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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돌널무덤(석관묘 石棺墓) 청동기시대 대표적인 무덤의 하나. 구덩이를 파고 판돌[板石]·괴석(塊石)·할석(割石) 등을 써서 돌널[石棺]을 만들어 주검을 묻는 무덤 형식이다. 땅 위에 봉토나 상석 같은 표지시설이 없기 때문에 발견된 수는 고인돌에 비해 적지만, 우리나라 전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사용된 석재의 성격에 따라 몇 가지 형식으로 구별된다. 첫째, 네 벽과 바닥·뚜껑돌을 각각 1매의 큰 판돌로 만든 것, 둘째, 여러 매의 작은 판돌을 이어 만든 것, 셋째, 괴석이나 할석을 판돌과 섞어 만든 것 등이다. 첫째 형식의 대표적인 유적은 강계 풍룡동·공귀리, 북창 대평리, 봉산 덕암리, 사리원 상매리, 단양 안동리, 진양 대평리 등이며, 둘째 형식은 부여 가증리·중정리·송국리와 김해 회현동 등이 있다. 널 길이가 160㎝ 이상이 되어 성인을 펴 묻도록 한 것도 있지만, 1m 안팎의 작은 것도 많다. 이 경우는 성인을 굽혀 묻거나, 아동용, 2차 매장 등으로 이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돌널의 너비는 다리 쪽보다 머리 쪽을 넓게 만들었는데, 이는 시베리아 카라수크(karasuk) 묘에서 보이는 특징과 같다. 셋째 형식의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서흥 천곡리유적이 있다. 출토유물은 판돌 무덤에서는 간돌검·돌화살촉·대롱옥·곱은옥·토기 등이 출토되고, 할석 무덤에서는 주로 동검류가 나오고 있다. 돌널무덤은 시베리아, 중국의 동북지방, 우리나라, 일본 등지에서 발견되고 있어 청동기시대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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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돌무지무덤(적석총 積石塚) 신석기시대부터 삼국시대 초기에 걸쳐 축조된 무덤 형식의 하나. 중앙에 돌널을 넣고 그 위에 냇돌을 덮은 무덤과 기단(基壇)이 있는 무덤, 돌방[石室]이 있는 기단식 무덤 등이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선사시대의 돌무지무덤은 몇 군데밖에 안 되는데, 옹진 시도, 통영 연대도·욕지도 등 신석기시대 유적에서는 주검 위에 막돌을 쌓아 만든 단순한 형태이고, 춘천시 천전리에서 발견된 것은 돌널 위에 돌을 쌓은 형태이다. 흔히 돌무지무덤이라 함은 고구려·백제 초기의 무덤을 말하는데 압록강과 한강 유역에 많이 분포되어 있다. 압록강 유역의 것으로는 랴오닝 성[遼寧省] 안런 현[桓仁縣] 고력묘자촌(高力墓子村), 평안북도 시중 심귀리·노남리와 자성 법동리 등지의 무덤떼와 지안 현[集安縣] 퉁거우[通溝]의 장군총(將軍塚)을 들 수 있다. 특히 장군총은 7단으로 쌓은 방형 기단식 무덤으로 바닥 1변의 길이가 30m, 높이가 14m쯤 되며, 안에 돌방과 널길[羨道]을 갖추고 있는 대표적인 돌무지무덤이다. 한강 유역에서는 서울 석촌동, 양평 문호리, 제천 도화리 등지에서 발견되고 있다. 석촌동 4호분은 방형 3단 돌무지무덤으로 돌방과 널길이 남아 있다. 한강 유역의 돌무지무덤은 고구려 돌무지무덤의 계통을 이어받아 백제에서 만든 것으로 보인다.
