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우린 두 질문에 답을 해봐야 한다. 예를 들어 당신은 누구를 알고 있는가 Do you Know someone? 와 누구에 대해 알고 있는가 Do you know about someone? 왜냐하면 '알다know'라는 동사는 창세기 4장 1절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의 동침하다sleep /lay with의 다른 동사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어로도 '알다connaitre'동사는 파자하면 함께(con) 태어나다(naitre)는 뜻이다. 요즘 유행어 <通하였는냐?>처럼 누군가를 혹 무엇을 안다는 것은 육체적 관계를 맺을 만큼 속속들이 정통으로 아는 것을 전제로 한다. 앎의 세계에선 이처럼 경험하여 아는 직접적인 앎을 지혜라 하고 들어서 아는 간접적인 앎은 지식이라 구분하기도 한다. 그러나 신앙계에선 아직도 예수님을 직접 만난 체험을 하는 사람들 보담 그렇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About Schmidt>처럼 <About Jesus> 라도 많이 알기를 바라는 것이 신앙인의 바람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알렉산더 페인Alexander Payne(1962년 생)감독의 3 번째 영화이다. 그는 10년 전부터 이 인물에 대한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즉, 잭 니콜슨Jack Nicholson의 한 친구인 영화 제작자 헤리 지트Harry Gittes가 그에게 루이 베글리Louis Begley의 소설 <About Schmidt>를 건네 준 것이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잭은 이 소설을 읽자마자 좋은 영화 감이라는 필이 꽂혔다는 데 지트는 그에게 이것을 대본으로 만들어 자기에게 보여달라 했고 그리하여 이 영화의 주인공 슈미트 역을 맡은 잭 니콜슨은 12 번째 오스카상에 지명되었다. 잭 니콜슨은 이 영화에서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인물을 창출, 그가 출연한 <뻐꾸기 둥지로 날아간 새One flew over the cuckoo's nest>나 <우체부는 언제나 두 번 초인종을 누른다The postman always ring twice>영화에서도 탁월한 연기를 보여줬지만 66세의 이 슈미트 역은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As good as it gets>를 능가, 더 이상 이보다 더 좋은 연기는 불가능할 정도로 열연을 했다.
이 영화에선 이제까지의 이미지 즉, 이를 드러내는 잔인하고 발작적이고 극도로 흥분한 모습을 보여준 것과는 달이 그는 꽉 다문 입술로 뺨을 부풀기는 하지만 결코 더 이상 사납지 않는 부드러운 눈초리와 그런 대로 세련된 목소리 그리고 헐렁치 않는 옷 속에 몸을 감춘 중후한 몸매로 니콜슨은 소시민으로 변신한다. 고대 생물학자나 공룡의 척추 동물 같기도 하지만 그는 다른 짐승을 재창출한다. 처음엔 늑대였다가 나중에 양을 연출해내는 것이 꽤 인상적이다. 10여년 전 미국영화는 <포레스트 검프Forrest Gump>라는 절대적 백치를 그려낸 적이 있는데 오늘은 <워렌 슈미트Warren Schmidt>는 인물을 내세웠다. 이 사람은 멜랑꼴릭한 은퇴자(아니 졸지에 디지털 시대에 직면 강제로 보험회사에서 퇴출당한 자)인데 한평생 일한 일터에서 쫓겨 난 후 끝장이 아니고 또 다른 삶이 존재함을 발견하곤 몹시 충격을 받는다. 슬프게도 남의 생명이나 노후를 보장한다는 보험회사를 다니면서도 막상 자기 노후는 보장할 수 없다는 아이러니에 직면하면서 더욱 더….
