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우리에게는 낯선 이름인 프랑수와 오종 감독의 올해 칸느 영화제 경쟁부분 진출작 [스위밍 풀]은, 역시 프랑수와 오종 감독답게 관객의 의표를 찌르는 극적인 반전으로 끝을 맺는다.
지난 해 국내에서 처음 프랑수와 오종 영화제가 개최된 이후 올해도 다시 프랑수와 오종 감독의 영화들이 한 군데 모여서 특별상영되고 있지만, 대부분의 관객들에게는 [스위밍 풀]이 그의 첫 작품이 될 것이다. 오종 감독의 특징은 언제나 마지막에 극적인 반전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이다. 마치 아가사 크리스티나 엘러리 퀸의 추리소설을 읽는듯한 결말 부분의 반전은, 그의 영화가 미학적 성취 못지 않게 대중적 성공도 거두고 있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스위밍 풀]은, 영국의 범죄소설 작가 사라 모튼이, 다음 작품을 구상하기 위해 프랑스의 한적한 별장에 머물면서 시작된다. 사라는 출판사 편집장이자 자신의 연인이기도 한 존의 별장에 머무는데, 예고없이 존의 딸 줄리가 나타나 그녀의 작업을 방해한다.
별장 마당에 있는 수영장은 영화의 핵심 공간이다. 모든 사건은 수영장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수영장의 물은 바닷물에 비해서 지루하고 권태스럽다. 거침없는 파도의 돌발적 소리침도 없고 위험을 자극할 그 무엇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무 것도 아닌 평범한 수영장은, 오히려 바다보다 더 무서운 유혹을 간직하고 있다. 나른하게 쏟아지는 햇볕 앞에서 저절로 무기력해지는 수영장은, 현대인의 권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한 우리들의 또 다른 충동을 자극하게 만든다.
사각형의 틀에 가두어져 있는 물. 언제 범람할지 모르는 강이나, 태풍을 만나면 해일을 일으키며 사납게 돌변하는 바다에 비하면, 수영장 속의 물은 얼마나 고요하고 안전한가. 그러나 바로 그런 고정관념이 문제를 일으킨다. 오히려 한 군데 고여있는 물이라는 점에서 수영장 속의 물은 죽음의 이미지와 가깝게 놓여 있다.
처음 사라가 수영장을 봤을 때, 그 위에는 검은 천이 드리워져 있다. 검은 천을 걷으면 드러나는 푸른 색의 물, 그 위에 떨어져 있는 낙엽들. 그리고 알몸으로 수영을 즐기는 줄리. 사라는 몰래 줄리를 훔쳐보기 시작한다. 그녀가 밤마다 상대를 바꾸며 데리고 오는 남자들, 그리고 투명한 햇빛 아래 선텐을 즐기고 있는 그녀의 완벽한 몸매를 보며, 사라는 자신도 모르게 호기심을 느끼게 되고 줄리의 일기까지 훔쳐본다. 두 여자 사이에 등장하는 프랭크가 살해되면서 이야기는 점점 미스테리 구조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줄리 역의 뤼디빈 사니에르는, 오종 감독의 전 작품인 [8명의 여자들]에서 막내 까트린느 역으로 등장했었는데 불과 1년만에 놀랄만큼 성숙된 몸매로 사라와 프랭크를, 아니 관객들을 유혹한다. 사라 역의 샬롯 램플링은, 깐깐하면서도 신경질적이면서, 동시에 팽팽한 몸매를 갖고 있는 줄리에 대해 호기심과 질투심을 느끼는, 추리 작가의 모습을 섬세하게 표현한다.
침착하게 서두르지 않고 사건을 펼쳐가는 오종 감독의 솜씨는 의심할 나위없는 장인의 바로 그것이다. 특히 마지막 짧은 쇼트 하나로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뒤집어 버리는 반전은 탁월하다. 단편 소설이나 꽁트에서 주로 쓰이는 절묘한 상황의 반전 효과를 그는 즐겨 사용한다.
프랑수와 오종 영화의 마력은, 평범한 속에서 비범함을 찾아, 낯익음의 일상성 속에서 낯설음의 비일상성을 극대화하는 데서 발휘된다. 극단적인 컬트 영화가 아니면서도 그의 영화는 우리의 일상적 수면 밑에 잠복한 또 다른 본능을 찾아낸다. 우리는 그의 영화 속에서 우리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하고 섬찟 놀라게 된다. 근친상간, 성정체성, 가학성과 피학성 등 극단적 주제를 다루면서도 프랑스 영화의 주류로, 세계 영화계의 기대주로, 단숨에 뛰어오른 프랑수와 오종의 비밀은 거기에 있다.
[스위밍 풀]은 영화 속의 작가인 사라가 쓴 책의 이름이기도 하다. 관객들은 어느 순간 자신이 독자였음을 깨달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