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넉넉히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
j. 오스왈드 샌더스 저.
제 1부 그리스도인 경험에 얽힌 문제들 2
제 1장 긴장과 과로의 극복 2
긴장과 과로를 일으키는 원인들 2
필연적인 결과들 3
만병통치약 4
제 2장 마음의 변질 7
성육신 이전의 상태 7
성육신의 상태 8
제 3장 고난의 목 12
”가시” 13
하나님의 선물 13
하나님의 목적 14
하나님의 보상 14
제 4장 낙담(의기소침)의 원인과 치료 16
낙담의 심연(深淵) 16
낙담의 범위 17
낙담의 진단 17
하나님의 규정 18
오늘날을 위한 교훈들 19
제 5장 영적 하향(下向)과 복구 19
표면적인 헌신의 위험 20
부분적인 성별(聖別)의 위험 20
불완전한 분리의 위험 21
무의식적인 악화(惡化)의 위험 21
하나님의 치료법 22
결과로 생기는 축복들 22
제 6장 양심의 기능 24
양심의 제한성 25
책망받는 양심 26
명령하는 양심 27
정화된 양심 27
제 7장 성령과 우리의 장애들 29
죄를 향한 성벽(8:2) 30
육신의 욕망들(8:5, 6) 30
조정이 불가능한 마음(8:9-11) 31
반항하는 적대의지 31
독자적인 영(8:14) 31
무서워하는 영(8:15-17) 31
기도없는 마음(8:26, 27) 31
제 8장 성화(聖化)에서의 하나님의 역할과 우리의 역할 33
일하라는 권고 33
일을 가능케 함 34
하나님이 일하시는 한도 34
제 9장 소홀히 된 제 9복 37
엄밀한 검사 37
십일조의 법 38
청지기 직분 모범 38
사후(死後)의 자선 39
40
여섯가지 처리 질문 41
여섯가지 인도의 원리 43
제 2부 그리스도인 사역에 얽힌 문제들 45
제 11장 영적 지도력의 조건 45
지도력의 본질 45
영향력 46
자격 47
도달하게 된 방법 48
경고들 49
제 12장 하나님께 인준받은 야망 51
기본적인 야망 51
가치없는 야망 52
결정적인 동기 52
제 13장 영적인 승리로 이끄는 무기 56
전쟁 56
군인들 56
무기 57
제 14장 권위를 가지고 지도하는 기술 59
”강한 자” 59
”먼저 결박한 후에야 ... 늑탈하느니라” 60
가능성과 실제성 61
무기력할 필요가 없다 62
제 15장 영적 열정 - 그 허(處)와 실(實) 63
그릇된 열심 63
오해적인 열성 63
참된 열성 64
약화되는 열심 66
지속된 열심 66
제 16장 묻지 않고 따라가는 제자도 68
부적절한 질문 68
자기연민 또는 자기검토 69
동기와 보상 69
비밀스런 짐 70
제 17장 시간의 전략적인 사용 72
그리스도의 본 72
시간이란 무엇인가? 73
시간의 정복 74
삼겹의 처방 75
추진의 동기 76
제 18장 선교 사명은 어떻게 받는가 ? 78
사명의 기초 78
느낌이 있는가 아니면 소리가 들리나? 79
부르시는 방법 79
국내인가 아니면 해외인가? 80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기 82
제 19장 영적인 등산 84
일관성있는 젊음 84
좌절되지 않은 중년 85
노년의 승리 85
”복잡한 일들을 적절히 긴급사태에도 넉넉히 처리하시는 하나님
이 책의 기본적인 목적은 제목에도 나타나 있듯이 그리스도인 사역자가 현대를 살면서 부딪히는 복합적인 긴장과 문제들의 해답을 신경안정제나 흥분제가 아닌 성서적 원리의 정확한 이해와 적용으로 찾을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인 사역에서의 효과는 성서에 발표된 영적인 법에 순응할 때에 오는 자연적인 결과라는 점을 말해 주고 있다.
치료의 방법은 다양하다.
어떤 경우에는 성서의 인물이나 사건을 예로 들어 문제를 설명하고 해결책을 제시한다. 다른 경우에는 성경구절들을 해설하거나 성서적 원리들을 해명하므로 그 해답을 찾게 된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분석해 볼 때 하나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이다. 그는 어떠한 긴급사태에도 넉넉히 대처하시는 분이며, 마음에 얽힌 복잡한 일들을 적절히 처리하시는 분이시다.
이 책의 대부분은 내가 여행하는 중에 많은 자료가 손에 닿지 않는 상황에서 씌여졌기 때문에 만일 증거의 신빙성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관용으로 인내해 주기 바란다.
오스왈드 샌더스
J. Oswald Sanders
제 1부 그리스도인 경험에 얽힌 문제들
제 1장 긴장과 과로의 극복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장 28절).
과로와 긴장은 우리 시대의 한 특징이다. 모든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파괴하는 일에 순응하고 있다. 사실을 말한다면, 믿는 영혼들에게 마음의 안식과 평정을 제공하신다고 굳게 약속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부조리에 너무도 쉽게 순응해 버린다. 일반 그리스도인들보다는 하나님과 그리고 하나님의 방법에 대하여 더 많이 알고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목사들과 선교사들일지라도 신경성의 해로운 긴장에서 결코 제외되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울며 기도하고 자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에게 머무는 안식에는 들어가지 못할 것같아 보인다.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되며 이렇게 될 필요도 없다.
허드슨 테일러 박사는 선교사로 일하게 된 초기와 중국대륙 선교부를 창설한 후 몇년동안, 이러한 곤경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그 후에 그는 변화를 체험하게 되었다.
어떤 사람이 당시의 그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는 전에 고생하며 괴로움을 당했던 사람인데 근래에는 영혼의 휴식마저 누리지 못하고 있다.”그 후에 그는 하나님과의 새로운 만남을 통해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급진적으로 변화된 간증을 할 수있었다.”
일에 관해서 말한다면 내게 맡겨진 일의 양이 너무 많거나, 책임이 몹시 중하거나, 극히 어려운 일이었던 것은 아니기는 하지만 어쨌든 나의 일에 대한 중압감과 긴장은 모두 내게서 사라졌다.”하나님께는 편애의 죄가 없으시므로 그가 자녀들 중 하나에게 하신 일이라면 모두에게도 기꺼이 하실 것이라고 기대해도 좋다.
긴장이란 단어는 ”뻣뻣하여 팽팽해진 상태에서 정신적 과로, 투쟁의 격렬함, 근육긴장을 일으키는 신경성 불안이 생기는 것”으로 정의되고 있다. 물론 이 말은 신경적 긴장이 모두 해로운 것임을 암시하고 있지는 않다.
하프의 줄은 필요한 만큼 팽팽해야만 제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여 정확하게 음악적인 소리를 낸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생의 가장 높은 성공에 도달하게 되는 것은 가치있는 생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모든 힘을 이용할 때 뿐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일정한 정도의 긴장이 포함된다.
누가복음 12장 50절에는 우리 주님이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라는 말씀도 하셨다.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는 긴장해야 할 필요가 있으셨다.
과로는 ”지나친 긴장”으로 정의되며 우리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거나 해로운 일에 지나치게 신경을 쓸 때 생긴다.
긴장과 과로를 일으키는 원인들
긴장을 일으키는 것은 힘든 일 때문이라고 일반적으로 오해하고들 있는데, 일 자체가 진짜 원인은 아니다. 일 자체가 힘이 든 일이라 해도 마음이 안식하고 있을 때는 건강을 가져온다.
일은 피곤을 낳지만 긴장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긴장의 근본적인 원인은 마음에 있는 것이지 신체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 사역자에게 과로한 건강상태를 유발시키는 요인들로써 적어도 다음의 네가지 요인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부적격성을 느낌.
자신에게 맡겨진 사역에 대해 영적인 자원의 부족함과 정신적 예민성을 계속 의식하는 것이 긴장을 낳게 하는 근원이다. 사실 대개는 기초가 잘 놓여있기 마련이다.
우리 중에 누가 자기의 영적인 사역에 적격인가?
완전한 적격성을 느껴야 우리의 영적인 부적격성을 느끼지 않게 되겠는가? 부족함을 의식함에 있어 우리가 양심적이면 양심적일수록 부족함을 보충하려고 더욱 애쓰고 분투한다. 이런 면에서 가장 심하게 괴로움을 겪는 사람은 의무감이 지나치게 발달한 완전주의자이다. 우리가 영적인 책임감을 느끼면 느낄수록 과로는 더욱 격렬해지는 법이다. 우리 사역이 요구하는 바에 접하여 정신적인 준비가 부적절하다거나 훈련이 불충분하다고 의식하는 것은, 다시말해서 우리의 정신적인 자본이 너무 빈약하여 과중한 수표를 발행할 수 없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모두 우리를 극단으로 인도해가는 것이다.
-근심하는 태도.
우리가 조절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 걱정하는 습관은 영적인 열심에 대한 신경을 마비시킬 수도 있으며 위험한 내적인 긴장을 야기시킬 수도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걱정이 유전적인 경향성을 나타내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습관성인 걱정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그것이 쓸데없는 일이며 어찌할 수도 없는 일임을 알면서도 오랫동안 방관해 두어 생활 형식의 일부가 된 습관을 깨뜨리는 데는 무력해 보인다.
조사, 건강, 마음의 문제들, 언어공부, 설교와 메세지의 준비, 까다로운 모임이나 면담, 사역하는 동료들과의 관계, 이 하나 하나가 근심을 더해주는 재료가 된다. 우리 주님께서 사용하신 근심이란 말은 마음이 나뉘어지고 산란하여 동요된 상태에 빠지는 것을 의미하며 어떤 한가지 일에 정신을 집중시킬 수 없는 상태이다.
-두려운 마음상태.
긴장과 과로를 일으키는 일반적인 원인이다. 신경성 체질을 가진 사람들 중에는 만사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다. 새로운 책임에 대한 두려움이나 경험이 없는 일을 맡게 될 것에 대한 두려움이 근심의 고뇌로 이 소심한 영혼을 채운다. 많은 경우에 그 실제적인 정당성이 인정되는 육체적인 두려움은 신경계통과 영적인 생활 양면에 원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잠을 빼앗아 갈 수도 있고 깨어있는 동안에도 이름모를 공포에 빠진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피하려던 그 상황을 오히려 산출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두려움에는 응답지 않으시고 믿음에 응답하시기 때문이다. 두려움과 믿음은 서로 배타적이어서 같은 마음에 함께 존재할수는 없다. 인간에 대한 두려움, 즉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며 무슨 말을 할까하는 두려움은 함정이 될 뿐 아니라 과로를 초래한다.
-다른이들에 대한 나쁜 태도(마음 가짐).
긴장을 일으키는 열매를 맺게 된다. 내적인 원한을 품고 있을 때, 때로는 거의 무의식적이지만, 시기, 질투, 악한 뜻, 증오심이 그러하듯 신경계통에 파괴를 가져올 수 있다. 바울이 근원적인 이유도 없이 이 파괴적인 정서를 단호히 ”버리라”고 권면한 것은 아니다. 이것들은 죄악이고, 영혼을 파괴하며, 건강을 해치기 때문이다.
수많은 방향에서 우리에게 쏟아지는 피할 수 없는 중압감이 이런 원한들 중의 하나에(또는 모두에) 첨가되면 내적인 긴장이 폭발점에 도달하는 경우 가 많다.
선교분야에서는 연구시간의 부족, 편지, 면담, 가정 일, 방해물 등이 모두 긴장에 자기 몫을 첨가한다. 집이나 상담실에 사람들이 몰려 있어 압박감이 지속되면, 그들은 관련이 있어서거나 호기심에서거나 간에, 반드시 있어야 할 개인의 자유로운 생활과 조용함을 뺏아간다.
여기에다 바울이 ”온 교회들을 돌봄”이라고 불렀던 일, 즉 영혼들에 대한 적합한 관심과 ”당신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양무리”를 위한 영적인 복지를 돌보는 일이 첨가되면 당신은 정신이 아찔하고 몸이 움츠러드는 중압감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특히 힘을 빼고 에너지를 약화시키는 열대성기후에서는, 누가 피로감없이 살 수 있겠는가?
필연적인 결과들
이런 류의 피로와 긴장은 몸과 마음 양면의 혹사를 가져온다는 말은 의사가 아니라도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리고 피로가 지닌 곤란한 특성 중의 하나는 자기를 전달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긴장 아래 살아가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알고 느낄 때 이런 분위기에서 영적인 도움을 준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피로는 육체의 무기력을 나타낸다.
여러 사람들이 고생하고 있는 신경성 소화불량은 그들이 먹은 음식보다는 그들이 하는 생각에 원인이 더 있지 않을까?
우리 나이에 편두통과 불면증의 경향이 있어 적절한 알약에 심각히 의존하게 되는 것은 혹사된 신경계통이 자신을 피로하도록(하나님은 결코 피로를 일으키도록 계획하지 않으셨다) 내 팽개친데 대하여 우리에게 복수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신경성으로 추정되는 많은 질환이 사실은 영적인데 그 원인이 있지 않을까? 건설적인 목표들로 유도되어야 할 에너지가 헛되게 낭비된다.
-정신적 혼란.
찬송가 작가는 이렇게 기도한다. ”여기 저기 허둥대는 불안한 마음을 가지지 않기 바라네.” 그러나 풀리지 않는 내적인 긴장들은 어차피 정신적인 불안과 혼란을 일으키기 마련이다. 이런 마음으로 영적인 일들에 전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마음의 혼란은 지속성을 띄게 되기 때문이다. 기도시간에는 생각을 특별히 조절할 수 없게 되어 기둥은 놔두고 바늘같은 일, 최근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일에 비참하게 매달린다. 잠자리에서도 몸을 가누지 못하고 어찌할지 몰라하는 것은 마음 속의 보다 깊은 불안을 증명하는 것이다.
논리의 절정은 영적인 쇠약함을 의미한다.
몸과 마음이 동맹을 형성하여 영(靈)에 대항할 때 그의 쇠약해짐은 어떠하겠는가? 경험이 많고 냉정한 우리의 적은 불타는 화살로나 압박하는 구름으로나 그가 목적을 달성하는데 가극 좋게 보이는 것으로 자기의 강점을 발휘할 독특한 기회로 이러한 상황을 이용한다. 이리하여 민감하고 심하게 눌린 영혼을 영적인 노예의 신분이 되게 한다 - 즉, 좌절감, 그리고 생활이나 사역에 열매가 없는 것 때문에 억눌려 고민하게 한다.
만병통치약
이러한 감옥에서 나오는 길이 있는가, 다시 말해서 구원받을 현실적인 가능성이 있는가?
하나님이 우리의 생활에서
피로와 긴장을 없애주심으로
우리의 정돈된 생활이
하나님의 평화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게 해 주실 것을 기대하는 것은
신기루를 좇는 일에 불과한 것인가?
자신과 하나님께 처절하도록 정직해질 준비가 된 사람들, 열쇠를 찾으려고 깊이 열중해 있는 사람들이 찾을 ”탈출로”는 있다. 구원의 길을 따라 나아가는 데는 다음의 단계들이 필요로 되는 것 같다.
-하나님을 다시 발견함.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복잡한 인격성의 가장 깊은 필요에 응하는 길이다. 하나님이 해결책 그 자체이시며 하나님의 계시가 관여된 일에 우리가 뛰어들 진실한 준비가 되었을 때 그 계시를 허락하실 것이다. 지나간 시대의 성도들에게는 그들의 현재를 억누르고 있는 필요에 정확히 알맞도록 점진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다.
우리가 필요하는 것은 엘 샤다이(El Shaddai /모든 일에 넉넉하신 하나님), 우리가 자신의 불충분을 의식하는데 대해 측량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하신 분,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계시인 것이다.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이 너무 작다는 것, 다시 말해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 의 개념과 지식이 너무 작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 본성의 복합성과 연약함을 처리하시기에는 부적당하다. 우리는 보다 큰 하나님을 소유해야 한다. 하나님의 풍성한 자원을 이해하는 대신 우리의 불충분을 확대하는 것은 해로울뿐만 아니라 죄가 된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죄”이기 때문이다.
모세는 자신이 부족하다는 말을 되풀이하다가 하나님을 노하게 하지 않았던가? 출애굽기 4장 14절에서 모세의 태도는 자기를 부르신 하나님의 모세가 책임을 성취하는데 필요한 설비를 그에게 공급할 것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다는 뜻이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함을 통해서 보다 크신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 일에는 시간이 걸린다. 평탄한 지름길은 없다. 에베소서 1장 3절, 베드로후서 1장 3절, 고린도전서 3장 21절 같은 깜짝 놀랄 단어들을 깊이 생각하라. 우리의 부족을 위해 충분한 정도 이상으로 이 자원들을 이용할 수있음을 믿으라.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그가 그 필요에 대처할 풍성한 만물을 갖추어 놓으셨다. 육체나 마음이나 영혼의 어느 영역에 있는 필요라해도 이에 넉넉히 대처하신다.
배고픈 군중에게 먹일 빵이 없다는 제자들의 문제가 그리스도에게는 걱정할 만한 일이 되지 못했다.
“그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심이라.”그는 언제나 알고 계신다. 우리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확신을 되찾게 되면 피로는 사라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긴장이란 우리가 불충분한 하나님을 소유할 때만 발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낱 죄인으로서의 자신,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자신을 인식하면 구원의 길을 따라 가는데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질수 있는 짐 이상을 지도록 하나님이나 사람에게 요구를 받고 있다고 느끼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고전 10:13)라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확신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가 질수 있는 짐의 한계를 알고 계시다. 성경이 가르치고 또 우리가 믿는다고 고백한 것처럼, 그리고 이 말에 의의가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명령하신 모든 일들을 할 능력이 있다.”그대가 만일 이 일을 하고 하나님께서도 그대에게 인가하시면 그대가 이 일을 감당하고”(출 18:23).
이 구절은 영속적인 원리이다. 우리가 해야할 일을 모두 하기에는 충분치 못한 시간들이라고 불평하지는 않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낮이 12시간이 아니냐?”이 말은 우리가 성취해야 할 임무마다 그것을 성취할 시간이 있다는 것을 명백히 의미하는 것이다. 수많은 우리의 활동들 중 어떤 것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이라기 보다는 스스로 부과한 일들일 가능성이 크며 당연히 중단되어야 한다.
우리가 눈에 띄게 자신을, 그리고 자신의 기량을 경시할 때, 다른 사람이 우리에 대해 이와 똑같이 말하는 것을 들을 때 우리의 불성실이 현저해지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보다는 인간의 인준을 확보하는데 더 신경을 쓰지는 않는가?
영적인 외모를 유지하므로써 영적인 것을 얻으려는 노력으로 인해 굉장히 피로해지는 것은 아닌가?
자기 연민에 빠지기 일쑤는 아니며 자주 소리내어 우리 자신과 고된 운명을 탓하지는 않는가?
그러나 베드로에게 하신 깜짝 놀랄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은 자기 연민은 본질상 사탄의 일임을 명백히 하셨다(마 16:23).
자아란 한낱 죄인인 것이 사실이며 우리에게 문제를 일으키는 참된 근원은 자아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마음의 보좌를 포기하지 않는데 있다. 그리스도의 깃발이 인간 영혼의 망루 위에서 나부낄 때 피로는 청명(淸明)에게 자리를 내준다.
구원을 향한 세번째 단계는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계속 구조를 받기 원한다면 태도의 급진적인 변화, 곧 순수한 마음의 재생이 따라야만 한다. 정신적인 자세가 변함없이 남아있는 한 긴장도 계속될 것이다. 우리가 하는 노고에 중압감을 느낀다고 해서 우리 자신을 동정하거나 변명하는 대신, 이제는 더 이상 부드럽게 피할 수 없는 약점으로 보지 말고 나무랄 만하고 불필요한 죄로 보아야 한다.
우리는 중압감을 더 이상 우리를 몰아부치는 짐으로 보지 말아야 하며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충만함을 전시하기 위한 진열대로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가 하시는 말씀을 듣게 될 것이다.”이제 내가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출 6:1).
이제 우리의 눈이 자신에게서 멀어져 하나님께 고정된다. 우리의 연약함이 많으면 많을 수록 우리가 그의 능력으로 일할 때 그에게 더 큰 영광이 돌 아갈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의 변화, 마음의 갱생은 어떻게 오는 것일까?
어떻게 그런 마음을 일으킬 수 있을까?
그것은 정확하고 목적있는 의지의 선택으로 인한 결과이다.
당신은 모든 책임의 짐을 그리스도께 가져가 거기 남겨둘 것을 선택하는가? 당신은 근심과 두려움이 영원히 마치는 것을 선택하는가?
그렇다면 바울은 권면한다.”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엡 4:23),”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롬 12:2).
이 일은 분명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에 대한 응답으로써 우리 안에 이루실 일이다. 디도서 3장 5절은 이 일이 성령의 사역임을 나타낸다.
우리가 자신을 변명하고 책임을 벗어나려고 하기를 한번에 모두 기꺼이 끝내버리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전체로 던져버리면 길이 열려지고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하시는 기적을 일으키시게 된다. 우리는 그리하여 영광스러운 주님과 그의 한량없으신 자원을 찬미할 정도로 사물들을 바라보게 되며, 하나님이 ”그의 넘치는 은혜”를 펼치도록 기회를 드리게 될 때 우리의 연약함을 기뻐하기조차 한다.
다시 말해서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던 마음”의 항상 넘치는 양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이 일이 초자연적일 것이라는 점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처음부터 끝가지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어쩌면 성령께서 주 예수의 돕는 은혜를 우리에게 실현시켜 주실 것을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분은 우리 안에 함께 거하셔서 영혼의 일상적인 그리고 시시각각의 필요들을 해결해 주시며 긴장과 피로를 제거해 주신다. 그가 마음의 안식을 약속하지 않으셨던가?”내게로 오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정규적인 기분전환과 평온은 육체적인 수준에 가치있는 공헌을 할 것이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됨을 알찌어다”(시 46:10)는 구절은 이 달음질하는 시대에서 우리가 거의 마음에 두지 않는 법규이다.
”사람이 자기에게 일으킨 대부분의 문제거리들은 침착하고 조용할 능력이 없는데 기인하는 것이다”라고 파스칼은 쓰고 있다. 만일 우리가 기분전환을 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의도하시는 것보다 더 바쁜 것이다. 주 예수는 산정(山頂)의 고요를 계속 구하셨다. 그는 제자들 에게 기분전환(relaxation)을 위해 따로 떨어져 지낼 필요성을 마음에 새기게 하셨는데 그의 충고를 무시하면 우리 자신이 손해를 입게 된다. 한 임무에서 다른 임무로 옮길 때는 한가한 마음을 가지는 능력을 탐내도록 하자.
최근에 하나님의 신자들 중의 한분이 자기를 나타내보이는 한 문장으로 기도를 끝냈다.”유쾌하게 새날을 맞겠습니다.”유쾌하게 !
피로감도 없고 떨리는 긴장도 없이 - 충분하신 하나님 안에서 완전한 휴식을 취하는 마음일 뿐이다.
제 2장 마음의 변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립보서 2장 5절).
인간의 마음은 온갖 도덕적이고 영적인 전투가 벌어지는 전쟁터이다. 마음은 죄를 향하는 유전적인 성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연상태의 마음은 하나님께 적대시하며 하나님의 법에 순복하지 않는다.”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
이러한 운명적인 무능함을 인식하며 바울은 로마에 있는 신자들에게 권한다.”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롬 12:2).
그는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는 것”을 그의 목적으로 삼았다(고후 10:5).
그가 빌립보인들을 격려한 것을 보면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라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이 완전히 변화되어 예수의 마음을 정확하게 반영하게 되는 것을 우리의 지고한 목적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본 장의 첫 머리 구절에서 바울은 굉장한 도전을 주고 있는데 본 장은 아마도 신약에서 가장 그리스도론을 잘 다룬 장이며 이로써 바울은 도전에 힘을 더하고 있다. 다른 해설가들이 이 구절을 여러가지로 번역했으며 각 번역은 진리의 다른 양상을 나타낸다.”당신 자신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반사시켜라” -라이트후트”당신의 생애를 주관하는 추진력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과 꼭같이 되게 하라” -캐쉬”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기질을 소중히 간직하라”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마음이란 그의 전체적인 내면의 기질, 그의 사상, 욕망, 동기, 그리고 그의 생활을 주관하는 추진력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 마음, 곧 그리스도의 기질을 조금 나타내는 것이야말로 냉소적이고 물질주의적인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그처럼 미약한 감명을 끼치는 이유가 아닐까?
사람들은 그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릴만큼 가치가 있는 것을 우리 생활에서 거의 볼 수가 없다. 슈트아트 홀든 Ⅱ세 박사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세상은 우리를 보는데 우리가 세상으로 하여금 믿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에 세상은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며 또한 믿지 않는다.”자연적이고 육적인 마음과는 완전히 대조를 이루며 세상의 반대편에 속한 그리스도 마음을 나타냄으로써만 모든 것을 희생할 가치가 있는 무엇인가를 우리가 소유하고 있다는 확신을 사람들에게 줄 수 있을 것이다.
이 뚜렷한 구절은 그리스도의 마음이 성육신(인간의 몸을 입은)의 상태와 성육신 이 전의 상태 양면을 통해 비슷하게 나타났음을 보여준다.
성육신 이전의 상태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빌 2:6, 7).”형체”라는 단어는 여기서 본질적인 속성들을 가르키는데 사용되었다. 단순한 외적인 모습이나 외모가 닮았다는 뜻이 아니라 본질적인 신성(神性)을 가르킨다.
성육신 이전에는 그리스도 - 마음이 어떻게 나타났는가?
그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셨다. 다시 말해서 이에 따르게 되는 주권, 탐욕스럽게 붙잡아야 할(또는 파악해야 할) 것,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붙잡아야 할 그 주권을 가질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다. 그대신 그는 자기를 비우셨다.
자기기권의 탁월한 행위를 통하여 그는 모든 영광을 단념하셨고 자발적으로 어떤 제한들을 받아들이셨으며 그의 주권을 베일로 가리셨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중재인이 되시고자 하셨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비움이 그의 신성(神性)을 버리는 뜻이라는 암시는 없다. 비우는 것은 노예의 형체를 취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고 특별히 언급되어 있다. 아버지와 함께 신성에 있어 같은 지위에 있음을 수줍어 하셨지만 그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분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포기할 수 있었던 그리고 포기한 몇가지 것들이 있었다. 하나님의 권세들을 비우지는 않는 반면 그 권세들을 사용하지 않기로 결심하셨다.
벤젤의 제안은 이러하다.”그는 충만함에 머물러 계셨으나 마치 텅 빈 것같이 견디셨다.”그는 자발적으로 그의 주권을 밖으로 전시하는 것을 포기하셨으며 그의 속성들 중의 몇가지를 독립적으로 행사하는 것을 포기하셨다. 절대주권자 대신에 노예가 되었다.
그 영화로운 형체, 그 견딜 수 없는 빛
그리고 위엄의 멀리 빛나는 불꽃이여,
그걸 가지고 천국의 높은 의회 탁자에,
삼위일체의 중간에 앉으시는게 당연하네.
여기서 우리와 함께 있기 위해, 그는 버리셨네.
영속되는 날의 궁정을 위해
진흙의 어두운 집에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을 택했네. -밀톤
성육신의 상태
그는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7, 8).
그는 정말 사람들같이 되셨다. 감각을 자극하는 모든 일에 있어 - 듣기, 모습, 행위, 생활방식 - 그는 진실로 사람이었다. 인간 본성의 모든 연약함과 죄없는 약점들이 있었다.
그러면 그가 육체를 입고 계실 때, 그리스도의 마음이 어떻게 나타났는가?”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그의 내적인 주관의 처리 내지 양도는 극한의 자기부정과 자기포기였다. 하기야 이것이 불명예의 가장 깊숙한 곳에 그를 개입시키긴 했다(사형수로 십자가를 지심을 의미 -역자 註). 그의 겸손은 신성(神性) 안에 있는 그의 지위를 포기하는데 그치지 않고 인간성(人間性)에 관여된 지위마저도 버리는데 이르렀다.
우리 주님이 자기굴복을 통해 취했던 하향의 단계가 그의 구속사역의 효용성을 높이는데 이바지한 것임은 분명하다.
그는 구유에서 태어나 경멸받는 마을의 어느 노동자 집에서 사시지 않아도 되었고 마을 학교에 다니며 얼굴의 땀을 흘려 생활비를 벌지 않아도 되었다. 그는 자원하여 가장 낮은 곳을 택하시므로 그의 제자들에게 기대하는 마음자세를 명시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영광의 보좌로부터 수치의 십자가로 인도해 갔던 그 마음을 소중히 간직하고 반영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마음이 나타나게 되기까지는 그 거쳐야 할 과정이 있었다. ”... 으로 여김받는” 것에서 출발하여, 자기비하에 이르게 되었고, 자기헌납으로 절정을 이루었다.
이 세가지 마음의 자세는 모세와 바울의 생애에서도 현저하게 나타난다.
”여김받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다.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히 11:26).
바울은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고 하였다(빌 3:8).
이전에는 그에게 가장 큰 자랑이었던 것이 그리스도 까닭에 해로 여기게 되었다(빌 3:7). 바울과 모세의 생애에 따랐던 모든 일은 이런 마음의 자세에서 생겨났다. 이들은 자신의 권리들에 집착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그 권리들을 기꺼이 포기하였다.
”자기비하.”
그리스도는 자신을 낮추사 ”노예의 형체”를 입으셨다.
모세는 자신을 낮추어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 - 노예 유목민 - 과 함께 고난받는 길을 택했다(히 11:25).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즐겨 불렀다.
”자기 헌납.”
그리스도는 잃어버린 인간성을 구속하기 위하여 ”죽음,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선택하셨다.
모세는 자신을 잊는 사랑으로 이렇게 기도했다.”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주옵소서”(출 32:31, 32).
바울은 필사적인 사랑으로 이렇게 썼다.”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 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2, 3).
이 성경구절에서는 우리와 비슷한 정열을 가진 사람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마음을 실제로 나타내 보이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마음 자세를 보다 명백하게 이해하며 주님의 생애를 주장해온 추진력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대부분의 남자와 여자가 진심으로 사모하는 일들에 대하여 주님은 어떤 태도를 취했나 숙고해 보아야 할 것이다.
세상적인 마음은 지위와 권력을 탐하며 그것을 움켜지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지 한다. 신앙적인 써클에 있어서 조차 지위를 놓고 부당한 다툼을 벌이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마음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의 모든 특권을 벗어버리고 모든 화려함과 권력을 거절하셨으며 자기 피조물들의 조롱을 받으셨다.”이 사람이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우리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세상적인 마음에 있어서 부(富)야 말로 어떤 값을 지불하고라도 얻어야 하며 비록 누군가가 그 추구과정에서 벽에 부딪힌다 해도 얻어야 할 최고선(最高善)인 것이다. 재정적으로 사례비가 적은 연고로 그리스도의 중대한 일들은 일군이 부족하여 쩔쩔매는 반면 이익이 많은 전문직이나 사업들은 붐비고 있는 것을 보라.
미국의 어느 상당히 영향력있는 성직자직이 공석중이었을 때 지원자가 250명이나 되었다!”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고후 8:9)
주님의 마음과는 얼마나 다른가.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를 받으려는 것이 세상적인 마음의 특징이다! 고되고 힘든 일을 피하려 한다. 이것이 부(富)를 그처럼 바라게 하는 요인 중의 하나이다. 부(富)는 다른 사람의 봉사를 보장받을 수가 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그가 하신 말씀에 나타나 있다.”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것이 주님의 기쁨이었다.
사무엘 로간브렝글(Samuel Logan Brengle) 박사는 뛰어난 미국 대학생 이었으며 그 해의 수석졸업생으로 대표연설을 했다. 졸업에 즈음하여 어느 영향력있는 강단에 초청을 받았는데 그 곳의 차기 강단을 맡을 자로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만족하지 않았다. 사람들과 접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는 복음을 좀 더 퍼뜨리기를 갈망했다.
이 결정의 순간에 구세군에 대한 소식을 들었는데 그 당시로서는 소문이 별로 좋지 않게 나 있었다. 그러나 그 기관이 영국의 하류층의 사람들에게 이룬 업적과 빈민가에서 얻은 승리에 대하여 읽고 자기의 갈망하는 마음을 만족시킬 수 있는 일로 생각했다.
그는 자기 교회를 사임하고 런던으로 항해해 갔으며 윌리암 부쓰(William Booth)장군의 휘하에서 사역을 하게 되었다. 그는 결국 사역에 응하였으나 그의 역량을 시험해보기 위하여 20여명의 후보생들과 함께 훈련요새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들 대부분은 비록 열성으로 가득차 있기는 했어도 공식 교육은 받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가 첫번째 맡은 일은 산더미같이 쌓인 동료들의 진흙 구두를 닦는 일이었다. 진흙을 털어내면서 그의 마음에는 굉장한 전투가 벌어졌다. 그가 일류교회를 버리고 런던에 온 것이 이 일을 하기 위해서 인가?
마귀는 그가 얻은 승진에 압력을 가해 왔으며, 그가 유혹자의 음성에 거의 굴복했었을 때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의미 심장한 성경구절이 그의 마음에 주입되었다.”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그는 순간적으로 적의 교활함을 간파하고는 진심에서 외쳤다.”주여, 당신이 수건을 가져다가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으실 수 있으셨다면 저는 솔을 가지고 후보생들의 더러운 구두를 닦을 수 있는게 분명합니다.”겸손이 승리를 거두었으며 세계적인 사역을 통해 천배나 증식될 생애의 기초를 놓게 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면으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입증하고 있는가?
세상적인 마음은 고난이나 체면손상에 관여된 일을 꺼려하여 피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될 때는 고난이나 체면손상이라도 사실상 자초하셨다. 고난과 수치의 전형(典型)인 그 고통스러운 십자가에서 죄수로 죽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다.”나는 받아야 할 밥티스마*가 있다”고 말씀하셨고 또한 ”그 이루기까지 내 고통이 어떠하랴”고도 말씀하셨다.
* 밥티스마(BAPTISMA)는 헬라어로서, 우리나라에서는 「세례」, 혹은 「침례」로 번역, 교회에 따라 선택 사용하고 있으므로, 그 복잡성을 피하고자 원어로 표기함.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요한 18:11).
그리스도 마음은 본질적으로 세상의 마음과는 너무 반대여서 완전한 개혁이 없는 한 여간해서 나타나지 않는다.
그 마음은 그를 어디로 인도했는가?
십자가로 인도해 갔다. 만일 우리가 그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 마음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해갈 것인가? 별 도리없이 십자가로 인도해 간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말고는 아무것도 이 급진적인 변화를 일으키기에 충분할 만큼 영향을 끼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독교의 상당수가 십자가를 잃어가고 있다. 십자가를 공격하는 일이 멈추어졌다. 십자가는 이제 더 이상 우리 삶의 방식에 깊이 돌진해오지 않는다. 주님의 시대에 헬라인들처럼 우리 시대 철학의 군호(암호)는 자기개발과 자기향락이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자기헌납과 자기희생에 연관되는데 우리 생활에서는 이들이 화음을 이루지 못하는 때가 너무나 흔하다. 예수께서 ”죽기까지 순종하시게 되었을 때” 이것은 마치 그의 생애의 궁극적인 종말인 것처럼 보였다. 사실은 반대로 생명의 시작이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갈보리에서 죽어 발아를 시작하자 - 다시 사셨다 - 오순절의 삼천명과 후속되는 시대의 이루 말 못 할 사람들에게서 생명이 싹트게 되었다.
영적인 열매를 맺는데는 다른 법이 없다. 우리는 세상적인 마음에 없어서는 안될 일들을 하기 위하여 모두를 위한 단번의 죽음을 각오해야만 한다.
우리가 죽기로 동의할 때에만 다른 사람들의 생애를 통하여 다시 살게될 것이다. 매일 십자가를 지는 것은 그리고 자기비하와 자기헌납을 통하여 우리 주(Master)를 따르는 것은 매혹적인 전망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용기를 가지고 이 일을 할 때에 사무엘 루터포드가 말했듯이 십자가는 단지 새의 날개정도의 짐밖에는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얻을 것인가?
