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 어떤 곳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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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상남도 서쪽에 자리한 산청군(山淸郡)은 백두대간의 정기가 마무리되는 지리산 자락에 깃들어 있는 고을이다. 동쪽으로 합천·의령군, 북쪽으로 거창군, 남쪽으로 진주시·하동군, 서쪽으로 함양군에 접한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북쪽의 중봉, 하봉으로 뻗은 지맥과 영신봉에서 뻗어내린 낙남정맥이 함양·하동군과 서쪽 경계를 이루고, 동쪽은 백두대간의 남덕유산에서 이어진 ‘거창기맥’의 황매산이 합천군과 분수령을 이루어 분지를 형성한다. 산청의 가장 큰 젖줄은 군의 중앙을 남북으로 관류하는 경호강(鏡湖江)이다. 동쪽은 황매산에서 발원해 차황·신등·신안·생비량면을 적시고 흐르는 양천강이 단성에서 경호강에 합류하고, 또 서쪽은 지리산의 여러 계곡의 물을 받아들인 덕천강이 진양호에서 남강에 몸을 섞는다. 이렇듯 3개 강 유역은 지세가 비교적 평탄하고 관개가 편리하며 토양이 비옥해 농경에 적합하나 넓은 평야는 적은 편이다.
산청은 삼한시대에는 변한의 일부였고, 생초면의 가야고분군과 금서면의 전(傳) 구형왕릉 등의 유적에서 보듯 가야 계열의 왕국이 자리하고 있었다. 삼국시대에는 지품천현(知品川縣)이었으나 757년(신라 경덕왕 10년)에 산음현(山陰縣)으로 개칭됐다. 1018년(고려 현종 9년) 산음현과 단계현(丹溪縣)이 합천(陜川)에 복속됐고, 1390년(공양왕 2년) 산음현에 감무를 두고 단계를 합천에서 강성(江城)에 이속시켰다. 1599년(선조 32년) 산음현에 통합됐다가 1613년(광해군 5년) 단성현이 분리됐다.
1767년(영조 43년) 산음현이 산청현(山淸縣)으로 개칭되면서 비로소 산청이란 지명이 나타난다. 1895년 23부제 실시에 따라 진주부(晋州府) 산청군으로 바뀌었다가 1906년(광무 10년) 진주의 삼장·시천·금만·백곡·사원·파지의 6개면이 산청군에 속했고, 1914년 단성군이 산청군에 통합됐다. 2003년 현재 산청읍과 차황·오부·생초·금서·삼장·시천·단성·신안·생비량·신등면의 1읍 10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산청군의 경호강을 따르는 3번 국도, 그리고 차황면에서 산청 읍내를 거쳐 지리산의 삼장·시천면을 지나는 59번 국도가 산청읍을 중심으로 ×자 형태를 이룬다. 또 의령에서 단성면 소재지를 거쳐 중산리계곡으로 연결된 20번 국도는 산청군 남쪽을 동서로 잇는 역할을 한다. 2001년 12월 대전~진주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수도권에서도 3~4시간이면 접근할 수 있게 됐다.
산청은 조선시대 때 교육기관이 많기로 이름난 곳이다. 고려 인종 때 창건되어 1752년(조선 영조 28년) 중건된 단성향교와 1440년(세종 22년) 창건된 산청향교가 있고, 1561년(명종 16년) 건립한 덕천서원과 1626년(인조 4년)에 창건된 서계서원이 있다. 그 밖에도 청곡서원·문산서원·평천서원 등의 서원과 크고 작은 서당과 사숙이 있다. 또 남사 전통마을, 신등 전통마을 등 영남의 양반과 중류층 가옥 구조를 살펴볼 수 있는 전통마을이 있다.
