텐데......
인생을 물어 무엇하리오?
삶이란 구름같이 믿지 못할 것......
용도 되었다가, 뱀으로 화하기도 하는 것......
노래였다.
기묘하게 여운을 끄는 노래소리가 춘풍을 타고 들려왔다. 구화산(九華山) 등성이의 초지에서 였다.
초지 아래는 더없이 넓은 밭이 펼쳐져 있었다.
쏴아... 쏴아아.......
바람이 불 때마다 대맥(大麥)들이 일제히 몸을 비비며 향긋한 냄새를 사방으로 퍼뜨렸다. 이제 막 익어가기 시작하는 보리냄새는 참으로 향긋했다.
하늘은 더없이 높고도 맑았다.
"......."
한 사람이 초지에 누워 있었다. 팔베개를 하고 누워있는 그의 얼굴은 죽립으로 가려져 있었다. 따라서 용모를 알 길이 없었다.
그는 일신에 회의를 걸치고 있었다. 그의 오른쪽에는 보자기로 싼 장검 한 자루가 있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그는 오른쪽 가슴에서 옆구리까지를 천으로 칭칭 감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 그는 큰 중상을 입은 듯했다.
죽립으로 얼굴을 가린 그 사람은 조금 전에 했던 노래를 몇 번이나 거듭해서 부르는 것이었다.
다시 한 차례의 노래가 끝났을 때였다.
문득 그의 팔베개가 풀어졌다.
머리에서 삐져나온 그의 손이 길다란 풀잎 하나를 뜯었다. 그는 풀잎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 순간 얼굴을 가리고 있던 죽립이 살짝 미끄러지면서 언뜻 눈이 드러났다.
"......."
구름이 흘러가는 푸른 하늘처럼 그의 눈빛은 웬지 텅 비어 있었다.
삘리리... 삘릴리리릴......
맑으면서도 구슬픈 음향이 흘러 나왔다. 초적은 구슬픈 여운을 남기며 초지 위로 퍼져나갔다.
바로 그때였다.
"하하하...! 형장, 몹시 고독한 모양이군요? 소제가 벗해 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느닷없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 음성은 옥계수(玉溪水)가 흐르는 것처럼 맑고 투명했다.
"......."
초적이 멎었다.
그러나 회의인은 여전히 누워 있었다. 잠시 후였다.
회의인의 눈 속에 흐르는 구름이 사라졌을 때였다. 이번에는 문사건(文士巾)을 쓴 하나의 얼굴이 회의인의 눈 속에 들어왔다.
"......."
두 눈은 수정같았다. 뺨은 빙옥을 무색케 했다. 신에는 하늘거리는 연남빛 유삼을 입고 발에는 당혜를 신고 있었다. 문사건을 쓴 미서생은 입을 열었다.
"하하.... 형장의 취미는 정말 고상하십니다. 절로 소제의 발길을 이리로 끌어 당기게 하는군요."
미서생은 섭선을 흔들며 다가왔다.
회의인은 여전히 누워 있었다.
미서생의 눈이 반짝였다. 가슴을 칭칭 동여맨 회의인의 모습과 보자기로 싼 한 자루의 칼을 보았기 때문이다.
미서생은 반가운 듯이 입을 열었다.
"검 한 자루 벗 삼고 흘러다니는 유랑인이시군요?"
"......."
"보아하니 큰 중상을 입은 모양이군요? 상대는 몹시 강했던가 보군요?"
"......."
회의인은 여전히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미서생은 그런 회의인의 무관심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회의인의 옆에 털썩 앉으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아... 정말 양광이 따스하군. 이런 날 초적을 불며 시흥에 젖는 분을 만났다는 것은 이 옥운생(玉雲生)의 다시 없는 행운인가 합니다."
그때였다. 아무런 대꾸가 없던 회의인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의 음성은 대단히 무심했다.
"계집애같은 이름이군."
회의인은 말을 끝맺으면서 죽립을 벗었다. 회의인의 얼굴이 해맑은 햇살 아래 드러났다.
지극히 평범한 얼굴이었다. 그야말로 평범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언제라도 저자거리에 나가면 만날 수 있는 그런 얼굴이었다.
"......!"