날마다 현 사회가 길가에다 아침마다 존재에의 의미를 묻지 않는 바보 로봇들을 쏟아놓는 요즘, 사건을 복잡하게 하기 위해 페인 감독은 도덕가의 잔인함을 발휘, 슈미트 부인을 남편이 은퇴한 지 얼마 안돼 급작스럽게 진공청소기로 카페트를 청소하다 죽게 만들고 그녀가 워렌이 출장 가고 없는 부재를 틈타 남편의 가장 친한 친구와 나누었던 짧은 불륜을 폭로해 버린다. 물침대 외판원인 얼간이와 약혼한 인정머리라고는 별로 없는 고명딸을 둔 늙다리 슈미트 씨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 영화는 마치 폭풍의 전야처럼 고요한 소리 없이 영상만을 비춰주는 첫 장면부터 심상치 않다: 어느 회사 사무실 말끔하게 치워진 책상 뒤로 한 남자가 외투까지 옷을 다 입은 채로 말없이 앉아 움직이지 않고 있고 그 곁엔 테이프가 붙여진 서류 상자들이 이사가는 것처럼 높이 쌓여 있고 벽엔 둥근 시계가 퇴근 시간 6시를 가리키자마자 그 남자는 일어나 사무실을 나간다. 이렇게 해서 한 남자가 일거리를 빼앗기고 <집으로> 돌아가는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렇다고 워렌 그가 누군가? 그는 결코 실망하고 말 인물은 아니었다.
워렌 그는 세상의 정복에 나서기 시작한다. 다행히도 은퇴하면 부부 둘이 여행이나 하며 살기로 작정 부부가 합자해서 산 캠핑 카가 있어 마누라처럼 이젠 집사람이 된 워렌 그는 아내와 캠핑 카에서 근사한 아침식사도 한다. 이젠 마음놓고 사고 싶은 가게에 가서 한가로이 주문도 한다.
김유신의 애마처럼 발길이 닿는 회사에 들러 자기 자리를 차지한 후배지만 조그마한 도움이 되 주러 하지만 보기 좋게 툇자맞고 돌아 온 날 마누라는 심장마비로 죽고 그 후 그는 딸에게 자기를 섬겨달라고 간청하지만 거절당해 비로소 홀로 서기로 맘먹는다.
동안 잘못 겨냥해 튕겨 나간 오줌청소에 골머리를 앓던 아내의 잔소리에 못 이겨 평소 변기에 앉아 오줌을 누던 워렌 이제는 서서 당당히 오줌을 누면서 재기 홀로 일어서며 그러나 식사하는 거 빨래하는 거 집안 청소하는 거는 여전히 서툴며 그 결과는 뻔할 뻔 자 마침내 쓰레기장이 되 버린 집을 비워둔 채 커다란 캠핑카를 몰고 평소에 않던 미국 여행길을 마치 자신의 생의 선구자가 된 것처럼 나선다.
아니 내심으론 딸이 자기를 받아주길 바라면서…그러나 기대는 헛된 돌개바람이 되어 워렌을 한없이 길가를 배회하게 한다. 운전대 돌아가는 데로 찾아간 곳은 66살이 되어서야 오래 만에 찾아간 어린 시절의 집. 그곳은 이마 타이어를 파는 가게자리로 바뀌었고 그런 대로 버팔로 빌은 하나의 고향집 같았고 인디언들은 이제야 남들과 같은 미국인들처럼 친근하게 느껴졌다.
워렌 그는 캠핑 카 지붕 위에서 별을 보며 한동안 자기 친구와 불륜의 관계를 맺은 죽은 아내를 용서해주겠다며 혼잣말하다 잠드는 법도 모르는 사람들과 맥주 마시는 법도 배운다. 그래도 인생은 근사한 것이 아니던가? 하지만 자기 딸이 원하는 카이제르 수염을 한 얼간이가 되 주고 싶어 그는 그들이 사는 곳으로 캠핑카를 몰고 갔다.
맘에 안 드는 사위 집에서 묵으면서 호탕한 특히 성적인 면에서 엽기적인 그녀 사돈 마나님의 수다에 끌려 간신히 자기 딸의 결혼식까지는 잘 참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는 절망의 극에 달한다. 동안 부재 중 문 앞에 수북히 쌓인 우편물을 수거해 들어가면서 그는 다신 이 집밖으로 나오지 않을 거라고 혼잣말을 한다. 살고픈 희망도 죄다 문 앞 흙 털이 위에서 구둣발 털듯 떨구고 들어와 책상 앞에 앉는다.