내부로부터 그 마음을 빚어낼 수가 있을까?
그 마음이란 흉내를 내는 과정인가?
누가 그리스도의 크고, 숭고하고, 수정같이 맑은 성품을 흉내낼 수 있었을까?
천사장 라파엘일망정 흉내낼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는가?
다음의 권고가 주는 힌트에 그 비결이 있지 않을까?”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다시 말하면 다른 사람이 우리 안에서 일하도록 하는 것이다. 자신을 양도한 신자들 안에 그리스도의 내적인 기질을 재생산하는 일은 성령이 하시는 가장 중요한 사역이 아닌가?
성령의 열매는 그리스도의 마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갈 5:22, 23)
세상적인 마음을 십자가에 못박을 것에 기꺼이 동의하고 성령의 성결케 하시는 능력에 과단성있게(맹목적으로가 아니라 뜻을 이해하며-역자주) 양도할 때 그가 기적을 이루실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향상을 이룩하는 정도에 따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변화를 받게 될 것이다.
제 3장 고난의 목
”세째 하늘 ...가시”(고린도후서 12장 2절, 7절).
신약계시가 인간 마음이라는 은밀한 통로, 곧 인간의 개성을 통하여 대부분 우리에게 전달된 것은 신약계시의 독특하고 귀중한 모습이다. 신약계시는 구름으로 부터 위엄있는 천둥을 통해 내려온 것이 아니다. 대부분은 사람들의 이름들이 서명된 연속된 편지들을 통하여 인간의 정신에 소속된 통용어로(디모데후서는 특별히 디모데의 정신이 통용하는 말로) 전달되고 있으며 이 통용어는 비애, 희망, 염려, 열의, 갈망, 사랑을 깊숙히 포용할 수 있다.
-H. G. 모울 주교가 디모데후서에 대하여 앞의 문단에서(고린도후서 12:1-10) 우리는 바울의 내면 생활에 대하여 그 성역을 잠시나마 상세히 엿볼 수 있었다. 이런 특권으로 인하여 우리는 그를 헐뜯었던 사람들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들이 반복해서 바울의 사도권에 도전했음으로 바울은 그의 마음을 노출시키게 되었던 것이다(11절).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비록 연약한 사람이긴 했으나 이렇게 썼다.”내가 만일 이러한 별 중요성이 없는 내밀(內密)을 세상에 알렸다면 나 자신을 경솔하고 멋적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바울은 확실히 이와 똑같은 남자다운 어색함을 느꼈을 것이지만 그의 직분을 입증할 필요성이 그로하여금 사랑하는 고린도인들과, 그리고 그들을 통하여 우리들과 이런 친교를 나누도록 유도했던 것이다. 깊은 예민성을 지닌 남자가 어쩌다 한번 나타내는 일들은 가장 깊은 경험들이다.
바울은 두가지 대립되는 경험들을 우리에게 말해주는데 하나는 높아지려는 유혹이고 다른 하나는 억누르려는 경향성이다. 그는 이 대조적인 경험들이 영광의 주님께로 부터 받은 단 하나의 문장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균형을 이루게 되었는지 보여준다.
”세째 하늘”
2절에 있는 실마리를 따라 나가면 바울의 세째 하늘 경험이 대략 제 1차 선교여행 기간에 일어났던 일임을 알 수 있다. 리스트라에서 죽은 채로 버려졌을 때 경험했을 가능성이 있다.
인간의 언어로는 이해될 수 없는 희귀하고 빛나는 경험들이 있는데 이것이 그중의 하나이다. 바울은 하나님이 충만하게 계시되어 있는 영역으로 옮겨졌다.”그가 거기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4절).
그러나 이런 황홀상태의 경험은 하나님의 택함받은 심부름꾼에게 위험을, 다시 말해서 제나름대로 처리하는 방법을 가질 위험을 초래했다. 바울이 영적인 교만에 굴복할 극한의 위험에 처해있었던 것은 자신이 언급한 말에도 분명히 나타나 있다.”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7절).
지성(知性)이라는 위대한 은사를 소유하는 것과 특별하고 비상한 경험을 향유하는 것처럼 인간을 자기 중요감에 부풀게 하는 것은 없다. 그리고 영적인 자만보다 더욱 확실하게 영적인 유용성의 자격을 박탈당하는 일은 없다.
바울에게 허용된 계시의 그 풍성함이 그가 섬겨야 할 사람들로 부터 그를 고립시키기는 쉬운 일이어서 하나님은 그의 사역이 제한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하여 평등하게 만드는 요소를 그의 생활에 보내었다. 우리의 깊은 영적인 체험들을 다른 사람에게 자세히 이야기하는데는 그리고 특히 우리의 영적인 성공을 이야기하는데는 대단히 심각한 위험이 따른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일 때가 있으나 이 때는 반드시 동기들에 대한 주의깊은 정밀검사가 따라야 한다. 50년 동안 하나님께 복음전도자로 위대하게 사용된 어떤 분이 이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그의 생애에 대한 탁월한 이야기를 말해달라는 요청을 거절하였다. 그는 하나님께만 속한 어떤 영광을 훔칠 교묘한 유혹을 깨달았던 것이다. 성령의 능력이 그의 생애에 계속 머물러 있기를 열망했기 때문에 그는 이전의 승리들을 잊어버리려는 노력을 애써 실행했던 것이다.
이 일은 특혜를 입은 세 제자들이 변화산 상에 천막을 치도록 허락을 받지 못한 일을 상기시킬 것이다. 그들은 그 영광스러운 비젼을 귀신들린 소년의 경련과 바꾸어야만 한다. 바울도 역시 그가 발광하는 인간성에게로 보냄을 받는 하나님의 사자(使者)가 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골짜기로 내려가야만 한다. 산은 골짜기가 깊은 것만큼만 높다는 것을 그는 배워야 한다. 영적인 경험들을 통해 높이 올라가면 갈수록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과 자신을 더 깊이 동일시 해야하는 것이다.
”가시”
이 자서전적인 일견(一見)에는 고의적인 말조심이 따르고 있다. 사도 바울은 단호한 목적을 가지고 세째 하늘의 위치나 성격, 거기서 그가 들은 말, 그리고 그가 본 것에 대하여 침묵을 지킨다. 마찬가지로 그가 지닌 가시의 성격에 관하여서도 흉금을 털어놓지 않는다. 이렇게 하므로 이 부대적인 사건에서 우리 생각을 다른데로 돌려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불변하는 원리들에 모든 관심을 집중시키게 한 것을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그가 만일 우리들과는 다른 자신의 개인적인 가시를 자세히 설명하였다면 그가 누린 하나님의 보상이 우리들의 것이 될 수 있다고 믿을 준비가 덜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에 따르면 그의 경험은 모든 시대의 신자들이 위로와 힘을 얻을 수있도록 대표적인 경우가 되어야 했다.
가시라는 단어의 뜻은 ”가시, 말뚝(stake), 가시나무”를 말한다.
이 가시라는 단어는 그가 찔린 말뚝의 고통스러운 개념을 전해준다고 생각되어 왔다. 그 가시의 성격에 대해서는 안질, 말라리아, 편두통, 간질, 언어장애, 인상적이 못되는 풍채 등 모두 확정적이 아닌 여러가지 추측들이 있으나 격심하게 고통스러운 육체적이거나 기질적인 어떤 것이라고 말할 수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도덕적이거나 영적인 악을 제거해 달라는 기도에 응답을 거절하신 일은 결코 없으시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그를 상하게 하고, 겸손케 하고, 제한시켰다. 처음에 그는 이 가시를 장애가 되는 제한이라고 보았으나 후에 참된 통찰을 통해 그 가시를 보았을 때 하늘의 유익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의 사역을 성취하는데 가시가 방해가 된다고 느끼며 바울은 충동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그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내가 세번 주께 간구하였더니”라고 그는 고백했다. 그는 가시가 왜 있어야 하냐고 하나님께 묻기를 멈추지 않았다 - 그는 단지 모두에게 유익이 되도록 그 가시가 떠나가기만을 바랬다. 그의 간구는 생각나면 이따금 하는 기도가 아니라 마음 깊은 곳의 울부짖음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가시는 그에게 격렬한 고통을 일으켰으며 그를 시달리게 했다. 그는 그것이 마치 목적이 없이 제멋대로 보내진 것인양 행동했다. 그는 그때까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목적없는 고통같은 것은 없으며 하나님은 결코 변덕으로 행하시지 않으심을 배우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제 바울은 응답받지 못한 기도라는 문제에 직면하여 자신을 발견하였다. 하나님은 그의 탄원에 동정을 보내시지 않으셨는가? 하나님은 그가 간구하는 상세한 말에는 응답하시지 않았지만 그의 마음의 울부짖음에는 응답하셨다. 바울의 가장 깊은 욕망은 이 가치로 말미암아 그의 사역이 방해를 받게되지 않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 가시가 남아 있다면 그의 사역이 풍성해질 것이라는 확신을 그에게 주심으로 응답하셨다.
성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는 방탕한 그녀의 아들이 도덕의 시궁창이던 로마로 가지 않게 해달라고 끈질기게 기도했다. 그런 일이 없었다면 그는 더 깊은 죄에 던져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상세한 요구는 응답되지 않았다. 그런데 어거스틴의 여행은 그가 밀라노로 가게 되는 첫 계단이었음이 판명되었으며, 거기서 그는 하나님께 사로잡히게 되었다. 하나님의 방법은 종종 이러하다.”우리는 큰 일을 이루려고 힘을 구하지만 순종을 배우도록 연약하게 지음을 받는다. 보다 위대한 일들을 할 수 있기 위해 건강을 구하지만 보다 좋은 일을 하도록 연약함을 주신다. 인간의 찬양을 얻을 수 있도록 능력을 구하지만 하나님의 필요성을 느끼도록 미약함을 주신다. 우리는 생을 즐기려고 모든 것들을 구하지만 모든 것들을 즐길 수 있도록 생을 부여받는다.
하나님의 선물
바울은 자신의 값진 경험으로부터 그의 가시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내 육체에 ... 가시를 주셨으니”라고 했는데 이 말 배후의 생각은 ”호의로 주셨다”는 뜻이다! 사탄이 바울의 시련에 관여된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 가시는 자기를 쓰러뜨리려고 보냄을 받은 사탄의 사자(使者)라고 바울은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7절).
시험하도록 시키는 사람은 하나님이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욥의 경우에서와 같이 하나님은 사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종을 체질하도록 허락하시는 것인데 시험하는 가시가 바울에게 다달았을 때에는 ”사탄의 사자”가 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 되었다. 가시는 그에게 베풀어진 것이지 부과된 것은 아니었다. 사탄의 악의(惡意)라고 생각했던 것이 바울의 보다 넓은 사역을 내다보고 하나님이 베푸시는 축복의 선물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하나님의 사랑은 멀리를 내다보신다. 하나님께는 그의 자녀의 영적인 복지와 성장이 그들의 육체적인 위안보다 훨씬 크고 중요하기 때문에 고난의 사역이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현재의 고통이 영원한 유익을 산출 한다면 그 고통을 반드시 없애는 것은 아니시다.”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히 12:11).
우리의 개인적인 가시가 신체장애, 몸의 불구, 기질적인 연약함, 정신적인 장애일 수도 있다. 알렉산더 휫트 I세 박사에게는 그가 사생아였다는 사실이 평생의 가시였으나 그 가시가 동정심을 얼마나 발달시켰는지 모르며 그의 사역을 얼마나 풍성케 했는지 모른다! 우리에게 요점이 되는 것은 우리의 독특한 가시를 통해서 하나님의 호의어린 선물을 깨닫느냐 아니면 바울처럼 가시를 밀어내는데 온갖 노력을 기울이느냐 하는 것이다.
주목해야 할 일은 바울이 자신의 가시를 제조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가시가 언제나 자녀를 훈련시키는 하나님의 방법인 것은 아니다. 뾰족 뾰족한 침이 달린 침대를 만들어 거기서 자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지만 우리는 영적인 수도승이 되려고 부름을 받은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가시를 우리에게 주실 그때 받아도 시간은 충분할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
바울은 그의 계속되는 시련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식별하게 되었다.”그것이 없었다면 나는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자고(自高)했을 것이다”(7절).
우리들 중에서 가득찬 컵을 옮길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하나님의 큰 은사를 받은 사자(使者)에게 엄습할 자만에 대한 특별한 유혹들을 아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영적인 파선에서 그를 구하실 목적이셨다. 제거해 달라고 하나님께 끈덕지게 간구했던 가시가 자신의 생애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의 일부였음을 깨닫게 되자 바울의 모든 태도가 변했다. 그의 입술에서는 그 청원이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무엇이 이 끈덕진 간구자를 순복하는 고난자로 변화시켰는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말씀이다.”그가 내게 말씀하시기를...”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말할 기회를 드렸으며 하나님의 목소리가 은밀한 곳의 조용함을 통해 그의 영혼에 스며들자 마음의 격동은 끝났다. 이제 그는 하나님의 뜻을 한숨이 아니라 노래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가시 안에 있는 은혜로운 하나님의 목적을 이해했는가?
하나님의 보상
하나님의 목소리는 바울에게 하나님의 보상에 대한 확신을 전해주었다.”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신지라”(9절).
비록 가시가 제거되지는 않을 것이었지만 이에 못지않는(평등한) 보상이 적절한 은혜와 능력이라는 선물로 주어졌다. 우리는 고난의 용광로에 처해지기까지는 우리 안에 있는 것을 결코 알 수 없으며, 하나님이 은혜로 예비하신 것을 온전히 알아 거기 의지할 수도 없다. 금은 불 가운데서만 제련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불은 절대로 그의 성도를 상하게 하지 않는다. 불이 그들을 만들어낸다. 하나님의 아들의 동료가 되는 것을 보장해 주는 축복의 불이다! ”내 은혜 - 활동중인 내 사랑 - 가 네게 족하다.” 이 말은 바울이 간청하는 그 은혜를 주시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그가 의지해야 할 이미 주어진 은혜를 가르킨다.
초기 영국의 케스 교단에서 가장 위대한 성경 교사들 중의 하나였던 웹피플이라는 성직자는 젊은이였을 때 해변에 갔다가 그가 극진히 사랑하는 자녀들 중의 하나를 갑자기 잃었다. 장례식에서 돌아오자 이 충격을 받은 아버지는 서재에서 무릎을 꿇고 이 슬픔의 시간에 하나님의 은혜가 족하게 해주실 것을 간구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위로가 마음에 찾아오지 않았으며 계속 눈물을 흘렸다. 하나님의 말씀조차 그에게 아무 소식을 전해주지 않았다. 얼마가 지난 후 벽난로 위에 길게 내려진 이 말씀을 맺힌 눈물을 통해서 다시 읽었다. 처음으로 그는 대문자로 인쇄된 한 단어를 주목하게 되었다.”족하다(IS sufficient)”그는 성별된 눈으로 읽었다. 그리고 외쳤다.”주여, 나를 용서하소서, 나는 당신의 은혜가 내게 족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당신은 언제나 내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My grace is sufficient for thee)」 나는 족한 은혜를 인하여 당신께 감사드리며 그것을 이제 제것으로 삼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적절할 뿐만 아니라 필요한 때를 위해 유용하다. 우리는 은혜를 구할 필요가 없다. 은혜는 이미 주어졌으며 우리가 받아들일 때에 머물게 된다. 이 언급이 얼마나 웅대하며 그 범위가 얼마나 넓은가!
실패한 결혼, 마음에 들지 않는 직장, 무정한 가정, 육체의 연약함과 고통, 선교 생활의 압박감, 압도해 오는 비애 중에도 은혜는 족하다. 우리의 무능력이 하나님의 족한 은혜를 붙들게 하는 원인이 된다면 이는 위장된 축복들인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훈련에서 그가 보인 반응을 통하여 우리에게 찬란한 본을 보여준다.”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9절)라고 그는 확신있게 주장한다.
가시가 그 날카로움을 조금도 누그러뜨리지 않았고 그 괴롭힘의 격렬함을 덜게 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보상하시는 은혜가 그로 하여금 침울한 장송곡에서 승리의 노래로 바꾸어 부르게 할 수 있었다.
세상의 철학은 ”치료될 수 없는 것은 견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치료될 수 없는 것은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연약함, 고통, 궁핍, 그리고 문제거리들 조차 즐긴다”라고 빛나는 간증을 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도 놀라운 것임이 판명되어 그는 그 은혜에 온전히 의지하게 되는 싱거운 경우들조차 환영하였다.”나는 기뻐함으로 자랑하리니 ... 나는 즐기기조차 하노니” - 내 가시를!
폴란드 귀족의 아내로써 좌절과 실망으로 생애를 일관해 온 엠마 페킨스카의 승리를 거둔 믿음에 대하여 그녀의 전기(傳記) 작가는 눈에 뛸만한 찬사를 보냈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그녀는 하나님이 거절하신 일들로 부터 웅장한 꽃다발을 만들어냈다.”
마침내 바울은 가시의 경험을 통하여 자신이 영적인 교만의 위험으로부터 구조되었을뿐 아니라 영적인 능력의 새로운 보고(寶庫)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음을 발견하였다. 그는 자신의 연약함을 하나님의 능력과 바꿀 수 있었다. 하나님의 능력은 그의 연약함을 없애버리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 연약함이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완전하게 되었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고 하나님이 언급하셨다.
그의 고난과 고통이 희생적인 봉사에서 왔다고 구실을 삼아 변명하는 대신, 또는 제거해 달라고 구하는 대신 바울은 이제 하나님의 적절한 은혜와 능력을 붙들게 되었고 지금까지 보다 훨씬 큰 탐험들을 시도하게 되었다. 그는 사탄이 그에게 사용하려했던 그 무기의 방향을 돌려 적을 향했으며 그의 주님을 위해 영광스러운 승리를 거두었다. 이렇게 하여 세째 하늘의 환희의 경험은 귀찮은 가시에 대한 영광스러운 보상 앞에서 그 빛을 잃었다."
제 4장 낙담(의기소침)의 원인과 치료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구하옵나니 즉시 나를 죽여”(민수기 11장 15절)”여호와여,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열왕기상 19장 4절)”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요나 4장 3절)
역사상 그 어느 때 보다도 오늘 날 신경쇠약과 정신적 기능저하(또는 우울)가 많이 발생하고 있음은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 두번에 걸친 세계대전과 계속되는 긴장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영향을 받았음은 의심할 나위 없다. 하나님의 종들이 자연적이며 영적인 법을 위반한다면 낙담(의기소침)의 기간을 면제해 준다는 약속은 없음을 성경의 연구가 나타낼 것이지만 이전에도 그런 일은 없었다.
그리스도인은 매우 교활한 적을 가지고 있는데 룻 팩슨 양의 잘 어울리는 말을 빌린다면 교활한 적이 노리는 삼중(三重)의 목표는 그에게서 부(富)를 빼앗는 것, 그의 행보에서 그를 꼬여내는 것, 전쟁에서 그를 무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해 그가 사용할 수 있는 무기가 의기소침(낙담)과 기능저하(억압) 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우리들 중에서 누가 비참과 절망의 이름없는 감정 - 정의할 수는 없으나 지극히 현실적인 - 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있겠는가? 이런 경험을 한 것이 우리만이 아님을 깨달을 때, 그리고 하나님의 남자들과 여자들이 우리 앞에 있는 것과 똑같은 그늘진 좁은 길을 갔다는 것을 깨달을 때, 그들을 위한 구원의 길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를 위한 구원의 길이 있음을 깨달을 때, 우리는 큰 위안을 얻는다.
낙담의 심연(深淵)
죽게해 달라고 기도했던 성경에 나타난 인물들은 하나같이 눈에 띄게 성공한 선지자들임은 의미심장한 일이 아니겠는가?
바로 이러한 탁월성이 아마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여 보다 작은 우리 인생들의 본보기로 삼으신 이유일 것이다. 사실 이것은 믿는 자에게서 살려는 의욕을 뺏아 가는 기능저하(억압)의 심각한 경우이며 여기에는 뿌리 깊은 심층의 원인들이 있기 마련이다.
온유한 모세는 하나님과 자기 민족을 위하여 엄청난 일들을 성취하였으며 오래동안 믿을수 없을 만한 짐들을 졌었다. 그의 지도력 아래 한 떼의 노예가 하나의 조직된 국가를 이루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보살피심과 예비하심을 수없이 경험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끊임없는 불평과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 모세를 억압하였음으로 고민중에 울부짖었다.”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질 수 없나이다... 나를 죽여 ...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인간의 변덕으로 인해 마음이 짓눌려 인내의 한계에 이르렀고 이를 넘어 완전하고 극심한 실패감에 빠져들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자신의 완성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완성에 대한 책임은 없게 하셨음을 모세는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의 앞에는 수십년에 걸친 놀라운 사역이 놓여 있음을 그는 꿈도 꾸지 못했다.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들을 멸망시키는데 하나님의 도구로 역할을 맡았던 한 세대의 가장 극적인 장면에서 막 벗어난 참이었다. 그때 그는 갑자기 약해져서 그의 놀라운 용기는 힘을 잃었고 아주 최근에 그가 쳐부셨던 여인의 얼굴을 피하여 도망했다. 홀로 서있는 로뎀나무 아래서 그는 불평했다.”여호와여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요나는 비겁하게 도망하였다가 바다 밑의 경험을 하고는 회개하여 돌아서서 하나님의 메세지를 사악한 니느웨 성에 전했다. 그는 그 큰 성이 먼지와 재 중에서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보고 놀라고 당황했다. 그러나 그는 기뻐서 뛰는 대신 박나무 아래 몸을 늘어뜨리고 한탄하였다.”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낙담의 범위
이 분들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은 주위의 환경을 생각해 볼 때 나타나는 놀라운 사실은 각 경우마다 의기소침하기 보다는 의기양양해야 할 이유가 더 많았다는 점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역사하는 굉장한 능력을 애굽에서 그리고 광야에서 직접 보았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증거했으며 그 결과 배반한 나라가 부복하여 죄를 자백하게 되었다. 요나는 인간 역사에 기록된 가장 많은 군중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데 사용된 도구였다.
그러면 왜 의기소침하고 실망에 빠져 있었나?
문제는 적이 이 파괴적인 유도 미사일(낙담)을 언제 우리에게 발사할지 결코 알 수 없다는데 있다. 발사할 만한 최소한의 이유가 있을 때 발사하는 것이겠지만 일반적으로 그것이 출현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선행 조건들이 있기 마련이다.
낙담의 진단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각 사람의 경우마다 낙담하게 되는 심중의 배경이 있음이 나타났다.
-생리학상의 배경.
모세는 일상의 행정처리와 판결에서 오는 끊임없는 피로로 말미암아 육체적인 인고(忍苦)가 지나쳤다. 힘(Virtue) - 마음의 에너지 - 이 그가 백성의 원망을 듣고 문제들을 상담하는 동안 계속 그에게서 빠져나갔다. 이백만의 불만을 품은 백성으로 이루어진 한 나라와 하나님 사이에 연락을 유지해간다는 것은 초인적인 임무였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예민한 통찰력으로 모세가 자기 사역을 성취하려는 고귀한 노력으로 인해 닮아 없어지고 있음을 간파했다. 우리 자신들은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 값을 언제나 잘 매기는 것은 아니며 종종 육체와 신경의 자원이 심각하게 마르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비록 우리의 이드로들이 주는 충고에 언제나 감사하지는 않을 때가 많지만, 이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신 사자(使者)일수도 있는 것이며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다.
다음으로 엘리야의 정서적인 긴장과 피로가 갈멜산에서의 고독한 대결 기도의 맹렬함, 이스르엘까지 50여km를 달린 일, 금식 등에서 왔음을 생각해 보자. 그는 정서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고갈되어 있었고 전체로 보아 격노한 이세벨의 위협에 맞서기는 적합하지 않았다.
요나의 의기소침 역시 육체적인데 근거하였다. 답슨(C. C. Dobscn)은 하나님이 요나를 다루신 방법에서 그 원인이 되는 실마리 - 일사병의 기미 - 를 찾는다. 필라델피아나 시드니 만한 도시에 전도를 한 후 정서적으로 소모되고 육체적으로 힘을 다 썼으며 태양열에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요나는 절뚝거리며 성을 빠져나와 불타는 태양광선을 피할 오두막을 세웠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비하신 박나무가 시든 후에 ”해는 요나의 머리에 쬐매 요나가 혼곤하여”(4:8)라고 기록되어 있다. 육체적인 원인들은 이와 같았으나 선지자 각자에게는 의기소침했던 다른 이유도 있었다.
-이기적인 배경.
모세는 그가 무너지는 순간까지 시종일관 그의 백성을 돌보는데 사심없이 일했다. 하나님의 진노가 우상숭배하는 사람들에게 불타 올랐을 때 모세는 만일 그들이 버림을 받는다면 하나님의 책에서 자기 이름을 말소해달라고 기도했었다. 그러나 이제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민 11:11-15).
백성들의 영적인 필요가 극에 달했음을 잊은 채 하나님을 비난하며 자기 연민의 술잔치에 빠져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성취할 수 있게 하셨던 모든 일을 잊어버리고 자기 말만 늘어놓게 되었다.
엘리야 역시 반발의 시기를 맞아 하나님을 비난했으며 이상한 자기환멸 중에 외쳤다.”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그의 자만심을 산산이 부숴뜨리는 강타를 얻어 맞았다.”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히 특심하오니”라고 불평했는데 그 뜻은 그의 열심에도 불구하고 그가 ”낮춤을 당했다”는 뜻이다. 그는 ”오직 나만 남았거늘”이라고 두번 반복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헌신에 있어 그가 느낀 고독감을 나타내고 있다. 그도 역시 자기연민에 휘말려 들었다.
요나의 경우도 다를 바 없었다. 그가 하나님을 비난하게 된 원인은 하나님의 은혜와 관용에 대한 분개에 있었다! 정말 문제가 된 것은 니느웨 성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이 선지자로써의 자신의 명성을 산산이 부숴버렸다는데 있었다. 요나는 심판을 예언했는데 하나님은 자비를 행하셨다. 그의 명성이 사라졌으므로 요나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결론을 내렸다.
각 경우에 있어 죽으려는 욕망은 하나님과 그의 영광 대신 자기와 자기 관심사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삼은데서 발생하였다. 그 형태는 다르다 해도 모든 의기소침은 본질상 자기과시가 아닐까?
-영적인 배경
그런데 이들은 모두 진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으며 육체적 배경이나 이기적인 배경은 그들이 의기소침해야 했던 오직 하나뿐인 원인은 아니었다.
각 경우마다 깊은 영적인 실망, 실패감이 있었다. 모세가 자기를 폭발시킨 근저에는 하나님과의 불일체감, 즉 하나님의 동정에서 벗어나 있다는 느낌이 깔려 있는데 당시로서는 드물지 않은 감정이었다.
이 감정과 짝을 이룬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새로워진 불만과 불평에 대해 모세가 느끼는 신랄한 실망이었다. 그는 실패했으며 임무를 감당하기에는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하나님의 목적을 낱낱이 성취하지 못한데 대해 낙담한 상태에 있었다. 전체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음을 목격하기 보다는 죽는 편이 나았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에 참된 신앙의 철저하고도 영속되는 부흥이 일기를 갈망하여 기도하였으나 갈멜산에서 이루어진 그럴듯한 약속은 오래동안 오지 않던 비가 내리자마자 사라져 버렸다.
감동은 표면적이고 덧없는 것일뿐이며 하나님을 위한 열성에 있어서는 완전히 혼자뿐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그처럼 단단히 믿었던 갈멜산에서의 입증은 헛된 것임이 분명했다. 그는 실패했으며 이런 상황 아래서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요나가 회개한 것과 그 후 큰성 니느웨에 가서 선지자의 사역을 감당한 것은 귀중하고 값진 성과였다. 그는 여호와께 순종하여 40일 후에 니느웨가 그 사악함 때문께 멸망할 것이라는 경고의 소식을 전했다. 그러자 그들이 회개하였으므로 하나님은 마음을 바꾸었고 요나를 실망시켰다. 그가 어떻게 다시 그 사람들을 대면할 수 있겠는가? 가장 나빴던 것은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그 사람들을 다시 대면하도록 시키실 것임을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던 일이다. 왜냐하면 그는 몸소 하나님의 은혜와 관용을 체험했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떻게 자기 메세지를 다시 확인할 수가 있겠는가? 그는 선지자로서 실패했고 이대로 모두 끝내기를 바랐다.
하나님의 규정
하나님께서 지나치게 일한 그의 종들을 각각 다루시는 과정에서 그의 부드럽고 인격적인 특징이 은혜스럽게 모습을 나타낸다. 어느 경우에도 그들의 기도는 하나님께 응답을 받지 못했는데 하나님은 그들의 참된 동기를 이해하셨으며 이 간청이 단지 일시적인 자기연민의 표현임을 아셨기 때문이었다. 각 경우마다 하나님은 특정한 해결책을 가지고 계셨다.
-모세를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70명의 성령받은 장로들을 보내어 그의 짐을 나누어지도록 하셨고 모세가 영적인 사역에 전념할 수 있도록 자유를 주셨다. 하나님은 마음의 욕망을 채워주심으로 백성의 불평을 가라 앉혔다. 반면에 그들은 영혼이 빈약해지는 희생을 치루어야 했다. 하나님은 언약의 확실성을 새롭게 하셨으며(민 11:23) 모세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셨다.
-엘리야를 위한 치료 방법은
우선 하나님이 그와만 이야기하실 수 있는 외딴 곳으로 그를 철수시킨 다음 그에게 자신을 새롭게 계시하신 것이었다. 다음으로는 두번의 긴 잠을 주시고 하나님의 부엌에서 구운 빵으로 두번 식사하게 하시고, 천국의 우물들에서 멀리 길어 온 물을 두번 마시게 하셨다. 엘리야는 이어서 용기를 북돋는 확실성을 부여받게 되는데 혼자라는 생각과는 거리가 멀게도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000명의 다른이들로부터 정신적인(도덕적인) 후원을 얻게 되었으며 이들 중의 한 사람을 동료로 얻었다.
-요나를 위해서는
하나님께서는 보호하기 위한 박나무를 준비하셨으며 그 나무가 신들었을 때에 그가 보인 삐뚤어진 동정을 통해서 지금은 회개한 니느웨 성의 주민들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와 동정을 그에게 나타내 보이셨다.
오늘날을 위한 교훈들
하나님의 영웅들에 대한 전기들은 우리에게 교훈과 격려가 되도록 쓰여진다. 그리고 우리가 연구해 온 이야기 장면들은 이상하게도 오늘 날 우리의 필요에 적합한 교훈들로 가득차 있다. 하나님의 경애하는 종들은 하나님의 육체의 법을 어기면 반드시 벌을 받거나 의기소침의 맹공격을 받는다.
육체와 신경의 자본을 지나치게 소모하는 것은 비록 주님의 봉사 분야에 극도로 필요한 것이라 해도 적에게 우리의 영혼을 공격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지나치게 소모하는 일에는 위험이 따른다.
의기소침은 영적인 실패 후에 뿐만 아니라 영적인 성공 후에도 올 수 있다.
우리의 적으로부터 추격을 받지 않으려면 육체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새롭게 되기를 추구해야만 한다.
우리가 잠시나마 우리의 중심을 하나님에게서 자신에게로 바꾸어 놓으면 정신적인 질병에 자신을 열어놓게 되는 결과가 된다. 우리는 이드로들(장인들)의 충고를 무게있게 다루어야 한다. 일을 배당하여 위임하고 얽매인 몇가지 일에서 벗어나면 영적인 낙관론을 복구시키는데는 시간이 많이 들지 않는다.
육체적으로 미리 예방조처를 취하면 일사병 - 또는 학질(신경통이나 마음의 괴로움을 말하는 것은 아님)을 막을 수 있다.
우리가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 일들이 확실히 실패한 것을 보고 실망할 때 이를 믿음의 방패로 막지 못한다면 우리 영혼에 비참한 영향을 미쳐 자기연민과 실망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실패는 종종 실제라기 보다는 외관상일 때가 많다 - 엘리야와 칠천명의 경우가 그러하였다.
일찍 잠자리에 드는 것과 식성을 바꾸는 것은 압박을 받는 어떤 경우에 안정을 가져다 주는 일이 많다.”나는 할 일이 많아서 자러 가야 한다”고 불란서의 철학자 르 메이트러는 말했다.
하나님은 그의 환자 각각에 대하여 개별적으로 처방하신다.
하나님은 억눌린 영혼들 각각을 회복시켜서 활용성이 더욱 증가된 영역에 두시기를 기뻐하신다.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엡 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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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장 영적 하향(下向)과 복구
”백발이 얼룩얼룩할찌라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 (호세아 7장 9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 네가 불의함을 인하여 엎드러 졌느니라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 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하시고 선한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주께 드리리이다 우리가 앗수르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하며 말을 타지 아니하며 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지은 것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 신이라 하지 아니하오리니 이는 고아가 주께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음이니이다 할찌니라 내가 저희의 패역을 고치고 즐거이 저희를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저에게서 떠났음이니라(호세아 14장 1절-4절).
하나님과 생동력있게 일치하는 데서 벗어나기란 쉬운 일이다. 이처럼 영적인 조절이 불가능해지는 것은 반드시 고의적인 일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이런 상태가 처리되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가히 비극이라 할 수 있겠다. 히브리서 13장 20절, 21절의 기도에 나타나 있는 내용은 영적으로 조절이 불가능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평강의 하나님이 ... 너희를 온전케 하사...”후반절 ”너희를 온전케 하사”가 뜻하는 바는 ”너희를 바른 조정에 맡기겠다”는 말로 빠진 팔을 맞추는 것으로 비유될 수 있겠다. 이 때 필요한 가장 급선무는 신체의 남은 부위에 도로 갖다 맞추는 일이다. 그 다음에야 비로소 몸의 생명력이 그 팔에 부어져 제 참된 기농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아마도 우리에게 현재 필요한 일은 정확한 영적인 조정에 도로 맞추어져 그리스도의 몸에서 우리의 참된 기능을 다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예언서들 중에서 가장 부드러운 예언자 호세아가 전하는 메세지는 이런 목적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이 메세지는 호세아 자신의 가정적인 비극의 심연으로부터 솟아난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연민의 정과 부드러움으로 일관되어 있다. 우리가 관심을 가진 구절들은 에브라임 지파에게 한 말이며 여기서는 이스라엘 왕국 전체를 가리키는데 에브라임은 이 왕국에서 우세한 지파였다. 이 구절은 그들이 영적으로 하락하게 된 원인을 하나님이 진단하시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표면적인 헌신의 위험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6:4).
우리는 피상적으로 특정지워지는 시대에 살고 있으며 그 결과 우리가 하나님의 메세지에 대한 반응에서 피상적이 되기가 쉽다. 하나님께서 급진적으로 그리고 깊숙이 우리를 다스리도록 기회를 드리는 일은 거의 없다. 실패와 죄에 빠져있다는 확신이 들 때조차 우리는 성령이 우리 안에서 강하게 역사하시므로 죄를 미워하게 되도록 마음을 열지 않는다. 우리는 진지하고 영구적으로 죄의 문제를 다루지 않고 가볍게 우리의 죄성을 따른다. 우리의 새로운 결심이 마치 중심의 회개와 단념을 대신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하나님의 불평은 에브라임의 인애가 휘발성이어서 아침 구름이나 쉬없어지는 이슬같이 사라진다는데 있었다. 우리가 최선이나 최고를 원하지 않는다든지 또는 더 잘하려고 결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결심이 곧 시든다는 것이다.
에브라임의 변덕이 하도 심하여 하나님조차 어찌할 바를 모르게 한듯한 인상을 받는데 이로 인해 그는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고 외치시게 되었다. 우리의 변덕과 피상적인 태도 역시 하나님을 난처하게 할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변덕장이 시몬이 성령의 영향으로 반석 베드로로 변화된 것을 기억한다면 격려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부분적인 성별(聖別)의 위험
”에브라임이 ...뒤집지 않은 전병(cake)이로다”(7:8).