3. 널무덤(토광묘 土壙墓) 구덩이[土壙]를 파고 별다른 시설을 하지 않은 채 주검을 묻는 무덤으로서 가장 간단한 방법이며, 시대와 지역에 관계없이 보편적으로 널리 쓰인 무덤양식. 한국에서는 선사시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청동기시대말과 이른 철기시대를 거쳐 삼국시대에 이르러 일반화되었지만, 앞시기의 것은 봉토(封土)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아서 우연하게 찾는 경우가 많다. 구덩이의 모습은 거의가 묻힌 사람의 머리쪽이 넓고 아래가 좁은 긴 네모꼴이며, 묻는 방법은 홑무덤[單葬]과 어울무덤[合葬] 2가지가 있다. 묻은 방법과 서로 관련시켜보면 시기에 따라 크게 3가지의 과정을 거치면서 발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처음에는 네모꼴로 판 구덩이에 주검을 직접 묻기(바로움무덤) 시작했는데, 이러한 방식은 선사시대부터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져오고 있다. 그뒤 이른 철기시대가 되면 나무널[木棺]을 만들어 그 속에 주검을 넣고 구덩이에 묻는 방법(나무널움무덤)이 널리 퍼지기 시작하다가, 차츰 모가 진 나무로 상자 모양의 나무덧널[木廓]을 만들어 그 안에 1기(基) 또는 2기의 나무널을 놓은 다음 흙을 덮어 봉토를 올리는 형식(나무덧널움무덤)이 쓰였다. 나무덧널움무덤은 움무덤의 발달과정으로 볼 때 짜임새나 모습에서 중요한데,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중국의 무덤전통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대동강유역의 부조예군묘(夫租濊君墓)·고상 현묘(高常賢墓)와 경주 조양동, 화순 대곡리 무덤 등이 있다. 부조예군묘에서는 "夫租濊君"이라고 새겨진 은도장[銀印]이 나왔는데, 이는 옥저(沃沮)의 족장무덤으로 여겨져 우리 역사의 초기 국가에 관한 실체를 알려주는 구실을 하고 있다. 다른 껴묻거리는 세형동검을 비롯한 늦은 시기의 청동기와 쇠검[鐵劍]·철로 만들어진 말갖춤 등 청동기와 철기가 섞여 나와 이 시기의 문화전통에 관한 것은 물론, 한반도와 중국과의 교류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경주 조양동에서는 오랜 기간 동안 만들어진 비교적 많은 무덤이 조사되었는데 나무덧널움무덤에서 고신라(古新羅)의 대표적인 무덤 모습인 돌무지나무덧널무덤[積石木廓墳]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성격을 지니고 있어 두드러지며, 이른바 옛 와질토기라는 것과 중국의 전한 때 만들어진 청동거울 등이 한꺼번에 쏟아져나와 삼국 초기의 역사발달을 살펴보는 데 중요하다. 삼국시대의 움무덤은 초기에 널리 만들어졌는데 비교적 문헌자료가 없는 고대사를 이해할 때 중요하며, 서울 가락동무덤처럼 한 묘역 안에 독널[甕棺]을 곁들여 만든 다음 봉토에는 표토 가까이에 돌이나 기와를 1겹 깐 점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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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독무덤(옹관묘 甕棺墓) 주검을 독[甕]이나 항아리[短頸壺]에 넣어서 땅을 파고 구덩이[土壙]를 만들거나 독을 넣을 만큼 적당히 파서 묻는 무덤. 청동기시대 이래로 이른 철기시대를 거쳐, 우리나라의 남부지역에서는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는 오랜 전통의 무덤 양식 가운데 하나이다. 삼국시대의 것은 봉토가 있지만 그 앞 시기의 것은 땅 위에 무덤의 자취가 없기 때문에 지금까지 조사된 경우가 적다. 