산청에 탯줄을 묻었거나 인연을 맺은 인물 중에 이름을 날린 사람은 고려 말 중국에서 목화씨를 가져온 삼우당 문익점, 퇴계 이황과 견줄 만큼 독특한 학풍을 이룩한 남명 조식, 그리고 최근엔 성철 스님이 우뚝 서있다. 단계면에는 문익점이 목화씨를 처음 재배한 목면시배유지와 성철 스님 생가인 겁외사 등이 있고, 시천면에는 덕천서원·산천재·조식 묘소 등 조식 유적이 남아있다.
낙남정맥
낙동강 남쪽 울타리 역할을 하는 전통 산줄기. 지리산 영신봉(靈神峰·1,651m)에서 시작한 낙남정맥(洛南正脈)은 영남 남부지방을 동남쪽으로 관통하다 옥산(614m)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대곡산(543m), 여항산(744m), 무학산(763m), 구룡산(434m), 대암산(655m)을 거쳐 낙동강 하구를 지키는 동신어산(460m)까지 약 226km에 달한다. 이 산줄기의 남쪽에는 대체로 하동, 사천, 삼천포, 고성, 마산, 창원, 김해 등 영남 남해안지방이 위치한다. 이 산줄기를 기준으로 영남 남부의 해안·내륙의 문화를 구분하기도 한다.
종주에 필요한 1:50,000 지형도는 운봉·산청·하동·곤양·진주·삼천포·함안·충무·마산·창원·김해·밀양.
1:25,000 지형도는 대성·사리·악양·청암·하동·대평·성내·사천·진주·삼곡·두문·학림·고성·구만·반성·봉성·마산·창원·진영·진해·무계·봉림·물금.
전 구형왕릉
산청군 금서면 왕산 기슭에 있는 전(傳) 구형왕릉(사적 제214호)은 금관가야의 마지막 임금인 구형왕의 무덤으로 전해오고 있다. 금관가야 제10대 왕(재위 521-532)인 구형왕(仇衡王·?-?)은 532년(신라 법흥왕 19년) 신라에 항복하여 상등(上等)의 벼슬과 가락국을 식읍(食邑)으로 받았다.
협곡의 경사진 언덕에 잡석으로 층단을 이루고 있는 이 무덤은 가야뿐만이 아니고, 한반도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인 묘제와는 다르다. 층단은 모두 7개, 총높이 7.15m며, 꼭대기에 타원형의 봉분이 마련되었으나 일반 봉토분과는 전혀 다르다. 외형으로만 본다면 고구려 초기의 적석총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특이한 점은 앞면 넷째 단에 작은 감실(폭 40cm, 높이 40cm, 깊이 68cm)이 마련되어 있는데, 그 용도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이런 독특함 때문에 왕릉이 아니라 석탑 또는 제단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무덤 앞의 비석, 돌짐승 등 석물들은 모두 후대에 김해 김씨 후손들이 만들어 세운 것으로 왕릉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가 되지 않는다.
류의태 약수터
구형왕릉 바로 앞 갈림길에서 임도를 따라 2km쯤 오른 뒤 오솔길을 200m쯤 걸어올라가면 너덜지대에서 솟아나는 시원한 샘물을 만날 수 있다. 수량은 제법 많은 편인데, 날씨가 가물거나 비가 와도 항상 일정하다.
산음현, 즉 산청 금서면 화계리는 류의태가 의술활동을 펴던 곳으로서 그는 약재를 달일 때 반드시 이 약수를 썼다고 전한다. 병명을 알 수 없던 병도 이 물을 이용하면 치료가 되었다고 한다. 최근에도 이 약수는 잘 낫지 않는 위장병, 피부병 등에 특효가 있다고 알려져 왕산을 찾은 등산객은 물론이고, 멀리서도 물을 받아가기 위해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다. 이 약수는 약효가 뛰어난 물로 꼽히는 냉천이다.