옥운생의 얼굴에 가벼운 실망기가 스쳤다. 그러나 옥운생은 곧 활짝 웃었다. 이어 그는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러시는 형장께서는 얼마나 사내다운 이름을 갖고 계시오?"
그 말에 회의인은 쏘아부치듯 퉁명스럽게 말했다.
"석무심(石無心)."
"석무심?"
옥운생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다음 순간,
"하하하하!"
옥운생은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석무심은 성긴 눈썹을 모으며 옥운생을 향해 물었다.
"왜 웃지?"
"하하하... 너무...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라서 그럽니다."
"......?"
옥운생은 눈알을 생기있게 반짝이며 말했다.
"하하하... 석무심이라뇨? 옥운생이 보기에 형장의 이름은 차라리 유정인(有情人)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하하하!"
"유정... 인이라고? 내가?"
석무심은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옥운생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다가 반색을 하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당신은 비록 겉보기에는 무심한 것 같지만 속으로는 누구보다도 뜨거운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저는 당신을 처음 보는 순간 그것을 알았습니다."
"후훗... 내가?"
옥운생은 확신한다는 듯이 힘주어 말했다.
"그렇습니다."
"잘못 보았네."
"틀림 없습니다."
"어째서지?"
"그건 이 옥운생이 그렇게 보았기 때문이죠."
"......!"
다음 순간 석무심은 대소를 터뜨렸다. 그의 대소는 춘경 속으로 맑게 번져나갔다.
"푸핫핫핫......!"
석무심은 한동안 마음껏 웃어제꼈다. 그의 웃음은 참으로 싱그러웠다. 마치 어린아이가 천진난만하게 웃는 것처럼 그 웃음에는 티끌 하나 없었다.
한동안 웃던 석무심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어 그는 다짜고짜 옥운생의 어깨를 거머쥐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가세!"
"네? 어디로 말이오?"
옥운생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엉거주춤 일어섰다.
"술을 마시러!"
석무심이 내뱉았다. 그 순간 옥운생의 입술은 묘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는 곧 호탕하게 대답했다.
"술... 좋지요!"
그들은 곧 어깨를 나란히 하고 초지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옥운생의 키는 석무심의 어깨 높이와 같았다. 뿐만 아니라 옥운생의 몸매는 가냘프기 한량 없었다.
하늘이 예정한 것일까? 아니면 전혀 우연이었을까? 어쨌거나 두 사람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즉시 의기투합했다.
두 사람은 즉시 한 가지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보리밭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술을 마시자는 것이었다.
지지배배.. 지배.......
인기척에 놀란 고천자(告天子) 한 마리가 보리밭을 날아오르며 요란하게 울고 있었다.
하운주가(河雲酒家)는 구화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었다.
구름만 노니는 강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하운주가는 한적했다.
석양 무렵이었다. 낙조가 서편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주점의 창으로 비스듬히 들어왔다.
주탁 위에는 긴 밀대가 두 개 꽂힌 투박한 항아리 하나와 비사(飛蛇)를 구워 놓은 접시가 하나 놓여 있을 뿐이었다.
"끄... 윽!"
취기 탓이었을까? 석무심의 입에서 불쾌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아... 미안... 그렇지만......."
석무심은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그는 지나치게 술을 많이 마신 것이었다.
어느새 석무심은 오십 근이 넘는 술을 마셨다. 그가 마신 술은 백랑(白 )이라는 구화산 특산의 독주였다. 그의 얼굴은 취기 탓인지 아니면 낙조 탓인지 붉으스름하게 물들어 있었다.
"술은... 좋은 것......."
석무심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유쾌한 듯이 말했다.
"하하... 그... 그렇구 말구요."
맞장구치듯 옥운생이 혀꼬부라진 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는 노을을 등지고 앉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운생의 관옥같은 얼굴은 불타오르는 듯했다.
"후후... 그렇게 얼굴이 붉으니 마치 남장미인이라도 보고 있는 것 같군. 꺼억!"
석무심은 농기섞인 말을 뇌까리며 딸꾹질을 했다. 그때였다. 옥운생이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입을 열었다.
"꺼억! 석형, 노... 농담하지 말아요. 소... 소제가 만일 남장미인이었다면 이제까지 버티지도 못했을 것이오... 끅!"