널[棺]로 쓰여지는 독이나 항아리가 1개이면서 넓적한 돌 같은 것으로 뚜껑을 덮은 것은 외독[單甕棺], 항아리나 독 2개가 서로 아가리를 맞대고 뉘인 것은 이음독[合口甕棺]이라 하며, 3개를 이어서 만든 것도 가끔씩 발견되고 있지만 이 가운데 이음독이 가장 널리 퍼져 있다. 독무덤이 있는 곳의 지세는 시기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청동기시대의 것은 강이나 작은 냇가를 낀 들판과 붙어 있는 구릉지대에서 고인돌·움무덤[土壙墓]·돌상자무덤[石箱墳] 등과 함께 발견되고 있으며, 이른 철기시대의 것은 구릉지대를 비롯하여 산기슭에서, 김해 회현리와 부산 낙민동유적과 같은 것은 조개더미에서 발견되었다. 그리고 삼국시대의 것은 야트막한 산기슭에 있는 경우가 많다. 청동기시대나 이른 철기시대의 유적은 강서·은율·신천·공주·광산·김해·부산 등지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그다음 시기에는 이러한 무덤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 전국적으로 나타나고 있어 보편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묻는 방법을 보면 대부분 수평으로 널이 놓여 있는 모습이지만 공주 남산리유적에서는 수직으로 놓인 것도 있어 다른 유적의 것들과 비교되며, 널로 쓰인 토기는 민무늬토기[無文土器]나 민무늬토기 계통의 적갈색 연질토기(軟質土器), 회색 삿무늬토기[繩蓆文土器]가 주로 이른 시기에 사용되었는데, 강서 태성리유적에서는 화분토기(花盆土器)를 이용한 것도 있다. 묻힌 사람[被葬者]은 널의 크기로 보아 이른 시기에는 어린아이나 두벌묻기[二次葬]의 방법으로 어른을 세골장하였던 것 같으며, 삼국시대에는 나주 반남지역의 독무덤들처럼 강력한 권력을 가졌던 사람을 묻었던 것도 있지만 돌덧널[石槨]로 된 큰무덤 옆에 딸린 것이 발견되고 있어 독무덤의 복합성과 전통성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딸린 독무덤은 어린아이가 묻힌 것으로 여겨져 큰무덤과 서로 관련이 있는 가족무덤의 한 형태로 이해된다.
5. 굴식 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 橫穴式石室墳) 판모양의 돌 ·깬돌[割石]을 이용하여 널을 안치하는 방을 만들고 널방벽의 한쪽에 외부로 통하는 출입구를 만든 뒤 봉토를 씌운 무덤. 일반적으로 굴식돌방은 그곳을 사람이 살고 있는 공간으로 간주하여 널길[羨道]과 문이 달리고 사람이 서서 드나들 수 있도록 만든 무덤을 가리키는 것으로, 납관(納棺)만을 목적으로 고안된 구덩식[竪穴式]이나 앞트기식[橫口式]과 구분된다. 이 무덤의 형식은 일반적으로 널방의 평면형태와 널길의 위치에 따라 직사각형 돌방 ·방형 돌방으로 크게 구별한다. 굴식돌방무덤은 고구려 ·백제 등에서 일찍부터 행하여진 묘제로서,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하였고 가야고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신라 후기에 유행한 굴식돌방무덤은 평면이 대체로 방형이고 ‘ㄱ’자형의 널길이 있어서, 신라에서 독자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 ·백제 ·가야 등과의 접촉을 통해 출현한 묘제라고 하겠다. 이는 순흥 읍내리의 고분벽화무덤이 신라 ·가야와는 다른 고구려계의 모습을 보여주는 점에서도 방증된다. 또 낙랑과의 관계를 주목하는 논자도 있다. 굴식돌방무덤 안에는 추가장을 위해 관대가 놓여 있고, 관대에는 머리베개[頭枕]와 족좌(足座)가 있다. 이 무덤의 출현은 가장 고식인 경주 보문리 부부총의 토기 양상으로 보아 6세기 중기로 편년되며, 주로 김해 ·고령 ·합천 ·현풍 ·인산 ·경산 ·경주 등에서 발견된다. 특히, 쌍상총(雙床塚)에서는 평면이 방형인 널방에 남벽 중앙 널길이 ‘모’자형으로 나 있으며, 서악동(西岳洞)은 도굴이 전혀 안된 최초의 경우로, 3인용 관대와 돌베개 ·족좌 등이 있다.
