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레바논 사태의 전말 -
<배경>
과거 한때 중동 지역에서 가장 서구화 되고 살기 좋은 나라로서 그 수도 베이루트는 중동의 파리로 불리우기 까지 했던 이 나라가 집집마다 파라솔보다 자동소통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지경이 되어버린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더듬어 올라갈 필요가 있다.
19세기 말에서 금세기 초에까지 중동 지역 대부분은 대제국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는데, 이들이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함에 따라 이 지역을 전승국인 영국과 프랑스가 사이좋게 나누어 가지는 과정에서 시리아는 그 지배권이 프랑스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그 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0대 중반, 열강 제국들의 식민지 경영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세계각지에는 수많은 신생독립국이 생겨났는데, 마지못해 물러나면서도 이 중동 지역에서 완전히 발을 빼는 것이 못내 아쉬운 영국과 프랑스는 의도적으로 몇개의 신생국가를 더 만들어 놓고 철수하게 된다.
즉, 자국의 이익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지역에(전술적, 지리적 요충이나 석유와 같은 특수한 자원이 풍부한 곳) 자신들의 말을 잘 듣는 작은 나라를 세워놓고 알게 모르게 영향력을 행사하자는 의도인데, 이때 영국이 이라크의 영토일부를 쪼개어 레바논을 만들었던 것이다.
자연히 레바논은 1943년에 독립을 성취할 때부터 중동에서 가장 서구적인 색체를 띠고 있었고, 또한 그리스, 터키계 이주민들이 많았던 탓에 이웃의 다른 중동국가들과는 달리 기독교를 신봉하는 주민들이 많았다.
때로는 과격하고 호전적이며, 철두철미한 회교이념에 충실한 주변 회교 국가들 한복한에서 회교도와 기독교도가 공존하는 이 나라의 운명은 처음부터 오늘과 같은 미래가 예정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여간 독립 이후 30여년간 별문제가 없었다.
국내의 기독교 정치세력과 회교 세력은 '국가평의회'라는 합의 기구를 만들어 놓고 여기서 의견 조정을 거쳐 양쪽이 교대로 집권해 나가며, 1948년의 제1차 중동전에는 주변 회교국가들의 권유에 따라 비록 소규모이지만 군대를 파병하여 이스라엘과 싸우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 전쟁 이후로 문제의 싹이 움트기 시작했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함에 따라 이스라엘 땅에서 살던 약 40만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레바논으로 말려 들어온 것이다. 그 후 20여년간 이들은 남부 레바논 일대에 대규모의 난민촌을 형성하고 더부살이를 시작했는데, 회교도와 기독교도가 위태로운 균형을 가까스로 잡아가고 있던 이 작은 나라에 급격히 회교 인구가 불어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그리고 1970년 요르단에서 이스라엘에 '피'의 보복을 목표로 하는 PLO게릴라들이 이스라엘의 더 과격한 보복공격을 겁낸 요르단 국왕에 의해서 기지를 폐쇄, 추방당하게 되어버린다. 이렇게 쫓겨난 PLO게릴라들은 국내의 잡다한 정파간의 합의체에 불과하여 강력한 통치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레바논정부의 약한 통제력과, PLO의 국외활동을(항공기 납치, 해외 주재 이스라엘 공관에 대한 테러등) 수행하기가 쉬운 국제도시 베이루트가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레바논으로 몰려 들어가게 되었다. 게다가 주변 회교강국들의 압력도 한몫을 했다.
군사강국 이스라엘과 대치하고 있는 그들로서는 PLO가 이스라엘과 싸우는 전위부대로서 아주 쓸모있는 존재임에는 틀림없지만 어린 아이 조차 장난감보다 자동 소총을 더 능숙하게 조작하는 이 위험한 존재들을 자기네 국토 안에서 먹여 살리는 일만은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달갑지 않은 일을 만만한 약소국 레바논에 떠넘겨 버린 것이고, PLO의 본부는 레바논의 베이루트에 설치되기에 이른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레바논 내의 회교 세력과 기독교 세력의 불화는 단순히 종교적 신념의 차이 때문이라고 생각 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어느 한편이 정권을 잡는데 따라 더 큰 이익을 누리는 지배계급이 될 수 있다는 실질적인 계산에 의해 레바논 내의 회교 세력은 국가평의회 내에서 더 큰 요구를 하기 시작한다.
