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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파크, 코끼리, 에디슨 그리고 최초의 전기의자 사형... 도무지 공통점이 없어 보이는 이 단어들이 참으로 기구한 인연으로 한 점에서 모인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요?
어렸을 적 위인전이란 위인전에는 빠지는데가 없어 세계에서 가장 똑똑하고 훌륭한 사람인줄 알았던 발명가 토마스 에디슨의 생애를 다른 각도에서 찬찬히 들여다 보면 이 '인간'이 저지른 참으로 어처구니 없고 한심한 사건 하나를 알게 됩니다. 더구나 그것이 제가 사랑하는 테마파크를 배경으로 일어난 것이어서 더욱 놀랍고 가슴 아픕니다.
<토마스 A. 에디슨>
'발명가' 에디슨은 품성이나 성격과는 상관없이 그의 수많은 발명품으로 인해 살아 있을 때부터 이미 '위인'으로 추앙받던 인물입니다. 전구와 축음기, 영사기 등 인간의 삶을 혁신적으로 바꾸어 놓은 수많은 발명품을 만든 그는 끊임없는 노력과 자기 계발로 쉬지 않고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전구를 발명해 세상의 어둠을 물리쳤던 에디슨이 사업가로도 큰 수완을 발휘한 때는 1800년대 후반이었지만 가장 힘든 시기이도 했습니다. 원인은 그가 주도했던 전기 사업 때문이었습니다.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하고 회사를 차려 큰 돈을 벌기 시작했던 1800년대 후반에는 전기 관련 제품이 활발하게 개발되고 있었지만 문제는 송전이었습니다. 흔히 고압선과 전신주로 상징되는 전기의 배송이 바로 그것인데 음극과 양극이 나란히 가는 직류 방식으로는 먼 거리의 이동이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발전소나 전기 발생 시설로부터 불과 4~5km가량이 최대 거리였다고 합니다. 직류 전기를 실어 나르는 전선 등에서 생기는 저항으로 전기가 먼 거리를 가지 못하고 소멸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에디슨은 이를 축전지와 소규모 발전 시설로 해결해내고 있었습니다. 이 때, 이러한 문제를 획기적으로 개선한 인물이 뉴욕 출신의 발명가 죠지 웨스팅하우스였습니다.
<죠지 웨스팅하우스>
웨스팅하우스는 전기를 보내고 받을 때 양극과 음극이 주기적으로 교차하는 교류 방식을 발명하였는데 오늘날 우리가 쓰는 보편적인 전기 방식의 출발이었습니다. 플러스-마이너스를 반드시 구분해야하는, 건전지로 상징되는 에디슨의 직류 방식과 전기 콘센트를 꽂을 때 전극을 생각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꽂아도 되는 일반 전기 소켓을 생각하면 되는 웨스팅하우스의 교류 방식. 이들은 각기 회사를 앞세워 '전쟁'이라는 표현이 무색할만큼의 엄청난 갈등을 겪습니다. 전구를 생산하는 회사를 소유하고 있던 에디슨은 내심 교류 전기의 우수성을 알고 있었지만 직류 전기를 이용하는 전구의 사업성과 자신의 자존심을 위해 웨스팅하우스의 교류 전기를 시종일관 부인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니콜라 테슬라라는 또 한명의 천재가 개입합니다.
<니콜라 테슬라>
옛 유고슬라비아의 세르비아 출신인 테슬라는 처음 에디슨의 조수로 고용되었지만 일찌감치 교류 전기에 대한 우수성을 깨닫고 에디슨에게 교류 전기로의 진로 수정을 요구하다 결별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테슬라의 발명품에 대한 보너스를 지급하지 않으려던 에디슨의 속셈도 한몫하게 됩니다. 이후 테슬라는 웨스팅하우스와 결합하게 되고 그 뛰어난 재능을 바탕으로 번번히 에디슨의 직류 전기 사업을 망치게 됩니다. 특히, 에디슨과 웨스팅하우스가 정면 충돌해 웨스팅하우스의 완승으로 끝난 나이아가라 발전소 송전 사업은 테슬라의 가장 뛰어난 성과이기도한데 에디슨은 여기에서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게 됩니다.