옥운생은 연신 딸국질을 했다. 옥운생의 불콰하게 달아오른 얼굴을 바라보던 석무심이 고소와 함께 중얼거렸다.
"훗훗... 내가 빨아마신 술은 마흔 아홉 근이지만... 그대는 고작... 한 근밖에 빨지 않았는데... 끄윽!"
"......!"
옥운생의 붉은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정말 빈틈없는 자다!'
옥운생은 내심 중얼거리며 가볍게 아미를 떨었다.
맞는 말이었다. 옥운생은 술항아리에 꽂아둔 빨대로 지금까지 한 근 정도의 술만을 빨아마셨던 것이다.
지금까지 그들은 열 근짜리 항아리 다섯 개를 비운 셈이었다. 때문에 석무심의 관찰력은 정확한 것이었다.
'혹시... 그것도 눈치채었을까?'
찰나지간 옥운생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바로 그때였다.
"크윽... 그런데 이 백랑이란 놈은 유난히... 독하군... 버.. 벌써... 어지러우니......."
석무심은 술항아리를 잡으려고 손을 앞으로 뻗었다. 하지만 그의 손은 항아리를 잡지 못했다.
"으... 으음......."
쿵!
그는 치밀어오르는 취기를 이기지 못한 듯이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그리고는 이마를 주탁에 박고 말았다.
"드르렁... 쿨... 드르렁......!"
어느새 석무심은 코를 골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주 짧은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석형! 석형! 정신 차리시오!"
옥운생은 당황했다. 그는 급히 석무심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러나 석무심은 완전히 곯아 떨어지고 말았다. 옥운생이 아무리 흔들어도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허어... 이것 참!"
옥운생은 마침내 체념하고 말았다. 그는 몸을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이런... 방을 잡아야 겠군."
그때였다.
"헤헤헤... 방을 드릴까요? 마침 깨끗한 방이 하나 있습니다요. 헤헤헤......."
기다리고나 있었다는 듯이 주점 주인이 달려왔다.
"주시오. 아무래도 날이 저물어 일숙해야 할 것 같소."
옥운생은 담담히 말했다. 그런 옥운생의 얼굴에는 취기라고는 없었다. 이어 그는 주머니에서 은조각 하나를 꺼내 주점 주인에게 내밀었다.
"예, 예... 하이구! 고맙습니다요!"
주점 주인은 앞으로 떨어지는 은조각 하나를 받으며 입이 딱 벌어졌다.
④
객방(客房)은 하운주가의 뒤쪽에 있는 별채였다. 그곳은 보기보다는 깔끔했다.
"......."
옥운생은 골아 떨어진 석무심을 침상에 눕혔다. 그리고는 멍하니 그를 내려다 보았다.
"드르렁... 쿨... 드르렁......."
석무심은 세상 모르고 코를 골았다. 그는 큰 대 자로 뻗은 채 잠들어 있었다.
"......."
옥운생은 다시 석무심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무엇인가를 탐색하는 듯했다. 석무심의 얼굴은 정말이지 평범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옥운생의 안색은 몇 번이나 변했다.
'이 사람... 아무리 보아도 특징이 없어 보이는 자다. 그런데도 이렇게나 내 마음을 잡아 끌다니... 이 자의 평범한 얼굴 이면에 대체 무엇이 있길래 그런 것일까?'
옥운생은 내심 중얼거렸다. 이어 그는 석무심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여전히 평범한 범부에 불과했다.
옥운생은 다시 중얼거렸다.
'이 자의 신분은 대체 무엇일까... 낭인? 아니다. 절대 유래없는 낭인만은 아니다. 무엇인가가... 감추어진 것이 있다!'
찰나지간 옥운생의 눈이 반짝 빛났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석무심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여인의 손같이 섬세한 옥운생의 옥수가 바르르 떨렸다.
'미혼산산분(迷魂散散紛)을 술에 탔으니 절대 깨어날 리는 없다. 내가 품 속을 아무리 뒤져도 모를 것이다.'
옥운생은 옥수를 뻗었다. 그는 먼저 석무심의 오른쪽 가슴을 칭칭 동여맨 천을 끄르기 시작했다.