이 말은 이스라엘에게는 익숙한 비유였다. 밖에만 구어지고 안에는 반쯤 설은 과자를 만들어 창피를 당한 경험이 없는 주부가 어디 있겠는가? 여기서 말하는 과자는 철판에 굽는 과자로 뒤집지 않아서 한 쪽은 타고 다른 쪽은 설은 과자이다. 많은 사람들이 성격상으로 이와 같다 - 어떤 면에서는 지나치게 개발되었고 다른 면에서는 부족하다. 진전과정이 어떤 분야에서는 뛰어나지만 다른 면에서는 지연되고 있다. 우리들 중 상당수가 부분적으로만 성별(신성화)되어 있다. 왜냐하면 우리 삶의 어떤 부분들은 성령의 불을 향하여 뒤집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이는 성경 지식에는 강하지만 영적인 은혜에는 약하다. 어떤이는 본성은 원만하고 관대하지만 기질상 난폭하다. 어떤이는 정통을 찾는데는 강하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에는 연약하다.
한 면만의 개발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문제인 것이 사실이다. 예수만이 완전하게 성별되었으며 성격상 진실로 균형이 잡힌 분으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시다.”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엄위하심”의 완전한 균형을 본다. 그가 ”뒤집지 않은 과자”라는 말을 들을 수는 결코 없는 것이다.
우리가 좋아하는 어떤 형태의 일은 지나치게 하고, 가려지고 마음에 별로 들지 않는 임무들은 등한히 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의 유혹이다. 우리의 강점들을 개발하며 약점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학자는 탐욕스럽게 정신의 양식을 공급하지만 육체는 등한히 한다. 성경은 우리 성격상의 연약한 점들을 개발하여 ”하나님의 모든 뜻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있게 설 수 있도록” 하라고 지시하신다.
우리가 재확인해야 할 사실은 과자 아래서 불은 아직 타고 있다는 것이다.
과자를 뒤집어 빵굽는 과정을 완성시킬 시간은 아직 있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 성격상의 불완전하고 완성되지 않은 부분을 성령의 불을 향해 뒤집어 그가 우리를 온전히 성별하시게 하는 일이다.
불완전한 분리의 위험
”에브라임이 우상과 연합하였으니 버려두라(let himalone)”(4:17).
”에브라임이 열방에 혼잡되니”(7:8).
그리스도를 위해 세상들과 해야 할 접촉을 못하게 하는 것은 잘못된 분리이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것은 한 접시에는 소금을 다른 접시에는 고기를 담아 내오는 것을 생각하신 것이 아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고립하여 세상을 떠나 마귀를 이롭게 하라고 제안하신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리스도 자신이 이런 방식으로 분리하지 않는다고 바리새인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셨다.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조소했다.
그러나 올바르고 의무적인 분리가 있다. 에브라임은 그의 우상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해야 하며 거룩하지 않은 나라들로부터 분리해야 한다. 에브라임과 그의 우상들에 대한 언급은 자주 오해를 받아 하나님께서 마치 ”그래, 에브라임이 자기 우상을 가지겠다면 가지도록 버려두라! 나는 그와 관계를 끊는다”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있지 않은 바로 그것이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11:8).
이것이 하나님의 한탄이시다.
하나님이 하시려는 말은 에브라임을 홀로 버려둔다는 말이 아니라 유다에게 우상숭배의 이같은 나쁜 본을 따르지 말라는 경고였다. ”그가 만일 자기 우상들을 따라간다면 그를 따르지 말라.” 다른 사람들을 따라 노예처럼 세상으로 향하거나 보다 낮은 기준들에 적응하기는 너무도 쉬운 일이다.”버려두라(let him alone)”이것이 하나님의 경고이다. 세상과의 협정들은 깨어져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은 고립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절연상태에서 벗어 나오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죄인들에게서 분리”되셨다. 그러나 그의 분리는 도덕과 영적인 것이지 육체적인 것은 아니셨다.
무의식적인 악화(惡化)의 위험
”저는 이방인에게 그 힘이 삼키웠으나 알지 못하고 백발이 얼룩 얼룩할찌라도 깨닫지 못하는도다”(7:9).
백발(gray hairs)은 느끼지 못하고 알지 못하게 찾아오며 육체의 활기를 경고하는 표식이다. 하룻밤 사이에 백발이 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영적인 하향(下向)도 반드시 의식되거나 갑자기 오는 것은 아니다. 타락은 결코 결심하고 하는 것이거나 고의적인 것이 아니다. 영적인 전망과 열중은 반드시 하향하게 되는 경향성이 있다. 에브라임이 악하게 되는 것(惡性化)은 우상숭배로 이끌고 간 신성치 못한 동맹으로 시작되었다.”앗수르[앗시리아]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하며 말을 타지 아니하며 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지은 것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 신이라 하지 아니하오리니”(14:3).
언제나 그렇듯이 우상숭배는 부도덕으로 인도되었고 그 결과 나라의 전체 조직을 약화시켰다.
경고는 명백히 밝혀졌으며 우리는 영적인 삶의 미숙기에 속한 표징들이 나타나는지 아닌지 발견하는데 힘써야만 한다. 영적인 쇠약이 벌써 많이 진전돼 있는데도 체면만 차리고 있을 수 있는게 사실이다. 우리 자신에 진실한 상태에 대하여 모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란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살펴보는 일을 게을리한 결과일 것이다. 우리가 관심만 가지면 그 거울은 이상과 실제 사이의 굉장한 차이를 우리에게 나타내 보여줄 것이다. 타락(Back-sliding)은 종종 하나님의 기준으로 자신을 측정해 보려고 너무 덤빌 때 시작하는 수가 있다.
에브라임의 비극적인 상황은 ”그가 알지 못했던 것”이었다. ”삼손은 여호와께서 그를 떠나신 것을 알지 못했다” -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을 모르는 비극이다.
흰 머리를 해결하는 흡족하고 영구적인 방법은, 오직 한가지 물들이는 것이 아니라 뿌리로부터 뽑아내는 것이다.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명령을 받았다.”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 7:1)
하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뽑아 줄 수 없는 청결이 있다. 우리가 우리 몫을 할 때 하나님은 응답하신다.”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겔 36:25).
하나님의 치료법
하나님은 질병을 진단하시는 일을 멈추지 않으시며 은혜스럽게 구제법을 처방하신다. 에브라임에게 하셨던 것과 꼭같이 우리를 진단하시고 처방하신다.
첫째로, 하나님은 회개할 것을 명하신다.
막연하고 일반적인 고백이 아니라 특정하고 개인적인 감정을 토로할 것을 명하신다.”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하시고 ... 드리리이다”(14:2).
우리의 죄들은 개별적으로 범하게 된 것이고 그러므로 이름을 그 앞에 낱낱이 대야 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둘째로, 함정에 빠뜨리는 동맹군들에 대한 포기가 따라야 한다.
무자비한 앗수르 사람들과의 협정 그리고 금지된 애굽의 말(馬)을 의지한 것이 에브라임의 파멸을 초래했다. 이런 동맹군들은 영원히 필요없게 되어야 한다. ”앗수르(앗시리아)가 우리를 구원치 못할 것이며, 우리는 말을 타지 않겠다”고 말하라(14:3). 그리고 모든 우상들을 완전히 포기해야한다.”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지은 것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의 신이라 하지 아니하며”(14:3).
하나님은 당연히 그의 것인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어떤 것이라 해도 살도록 놔두시지 않을 것이다.
세째로, 하나님은 ”여호와께 돌아오라”고 에브라임을 초대하신다(14:2).
그가 돌아올 때 그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기다리시며 베푸시는 환영이 어떠하겠는가!”내가 저희의 패역을 고치고 즐거이 저희를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저에게서 떠났음이니라”(14:4)
결과로 생기는 축복들
회복된 친교와 하나님이 약속하신 재조정의 축복들 중에서 세가지가 뛰어나다.
-그는 신선을 약속하신다.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14:5).
에브라임의 표면적인 인애는 아침 이슬같이 사라졌으나 하나님의 새롭게 하시는 이슬로 말미암아 보충된다. 동양에서는 이슬은 갱생의 주된 근원이며 이것이 없이는 식물은 죽는 것이다. 사치품이 아니라 필수품이다. 전에는 메마르고 열매가 없었으나 이제 새로 조정된 생명은 이슬을 흠뻑 머금었으며 신선하다.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모든 일들이 새롭게 됐다. 그리고 받은 이슬은 주는 이슬이 될 것이다.”야곱의 남은 자는 많은 백성 중에 있으리니 그들은 여호와에게로서 내리는 이슬같고”(미 5:7).
우리의 생활은 연중 끊임없이 새롭게 되며 다른이들은 계속 새롭게 할 것이다.
-이슬의 신선함이 꽃의 향기를 방출한다.
신선함과 향기는 함께 거한다. 가뭄이 닥치면 꽃의 향기는 떠나간다. 호세아를 통한 약속은 ”저희는 소성할 것이며 ... 그 향기는 레바논의 포도주같이 되리라”(14:7)는 것이다. 향기는 예민한 것이지만 향기가 없는 것은 쉽게 간파되며 향기가 있는 것은 놓칠 수가 없다.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시간을 보냈을 때 그의 명백한 향기를 지니고 다니게 되었으며 사람들은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음을 알았다.” 그의 향기는 숨길 수가 없었다.”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고후 2:14, 15).
그러나 신선함과 향기는 기쁘고 즐거운 것이긴 하지만 그것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다.
-열매맺는 것이 모든 자연의 목적이다.
호세아는 이슬을 보내어 향기를 생산하시는 그 여호와께서 열매를 맺게 하신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14:8).
나무의 조정기능을 벗어난 꺾인 가지는 전혀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 하나님의 조정을 벗어난 신자는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그러나 올바른 조정기능이 회복되면 그는 다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제 6장 양심의 기능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사도행전 23장 1절).
양심의 기능에 대한 무지와 양심의 건전한 행사에 대한 하나님의 규정을 모르는 것은 심각한 영적인 무질서를 초래할 수 있다. 많은 민감한 그리스도인들은 병적이고 연약한 양심 때문에 평생을 절뚝거리며 살아가고 그 양심의 목소리는 삶에 휴식과 안정을 주지 못한다.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진지함과 열의를 보이는 것은 단지 문제를 강조할 뿐이며 끊임없는 자기고발의 상태에서 살게하는 원인이 된다. 이러한 불행한 상태로부터의 구조는 이 주제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전용(傳用)하므로 가능해진다. 진리는 언제나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효능이 있다.
양심은 인간의 도덕적인 본성에 속한 독립된 기능인가?
양심은 오류를 범하기 쉬운 인간의 기계장치인가 아니면 오류가 없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가?
관계된 성경을 상고해 볼 때 양심이란 인간이 선과 악을 구별하게 하고, 도덕적 가치를 깨달아 알게 하는 지(知)와 정(情)의 특별한 활동임이 밝혀진다. 양심은 의지의 행위들에 대해 권장 또는 비난하는 영혼의 증언 및 판단으로 정의되어 왔다. 이런 능력을 가지지 못한 동물들은 죄를 지을 수가 없다. 양심이 없다면 인간도 역시 그가 식별하지 못하는 죄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의 죄를 나쁘다고 정하는 것은 양심의 활동에 의한 것이다. 양심이란 단어는 다른 사람과 연관된 그 한 예로 하나님과 연관된 지식을 뜻하며, 인간이 자기 행위에 대하여 스스로 평가하고 자신을 찬성하거나 반대함에 있어 하나님과 함께 입회한다는 개념을 전해준다.
철학자 칸트는 이를 ”지상 명령”이라고 했다. 양심은 영혼의 신경 본부이기 때문에 도덕적인 즐거움과 고통에 예민하고, 행위에 대한 도덕적인 자질을 판단하는 것과 그 자질을 고려하여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판단하는 기능을 가진다.
양심은 우리가 점진적으로 획득하게 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질적인 품성의 일부이다.
양심은 초자연적이거나 신적인 것이 아니라 순전히 인간의 능력이며 종종 영혼에 거하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양심은 죄악된 행위로 이끌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은 양심이 악마의 소리일 수도 있다. 양심은 하나님의 소리가 아니라 오히려 영혼에 거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이다.
양심은 아무 일도 계획하지 않는다. 양심은 온도계와 같아서 온도를 알아내고 나타내기는 하지만 온도 자체를 변경하거나 만들어 내지는 않는다. 양심은 인간의 도덕적인 본성에 있어 가장 신비스러운 그리고 가장 높은 기능이다. 그리고 늘상 순종할 때 가장 설득력있는 권위를 가지고 말한다.”우리가 양심에 순종할 때 최고의 행복 속에서 살게 된다. 우리가 불순종할 때 밥티스마 요한처럼 양심은 외친다. 「그 일은 옳지 않다!(It is not lawful /마 14:4)」라고.”
바울은 이방인도 양심을 가지고 있다고 확실히 말한다. 그들 안에 한 법이 있어 일정한 행동 과정을 취하게 하거나 단념하게 한다(롬 2:15).
카나다 북서부에 사는 한 인디안이 자기 양심의 활동을 개성있게 묘사했다.
”양심은 내 안에 있는 모서리가 세개 달린 작은 물건으로 내가 잘못을 저지를 때는 그것이 돌기 때문에 마음을 대단히 아프게 한다. 그러나 계속 잘못을 저지르면 그것이 너무 많이 돌아 모서리가 달아져 더 이상 아프게 하지 않는다.”
죤 번연(John Bunyan)은 그의 저서 「거룩한 전쟁」에서 인간영혼(Manso-ul)이라는 도시의 형태로 인간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시민중의 하나를 양심씨(氏)라고 부른다. 악마가 그 도시를 빼앗았을 때 전 주인 엠마누엘에게 속한 것은 모두 파괴하려고 한다. 양심씨(氏)를 죽일 수 없자 깊은 지하감방에 가두어 그의 소리가 사실상 나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엠마누엘이 인간영혼 도시를 도로 빼앗고 확신이라는 노장이 귀문(Ear Gate)을 습격하자 양심은 대단히 흥분하여 지하감방에서 전 도시가 그의 음성으로 뒤흔들리도록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큰 소리로 엠마누엘에게 충성할 것을 외치고 그의 권위에 대항하는 반역을 비난하였다.
여기서 양심은 실행기구가 아님을 주목해야 한다. 양심은 인간이 바른 일을 하게 하며 나쁜 일을 그치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양심은 그 내린 판단을 전달하고 적절한 감정을 산출해 내지만 그 판결에 따라 행동하는 일은 인간의 의지에 맡긴다. 양심은 이 이상 책임을 질 능력은 없다.
양심의 제한성
”나는 내 양심에 따라 산다”는 말은 마치 그로 인한 행동이 자동적으로 옳은 것이기나 한듯 자기만족에 빠져 종종 언급되는 말이다.
그렇지만 양심은 과연 오류가 없는 안내자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함을 얻지 못하노라”(고전 4:4)고 바울은 썼다.
워즈워드는 양심을 ”영혼에 비친 하나님의 가장 상세한 모습이며 세상에서 가장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설명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양심이 그 기능을 바르게 발휘하기를) 힘쓴다는 바울의 주장이 이를 증거한다.(행 24:16)
그러므로 양심에 오류가 없을 수는 없다. 양심은 그 증거하는 도덕적인 행위의 기준에 따라 신실하게 반응하는 가변적 요소이다. 그 기준이 불완전하거나 지극히 잘못된 것일 수도 있으나 양심은 그 정한 기준대로 판결하게 된다.
고대 힌두교인의 양심은 소를 죽이는 일에 대해서는 야단스럽게 항의하지만 그의 자녀를 희생제물로 드리는 동안은 조용히 있는 것이었다.
어느 힌두교인이 영국의 행정관에게”우리의 양심은 과부들이 남편을 장사지내는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태우는 것이 옳은 일임을 말해준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행정관은
「우리의 양심은 당신이 그렇게 하면 당신을 매다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고 대답했다.
이것은 전적으로 양심이 증거하는 도덕적 기준에 관한 문제이다.
용납된 기준이 잘못된 것이면 양심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진 공포의 종교재판과 같은 폐단도 아무 항의없이 받아들일 것이다.
모든 양심은 교훈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 사실이다. 양심의 섬세한 기계장치가 타락으로 인해 균형이 무너졌다. 두 눈의 시력이 정확히 제휴를 맺을 때 총탄이 황소의 눈을 맞출 수 있듯이 양심이 성경과 정확히 제휴를 맺게 될 때만 정확한 도덕적인 판단이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전 말씀을 존중하고 부지런히 공부해야 할 강력한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이다. 시계는 표준시간에 맞추고 조절되어야 하듯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된 무오한 표준에 맞추어지고 조절되어야 한다. 물론 품성의 유일한 표준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우리가 그와 함께 걷는다면 우리의 표준은 전에 없이 향상될 것이다.
양심이 그 알고 있는 정의로운 표준에 순종적으로 반응하는 동안 관습, 습성, 선입관에 의해서는 제한을 받는다. 이들의 구리는 너무나 커서 양심의 소리인 것처럼 보일수도 있다.
관습이 남부인들의 노예제도라는 악에 대해 양심을 그토록 무디게 했음으로 길고도 쓴 교육이 있은 다음에야 포로들이 풀려났다.
바울은 편견과 완고로 눈이 멀어서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양심이 찬성했던 행위의 참된 본성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얼마나 비통하게 회개하였던가!
종종 우리는 원리에 서있다고 생각하지만 편견에 빠져 있을 때가 있다.
양심은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조절되었을 때 옳은 일을 하라고 주장하며, 그릇된 일을 비난하고, 경멸을 받을 때 가책을 일으키고, 유의할 때 평화를 주는 인간 영혼의 감시장치이다.
책망받는 양심
양심은 어떤 목적있는 행위를 책망하기도 하고 명령하기도 한다. 성경에는 각 범주에 속하는 발전의 단계들이 열거되어 있다. 우선 우리 모두를 비겁자로 만드는 책망받는 양심의 가능한 단계들을 생각해 보자.
-연약한 양심은 건강치 못한 병든 양심이다.
지나치게 조심성있고 지나치게 예민하다(고전 8:7-12). 연약한 양심은 양심의 빛에 따라 신실하게 반응하지만 약한 자력을 가진 나침반처럼 영향을 쉽게 받으며 흔들리는 경향이 있다. 연약한 양심을 가진 사람은 어떤 행위가 옳은지 그른지에 대하여 의심하므로 계속 괴롭힘을 당하며 믿음으로 뿌린 것을 불신앙으로 계속 파엎는다. 양심을 위해 순교자가 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죤 웨슬레(John Wesley)는 어느 날 성령이 분명하게 그를 감동하지 않으면 영혼에게 말씀을 전하지 않을 것을 서약했을 때, 양심의 순교자가 되는 일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날이 끝날 때 쯤 킹스우드에 도착해서 그는 영혼에게 전도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러자 그는 전도를 필요로 하는 영혼이 있을 때는 그가 전도하는 것이 잘하는 일이며 그가 기회를 살려 나감에 따라 성령께서 그 기회를 사용하신다는 결단을 내리게 되었다.
양심이 연약해지는 데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대한 불완전한 지식과 그 결과로 인한 불완전한 믿음
굴복하지 않은 의지로 인해 우유부단한 선택을 하는 경우
하나님의 알려진 뜻에 순종하거나 그 뜻을 행하려는 자발성이 있을 때는 지나치게 조심성이 있는 앙심으로 인해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
좋은 믿음 중에서 태도를 분명히 한 행위를 계속해서 재고하는 일은 그만두어야만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사진을 찍고 그 원판을 현상하는데 만족스럽지 못해하는 습성에 빠진다. 그 상황에 관계된 사항을 성경의 빛 가운데서 명백하게 직면하고 성령의 안내를 구하며 자신을 최선의 판단에 따라 결정을 내리는 것이 이를 교정하는 방책이다. 그 후로는 그 문제를 다시 열어 젖히는 일을 단호히 거절해야 한다.
연약한 양심은 더럽혀진 양심으로 변질되기가 쉽다. 그 순진성이 오히려 오염되기 쉽게 만든다.”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고전 8:7).
우리가 만일 양심이 나쁘다고 증거한 행동을 계속한다면 양심을 더럽히는 것이며 양심이 신실하게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 된다. 시계가 멈춘다면 그것은 시계의 잘못이 아니라 섬세한 기계장치를 막은 먼지의 잘못이다. 양심도 마찬가지이며 특히 순전성의 영역에서는 그렇다.”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딛 1:15).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면 심각한 결과들로 가득 차게 된다.”...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 1:19)라고 바울은 경고했다.정화되지 않은 계속적인 오염을 통하여 양심은 습관적으로 악해질 수 있다(히 10:22). 악한 양심의 소유자가 행할 의지를 가진다면 그가 하도록 허락될 것이지만 간언하기는 점점 어려워질 것이다. 악한 양심은 표준을 낮추는데 반응을 보이기 시작하여 악을 선으로, 선을 악으로 보게 되는 자리에 이른다.
일정표에 따라 온갖 범죄를 지어온 어느 밤 도둑이 그가 지은 죄에 대하여는 양심에 아무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으나 다른 밤 도둑이 그에게 맡긴 10불을 썼을 때는 양심의 가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양심의 판정에 대한 습관성의 도전은 양심을 마비시켜 무감각을 낳아 더이상 저항하지 않게 된다. 이런 상태에 이른 때를 바울은 화인맞은, 마비된 양심이라고 묘사하는데 극도로 무감각하고 무신경한 상태이다.”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 4:2).
이것은 무서운 상태이며 - 어떤 호소도 성공할 수 없는 것은 양심이 실제로 갈데까지 가 있기 때문이다.
”악은 소름끼치는 모습을 한 괴물일세
미워해야 할 것, 그러나 나타날 필요가 있는 것,
너무 자주 나타나면, 친해지는 얼굴.
처음엔 참으나 다음엔 동정하고, 그리고 나선 껴안는다네.”-알렉산더 팝(Alexander Pope)-
하향(下向)하는 과정에 유의하자. 순전한 양심이 연약해지고 더럽혀진다. 그러나 악에 대한 포기와 청결케 됨으로 말미암아 그 순전성이 회복되지 않으면, 양심은 이 단계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양심은 더욱 나빠지고 저하되어 그 소유자는 간언도 듣지 않고 악을 더욱 행하게 된다.”내 양심은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는 주장은 순전한 양심이라기 보다는 악을 더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음으로는 최종적인 비극의 단계 - 화인맞은 상태가 온다.
명령하는 양심
이것은 그 무엇보다도 욕심을 내어야 할 상(賞)이다.”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요일 3:21).
양심은 잘못을 책망하는데 신실한 것처럼 바른 일을 명령하는데도 신실하다. 순전한 양심(pure conscience:딤전 3:9/딤후 1:3)은 신실하게 그 의무를 수행함으로 악의 접근에 매우 민감하다.
마차를 빌려주는 업소의 주인이 한번은 순회 동물원에서 짚을 한무더기 샀다. 그의 말들은 안정을 찾지 못하고 불안해 했다. 비록 사자를 본 것은 아니지만 말들은 천연의 적이 이 짚단과 접촉되었던 것을 알아차렸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의 행동을 비추어 충성스럽게 순종함으로써 양심을 순전하고 민감하게 유지할 수 있다. 순전한 양심은 그 표준에 맞는 것에는 반응하고 그 표준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
선한 양심(good conscience)은 모든 일에서 순전한 양심의 명령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행복한 소유물이다(딤전 1:5, 19).
선한 양심의 견책은 기꺼이 받아들여지며 잘못된 것은 제거하고 불충분한 것은 첨가한다는 원칙에 따라 행해진다. 순전한 양심과 선한 양심은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거리낌 없는”(행 24:16)것으로 청명(serenity /마음이 맑고 고요하여 평정을 찾은 모습)과 마음의 안식을 가져온 상태이다.
어떠한 고발도 하나님과의 평화를 부수거나 사람들과의 관계를 망쳐놓지 못한다. 이것을 버린다는 것은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지는 몰라도 너무 높은 값을 지불하는 것이다. 그러나 거리낌이 없는 양심을 얻는 것은 바울에게 있어 계속적인 연습에 달린 문제였다. 그는 자기 영혼을 위한 훈련장을 가지고 있었다. 양심이 그리스도의 피로써 정결해짐을 통해 완전해질 때 그 성취의 절정에 도달하게 된다(히 9:9).
정화된 양심
더럽혀지고 책망받는 양심을 위한 만병통치약은 무엇인가?
성경은 이중의 정화가 필수적이며 가능하다고 시사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 7:1).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Divine Injunction)이다.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은 동굴에서 거주하여 보는 능력을 잃었기 때문에 전혀 보지 못하는 동물들에 대하여 썼다. 동굴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데서 살았던 몇몇 동물들은 시력을 부분적으로 잃었으나 빛에 대하여 천천히 익숙해짐에 따라 점차 시력을 되찾게 되었다.
양심이 비록 죄에 대한 민감도를 상당히 잃었을지라도 그것이 회복되기에 너무 늦은 것은 아니다.
죄악되고 하나님의 뜻에 반대된다고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에서 우리 자신을 정화-분리-하는 과정을 스스로 밟는 것이 그 첫 단계이다. 우리에게 이렇게 하려는 의사가 없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케 되는 체험에서 자신의 자격을 자동적으로 박탈당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모든 알려진 죄를 처리하기로 자신을 단호하게 확정짓는다면,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이 우리의 목적에 대하여 확신을 주시는 것과 그 달성을 가능케 하심을 고려에 넣어도 좋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을 정결케 하는 것은 양심이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정화되기 위한 필수적인 준비과정일 뿐이다. 양심에는 자체의 병폐를 고칠 치료의 능력이 없다.
히브리서 9장 13절, 14절이 양심의 완전한 정화와 갱생을 위한 절대 확실한 처방을 내린다.”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 못하겠느뇨”이 구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바 아직 새끼를 낳은 적이 없는 붉은 어린 암소를 제물로 바치는 일의 특성은 언제나 유효하며 쉽게 감동을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케 되는 것도 이와 같다. 그러나 양심에 상처입은 이스라엘에게는, 우리도 마찬가지이지만, 유효한 제물이 개인적으로 인정을 받아야만 한다.
”귀하고 귀하신 예수의 피
값없이 무한정 흘러 넘치네.
그 피를 믿네, 그 피를 받네.
나를 위한 것이네.”
예수의 귀하신 피는 가장 악한 죄라도 용서받게 하시며 양심에서 즉각적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하신다. 그것이 다시는 우리를 괴롭히지 못하게 하신다. 양심은 풀려난 스프링인양 육신적으로 죄에 접근하는 것을 경고하고 도덕적인 행위의 특성을 판결하는 정상 업무로 돌아온다.
과거의 죄라는 무의미한 압박에서 벗어나 영혼은 마치 풀려난 종달새처럼 노래를 부르며 자기 본래의 본분으로 날아오른다. 성령은 우리의 믿음에 응답하여 더럽혀진 양심에 그리스도의 피라는 강력한 용매를 바르시며 이후로는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거리낌이 없는 양심”을 가지고 살게 하시기를 기뻐하신다.
제 7장 성령과 우리의 장애들
”그러므로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로마서 8장 1-2절).
우리에게 자격이 없고 장애물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지닌 유용성을 제한할 필요는 없는 일이다. 미래가 과거보다 더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기 어려운 상태에서 보잘 것없는 우리의 최선을 다하여 절뚝거리도록 운명지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모든 기질적이며 심리학적인 문제들에서 구원받을 길이 있다. 이것이 로마서 8장에 나오는 선교사 바울의 낙관적이고 만족스런 이론이다.
성문학(聖文學)이나 대중문학 그 어디서도 로마서 7장보다 더 좌절된 생활의 모습이 뼈에 사무치도록 매섭게 잘 그려진 곳은 없다. 선에 찬성하면서도 악을 행하는 심정의 고뇌가 생생한 그림으로 나타난다.”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7:15).”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7:18).
사도는 의지의 역전(逆轉)을 깊이 의식하고 있다. 그의 전 의지는 원치않는 육신의 죄악된 행위들에 대항한다. 그가 그런 행위들을 선택하지는 않으나 유혹의 결정적인 지점에 이르면 의지가 마비된다. 7장 24절에서는 그 절정에 이른다.”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7장에 나오는 구제불능의 비관주의에서 빠져나오면 8장의 영광스런 낙관론에 이른다.”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바울의 연속된 논급이 7장을 벗어나 8장으로 이동해 간다는 것에 동의하기를 꺼려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5장의 제목은 죄의 형벌로부터의 구원이다. 6장은 죄를 폭군으로 소개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 폭군의 권세로부터 구원해 내는 것을 나타낸다. 7장은 신자의 마음에서 벌어지는 내적인 전쟁을 그리고 있으며 죄의 권세로부터 구원해 달라는 그의 외침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그러나 8장에 이르면 그 해결책이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받는데 관계가 있음이 분명해지며 이 논급에서 사도는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전임 대주교 해링톤 리즈(Harrington C. Lees)는 금세기 초기에 발견된 그리이스 문서에서 유래되었던 암시의 뜻을 밝힘으로써 우리에게 큰 공헌을 했다.
커다란 공헌가운데 하나는 우리를 위해 그리이스 문서를 번역해온 사람들의 현대적 발견의 덕분이다.”「정죄함이 없다(No condemnation)」는 단어는 우리가 흔히 해 온 생각과는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이스에서는 이 단어가 아직도 법적인 용어로 사용되지만 형법이 아니라 민법이다. 「정죄함이 없다(No condemnation)」의 뜻은 법적으로 하자가 있는 땅, 불리한 조건, 저당, 한정된 계약, 빌린 땅, 연체금, 현재의 보유권을 압박하는 과거의 저당권 등을 조회하는 행위에 대해 정죄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부동산 거래에서는 이를 정죄하지 않겠다는 자유로운 보장을 받아야 한다. 부동산의 양도를 성사시켜 넘겨줄 때에는 변호사가 「결점이 없다(No drawback)」고 말한다.”
그 부동산에 하자가 있는 한 법적인 소유주는 자기 재산을 충분히 그리고 거리낌없이 즐길 수는 없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 그 부동산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와 연합한 사람들에게는 민법이나 형법상 어떤 종류의 정죄함이나 불리한 조건도 해당되지 않는다.
이제 이것을 원전(元典)에 새롭게 비추어 볼 때 바울 사도가 말하는 의미를 알아채기는 어렵지 않다.
7장에서 그리스도인은 현재의 경험을 속박하고 시들게 하는 과거의 죄와 실패로 말미암아 압박아래 신음한다. 8장이 전하는 메세지는 과거의 영적인 실패가 현재에 불리하게 영향을 미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죄함”-불리함, 무능력, 장애, 손실-이 없기 때문이다.
유일한 자격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받은 특권이므로 우리에게 진실된다. 우리는 더이상 절름거리는 무능력과 과거의 장애들로 절뚝거릴 필요는 없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안에서 그와 연합하므로 옛 생활의 능력은 깨뜨려지며 법으로 깨뜨려지는 것은 아니다. 또한 옛 생활에서 넘겨받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것이 믿는 자를 위한 복음이다.
성경이 말해주고 있는 진리를 보는 것이 한가지 일이면 그것을 우리의 기질과 주위환경에 연관된 개인적인 경험으로 바꾸어 보는 것은 또다른 일이다.
7장에는 ”나(I)”라는 단어가 30번 이상이나 점점이 박혀 있다. 반면에 성령이란 단어는 한번 나온다.
8장에서는 성령이 탁월하게 돋보이는 반면 ”나(I)”는 두번만 나온다-그 다음에 즐거운 연결이 이루어지긴 한다. ”나(I)”라는 대문자를 중심에 두지 않고, 성령을 높이며, 그에게 순종할 때, 죄의 지배로부터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나면 성령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우리에게 전하여 준다. 성령은 하나님의 동력이요 하나님의 자극이다. 다락방의 대화를(요한복음 14-17장) 제외하면 성경의 어느 다른 곳에도 성령에 대하여 본 장에서 처럼 많이 언급하고 있지 않다. 좌절과 실망을 승리와 기쁨으로 변화시킨 분이 성령이시다. 그리하여 8장은 신자에 대한 설명하기를 방해하는 쇠고랑과 과거의 저당권에서 완전히 자유로와진 사람이라고 했다.우리들 중에 누가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나 봉사사역에서 장애나 무능력을 깨닫고 괴로와 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우리는 매번 이들과 부딪히게 된다. 이런 사실이 바울로 하여금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단어적인 언급을 하게 한다.”장애가 없으면 능력도 없다.”인간 본성의 연약함을 입으신 우리의 대제사장이 우리 미약한 감정을 어루만지시는 일을 우리는 얼마나 기뻐해야 하겠는가! 우리가 얽매여 있는 각 결점을 위해 대제사장이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적절한 대비책을 마련해 놓으셨다는 것이 얼마나 기뻐할 일인가! 이제 몇가지 무능력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는데 성령의 활동만이 이 무능력을 만족스럽게 해결한다.
죄를 향한 성벽(8:2)
”죄와 사망의 법”이 우주적으로 작용하여 우리에게 죄를 향한 운명적인 성벽(경향성)을 지니게 한다. 우리들 중에 어느 누구도 거룩한 것을 향하는 자연적인 경향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우리가 가진 모든 덕은... 그 분의 것이다.”이 구절(8:2)은 두 개의 상반되는 법을 나타내는데 보다 높은 법이 보다 낮은 법의 능력을 상쇄하며 무효화 한다. 성령 하나님이 지니신 능력은 죄의 세력을 꺾으며 신자가 그토록 진정으로 만족스럽게 여기는 하나님의 법을 성취하도록 그에게 자유를 주신다.
마치 식물에 있는 생명의 법칙이 지구인력이 아래로 잡아당기는 것을 저지시키고 꽃과 열매로 자신을 표현하게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의 생명의 법”이 죄의 하향(下向)하는 성벽을 무력화시킨다. 그리고 신자로 하여금 은혜들을 자유롭게 표명하게하며,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 죄를 향한 성벽이 더 이상 우리를 무능력하게 할 필요가 없다.
육신의 욕망들(8:5, 6)
인간 본성의 자연적인 욕망은, 스스로는 잘 느끼지 못하더라도 우리 종족의 유전과 죄의 탐닉을 통해서 인간을 타락(저하)시키고 나쁜 길로 인도한다.”육신의 생각”은 거룩하지 못한 야망들과 경쟁들, 교만한 품행, 불친절하고 비판적인 언어에서 스스로를 들어낸다. 우리가 가장 선한 순간에 있어서조차도 육신의 생각이 개입된다.
헌신(committal /몸을 드림, 자기를 위탁하여 양도함)와 명백한 행위와 마음 자세로 말미암아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조절하고 다스리도록 할 때 그가 육신의 기호와 욕망들을 변화시켜 주신다.
우리 마음을 육신적인 일들에 고정시키거나 아니면 영적인 일에 고정시키거나 하는 것은 우리가 선택하는 일이다. 하나님이 우리 대신 그 일을 하실수는 없으시다. 그러나 우리의 연약한 의지를 하나님의 편에 고정시키는 순간 성령이 즉각적으로 응답하시고 힘을 주신다. 육신의 욕망에서 생기는 무능력이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조정이 불가능한 마음(8:9-11)
오스트레일리아의 멜버른에서는 주인들이 휴가차 집을 비운 사이에 십대 록큰롤 그룹이 2주일 동안 무단점령하여 계속적인 파티를 벌린 끝에 집을 수라장으로 만들어 놓았다. 좋지 못한 사람들이 점령(조정)하고 있었다.
육신의 정욕과 세상의 안목으로 인해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자주 변하며, 그리스도께 대한 헌신의 생활에서 떨어져 나가기가 얼마나 쉬운가! 그러나 여기서 성령은 마음의 영원한 관리인-감독자, 검열관, 감시자-로 나타나며 따라서 이와 연관된 성령의 전능하신 힘을 주목하게 된다. 그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예수를 일으킨 자의 영”이시다. 이러한 능력의 영이 우리 마음을 조절하고 계시는 한 무슨 일이나 가능하다. 성령이 조절하시는 곳에서는 무능력한 마음은 없다.
반항하는 적대의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뜻에 반역하는 의지로 행동하는데 친근하다. 죄의 충동을 받아 육신이 그 욕구를 표명하고 옹호할 때 의지는 반역자가 되어 육체와 합작하고 성(城)의 망루를 팔아 넘긴다. 심각한 무능력(무자격)이 여기서 생기지만 성령의 사역을 통한 거룩한 만병통치약이 이에 대비하여 준비되어 있다.”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8:13).