그 중 눈에 어둠 속의 한줄기 빛처럼 들어온 항공편지봉투를 뜯어보는 그의 얼굴은 한참 후에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그의 두 눈에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 이 영화는 끝이 난다.
사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사랑하는 엔두구Dear Ndugu'로 시작 편지를 쓰는 장면으로 시작 워렌이 나레이터가 되어 이 영화의 줄거리를 이어가는 영화이다. 그가 펴∼엉∼생 한 일 중에 잘한 일이 하나 있는 데 그것은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무용지물 은퇴생활을 상징하는 바로 온종일 켜놓은 티브이에서 굶주린 아이들에게 한 달에 22달러를 보내주면 그 아이의 대부대모가 되어 관계를 맺는 복지 단체의 광고를 우연히 본 것이 그의 마음을 움직여 한 작은 탄자니아 아이와 연결 그후 그는 그 아이에게 온갖 자기 이야기를 일방통행으로 허심탄회하게 쏟아 놓는다. 한 번도 답장이 없는 지라 기대는 엄감생심 그런데 이게 웬 일이람! 엔두구 그 아이에게서 온 편지였다. 그가 있는 고아원 수녀원장이 대신 쓴 편지였는데 그 아이는 겨우 6살이어서 글을 쓸 줄도 읽을 줄도 몰라 동안 수녀원장이 당신의 편지를 읽어 주어 알고 있는데 이번에 그 아이가 소식을 그림으로 그려 동봉한다는 것 아닌가!
그림 모퉁이에 해가 떠있고 어른과 아이가 손을 잡고 서 있는 엔두구의 서투른 그림 한 장이 그만 66살의 워렌 슈미트를 졸지에 6살 짜리 아이로 변신케 한다…만약 니고데모가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봤더라면 한 밤에 예수를 찾아와 거듭남에 대해 물었을 때 꾸중을 듣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다시 거듭나 그 후로의 슈미트의 삶이 어떨 거라는 소망을 안고 영화관을 나서게 하지만 잭 니콜슨의 울음과 웃음으로 일그러진 마지막 얼굴 표정은 가슴이 메어지지 않고서는 웃기가 어렵다. 마치 고통과 환희가 뒤범벅이 된 해산하는 여인의 얼굴을 떠올린다. 사람이 한평생을 살았으면서도 심지어 가족 하나에게도 도움이 안되고 늘그막에 아무에게도 삶의 가치를 발견하기는커녕 철저히 버림받았다는 생각이 변하여 문득 잃었던 식욕이 동하듯 삶의 의욕이 솟구치고 뭔가 할 일을 만들어낸 사람이 짓는 얼굴에서 우리 또한 비로소 안도의 숨을 쉬며 그와 함께 마지막 선한 행동에 참여하고픈 욕망을 느낀다.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집으로>라는 영화에서처럼 가족의 의미와 가족해체 혹은 가정붕괴가 가져온 그 후유증 그리고 노후대책은 과연 어떠해야하는 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이미 한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진지 오래고 삼팔선(38세에 일을 고만둘지도 모른다는 위기 위식), 사오정(45세 정년),오륙도(56세도 직장에 다니면 도둑), 육삼강(63세도 명퇴 안하면 강도)이란 엽기적인 표현이 나돌 만큼 사회도 보장이 없고 창세기 이후 가장 확실한 혼인의 返品率이 50%에 이르고 있는 요즘이다.
<귀하께선 정말로 이혼하시겠습니까? 예(Y) 아니오(N)>처럼 인터넷으로 클릭하는 세상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어서 증가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혼율도 격증함에 반비례 혼인율도 폭락 이젠 결혼하고자 하는 사람도 적어졌다. 그대신 혼인하지 않고 사는 동거족 그리고 아예 혼자사는 독신족들이 늘어가고 있는 추세다.