지리산 성모상
오래 전부터 지리산 천왕봉에 모셔온 성모상(聖母像)은 높이가 1.2m, 너비 50cm의 아담한 체구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를 산신으로 모신 것이라 하고, 이승휴의 <제왕운기>에는 고려 태조 왕건이 도선국사에게 자신의 어머니 위숙왕후를 지리산 산신으로 모신 것이라고 한다. 또 성모상이 석가모니의 생모인 마야부인이라고도 하며, 무속에선 불로장수와 만사형통을 관장한다는 마고 여신이라고도 한다. 이렇듯 건국신화와 불교와 무속신앙이 뒤섞여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낳은 성모상에서, 우리 민족이 지리산을 얼마나 숭상했나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다. 현재 중산리 천왕사라는 절에 세워져 있다. 음력 3월 7일 성모상을 위한 천왕제를 지내고 있다.
내원사
 | 삼장면 대포리 장당계곡과 내원계곡이 합류하는 지점에 자리한 내원사(內院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 신라 말 무염(無染, 801-888)이 덕산사(德山寺)로 창건했지만, 이후 언제 폐사 되었는지 자세히 전하지 않고, 1959년 홍원경 주지가 중건한 뒤 꾸준히 불사를 일으켜 오늘에 이른다. 경내엔 석조여래좌상(보물 제 1021호)과 내원사삼층석탑(보물 제1113호) 두 점의 보물이 있다.
비로전에 모셔진 석조여래좌상은 내원사에서 30리쯤 떨어진 보선암 폐사지에서 발굴된 것이다. 석불 대좌 중대석에서 발굴된 사리함 표면에 적힌 명문(銘文)에 따르면, 766년) 776년(신라 혜공왕 2)에 한 화랑이 요절하자 그의 부모가 불상을 제작하였다는 내용 등 불상 조성 연대와 동기 등이 적혀있다. 제작 기법, 사리함 뚜껑 처리 방식 등 미술사적 측면과 불교사적 측면에서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 사리함은 1986년 영태이년명납석제호(永泰二年銘蠟石製壺)라는 명칭으로 국보(제 233호)로 지정되어 현재 부산시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내원사삼층석탑은 신라시대에 건립한 일반형 삼층석탑이다. 이중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얹었는데, 상·하층 기단석에는 양 우주와 1탱주가 모각됐다. 탑신부는 신·개 각 1석씩 조성하였는데 각층 탑신에는 우주가 모각되고 옥개받침은 4단씩이다. 1950년경 도굴꾼에 의하여 파괴된 것을 1961년 내원사 주지 홍진식 스님이 복원했으나 맨 위쪽 옥개석이 많이 부서지고 상륜부는 없다.
대원사
 | 지리산의 동쪽 삼장면 유평리에 있는 대원사(大源寺)는 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海印寺)의 말사다. 548년(진흥왕 9년)에 연기(緣起) 조사가 창건해 평원사(平原寺)라 했는데, 그 후 언제 폐사가 됐는지는 자세히 전하지 않는다.
1천여 년 동안 폐사됐던 것을 1685년에 운권 선사가 옛 터에 사찰을 건립해 대원암이라 했다. 1890년(고종 27년)에 무너진 암자를 중건하면서 대원사라 했고, 큰스님을 초대해 불교를 공부하니 전국의 수행승들이 소문을 듣고 구름처럼 모여들었다고 한다.
여순사건과 한국전쟁 등으로 폐허되어 방치되다가 1955년 중창하면서 비구니 선원을 개설했다. 건물로는 대웅전·원통보전·응향각·산왕각·봉익루 등이 있고, 절 뒤쪽의 사리전(舍利殿)은 비구니라면 한번쯤 거쳐 가는 곳이다. 그 앞에 자리한 대원사다층석탑(보물 제1112호)은 조선시대 때 작품이다.
단속사지
 | 단성면 운리 웅석봉 남쪽 계곡에 자리했던 단속사(斷俗寺)는 통일신라 이후 고승을 많이 배출해 1,000여 년의 법통을 이어왔는데, 1568년(선조 1년) 유생들이 불상과 경판 등을 파괴하고, 이어 정유재란 때 불타버린 후 재건됐으나 현재는 폐사됐다.