<1800년대 후반, 나이아가라 발전소 기록 중에서>
나이아가라발전소 건으로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에디슨은 철치부심하다가 엉뚱한 방향으로 그 뛰어난 머리를 쓰기 시작합니다. 바로 교류 전기의 위험성을 사람들에게 알려 사업을 망치게 하려했던 것입니다. 지금처럼 그리 높은 양의 전압이 필요하지 않았던 1800년대 후반에는 에디슨이 발명했던 전구와 영사기, 축음기 등이 가장 활발하게 사용되는 전기 제품이었습니다. 그러나, 높은 전압을 송배전할 수 있는 교류 전기는 그 방식과 절차보다는 그가 수용할 수 있는 높은 전압이 문제였습니다. 우리가 쓸만큼의 전기는 직류로 가능하며 자가 발전이나 축전으로 충분한데 왜 위험하게 높은 전압의 교류 전기를 사용해 목숨까지 위협받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에디슨은 말로만 끝내지 않았습니다. 당시 에디슨의 회사가 있던 뉴져지의 한 마을에서는 애완 동물이 자주 없어지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정확한 결과는 발표되지 않았지만 에디슨의 회사에서 아이들을 통해 애완 동물들을 사들였다는 소문이 무성했었다고 합니다. 물론, 그 목적은 교류 전기로 그 동물들을 살해하는 것이었습니다. 교류 전기가 사람과 동물들에게 치명적이라는 소문은 차츰 커져 갔고 사람들이 불안해할즈음 뉴욕 남단의 테마파크 코니아앨랜드에서 작은 소동이 일어납니다. '탑시(Topsy)'라는 재주꾼 코끼리가 난동을 부려 조련사 두명이 밟혀 죽었던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에디슨은 쾌재를 부르며 뉴욕시 당국에 연락을 했고 에디슨의 명망성에 취해 있던 뉴욕시는 이 야심만만한 천재의 제안을 수락하고 맙니다. 난동을 부렸던 코끼리 탑시를 교류 전기로 살해했던 것입니다.
<뉴욕시 남단의 해변 휴양지 코니아일랜드. 세계 최초의 롤러 코스터가 설치되었다.>
<에디슨의 교류 전기 장치로 코끼리 '탑시'를 살해하는 장면>
지금 세상에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로서는 이 '살인 코끼리'에 대한 감정이 워낙 좋지 않아
여론은 어느새 에디슨의 편이 되어 주었습니다.
교류 전기에 대한 위험성도 새삼스럽게 부각되기 시작했습니다.
에디슨은 더욱 수많은 동물을 교류 전기로 죽여 나갔으며
한편으로는 자신의 직류 전기를 홍보하는 대대적인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그 즈음 에디슨은 의회를 동원해 로비를 시도하고
웨스팅하우스의 회사 직원들을 매수하는 등 갖은 비열한 수를 동원해
테슬라와 웨스팅하우스의 교류 전기를 깍아내리려고 했는데
그 결정적인 계기로 삼은 것이 바로 전기의자 사형이었습니다.
교류전기로 수많은 동물들을 죽이며 교류전기의 위험성을 홍보하던 에디슨은
교류 전기로 사람을 죽이려는, 그것도 공개적으로 죽이려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당시 뉴욕주는 교수형으로 사형을 집행하고 있었는데
그 방식이 지나치게 잔인하다고해서 대체 방안을 찾고 있었습니다.
기록에는 뉴욕시 정부에서 요청했다고도 하고
에디슨이 로비를 했다고도 하지만
이러한 의사 교류가 있은 직후 에디슨이 미친듯이 움직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일단 에디슨은 제 3자를 내세워 웨스팅하우스의 교류전기 특허를 몇개 사들입니다.
인간을 죽이는 전기의자가
웨스팅하우스의 특허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게 만들어낸 전기의자가 처음으로 사용된 것은 1890년
윌리엄 캐믈러라는 사형수의 처형이었습니다.
사형수의 머리와 발에 전극을 대고 1,000V의 교류 전기를 흘려 보내는 것이었는데
사형 장면은 에디슨이 원하는 대로 가지 않았습니다.
작은 동물만을 죽이던 에디슨과 그 연구원들이 사람을 쉽게 봤던 탓인지
8분간의 방전에도 불구하고 캐믈러는 죽지 않고 고통에 몸을 떨었다고 합니다.
결국 2,000V로 전압을 높여서야 이 참혹한 처형을 끝낼 수 있었는데
여론은 교류 전기보다 전기 사형 자체에 대한 공포심으로 들끓어버려
에디슨의 교류 전기 죽이기 전략은 실패하고 맙니다.
<최초의 전기의자 사형을 보도한 뉴욕 헤럴드 신문>
<에디슨이 추후 보완한 전기 사형용 의자>
결국 이러한 에디슨의 홍보 전략에도 불구하고 몇년 후 시카고박람회에서 에디슨은 웨스팅하우스와 독일의 교류 전기 기구에 판정패를 당하고 맙니다.
자존심 강한 천재가 겪은 참지 못할 패배였던 것입니다.
몇십년 후, 결국 에디슨은 사업적으로 모든 성과물을 맛보며 편안한 여생을 맞게 되고, 내용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던 웨스팅하우스는 전기 사업의 무리한 확장으로 파산하고 말지만 세상은 에디슨이 그리도 부정했던 교류 전기의 세상이 되고 맙니다.
토마스 에디슨, 그 천재성과 자존심과 탐욕과 운과 실익까지도 포기하게 한 질투의 심경...
왜 그렇게, 사악하게까지 느껴지는 에디슨이 천재로 위대한 발명가로만 포장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1960년대, 중공업 발전에 국운을 걸었던 일본의 모든 교과서와 부교재들이 인간적으로는 한없이 부족한 이 발명의 천재를 정책적으로 키웠고 그 엄청난 일본어 책들이 고스란히 우리에게 소개되었던 것은 단순히 우연일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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