설상가상으로 <징역 3년 집행 유예 15년 거기에다 평생 보호감호>이란 한국사회에서 자녀를 둔 엄마의 형량이 장난 아니어서 출산율도 저조 세계에서 1위가 되었다. 저출산은 대가족시대의 겉보기엔 장점을 이어 받을 수 있는 것 같지만 즉 친할아버지+친할머니와 외할아버지+외할머니와 부모등 6명이 1명의 아이를 떠받들며 4-2-1 구조로 바뀌면서 아이 1명의 입으로 흘러들어(six pockets one mouth)가는데 맞춰 고급화 길로 가고 있다. 이 말은 반대로 한 아이가 나중에 부양해야할 가족은 6명이나 되어 그 책임을 혼자 져야하는 결과를 초래 책임회피로 인해 가족붕괴를 의미한다. 게다가 아이들이 부모의 과잉보호와 맹목적인 사랑 속에 자기 중심적이며 이기적인 소화제로 커 가는 것도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어쩌다가 하나님의 절대적인 명령마저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지로다(창 2:24)" 안 먹히는 사회가 된 것일까? 현대의 혼인이 이미 고장난 명품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운데 불길하게도 사랑과 도덕과 종교가 이 사실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로 동원되었는데 그러나 성과 혼인의 현실은 사랑과 도덕과 종교가 혼인을 자연화 성화하는 데 실패했다는 사실을 적시한다. 그러나 정작 걱정해야할 것은 이런저런 엽기적인 세태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들이다. 정체성 정립 외에도 최초의 관계인 가족 사이에서의 확실한 자기 자리 매김이 없고서는 도저히 이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어바웃 슈미트> 영화가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문제가 여럿 있다. 우선 평생 직장에서 남을 위해 일하면서 밥벌이하는 경제인으로는 성공을 했다 해도 가정에서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 역할은 물론 자신의 취미생활을 하면서 생을 즐겁게 살아 은퇴 후의 제 2의 생도 착실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워렌 슈미트처럼 졸지에 아내를 잃어버린 데다 할 일 없어 공시간을 메우지 못한 채 심지어 매기 식사마저 해결 못하는 무능력자로 타락 그토록 황당해 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애초에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도록 혼인을 통해 가정이란 공동체를 이루어 최소한 8명(노아네)의 가족 속에서 협력+협동하며 살아가게 만드셨지만 대가족 시대에서 핵가족 시대로 변천, 이젠 아예 가정붕괴 시대로 접어들어 야기되는 사회 문제 해결책이 요원 이제야 가건모(가정을 건강하게 하는 모임)을 만드는 등등 대안에 고심은 하지만 왜 가정이 해체되는 가에 대한 본질적인 원인분석과 정밀진단과 치유가 시급함에도 불구하고 나 몰라라 남 탓으로 미루고만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노후대책이란 별다른 것 아니다. 십자가 十로 보면 수직과 수평의 두 막대의 중심이 나라고 한다면 수직막대 위로 부모가 있고 아래로는 자식이 있으며 수평막대 오른 쪽은 부부 왼쪽은 형제로 가족이 구성되어 있다. 즉 내가 매일 지고 보살피고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하는 가정의 十 인 셈이다. 이 십자가는 하나의 퍼즐 조각처럼 즉, 나라는 퍼즐 한 조각이 빠져나간다면 4개의 퍼즐은 흩어지고 만다는 사실에 주목한다면 책임 소재는 분명해진다.
게다가 이 가정이 모이면 國家가 되는데 나라 역시 커다란 가정일 뿐 아닌가? 슈미트씨는 가정을 지키는 데는 완전 실패했다. 이젠 그가 관계하며 살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군계일학의 적막감에 절망 짧은 방황방랑에서 돌아온 그에게 배달된 편지 한 장이 그를 구원할 줄이야! 이것이 페인 감독이 노린 것이다: 혼자 노는 백로보다 함께 노는 까마귀가 낫다!
