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에서 식구(食口)는 첫째로 같은 집에서 살며 끼니를 함께 하는 사람, 둘째로 한 단체나 기관에 속해 함께 일하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예로부터 이 단어 외에도 경우나 사정에 따라 유사한 뜻으로 다양하게 변형하여 호칭되어왔다. 가구(家口)⦁가족(家族)⦁가권(家眷)⦁권구(眷口)⦁권속(眷屬)⦁계루(繫累)⦁소솔(所率)⦁친솔(親率)⦁가솔(家率)⦁식솔(食率) 따위가 그들의 예이다. 한편, 집안 식구 외에 집에서 함께 기거하며 끼니를 얻어먹고 있는 객식구(客食口)를 비롯해서 집안 식구 외에 덧붙여서 얻어먹고 있는 군식구(-食口) 혹은 잡식구(雜食口)도 있다. 이들 부류에는 넓은 의미에서 보면 식객(食客)⦁기객(寄客)⦁문객(門客)⦁묵객(墨客)⦁유객(遊客)⦁손⦁손님⦁길손⦁유인(遊人)⦁객려(客旅)⦁기려(羈旅)⦁나그네⦁여객(旅客)⦁유자(遊子)⦁행객(行客)⦁행려(行旅)⦁객인(客人)⦁객중(客衆 : 손님의 높임말)⦁객(客) 등들도 언중(言衆)에게 널리 쓰였다.
그 옛날엔 삼사 대(代)가 한 지붕 밑에서 집단으로 거주하는 대가족제도였던 까닭에 천륜이나 인륜으로 맺어진 가족이자 식구가 많았다. 또한 교통이 불편하고 숙박시설이 발달하지 않았던 관계로 멀리에서 찾아온 지인이나 친인척이 며칠 동안 머물던 경우가 흔했다. 게다가 인심이 좋기로 소문난 대가 집인 경우 하인 식구나 머슴을 비롯해 길을 가던 길손이나 뜨내기 부보상(負褓商) 등이 날이 저물면 찾아들었던 관계로 객식구 혹은 군식구가 상당히 많았다.
이즈음 거개의 가정은 핵가족으로 그 옛날에 비해 식구는 참으로 단출하다. 게다가 친인척이나 지인이 멀리에서 찾아와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해결해야 할 일을 마치면 사통팔달의 빠른 교통편을 이용해 당일에 귀가하게 마련이다. 피치 못할 경우 대부분은 호텔 같은 숙박시설을 이용하는 관습이 보편화되었기 때문에 객식구와 함께 숙식을 함께하며 불편을 겪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내 어린 시절의 회상이다. 6⦁25전쟁 참화로 모두가 곤고한 형편과 무관하게 우리 집은 대가족이 함께 살았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큰아버지와 부모님을 위시해서 우리 육남매가 고정 식구였다.
게다가 객식구가 끊일 날이 없었다. 먼저 가군(家君)인 할아버지가 사람을 좋아해 사랑채 할아버지 방에는 평균 한두 명의 객식구가 붙박이로 기거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분들이 왜 우리 집에 머물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할아버지와 교분이 두터운 풍수지리를 하던 지관(地官)이나 전통약재나 침술에 밝다는 의원(醫院)을 비롯하여 얼치기 문객(文客) 부류도 심심치 않게 찾아들었다. 다음 유형은 길손이나 다양한 뜨내기 등짐장수들이 지나다가 날이 저물면 동네에서 우리 집 사랑방이 그들의 단골 숙소로 제공되는 게 불문율처럼 되어 있었다. 이따금 이기는 하지만 멀리에 사는 친인척이 우리 동네 쪽으로 왔다가 하룻밤 유숙해야 할 형편이거나 며칠 머물 경우 여러 친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우리 집을 숙소로 정하는 걸 당연시 했다. 이런 연유로 내 어린 시절 우리 집엔 순수한 의미의 우리 가족만 오순도순 식사를 했던 기억이 거의 없다. 따라서 내 어머니는 일 년 내내 솥 끝에 물이 마를 날이 없었던 것으로 회상된다. 서민 아파트라는 공간이 객의 설자리를 허락하기 어려울 정도로 협소한 원천적인 문제의 발로일까? 아니면 요즘 문화의 대세일까? 내남없이 특별한 연이 없는 한 친인척 집을 찾아가서 며칠 신세를 지며 함께 기거했었다는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최근에는 도통 없다. 내 경우도 대학 졸업 이후 친인척이 아닌 친구 집에서 잠을 자고 식사를 대접 받았던 두 번 정도의 기억이 유별나게 또렷한 기억의 곳간에 오롯이 새겨져있다.
아마도 군에서 제대하고 대학원 다닐 무렵 이었을 게다. 무슨 일인가 청주에 갔다가 그 당시 농협에 재직하던 친구 K의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졌다. 그 당시 친구 어머님은 칫솔도 지니고 가지 않았던 덜렁이인 내게 새 칫솔까지 마련해 주시며 당신의 아들 대하듯 보살펴 주시던 따스함이 여태까지 화롯불을 쬐는 것처럼 훈훈하다. 또 하나는 마산에서 서울에 갔다가 신혼이었던 D대학 교수인 L박사 집에 찾아갔을 때의 일이다. 친구의 부인이자 K대학 교수로 영문학자인 Y박사가 자기 남편과 나를 신혼방의 침대에서 함께 자라고 방을 내주고 정작 자신은 서재를 쓰던 마음에서 무척 감동을 받았었다.
세월이 변함의 방증일까 아니면 모계사회로 회귀를 보이는 미미한 징조일까? 요즘 아이들은 이모와 이종사촌과는 엄청 친해도 고모와 고종사촌은 모른다는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적 지 않다. 잔칫날이나 명절을 도래하면 종갓집엔 대소 간의 친척이 모여들어 북적대며 어울리다가 좁은 방에서 새우잠을 마다하지 않고 행복해했던 아련한 추억은 이제 전설속의 얘깃거리에 가깝다. 분가한 자녀들이 제 아이들을 거느리고 부모의 집에 찾아왔다가 잠자리가 불편하다고 늦은 밤에 제 둥지로 되짚어 돌아가거나 가까운 호텔이나 숙박시설을 찾아 나서는 예가 드물지 않은 지금의 풍속도이다. 이런 정서와 가치관의 흐름에 걸맞게 법이나 제도가 자연스럽게 바뀌듯이 그 옛날 구닥다리 잣대로 재단했던 식구나 객식구에 대한 정의도 디지털 시대의 핵가족 개념의 철학에 걸맞게 손을 봐야 아귀가 맞는 게 아닐까?
(한판암 님의 수필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