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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06월 23일 12시 57분] | ||
체코를 꺾으며 죽음의 조에서 1위로 탈출한 이탈리아는 2002년에 비해 조별예선에서 우승후보다운 모습을 확연히 보여줬다. 그러나 16강 진출의 환희에 겨워하던 이탈리아인들은 다섯 시간 뒤 맞은 상황에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속으로 "맘마미아(세상에 이럴수가)!"를 외치며 계속 이어지는 악연에 허탈감에 젖었을까, 아니면 복수의 기회가 왔다는 생각에 기뻐했을까? 거스 히딩크 감독과 이탈리아 축구의 악연은 결국 독일 땅에서도 이어지게 됐다. 여명이 밝아오던 때 터진 해리 큐얼의 동점골을 보면서 가장 먼저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간 단어는 이탈리아였다. 제3자의 입장에서 봐도 이렇게 재미난 상황인데 당사자, 특히 당했던 자의 입장은 오죽 찝찝하겠는가. 단지 사커루와 만나는 시나리오였다면 이탈리아 입장에서는 꺼림칙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르첼로 리피 감독의 말처럼 브라질을 피했다는 점에서 98년 이후 8년 만의 월드컵 8강 진출에 한발 다가섰다며 쾌재를 불렀을 테다. 하지만 히딩크라는 존재를 상기해보면 상황은 꽤 많이 달라진다. 히딩크 감독은 그간 대표팀과 클럽의 감독으로서 이탈리아 축구를 수 차례 괴롭혀왔다. 그중 악연으로 이어진 출발은 월드컵 100년사를 수놓는 명승부 중 하나로 꼽힌 2002년 한•일월드컵 16강전이다. 당시 히딩크 감독의 철저하게 준비 된 전술과 경기장 안팎에서의 심리전, 어느 때보다 강하게 무장한 선수들의 자세, 열정적인 붉은악마의 응원이 삼위일체로 이뤄지며 한국은 이탈리아와의 전력상의 열세를 만회했다. 당시 경기의 파장은 월드컵이 끝난 후까지 이어지며 이탈리아 축구는 긴 시간 한국민과 언론의 도마 위에 오르내렸다. 당시 심어진 이미지가 지금도 여전할 정도니까. 월드컵 후 네덜란드의 PSV 아인트호벤 감독으로 복귀한 히딩크 감독은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이탈리아 클럽과의 경기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히딩크 감독의 명성을 드높이는 데 도움을 준 세리에A의 클럽은 AC 밀란이었다. 비록 결승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2004~2005시즌 챔피언스리그 4강 2차전에서 프리미어리그 진출의 기폭제가 된 박지성의 골을 비롯, 밀란에 3-1 승리를 거두며 명성을 떨쳤다. 지난 시즌에는 32강 조별 리그에서 원정에서 0-0 무승부, 홈에서 1-0으로 승리하며 우위를 점했다. 특히 1-0 승리를 거둔 경기에서는 주포메이션인 4-3-3과 4-4-2가 아닌 3-4-3을 가동하며 전력 열세를 메웠다. 당시 이탈리아 해설진은 아인트호벤 수비진의 움직임을 보며 ‘한국의 사촌’이라고 표현했고 유럽 언론은 지오바니 트라파토니, 카를로 안첼로티 등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명장과의 맞대결에서 강점을 보이는 히딩크를 가르켜 '이탈리아 킬러'라는 애칭을 붙였을 정도다. 이렇듯 히딩크 만으로도 버거운 이탈리아는 또 하나의 부담감을 안아야 한다. 바로 2006년의 호주가 2002년의 한국과 많은 부분에서 닮아있기 때문이다. 물론 강인한 체력과 몸싸움을 바탕으로 백병전을 연상시키는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경기 방식은 히딩크 감독의 영향이지만 강한 정신적 무장도 단판 승부에서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크로아티아전이 끝난 뒤 히딩크 감독은 호주 선수들을 가르켜 "사자의 영혼을 지녔다"고 표현하며 토너먼트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발휘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2002년 당시 세리에A 페루자에서 뛰던 한국의 안정환처럼 이탈리아 축구를 잘 알고 있는 파르마의 마르코 브레시아노가 있다는 사실. 16강 진출의 명운을 가른 크로아티아전에서 상대 선수 두명이 퇴장당하고 페널티 킥을 얻는 등 심판 판정 운마저도 2002년의 한국과 닮았다. 만일 체코전에서 부상을 입은 수비수 알레산드로 네스타가 호주전에 나서지 못한다면 닮아도 이렇게 닮을 수 없는 상황이 연출된다. 4년 전의 시나리오를 다시 읽어 내려가는듯 한 꺼림칙함을 느끼고 있을 이탈리아 앞에 놓여진 히딩크 데자부(Hiddink deja vu). 하지만 히딩크 마법도 이번에는 그렇게 쉽지 않을 전망이다. 현재의 이탈리아는 2002년에 비해 분명 나은 팀이다. 히딩크 감독 특유의 전략인 심리전도 모지 스캔들과 데 로시 사태로 인해 역으로 단합 된 이탈리아를 파고 들기 어려워 보인다. 마르첼로 리피 감독과 이탈리아의 스타들도 남은 시간동안 히딩크라는 요소를 철저히 파악하고 나올 것이다. 전력의 열세 속에서 흔들고자 하는 히딩크와 흔들리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쓸 이탈리아. 단판승부의 특수성 속에서 벌어질 치열한 심리전과 두 팀 사이에 얽힌 연이 빚어내는 한판 승부는 분명 이번 월드컵 16강전의 최대 화제가 될 전망이다. 일본전이 그랬던 것처럼 이탈리아전도 적어도 한국 내에서는 분명 호주 대표팀을 향한 일방적인 응원 분위기가 조성될 것이다. 그런 일방성에 씁쓸한 감정이 들 국내의 이탈리아 팬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보내지만 어쩌겠는가, 이제 히딩크 없이는 한국축구사를 얘기할 수 없는 상황임을 인정해야하지 않을까? 다만 이탈리아 축구를 지지한다는 이유만으로 비난에 나서는, 각자의 선택을 존중하지 않는 행동도 지양되었으면 한다.
필자 및 코너 소개 스포탈코리아를 거쳐 JES에 입사한 서호정은 현재 일간스포츠에 필력을 쏟고 있다. 매니아로 출발해 축구 저널리스트에 입문한 몇 안되는 사례 중 하나로 꼽히는 그는 축구에 관한 한 누구못지 않은 애정을 자랑하며 축구 미디어계에 젊은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