성령은 우리가 그 악한 원리를 계속 수행하는 일을 처리하게 하실 것이며 그의 기쁘신 뜻을 행하려는 의지를 더욱 주실 것이다(빌 2:13).
독자적인 영(8:14)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기를 좋아해요”라고 한 소녀가 말했다. 우리들 모두는 자기의 삶을 경영하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밖으로부터 부과된 어떤 권위에 대해서는 분개하는 유전적 경향성이 대부분의 우리에게 있다. 중생(重生 / 거듭남)했더라도 ”각기 제 길로 가려는” 욕망을 근절시키지는 못한다.
하나님의 아들들의 특성은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인도를 받는 것인데 여기서 아들들이란 아이들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그 신분과 성품과 닮은 점과 특권을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나누어 가지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영의 독립성은 영적인 미성숙이나 영적인 타락을 표시한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복하는 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을 나타내는 특성이다. 우리 삶의 고삐를 성령의 손에 맡길 때 그가 우리를 기쁘게 인도하실 것이며 이러한 무능력에서 우리를 구하실 것이다.
무서워하는 영(8:15-17)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믿음에서 두려움으로 떨어지는 일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며 우리들 중의 더러는 이런 환경에 익숙하다. 청하지 않았음에도 찾아오는 모든 두려움은 마음을 움켜쥐는 경향이 있어서 우리는 두려움의 맹공격 앞에서 무기력함을 느낀다. 사탄은 우리가 아들이 아니라고 애써 설득할 것이다.”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이라고 두번 반복하여 예수님을 시험하였다. 사탄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뢰를 비벼 꺼뜨리기 위해 우리의 소명과 신성화(神性化)를 언제라도 공격할 것이다. 성령은 우리의 영과 연합하여 우리가 사실상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그가 실제로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의 신성화(神性化)는 참되며 가짜가 아님을 증거하신다. 두려움과 믿음은 전적으로 모순되며 성령은 믿음의 영이다. 그가 조절하실 때 두려운 마음의 무능력은 사라진다.
기도없는 마음(8:26, 27)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기도는 대단히 복잡한 영적인 활동이어서 가장 성숙한 성도라야 사도의 진술에 기꺼이 서명(찬성)할 것이다. 우리가 기도하기를 싫어하며, 그 싫은 것을 극복하는 정성이 미약함에도 불구하고 성령이 기도로 도우신다는 보장은 이중(二重)으로 환영한다. 성령은 몸의 연약함에 있어 우리를 보조하실 것이다. 절정에 이르지 못함, 사생활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 집중의 어려움, 육체적인 고통이나 불편-이 모든 것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하나님 역사의 범위에 들어있다. 기도의 영이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실 것이다.
이 영광스러운 장(8장)의 일관된 교훈은 우리가 시달리고 있는 모든 약점이나 무능력은 성령이 역사하시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벌충이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밑줄을 그어야 할 한가지 요점이 있다.
성령은 그가 하실 것이라고 우리가 신뢰하는 만큼만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일하실 수 있다.”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는 말씀은 우주적으로 적용되는 공통된 원리이다. 우리가 만일 만족스럽지 못한 기도생활을 계속하며 성령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실 것을 분명히 믿지 않는다면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의 전능하심에 쇠고랑을 채우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해주실 것을 믿든 모든 일을 하실 것이다.
그를 온전히 신뢰하므로 그에게 영광을 돌리고 있는가?
에드워드 7세 왕의 대관식에 잇따라서 델리(Delhi)에서의 공식접견이 있는 동안 답하(Dabha)의 군주(Maharajah)가 델리 밖에 있는 땅이 자기에게 배당되도록 계획을 꾸몄다. 그가 돌아와서는 그 지역 재무국에 거액의 돈을 지불하고 그 땅이 영원히 세금부담을 면제받도록 하였다.
그는 말했다.”왕인 내가 여기 머물러 있다. 그러므로 이 땅은 영원히 세금을 물지 않아도 된다.”그래서 오늘날 델리 근처에 살며 돈이 없는 사람들은 그 지역에 마음대로 거처를 요청해도 된다. 돈을 지불한 사람이 따로 있어도 요청할 수 있다. 그들은 왕이 그들에게 베푼 선물을 제한없이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님 역시 여기에 ”천막을 치셨다”(요 1:14). 그리고 본 장에서 말하는 모든 축복들의 값을 그가 지불하셨다. 우리는 이제 제한없이 이것을 즐길 수 있다. 왜냐하면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기” 때문이다.
제 8장 성화(聖化)에서의 하나님의 역할과 우리의 역할
”이루라 ...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빌립보서 2장 12절, 13절)
역설을 사용하여 영적 진리를 제시하는 것은 바울이 가장 좋아하는 방법이었다.
마비(H. C. Mabie)박사는 역설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역설이란 분명히 하나의 모순이다. 그러나 말에 있어서는 모순이지만 실제 또는 현실의 깊은 면으로 볼 때는 그렇지 않다. 성서에서 분명히 자기모순적이거나 다른 구절에서 한 말과 대립 관계에 있는 말을 발견할 때마다 표면적으로 이를 현실화하려는 동경의 깊은 곳에 어떤 위대한 조화가 있음을 믿어도 좋다.
어떤 구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죽은 자 같으나 산 자요, 슬퍼하는 자 같으나 기뻐하는 자요,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요, 가난한 자같으나 많은 이들을 풍성케 한다고 했다. 이보다 앞서 제시한 구절은 또다른 본보기이다.”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이 구절은 승리하는 생활의 두가지 필수적인 면을 제시하고 있다-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
하나님께서 구원과 정화라는 기적을 중재하시고 이루심에 있어 팔짱을 끼고 소극적으로 기다리신다는 생각은 여기서 제외된다. 이 일에서는 다른 모든 일에서처럼 인간과 하나님의 합작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그 어느 한쪽이라도 모르는 것은 치명적인 일이다. 의심할 나위없이 하나님의 역할이 어디서 끝나고 인간의 역할이 어디서 시작하는지 결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성령은 그런 지점들을 개별적으로 우리에게 비추어 주셨다.
성화(sanctification)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지만 인간의 협동을 떠나서는 얻을 수가 없다. 인간은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권고받는다.”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는 말씀에 따라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으로 간주하는 동안 육신의 행위들은 극복될 것이다.
그러면 이 본문을 로마서 4장 5절과는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두 사상이 모순적이라기 보다는 상호보충적이라는 것이 해답이다.
일하라는 권고
”너희 구원을 이루라.”
녹스(Knox)추기경의 이 구절을 번역한 것을 보면 신학적인 편견의 힘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두려워하므로 네 구원을 얻도록 일해야 한다.”그러나 이 구절(빌 2:12)은 그렇게 말하지도 않았고 그런 뜻도 아니다. 바울은 명쾌하게 언급하기를 이루어야 할 것은 ”너희 자신의 구원”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열광적으로, 두려움에 사로잡힌 열성으로 얻어야 할 구원이 아니라 이미 너희 것이 된 구원이란 말이다. 결국 그가 말하는 것은 ”너는 부동산을 얻었으니 이제 가서 일하여 숨겨진 자원들을 개발하라”는 것이다.
구원은 광범한 단어이며 신약에서는 믿는 사람들에게 이 단어가 세가지로 사용되었다.
죄책과 형벌로부터 구원을 받았으며
죄를 오염시키는 존재로부터 구원될 것이며
죄를 사랑함과 죄의 권세로부터 지금 구원을 받는 중이다.”너희 자신의 구원”이란 표현에는 과거-득의(justification), 현재-성화(sanctification), 미래-영화롭게 됨(glorification)이 연관되어 있다.
”이룬다”는 표현은 과학이나 수학 문제에서 처럼 궁극적인 목표를 달성하여 끝낸다는 사상을 전해준다. 신자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문제는 이 구절에서는 결코 나타나지 않으며, 우리의 성화(신성화)가 그리스도께 헌신한 절정의 순간에 완성되는 것이라는 사상은 받아들여질 여지가 없다. 그리스도께 온전히 헌신하는 데에 온전한 성화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헌신의 고비는 진행과정의 출발에 불과하다. 우리는 책임져야 할 평생직에 있는 것이다.”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좇아가노라”(빌 3:12)고 바울은 증언했다.
성화는 시간의 유동에 따른 자동적인 결과가 아니다. 하나님과의 협력에는 인간의 자유라는 대행기관이 개입된다. 하나님은 태양과 비를 보내시며 토양과 씨를 공급하신다. 그러나 농부가 쟁기로 갈고, 비료를 주고, 씨를 무리고, 추수하지 않으면 수확이 없을 것이다.
통찰력을 가진 성도 죠지 뮬러(George Mueller)에게 한번은 최면에 걸린 한 젊은이가 아침에 경건의 시간을 가지기 위해 일찍 일어날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고 요청했다.”젊은이여, 한 발을 침대 밖으로 내려 놓는다면 하나님께 기도해서 다른 발을 내려놓는 일을 도와달라고 기도드리겠네”라고 응답하였다.
이것은 상식일 뿐아니라 건전한 신학이다. 우리의 온전한 구원에서 하나님이 홀로 하실 역할이 있고 인간이 홀로 성취해야 할 부분이 있다. 믿음 안에 있는 사람이 그에게 지정된 역할을 성취할 때 성령은 가능케 하는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흘러가도록 송전선을 가설하신다. 하나님은 반드시 믿음에 응답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삶과 성품에 연관하여 완성을 이룩해야 하며 이들은 우리 소유인 구원을 통해 물려받은 영광들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정신으로 이 일을 하게 되는가?
녹스가 제시한 것처럼 ”걱정스런 두려움으로?”분명히 그렇지는 않다.
이것은 복음의 전체 정신과 모순된다. 노예같은 두려움이 아니라 ”떨림과 자신을 의지하지 않음으로” 해야 한다.
바울은 사람들에게 말할 때는 마치 아르미니우스 신자(Arminion)처럼 권고하고 하나님께 말할 때는 칼빈주의자처럼 기도하지만 어떤 모순을 의식하고 있는 것같지는 않다. 그의 권고는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는데 자신을 신뢰하는 위험을 경고한다. 성령을 의지하는 정신으로 해야하며 다른 연관된 구절에서는 이처럼 제안한다.”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일을 가능케 함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성품의 지고함을 이루도록 적절한 동기를 주시고 우리를 격려하시는 자극을 주시면서 권고하신다. 이 구절에서는 이중의 동기가 제시된다.
-하나님의 내주(內住).
우리는 자신의 독자적인 인적 자원에 남겨져서 자신의 내적인 자극에만 의존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영원하신 삼위의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니.”
”진리의 영이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23, 17).
하나님의 모든 능력을 가지시고 내주하시는 손님과 협력할 것을 신자에게 권유하는 이 영광스러운 사건은 분명히 충분한 자극이 된다.
-하나님의 내적인 역사
전능하신 하나님은 신자의 마음에 거하실뿐 아니라 역사하시며 우리의 정화에 있어 적극적인 대행자가 되신다.”너희 안에 행하시는[일하고 계신] 이는 하나님이시니.”그는 모든 필요에 대처하시는 적합한 능력을 가지고 일하신다.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효력이 있다. 사람이 단단한 나무를 통하여 수 톤의 물을 빨아내는 일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러나 매일 나무에서 액이 올라 올 때 이런 기적은 천번이나 일어난다.
하나님이 안에서 일하시고 있다는 의식을 가지고 바울은 주장하였다.”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여기나오는 ”모든 것”이란 단어는 원전(元典)으로 볼 때 ”우주의 모든 것”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즐거움이 되는 모든 일들을 그가 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뜻의 범위 안에서 그는 일종의 전능을 누렸던 것이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한도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여기 역설의 또 다른 면이 있다. 하나님이 내 안에서 역사하셔서 뜻을 정하여 일하게 하신다. 그런데 한가지 유의해야 할 일은 결정하고 일하는 것은 나의 일이다. 하나님이 대신 결정하고 대신 일하시는 것이 아니다. 성화에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은 영속적인 동반의식으로 결합되어 있으며 각각의 활동 범위를 분리시키려는 모든 노력들은 실패한다.
내가 원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 안에서 그 뜻을 일으키신다.
내가 일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힘을 공급하신다.
-기질.
로마서 7장에서 제시된 문제는 18절로 요약된다.”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버질(virgil)은 이렇게 슬퍼했다.
”나는 보다 나은 진로를 보고 찬성한다. 그런데 더 나쁜 것을 따라간다.”
그가 비록 마음으로는 보다 나은 것에 찬성했지만 보다 나은 것을 행하려는 기질이 결여되어 있었다. 거듭난 사람이라도 갱생의 힘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하는 한 연약함을 느낀다-그의 의지가 역행하는 것을 너무나 자주 발견한다.
웨이(A. S. Way)는 이 구절을 번역하면서 하나님의 활동을 이처럼 제시하고 있다.
”추진력(자극)을 공급하시고, 해결할 능력을 주시고,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수행하여 성취하려는 의지를 주신다.”우리는 우리 자신의 자원에 내던져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생겨난 유익들을 우리가 취하는 것이며 성령의 은사를 가지는데 이 성령을 통하여 이런 유익들이 우리 생활에 적용되는 것이다. 그런데 선택하는 일은 내가 해야만 한다. 하나님은 우리 의지의 적극적인 참여와 협력없이는 그의 능력이나 축복을 주시지 않으신다. 내가 한번 내 연약한 의지를 하나님 편에 두면, 내 자각적인 의지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택하며, 성령이 내 오염된 의지에 힘을 주시는 일이 가능케 된다.
-행동.
올바른 추진력(충동)이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되고, 해결할 능력이 사람에게 주어진 후에도 이를 행동에 옮기는 것은 사람에게 남겨진다. 하나님이 대신해서 행동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정화는 본질상 적극적이며 다만 악을 행치 않는 것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영이 주신 새 힘을 행사할 때 그는 ”그의 기쁘신 뜻”을 성취할 수 있다. 하나님의 전체적인 뜻을 이룬다. 자기 자신 속에는 아무 강한 것이 없으나 하나님의 내주하심과 내적인 역사가 있으면 이제 더 이상 연약함과 죄의 놀이개는 되지 않는다.
한편 손 마른 사람의 경우보다 인간과 하나님의 협력에 대하여 더 적중하는 예증은 없을 것이다. 그가 늘상 시도해온 것처럼 자신의 의지를 행사해 보았어도 그의 무기력한 근육에 어떤 효력도 생기지 않았다. 우리 주님이 그의 손을 펴라고 명령했을 때, 천번이나 해보았어도 효과가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그의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천 한번째 해본다고 해서 어떤 다른 것을 기대할 이유가 있었을까?
그러나 믿음이 그의 마음에 불을 붙였고, 주님의 명령에 반응하여 자기 의지를 행사했을 때, 기쁘게도 무기력했던 손이 반응을 보여 다른 한 손처럼 온전해졌다.
믿음으로 행할 때 하나님은 능력을 풀어 놓으신다. 육체에 있어서 그렇듯이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믿는 자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
무엇보다도 불가능한 일은
내 안에서 죄의 통치가 그치는 것이라네.
그러나 죄의 통치가 그칠 것을 나는 안다네.
불가능해보이지만 확실하네
불가능한 일이 내게는 모두 가능하다네.
제 9장 소홀히 된 제 9복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사도행전 20장 35절).
영적인 생활의 연약함과 금전관리의 실패 사이에는 어떤 명백한 연관이 있다고 해야할 것이다. 하나님의 창고에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영적인 경험에 있어 하늘의 창을 여는 전주곡이 되어 온 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생애를 통해 잘 알려져 왔다.
웨일즈의 죤스(R. B. Jones)목사는 주장하기를 하나님의 소유이고 그리고 그것을 요구하는데도 하나님의 백성의 손에 계속 쥐어져 있는 돈만큼 우리가 생명력있고 강력한 영적(靈的) 이끌림을 받는 것에 대해 방해하는 것도 없다고 하였다.
에베소 교회에게 쓴 글에서 바울은 복음서에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주님의 말씀이라는 근거가 있는 몇몇 말씀들 중의 하나를 생각나게 하였다.”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찌니라”(행 10:35).
이 아홉번째 복은 자선이라는 높은 행복에 강조를 두었으며 이를 보존하여 기록케 하신데는 그 목적이 반드시 있는 것이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바치는 은혜가 소홀히 되고 있다고 말했다.”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찌니라”(고후 8:7)고 바울은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을 강권한다.
우리는 이 은혜를 나타내보였는가?
또한 이 복을 경험했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엄밀한 검사
돈은 인품을 시험하는 것중의 하나로 성경에는 놀랄만한 양을 돈에 대하여 할애하고 있다. 어떤 교사는 공관복음서의 여섯 구절중에서 한 구절은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돈과 관계가 있다고 주장했다.
주님의 비유 서른 여덟가지 중에서 열 여섯은 돈에 대한 주제가 연관되어 있다. 사람이 부자이거나 가난하거나 간에 자기 소유에 대한 그의 반응을 관찰하면 그 인품에 대해 관한 지침을 얻게 된다.
마가복음에 나오는 젊은이는 자기의 많은 소유에 대해 무기력한 노예가 되었으며 그후로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되었다. 그가 재산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재산이 그를 단단히 붙들고 있어 그 재산이 주는 임시적인 이점을 희생하기 보다는 차라리 자기 영혼을 잃는 것을 택하는 것이다.
우리의 돈을 물쓰듯 하기를 피하는 것과 사치를 피하는 것은 상당히 훌륭한 과업의 성취이다. 이 일에는 영적인 균형이 잘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스인들(the Greeks)은 이 일을 높이 평가하였으며, 바울은 로마의 신자들에게 이것을 하나의 지대한 목표로 선정하고 있다(롬 12:3).
돈과 그 관리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은 분명히 부분적으로 성서적일 경우가 많다.”그 주인의 돈”(마 25:18)이란 구절은 퍽 의미심장한 말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 돈을 얼마나 많이 하나님께 바치는가 하는데 있지 않고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돈을 자신을 위해서 남겨둘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이 우리 주께서 말씀하신 복(아홉번째 복)을 경험하도록 절대 확실하게 인도해갈 것이다. 돈과 그것을 벌 능력은 하나님께로 부터 온 선물(은사)이며 직분이다. 우리는 소유주들이 아니라 우리가 소유한 것에 대한 관리인일 따름이며 맡은 직분에 대하여 결산을 해야만 한다.
가장 냉혹한 성서의 고발 가운데 하나는 말라기 시대의 유대인들에 대한 기소이다. 이들은 가치없는 찌꺼기는 하나님께 바치고 최고의 우량품은 자기가 가짐으로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였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말 3:8, 9)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 고발이 있은 직후에, 십일조를 바치면 넘치는 축복을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이다(10절). 불행하게도 이러한 위선이 말라기 시대에는 특별한 것이 못되었다.
칼빈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께 자기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하여 바치는 것보다도 이방인들이 미신적인 습관들을 행하기 위해 신에게 바치는 액수가 더 많다고 자기 시대를 탄식했다. 이것은 오늘 날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의 조건(십일조)을 성취할 때 넘치는 축복이 약속되어 있는 것도 마찬가지이며 이를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십일조의 법
역사의 여명기로부터 십일조를 바치는 일은 일반적으로 실천되었다(창 14:20). 십일조를 바치는 일은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로마인, 헬라인, 아라비아인들의 관습처럼 되었다. 이 관례가 시내(Sinai)에서 하나님의 재가를 받은 것은 사실이나 십일조의 법은 모세의 율법보다 400년이나 앞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유대인에게 있어 십일조는 피할수 없는 의무였으며 이에 첨부하여 감사헌금과 의연금을 드렸다. 헌신적인 유대인들은 관습적으로 수입 중 십의 이조(또는 오일조/one-fifth)를 하나님께 그리고 사랑의 목적을 위해 바쳤다.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아래 있으므로” 십일조의 법이 그들에게는 폐지된 것을 만족해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도덕률 폐기론자가 되고 싶은 욕망은 전혀 없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보다 높은 법을 지닌 ”그리스도의 법” 아래 있지 않는가?
은혜의 법을 취하여 우리의 바치는 일에 있어 율법아래 있는 유대인의 수준으로 끌어내릴 것인가?
크리소스톰(Chrysostom)이 이런 마음 자세에 대하여 한탄한 말이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유대인들 사이에 별 중요성이 없는 일이면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별 중요성이 없는 것으로 생각해야만 한다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우리 주님은 헌신적인 유대인들이 했던 것처럼 자기 아버지 하나님의 창고에 십일조보다 더 많이 바치시지 않으셨던가? 그리고 그의 발자취를 따르도록 우리에게 본을 남기시지 않으셨던가?의심할 나위없이 십일조는 신약에서 특별히 명령된 곳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의 방법에서는 십일조란 비범한 일(genius)이 아니기 때문이다.”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고후 8:8).
이 말은 바로 이같은 관계에서 사용한 바울의 말이다. 그는 사랑의 마음으로 하지 않는 후한 손길이 영적으로는 가치가 없음을 알았다. 그리스도의 넘치는 사랑과 은혜만이 이기적인 마음을 비이기적으로 만들 수 있다.
오순절의 사랑 속에서 따뜻한 성장을 하는 가운데 초기 제자들은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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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 있어 하나님께 희생적으로 바치는 일은 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은 진절머리나는 의무가 아니라 영적인 즐거움이었다. 사깃군 야곱조차도 십일조를 바쳤고, 강탈자 삭개오는 반을 드렸고, 가난한 과부는 ”생활비 전부”를 드렸다.
청지기 직분 모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본보기는 주께서 주시는 풍요로운 삶에 이르는 것이나, 경건하지 못한 고린도 교회는 마게도니아에서 매우 빈곤한 삶을 살았다(고후 8:1-5). 이 마게도니아 사람들은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심한 빈곤과 고난과는 현저하게 모순된 일이지만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했다(2절). 그들의 제한된 자원에도 불구하고-그들은 개척 정착민들이었다. 자신의 능력 이상으로 드리며 참된 희생의 지경에 이르기까지 드렸다(3절). 그들은 권함을 받기까지 기다리지 않고 바치는 특권을 간청하였다(3, 4절).”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어렵게 번 돈을 드리기 앞서 더욱 값진 자기 자신을 헌납하는 일이 선행되었다(5절). 그들이 명시한 연보의 정신은 다른이들에게 자극을 준 것이 입증되었고(고후 9:2) 바울로 하여금 모든 시대의 교회 앞에 바치는 일의 최고 본보기로 세우도록 영감을 주었다-우리 주님이 우리를 풍요롭게 하려고 스스로 기꺼이 가난해진 정신(9절). 많이 가졌거나 적게 가졌거나 이처럼 즐겁게 그리고 타산을 떠난 자기포기로써 주님께 우리 모두를 바쳤는가!
어떤 행위가 본래 지니는 가치는 물론 그 영감을 주는 동기에 따라 좌우된다. 기증자의 마을의 상태가 가장 중요하다. 사업상 하나님이 축복해 주실 것을 바라고, 또는 직업상의 진보를 바라고, 또는 개인적인 영의 축복을 구한다 해도, 단지 이런 동기로만 바친다면 우리의 바침은 무효화 된다. 그리스도에 대한 마음의 사랑에서 비롯된 선물만이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것이다.
로버트 르또르뉴(Robert G. Letourneau)는 충성된 청지기의 한 사람인데 이런 지혜로운 말을 하였다.
”댓가가 따르기 때문에 바친다면 그 댓가는 오지 않을 것이다.”
우리 주님은 과부의 헌금이 그 양에 있어서는 얼마 안되지만, ”생활비 전부”를 바치게 했던 그 헌신의 질을 보시고 가치있는 것으로 평가하셨다.
하나님이 측정하시는 척도는 헌금의 금전적 가치가 아니라 거기 연관된 희생이다. 드려진 양이 아니라 남은 양을 측정하신다. 우리의 안락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범위에서 바친다면 이것은 전혀 그리스도인의 헌금은 아니다.
언제나 자지 않는 적이 연보하라는 충동을 다양한 방법으로 공격할 것은 뻔한 일이다. 적들은 헌금하기에 용이하거나 편안할 때까지 연기하라는 제안을 하여 영혼에 있는 관대함의 샘을 말리려고 애쓸 것이다. 헌금하기에 용이한 때가 꼭 온다는 것은 전혀 비슷한 말이 아니다.
오늘 관대한 충동을 비벼 끈다면 내일 같은 일을 하기는 더 쉬운 것이다.
공격하는 또다른 법은 그 관대한 사람의 자산을 동결시켜서 헌금할 현금이 없게 하는 것이다. 사업을 확장하는데는 모든 이용 가능한 현금을 재투자하는 것이 요구된다. 그렇지 않으면 현존하는 투자 자본을 건지기 위해 더 많은 돈을 들여 밀어야만 한다. 이런 모범은 많이 보아 이미 익숙하다.
수입이 증가하면 이에 비례하여 생활 수준도 올리라고 유혹자는 자극을 주는데, 이렇게 하면 증가분을 모두 삼켜버려서 전에 보다도 헌금에 쓸 돈이 더 없게 된다.
죤 웨슬레(John Wesley)는 전혀 달랐다. 일년에 30파운드를 벌 때 26파운드로 살고 4파운드를 하나님께 드렸다. 그의 수입이 두배가 되자 그는 26파운드로 계속 살면서 주님께 34파운드를 드렸다. 하나님이 이처럼 풍성한 양으로 참된 영적인 부요함을 그에게 위탁하신 일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사후(死後)의 자선
적의 또다른 술책은 후에 고오든(A. J. Gordon)이 사후의 자선이라고 적절히 이름을 붙였는데 죽은 후로 관대해지기를 미루며 연보를 아끼게 하는 것이다.
고오든은 묻는다.”왜 그다지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죽음으로 유언 집행자를 삼아 수 천 수백만을 뼈만 남은 손가락으로 할당하게 하는지 모르겠다. 그들이 죽으면 그들의 부는 뒤에 남게 되는데 그들의 탐욕은 살아남아 사후에도 그 폭리를 거둔다!우리가 할 수 있을 때 우리의 부양가족들을 위해 온당한 대책을 세우는 것은 의심할 나위없이 현명한 일이다. 그러나 죽음이 그의 주머니에서 양심과 박애의 유산을 흔들 때까지 기다린다면 이것을 그리스도인의 관용이라고 부르지는 못할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살아 있을 동안에 우리가 드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드리자. 그리고 우리의 돈이 하나님의 일에 사용되는 것을 보며 즐거워하자.“
하나님은 「육체에 거할 때 한 일들」에 대해 상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 몸을 떠나서가 아니다. 그는 그의 명령을 즐겨 듣는 사람들에게 명백하게 말씀하신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마 6:19, 20).
바른 동기로 하나님께 관대하게 되면 여기서는 물론, 이후에도 상을 받는다.”장차 오는 날에 거두는 추수는 우리가 뿌린 것에 대해 정확히 비례한다.”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고후 9:6).
풍성한(liberal) 영혼을 위하여 보상의 충실한 법이 작용한다.”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 6:38).
그 역(逆)도 성립한다.”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잠 11:24).
갈보리와 그리스도의 보좌 심판대의 빛으로 우리의 지나간 청지기 직분을 검사하고 성령이 제안하시는 수정을 가하면 유익되고 건강에 좋은 훈련이 될 것이다.
제 10장 행동을 인도하는 원리들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고린도전서 9장 21절)
우리들 모두에게 있어 그럴 것이지만 특히 젊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의에 대하여, 달리 말해서 우리가 따라야 할 행위의 과정에 대하여 어리둥절할 때가 많은 것같다.”내가 그리스도인으로써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또는 거기 가는 것이 온당한가?”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권위있고 만족스러운 해답을 찾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어떻게 그 해답을 발견할 수 있을까?
이것도 하지 말고 저것도 하지 말라는 금지의 연속물을 들추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세상적인 일들에 대하여 그러하다. 때로는 스스로 충분히 확신이 가지 않는데도 다른 사람들의 신념에 굴복하기도 한다.
이런 태도는 씩씩하고 건강한 영적인 체험으로 유도해가지 못하는 때가 많다. 왜냐하면 이런 태도는 주로 순간적인 결정에 따라 이끌려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을 부지런히 연구하면서, 생각과 기도를 통하여 우리 자신의 신념에 이르러야 하며 다른 사람들로부터 유전된 것에 연약하게 적응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이렇게 말함에 있어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금기나 금지같은 것이 있을 처소는 없다는 생각을 경계해야만 한다. 금지는 신구약을 통하여 많이 발견할 수 있으며-그 예로써 십계명을 들 수 있다. 우리는 ”은혜아래 있지 율법아래 있지는 않다”는 이유로, 그리고 율법의 제한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금지사항들에 반대한다면 십계명 중에서 아홉개는 신약에서 재인용되고 있으며 신약에서는 그 적용이 대폭 확대되었다고 대답할 수 있다.
행위로 나타난 살인은 마음에 나타난 증오를 추적해 간다. 우리는 의로워지는 방법에 있어 더 이상 ”율법아래” 있지 않다. 그러나 생활의 새로운 방식으로는 ”그리스도의 법아래” 있다.
바울은 자유롭게 권고하기도 하며 또한 금지시키기도 한다. ”벗어버리라”, ”삼가라.”, ”버려라”는 말들이 그의 서신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성경은 일어날 수 있는 모든 행동을 세밀하게 법으로 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경우를 예비하고, 정확히 적용시킬 수 있는 명확한 원리들이 열거되어 있다.
만일 하나님이 명확한 안내를 주시지 않으셨다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못한 책임이 우리에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약 기독교의 기풍은 금지사항들을 부과하고 규율과 법칙들로 제도화하기 보다는 명확한 길잡이 원리들을 제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가정교사 아래 있는 어린아이들이 아니라 성숙한 아들들로 그의 백성을 대우하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성경을 읽으며 우리는 계속 묻는다.”이 구절에 제시된 영적인 진리는 무엇인가?”
우리가 만일 인도를 받으려한다면 목적에 대한 절대적인 진지성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뜻을 행할 준비가 된 사람에게만 그것을 나타내시기 때문이다. 성경의 의견을 믿음과 실천의 모든 문제에 있어서 최종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려는 완전한 자발성이 있어야 한다.”이 일이 어디가 해롭다는 말인가?””다른 사람들도 하는데 나는 왜 못하지?”이와 같은 의문스러운 일에 부딪히는 것은 미리 정한 뜻이 있으며 얻고자하는 것은 안내가 아니라 인가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마음으로는 이미 거의 결정을 한 것이다.”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그는 알 것이다...”(요 7:17).
이 구절은 우주적으로 적용되는 원칙이다. 하나님이 그의 뜻을 나타내시면 곧 이를 행하려는 순수한 목적이 있는 곳에서 이 추구자는 어두움가운데 남겨지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말해서, 하나님의 뜻을 효과적으로 수행치 않으려는 마음은 하나님의 안내의 빛에서 제외된다.
여섯가지 처리 질문
다음의 적극적인 질문들을 묻고 대답하는 것은 의심스러운 일들에 관한 여러 문제들을 자동적으로 처리할 것이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만일 사람의 주된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면 이것이 우리의 첫 검사와 주된 관심사가 되어야만 한다. 계획된 과정이 자기에게 종결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다면 그 일은 옆으로 제쳐 놓아야 하는 것이다.
-유익이 되는가?
그 일이 내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내 간증과 내 봉사에 도움이 될 것인가?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고전 10:23).
그 일이 하나님께 그리고 나의 동료들에게 좀 더 유익이 되는 내 생활이 되게 하는 경향이 있는가?
-개발하는 일인가?
그 일이 나의 그리스도인의 성품을 육성하며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데 나를 도울 것인가?
”너희를 피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고후 10:8).
하나님의 지고한 관심은 그의 교회에 집중되어 있으며 우리는 교회를 세우시려는 그의 관심에 참여해야 마땅하다.
-노예로 만드는 경향이 있는가?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도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고전 6:12).
일 자체가 적합하더라도 우리를 지배하게 되며 균형을 잃게 할 수 있다. 그들은 우리의 관심을 요구하므로 보다 중요한 다른 일들을 게을리하게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세속적인 책을 읽는 일은 독자를 사로잡아 하나님의 말씀과 영적인 책들을 읽으려는 그의 욕구를 저하시킨다. 세속적인 책을 읽는 양이나 질에 있어서 엄격한 자기 훈련으로 이런 상황에 빠지지 않도록 철저하게 경계해야 한다.
-유혹에 대항하여 나에게 힘을 줄 것인가?
우리가 자원하여 유혹에 노출된 곳에 간다면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며”라는 기도는 거의 쓸모가 없다. 구세군 사관이 자신의 정당표어를 팔려고 선술집에 들어가는 것과 젊은이가 그의 친구들과 ”즐기려고(축하하려고)” 들어가는 것은 아주 다르다. 죄를 죄가 아닌듯이 만드는 경향이 있는 장소나 행동은 피해야 한다.
-그 일이 세상적인 특징이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특징이 있는가?”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일2:16).
계획된 행동의 과정이 세상적인 특성에 보다 치우쳐 있다면 우리의 진로는 뻔한 일이다.”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은 우리의 애정을 지배하는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죄는 아니라해도 ”부담(weights)”이라고 부를 수 있는 여러 관계들, 쾌락들, 활동들이 있다. 이들은 천국 경주에서 전진해 나가는 일을 방해하며 그러므로 제쳐 놓아야 마땅한 일들이다.
캠벨 몰간(G. Campbell Morgan)박사는 ”방해하는 일들은 반드시 낫거나 서민적일 필요는 없다. 그 자체는 귀족적인 일들, 지적인 일들, 아름다운 일들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들중 어느 하나에 참여하면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궁극적인 목표를 보는 시야가 흐려진다. 우리가 달음질하는데 붙잡고 늘어지며, 우리가 가는 길에 신념이 굳고 꾸준하지 못하도록 한다. 이들은 부담과 방해가 된다” 라고 말하였다.
이제 의심가는 행위에 대한 여섯가지 원리들을 생각해보자. 이들은 바울이 성령의 영감아래 발표한 것이다. 바울은 오늘날 우리가 당면하는 어려운 일들과 비슷한 로마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들을 다루었다.
여섯가지 인도의 원리
성경에서 중요한 영적 진리와 교리들은 최소한 한 문단으로 확장하여 충분히 다루고 있다. 의심나는 일들에 관한 주제는 로마서 14장에서 충분히 다루어 지는데 바울은 다음의 원리들로 정리해 놓았다.
-판단의 자유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채식주의자)를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롬 14:2, 3).
문제가 되는 초점은 우상에게 드려진 고기를 그리스도인이 먹어야 할 것인가 먹지 말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우상이란 결국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은 박식한 신자들은 그런 고기를 먹는데 자유를 느꼈다. 그러나 교육을 조금받은 사람들에게는 걸림이 되는 것으로 고기 먹는 일을 절대로 삼가했다. 여기에 마찰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었으며 이같은 생명력있는 교리에 문제가생겨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관용의 자세를 권고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교회 안에는 순수한 견해 차이를 포용할 여지는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와 반대되는 의견을 주장할 우리 형제의 권리를 인정하고 유지해 가야 한다.
-개인적인 확신의 권리
”혹은 이 날을 저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찌니라”(롬 14:5).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우리의 신학적인 색채를 택하는데 있어서 카멜레온처럼 되기가 쉽다. 그 결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좌우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학적인 편견에 따라 좌우되기가 쉽다. 바울의 권고는 고찰하는 문제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충분히 납득해야하며 다른 사람의 성품과 자질이 아무리 칭찬할만해도 우리의 행동이 그들의 명령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결정이라면 우리 자신의 결정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행동에 대하여 책임질 사람들은 우리들 자신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한 분에 대한 책임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14:4).
우리가 책임을 다해야 할 분은 하나님 한 분에 대해서 뿐이다.”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14:12).
우리는 우리가 책임져야할 사회의 구성원들임을 깨닫는 반면 바울은 우리의 최종적인 책무는 하나님께 대해서만 지는 것을 강조한다. 우리 주인 그리스도는 한 분 뿐이시므로-교황이거나 감독이거나 목사이거나-그 누구라도 우리 행위에 대해 절대권을 사칭하는 사람은 ”구속주의 왕권”을 침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모든 것이 드러나고야 만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모든 사람들의 행위에 깊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다른 사람과 의견이 맞지 않을 때 이를 비판하지 않음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14:10).”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14:13).”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14:4).