"......."
천을 다 끄르는 데는 상당히 시간이 걸렸다.
옥운생의 투명할 정도로 흰 이마에는 진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마침내 그는 천을 모두 끌렀다. 이어 그는 조심스럽게 석무심의 잿빛 상의를 끌렀다.
그때였다.
"아... 아... 이럴 수가!"
옥운생은 경악성을 내질렀다. 이어 그는 도저히 볼 수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며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석무심의 오른쪽 가슴은 참혹했다. 너무나 깊은 검상(劍傷)때문이었다. 검상은 석무심의 오른쪽 가슴을 완전히 관통하고 있었다. 채 아물지 않은 상처에는 피가 말라 엉겨붙어 있었다.
"이... 이렇게 지독한 상처를 입고도 죽지 않았다니!"
옥운생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바로 그때였다.
"아!"
옥운생은 갑자기 얼굴이 새빨개지며 탄성을 발했다. 그것은 바로 석무심의 가슴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가슴은 우람한 근육으로 뭉쳐져 있었다. 따라서 남성적인 매력을 물씬 풍기는 것이었다.
"휴우!"
옥운생의 입에서 가녀린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는 석무심의 우람한 가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의 눈썹이 자꾸만 파르르 떨렸다. 바로 그때였다.
"......!"
서서히 그의 옥수가 석무심의 가슴팍을 가볍게 쓸어가는 것이 아닌가? 석무심의 우람한 가슴팍을 쓰다듬은 옥운생의 옥수는 감전이라도 된 듯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옥운생은 겉보기에 분명 사내였다. 남자가 남자의 가슴을 쓸며 이상한 감정에 젖는다는 것은 보통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없는 일이었다.
"......."
옥운생의 손은 석무심의 가슴을 애무하듯이 쓸어갔다. 그러다가 점차로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명치를 지나 배꼽 근처까지 내려갔다.
"음!"
옥운생의 붉은 입술 사이로 가늘었으나 뜨거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의 얼굴은 더욱 붉어졌다.
바로 그때였다. 석무심의 배꼽 아래를 더듬듯이 쓸어가던 그의 손 끝에 무엇인가가 걸렸다. 그곳은 아랫배 가까운 허리춤이었다.
"......?"
옥운생은 눈썹을 쫑긋 세웠다. 이어 그는 석무심의 허리띠 속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
그것은 차가운 금속의 물건같았다. 그것은 손으로 전해져오는 느낌으로 보아 아주 얇고 둥근 모양이었다.
하지만 자세한 것은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을 더 자세히 확인하려면 손을 더 깊숙이 넣어야만 했다.
그러나 옥운생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치...이!"
옥운생은 마침내 손을 뺐다. 이어 그는 얼굴을 붉히며 중얼거렸다. 새삼스럽게 자기의 행동이 멎적다는 것을 깨닫기라도 한 것처럼.
"마치...이 사람을 애무하는 것 같군."
이때였다. 그의 눈이 갑자기 반짝 빛났다. 보자기에 싸인 물건 하나가 그의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옳지. 저것은 검이다. 저것을 보면 이 자의 정체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옥운생은 성큼 보자기에 손을 댔다. 그 순간 기절초풍할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으음!"
잠꼬대와 함께 느닷없이 석무심이 돌아 누우며 그의 허리를 끌어안은 것이었다.
"앗!"
방심하고 있던 옥운생은 여지없이 당하고 말았다. 그는 석무심의 억센 팔에 안긴 채 침상 위로 쓰러지고 만 것이. 그의 얼굴은 자연스럽게 석무심의 가슴에 파묻혔다.
"으음!"
옥운생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는 급히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강한 사나이의 체취를 맡는 순간 웬일인지 전신에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석무심은 아무것도 의식치 못하는 듯했다. 그는 옥운생을 품에 안고 정신없이 코를 드르렁 드르렁 골았다.
"......."
옥운생의 얼굴은 완전히 도화꽃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더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마침내 옥운생은 석무심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스르르 눈을 감고 말았다. 그 순간 그는 참으로 편안한 기분을 맛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마침내 옥운생은 자신도 모르게 편안하고도 달콤한 잠 속으로 빨려들고 말았다.
