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물안개가 자욱한 용평 퍼블릭 9번 홀 그린 정경
골프는 늘 설렘이다.
20년 넘게 해온 운동이지만 라운딩 할 때마다 새로운 기대와 꿈에 부풀곤 한다.
누구누구와 언제 어디서 라운딩을 한다는 스케줄이 잡히면 마음은 벌써 그곳에 가 있다.
이번 여름에는 고등학교 동창 친구끼리 3박4일 일정으로 용평에 가기로 했다.
콘도에 머물면서 퍼블릭코스에서 라운딩을 하기로 한 것이다.
난 용평 퍼브릭을 자주 가는 편이지만 다른 친구들은 한두 번 라운딩을 해봤거나 처음이다.
용평 퍼블릭은 전장이 짧은 대신에 양잔디에다 업다운이 심하고 평탄한 곳이 거의 없을 정도로 발이 공
아래 놓이거나 아니면 공이 발 위 쪽에 놓이는 사이드 경사지에서 스윙하는 곳이 대부분이다. 그런만큼
용평은 코스가 까다롭고 어렵기는 하지만 어려운 만큼 도전하는 맛 또한 그에 비례해서 크다.
2007 에비앙 마스터스 중계를 보면서 심한 경사와 언듈레이션 등 전체적인 코스 분위기가 용평과 비슷
했다. 에비앙 마스터에서 내노라하는 선수들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 새삼 우리 같은 아마추어가 골
프실력을 키우기에는 용평만한 곳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지난 7월 28일 아침 아홉시에 서울을 출발했다.
출발일 오후 4시에 9홀을 29일과 30일은 18홀을, 그리고 서울로 돌아오는 날 아침은 다시 9홀만을
라운딩하기로 미리 예약이 되었으므로 출발 당일 오후 라운딩에 늦지 않도록 여유 있게 출발했다.
9번 홀 그린을 향해
우리는 해외는 아니지만 몇일간의 숙박 골프를 한다는 기쁨으로 너 나 할 것 없이 즐거워했다.
차는 어느새 중부고속도로를 거쳐 영동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호법을 지나서부터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정체로 고속도로는 이름과는 달리 '저속도로'로 바뀌었다.
고속도로 안내 전광판에서는 여주를 16키로 남겨두고 문막까지 정체라는 안내가 나왔다.
골퍼는 길이 밀릴 때 애간장을 태운다. 티오프에 늦어 본 경험을 한 골퍼의 마음 조림은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상상하기 힘들다.
언젠가 티오프시간에 맞추어 가기 위해 비상등을 켜고 노견을 달리는 만용을 부린 적도 있었다.
우리는 여주까지 한 시간 넘게 지체를 거듭하다가 겨우인터체인지에서 빠져나와 42번 자동차
전용도로로 바꾸어 탔다. 정체된 고속도로와 달리 이 길은 예상대로 너무도 한산했다.
길을 바꾸어 타기를 잘했다며 어린애들처럼 좋아 했다.
다시 문막에서 다시 영동고속도로를 탔는데 신기하게도 정체가 풀려있었다.
평소보다 한시간 이상을 지체한 끝에 12시 반이 지나서야 용평리조트가 있는 횡계에 닿았다.
이제 티오프 걱정은 안심이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며 오랜만에 강원도의 맛 황태국으로 느긋한 점심을 먹었다.
횡계에는 요소요소마다 동계올림픽 3수 도전의 결의를 다지는 플래카드가 걸려있었다.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한 이 곳 강원도 주민들의 열망이 얼마나 큰 지를 가늠할 수 있었다.
용평리조트로 향하는 길섶에는 때 이른 코스모스가 하늘거리고 있었고 자작나무 가로수가 용평의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었다.
2번 홀과 3번 홀 사이의 계류-전날 내린 비로 황토물이 흐른다.
마침내 리조트에 들어서니 진입로 옆으로 개울을 따라 퍼블릭 8번 쇼트 코스 아일랜드 그린과 마지막
9번 홀의 페어웨이와 그린이 눈에 들어왔다. 평화로운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 가슴이 설레고 어느새
마음은 그린에 올라가 퍼팅을 하고 공이 홀에 떨어지는 소리가 환청으로 들려왔다.
체크인을 하고 필드가 내려다 보이는 전망 좋은 방에서 한가로운 휴식을 취한 다음 시간에 맞춰 코스로
나갔다. 도착 첫날 오후 나인홀 라운딩은 말하자면 탐색전이자 이틀간의 본게임에 앞선 전초전인 셈이
다. 보아하니 모두가 우의를 다지자는 착한 눈빛보다 '넌 죽었다'는 설욕의 눈빛이 번뜩이고 있었다.
날씨는 높은 구름에 바람이 상쾌했다.
한여름 라운딩으로는 보기드물게 쾌적한 날씨였다.
공이 안 맞는 이유로서 날씨 핑게를 대는 건 이미 틀린 일이었다.