우리 형제들의 행위를 재판하고 비판하는 것은 우리의 특전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만 속한 권리이며, 오히려 우리는 어느 날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서로서로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14:10). 우리는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에 주의”해야만 한다(14:13). 형제가 인정해주기를 우리가 바라는 것과 같은 정도로 그 형제의 행동의 진지성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절제함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13:10)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14:21)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고전 9:12)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즐거움만을 위하여 살지 않으며 그의 행위가 연약한 형제에게 미칠 영향을 늘 마음에 둔다. 절제있게 마시는 사람의 많은 자유가 자기 욕망을 그같은 분량으로 조절하지 못하는 연약한 사람을 타락시킬 것은 뻔한 일이었다. 우리는 우리 자유가 형제에게 거치는 돌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연약한 형제를 위하여 자발적으로 우리의 적합한 즐거움을 유보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위하는 길이다.”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15:1).
-의심스러운 일들을 절제함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14:23).
우리가 의심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 일이 의심스럽다는 억측을 일으킨다. 우리가 취하는 행동은 믿음의 적극적인 확신으로 수행해야한다. 의심이 생긴다는 것은 기도와 부지런한 성경연구를 통하여 우리가 해야하는 일의 확신에 이르기까지 미루어야 한다는 소명이다. 다른 일들에서도 그렇지만 이렇게 하면 우리는 절대 길을 잃지 않는다. 의심이 나는 이익은 하나님께 드리면 된다. 그러나 우리가 ”연약한” 양심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는데 이 문제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다. 전통이나 선입관때문에 성경이 정죄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의심을 가질 수도 있는 것이다.
성령의 일은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것인데 우리는 성령의 은혜스러운 사역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어베이(C. B. Eavey)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도덕적인 기준을 통한 성령의 인도와 훈계는 도덕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루는 참된 기초이다. 성령의 인도와 훈계는 법률의 형식을 갖추지 않은 도덕성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법에 모순되지 않으면서도 법의 정신에 입각한 것이다. 참된 도덕성은...내향적일 수 밖에 없다. 성령은 법의 개념이 마음에 살아있게 하며 마음의 동기를 조정하도록 하신다. 성령의 인도와 훈계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고 온전히 실행될 때, 모든 법보다 더 윤리적인 실천을 하도록 끌어 올리는 세련된 예민성이 따르게 된다.”
제 2부 그리스도인 사역에 얽힌 문제들
제 11장 영적 지도력의 조건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누가복음 22장 26절).
"또 저희 사이에 그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찌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찌니라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 22:24-27).
지도력의 과정이 해(年) 수로 그 서열이 정해지며 지도자들이 부족하다는 사실이 묵계에 의해 승인되고 있다. 세속적인 영역에서나 신성한 영역에 있어서를 불문하고 정당한 역량을 가진 지도자들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성경에서는 어떤 종류의 사람을 하나님이 찾고 있는 것으로 자주 제시된다.”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느니라”(삼상 13:14).”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렘 4:25).”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렘 5:1).”내가 그 틈에 서있을 사람을 찾다가”(겔 22:30).
하나님께서 그의 영적인 요구들에 부응하는 사람-죤 웨슬레같은 사람, 윌리암 부쓰같은 사람, 허드슨 테일러같은 사람, 빌리 그래함같은 사람-을 발견하시면 그들의 명백한 능력의 한도나 결점들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위하여 그리고 그들을 통하여 하시는 일에는 제한이 없으신 것같다.
오늘날 교회가 가장 필요로 하고 있는 일들 가운데 하나는 권위있고, 영적이고 희생적인 지도력이다. 권위가 있어야 하는 것은 백성들은 그가 가는 길을 알고 있는 사람, 그들의 신념에 영감을 주는 사람에게 인도받기를 무척 좋아하기 때문이다.
"
지도력이 영적이어야 하는 것은 육적이고 자연인(거듭나지 않은)의 견지에서 통하는 지도력은 언제나 경쟁적이며 메마름과 영적인 파산을 초래할 뿐이기 때문이다.
희생적이어야 하는 것은 온 세상을 위하여 스스로를 희생제물로 바치신 분의 생활이 본이 되기 때문이며, 지도자의 좁은 길은 희생적인 봉사로 향해 가는 외로운 길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지도력의 본질
참된 영적 지도력의 본질은 고(故) 쯔웸머(S. M. Zwemer)박사의 글 가운데 잘 나타나 있다.”길을 알고 있어 계속 전진하며 다른 사람들이 따라오도록 끌어당기는 남자와 여자가 이처럼 필요로 되는 세상은 없었다.”만일 우리가 지도자가 된다면 그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갈 길을 안내할 수 있기 때문인데 그 길이란 우리 자신이 몸소 밟는데 성공을 거둔 길이다. 우리는 자신이 가 본 한도 내에서만 다른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따라오라고 영감을 주는 범위에서만 지도자가 될 수 있다. 지도자는 스스로 자격을 갖추고 있어서 하나님을 위한 일을 성취함에 있어 다른 사람들의 협력을 구할 수 있다.
지도력은 개인의 인격적인 힘의 결과라기보다는(비록 영향을 미치기는 하겠지만) 그 인격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배를 달게 받는 결과로 생긴다. 성령이 방해를 받지 않고 활약하시기 때문에 그는 그의 동료들보다 영적인 권위를 더 많이 소유하게 된다.
그의 영향력은 그가 타고난 천부의 재능과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러면으로 보아 영적인 지도력과 천부적인 지도력은 아주 딴 종류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천부적인 지도력에도 적용되는 지도원리들을 배워야 할 것이 많다.
□「승리 작전」이란 책에서 필드 마샬 몽고메리(Field Marshal Montgomery)는 군사지도력의 일곱가지 성분을 발표했는데 영적인 지도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시킬 수 있다.
-그는 뒷자리에 앉아 세밀한 일에 몰입하는 것을 피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는 마음이 좁아서는 안된다.
-그는 거만하지 않아야 한다.
-그는 사람들을 잘 뽑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는 자기 수하의 사람들을 신뢰하고 그들로 간섭을 받지 않고 일할수 있게 해야 한다.
-그는 명확한 결정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는 신념을 주는 사람이어야 한다.
□오랜 기간을 통하여 고(故) 죤 R. 모트보다 지도자들의 선발과 훈련에 있어 더 많은 경험을 가진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은 거의 없다. 그의 지도력 테스트는 다음과 같다.
-적은 일들을 잘하는가?
-그는 우선권(선두)의 의미를 배웠는가?
-그는 자기 여가를 어떻게 이용하는가?
-그는 열정을 지녔는가?
-그는 반동력의 이점을 취하는 법을 배웠는가?
-그는 성장력을 가지고 있는가?
-그는 실의와 좌절에 직면하여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그는 불가능한 상황들에 어떻게 직면하는가?
-그의 가장 연약한 점들은 무엇인가?
영향력
지도력이란 본질상 어떤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끼치는 영향력이기 때문에 한 사람의 생애가 지닌 거의 무한한 가능성을 여기서 재론할 여지는 없다고 하겠다.”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롬 14:7).
성서와 경험, 양자 모두는 우리가 도덕적으로 또 영적으로 중립을 취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단언한다. 우리는 우리의 영향력에 따라 좋거나 나쁘거나간에 지울수 없는 인상을 주는 생활의 범위에 살고 있다.
죤 게디 박사는 1848년에 아네튠에 가서 24년을 살았다. 그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비석에는 이런 말이 있다.”1848년에 그가 도착했을 때는 그리스도인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었다. 1872년에 그가 떠날 때 이방인(믿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윈쉽 박사는 미국의 두 가정을 선과 악으로 현저하게 대조하여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죠나단 에드와즈의 아버지는 목사였고 그의 어머니는 성직자의 딸이었다. 그들의 자손들 중에는 학장이 열 네분, 백명 이상의 대학 교수들, 백명 이상의 법관들, 30명의 재판관들, 60명의 의사들, 백명 이상의 성직자들, 선교사들, 신학 교수들이 있었다. 미국의 대 산업치고 그의 가족 중 일원이 주역들 틈에 끼지 않은 곳이 거의 없었다.
이와는 반대로 쥬크 가족을 살펴보자.
그들은 배울 수가 없었고, 일하기를 원치 않았으며, 뉴욕주가 백만달라는 썼을 것이라고들 말하는 집안이다. 그들의 전체 기록은 빈곤과 범죄와 정신이상과 저능과 연관된 것이다. 알려진 천 2백명의 자손들 중에서 3백 10명은 전문적인 극빈자들이었고, 4백 40명은 자신들의 사악함으로 말미암아 육체적으로 건강을 망쳤고, 60명은 습관적인 도둑이고 1백30명은 유죄판결을 받은 범법자들이며, 55명은 음란의 희생물이 되었고, 20명만이 장사를 배웠다(그 중 열명은 주 교도소에서 배웠음). 이 악명높은 가족은 일곱명의 살인자를 배출했다.”
자격
장교선발및 평가 쎈터(OSAC)”로 알려진 군사기관이 있는데 여기서는 사람들이 지도력에 대한 검사를 받는다. 사람이 OSAC에 도착하면 사병이거나 대위거나 모두 동료(a number)가 된다. 모든 계급이 평등해진다. 각자는 접시를 닦고 구두를 닦는다. 여기서 관찰되는 점은 지식이나 능숙이 아니라 이러한 예기치 않던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이나 비판, 그리고 위기에 대한 반응이다. 각자는 계속 상담을 통해 세밀히 검토되고 지도력에 대한 그의 역량을 식별해 내게 된다.
하나님도 역시 그의 OSAC를 가지고 계셔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가 우리에게 부과한 시험에서 보인 반응으로 말미암아 책임있는 봉사사역을 위한 자격을 스스로 상실케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가능성있는 지도자들에게서 찾으시는 자격에는 어떤 자질들이 있는가?
최고로 중요한 특성은 진정한 영적인 것이다.”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전 2:15).
잘못된 형제들에 대한 사역을 말하는 가운데 바울은 갈라디아의 지도자들에게 이렇게 권한다.”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갈 6:1).
작은 지도력의 지위를 위해서도 초대교회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을 요구했다(행 6:3). 영적인 것은 성령의 능력과 영향력을 가진 헌신한 신자의 생활에서 나타난다. 성령으로 조절을 받는 것이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이다.
타이어씨는 그의 헬라어 사전에서 이렇게 말한다.”충만하다는 것은 마음을 점유하는 것이다.”누가복음 5장 26절은 제자들이 ”심히 두려워 하였다”고 했는데 이 말은 곧 두려움이 그들의 마음을 점유했다는 뜻이다.
요한복음 16장 6절에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임박한 이별에 대하여 말했을 때 제자들의 마음이 근심이 가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말은 슬픔이 그들의 마음을 조절하였다는 뜻이다.
똑같은 뜻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하셨다(엡 5:18). 영적인 사람은 그의 마음과 정신과 인격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점유되고 조절되는 사람이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 각각은 어떤 의미에서 영적인 지도자들이다.
그는 진정 겸손한 사람이 될 것이다. 이 자질은 정치나 상업에서는 요구되지도 않고 탐내지도 않는다. 그러나 진정한 영적인 지도력에서는 본질적인 것이다.
이 장의 서두에 나오는 간단한 말에서 주님은 지도력의 길이 좁고 험하다는 개념을 주셨다. 이방의 임금들은 거드름을 피울지 모르나 하늘의 왕국에서 큰 자는 그의 주님처럼 겸손할 것이다. 이 사람은 대중의 기호에 맞추어 숨은 봉사를 하는 좁은 길을 더 좋아할 것이다.”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 20:26, 27).
그는 백성을 섬기고 돕는 한도에서 그들을 인도할 능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밥티스마 요한이 여인에게서 난 자 중 가장 위대하게 된 비결은 그의 진면목을 밝혀주는 선언에서 찾아볼 수 있다.”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
지도자의 겸손은 지도자의 영적임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증가하는 자질이다. 해가 지나감에 따라 바울이 이 은혜에서 성장한 것에 주목하면 교훈이 된다. 그의 사역 초기에서 자신의 불미스러운 과거를 돌이켜 보며 이렇게 인정하였다.”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고전 15:9).
얼마 후에 그는 자진하여 말했다.”나는 모든 성도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다”(엡 3:8).
그의 생애가 종말을 향해 당겨지고 있을 때 그는 이렇게 슬퍼했다.”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지도자의 생애는 자기훈련으로 특징지워질 것이다.
훈련과 제자는 같은 어원에서 온 말이다. 훈련된 사람만이 참된 제자의 정신을 안다. 제자의 정신이란 지도력에 대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시간을 낭비하는 동안 지도자는 일을 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노는 동안 기도할 것이며 다른 사람들이 자는 동안 공부할 것이다. 옷을 입고 음식을 먹는 일에 군인다운 훈련을 준수하여 전쟁을 잘 수행할 것이다. 박수갈채도 못받고 감사도 듣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피하는 즐겁지 않은 임무나 숨겨진 의무를 행할 것이다.
그는 밖에서 부과된 훈련에 저항하지 않을 것이다. 지도하기를 즐기는 사람들은 부지기수이지만 순종하기를 즐기는 사람들은 아니다. 어느 행인이 왜 이렇게 조용하냐고 묻자 한 소년이 이렇게 대답했다.”우리는 모두 장군들인데 전쟁할 사람을 얻지 못해서요.”
훌륭한 지도자는 주님 안에서 자기 상전인 사람들에게 충성스러우며 잘 따르는 사람임을 먼저 증명해야만 한다. 좋은 지도자는 개인주의적이 되지 않고도 한 개인이 되는 법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 강하게 훈련을 받기 때문이며 다른 사람들은 그의 강한 훈련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는 이렇게 기도하기를 계속할 것이다.
사물을 부드럽게 하는 민감한 사랑에서,
연약하게 하는 쉬운 선택에서,
(이래서는 영혼이 방비를 튼튼히 하지 못하며,
이런 식으로는 십자가의 길을 가지 못한다)
당신의 갈보리를 흐리게 하는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어린양이시여, 오 나를 구하소서.
-아미 카미카엘(Amy Carmichael)
그(좋은 지도자)는 비젼을 가진 사람이 될 것이다. 옛 선지자들은 보는 사람들이라고 불리웠는데 동시대 사람들 보다 예민한 영적인 감지력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영적인 지도자는 영원성의 빛으로 사물을 명확하게 본다.”비젼(전망, 묵시)은 보는 것 이상이며 통찰력보다도 더한 것이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다.”자신의 세대에게 지울 수 없는 감동을 준 성서의 모든 인물들은 현저할 정도로 이 자질을 소유하고 있었다. 지도자는 그의 동료들보다 멀리 보기 때문에 비록 반드시 인기를 얻지는 못한다 해도 표준을 높이 설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그들을 가장 높은 수준으로 끌어 올리려고 애쓸 것이며 그 궁극을 아주 명백하게 보기 때문에 당면한 일 때문에 궁극적인 일을 희생하도록 허락지는 않을 것이다.
좋은 지도자는 신속하고 명확한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한번 확인하면 그는 즉각적인 행동으로 들어가며 결과를 따지지 않는다.”지도자는 배수의 진을 칠 수 있는 사람이다.”환경이 그를 좌절시키지 못할 것이며 어려움이 그를 단념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의 목표가 단순하고 그의 동기가 순수하기 때문에 그의 결정들은 복잡하지 않으며 머뭇거리지 않는다.
중국 대륙 선교회의 프레드 미첼(Fred Mitchell)은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는데 그는 그의 마지막 메세지 중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앉아서 참을 수 있고, 충격을 흡수하고, 완충지대의 역할을 담당하고, 천재(天災)나 성가신 일들로 인한 괴롭힘을 달게 견디는 것이 지도자들의 자질이다.
모세는 백성의 불평과 고집과 반란을 견디었다. 그는 보이지 않는 분을 보는 것같이 견디며 꾸준한 과정을 수행해 갔고 이 과정에 변함없이 종사하였다. 하나님의 종에게 닥친 근심과 눈물과 계속적인 알력과 시련들은 하나의 큰 성품 테스트이다.”
도달하게 된 방법
지도자들은 단지 선출이나 지명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영적 권위란 감독들이나 이사회에서 협의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영적인 지도자들이 지위나 위치를 추구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 영적인 성품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런 지위에 있을 것으로 입증이 된 사람들은 그런 지위를 찾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이들은 바룩(Baruch)에게 준 여호와의 충고를 충분히 습득한 사람들이다.”너를 위하여 대사를 경영하느냐? 그것을 경영하지 말라”(렘 45:5).
사무엘 로간 브렝글은 보기드문 영적인 능력의 사람으로 영적 권위에 이르는 길에 대해 자주 인용되는 말을 하였다.”이것은 장려한다고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많은 눈물과 죄의 고백과 겸손케 함과 마음의 살핌과 자기굴복, 각자의 우상을 용감하게 희생시키며, 담대하게 불평하지 않으며, 십자가를 받아들임에 있어서 타협하지 않음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을 위하여 위대한 일들을 추구함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바울처럼 이미 얻어진 것들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잃어버림으로 얻어진다. 그 값은 큰 것이지만 진실한 지도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치루어야만 할 희생이다.”
지도력을 구하는 사람들 모두가 그런 정확한 값을 치룰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사람을 대중 위에 공식적으로 높이시기 앞서 하나님의 조건들이 비밀히 수락되기를 기다릴 수 밖에는 없으시다.
경고들
영적인 권위를 소유했다고 해서 실수가 없도록 하시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인간이며 허약함에 에워 싸여 있기 때문에 여전히 실수를 범하기 일쑤이다. 그러나 순수한 실수가 반드시 죄일 필요는 없다. 하나님을 위해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 것보다 정직한 실수를 하는 편이 낫다. 사도들 조차도 때때로 실수를 저지를 때가 있었으나 하나님께서 그 뒤에 무효화하였다.
영적인 지도자는 자연법의 작용에서 면제된 것은 아니다. 만일 육체의 법을 파기한다면 그는 육적인 형벌을 지불할 것이다. 가장 거룩하고 능력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짊어진 거의 견딜 수 없는 짐으로 인해 임시적으로 파기했다. 죤 녹스는 스코틀랜드의 위대한 개혁가로서 그의 생애 말기에 상심하여 공적인 생활에 물러나 절망적으로 이렇게 썼다.
"”주 예수님, 내 영혼을 받으시고 이 가슴아픈 생활에 종말을 고하게 하소서. 사람의 아들들 중에서는 정의와 진리가 발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신중한 마음으로 - 죤 녹스 올림.”변화산 상에서 주님과 대화했던 두 사람(모세와 엘리야)이 모두 사역의 피로로 인해 마음이 상하여 죽고 싶다고 기도했음은 사역의 위안(결실 또는 즐거움)이 없었기 때문은 아니다.
한번 수여된 영적인 지도력은 자동적으로 보존되는 것은 아니다. 삼손은 긴 세월동안 성령이 주시는 무한한 힘을 누렸으며 그의 능력의 비밀을 가지고 희롱하고 있었을 때도 그랬다. 그러나 마침내 그의 죄가 그를 좇아와 붙들었다.”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사사기 16:20).
바울은 이런 착각에 사로잡히지는 않았다. 고린도인들에게 쓴 편지에서 그는 최종에 가서 인정을 받지 못하게 되는 일을 염려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지도자들의 죄에 대하여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죄보다 엄하게 다루심을 알려준다. 지도자가 지닌 책임의 본질상, 대중에게 하나님의 대리자로써 계속 주시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예가 그의 행위에 개입된다.
모세는 40년 동안 이스라엘의 정치 및 종교생활의 초점이 되었다. 모든 눈들이 그에게 쏠렸던 것이다. 그의 모든 행동은 공적인 행동이었으므로 하나님은 언뜻 보아 심각해 보이지 않는 죄라도 준엄하게 다루시는 것이다.
축복된 보충적 진리가 있다. 비록 하나님께서 잘못을 저지른 지도자를 준엄하게 다스리시지만 또한 그가 보증하는 지도자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도 준엄하게 다스리신다.
고라의 자손들이 모여 모세에게 대항하였다.”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뇨”(민 16:3).
하나님의 옹호는 즉각 나타났다.”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 가족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 물건을 모두 삼키니”(민 16:32).
모세의 누나 미리암이 모세가 아내를 선택한 일로 그를 비판했을 때 하나님은 문둥병으로 그녀를 때리셨으며 모세의 중재로써만 고침을 받을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지명하신 영적인 지도자는 하나님과 더불어 겸손히 행할 때(그 때만) 절대 안전하다. 왜냐하면 그가 부여하신 권위를 지닌 사람들을 하나님은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시며 그 권위를 지켜주시기 때문이다.
끝으로 말하자면 지도력에는 흔히 외로움이 따른다고 할 수 있겠다. 어렵게나 인기없는 정신적 결정을 하는데 따르는 정신적 고통은 그 일을 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만이 온전히 알 수 있는 일이다.
제 12장 하나님께 인준받은 야망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야베스는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 그 어미가 이름하여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역대상 4:9, 10).
"크롬웰, 내가 당신께 명하니 야망을 버리시오. 그 죄로 인해 천사들이 타락했습니다.”
쉑스피어가 그의 주인공들중의 하나인 카르디날 월시의 입에서 이런 말을 하게 한 것은 성서의 가르침에 맞는 충고를 주는 것이었을까?
야망이란 비열하고 이기적인 자질인가?
야망이란 정말로 ”귀족적인 마음의 최종적인 헛점인가?”
성경에는 이런 혹평을 받기에 알맞는 야망이 있는가 하면 가치있고 사모해야 할 야망이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본질적으로 말해서 자기주변에 중심을 두며 자기에게 귀착되게 하는 야망은 가치가 없고 그 중심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있는 야망은 정당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권장할 가치가 있다.
기본적인 야망
가치있는 일들이 실패하게 되는데는 기본적인 야망, 그들의 생활을 일원화시키는 주된 목적이 없기 때문일 때가 많다. 그들은 우연히 아무렇게나 살고 있으며 바울처럼 살지 못한다. 바울은 ”이 한가지 일을 하노라”고 말했다.
유명한 웹스터 형제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가 소년들이 멍한채 주위를 맴돌고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에스겔아, 무얼하고 있는 거지?”「아무것도 안해요.」”
다니엘아 너는 무얼하지?”「에스겔을 도와주는 중이지요.」
우리가 가치있는 야망을 달성하려고 한다면 웅변가 데모스테네스가 웅변력을 얻으려는 과정에서 보여준 전심(全心)의 자기포기가 있어야 한다.
A. T. 피어슨 박사는 데모스테네스가 처음 대중에게 연설했을 때 대중이 웅성대어 강단을 물러나고 말았다고 전한다. 그의 목소리는 거칠고 연약했으며 그의 외모는 호감을 주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는 동료 시민들이 그에게 매달려 있게 하겠다고 결심하고 마침내 밤낮없이 웅변에 자신을 드렸다.
그는 머리를 반쯤 면도하여 사회생활의 제반 업무에 개입되지 않게 했다. 말더듬는 것을 극복하려고 입에 조약돌을 물고 연습하였다. 그는 에게해(海)의 천둥에 자기 연설을 맞추어 음량을 원하는 만큼 얻을수 있었다. 어깨가 삐뚠 것을 교정하기 위하여 매달아 놓은 칼아래 서있었다. 거울 앞에서 연습하여 비뚤어진 얼굴을 교정하였다. 그가 대중 앞에 나타났을 때 국가를 움직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는 민족의 사활이 걸린 순간의 문제에 대해 다른 웅변가와 함께 연설하고 있었다. 그의 동료가 연설을 끝내자 백성이 말했다.”굉장한 웅변이구나!”그러나 데모스테네스가 결론에 이르렀을 때에는 한 목소리로 그들이 소리쳤다.”가서 빌립과 싸우자!”
세상적인 야망은 세가지 주된 방향으로 표현된다.
-명성을 얻는 것.
-부를 쌓는 것.
-권력을 휘두르는 것.
그러나 세상적인 야망의 치명적인 결점은 자기에게 중심을 두며 하나님께 두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러한 야망으로는 귀족이 되지 못한다. 이는 시기와 질투를 야기시킨다. 이 야망은 다른 사람들을 마땅히 고려해야 함에도 그러지 못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갈 데까지 갈 것이다. 이 야망은 성공적인 사업가가 보다 연약하지만 보다 견실한 경쟁자를 냉혹하게 밀어붙일 것이다. 그러나 그 보상이 얼마나 천박하며 실속이 없는가! 영원성의 빛으로 비추어 볼 때 그 성취가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 나폴레옹이나 히틀러의 야망은 순간적인 영광을 가져다 주었으나 영원한 수치를 가져왔다. 그런 야망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과는 정반대이다.
가치없는 야망
세상의 여러 기관들 뿐만 아니라 신앙적인 기관에서도 가치없는 야망을 길러가고 있을 수 있다. 오순절의 변화를 체험하기 전에, 주님의 측근 중 두사람, 야고보와 요한은 다른 열 형제들 위에 놓으려는 열의에 사로잡힌 어머니를 이용하였다.
그들은 움크려 작은 음모를 꾸몄다.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최고 특권의 자리를 노릴 틈을 다른 요구자들이 얻지 못하게 하였다. 마지막 만찬조차도 그들의 이기적인 분쟁으로 인해 성스럽지 못한 경우가 되고 말았다. 열사람 중에서 그 누구도 가치없는 야망에서 자유스럽지 못하였다.
그렇지 않다면 선수를 친 야고보와 요한에 대해 그토록 분개했겠는가? 그들은 쓴 경험을 통해 아직 더 배워야 했다. 그리스도의 왕국에서는 가장 낮은 자가 가장 위대한 자이다. 후에 이들은 그 교훈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이 인준하시는 야망은 훨씬 다르다.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는 전혀 다른 가치척도로 산다. 하나님이 인준하신 야망은 순수하고 고귀해야 하며 자기부인과 자기희생으로 물들여져야 한다. 제자는 그가-몸, 지성, 정서, 의지-그리스도께 소속되어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그에게 오는 어떤 영광도 그의 주인에게 속해 있음을 안다. 그의 주님처럼 받는 것보다 주려는 야망을 사모한다. 섬김을 받는 것보다 섬기는 것을, 자기 영달을 꾀하여 시간과 재능을 손상시키는 대신 주인을 위하여 시간과 재능을 사용한다.
결정적인 동기
야망의 성격을 결정짓고 그것이 칭찬할만한 것인지 가치없는 것인지 가리는 것은 야망 밑에 깔린 동기이다.”네가 너를 위하여 대사를 경영하느냐 그것을 경영하지 말라”(렘 45:5).
이것은 하나님이 바룩에게 주신 메세지였다. 그리스도의 산상설교에서 그는 권하신다.”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마 6:19).
잘못은 야망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내면에서 발생하는 동기에 있다. 그 자신 강렬한 야망의 사람인 바울은 자신을 하나의 본보기로 인용하여 목표를 높이 세우라고 다른이들을 권한다.”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 가노라”(빌 3:14).”너희는 얻도록 이와같이 달음질하라”(고전 9:24),”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바울 자신의 비범한 야망이 그의 서신들에서-어느 면으로는 간접적으로 나타나있다.”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빌 4:18).”종용해 지는 것”-내적 휴식의 고요와 평정(살전 4:11).”또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롬 15:20).
그의 모든 야망은 그리스도 안에 중심을 이루고 있음을 찾아보게 된다.”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골 1:18).
데이빗 브레너드(David Brainerd)는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영혼들을 구하여서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야망에 불타서 그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나는 어디서 어떻게 살든지 상관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위한 영혼을 얻을 수 있다면 어떠한 어려움이라도 참고 견디겠다. 내가 잘 때도 이것을 꿈꾸며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하는 생각도 그리스도께 영혼들을 인도하는 것이었다.”
죠지 화이트필드의 지고한 야망은 다음의 놀랄만한 문장에서 표현되었다. ”하나님이 영혼을 주지 않으시면 나는 죽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스도인에게 정당한 야망이 어떤 것인가를 재는 측정 자가 있다. 그 야망의 지고한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인가?
제자의 영광을 위한 것은 아닌가?
그것이 성취되면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역에 더 유용할 것인가?
그리고 그의 동료들에게 보다 큰 축복을 끼칠 것인가?
테오도르 모노드는 다음의 강령으로 이를 압축하였다.”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거룩한 야망에 대한 성서의 위대한 본보기 중의 하나가 이 장의 머리 구절에서 발견된다. 이 간단한 구절을 통해 하나님이 모든 동시대의 사람들 중에서 존귀한 자로 뛰어나게 하신 한 사람의 성품과 야망에 대해 탁월한 통찰력을 하게 된다. 이것은 그가 ”그의 형제들 보다 더욱 존귀하게”되게 했던 야망을 들어낸 탁월한 스켓취이다. 이 작은 그림의 배경은 죽음의 광야에 있는 오아시스인데 이것은 하나님이 그의(야베스) 재능에 덧붙여주신 그의 중요성을 가르킨다.
하나님이 수백만 사람들 중에서 한 사람의 비문(碑文)을 보전하느라고 수고하시고 그토록 간명하면서도 의미에 찬 말을 주신 것은 상세히 공부하라고 하신 것임이 분명하다.
그의 야망에 대한 다른 주제로 넘어가기 앞서 야베스의 생애에서 두가지 교훈을 눈여겨 보는 것은 매우 값진 일이다.
그늘지게 하는 불분명함은 필요치 않다.
거룩한 목적을 존중하는 들어난 본질만이 야베스의 비문에 실려있다. 그가 부하고, 재능있고, 인기가 있었는지에 대해 시사하는 말은 없다. 다만 그는 그의 형제나 동시대 사람들 보다 더 존귀하였다고 되어 있으며 하나님은 그의 것만을 후세 사람들을 위해 기록을 보존하신다.
교회역사를 훑어보면 하나님은 때때로 불명료한 남자나 여자들을 택하여 비범할 정도로까지 사용하신다. 한편 훨씬 많은 재능을 지닌 사람들이 지나가 버리기도 한다. 야베스는 그의 은밀한 기도로 인해 불분명한데서 나와 영영히 탁월한 데로 들어갔다. 그의 기도는 그의 생애에 대한 열쇠가 된다.
무력함이 종족의 생명에 있어서 무자격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야베스가 기질상 지독한 결점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은 그의 어머니가 지으신 이름에서도 나타나는데 그 뜻은 ”슬픔”이란 뜻이다. 그녀는 ”내가 슬픔 중에 그를 낳았다”고 하였다. 그가 태어나기 전에 강타했던 비극이 그가 세상으로 들어오는 것을 어둡게 했다.
태아기에 받은 영향은 어린이의 본성에 크게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이 아이도 역시 그 영향을 피하지 못했다. 비록 그의 본성이 음울한 기분으로 고정되었기는 하지만, 그리고 비관주의적인 경향을 물려받았지만, 야베스는 그런 무력함을 물려받지 않은 다른 형제들 위에 높이 올랐다. 차라리 그의 결점이 그를 위대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무력함이 반드시 영적인 사역을 위한 무자격일 필요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거룩한 야망에 대하여 동정하시고 공감하신다. 야베스는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신 강한 야망을 소중히 품고 있었다. 그의 네가지 간청은 사실 욕심을 많이 낸 것이며 표면상으로는 이기적인 것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구하는 것을 들으셨다”는 구절은 그의 참된 바람이 자기 영달보다는 하나님께 영광돌리는데 있었음을 시사한다. 하나님은 가치없는 동기를 높히시지 않으시며 자기중심적인 기도에 응답하시지도 않으신다.
"”구하여도 밭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구함이니라”(약 4:3).
하나님은 야베스가 하나님을 높이기를 바라기 때문에 야베스를 높이기를 기뻐하셨다.”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삼상 2:30)는 영속적인 진리이다.
그의 기도중에 나오는 사중(四重)의 간청은 마음의 포부를 말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지경을 넓힐 것을 구했다.”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보통의 축복은 그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이전에 했던 경험을 능가하는 무엇을 사모하였다. 하나님의 귀는 이런 탄원을 언제나 경청하신다. 왜냐하면 참된 영적인 축복은 언제나 성격과 자질을 귀족화시켜 다른 사람들에게 보다큰 축복을 가져오게 한다.”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그는 하나님의 지경을 넓힐 것을 구했다.”오, 당신께서 내 지경을 넓히시고”그의 일차적인 관심은 의심없이 자기가 보다 큰 영향력을 행사할 영역을 늘리는데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자기영달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요구를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그의 야망은 하나님이 인준한 것이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 중에서 어떤 것은 신앙심이 깊어 보이지만 철저히 분석해보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위험한 반(半)진리를 나타내기도 한다.
"작은 공간을 채우는데 만족하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면.”
물론 이것은 가치있는 감상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처하게 해주신 위치가 ”작은 공간”이라면 기꺼이 거기서 하나님께 영광을 드려야 한다. 우리가 그곳에서 영광을 드릴 자격을 얻기까지 승진을 해야 되리라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그런데 이 두 구절이 본의아니게 전하는 의미는 넓은 공간에서 보다도 작은 틈바구니에서 하나님은 더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보다 큰 장소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면 그곳을 채울 만큼 큰 야망을 가져서는 안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모두 생의 작은 공간을 채우게 되는 것을 원하시지는 않는다. 그는 그에게 충성스럽게 봉사할 사람들과 큰 책임의 지위에서 그를 영화롭게 할 사람들을 구하신다. 이 찬송이 예상하는 것같은 만족은 영적인 해이함에서 생기는 것일 수 있으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보다 큰 영역에 종사하는 값을 지불하기를 꺼리기 때문일 수도 있다.
캐리의 모토가 우리 주님께 더욱 값진 것이 아닐까?”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들을 시도하라.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들을 기대하라.”하나님은 야베스같은 인물들을 찾고 계신데 이들은 보다 넓은 공간에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을 돌릴 수 있을 때는 지금의 제한된 기회에 만족하지 않는다. 우리의 야망은 하나님을 위해 보다 넓은 영향력을 얻는 것, 하나님을 더 깊이 사랑하는 것, 하나님을 믿는 보다 강력한 신앙,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더욱 자라가는 것이 되어야 하겠다. 우리 야망의 동기를 조심스럽게 지켜보아야 하며, 동기가 바르면 하나님은 지경을 넓혀 달라는 우리의 기도를 거절하시지 않으실 것이다.”하나님이 그 원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하나님의 권능을 부여해 달라고 구했다.”오,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지경이 커졌다는 것은 책임이 증가했다는 뜻이며 보다 큰 요구에 응해야 한다는 뜻이다. 야베스는 하나님을 위해 이 새로운 영역을 소유하고 개발하기 위해 자신의 능력보다 큰 능력이 요구됨을 알았다.
세례(침례) 요한은 ”주의 손이 저와 함께 하심으로”(눅 1:66) 그토록 능력있게 이스라엘을 감동시켰다. 그 손은 야베스와도 함께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환경을 구했다.”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야베스는 지경을 넓히는데 따른 피할 수 없는 위험을 잘 알고 있었다-그의 적의 편에서 활동이 격화될 것이었다.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시도하는 것에는 언제나 악한 자의 적대적인 주목을 끌기 마련이다. 야베스의 기도는 모든 세대에 적용될 수 있다.”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존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한 17:15).
이 기도는 자기 사람들을 위한 우리 주님의 간청이었다. 우리는 사탄의 공격에 상처입기가 매우 쉽다. 따라서 하나님께 겸손히 의존하여 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필요를 의식하고 야베스는 하나님의 가호가 항상 머물기를 구했다.
"”하나님이 그 구하는 바를 허락하셨더라.”
하나님께 보다 큰 영광을 돌리는 것이 유일한 야망인 사람을 위해 하나님이 하시지 못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제 13장 영적인 승리로 이끄는 무기
”저를 이기었으니.”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 쌔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했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계 12:7-11).
세상에서 사탄이 휘두르는 막강한 능력을 고려해 볼 때 사탄의 활동과 방법에 대해 더 연구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관심을 두고 있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사단의 술책을 모르기 때문에 책략에 있어 우리의 헛점을 찌르게 하고 전술에 있어 우리를 이기도록 할 때가 많다. 그의 교활한 활동에 대해 깨어 있지 못하기 때문에 태만에 깊이 빠진다.