"이럴 수가!"
옥운생은 눈을 떴다. 순간 그는 안색이 창백하게 변하여 급히 방 안을 둘러보았다.
방 안에는 그가 없었다. 단지 탁자 위에 보자기에 싸인 석무심의 검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그는... 떠나지 않았단 말인가?'
옥운생은 불안과 안도가 반반인 얼굴로 내심 중얼거렸다. 이어 그는 급히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때였다.
"......!"
문득 옥운생의 눈이 빛났다. 그는 급히 탁자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보자기로 감싼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옥운생이 막 보자기를 끌르려는 순간이었다.
"이제 일어났는가? 옥제(玉弟)!"
느닷없이 그의 등뒤에서 가라앉은 음성이 들리는 것이었다. 뒤이어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
옥운생은 도둑질 하다 들킨 듯한 표정이 되었다. 그는 황급히 손을 거두었다.
"이... 일찍 일어나셨군요!"
석무심은 담담히 말했다.
"방금 세수하고 오는 길이네. 그런데 어젯밤 옥제가 내 상처를 돌보았더군?"
"네...그... 그것은... 상처가 중한 것 같아서... 감히 무례를 범했습니다. 용서하세요."
"어쨌든 고맙네. 오랜만에 술을 들었더니... 아직도 머리가 혼미한 것이 영 괴롭군."
석무심은 중얼거렸다. 옥운생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건 술 탓이 아니라오. 그것은 소제가 물 속에 몰래 탄 미혼산산분 때문이라오.'
"자, 식사를 하고 떠나세."
석무심이 말했다.
"그... 그러죠."
옥운생은 황급히 옷매무새를 고쳤다. 그러다 그는 아연했다. 연남빛 유삼의 앞섶이 벌어져 있는 것이었다. 그의 안색이 순간적으로 창백해졌다.
'혹시?'
옥운생은 일말의 의혹을 느끼며 석무심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석무심은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옥운생은 급히 앞섶을 고쳐 여민 후 그를 따라 나갔다.
오월이지만 태양은 제법 따가왔다.
석무심과 옥운생은 나란히 말을 타고 관도를 달렸다.
따가닥... 따가닥!
관도를 치고 달리는 말발굽 소리는 경쾌했다.
흑마와 백마는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하운주가를 떠나는 즉시 말을 구한 것이다. 두 사람은 나란히 말을 몰았다. 피차간에 행선지는 묻지 않았다.
이 길은 금릉(金陵)으로 향하는 관도였다. 자욱한 황사가 그들의 뒤로 구름같이 일어났다. 한동안 말을 몰기에 여념이 없던 옥운생이 석무심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석형께서는 여인을 좋아하십니까?"
"......!"
석무심의 안색이 흠칫했다.
"그건 왜 묻지?"
"하하... 석형같은 영웅이 미인을 좋아하는 것은 당연지사라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옥운생이 대답했다. 그러자 석무심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그건 자네에게 더 잘 어울리겠군. 자네같은 미남자야 말로 더욱 풍류를 즐길 것이 아닌가?"
"하하! 솔직이 그렇습니다."
"그럼 잘 되었군."
"네?"
"우리가 가는 곳이 어디인가?"
"금릉 쪽이 아닙니까?"
"금릉은 색도(色都)라네. 천하의 명기와 미인들이 구름같이 있다네."
찰나지간 옥운생의 안색이 변했다.
"그럼 석형께선 그것 때문에 금릉에 가시는 길입니까?"
"그렇다고 할 수 있지."
"......!"
옥운생의 안색이 약간 굳어졌다. 그러나 곧 옥운생은 얼굴 표정을 바꾸었다.
"하하하... 좋습니다. 영웅호색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소제도 바라는 바입니다. 이럇!"
옥운생은 힘껏 채찍을 휘둘렀다.
히히힝!
말은 힘차게 울며 앞으로 내달렸다.
두두두.......
자욱한 먼지를 일으키며 옥운생은 저만큼 앞질러갔다. 석무심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화났군."
그는 들릴듯 말듯 중얼거리며 말에 박차를 가했다.
첫댓글 굿,,,
잘 보고 갑니다.
잼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