보물로 지정된 단속사지 동삼층석탑(보물 제72호)과 서삼층석탑(보물 제73호)이 있고, 당간지주(幢竿支柱)가 남아있다. 동·서 삼층석탑은 전형적인 신라 석탑으로 비례미와 균형미가 잘 조화되어 안정감이 있고, 또한 치석의 수법이 정연하여 우아하다. 삼국통일 이후에는 이 같은 쌍탑 가람형식이 지방의 깊은 산골에까지 전파됐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도 절터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와당을 비롯한 석물들이 출토되고 있으며, 주변 민가의 담장이나 집안에 많은 석물들이 흩어져 있다.
단속사 창건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에 두 가지 설이 전한다. 748년(경덕왕 7년) 왕의 총애를 받던 이준(李俊)이 조연소사(槽淵小寺)를 개창하여 단속사라 하였다는 설과, 763년(경덕왕 22년)에 신충(信忠)이 벼슬에서 떠나 지리산에 들어가 삭발하고 왕을 위하여 단속사를 창건했다는 설이다.
김일손(金馹孫)이 정여창(鄭汝昌)과 함께 천왕봉을 등반하고 쓴 <두류기행(頭流紀行)>에서 단속사를 ‘절이 황폐하여 중이 거처하지 않는 곳이 수백 칸이나 되고 동쪽 행랑에 석불 500구가 있는데 하나하나가 각기 형상이 달라 기이하기만 했다’고 적고 있다.
남명 조식 유적지
1501년(연산군 7) 지금의 합천군에서 출생한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은 이황과 함께 당시 영남유학의 쌍벽을 이루었던 대학자로 실천적인 성리학을 중시하였다. 모든 벼슬을 물리치고 현재의 산청군 시천면인 덕산(德山)에서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다가 1572년(선조 5년)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덕산 부근에 덕천서원(德川書院), 산천재(山天齋), 남명 묘소 등의 유적지가 있다.
덕천서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89호) 1576년(선조 9) 남명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그가 강학하던 자리에 건립한 서원이다. 1609년(광해군 1) 사액서원이 되었으나 흥선대원군에 의해 철폐되었다가 1930년대에 다시 복원되었다. 경의당(敬義堂)은 서원의 각종 행사와 유생들의 회합 및 토론장소로 사용되던 곳으로 ‘德川書院’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서원의 중심 건물이다.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집으로 중앙에 대청이 있고 그 양쪽으로 툇마루와 난간이 달려있는 2개의 작은 방이 있다.
덕천서원에서는 매년 음력 3월과 9월의 첫 정일(丁日)에 제사를 지내고 매년 양력 8월 18일에는 남명의 탄생을 기념하는 남명제가 열린다. 덕천서원 앞에 있는 세심정(洗心亭)은 1582년(선조 15)에 세웠다. 산천재는 선생이 학문을 닦고 연구하던 곳으로 1561년(명종 16)에 세웠고, 1818년(순조 18)에 고쳐졌다. 규모는 앞면 2칸, 옆면 2칸이다. 산천재 맞은 편 언덕으로 50m쯤 오른 곳에 남명 묘소가 있다.
남사 고가마을
 | 지리산 동쪽 기슭에 자리잡은 단성면 남사마을은 분위기가 정겹고 고풍스런 맛이 넘치는 마을이다. 마을 앞을 흐르는 남사천과 어우러진 모습은 풍수지리상 반달 모양. 그래서 달이 차지 않도록 동네 가운데는 농지로 두었고 동네 양끝에 주택을 배치했다. 둥그렇게 굽이쳐 흐르는 냇가와 마을이 잘 어울린다.
남사 마을은 500년쯤 전 진양 하씨의 이주로 마을이 시작됐다. 대개 오래된 마을이 한 성씨로 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이곳은 성주 이씨, 밀양 박씨, 진양 하씨, 전주 최씨, 연일 정씨, 재령 이씨 등 여러 성씨가 이주해 와서 살고 있다. 비록 많은 집들이 세월에 따라 개조되어 원래 제 모습을 잃어가고, 인적을 찾기 어려운 집도 있긴 하지만, 18~20세기 초 사이에 지어진 한옥 80여 채가 남아 있다.