오너가 의기양양하게 샷을 날렸는데 낮게 깔린 공이 눈앞의 개울로 곤두박질을 쳤다.
2번 친구가 왼쪽 숲 속으로 직구를 날렸다. 나와 또 한 친구 두사람은 표정관리를 하는 빛이 역력했을
것이다. 골프에서 한 사람의 불행은 세 사람의 행복이라 했으니....
"칼을 너무 갈아서 날이 넘은 거야"
"오늘 첫 샷부터 왜이러지?"
"아이쿠 운전하고 왔는데 멀리건 하나 줘야하지 않아?"
코스 안내도 버치힐 콘도와 멀리 보이는 6번 홀
이렇게 우리는 동상이몽에 동병상련의 샷을 날렸다.
뒤땅을 치고 토핑을 하고 깔깔거리고 남의 실수에 나이스 샷을 외쳤다.
숙적의 파온에 섬뜩해하고 홀을 파고드는 롱퍼팅에 한숨을 지었다.
홀당 거금 천냥 짜리 라스베가스가 벌어졌다.
신경전이 날카롭다. 겨우 한 그립 오케이도 어림없었다.
지갑이 호주머니에서 바쁘게 들고 나갔다.
나인 홀을 40타로 마감했다.
다른 친구들이 은근히 경계의 눈빛을 보낸다.
속으로는 분명 내일 다시 보자는 결의를 다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나흘간의 열띤 라운딩은 계속되었다.
둘째 날 아침부터 주룩주룩 내린 비로 전반 라운딩을 취소할 수 밖에 없어서 아쉬었지만 다행이도
뒤늦게 날이 개는 바람에 9홀 라운딩으로 만족해야 했다.
세째 날, 구름은 끼었지만 비가 그친 덕분으로 처음으로 18홀 풀코스 라운딩을 했다.
무빙데이답게 상금 순위의 변화가 있었다.
어제의 꼴찌가 선두에 나섰고 선두가 3위로 주저앉았다.
퍼블릭 9번 홀 그린 원경
드디어 휴가가 끝나는 마지막 날의 최종라운드.
새벽안개가 채 가시기도 전에 우리의 아쉽기만 한 마지막 9홀 라운드가 시작되었다.
네사람의 라스베가스에 더해서 나와 숙적 친구는 따로 타당 천냥짜리 스트로크 내기가 더해졌다.
첫 홀부터 불이 번쩍인다.
내 힘찬 티샷이 중앙 페어웨이에 안착하자 숙적도 지지 않고 힘찬 티샷을 날렸다.
회심의 내 세컨샷은 그만 그린 우측 맨땅 해저드 지역에 떨어지고 말았다.
숙적은 유유히 써드샷을 핀에 붙였고 나의 그 다음 샷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벌타 하나를 먹고 나와서 치느냐 그냥 그자리에서 치느냐로 고심할 필요는 없었다.
물이 없는 자갈이 깔린 맨땅이지만 난 샷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쳤다.
핀까지는 30야드 심한 오르막 포대그린이었다.
중간에 해저드와 그린을 경계 짓는 1~2미터 높이의 자연석 축대가 가로 놓여있을 뿐 샷만 제대로
하면 그린 안착은 문제 없다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픈스탠스에 샌드웨지를 짧게 잡고 페이스를 오픈시킨 다음 가볍게 두세 차례의 연습스윙을 하고
나서 얼리 코킹으로 하프스윙을 했다. 볼이 치솟아 올랐고 시선은 하늘의 공을 뒤쫓았다.
약간 짧다는 생각을 했는데 웬 둔탁한 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충기구(?)에 홀인 되다.
친구들의 탄성이 들렸다.
"어???"
"뭐야!!!"
볼은 그린 못 미쳐 워터헤저드 경계지역에 세워 놓은 박격포탄 형 플라스틱 통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골프에 입문해서 홀인원 하기를 소망했었는데 홀인원보다 더 희귀한 이런 홀인은 해외 토픽감이
되고도 남음직했다.
벌타 드롭인가? 무벌타 드롭인가?
움직일 수 있는 인공장애물인가? 오비말뚝같은 고정물에 속하는 것인가?
난 내심 벌타가 주어질 것인지에 대한 계산을 하고 있었다.
그 플라스틱형 통은 아마도 방충기구 같았다.
윗부분은 노란 십자날개를 달고 있고 아랫부분은 초록색 통으로 된 장치로 약 1미터 높이의 쇠막대
끝에 걸어 놓은 것으로 다른 골프장에서는 볼 수 없는 용평만의 특유한 시설물이었다.
경기 도우미는 <무벌타 드롭>이라고 명쾌한 판정을 했다. 무벌타라 해도 난 이미 두 타를 지고
있었으므로 더 이상의 시비는 없었다. 오히려 자갈밭 헤저드에서의 진기한 홀인샷에 대한 박수가 터져
나왔고 그 샷을 *<오잘공>으로 하자는데 아무런 이의가 없었다.
*오잘공은 그날의 라운딩중 제일 잘된 샷이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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