제 2차 세계대전 때 영국 육군 원수 몽고메리가 롬멜을 이기고 승리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상대방에 대해 깊은 연구를 했기 때문이다-그의 성격, 기질, 습성, 이전의 전술, 얻어진 지식으로 그는 자기의 위치를 견고케 하고 그의 원수를 연약하게 할 수 있는 작전을 짤 수 있게 되었다.
앞에서 나온 성경구절에서 우리는 사단의 성격과 방법들에 대하여 그를 이기신 분으로부터 직접 듣게 되며 그것을 가지고 우리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전쟁
요한 계시록의 11장까지에서는 교회와 세상과의 끊임없는 투쟁의 베일을 벗기고 있다. 그 후에는 이 외적인 대결은 결국 하나님과 사단, 빛과 어두움 사이의 영원한 전쟁을 표명하는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이 부분의 시작에 있어 우리는 깜짝 놀랄 문장을 대하게 된다.”하늘에 전쟁이 있으니”이 하늘의 전쟁은 땅에서도 곧 나타나는데 계속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 갔음이라”(12절).
자기 때가 줄어든 것 때문에 분을 냈다고 했는데 아마도 우리 시대의 점차 고조되고 있는 긴장을 설명하고 있는 것같다.
교회 역사를 고찰해 보면 그의 전쟁하는 방식을 보게 된다. 박해로도 어린 교회의 열성을 누그러뜨리지 못하자 유대교 신봉자들을 자극하여 은혜의 복음을 타락시키고 교활한 교훈들을 통해 분파를 일으켰다. 이 계략이 패배하여 복음이 마침내 로마의 이교주의를 극복하자 사단은 로마와 그리이스 교회들을 탄생시켜 진리와 오류를 뒤섞게 했다. 우리 시대에서도 아프리카가 완전히 복음화되는 과정이 잘 되는듯 하자 사단은 발전하는 교회와 복음이 닿지 않은 이방인 사이에 모슬렘으로 하여금 대륙 전체를 달리게 하여 방해를 놓았다.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들 각자는 지구의 전쟁에 개입되어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전체 피조물에게 복음을 받아들이게 할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자비한 적과 맞서 싸우는 전면전에 종사하고 있는 것이며 아무도 이러한 복무에서 제외된 사람은 없다. 다른 나라뿐 아니라 우리의 나라는 오히려 전장의 최전방이며 많은 사상자를 낼 것이다.
군인들
"저를 이기었으니.”9절과 10절에는 우리의 적들을 나타내는 이름들이 연속적으로 나온다. 다섯개의 생생한 단어들을 통하여 성령은 사단의 성격과 전쟁의 방법들에 대한 통찰력을 밝게 해 주신다.
-그는 큰 용으로 불리워진다.
헬라의 사상으로는 용이란 전설적인 괴물로써 무시무시하고 절대적인 힘을 가졌으며, 잔인하고 신비적이며 사납고 심술궂은 것이다.
-옛 뱀인 그는 교활하고 간사하며 은밀히 일한다.
그는 공개적으로 나타나는 일은 거의 없고 에덴 동산에서처럼 누군가의 뒤에 숨는다. 그는 빛의 천사들로 자신을 가장하기도 한다(고후 11:14).
-마귀라는 명칭은 중상자란 뜻이다.
그는 태초에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을 중상했으며 후에는 하나님께 욥을 중상했다. 중상은 그가 지닌 가장 영향력있는 무기의 하나이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같은 험구의 사역에 종사할 때 이를 기뻐한다.
-다음으로 사단이란 말이 나오는데 이는 하나님과 교회와 신자의 적이다.
그는 모든 거룩한 자들에게 잘 알려진 원수이다.”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슥 3:1).
그는 인간의 가장 큰 관심거리와는 무엇이든지 경쟁하며 하나님께 더욱 영광을 돌리는 일에도 대적한다.
-그는 형제들을 참소하는 자이다.
그는 거짓의 아비이며 자기 목적이 적중되면 진실을 말할 것이다. 그리고 슬픈 일은 사단이 자기 주장을 내세우는데 자료로 쓰이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를 하나님께 참소할 뿐만 아니라 서로 서로를 참소케 한다. 지구의 여기 저기를 다닌다는 말이 사단에게 쓰여지면 이는 ”스파이처럼 다닌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는 그의 악의적인 활동을 언급하는 것이다.
고도로 조직화된 계급사회를 가진 이 힘세고, 심술궂고, 교활하고, 중상하며, 참소하는 적이 우리를 대적하려고 다닌다면 누가 그를 이길 것인가?”여러 형제가 저를 이기었으니.”연약하고, 죄많아서 하나님께 참소를 당한 형제들이 이겼다. 형제들이라고 할 때 이는 주님과 혈연관계에 있다는 뜻이며 이것만으로도 사단의 적대의 대상이 된다. 사단은 이제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를 통해서만 교회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의심하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혈연 관계로 말미암아 또한 그들은 그리스도의 승리를 나누어 가지게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를 이기려 한다면 우리가 가진 무기들을 알아야 할 것이다.
무기
우리의 사령관은 무장하지 않고 이 전쟁에 종사하는 것을 바라지는 않으신다.
-심판의 무기가 있다.
”어린양의 피로 저를 이기었으니.”갈보리에서 그 능력(potency)을 이끌어낸 무기이다. 승리의 비결은 용맹한데 있지 않고 그리스도의 승리의 죽음을 통하여 그와 하나가 되는데 있다. ”어린양의 피”라는 구절은 마술적인 매력이 있어 설교나 기도에 중대한 의미를 주는 것이며 정통성과 초자연적인 결과들을 보장하는 그런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어린양의 피”는 경솔하게, 생각없이 중얼거리는 상투적인 문구가 되어서도 안된다. 기계적으로 반복하여 무슨 신비한 능력을 얻는 단어도 아니다. 이 말은 지적이고, 활동적이며 생동적인 믿음으로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뜻한다. 그가 피를 흘리심으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였고 마침내 그를 패망시켰다.
이 구절은 성경에서 가장 풍성한 구절들 중의 하나이다. 이 안에 그리스도의 중재사역의 유익성과 가치가 집중되어 있다. 죄인들에 의해 폭력적으로 빼앗긴 하나님 어린양의 생명은 실은 자발적으로 버리신 것이었다. 그는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나셔서 자기 자신의 피 덕택으로 하나님의 오른편에 올리워지셨다. ”어린 양의 피”는 이제 우리가 얻는 승리의 밑거름이 된다.
주목을 끄는 것은 이 구절에 나오는 ”말미암아”(by)는 ”때문에”(becauseor)이지 ” ... 을 수단으로 하여”(by mean of)라는 뜻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가 자기의 피를 흘림으로 죄와 사단의 능력을 깨뜨렸기 때문에 그와 하나가 된 우리는 그의 승리에 참여할 수가 있다. 우리는 사단을 이미 정복한 것으로 여겨야 하며 그리스도의 승리를 나 자신의 승리로 주장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단은 ”어린양의 피”에 맞설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도를 통해 어린양의 피를 내세울 때 이것은 진실로 우리의 믿음이 그리스도가 성취하신 모든 승리에 고정되고 안정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가 대신 죽었으며 승리의 부활을 이루어 하나님의 측량못할 능력을 풀어놓았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첫번째 방어 무기이다.
-증거의 무기가 있다.”여러 형제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한 믿음은 그의 살으심, 곧 능력의 말씀을 증거하는일로 이어진다. 이 구절로 보아서는 그들이 증거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아니면 자신들의 간증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아마 두가지 뜻을 다 포함하고 있는듯 하다.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간증은 영적인 결과를 성취할 능력이 없다.
그러나 말씀에 기초한 간증은 성령의 검이 된다. 마귀를 침묵케 하는 것은 논쟁이나 탄핵이 아니라 간증이다. 사도들의 말씀은 경험을 통하여 입증이 된 것으로 우리에게는 간증을 듣는 것과 같다. 지적으로 말씀을 안다고 사단과의 전쟁에 충분한 것은 아니다. 간증은 사도의 설교에서 탁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바울은 간증을 사용하여 큰 효과를 보았다. 선교의 계획에는 교육, 의료, 농업에 대한 여지가 있으나 성령의 능력으로 인도를 받는 간증의 말을 대신할만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에 접근하기에 대단히 용이하도록 해놓으셨으며 오늘날에는 우리의 간증이 날개를 달도록 하셨다. 라디오, TV, 녹음 등 모두를 그가 이용하셔서 용을 이기실 수 있으시다.
-희생의 무기가 있다.”그들은 자신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며 죽음이 와도 뒷걸음질 하지 않는다”(웨이머쓰). ”간증”이라고 번역된 이 헬라어 단어는 영어에서 ”순교”라는 단어를 파생시킨 말이다.
두번째와 첫번째 무기와는 구별되게 세번째 무기는 어떤 적을 향하는 무기가 아니다. 이 무기는 두손으로 단단히 쥐고 우리의 가슴에 꽂을 검이다. 순교의 정신을 가진 사람의 검같은 간증만이 힘차게 그 효력을 나타낸다. 그에게 생명이란 2차적인 중요성에 속한다. 이 점에 있어서 주님은 그의 추종자들에게 빛나는 본보기를 세워 놓으셨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희생제물로 내놓은 것은 갈보리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고 베들레헴에서 시작된 것도 아니다. 그는 ”창세 이후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었다(계 13:8). 그는 자신이 하신 교훈 즉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 12:24)는 말의 본보기였다. 십자가의 길을 밟지 않고 하는 간증의 말은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현대 기독교에 결여된 것 중에는 희생의 기초가 되는 순교정신이 있다. 오늘날은 그리스도인이 되면 희생을 치루기 보다는 축복을 받는다. 마치 위안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만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제자들이 될 수 있는 것같이 우리는 우리의 위안거리들에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여러 형제가 저를 이기었으니.
여기 패배할 수 없는 낙관주의에 대한 주목할 특징이 있다. 우리 주님은 단언적으로 언급하셨다.”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사단의 심판과 패망은 결국 갈보리에서 보장을 받게 되었으나 사형이 집행되기까지 우리는 이러한 무적의 무기들을 소유하는 것이다. 우리는 갈보리의 승리를 내 것으로 삼는다. 우리는 갈보리의 정복하는 능력을 증거한다. 우리는 생명 자체를 우리의 사령관을 위해 기꺼이 내놓는다.
제 14장 권위를 가지고 지도하는 기술
”먼저 결박하고... 늑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더 강한 자가 와서 저를 이길 때에는 저의 믿던 무장을 빼앗고 저의 재물을 나누느니라”(마 12:28, 29/ 눅 11:21, 22).
기도는 다섯가지 구성 요소로 나뉘어진다.
찬양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데 열중한 영혼이다.
감사는 하나님의 여러가지 은혜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는 것이다.
고백은 하나님의 기준에 이르지 못한데 대한 죄악감과 실패를 진정으로 통회하는 심정을 말로 표현하는 것이다.
간구는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 개인적인 필요를 늘어놓는 것이다.
중보기도는 우리와 같은 특권의 위치에 서있지 못한 사람들, 그리고 우리와 같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요청이다.
기도의 이러한 요소들 각각은 잘 균형을 이룬 헌신적인 생활에서 그 신분을 찾게 된다.
중보의 사역에는 정반대의 영적인 활동이 생길 수 있다. 우리의 중보기도는 안정된 믿음의 조용한 표현일 수 있다.”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마 7:7).”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히 11:6).
중보기도는 영적인 투쟁이 표현되는 것일 수도 있다.”어떻게 힘쓰는 것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골 2:1).”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니 저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골 4:12).”우리의 씨름은 정사와 권세에 대함이라”(엡 6:12).
기도에 대한 이 양상(엡 6:12)은 잘 알려져 있지도 않고 실천도 잘 안되는 편이다. 그러나 ”기도 전쟁”으로 불리는 이 일에 대한 승리가 여러 상황 가운데서 좌절과 패배를 승리로 바꿀 것이다.
이 장의 앞에 나오는 구절에서 그리스도는 귀신의 왕의 힘을 빌어 귀신을 쫓아낸다는 바리새인들의 엉뚱한 고소를 통렬히 책망하시고 있었다. 마귀가 자기의 왕국을 파괴시킬만큼 순진하단 말인가! 예수께서는 자기가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귀신의 왕에게 아첨한다기 보다는 그 왕을 정복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강한 자”
권위있는 기도에 대한 생생한 비유적인 설명에서 ”무장한 강한 자”가 우리에게 제시되는데 이는 ”그보다 강한 자”가 그를 이기고 탈취물을 나눌 때까지 자기의 왕궁과 물건들을 무사히 지키는 자이다. ”강한 자”는 비록 제한을 받기는 하지만 사람들의 영혼과 마음에 강력한 힘을 행사하는 마귀를 가르킨다.”그보다 강한 자”란 어린양 말고는 없다. 그의 피 덕택으로 우리는 어두움의 세력을 이길 수 있다(계 12:11).
어린양은 ”강한 자”와 영구한 대결을 벌리고 계시며 그가 정복되고 그의 왕궁이 완전히 망하기까지 어린양은 쉬려하지 않으신다. 경쟁하는 왕국 사이의 대결에서 중보자(기도하는 사람)는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그러나 중보자는 십자가에서 마귀를 이기시고 얻은 그리스도의 승리에 대하여 생생한 감각을 가지게 되지 않는 한 자기 역할을 최고로 효과있게 담당할 수는 없다. 중보자는 사탄이 갈보리에서 격파된 적임을 끊임없이 깨닫고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중국 남서부의 리수 사람들에게 사도였던 제임스 O. 프레이저의 경험 속에서 좌절을 승리로 바꾸어 놓았던 것은 기도의 호전적인 면을 발견한 일이었다. 그는 위대한 헌신과 자기 희생으로 5년 동안 일했었다. 그러나 그것을 나타낼만한 결실은 거의 없었다. 그는 자기 일에 용기를 잃었을뿐 아니라 내적인 경험에 있어서도 거의 자포자기의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에게 보내진 잡지의 한 항목을 읽고서 그는 구원을 받고 축복을 발견하였다.
”그 잡지가 내게 보여준 것은 고난의 근거에 명확히 저항하므로 악한 자의 세력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사람들이 듣는 영적인 가르침에 효력이 없어 보이는 것을 많이 보았다. 어쨌던 다른 진리들이 있다는 나의 생각은 실패로 끝났다. 주 예수께 모든 것을 맡긴다는 수동적인 태도는 다행히 진리이기도 하지만 그 때 당시에 꼭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다... 다른 시기에는 진리의 다른 적용이 필요하다. 고난의 근거에 대해 명확히 저항하므로 나는 빛을 찾았다. 왜냐하면 그렇게하여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렇게 하기를 원하면 언제나 영적인 영역에서 승리를 얻을 수 있음을 발견하였다... 사람들은 저항이라는 새로 발견된 무기를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프레이저 씨는 엔지니어의 직업에 종사하며 일들이 잘 진행되는 것에 언제나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을 자신에게 새롭게 적용하기 시작하자 그가 속아왔다는 것을 발견하고 몸을 떨었다. 그의 생애에 새로운 승리가 찾아왔을 뿐 아니라 갈망하던 축복이 그가 사랑하는 리수의 사람들에게 부어졌으며 하나의 방울이 거대한 시내를 이루게 되었다.
”먼저 결박한 후에야 ... 늑탈하느니라”
성서에 제시된 우선순위를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것이 전도에 효과가 없는 중대한 원인이 된다는 것은 결코 타당성없는 말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고야 그의 물건을 뺏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치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늑탈치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늑탈하리라”(막 3:27).
우리 주님께서 그토록 분명하게 말씀하신 이 순서를 지키려고 애쓸 것인가 아니면 그가 아직 결박되지 않았는데 무모하게 그의 집을 약탈하려 할 것인가? 우리가 사단의 손아귀에서 구하려고 애써온 영혼들을 뒤에서 낚아채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이것이 바로 수많은 선교사들을 실망시켜 온 마음을 찢어 놓는 경험이다. 그들은 사람들이 믿음의 고백을 하는 것을 보고 다음으로는 그들이 이교의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우리의 기도는 예수가 말한대로 ”강한 자”를 묶는 것이라기 보다 열의있는 간청을 반복하여 드리는 일에 지나지 않을 때가 너무나 많다.
이러한 표현이 뜻하는 바를 이해한다고 보고 우리 주님이 사단을 묶은 방법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주님은 마귀와 세번의 큰 대결을 했다-광야에서, 동산에서, 골고다에서.
주님은 광야에서 사람의 심금에 와닿는 세가지 방법-곧, 식욕, 탐욕, 야망-으로 맞부딪혀 모든 유혹을 저항하는데 성공하시므로 첫 승리를 장식하셨다. 유혹의 각 단계마다 성령의 검으로 물리치셨으며 패배한 마귀는 잠깐동안 그를 떠나갔다. 이 승리로 인하여 예수는 신뢰할 만한 주장을 하시게 되었다.”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요 14:30).
우리 생활에 완고한 부분이 있어서 사단이 우리를 붙들어 두게 한다면 우리가 사단을 실제로 결박하는데는 무력하여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우리 주님의 마귀와의 다음 대결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있었다. 그의 투쟁이 너무나 강렬하고 고뇌스러워 그의 땀구멍에서는 피가 스며 나왔는데 이것은 자연법칙이 아니었다. 이 경우는 어떻게 승리하셨을까?
자기 뜻을 그의 아버지의 뜻과 합병하므로 승리하셨다. 그의 기도에는 인상적인 발전과정이 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1, 42).”다시 두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 26:42).
두번째 기도에서는 첫번째 간구에서 나타난 인간 본성이 지닌 마지못해 함은 사라지고 기꺼이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셨다.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만 나온다. 그는 이제 단순히 받아들일뿐 아니라 몹시 기뻐하신다.”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요 18:11).
이리하여 주님에서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포함되는 한이 있어도 아버지의 뜻을 완전히 기쁘게 받아들이겠다는 뜻을 끝까지 버리시지 않음으로 해서 사단은 다시 한번 산산히 부서지는 실패를 맛보았다. 우리가 승리의 자리에 남아 있으려면 하나님의 뜻을 의심없이 받아들여야만 한다.
마귀를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패배시킨 것은 골고다에서 이루어졌다. 그리스도는 그의 죽음을 통해서 그를 이기었다.”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골2:15).
그가 성육신하신 목적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히 2:14)가 아니었나?
"파괴하다”는 단어가 뒷부분에 나오는데 이것은 ”효력이 없게 하다, 행동을 못하게 하다”는 뜻으로 이와 똑같은 개념이 강한 자를 묶으라는 명령에 개입되어 있다. 그의 죽으심을 통하여 주님은 신자를 이기는 마귀의 권세를 영원히 무찌르셨다. 그후로 마귀는 강탈자가 된 것이다. 그가 이제 우리에게 행사하는 주권은 그리스도의 승리의 완전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제것으로 삼지 못하는데 있거나 아니면 우리의 생활에서 묵인된 죄의 결과이다.
이러한 묵인은 마귀의 활동을 위한 유리한 고지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마귀를 ”파괴했고”, ”결박하였다”는 사실을 굳게 붙들자. 그러면 우리는 그의 몸의 지체(멤버)로서 살아있는 믿음에 그와 연합하여 한 몸이 되고, 같은 생명을 나누며 그의 승리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승리는 우리 주님의 승리였다. 사단에게 내려진 선고가 최종적으로 집행되는 것은 심판받은 모든 자를 주께서 벌하실 때이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그의 승리에 참여하게 하신다. 그의 승리는 우리의 승리가 된다.
가능성과 실제성
현실적인 질문은 사단을 이긴 이 승리가 우리의 특별한 관심이 있는 분야에서 어떻게 실제로 작동하게 되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사단의 세력으로부터 모든 영혼을 구하셨을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가능성은 현실성으로 바꾸어져야 하는데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영적인 권위를 행사할 때 이루어진다.
70인이 전도여행에서 혁혁하게 돌아와 귀신들도 그들에게 복종한 일로 기뻐하자 예수는 놀라운 언급을 하셨다. 이 언급의 중요성은 아무리 해도 다 이해할 수는 없다.”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눅 10:18, 19).
우리는 이 초대 제자들보다 지위가 못하지 않다.
이 발언에서 예수는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위임한다는 말을 사단의 타도에 연결시켜 연이어 말씀하셨다. 이 권세는 그들이 아무 때나 어떤 상항에서든지 사용할 수 있었다. 그들이 이 권세를 써먹자 효력이 있어 귀신들조차 그들에게 복종하는 것을 보았다. ”내 이름으로”(즉 그의 권위로) ”저희가 귀신을 쫓아내며”(막 16:17).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권위를 사용하므로 사단을 결박할 수있으며 담대히 ”그의 집을 늑탈”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일을 함에 있어 우리가 선 땅을 확인해야만 한다. 사도행전 19장에는 방랑하는 유대인 무당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이 사단과 악한 영들에게 권세를 행사하려고 했던 일에 대한 기록이 있다. 귀신을 쫓아내려는 자신들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자신이 소유하지 않은 권위를 사용하려 했다.”바울이 전하는 예수의 이름을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그러나 사기임을 알고 귀신들린 사람이 응답하기를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고 하였다(행 19:15).”악귀들린 사람이 그 두 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여 이기니 저희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행 19:16).
주어지지 않은 권위를 가장하는 것은 숙연한 일이다. 어두움의 세력을 가볍게 취급해서는 안된다.
예수는 귀신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으며 그들에게 두려움이 되기도 했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막 1:24)
이것은 시켜서 한 것이 아닌 자발적인 간증이다.”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마 8:29).
30년 동안 그들은 예수의 죄없는 생활을 지켜보았으며 그를 누를 수 없음을 알았다. 그들은 바울과도 안면이 있었다. 이들은 바울이 그리스도인의 피에 굶주려 있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던가? 이들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그의 완전한 변화로 말미암아 그들의 가장 무서운 적이 된 것에 당황하지 않았었나? 그렇다. 그들은 바울과 안면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방랑하는 유대인들은 알지 못했다. 그들의 이름들은 지옥에 알려지지 않았다.
우리의 이름은 어두움의 세력들에게 알려졌는가 아니면 우리는 영적으로 하잘 것 없는 사람들이어서 그들의 왕국에 아무 위협을 주지 않는 것인가? 우리의 기도는 ”강한 자”를 묶는데 효과가 있는가 아니면 그의 집을 늑탈하려는 우리의 미약한 노력을 그가 비웃고 있는가?
무기력할 필요가 없다
귀신들린 소년의 아버지가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다”고 말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원수의 모든 힘을 제어할 권세를 주신 바로 그 제자들을 애석하게 여기면서 한 말이었다. 그들이 예수님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라고 묻자 그는 한마디로 ”불신앙” 때문이라고 진단하셨다(마 17:20, 21). 그들은 주께서 그들에게 준 권위(권세)를 생명력있게 믿지 않았으며 그 불신앙이 그들을 무력하게 하였다.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전혀 부적절한 상황에 개입된 것을 알게 되면 그리스도의 권세를 사용하여 승리가 확실히 드러나기까지 주께서 십자가에서 획득하신 승리를 주장하고 계속 믿음에 서 있어야 한다. 사도 바울이 믿음의 싸움을 싸우라고 한 것은 이 뜻이 아니겠는가?
제임스 O. 프레이저가 성령이 주시는 깊은 확신으로써 리수마을의 가정들 백개 이상이 자신의 것이라고 기도중에 주장하였을 때 그에게 이 교훈을 가르치셨다.
"사단의 술책은 이런 것 같다. 즉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가 믿음의 자리로 뚫고 나아가는 것을 방해한다. 그렇게 하므로 ”주목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는 육적인 어슬렁거리는 기도는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런 기도들은 사단을 손상시키지는 않기 때문이다. 어떤 분명한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는 분명한 믿음을 얻기가 그처럼 어려운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조용하고 안정된 믿음을 얻게 되기 앞서 기도로 애쓰고 씨름해야만 한다(엡 6:10). 그리고 우리가 곧장 뚫고 나아가 하나님의 손을 마주 잡기까지는 결국 참된 신앙을 얻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한번 참된 신앙을 얻으면 지옥의 모든 원수들은 그것을 무효화시킬 힘은 없는 것이다... 정말 전투는 믿음의 기도를 드릴 때 시작된다.”
그리스도의 권세를 사용하며 그의 승리에 참여한다면 우리는 주어진 어떤 영적인 환경에 있어서도 ”강한 자”를 결박하는 도구로 쓰여질 수 있다. 그럴 때에만 우리는 그의 재산을 늑탈하고 포로된 자들을 구하는 위치에 있게된다.
제 15장 영적 열정 - 그 허(處)와 실(實)
”열심으로는...”(빌립보서 3장 6절).”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요한복음 2장 17절).
정당한 열심은 욕심을 내야 할 자질이다. 웹스터 사전에 따르면 이 단어의 뜻은 ”어떤 일이거나 추구하는 열의, 불타는듯한 적극적인 관심, 몰두, 열성”이다. 이처럼 바람직한 성품을 뜻하는 이 단어가 불행히도 뜻의 혼란을 가져와 대단히 열성적이지만 균형과 지성이 결여된 사람을 나타내는 때가 많다.
열성이라는 단어가 비록 특징적인 그리스도인의 단어라고는 할 수 없으나 그리스도인의 어휘 중에 분명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세속적이거나 거룩한 생의 활동들 중 어떤 것에도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나 인간의 봉사사역에 있어 위대한 일들을 성취한 사람은 너나없이 그들의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 있는 장애물들을 뛰어넘게 해온 불타는 열심으로 특징지워져 오고 있다.
우리 주님은 어려서부터 독특한 수준으로까지 이 자질을 나타내셨다. 그가 12살 밖에 안되었을 때 그의 부모로부터 합당치 않은 책망을 받게 한 것도 아버지 하나님의 집에 대한 열심과 관심이었다. 그의 지상생활 전체를 통하여 그의 열정은 자신을 십자가로 이끌어가기까지 약해지지 않고 지속되었다.
그릇된 열심
영적인 열심을 넘어선 것은 대부분 육체적인 정력일 뿐인 경우가 많다. 이것은 영적이라기 보다는 ”정신적인” 것이다. 종교적인 열심도 복음적인 신자들에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여호와의 증인같이 이단도 이런 불타는 열심을 내지 않는가?
카이로에 있는 알 아즈하르 대학교에서는 모하멧을 위하여 세계를 정복하기 위해 해마다 5,000명의 회교 선교사들을 훈련시켜 파송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부처가 오신 2,500년 째를 기념하여 타일랜드에서는 1957년 5월 13일에 젊은이들 2,500명이 불교사제로 승인을 받았다.
인류는 지구 전체에 퍼져 있는 공산주의자들의 세계혁명에 대한 열의에서 나타난 것보다 더한 광신적인 열성의 예를 결코 찾아 볼 수 없다.
바울이 개종하기 전에 열성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비참하게도 방향이 틀린 것이었다.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고 그는 자신을 방어하는 중에 확실히 밝혔다(행 22:3).
그러나 그의 열성은 통탄할 일로 그를 이끌어 갔다. 그는 신실한 유대인이라고 할 때 예상되는 유익을 계산에 넣고 이런 말을 했다.”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빌 3:6).”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하였고”(사도행전 26:11).
다메섹 도상에서의 그의 경험이 있은 후로는 그의 그릇된 열성은 그의 가장 큰 비탄거리의 하나가 되었다.”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고전 15:9).
그는 자신을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한껏 누렸다.”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 1:12, 13).
잘못된 열성은 하나님의 교회를 파괴하는 일을 할 수도 있다.
오해적인 열성
주님은 다른 사람들과는 눈에 띄게 달랐기 때문에 원수들이 예수를 귀신들린 사람으로 묘사하였다.”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요 7:20).
그의 친구들은 주님의 비범한 행동들에 대하여 보다 친절한 해석을 붙여 주님께는 그 행동들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설명하였다.”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막 3:21).
세상에서 오직 한 분 완전히 균형잡힌 사람을 그의 동 시대 사람들이 이처럼 여겨야 하다니 놀랄 일이 아닐 수 없다!
"열심”이란 단어는 헬라어의 ”끊이다”는 동사에서 왔으며 마음에서 저지할 수 없도록 끓어 오르는 열정, 몰두를 뜻한다. 제자들은 그 주인이 거룩한 열심으로 불타오르며 죄없는 의분으로 이글거리는 것을 보자(수세기를 흘러온 리듬을 깨고 성전의 장삿군과 돈 바꾸는 자들을 몰아내심을 보고) 그들은 갑자기 시편 69편 9절의 예언이 의미심장함을 깨닫게 되었다.”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요 2:17).
예수님은 경계하셨다.”제자가 그 선생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마 10:25).
주님을 오해한 사람들이 바울을 오해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행 26:24).
그리스도인의 건전을 전하는 사도가 정신적으로 불균형을 이룬 사람으로 취급을 받아야 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는가? 그 시대의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바울의 활동이 정상적이라고 하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건전성이란 상대적인 용어이다. 판단하는 사람에게 달려있다. 그가 에베소에서 신자들에게 도전을 주었을 때 실생활에 표준이 되는 행동은 아니었다.”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 20:31).
그렇지만 이 일은 참된 건전성에 대한 증거가 아니겠는가? 바울은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을 바르게 전망하고 조화있게 행동하였다.
주여, 바로 오늘 제게 불타는 열성을 주옵소서,
죽어가는 영혼들을 위하여 그것으로 변호하게 하소서,
강렬한 갈망으로, 죽음처럼 강한 사랑으로, 하나님이 주신 믿음으로 ...
세상은 ”미쳤다”고 할 지도 모르옵니다.
그러나 그 또한 내 기쁨이며 세배의 축복이옵니다.
먼저는 나의 냉냉한 가슴에, 다음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리고는 나의 죄로 녹슨 형제를 죽음의 항아리에서 건져낼 수도 있으니
-저자 미상
로마서 12장 11절에서 바울은 신자들에게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권고한다. 또한 같은 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온건성을 개발하라고 격려한다. 그러므로 그의 생각 속에서는 열심과 온건은 서로 배타적일 필요가 없었다.
브래이크라크(E. M. Blaiklock)는 로마서 12장 3절을 이렇게 옮긴다.”하나님이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게 할 수 있게 하셨기 때문에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 각자는 자신을 마땅히 생각해야 할 그 이상으로 높게 생각지 말고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그리스도인의 온건성을 개발하라.”바울은 자기-존중을 반대하고 온건하게 생각할 것을 가르쳤다. 그가 사용하는 sophrusune(soberly/한글판 성경에는 ”지혜롭게”로 되어 있음, 온건하게, 맑은 정신으로의 뜻”(역자 註)이란 단어는 중용 그리고 자기조절이란 개념과 연결되며 이는 극단으로 내닫지 않는 마음의 섬세한 균형을 뜻한다. 그렇지만 이 사람은 그의 주인에 대한 과잉 열성으로 인해 제정신이 아니라고 고발을 당한 사람이다.
참된 열성
토저(A. W. Tozer)는 참된 열성과 거짓된 열성을 대조한다.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순수한 사랑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불타는 욕망으로 표현되며 우리의 동료들에 대한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의 복지를 위해 쏟아 붓는 헌신으로 인도해 간다. 이같은 사랑은 물론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된다. 그러나 자기에게 중심을 둔 야욕적인 종교자의 습관적인 소심한 활동은 하나님의 비위에 거슬릴 것이 뻔하며 셀 수 없는 수많은 인류의 영혼에 해로운 것으로 결국 드러날 것이다.”
참된 열심은 그리스도를 대상으로 하며 그로 말미암아 고취되는 열심이다. 진젠도르프 백작은 주장하였다.”내게는 오직 한가지 정열이 있다. 그 정열은 주님, 주님 한분 뿐이다.”그의 그리스도 중심의 열심은 세상의 가장 위대한 선교 조직체의 하나인 모라비안 교회를 일으키게 했다.
프레데릭 마이어즈(Frederic W. H. Myers)는 바울의 불타는 열심을 강렬한 말로 설명한다.
그리스도시여, 나는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당신께 저의 이 부름이 만족스럽기를 빕니다.
예, 내게 있어 당신은 크나 큰 만족입니다.
자, 어떤 애교있는 말로 나는 당신을 꾀려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명성도 친구도 없었고 그리스도 뿐이었습니다.
예, 삶과 죽음을 통하여, 슬픔을 통하여 그리고 범죄를 통하여
나는 그를 만족해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만족해 왔으니까요
그리스도는 끝입니다. 그리스도는 처음이시니까요
그리스도는 처음이십니다. 끝은 그리스도이시니까요
그리스도를 중심한 열심은 여러가지로 나타날 것이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해 ”밤낮 눈물로써” 잃어버린 자들을 구하도록 하게 한 것도 이 열심이었다. 이 열심이 에바브라로 하여금 골로새에 있는 그의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강렬한 기도를 하도록 인도해 갔다.”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니 저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 구하나니 ...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하는 것(열성이 대단한 것)을 내가 증거하노라”(골 4:12 13).
이 열성은 마케도니아 개척민들로 하여금 자극적인 연보를 하게 했다.”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하여는... 너희 열심이 퍽 많은 사람들을 격동시켰느니라”(고후 9:1, 2).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목적들 중의 하나가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을” 삼으려는 것일 정도이다(디도서 2:14). 참된 열심은 언제나 영적인 수확을 걷게 마련이다.
그의 개심자들에게 바라는 바울의 참된 바람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로 불타오르는 마음, 하나님과 인간을 향한 사랑으로 불타는 심정,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정으로 타오르는 의지였으며 그의 기도들 중에 잘나타나 있다. 우리 복음주의자들에게 장학금도 더 필요하겠지만 그리스도를 위한 백열등같은 열성이 더욱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깊은 지식과 불타는 열성의 결합은 희귀할지는 모르지만 양립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헨리 마르틴은 인도의 토양을 위하여 제일 처음 일어섰을 때 이렇게 외쳤다.”이제 하나님을 위해 나를 불태우게 하소서.”짧은 7년이었지만 문자 그대로 그의 열성이 그를 불태웠다. 그가 죽기 전에 신약을 세 나라 말로 번역했다! 다음의 언급은 그가 감동 중에 한 말이다.
내가 죽을 때 얼마나 기쁠까
내 생명의 등잔이 당신을 위하여 다 타올랐으니.
한 죄인을 구하기 위하여 내가 바친 수고와 돈에는 관심을 두지 않겠네
길이 거칠었던 것에도 관심두지 않겠네
"
내가 죽을 때 나는 얼마나 기쁠까
내 생명의 등잔이 당신을 위하여 다 타올랐으니.
약화되는 열심
열심은 반드시 사라지기 마련이라는 바울의 지식은 부지런할 것을 권면하도록 마음을 움직였다. 청소년기의 열심을 계속 지니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는 시작은 잘하나 끝까지 성취하는데는 실패하는 때가 많다. 바울은 젊은 디모데에게 이런 경향성을 주의시키고 있는 것같다. 맥빠진 군대가 되지 않을까 염려하여 이렇게 권면한다.”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딤후 1:6).
솔로몬 군도에 사는 원주민들은 잘 때 불이 담요 역할을 한다. 밤에는 쌀쌀하므로 체온이 점차 떨어지면 불꽃 주위에 더 가까이 몰린다. 때때로 서로서로 일어나 죽어가는 불에 새 연료를 넣어 그 열기를 즐기게 된다. 에베소교회가 이와 비슷한 상황에 있었다. 그리스도를 향한 그들의 첫사랑의 불꽃이 시들어 미약한 깜부기 불이 되었고 저들의 주님은 헌신의 불꽃에 새 연료를 부어 다시 살리라고 권하셨다. 그렇지 않으면 증거의 등잔을 옮기겠다고 하셨다.
미지근한 그리스도인들은 각성하는 사역을 하지 못하며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이끌지도 못한다. 자기 세대에게 감명을 주는 사람은 열심의 사람이며 그의 설교는 사람들의 마음에 구원의 감동을 남긴다. 밥티스마 요한에 대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놀라운 간증을 하셨다.”그는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요 5:35).