화적의 칼을 자기 몸으로 막아 아버지를 구한 영모당 이윤현의 효성을 기린 사효제가 있고, 마을의 길흉을 예견한다는 하씨 가옥의 감나무도 옛날 이야기를 전해주는 듯하여 고즈넉한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연일 정씨 가옥, 선산 최씨 가옥은 남부 지방 양반가옥 형식을 보여주는데, 이상택 가옥은 200년이 넘는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안채가 잘 보존되어 있다.
성철 스님 생가
 |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 대전~진주 고속도로 바로 옆에 성철 스님 생가와 겁외사(劫外寺)가 있다. 스님의 생가터에 생가를 복원하고, 기념관과 동상, 그리고 겁외사라는 사찰을 창건해 2001년 문을 열었다.
성철 스님 생가는 겁외사 입구인 벽해루(碧海樓)를 거쳐 들어가게 되어 있다. 벽해루를 지나면 정면에 스님의 동상(사리탑)이 서 있고, 동상 좌측으로 대웅전이 있다. 스님 동상 뒤쪽의 혜근문(惠根門)을 통해 스님의 생가와 기념관으로 들어갈 수 있다.
혜근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보이는 건물이 스님의 생가를 복원해 놓은 율은고거(栗隱古居)이고, 우측 건물은 사랑채, 좌측 건물은 스님의 기념관인 포영당(泡影堂)이다. 포영당에는 스님이 입으셨던 누더기 두루마기와 덧버선 등의 유품과 유필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등 성철 스님이 26살로 절에 들어가기 전에 속세에서 읽었다고 기록한 목록들도 눈에 띈다.
목면시배지
단성면 사월리에 있는 목면시배지는 고려 말 공민왕 때 문익점이 면화를 처음 재배한 곳이다. 목면시배유지 전시관 면적은 15,295㎡, 전시관의 제1전시실에는 목화에서 무명이 되기까지의 과정과 면화의 역사, 베틀, 물레 등이 전시되어 있다. 제2전시실에는 무명으로 짠 각종 전통 의상 등이 전시되어 있다.
야외에는 문익점의 목화씨가 자랐던 300여 평의 목화밭이 있다. 전시실 옆 건물에선 전통 베짜기 및 천연염색하는 모습을 직접 보여준다. 염색을 시연하는 건물 앞에는 문익점의 효를 높이 평가한 고려 우왕이 내린 효자비가 있다. 1965년 이 일대가 사적 제108호로 지정됐다.
신안면 신안리에 있는 도천서원(경상남도 유형문호재 제 237호)은 문익점을 추모하는 사당이다. 1461년(세조 7년)에 나라에서 처음 세웠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가 중건됐으며, 1787년(정조 11년)에 도천서원이라고 사액을 받았다. 1871년(고종 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1891년(고종 28년)에 단성 사림들에 의하여 노산정사란 이름으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1975년 사당인 삼우사를 재건하고 서원으로 복원했다. 이 서원 옆산으로 100m쯤 올라간 곳에 문익점 묘소가 있다
도전리 마애불상군
생비량면 도전리 어은마 을 입구 20번 국도변에 있는 마애불상군(경남 유형문화재 제209호)은 29구나 되는 대량의 불상군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희귀한 예로 꼽힌다. 이 불상들은 바위절벽에 4단으로 줄을 지어 새겨져 있는데, 맨 아래 1층 14구, 2층 9구, 3층 3구, 4층 3구가 배치돼 있으며, 크기는 대부분 30cm 안팎이다.
여러 가지 형식으로 새겨졌지만 대개 비슷해 연꽃대좌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있으며, 소발의 머리칼에 큼직한 육계가 솟아 있고, 머리는 둥글고 단아하지만 이목구비가 마멸이 심한 편이다. 몸은 사각형이면서도 단정하며 통견의 옷주름이 불상의 크기에 비해 다소 많은 편인데, 나말여초, 특히 고려시대의 불상 특징이 강하게 엿보이고 있다.