6. 돌무지 덧널무덤(적석목곽분 積石木槨墳·목곽적석총·적석봉토분) 신라의 대표적인 무덤 형식.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목곽적석총·적석봉토분이라고도 한다. 지상 또는 구덩을 판 지하에 상자 모양의 덧널[木槨]을 놓은 다음, 그 위에 냇돌을 둥글게 쌓고 다시 흙을 입혀 봉분을 만든 것이다. 신라 왕과 귀족의 무덤으로서, 경주시 황남동·황오동·인왕동·노서동·노동동·보문동 등지와 월성 금척리, 창녕 교동 등에서 고분군을 이루고 있다. 무덤 구조는 덧널·돌무지·둘레돌·봉토 등 4부분으로 이루어졌고 덧널 위치에 따라 지상식·반지하식·지하식으로 구분되는데, 대부분의 고분이 지하식이며 지상식으로는 천마총·황남대총·서봉총·금관총 등이 있다. 추가장(追加葬)이 안 되는 홑무덤이 특징이며, 합장이나 집단장은 한 봉토 안에 여러 개의 덧널을 설치하거나, 황남대총(98호분)과 같이 남북으로 2개의 봉분을 붙여 쌍무덤을 만든 것도 있다. 홑무덤과 쌍무덤은 왕과 왕비 등 최고위층의 무덤이고, 다곽묘·집단묘 등은 하위 귀족의 무덤으로 보인다. 봉토를 보호하고 묘역을 표시하기 위해 봉토 밑에 둘레돌을 돌렸다. 껴묻거리[副葬品]로는 금관·귀걸이·구슬목걸이를 비롯한 귀금속 꾸미개와 토기들이 있다. 무덤의 크기나 출토 유물의 성격으로 보아 고대 왕권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고대국가 기틀을 확립해가던 4세기 전반에서 6세기 전반에 걸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경주 황남대총
7. 덧널무덤(목곽묘 木槨墓 ·토광목곽묘 土壙木槨墓) 초기철기시대에서 원삼국시대에 이르는 대표적인 무덤 형식의 하나. 목곽묘(木槨墓)·토광목곽묘(土壙木槨墓)라고도 한다. 구덩이를 파고 널[棺]을 넣는 덧널[木槨] 시설을 나무로 만든 무덤이다. 삼림지대의 주민들로부터 비롯되어 남시베리아·스키타이·몽골·한국과 유럽 할슈타트 문화 지역 등으로 파급되었다. 특히 중국에서 상대(商代)부터 전국시대에 이르기까지 발달한 양식이다. 우리나라의 덧널무덤은 초기철기시대의 것으로 강서 태성리, 은율 운성리, 봉산 송산리 당촌, 경주 구정동·입실리, 화순 대곡리, 김해 양동리·예안리 등지에서 발견된 것이 대표적이다. 특히 대동강 유역의 부조예군(夫租濊君) 무덤, 고상현(高常賢) 무덤은 당시 유력자의 무덤으로 이름난 예이다. BC 1세기에서 AD 1세기경에 만들어진 낙랑의 덧널무덤은 상태가 아주 좋아 무덤구조 연구에 훌륭한 자료가 된다. 지하 움 안에 나무로 네모난 방 모양의 덧널을 짜고, 그 안에 다시 나무로 널을 만들어 부부 또는 가족을 합장하였다. 봉토는 사각추의 위를 자른 것같이 만들었다. 그중에 채협총(彩)은 벽에 기마도(騎馬圖)가 그려 있는 벽화무덤이기도 하다. 원삼국시대의 경주 조양동 덧널무덤은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으로 넘어가는 과도기 형식이라는 점에 그 중요성이 있으며, 부산 복천동 학소대와 경산 임당동 무덤이 같은 성격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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