등불은 언제나 심지를 소모시키면서 빛을 낸다. 아돌프 다이스만(Adolph Deissmann)은 다음의 말로 바울의 줄어들지 않는 열성을 설명하였다.”다메섹의 불빛은 젊은 박해자의 영혼에서 다량의 타지 않는 재료를 찾아 냈다. 불꽃이 타오르는 것을 보았고 그 때 밝혀진 빛이 노년 바울에게서 조금도 줄지 않았음을 느낀다.”
지속된 열심
로마서 12장 11절의 중앙에 나오는 ”열심을 품고”(fervent in spirit)라는 말대신 리즈는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정신이 끓는 점에 머물러 있게 하고”우리가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사람을 섬겨야 함과(11절 상)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종의 신분이라는 사실은 우리의 영을 ”열정으로 대단히 끓어 오르도록” 유지하는 중앙의 용광로이다. 영적으로 사기충천한 때에 끓는 점에 도달하기는 쉽지만 거기 머물러 있기는 쉽지 않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열심을 만들어 내거나 자신의 열심을 유지할 수는 없다. 열심이 그 기치를 올리지 않는다면 외부의 자극이 있어야 하는데 이 일은 성령의 불로 말미암아 공급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생긴 능력은 쓸모없는 김이 되어 사라져서는 안되며 주님을 위하여 종의 신분으로 섬기는데 이용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최고로 중요한 것은 성령과 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며 그를 근심케 하지 않는 것이다.
「천로역정」에 보면 그리스도인이 해설자의 집에서 난로에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거기에 물을 붓고 있었는데 불꽃은 더욱 더 높이 솟았다. 그는 이런 현상을 놀라서 바라 보았지만 마침내 뒤에서 누군가가 기름을 붓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불에 기름을 계속 붓는 것은 성령의 사역이며 우리의 열심을 끓는 점에 보존케 하신다.
아폴로는 성령의 사역에 대한 빛나는 본보기였다.”그가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행 18:25).
부활이 있은지 오십일만에 복음의 사실은 완전하고 일반적인 지식이 되었다. 그러나 성령이 강림하실 때까지 중요한 일은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성령이 강림하시자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술취한 것으로 밖에는 설명할 도리가 없었다. 이는 거룩한 충동을 마귀의 충동으로 혼동된 것이다.
우리가 ”성령의 도우심을 입어 끓는 점에 보존되는 일”은 가능하다. ”그리스도에 대하여 충분히 생각하고, 충분히 묵상하고, 충분히 숙고하므로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알렉산더 휘트(Alexander Whyte)는 말한다.”그렇다. 이렇게 하면 당신은 바울의 마음처럼 뜨거운 심정을 소유하여 생각하고, 읽고, 기도할 수 있다. 그리스도에게 자기의 뜨거운 마음을 주신 성령, 바울에게 자기의 뜨거운 마음을 주신 그 똑같은 성령께서 당신에게도 또한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제 16장 묻지 않고 따라가는 제자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요 21:23).
시련을 당하는 성도들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이스라엘과 한편이 되어 불평하기가 일쑤였다.”주의 길이 공평치 않다 하는도다”(겔 18:29).
하나님의 어떤 처사는 우리가 타고난 정의감에 모순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동료들은 우선적인 취급을 받는 것으로 보이고 그래서 우리에게 맡겨진 책임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대신 어깨너머로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사도 베드로가 가진 경향성이었는데 우리 주님은 두가지 경우를 매우 신실하게 다루셨다. 해가 없어 보이는 그의 질문들에 대하여 우리 주님의 반응이 냉정하거나 적어도 씁쓸해 보이는 때가 종종 있었다. 이 어부는 온유하시고 성육신하신 사랑의 주님께 자기가 생각한 것보다 심한 대우를 받았다. 주님이 좀 편하시라고 좋은 뜻에서 드린 베드로의 제안은 심한 책망을 받을 만한 것은 분명히 아닌것 같았다.”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마 16:23).
또 한가지 경우는 요한의 미래에 대해 악의 없는 질문을 했을 때였다.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이 질문 역시 너무 거친 취급을 받았다.”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정중한 말로 한다면 ”베드로, 당신 일이나 신경쓰시오”가 될 것이다.
우리 주님은 ”먼저 된 자로써 나중되고 나중된 자로써 먼저 될 자가 많다”고 경고하시지 않으셨던가?
이것은 베드로의 책임있는 질문에 대한 주님의 쌀쌀한 응답이셨다.”자, 우리가 모든 것을 버려두고 당신을 좇았습니다.”주님은 베드로를 괴롭히는데서 기쁨을 얻으셨나 아니면 중요한 진리를 강조하려 하셨나 ?
주님이 단호하고 준엄하게 말씀하신데는 오늘날 그의 모든 종들이 참고해야 할 그만한 중요한 이유가 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베드로와 부드럽고도 영혼을 살피시는 대화를 가졌던 것은 그가 이제는 겸손해지고 참회했을 때였다. 주께서 세번 반복하신 질문에 답하면서 베드로는 새로워진 마음으로 사랑을 주장하였고 새로운 사명을 받았다. 다음으로는 베드로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격렬한 죽음을 당할 것에 대한 예언적인 발표가 있었으며 끝으로 ”나를 따르라”는 명령이 있었다(요 21:15-19).
부적절한 질문
지나간 몇시간 동안의 감동적인 경험은 베드로를 그처럼 은혜스럽게 회복시켜 사명을 다시 주신 주인께로 그의 관심을 집중하게 하기에는 충분했으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주님께 관심을 집중하기 보다는 자기의 미래를 요한의 미래와 비교하기에 바빴다. 즉각적으로 그의 마음은 옆 길로 빗나가 언제나 준비가 되어있는 혀로 발설한다.”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예수님은 그가 늘상 하시던 대로 다른 질문을 하시므로 베드로의 비평적인 질문에 답하셨다.”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찌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베드로는 그가 관심이 없는 영역으로 밀어 넣어지고 있었다. 거절과 고난의 좁은 길을 발아야만 함을 알고 충격을 받은 중에 그의 첫 반응은 자신의 운명을 다른 사람의 것과 비교하는 것이었다.
그는 차별대우를 받고 있는 것인가?
요한은 베드로가 견뎌야하는 고난같은 데서 제외되는 것인가?
요한도 묶어져서 그가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 갈 것인가 아니면 특별한 취급을 받게 될 것인가?
베드로에게 자기연민이 시작되었음을 느끼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베드로가 이런 내용을 함축하여 질문한 것에 대답해 주는 대신 주님은 베드로의 관심을 날카롭게 책망하셨다.”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베드로의 장래를 결정하시고 그것을 나타낼 권리를 주장하신 주는 이제 요한에 대한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신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베드로는 왕국의 이익을 위한 일중 최고로 중요한 일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있었으며 자기 교훈을 철저하게 배워야만 했다. 예수님을 따라감에 있어 그는 뒤로 돌아서거나 자기 운명을 다른 제자의 것과 비교해서는 안되었다. 그의 지속적인 유혹은 다른 사람들의 일을 관리하려는 것이었다. 한 경우에는 예수를 관리하려고 까지 하지 않았던가?
베드로가 배워야 했던 것은 그의 주인이 자기 제자들 각각을 개별적으로 다루시고 있음을 배워야 했고 그 방법이 다른 사람들에게 언제나 명백하거나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님을 배워야 했다. 어떤 제자에게도 주께서 다른 제자를 다루시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다른 이들을 다루도록 하시지는 않으신다. 또한 자기 운명을 다른 이들과 비교하게도 하지 않으신다. 요한은 그가 할 수 있는 한 깊이 고난의 잔을 마실 것이지만 그것이 베드로의 관심사는 아님을 그가 알아야 했다.
그의 오직 한가지 관심은 그의 주인을 따라가며 자기 발걸음을 조심하고 하나님의 양 떼를 먹이는 책임을 다하는 것이어야 했다(15-17절).
자기연민 또는 자기검토
예수께서 자기의 책망에 대하여 한마디의 설명이나 해설을 하지 않았음에 대해 주목해 볼 가치가 있다. 절대주권의 주님은 자신을 제자에게 설명해야되는 의무는 없는 것이다. 주님은 다만 베드로가 자기의 관심사가 아닌 일에 간섭하고 있음을 수정처럼 맑게 보여주었다. 주님은 아무 위로의 말씀도 없으셨다. 지금 위로를 한다면 연약함에 빠지게 하고 자기연민을 일으키게 되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냉혹한 전쟁에 종사하도록 되어 있는 군인이었다. 그는 엄격하고 정밀한 훈련을 받아야 한다. 여기에 이처럼 엄하게 책망하신 배경이 있다.
예수님은 영웅들을 원하시며 남의 일에 참견하는 사람들은 원치 않으신다. 주님은 자기의 명령에 대해 자기연민없이 질문없는 순종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야하는 것이다. 주님은 타고난 기질적인 연약함에 대해서도 가차가 없으시다. 주님은 베드로가 책망을 받고 마음이 아프도록 놔두셨다. 요한이 죽지 않을 것이라는 억측을 고쳐주시려고도 하지 않으셨다.
그의 말 뜻은 결국 ”내가 오기까지 그가 남아 있는 것이 나의 좋은 즐거움이라고 한다 해서 그것이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의 관심은 나를 계속 따르는 일에 고정시켜야 한다. 너의 형제 제자가 특별 취급을 받거나 말거나 신경질을 내서는 안된다” 라는 것이다.
베드로는 초기에도 똑같은 경향성을 나타냈었다.
한번은 자기의 재산에 억눌린 부자 청년 관리가 슬프게 돌아간 일이 있었다. 그런 품행을 가르키며 예수는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씀하셨다. 그 젊은 관원에 대하여 의식적인 우월감을 가진 베드로는 늘 준비되어 있는 혀로 끼어들었다.”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마 19:27).
베드로는 보다 우월한 헌신은 마지막 날에 우위를 차지할 것이라고 의심없이 기대했다. 그의 말은 옳은 것이었다. 희생적으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백배나 받을 것이요 저쪽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유업으로 받게 된다고 주님은 확신을 주셨다. 그러나 주님은 한가지 숙연해질 조항을 첨부하셨다.”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되고 나중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베드로는 자신을 젊은 관원과 비교하여 유리하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봉사사역에 대한 동기를 면밀하게 검토해보아야 한다.
동기와 보상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포기와 기권의 배후 동기이다. 베드로는 말했다.”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예수님은 백배의 보상을 받는 동기는 ”내 이름을 위하여”(29절)라고 시사하셨다. 봉사사역의 최고 목적이 무엇을 얻기 위한 것이 된다면 우리가 목표로 하는 것을 성취할 수는 없다. 우리의 동기가 그리스도를 위한 사랑일 때 그는 우리가 잃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보살펴 주신다.”백배 ...영원한 생명.”먼저된 자는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된다.
이 대화에 연속하여 나오는 일군을 고용한 포도원 주인의 비유에서도 이런 같은 원리가 뚜렷하게 드러난다(마 20:1-16).
새벽에 고용된 사람은 11시에 고용된 늦게온 사람들이 자신들과 같은 급료를 받는 것을 보자 신경질내기 시작했다. 사실 그들은 언약된 품삯-정당한 품삯도 됨-을 받았으나 정당한 취급을 받은 것이었을까?
불평을 털어 놓자 주인은 두가지 반박할 수 없는 진술로 저들을 대했다.
첫째는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는 진술이다. 그는 그들과의 계약을 그대로 성취했다. 그는 그들에게 사기를 한 것이 아니었다. 정당성이란 관점에서 볼 때 고소할 것이 없었다.
둘째는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마 20:15)는 진술이다. 주인의 관대함이 아무에게도 해를 끼친 것이 아닌데 자신의 감정을 상하게 되었다.
상은 일한 시간의 길이에 따른 것이 아니라 허락된 기회를 충성스럽게 이용한데 따른 것이다. 12시간 노동한 사람의 문제는 그들의 부당한 불평들에서 명백하게 나타난다.”먼저 온 자들이 더 받을 줄 알았더니.””저희를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이리하여 절대주권의 주께서는 베드로에게 다른 제자들을 다루시는 일에 대해 명령하거나 끼어들지 말 것을 명백히 하신 것이다. 주님이 다른 사람보다 어떤 사람에 대해 보다 더 관용하거나 관대해보여도 그가 누군가에게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기 것을 가지고 자기 뜻대로 하실 수있으시다.
이 문제를 개인적으로 적용해 보자. 주께서 보다 관대하게 다른 사람들을 다루시는 것처럼 보인다면, 즉 우리에게 제한하신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는 부여하신다거나 우리의 마음에 그늘을 내리는 슬픔과 고난의 어두운 그림자를 주시면서 다른 사람들은 계속 햇빛을 쪼이게 하는 것이 분명하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할 것인가?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는 아직 거울을 통해서 보듯 흐리게 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부분적으로만 알 수 있다. 사물들은 표면에 나타나는 것보다는 훨씬 평등한 것일 수도 있다. 누가 다른 사람의 마음에 숨겨진 근심과 부담감을 알 수 있는가?
비밀스런 짐
위대한 선교 탐험가 데이비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이 한창 그 명성을 날릴 때 그를 찬양하는 사람들에게 말했다.”인생의 항로를 항해하고 있는 우리의 배가 순풍에 돛달고 영광스럽게 항해해 갈 때 그 배 밑에는 바닥짐이 있어 배가 안전하게 균형을 잡아가듯이, 이런 바닥짐을 우리에게 짊어지게하는 어떤 손길이 있는 것입니다.”그의 은밀한 바닥짐은 그에게 큰 슬픔을 안겨주는 죄에 빠진 아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동료 제자들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처사는 우리의 관심사가 아님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내가... 할찌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우리가 관심가져야 할 일은 우리의 동기를 조심스럽게 지켜보며 우리가 따라가는 그 분에게 눈을 고정시키고 어깨너머로 다른 사람들을 보지 않는 일이다.
이 원리는 국내뿐 아니라 선교지에도 특별한 관련이 없을 수 없다. 왜냐하면 탐내는 것과 질투는-불평은 말할 것도 없고-두 곳 어디서나 번창할 수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보다 후한 장비와 시설을 선물로 받는가?
다른 사람들이 특혜취급을 받는가?
우리는 더욱 훌륭한 선천적인 은사를 몹시 바라며 다른 사람들의 보다 매력적인 인품을 시기하는가?
다른 사람들은 시간과 돈을 사용함에 있어 그리고 일하는 품행에 있어 양심이 없어 보이는가?
우리가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 진급을 다른 사람이 받았나?
우리는 오해를 받고 있으며 우리 일이 진가를 인정받고 있지 못하는가?
우리는 같은 써클에 있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역경을 치루거나 아니면 위안이나 편의를 누리지 못하는가?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거두지 못한 성공을 즐기고 있는가?
주님은 간단한 격려의 말로 우리의 문제에 답하신다.”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주께서 다른 사람들을 다루시는 일에 신경질을 내서는 안된다. 우리는 그가 비록 방향은 다를지 모르지만 똑같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 훈련을 받고 있다는 확신으로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다. 주님께 또는 우리들이나 다른 사람들을 훈련시키는데 있어 아무 거치는 일이 없음을 알 때 축복을 받을 수있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며 우리가 가지지 않은 것을 누린다는 사실을 우리는 활기있게 깨닫고 기뻐해야 한다. 우리의 처사들은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관여되어야 하며 우리의 전 관심은 다른 사람이 무엇을 하든지 갈렙처럼 ”주를 온전히 따르는 것”에 두어야 한다.
제 17장 시간의 전략적인 사용
”세월을 아끼라”(에베소서 5장 16절).
바쁜 그리스도인 사역자들은 세상에서 자주 듣는 표현을 빌려 쓰는 경향이 있다.”시간이 없어,” 또는 ”너무 바빠서.”이 말은 굉장히 성실성있게 들리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종종 있다. 이 말이 무심코 드러내는 내적인 태도는 신경계통에 파손을 가져올 수 있으며 또한 그 결과 영적인 생활에도 해가 될 수 있다.
우리에게 충분한 시간이 없다는 것은 정말 사실인가?
위대한 인물들은 너무 바쁘다는 인상을 절대로 주지 않으며 오히려 제법 여유가 있어 보이는 인상을 준다. 굉장히 바쁜 인상을 주는 사람들은 대개는 통이 작고 능력이 없는 사람이다.
호레이스 부쉬넬(Horace Bushnell)의 세계적으로 유명한 설교 중의 하나에는 「모든 사람의 생애에 대한 하나님의 한가지 계획」이 있는데 여기에 빛을 비추어 주는 문단이 나온다.
"모든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의 마음에 새겨진 완전하고 온전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이 거룩한 전기(傳記)가 살아야 할 생애에 끼어드는 것이다. 지금은 펼쳐지지 않았으나 이 생애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완전하고 아름답게 펼쳐지도록 하나님이 은밀하게 육성하실 것이다. 마치 나무나 꽃들이 세상에서 은밀하게 양분을 공급받는 것과 같다.”
이 언급은 가장 겸손한 생애에 위엄과 의미를 부여하는 놀랍고도 생을 변화시키는 진리를 간직하고 있다. 이 언급은 바울의 주장과도 일치한다.”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이것이 사실이라고 할 때 당연한 결과는 우리의 생애에 대한 하나님의 완전하고 특별한 계획을 성취할 시간은 매일 충분한 것이 된다.
그리스도의 본
우리 주님은 전 생애를 통하여 위엄있고 신중한 걸음으로 다니셨으며 서두르는 법은 결코 없으셨다. 갈망하는 군중들이 언제나 쇄도해 왔으나 그의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을 위한 특정한 유익밖에는 주님의 더 중요한 관심사가 없다는 식의 느낌을 준 일은 결코 없었다. 그렇게 하실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나?
모든 사람의 생애를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을 아셨고, 주님은 그의 생애와 성취되는 모든 상황도 역시 하나님 아버지의 완전한 조절아래 있음을 인식하시고 계셨다. 시간은 주님께 대해 아무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가 자기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주장하신 적이 몇번 있었다. 이 주장이 은연 중에 나타내는 말은 그의 생애 전반에 걸친 목적이 엄중한 정확성으로 시간까지 계산되어 조절되도록 하나님 아버지가 계획하셨음을 나타낸다.
주님의 달력은 이미 배정이 되어 있었고 지상에서의 그의 유일한 관심은 할당된 시간 안에 하라고 그에게 맡겨진 일을 성취하는 것이었다(요 7:6/12:23, 27/13:1/17:1). 그가 사랑하는 어머니도 이러한 하나님의 시간 계획표를 방해하도록 허락되지 않았다(요 2:4). 인간의 깊은 애정도 그의 스케줄을 이틀 앞당기도록 허용하지는 못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아버지의 계획은 망쳐지는 것이다(요 11:6, 9).
그가 생의 종말에 처해 절대적인 만족으로 생애를 돌이켜 보며 자기를 인정하는 말씀을 하신 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요 17:4).
그 중에서 하지 말아야 할 주저함때문에 망친 일이나 시간의 부족으로 불완전하게 끝내신 일은 없었다. 그는 하루 24시간을 통하여 전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에 충분한 시간을 발견하셨다.
주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정확한 말씀은? ”낮이 열두시간이 아니냐?” 였는데 이 말은 주님이 보이신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조용하고 꾸준한 확신을 나타내며 그 결과로 원수들과의 대결이나 위험에 직면하여서도 용기를 가지셨음을 암시해 준다. 장애물들도 그의 평화를 어지럽히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그것 역시 아버지의 계획에 이미 들어 있으며 원수들에게 내릴 진노가 주님의 ”때”를 기다렸다가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일을 요지부동하게 추구해 나갈 수 있으셨으며 ”완성될” 것을 알 수 있었다. ”식사할 만한 시간적 여유”가 언제나 있었던 것은 아니라 해도 하나님이 주님더러 하라고 계획하신 모든 일을 할 시간은 있었다.
우리 생활에서는 흔히 결핍되기 쉬운 주님의 이런 바랄만한 자질들을 멀리서 칭찬하기는 쉽다. 그러나 우리는 칭찬만 할 것이 아니라 따라가야만 한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면에서도 그렇지만 이 점에 있어서도 우리의 본이 되시기 때문이다. 주님 안에 내주하시는 똑같은 성령이 우리를 돕고 계신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계획을 성취하기 위하여 이 땅에 보내진 것이 아닌가?
그에 대해 예언적으로 언급된 것을 보면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시 40:7, 8)
다음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가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들을 보내노라”고 하셨으며 보내신 이가 또한 우리의 사역을 성취하실 것이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시간이란 그림자가 움직여 가는 동안 시계가 내는 똑딱거리는 소리인가? 달력이나 시계는 시간을 알도록 기록하는 기계적인 방법이지 시간 자체는 아니다. 일반적으로 사용할 때 시간이란 ”존속기간” 또는 ”일들이 발생하는 기간의 범위”를 뜻한다. 그러나 시간에 대한 가장 도움을 주는 정의가 있다면 그것은 ”이용된 기간”이란 정의이다.
죤 모트(John R. Mott)박사는 시간이란 우리가 일할 수 있다고 측정한 우리의 삶과 우리 삶의 능력에 대한 측정치라고 보았다.
바울은 에베소 신자들에게 ”세월을 아끼라”고 권면하였으며 웨이머쓰는 번역하기를 ”기회를 사라”고 하였는데 시간은 곧 기회란 뜻이 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시간은 사야 우리 것이 된다는 점이다.
시간은 구속되어야 한다. 즉, 값주고 사야 한다. 우리는 시간을 어떤 직업이나 활동과 바꾸는 것이며 중요한 일에 또는 그렇지 않은 일과 바꾸기도 하는데 그러기 때문에 계획된 삶이 중요한 것이다. 시간이 없다고 말할 때 이것은 시간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기회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모른다는 뜻이 될 뿐이다. 시간은 하나님이 주신 청지기 직분으로 우리가 그분께 셈을 해야만 하며 우리가 어떻게 사용했느냐에 따라서 우리 시대와 우리 세대에게 이룩한 공헌의 가치가 결정될 것이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은 주로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좌우된다.”모든 얻은 것들과 성취한 것들은 시간을 충분히 이용하였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다. 만일 시간의 경제에 향상을 가져온다면 사는 방법을 배우고 있는 셈이다. 이 일에 실패하면 모든 일에 실패할 것이다. 시간이 그에게 허락하는 것보다 더 일하거나 보다 훌륭하게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라고 이 방면의 어떤 권위자가 쓴 일이 있다.
제레미 테일러(Jeremy Taylor)는 그가 지은 「거룩한 생활」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하나님은 인간에게 지상에서 짧은 시간을 살도록 하셨는데 이 짧은 시간에 영원성이 달려있다. 자기 시간을 하나님을 위하여 내놓는 사람보다 더 훌륭한 상인은 없다.”
시간에 대하여 한가지 숙연한 일은 시간은 물론 잃어버릴 수도 있으며 잃어버린 시간을 다시 찾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시간은 저장될 수 없으며 소모되는 것이다. 시간은 미룰 수 없으며 회복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생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배당된 시간을 충분히 사용하는 일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아래 인용한 문구는 어떤 해시계에 새겨져 있는 글인데 이러한 진리를 강조한다.
내 바늘이 드리우는 그림자가
미래와 과거를 나눈다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은
어두움 속에 당신의 능력이 미치지 않는 곳에 서 있다.
돌아오지 않는 선(line) 뒤로
사라진 시간은 더 이상 당신의 것이 아니다
하나의 시간만이 당신의 손에 있다
현재란 그림자가 멈춘 그 곳이다.
성취한 일이 주어진 기회와 걸맞지 않을 때 죄책감을 느끼며 예민한 양심이 무겁게 눌려지는 것도 이러한 숙연한 책임으로 인한 것이다. 법석대고 붐비는 분위기는 생을 전반에 걸쳐 침해하고 있으며-헌신적인 사람들은 빼놓고-영적인 사역을 무력하게 하고 있다.
잠을 줄이므로 낮시간을 늘이는 일이 많은데 너무 지나친 경우에는 굉장히 위험스런 조치가 될 수 있다. 만일 우리의 책임을 벗고 지낼 충분한 시간을 가지지 않는다면 이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맡겨 주지 않은 책임들을 지고 있는 것이거나 그가 우리에게 주신 시간을 전략적으로 사용치 않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일주일동안 보내는 우리 삶을 엄격하게 분석하여 자신을 조사할 수 있으며 이 일은 각자에게 값진 실험이 될 것이다. 바로 오늘 이 일을 시작하라. 그리고 일어나는 시간부터 잠자리에 들때까지 시간을 자신에게 맞추어 두라. 당신은 깜짝 놀랄 계시들에 접하게 될 것이며 지금 생산적인데 사용하는 시간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어떤 활동들을 할 시간이 없다고 말하기 앞서 먼저 우리가 가진 시간들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음에 대해 자신을 만족스럽게 여겨야 한다.
한 주는 168시간이다. 관대하게 잡아 잠자고 쉬는데 56시간, 식사와 가족을 위한 시간 21시간, 일하고 연구하는데 56시간을 배정하자. 그래도 35시간이 남는데 매일 5시간씩인 셈이다.
이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어디에 이 시간을 투자할 것인가?
이들이야말로 생의 결정적인 시간들이며 우리의 삶이 평범할 것인가 특수할 것인가를 결정짓게 된다. 우리는 이 시간들이 우리에게서 빠져 달아나게 할 때가 너무 많다. 여가 시간-우리에게 여가 시간이 없다고 말한다면 진실이 아니다-은 위험이기도 하고 동시에 기회가 되기도 한다.
시간의 정복
조ᄋ(J. H. Jowett)박사는 이렇게 쓰고 있다.”오늘날 우리 시대에 유행하는 말 중의 하나는 끊임없이 시간의 부족을 표현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말을 너무 자주 반복하므로 스스로 속아 그 말을 믿게 된다. 시간이 없다는 사람이 최고로 바쁜 사람인 것은 결코 아니다. 그들의 활동시간이 너무나 꽉 짜여있고 조직적이어서 당신이 어떤 요구를 하면 이타적인 봉사를 하기 위해 무슨 특별한 틈을 찾아내는 듯한 눈치가 보인다. 한 사람의 목사로써 고백하는 것이지만 가장 바쁜 사람들이란 내가 그들에게 특별한 봉사를 부탁하고 싶어지는 사람들이다.”
얼버무리지 말고 솔직하게 사실에 직면해 보자. 우리 각자는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 같은 시간을 가지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돈을 더 가질 수도 있고 능력이나 영향력을 더 가질 수 있을런지는 모른다. 그러나 우리 각자는 하루에 24시간을 가진다.
파운드(데나리온)의 비유에서 처럼 우리 각자는 같은 량의 시간을 맡았다. 그러나 모두가 그것을 사용하여 열배를 거두지는 못했다. 우리가 모두 같은 역량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이 비유에서도 이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작은 역량을 가졌으나 똑같이 충성스러웠던 사람의 상은 같은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역량에 대하여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에 어떻게 전략적으로 투자하느냐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상자에 담아 갈 것이 비교적 작을 때에도 많을 때와 같이 가득 들어 보인다. 왜냐하면 담을 것이 적을 때는 차곡차곡 챙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짐을 차곡차곡 챙기지 않는”것과 다름없는 죄를 짓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뜻과 연관된 그 이상의 시간은 결로 필요하지 않다.
중국 대륙선교회 회장이신 고(故) D. E. 호스트에 대하여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생활은 꽉 짜여 있지 않았고 깊고도 충분한 기도생활을 위해서 시간의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기도생황에 우선권을 주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즉시로 시간을 정복하는데 이르지는 못했다.
그는 말하기를 ”시간을 허비하게 되기는 쉽다. 선교사는 조반을 든 후 신문을 읽거나 아니면 다른 식으로 시간을 빼앗긴다. 그러나 사업계에서는 이런 일은 생길 수 없다. 내가 수년동안 대륙선교를 하면서 발견한 것은 이 문제에 관해 보다 조심하고 자기 훈련을 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다...시간의 사용에 대한 예민한 양심이 유지되어야 한다” 라고 하였다.
삼겹의 처방
우리의 생애가 하나님께 가능한한 가장 크게 사용되며 지나친 피로와 긴장없이 우리의 삶이 유용한 것들로 채워지기를 진지하게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줄 세 가지 건설적인 제안이 있다.
-새어나가지 않게 할 것.
우리 시대에는 시간이란 용어로 생각하지 말고 시간의 더 작은 부분(field)으로 생각하자. 만일 우리가 분(minutes)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시간은 저절로 주의하게 되는 셈이다.
고(故) 메이어 박사보다 더욱 차곡차곡 짐을 싼 사람은 거의 없다. 죤 웨슬레처럼 그도 자기 생황을 5분 간격으로 나누어 놓고 그중에 하나라도 게으르게 지나쳤으면 자신을 꾸짖었다.
이런 계획표(program)는 쌓이는 피로를 견디지 못하게 할 따름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메이어 박사는 그렇지 않았다.
그의 전기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그의 조용한 예절은 비적극적인 수면이 아니라 곧 팽이가 돌며 정지했을 때와 더욱 가까운 것이었다. 그는 서두르는 일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언제나 서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죽기 바로 전에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나는 한번에 한가지 일에 집중하는 사람을 주께서 만족하게 여기심에 대한 본보기인 것같군.”
우리같이 평범한 운명을 지닌 사람들에게 15분동안이라도 충분히 자기 몫을 다 발휘할 정도로 집중해서 일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것은 어렵지만 그렇게 하려고 시도한다고 해서 잘못된 것은 없다.
예를 들면 쓰레기더미에서 건져낸 시간의 파편들을 이용하여 독서할 시간을 많이 만들어 낼 수 있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진지하게 독서할 시간을 갖기까지 기다린다는 것은 헛된 일이다-그런 시간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가진 시간을 분 단위로 움켜잡아 독서할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 위에서 제안한 한주간 동안의 시간분석을 통하여 생각지 않았던 시간의 유출을 탐지해내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마음으로 부터의 목적의식을 가지고 그 유출을 막아야 한다.
-우선 순위를 배울 것.
낭비되지 않았다고는 하나 사실상 많은 시간을 그 중요성에 있어 이차적인 일들에 보내는 때가 많다. 바보란 일들의 균형을 잃는 사람을 가르킨다. 우리들 중의 더러는 이차적인 일들에 시간을 빼앗겨 우선적인 일들을 위해 시간을 남겨두지 못하는 불행한 경향성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있다.
부적절한 관심을 미세한 일들에 쏟아 정말 중요한 일들에 대해서는 시간을 쥐어 짠다. 영적인 일들이 관계되었을 때 특히 그렇다. 시간 할당을 재검토하여 영적인 일들에 적절한 시간이 배정되고 있는지 아니면 좋기는 하지만 이차적인 일들로 인해 밀려나고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우리 주님께서 친히 시사하신 바로는 발전하는 삶의 비결은 탁월한 가치가 있는 진주를 위하여 보다 열등한 진주를 희생시키는데 있다. 우리는 가장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 중요한 일들이 요구하는 것 때문에 그 일이 관계된 선 정도로 후퇴하는가?
관심을 끄는 기회들과 그 책임들에 대하여 존중해야 할 가치가 있는지 조심스럽게 가늠해 보라. 덜 중요한 일들은 모두 빼버리거나 이류의 위치에 두라.
죤 웨슬레는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절대로 일이 없이 지내지 말라. 그리고 하찮은 일에 고용되지도 말라.”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단련을 위한 휴식(오락)과 휴양(기분전환)은 그 중요성에 있어 이차적이 아니라는 점이다.
자신의 육체적인 힘과 신경 에너지를 회복하기 위하여 준비하는 일은 하찮은 일이 아니다.
만일 예수께서 우물 가에 앉아 그 바쁘신 와중에서도 휴식을 취하지 않으셨다면 사마리아의 여인은 놓치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평범한 사회생활을 즐기셨으며 결혼 피로연에 참석하는 것을 시간의 낭비라고 생각지 않으셨다. 우리는 시시때때로 주간 시간 분석표를 살펴보아 우선권을 옳게 배정하고 있는지 알아보아야 한다.
-계획을 시작하라.
적절한 계획이 없다면 우리 모두는 표류하게 되는 경향성이 있다. 우리의 생애를 하나님이 계획하시는 것이라면 매 시간마다 해야할 적절한 일이 있으며 기도하고 계획할 때 주님은 우리를 인도해 주신다.
죤 R. 모트 박사는 하루의 반을 현재를 위해 사용했으며 다른 12시간은 앞으로 올 날들을 위해 계획을 짜는데 사용했는데 이것은 시간을 잘 투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어떻게 해야 오늘을 가장 잘 계획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어보는 태도로 기도하라. 하루를 몇 개의 부분으로 나눈다. 적절한 시간과 장소가 자연적으로 요구되는 확실하고 분명한 의무들이 있는데 영적인 일이나 세상 일에나 마찬가지이다. 조심스럽게 최소로 낮추어야 할 이차적인 일들이 있다. 두개의 의무가 각기 다른 방향에서 잡아 당긴다면 기도하고 생각해본 후 보다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택하라. 세상적인 주장이 영적인 주장을 밀어낸다면 그럴만한 좋은 이유가 있기 전에는 그 주장을 인정하지 말아야 한다.
대부분의 생활을 보면 프로그램(계획된 일정표)에 짤막한 간격이 있어서 어떤 중요한 일에 배정하기는 너무 시간이 작아 보일 때가 있는데 이 간격이 채워져야 한다.
편지를 쓰면 어떨까?
쓸 시간을 얻기까지 기다리지 말고 당장 하라!
보다 편리한 시간을 기다리는 것은 편지쓰기에서는 죽음의 종소리이다. 정확성을 기하기 위하여 충분히 시간을 잡아야겠지만 너무 길게 잡아도 안된다. 수전노가 돈을 저축하듯 열광적으로 여분의 시간들(minute)을 사들이라.
당신의 날들을 계획하기 시작하라.
추진의 동기
시간을 이용함에 있어 급진적인 변화를 이룩하려면 목적을 추구하는 힘과 주께서 권능을 부여해 주실 것에 진실로 의존해야 한다. 우리들 모두가 불굴의 의지를 가진 것은 아니므로 ”우리 안에 계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힘입어야 한다.”시간의 사용은 크게는 동기가 주는 압력에 의존하고 있다. 오랫동안 시간의 사용에 있어 습관화되어온 느슨함에서 벗어나 삶의 패턴을 바꾸어가도록 우리를 강요하는 충분한 동기가 있는가?
헨리 만르틴은 그가 번역하고 있는 책(성경)에 실려 있는 진리를 고대하는 민족들을 볼 때 번역사업을 한 시간이라도 낭비할 수가 없음을 발견하였다. 잃어버려진 세계가 필요로 한다는 것이 시간을 건지도록 강요하는 동기가 되었다.
우리 주님이 지니신 생의 추진력은 그가 늘 하시는 말씀가운데 나타나 있다.”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기쁨을 드리는데 이용될 시간을 다른데 낭비하지 않도록 우리를 구해주는 동기가 될만한 충분한 효능이 이 말씀 속에 있다.
이런 생각들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자극이 되지만 다른 기질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이런 사상이 문제를 더욱 증가시키고 자기비난에 더욱 깊이 빠지게 할 따름이다. 이 주제에 대하여 비판적이고 예민한 양심을 가지는 것도 좋겠으나 바울이 ”연약한” 양심이라고 지칭한 것을 가져서는 안된다. 연약한 양심은 교훈과 훈련을 필요로 하며 그렇지 않으면 해를 끼치는 포학을 휘두르게 된다.
우리가 가진 힘을 다 발휘했어도 세상에는 더욱 힘써야 할 광대한 분야의 일들이 남아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필요하다고 우리를 부르는 모든 일에 응할 수는 없다. 제출(상정)된 계통에 따라서 주님 앞에 선 진지한 자세로 계획을 세우고 우리의 능력껏 최선을 다해 성취했으면 그 일은 더 이상 개의치 않아도 되며 그래야만 한다.
성취하지 못한 일에 얽매여서는 안된다. 우리의 조절 능력을 넘어선 환경들은 우리 계획의 일부를 성취하지 못하도록 방해할 것이지만 그것이 자아비판을 할만한 원인은 되지 못한다. 우리의 책임은 우리의 힘으로 조절이 가능한 범위안에 연관된 것들 뿐이다.