단정한 형태의 불상군은 불상의 옷 입음새나 수인 등 세부 표현에서 다소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수인의 경우 선정인·시무외인·보주를 든 손 모양 등으로 다양하게 묘사되어 있다. 불상 옆에 새겨진 ‘□□先生’이란 글귀가 흥미를 끌지만, 아직 밝혀진 바는 없다.
신등 한옥단지
산청 동쪽의 신등면 소재지를 돌아가면 한옥과 흙돌담길이 눈길을 끈다. 신등면 한옥단지는 단성면 남사 마을에 비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권씨 고가와 박씨 고가가 현재까지도 잘 보존되어 있다.
박씨 고가(문화재자료 제119호)는 5동. 안채와 사랑채, 문간채와 곳간채가 어우러져 ㅁ자형 평면을 갖춘 집이다. 안채는 1918년에 지었고 그 외 가옥은 1940년경에 지은 것으로, 앞면 5칸 반 옆면 2칸 규모이며,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대청마루 북쪽면은 틔우지 않고 도장방을 만들어 물품을 보관하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사랑채는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의 동향집인데 1칸 마루를 넓게 처리하고 2개의 온돌방 앞에 툇마루를 두었다. 안마당의 곳간채는 가운데 기둥 하나와 흙벽이 지붕을 지지하는 구조로서, 민가의 원형에서 발전한 것으로 주목된다. 경상남도 서부 중류 농가의 대표적인 살림집으로, 원래 모습을 비교적 잘 보존하고 있다.
모두 7동으로 이루어진 권씨 고가(문화재자료 제120호)는 안채, 사랑채, 곳간채, 문간채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는 앞면 5칸 옆면 2칸 크기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가운데 있는 대청을 북쪽으로 트지 않고 마루방으로 만든 특이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사랑채는 앞면 4칸 옆면 2칸 크기의 팔작지붕이고, 곳간채는 앞면 4칸 옆면 1칸 크기이다. 문간채는 앞면 4칸 옆면 1칸 크기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지리산 한방약초 축제
 | 지리산 기슭의 산청은 전통적으로 1천여 종의 약초가 자생하는 한방 약초의 보고로 여겨졌다. <동의보감>의 저자인 허준도 당시 산음이었던 산청에서 한의학의 거성 류의태를 스승으로 만나 이래저래 산청은 한방약초와 관계가 깊은 곳이다.
올해로 3회째인 지리산 한방약초 축제는 5월3일(토)부터 7일(수)까지 5일간 열린다. 이 축제에는 산청의 약초를 전시 판매하며 약초를 배우는 체험행사, 한방약초 체험 산행, 한방음식 먹을거리 장터, 한방약초 관련 세미나, 한방술과 차 전시판매, 약초동산 만들기, 관람객 한방 무료진료, 사상의학 체험실 등을 운영하고, 경호강 래프팅, 황매산 철쭉제 등 행사도 열린다.
황매산 철쭉제
 | 산청 동쪽의 황매산(1,103m)은 바위산의 모양이 매화가 피어있는 모습과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 5월이면 수십만 평의 고원에 선홍빛 철쭉이 군락을 지어 피어난다. 산청군에서는 풍년을 기원하며 황매산 철쭉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매년 5월 초순에 황매산 철쭉제를 연다. 올해로 21회째를 맞이한 황매한 철쭉제는 지리산 한방약초 축제 기간인 5월4일(일), 5일(월) 양일간 열린다. 황매산 풍년대제 산신제, 초대가수 초청, 산행인 노래자랑, 사물놀이 등의 행사가 펼쳐진다.