동안 IQ지능지수 EQ감정지수 SQ영성지수 시대를 지나 NQ공존지수(Network Quotient)시대가 도래 이젠 더불어 사는 지혜 NQ라는 공존지수가 요구되고 있다. 공존지수란 함께 사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얼마나 잘 운영할 수 있는가 하는 능력을 재는 지수다. 더불어 살 수 있는 자격을 가늠해 보는 잣대이기도 하다. 혈연 지연 학연을 이용한 처세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인터넷(그물 망) 등을 기반으로 새롭게 강조되는 수평적 네트워크 사회에서 서로가 함께 잘살기 위해 갖추어야 할 공존의 능력을 길러야한다. 지능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인적 그물 망임을 가르친 원조는 바로 하나님이 아니셨나? 이웃되어주기에서 원수를 사랑하기까지…. 그 동안 매달 탄자니아 불우한 아이에게 기부한 작은 돈과 그에게 하루하루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그 아이와는 상관없이 변기에 오줌 털어 내듯 토로한 것이 이토록 커다란 사랑으로 되돌아올 줄 워렌 슈미트는 정말 몰랐고 그때야 비로소 남을 위해 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수직의 삶에서 수평의 삶으로의 한 출발점에 그는 서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일생을 60 이라 할 때 전반부 30은 나를 도와주는 사람들에 의해 살지만 나머지 후반부 30은 이젠 남(가족)을 위해 살고 그후의 나머지 삶은 비로소 자신을 위해서 지만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살게 되어 있는데 이 시기야말로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기이다. 전반부 40은 애굽 궁전에서 후반부 40은 양치기로 광야에서 나머지 40년은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 멋진 인생 3 부 작을 완성한 모세야말로 우리의 귀감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결코 늦지 않는 법! 우린 물질과의 관계에선 돈-명예-권력이라는 가짐(to have)의 가치를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됨(to be)의 가치를 추구 비로소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나눔(to share)의 궁극적인 참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사람의 일생이라 할 때 자기 정체성의 확립은 나눔의 삶을 사는데 필요충분조건이 아닐 수 없다.
예수님은 먼저 자신은 하나님의 아들(to be the Son of God)임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일만을 행함(to do)으로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모든 것을 갖게(to have) 된 것처럼 우리도 이젠 먼저 됨-함-가짐의 순서를 따른다면 하나님이 우리게 요구하는 나눔의 삶을 실천 공존지수를 높이며 살 수 있지 않을까? 나눔의 세계는 자유-평화-사랑으로 충만한 바로 하나님의 나라인 것이다.
성경에선 아이가 아닌 자신은 물론 타인의 생명마저도 책임지는 어른들이 많진 않지만 그런 대로 귀감이 될만한 어른들이 등장한다. 요셉이 그러했고 다윗이 그러했다. 형들이 아버지 야곱이 죽은 후 형들을 원망 보복할 까 두려워하자 요셉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창50:21-23)며 그는 110세를 살면서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자기 슬하에서 양육하였다. 또한 다윗도 사랑하던 요나단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절뚝발이 므비보셋을 입양하여 자기 밥상에서 밥을 먹게 하고 모든 것을 돌보아 주었다. <이 종이 무엇이 관대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니이까?>(삼하 9:1-13)하며 므비보셋이 이에 감동 감복 감사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슈미트에게도 이젠 삶의 당위성을 발견 나머지 삶은 이젠 한 아이의 대부로서의 모든 사랑과 헌신 봉사 책임을 다하여 그 아이가 그린 태양처럼 따뜻하게 그의 삶을 비출 것을 <어바웃 슈미트>란 영화로 그를 알게된 관객으로 하여금 의심치 않게 한다. 그리고 관객자신들도 누군가의 무엇이 되어 주어야 겠다는 결심을 그리하여 구약에서 어바웃about으로 알려진 예수님이 신약에서 직접 등장 바로 자기 자신을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한 것처럼 우리도 그러고 싶은 신선한 충격을 가슴에 받으며 영화 크레디 엔딩이 끝나 가는 동안 하게 한다. 제 2의 제 3의 <어바웃 누구>가 속편으로 나오길 아울러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