귀찮다거나 중압감이 커지면 우리의 위탁(내맡김)을 검토해 볼 시간이 된 것이며 부당한 피로없이 잘 이행할 수 있는 일 이상의 일은 단호히 거절해야 한다. 이처럼 우리의 생활을 단순화 하므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으며, 우리가 신경과 영적인 자본을 이기적으로 절약하거나 어리석게 과용하는 일이 없도록 그 사잇길에서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신다고 확신있게 기대해도 좋은 것이다.
"
이와같은 생의 재 조직은 엄격한 훈련을 요구할 것이지만 얼마나 가치있는 일이겠는가. 이 일에서 조차 하나님의 조력을 받게 된다.”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딤후 1:7).
A. T. 로버트슨에 의하면 여기서 말하는 ”영(마음)”은 ”성령의 부음을 받은 인간의 영”을 가르키며 성령과의 협동으로 이 중차대한 일에 우리가 끼게 되는 것이다.
제 18장 선교 사명은 어떻게 받는가 ?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한복음 20장 21절).
우리의 삶은 우리 자신이 사용하게 된다. 그러나 단 한번 뿐이다. 그렇다면 생애를 현명하게 투자해야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
전문직업을 가질 것인가 아니면 사업계에 투신할 것인가?
국내 선교를 할 것인가 국외 선교를 할 것인가?
이런 대결의 목소리가 너무나 많고 선교 사명에 대하여 견해 차가 커서 결정을 내리기에는 쉽지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것은 물론 가능한 일이다.
사명을 확신하기 위하여 먼저 요구되는 필수적인 일은 성실하게 구하는 자를 하나님이 인도하고 계시며 앞으로도 인도하실 것을 확신하는 일이다.”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또는 안내하리로다)”(시 32:8).
이 약속을 발 밑의 기초로 하여 진실로 알고자 할 때 하나님은 그의 완전한 계획을 풀어놓으실 것이며 확신을 가지고 기대할 수가 있다.
마음의 태도는 안내를 받아들이는데 중요한 연관이 있다. 우리가 이걸 할것인가 하지 않을 것인가 결정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찾는데 질문의 목적을 둔다면, 그런 탐구는 포기하는 것이 좋다. 하나님은 그런 태도에는 반응하시지 않으신다. 그러나 ”주여, 당신의 뜻을 내게 보이소서 내가 그것을 하겠나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확실한 응답이 있을 것이다.
사명의 기초
그리스도인을 돌보는 일에 대한 사명은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이라고 알려진 부활하신 주님의 명령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이 명령은 주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전의 기간에 하신 연속된 명령들 중에 들어 있으며 신약의 첫 다섯권에 기록되어 있다. 이 명령을 통하여 주님은 모든 세대의 제자들에게 자기 세대를 복음화 할 책임을 부여하셨다. 용어는 명백하고 애매하지 않다.
그 명령에는 지리적인 제한이 없는데 그 이유는 모든 세계에 가야할 것이기 때문이다. 종족적인 차별이 있을 수 없다. 그 전하는 메세지는 모든 민족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특권층이 있을 수 없다. 모든 피조물이 이 해방의 소식을 들어야만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종족이나 성이나 계급이나 문화에 어떤 특권이 있을 수 없다.
마태복음 28장 18절에서 20절까지의 부활하신 주님은 그들에게 명령하시기를 그의 전능하신 힘을 의존하여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고 하셨고 ”시대가 완성”될 때까지 그가 함께 하실 것임을 약속하신다.
마가복음 16장 15절에서 그는 그 사명을 개별적으로 다루시어 ”만국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신다.
누가복음 24장 47절에서 49절까지 주님은 회개의 필요성과 죄의 용서를 강조하여 예루살렘을 출발점으로 하여 모든 민족에게 전하라고 하신다.
그러나 주님은 ”위에서 오는 능력을 힘입기”까지는 여행에 나서서는 안된다고 자세히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20장 21절에서 그는 이 사명을 자신의 사명이란 수준으로 끌어 올리시며 개인적인 용어로 사명을 주신다.”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사도행전 1장 8절의 기록에는 민족의 영달이란 사상을 버리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온 세계에 전도해야 할 필요성을 지시하신다. 이 다섯개의 명령문이 선교 사명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주의하여 눈여겨 볼 것은 우리 주님이 충고를 주시고 계신 것이 아니라 절대 주권의 지배자(Master)로써 그의 제자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온 세상에 전하라고 그가 명령하신 이상 그 성취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가 모든 피조물에게 미칠 만큼 큰 스케일로 복음전파에 관계하실 것이라면 각 세대에 이 직무를 수행해 갈 충분한 사람들에게 사명을 주셨음이 분명하지만-많은 사람들이 확신있게 반응하지 못하고 있다.
느낌이 있는가 아니면 소리가 들리나?
"선교분야에 사명을 받은 느낌이 없어요”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사명이 느껴지는 것일까 아니면 들리는 것일까?
사무엘은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했을 때 주님의 음성을 들었는가 아니면 그렇게 느꼈는가?
이사야는 여호와께서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하시는 음성을 들었는가 그런 느낌을 받은 것일까?
바울은 마케도니아 사람이 부르는 소리를 들었을까 느꼈을까?”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주님의 부르심을 들을 때 이것은 느낌의 문제가 아니라 순종의 문제이다.
우리가 어떻게 느끼든지 간에 명령은 분명하다. 우리가 듣고 반응할 때 비록 느낌이 소명은 아니라해도 깊은 관심에서 우러나는 느낌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느낌은 정신의 정보와 마음의 자세가 합해져서 발생하며 감정이 없다는 것은 정보를 얻지 못한 마음, 굴복하지 않은 의지, 또는 그리스도를 향한 냉냉한 마음의 소치라고 할 수 있다.
주님의 모든 제자들은 온 세상에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종사하도록 부름을 받고 있으며 이러한 하나님의 일반적인 소명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특별한 사역에의 부르심에 앞서 우선적인 요인이 된다. 모든 신자들에게 맡겨진 일반적인 의무를 깨우쳐 주는 성경 이상의 다른 소명은 필요치 않다. 만일 우리가 물에 빠진 사람을 보았을 때, 우리가 수영을 할 수 있다면 가서 그를 구하라는 특별한 지시는 필요치 않다. 피할 수 없는 의무가 우리에게 있으며 이것을 무시하면 그 사람의 피에 대해 죄가 된다.
부르시는 방법
하나님의 부르심은 어떤 판에 박힌 방법으로 오지 않으며 개인에 따라 다양해진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다른 사람들의 경험이 우리에게 유익이 되기는 하지만 그들이 받은 안내를 복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지는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를 다루시는데는 분명히 다양성이 있으며 우리 자신의 특별한 경우에 가장 알맞는 방법을 채용하신다.
예를 들면 빌림은 맹렬한 박해를 피하여 사마리아에서 일하도록 지시를 받았으며 얼마후에는 천사의 인도를 받아 사막으로 가게 되었다. 이 때 성령이 마차를 탄 에디오피아 재무관과 합석할 것을 지시하셨다.
바울은 어떤 지역에는 들어가지 말라고 성령에 의해 제한을 받았고 다른 어떤 분야에는 들어가라고 같은 성령에 의해 압박을 받았다.
그의 영은 내적인 ”정지”를 경험했으며 나중에는 명백한 ”해방”을 경험했다. 그러나 로마에서의 선교사역으로 인도를 받게 되는 최종적인 발걸음은 분명히 어떤 특별한 계시를 받은 결과가 아니라 자신의 영적인 판단력을 행사한 것과 성령이 내적으로 증거하신 일이 하나의 결합을 이룬 결과였다. 하나님의 방법은 다양하며 일률적이지 않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기계적인 것은 아니다.
성경을 무심코 펼쳐 나온 곳을 읽는 방법은 가끔 사용되고 있는데 우리를 이성적인 존재로 창조하신 하나님께 어울리지는 않는다. 그는 그의 영으로 우리의 영에 말씀하시며 그의 말씀(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실 때가 매우 빈번하다.”양들이 자기 음성을 아는 고로”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면 우리는 그가 말씀하시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K. D. 모이나하 박사는 다음과 같이 간증하였다.”하나님의 음성은 천둥 가운데 들리는 것이 아니며-하늘에서 오는 어떤 경이적인 부르심이나 지진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다-즉, 내 생애에 있어서의 비참한 경험이나 환경의 일대 변경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다. 소명은 훨씬 작은 목소리로 온다-조용한 침묵의 음성(音性)이다.
하나님은 그에게 가까이 나오도록 우리를 부르신다. 그리고는 주님의 평화에 속한 혼동되지 않은 내적인 고요함으로 말씀하신다. 이것이 우리가 결정을 내리게 하는 심판자가 된다.””신앙은 조용한 안내를 받아들인다. 불신앙만이 기적을 요구한다.”
위기의 때를 맞아 주님께로부터 개인적인 안내를 받게 된다는 약속보다 더 확신을 주는 것이 무엇이겠는가?”너희가 우편으로 치우치든지 좌편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 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정로니 너희는 이리로 행하라 할 것이며”(사 30:21),
하나님의 방법은 의심할 나위없이 인격적이다.
-그의 방법은 환상적인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대낮에 우리를 다루신다. 그는 자기 뜻을 나타내시는 한가지 요인으로 경우에 따라 꿈이나 환상을 사용하실 수 있으시며 사용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꿈이나 환상이 이성의 사용을 면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구약에서도 꿈이 하나의 안내로써 받아지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형식으로 반복되었음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창 37:7-9/41:3-7).
바울에게 임한 환상(vision)의 경우를 주목해 보면 그때 바울은 이미 선교사역에 부름을 받아 사역의 제1기를 끝내고 제2기에 착수했던 때였다. 이 환상은 그를 안내하는 한가지 요소로만 구성되었고 주의 깊은 안전장치가 되어 있었다.
환상이 임했을 때는 바울은 이미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이를 전하는 일반적인 의무에 반응을 보이고 있었을 때이며 봉사할 정확한 활동범위를 찾고 있는 중이었다. 이렇게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움직이고 있었다.
바울은 그의 영으로 어떤 제지가 가해짐을 체험하자 즉각적으로 자신의 계획을 포기하였다. 아시아와 비티니아를 위해 하나님이 설정한 시간은 아직 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다음 단계를 계시해 주시도록 기다리며 드로아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있었는데 이 환상을 본 것은 바로 여기서 였다.
그가 어떻게 마게도니아 사람인 것을 알았는지 지나가는 길에 관심을 가져 보자. 그들이 특징적인 옷을 입었던 것은 아니다. 마게도니아 출신인 누가(Luke)가 바울에게 자기 고향의 전도 필요성을 강요했을 것으로 추정해 보고 그가 바로 환상 중에 나타난 사람이라고 가정해 본다면 비합리적일까?
다음 단계로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한 자기의 판단에 대해 동료들이 검토해 줄 것을 의뢰했다. 그리고는 그가 이와같은 결정에 이르기까지 관여된 여러가지 요인들을 숙고한 후 ”의견이 확실하게 모아지거나” 아니면 ”신념있게 추론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이 마게도니아에서 복음을 전파하도록 그들을 부르셨다고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환상이 인도하는 길은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과 부합하였으며, 성령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고(그의 영이 이제는 제지를 당하고 있지 않았다), 동료들에게 비준을 받았으며, 자신의 판단으로 인정을 받았다. 이렇게 결론에 이르자 혹독한 영접이나 등을 찢는 일도 이 확신을 흔들지 못하였다.
-하나님이 사명을 주시는 방법은 언제나 이성적(理性的)이다.
죤 웨슬레는 이렇게 말했다.”하나님은 어떤 확실한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내게 이성을 주심으로 일반적으로 인도하신다.”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바울의 신성화된 판단력을 행사하게 하시므로 그를 일반직으로 인도하셨다. 하나님께서 때로는 비범하게 극적으로 안내하신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사명은 아니며 사명의 일부분이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사실상 대부분의 경우를 보면 이런 비범한 확증들은 결정이 내려지고 믿음으로 한걸음 내어 딛을 때 오는 것이 보통이며 우리가 상고해 본 바울의 경우에서도 그러하였다.
국내인가 아니면 해외인가?
국내사역(home service)을 할 것인가 아니면 해외에서 사역할 것인가에 대해 관련된 주장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지상명령(the Great Commision)은 둘중 어느 쪽과 연관되든지 수행될수 있는 것이 아닐까?
사실 맞는 말이다. 해외사역이 국내사역보다 더 높은 형태라고는 할 수 없다. 하나님의 뜻안에서는 모두 중요하기 때문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일이다. 이런 면을 고려함에 있어 안내가 될 몇가지 빛을 비쳐주는 요인들이 있다.
지속적인 허약체질 신경장애, 식사조절이 필수적인 경우, 두통이나 눈의 피로를 일으키는 경향이 있을 때, 또는 유전적인 정신질환이 있으면 봉사의 범위가 국내일 확율이 높다. 이런 조건들이 제시된다면 더 진행되기 전에 자격있는 전문의의 의견을 들어보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해외사역에 결격사유가 될만한 기질적인 조건들이 있다. 극도로 과민하거나 긴장하기 쉬운 성질, 우울증이나 정신병에 대한 경향성, 텃세에 대해 일으키는 이상 심리를 극복할 수 없는 경우, 다른 사람들과 일하기에 무력함, 모든 일과 모든 사람을 관리해야 직성이 풀리는 근성...등이다.
우리가 지금 처한 봉사의 영역에서 영적인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해외로 가도 영적 효과를 거두지 못할 것이므로 가야 할 이유는 거의 없는 것이다. 해외사역에 온전히 종사한다는 사실만으로 우리가 영적인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니다-지리적으로만 바뀐 것이지 영적으로 바뀐 것은 아니다. 우리는 해외선교를 생각하기 전에 정직하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하며 열매맺는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조건에 따라야 한다.
우리가 당면하는 같은 문제들에 봉착하여 성공을 거둔 거룩한 사람들의 경험을 아는 것이 도움이 되기도 하는데 국내냐 아니면 국외냐에 연관된 주장들에 대해 다음의 세가지 경우를 인용하기로 하자.
아라비아로 간 아이온 케이트-팔코너는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신념을 표현하였다.
「광대한 대륙들이 여전히 거의 극에 가까운 암흑에 싸여 있고 수백만 사람들이 이교주의와 회교의 공포로 고난을 당하고 있는데, 실적을 올려야 한다는 부담감이 엄습해 오면 하나님이 당신에게 처하게 했던 환경은 당신을 외국선교에 나서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제임스 길모어는 몽고에 소명을 받은 일을 생각하며 이렇게 썼다.
「내게는 ”왜 가느냐?”가 문제가 아니었다. 상식적인 수준에서 생각해 보아도 나는 선교사로 부름을 받은 것으로 생각되었다. 왕국은 추수밭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일이 가장 많고 일군은 가장 적은 곳에서 일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일군들은 본국에도 할 일이 넘친다고 말한다. 그러면 해외의 경우는 어떻겠는가? 추수할 때가 되어 이미 희어져 넓게 펼쳐진 평원들이 있는데 견실한 추수군은 여기저기 드물게 있을 뿐이다. 내가 앞으로 전진해 나가는 것은 명백할 명령에 대한 순종의 문제였다. 해외로 나가는 이유를 지정해 줄 것을 추구하는 대신 나는 본국에 머물러 있을 이유를 찾지 못했다고 말하기를 좋아했다.」
보다 최근의 예로는 스데반 네일 감독이 세번째로 인도에 돌아오며 한 말이 있다.
「나는 선교지의 필요가 본국 교회의 필요보다도 언제나 훨씬 크다는 나의 확신을 선포한다. 아무리 높은 인간적인 자격들이 있다 해도 한 남자 또는 여자에게 있어 선교사역에 적절하다는 것 이상의 자격은 없다고 본다. 어떤 업계라도 사업과 창조적인 일에 이처럼 넓은 영역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요구되는 희생이 가벼운데 비해 그 상은 측량할 수 없도록 크다. 」
해외선교는 국내선교보다도 더욱 분명한 소명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할 성서적 근거는 없는 것같다.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지리적인 차이 뿐이다.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라는 모든 신자들에게 주신 일반적인 의무를 우리 자신에게 적용시키는데 무슨 특별한 소명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요구에서 제외되는 것이 특별한 소명이라고 하겠다. 본질적으로 보아 해외사역에로의 부르심은 여타의 곳에서 봉사하도록 부르시는 소명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런데 이런 일반적인 의무가 특정하고 분명한 소명없이 해외선교에 종사하는 것을 정당하다고 보증하기에 충분한 것일까?
바울은 특정하고 분명하게 부름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 9:15, 16).”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행 22:21).
J. 허드슨 테일러는 폭넓은 경험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이 점에 있어서 명백하지 않은 선교사는 큰 원수에게 좌우되기가 쉽다. 어려움이 생길 때, 위험이 닥치거나 병들었을 때, 그는 본국을 떠나기 앞서 무엇이 그런 결정을 내리게 했는지 의문을 일으키는 시험을 당하게 된다.”내가 오지 말아야 할 곳에 온 것은 아닌가?”」
어떤이들은 실태가 하나님의 안내의 손길이라고 말하며 국내선교 사역에 관한 몇몇 실태로 보아 이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손길일 것이라고 한다. 만일 어떤 지역이나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의 복음이 적절하게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면 그 지역의 요구는 그렇지 못한 지역의 요구에 대해 이차적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은 분명히 합리적이다.
이것은 한마리 잃은 양과 우리에게 안전하게 있는 아흔 아홉마리 양에 대한 비유를 통해 주님이 가르치신 교훈의 하나이다. 본국에서는 선교지에서 보다 훨씬 적절하게 복음의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없는 사실이다. 미국에서는 535명당 목사 한 사람 꼴인데 반해 인도에서는 십만 1천명당 1명, 동남아시아에는 8만명중 하나이다. 본국에서는 원하기만 한다면 갈망하는 영혼이 구원의 길을 찾을 수 있다.
교회에 출석할 수 있고, 라디오를 듣고 TV를 볼 수 있으며, 성경이나 복음서적들을 살 수도 있고, 그리스도인에게 말을 걸 수도 있고, 생명의 길을 물어볼 수도 있다. 선교지에서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소망없이 살다가 그리스도없이 죽을 운명에 처해 있다. 그들은 어쩔수 없이 이교도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원해도 복음을 들을 수 없다. 아무도 말해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아직 전해지지 않은 지역의 필요들에 선교사의 힘으로 대응하기는 전혀 부적당하다. 이런 명백한 사실들이 바로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손길이라고 믿어도 좋겠다.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기
하나님의 뜻을 확인한다는 것은 때로는 괴로우며 마음으로부터의 철저를 기하게 되는 경험이다. 왜냐하면 우리들 대부분은 무조건 하나님의 뜻에 따르기를 꺼려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신앙심 깊은 헨리 마르틴도 이런 투쟁의 맹렬함을 알고 있었다.”지난 2, 3년 동안 나는 하나님의 뜻이 계시되면 그 뜻을 기꺼이 행하겠다고 마음 먹어 얼마나 고생을 겪었는지 모른다!”고 썼다.
인도하심의 문제에 있어서 이 점이 결정적인 요인이 되는 때가 많으며 이 문제를 무사히 넘긴다면 하나님의 지시가 늦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선교사명과 관련하여 최종적인 결정에 이르려 할 때 다음의 실제적인 제안들이 도움이 될 것이다.
-의도적으로(purposefully) 당신의 길을 주께 맡기라.
그가 이루실 것을 확신하라(시 37:5).”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히 11:6).
당신의 하나님 아버지의 신실하심이 당신에게 그의 뜻을 전달할 것임을 믿으라.
-활발치 못한 중에 무슨 일이 일어나기만 바라고 있지 말라.
적극적으로 준비하는데 자신을 바치라. 최근에 어떤 선교사가 출항하기 전날 밤에 간증하기를 몇 년전에 그녀가 선교사명을 받지 않았을찌라도 주께서 그녀를 부르실 것을 생각하여 의도적으로 그 방향의 훈련을 받았다고 하였다. 하나님은 그녀를 부르셨다.
-선교지, 선교회, 일의 형태에 대하여 할 수 있는 한 모든 권위있는 정보를 수집하라.
하나님은 관련된 사실들에 대하여 텅빈 머리에는 안내를 하실 수 없으시다. 사명은 책이나 잡지를 읽을 때 올 수도 있고, 사진을 보거나, 선교사와 대화를 하거나 기도하는 곳에 혼자 있을 때에도 올 수 있다.
-선교사업의 문제점들과 어려움들을 정정당당하게 직면하라.
그리고 여기 개입되는 원가를 계산하라. 열대기후 아래서, 그것도 마음이 내키지 않는 상황에서 단조롭고 진절머리나는 언어공부에 차분히 착수하게 된다면 해외사역에 붙어다니는 매력은 재빨리 사라져 버린다.
-신앙심깊고(godly) 견문이 넓어(well-informed) 그의 판단을 믿을 수있는 두세 사람과 의견을 나누라.
그분들이나 당신 자신의 부모들이 과도하게 영향력을 행사하게 해서는 안된다. 개입되는 것은 당신 자신의 생애이며 결정은 당신 자신이 내려야 한다.
-하나님의 뜻이 당신에게 명백해짐에 따라서 모든 지시에 순종하라.
주어진 빛에 순종하면 보다 멀리 비치는 빛을 받게 된다.
-최종적인 결정의 순간이 오면 찬부양론을 두 난에 조심스럽게 기록하라.
정신적인 진행과정을 인도해 주실 것과 당신의 의지가 하나님의 뜻을 향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해 주실 것을 성령께 부탁하고, 정보와 충고와 환경과 성경의 빛과 성령의 내적인 깊은 확신을 고려하여 결정을 내려라. 그러나 아직 행동은 하지 말라.
-시간이 당신의 결정을 테스트하게 하라.
확신이 더욱 깊어지는지 알아보고 하나님의 평화가 당신의 마음에 계속 충만해 있는지 눈여겨 보라. 그렇다면 주님이 인도하신다고 결론을 내려라.
바울은 주께서 마게도냐로 부르시고 계심을 ”인정하게”(assuredly gather-ed)되자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썼다”고 했다. 이렇게 하라. 그러면 하나님이 다음 단계를 보여주실 것이다.
당신은 전진해 나감에 따라서 성경을 통해 더 깊은 확신을 얻을 수 있고 주위 환경을 통해서 확인을 받을 수 있다. 특이한 확증은 가끔 주어지기도 하지만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쟁기를 손에 잡았으면 뒤돌아 서는 것을 단호하게 거절하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 주께서 당신은 ”하나님 나라에 적합치 않다”고 말씀하신다. 신앙으로 심은 것을 불신앙으로 흔들리는 일이 있어서는 절대로 안된다. 당신이 만일 성실성과 믿음으로 행동해 왔다면 당신이 받은 인도하심을 재고찰해 볼 필요는 없다.
옆으로 새지 않도록 조심하라. 원수가 당신의 결정에 도전하는 일이 있을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야망이나 편함을 생각하다가 옆으로 새며 보다 많은 사람들은 결혼이나 인간적인 애착으로 말미암아 도중하차하게 된다. 주님은 그에게 최고의 그리고 넘치는 충성을 할 것을 요구하신다.”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와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6, 27, 33).
제 19장 영적인 등산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여호수아 14장 12절).
구약에 나오는 용감한 갈렙은 성장하기를 결코 멈추지 않는 사람이었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점점 떨어져 광채를 잃는 모습을 보여주는 대신 오히려 그의 수준은 높아만 갔다. 그는 나이가 많아서도 위대한 일을 성취할 수 있다는 유쾌한 진리를 보여주었다. 또한 거룩한 봉사사역에서는 고정된 퇴직 연령이 없다. 생의 매 단계마다 우리는 그와 겨누게 되며 어떤 면에 있어서도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그가 거룩하면서도 일관성있게 성장하는 생을 살았던 공개된 비결은 그에게서 처럼 우리에게도 진실이 될 수 있는 네 단어로 된 간단한 말 속에 비장되어 있다.”그가 전심으로 여호와를 따랐더라.”
일관성있는 젊음
갈렙은 비교적 젊은이로 이스라엘 역사의 무대에 오른다. 그의 젊은 시절에 대해서는 아무 기록이 없으나 그에 대한 계속적인 기록을 볼 때에 젊은이다운 그의 개성을 정확하게 통찰하게 된다. 30년 동안의 우리 주님의 생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지마는 공생애의 3년은 우리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모두 말해주고 있다. 위기가 사람을 만들어내지는 않으나 사람을 나타내 보인다. 파선의 위기가 있기까지 바울은 단지 ”몇몇 죄수들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위기가 오자 그 환경의 명백한 지배자가 되었다. 유대지파의 통치자 갈렙이 열두 첩자들 중의 하나로 선택되었음은 그가 지도자와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두가지 자질이 눈에 띄게 나타났다.
첫째로 그는 불굴의 용기를 보여주었다.
육체적인 용기보다도 도덕적인 용기는 더 위대하고 희귀한 것인데 갈렙은 가데스의 위기 때에 둘 다를 보여주었다. 그의 도덕적 용기는 일반의 견해가 파도와 같이 거세지고 있을 때 이에 대항하여 거의 혼자서 굳게 서 있으므로 드러나게 되었다. 이 일은 인기를 갈망하는 젊은이들이 받는 가장 어려운 시험들 중의 하나이다.”모든 이가 그 일을 하고 있을 때” 이와 반대되는 과정을 끈기있게 뒤쫓기는 어려운 일이다. 소수의 주장에 대해 모두가 기꺼이 후원을 하는 것은 아니다. 거스르는 신학적 풍토에서 그릇된 침묵을 지키고 있기는 퍽 쉬운 일이다. 돌이 날아들기 시작할 때 자기 신앙의 태도를 지속해 간다는 것은 육체적인 용기가 대단히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위협당하기를 거절하였고 절대 다수의 요청에 굴복하지도 않았다.
둘째로 그는 강건하고 동요하지 않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하나님의 가치척도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한다. 그의 신앙이 더욱 눈에 띄게 된 것은 첩자들 절대다수의 보고로 인해 야기된 불신앙의 독기가 한창일 때 그의 신앙이 과시되었기 때문이다.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거기서 아낙 자손[거인들]을 보았고...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 ... 그 땅은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민 13:28-32).
실망과 불신앙의 이러한 냉냉한 분위기에서 갈렙은 불굴의 신앙을 주장한다.”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민 13:30/14:8, 9).
갈렙은 얼마나 장엄하게 신앙과 용기의 조화를 이루었던가!
겁나는 거인들이 있었는가?
그들은 밥이었고 어떤 작가는 이렇게 썼다.”거인이 크면 클수록 밥이 많은 것이다.”갈렙과 여호수아는 믿음을 가진 소수였으며 열사람이 보았던 모든 것을 그들도 보았었다. 그들 임무의 위대함을 축소시켜 본 것도 아니었다. 그들과 열 사람 사이의 차이는 열 사람이 거인들의 힘을 자신들의 메뚜기같은 힘과 비교하여 측정한데 대해 두 사람은 전능하신 하나님과 비교했던 것이다. 믿음에는 참된 전망이 있다. 열사람은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강청했다. 그들은 일시키는 감독의 채찍을 벌써 잊었던 것이다!
그러나 갈렙에게는 뒤로 돌이키는 일은 없었다. 우리는 각자의 특정한 거인들과 튼튼한 성벽에 부딪혔을 때 그 열사람을 본받을 것인가 아니면 두 사람을 본 받을 것인가?
좌절되지 않은 중년
젊은 시절에 로케트처럼 날아 올랐던 많은 사람들이 중년기의 시련들 앞에서 막대기처럼 떨어지곤 한다. 중년은 젊은이들처럼 폭발적이 못되고 훨씬 세심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결혼은 장래성있는 젊은이로 하여금 적극적인 영적 전투에서 빠져나가도록 마음문을 두드린다. 사라져가는 젊음의 열정을 가치있는 생의 목적으로 변화시키는 대신 우리는 사물들을 부드럽게 하므로 빈혈적이고 무미건조하게 된다. 영적인 열심을 잃게 되고, 개인적인 헌신의 감퇴가 오며, 자기부정을 늦추어도 되는 권리를 벌어두었다는 느낌을 가진다. 작은 성공을 기뻐하고, 부드럽고 쉬운데 굴복하여 안착하려 한다.
결혼과 가정생활에 대한 비현실적인 이상을 판에 박힌 것으로 받아들이는 때가 너무나 많다. 생을 고정시킴으로 말미암아 경향성과 습관들, 환멸, 비판, 그리고 때로는 냉소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생활의 형식이 되고 만다. 도덕적이고 영적인 자질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약화된다.
갈렙은 젊음의 시련을 성공적으로 통과했는데 그러면 중년기의 기나긴 시련은 어떻게 잘 넘겼을까?
그의 시험은 눈에 띄게 어렵고도 비참한 것이었다. 자신의 믿음과 용기에도 불구하고 그의 동시대 사람들이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40년 간이나 좌절과 실의의 생을 살며 고난을 받을 운명에 처해졌다. 불신앙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며 병을 옮긴다. 왜냐하면 불신앙은 전염성이 매우 강하기 때문이다. 자기의 능력이 절정에 이르렀을 시기에 목적없이 방황해야 할 운명에 처해졌으니 그가 토라져서 시무룩해지기는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주위의 영향력에 대해 성공적으로 저항했으며, 도덕적이고 영적인 수준을 잃지 않았고 오랫동안 지속된 시련에서도 살아 남았다. 그는 그의 젊음의 때에 독수리같이 날개를 달고 날아 올랐었다. 그리고 이제 그는 근심하지 않고 달리는 기술을 터득하였으며 생명력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안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는 마음이 약해지지 않고 걸을 수 있을까?
노년의 승리
갈렙은 노년의 가능성에 대하여 영광스러운 개념을 제공한다. 그가 85세였을 때 맞은 최고의 기회가 이 개념을 설명한다. 그에게 있어서 노년은 ”정력이 점차로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성취를 향해 박차를 가하는 것이었고, 산을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정상을 향해 공격하는 것이었으며, 노쇠와 무미건조함이 아니라 모험과 달성을 뜻했다. 그의 생애는 종말을 향해서가 아니라 완성을 향하여 꾸준히 전진해 갔다. 그의 마지막 몇 해는 최선의 해였다. 그는 각 연령을 거치면서 동시대 사람들 위에 높이 솟아 있다. 젊어서 그는 혼자 버티어 섰으며 나이가 많아서는 혼자 산을 오른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사십오년간 기다리며 그는 그의 진보된 믿음을 하나도 잃지 않았고 그의 추진력(충동)도 전혀 잃지 않았다.
그는 육체적으로 한창 때의 남자였다.”나의 힘이 싸움에 감당할 수 있사오니”(수 14:11). 부드러운 슬리퍼나 신어야 할 여기 이 85세의 사람이 철로된 신을 신고 산에 올라가 거인들을 패주시키겠다고 말한다!
그는 영적으로 대담하였다(adventurous).”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14:12)라고 그는 요구했다.
어떤 산일까?
물론 두렵고 정복할 수 없는 거인들이 사는 산이다. 45년 전에 서두름이 없는 여호와께서 갈렙과 그의 자손들에게 약속하셨던 산이다. 여전히 젊음으로 끓어 올라 그의 생애에 있어 가장 큰 임무에 매달려 생애의 가장 큰 승리를 성취하였다. 그의 이런 행동은 부주의하고 무모한 행동이 아니었고 계획된 믿음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야망을 품었고 하나님의 약속의 완전한 성취로 만족을 얻었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이것은 나이를 먹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일대 강령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믿음으로 발걸음을 내딛는데 주저하며 공격의 정신을 잃어가고 있는가?
우리는 전쟁의 혹독함으로 인해 내적으로 움츠러들고 있는가?
우리는 젊음에 남겨둔 일들의 황홀함을 의식하고 있는가?
아마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슬리퍼를 벗고 철신을 신는 것이며 주님의 이름으로 정복할 약간 무시무시한 산을 달라고 하는 것이다. 갈렙에게서 용기를 취할 수 있다. 그러나 갈렙에게 보다 훌륭한 점이 앞에 놓여 있다. 갈렙은 장성하기를 결코 멈추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믿음이 결코 동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C. H. 내쉬 목사는 그리스도인의 봉사사역에서 일할 천명의 남자와 여자를 훈련시켰는데 70세에 노장직을 은퇴하였다. 그러나 그가 쓸모없게 되지는 않았다. 80세 때에 그는 앞으로 십년간 열매맺는 사역을 하게 하신다는 확신을 주님께 받았으며 그 확신은 풍성하게 성취되었다. 그가 90세가 다 되었을 때 토인비의 불후의 역사서 제 6권 읽기를 끝내셨음을 알았다. 90회 생신이 지난 후 그는 결코 잊혀지지 않는 헌신기도를 통하여 많은 회중을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이끌어 가시는 것을 들었다. 갈렙처럼 그도 자연의 질서를 문제시하지 않고 나이가 들면서 그의 수준은 계속 성장해 갔다.
갈렙의 업적가운데 가장 주목할만한 것은 이스라엘의 모든 젊은이들에게 -자기 시대의 사람들은 광야에서 멸망받았다-보인 모습이었다. 그들중 어느 누구도 자기 영역에서 적들을 모조리 쫓아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갈렙은 거기서 아낙의 소생 곧 세 아들을 쫓아내었고”라고 기록되어 있다. 가나안을 분배받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기록에는 우울한 후렴구가 반복되고 있다.”그들이 가나안 사람을 다 쫓아내지 않았더라... 가나안 사람들이 그 땅에 거하니라... 얻을 땅의 남은 것은 매우 많더라.”
그들이 적들을 쫓아내지 못한데는 두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완전한 무능함때문이었다.”쫓아내지 못하였음으로”믿음의 결핍은 능력의 결핍을 초래하였다.
둘째는 나태로 인해서였다.”너희가... 땅을 취하러 가기를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라고 여호수아가 꾸짖었다. 젊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실패한 곳을 노인 갈렙이 극복한 이유는 무엇인가?
네개의 단어로 된 비결이 있다.”그가 전심으로 여호와를 좇았더라.”이 비밀의 중요성은 여러번 반복하여 기록된 것으로 강조된다. 인준받은 양심을 가진 갈렙은 이 말을 자기 자신에 대하여 주장할 수 있었다.”나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으므로”(수 14:8).
이것은 자랑이 아니라 엄숙한 사실의 진술이었다. 그가 존경하는 지도자이며 그의 성품과 마음자세를 평가할 기회를 가졌던 모세는 ”네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은즉”(수 14:9)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깜짝 놀랄 증거는 하나님께서 친히 하셨다.”내 종 갈렙은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민 14:24).
갈렙은 자기 적들, 거인들을 완전히 쫓아냈다. 그에게는 충성심이 나누어 진 적이 없었다. 받은 바 빛에 대한 꾸준한 순종과 하나님의 뜻을 알았을 때 불평없이 받아들이는 마음 뿐이었다. 자기 운명이 정당치 못하다고 불평하는 일은 없었다. 그에게 있어 하나님의 뜻은 선하고, 받을만하며, 완전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매우 느리게 움직였으나 그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만족해 하였다. 신약의 말로 하면, 예배의 논리적인 조례에 따라서 그는 자신의 몸을 살아있는 제물로 하나님께 바친 것이며 이런 희생을 꺼리다가 광야에 그 시체가 널린 믿음없는 대중과는 현저한 대조를 이룬다.
우리의 생활 가운데 제거하기를 꺼리는 영적인 적들, 그들을 쫓아내겠다는 우리의 미약한 노력을 비웃는 거인들이 있는가?
우리는 우리가 실제로 점유하고 누리는 영적인 영역보다도 훨씬 더 큰 특허장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는가?
이유는 한가지이다.
우리 생활에는 전심으로 주를 좇지 않는 어떤 영역이 있는 것이다. 마음에 다른 예약이 있거나 헌신상의 어떤 불비한 점, 영적인 능력을 누전시키고 영적인 생명력을 약화시키는 것들. 완전한 승리는 철저한 순종에서 온다.
우리를 당신의 등산가로 삼으소서
낮은 비탈에서 꾸물거리지 않겠나이다
희망으로 새롭게 하소서, 희망의 하나님이여
좌절하지 않고 언덕을 오를 수 있게요
보이지 않은 주님을 바라보면서.
-아미 W. 카미카엘
죽기까지 올라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