황매산 영화주제공원
황매산 철쭉밭 아래에 있는 영화주제공원은 영화 ‘단적비연수’의 촬영장으로 산속에 작은 원시 마을이 조성되어 있다. 3,000여 평의 공간에 31채의 가옥과 풍차, 영화에 쓰였던 은행나무와 주인공의 캐릭터 등 1,000여 점의 소품이 전시되어 있어 아이들과 함께 둘러보면 좋다. 올라가는 길에 식사 가능한 식당이 몇 군데 있고, 산 중턱의 공원 입구에 간단히 요기할 수 있는 간이식당도 있다.
경호강 어탕국수
산세가 아름답고 물이 맑기로 이름난 산청의 젖줄인 경호강 맑은 물에서 잡은 피라미, 붕어, 미꾸라지 등의 민물고기를 뼈째 푹 곤 국물을 이용해 단백질과 지방이 풍부하다. 맛이 정갈하고 담백하여 경남 향토음식으로 이름나 있는데, 특히 산청 경호강 유역의 어탕국수가 유명하다.
민물고기를 깨끗이 씻은 후 통째로 중불에서 2~3시간 정도 푹 곤다. 그리고 뿌옇게 국물이 우러나면 체에 걸러 가시를 추려낸 다음, 갖은 양념으로 맛을 낸 뒤, 국물에 국수를 넣고 끓인 후 산초가루와 함께 그릇에 담아낸다. 한 그릇에 4,000원. 경호강 상류 생초면 소재지의 경호정 앞에는 생초식당(055-972-2152), 우정식당(055-972-2259) 등이 어탕국수를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 많다. 바로 뒷골목의 생초제일식당(055-972-1995)도 어탕국수 전문집으로 소문이 나있다.
지리산 산채돌솥비빔밥
 | 산청에 들렀다면 지리산 자락에서 나는 표고버섯, 느타리버섯, 도라지, 취나물, 고사리 등을 푸짐하게 담아낸 산채비빕밥을 맛봐야 한다. 공기 좋은 곳에서 수확한 참깨로 짠 참기름의 고소한 맛과 달래순의 달콤하고도 상큼한 맛과 취나물 등 산채의 쌉싸롬한 맛은 잃었던 미각을 살리기에 충분하다. 식당에 따라 찔레순을 넣기도 한다. 지리산 더덕구이와 동동주 한 잔 곁들이면 더 없이 좋다.
산채돌솥비빔밥은 이런 산채를 돌솥에 넣어 요리한 것이다. 산채 비빔밥 4,000원, 산채돌솥비빔밥 5,000원. 대원사 위쪽에 유평식당(055-972-9587) 등 산채요리를 잘 하는 식당이 여럿 있다. 산머루, 더덕, 영지, 오미자 등으로 담근 술도 맛볼 수 있다.
산청 흑돼지
예전 시골서 흔히 볼 수 있던 흑돼지들이 요즘엔 단시일에 크게 자라는 외국산 흰 품종으로 바뀐 지 오래지만 토종 흑돼지의 쫄깃쫄깃하고 담백한 고기를 산청에서는 맛볼 수 있다. 지리산 맑은 공기와 심심산골에서 내려오는 깨끗한 물로 사육된 산청 흑돼지는 특히 고기의 맛을 좋게 하기 위해 사료에 지리산 산록의 황토를 섞어 먹여 산청 흑돼지 고유의 육질을 만든다. 쫄깃쫄깃하고 담백한 고기 맛이 좋다. 일반 돼지는 6개월이면 완전히 성장하지만, 산청 흑돼지는 8개월이 되어야 상품 가치가 있다.
산청읍 옥산리의 흑돼지와 누렁이(055-973-8289), 금서면 주상리의 천왕봉 식육식당(055-973-0037), 차황면 소재지의 은행나무식당(055-972-7444) 등은 흑돼지 전문식당으로 유명하다. 또 산청군청 근처의 도매식육식당(055-972-8650) 등에서 파는 흑돼지를 구입하면 비교적 싼 가격으로 푸짐하게 먹을 수 있다. 부위마다 가격이 다르지만 보통 600g 1근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