<내전의 시작>
이렇게 세력이 커진 회교도들은 국가 평의회에서 점차 더 권리와 이익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더부살이 하는 PLO는 이들 활동의 기수에 서게 된다.
기독교파와 회교도간의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양측이 서로 총질을 해대는 사태로 발전하고 마는데, 오늘날까지도 이 지루한 레바논 내전의 직접 원인이 된 최초의 방아쇠를 어느 쪽이 먼저 당겼는지에 대해서는 서로 책임을 상대방에게 전가하고 있다.
하여간 1975년 4월 13일 PLO게릴라들이 베이루트의 한 교회당을 기습하여 다수의 기독교도들을 살해하였고, 이에 대한 기독교도들로 구성된 팔랑게 당의 지도자 피에르 제마엘이 이끄는 기독교 민병대가 즉각 보복공격을 감행하는 것으로 레바논은 내전의 아수라장으로 빠져든다.
1975~1976년에 걸쳐 계속된 이 내전에서 약 8만병이 목숨을 잃었고, 처음에는 회교도와 기독교간에 시작된 이 분쟁은 점차 시간이 흐를수록 그 양상이 복잡해져서 급기야는 기독교파와 또 다른 기독교와, 수니파 회교도와 시아파 회교도들끼리 서로 치고받는 혼전으로 발전한다.
이 난리통에 유명무실해진 정부를 전복시키고 정권을 잡아보려는 각 정치조직들은 저마다 준 군사조직인 민병대를 양성하여 이 내전에 뛰어들었고, 그 결과 50여개의 민병조직이 난립하게 된다.
사태가 이렇게까지 악화된 데는 옛날부터 성인 남자라면 그 한사람 한사람이 모두 강인한 전사로서 전투와 무기를 숭상하며, 또한 근대적인 국가가 형성되기 전부터 부족단위의 지방토호들이 저마다 이런 사병조직을 거느리고 있던 이 중동지역의 오랜 전통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시리아의 개입>
시리아의 입장에서 본다면 레바논은 원래 자기네 영토였다는 생각에 시리아군은 전차를 동원하여 레바논으로 진격해 들어간다.
하지만 시리아군은 기독교 민병대가 아닌 같은 회교도인 PLO를 향해 진격을 하고, 이 내전의 전체 희생자 8만명중 30%인 PLO희생자가 시리아군에 의해 발생하게 된다.
같은 회교형제임을 과시하며 줄곧 PLO를 지원하던 시리아가 왜 이렇게 돌변하게 되었냐면, 첫째 이 내전에서 PLO의 지원을 받은 회교도세력이 승리할 경우 레바논은 당연히 이스라엘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할 것이고, 만일 이들과 이스라엘이 마찰을 빚는다면 당연히 시리아에도 불똥이 튀어오기 때문이었고, 두번째는 같은 회교도라 하더라도 PLO가 가세한 레바논의 회교도는 급진 시아파로서 이들은 시리아의 집권세력인 수니파와는 정치노선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여간 이 내전이 종결된 것은 1976년 11월이고 레바논에는 내전의 재발을 막기 위한 약 3만 여명의 아랍 평화유지군이 주둔하게 되는데, 이것은 명분일 뿐 사실은 그 병력 대부분이 시리아군으로서 결국 시리아가 레바논을 무력 점령한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상황이 된다.
하지만 레바논 남부 지역은 이스라엘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으므로 시리아는 이스라엘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이 지역에는 군대를 배치하지 않았고 그 결과 시리아군의 통제권을 벗어난 이 남부 자역에서는 여전히 기독교 민병대와 PLO게릴라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앞 마당에서 싸움판이 벌어진 집에 유리창이 성할 리가 없었다. 시리아와의 전투 와중에 PLO의 포탄은 지척거리의 이스라엘 영토로 날아들었고, 이스라엘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레바논의 틸 팔레스타인 난민촌에 폭격을 가한다.
항상 그래왔듯이 PLO는 1978년 3월 11일 이스라엘 수도 텔아비브에서 자동 소총을 난사하여 100여명의 유태인을 살해하는 것으로 또 다른 보복을 하는등, 끝도 알수 없는 보복에 보복이 이어지게된다.
<이스라엘의 개입>
이스라엘은 마침내 전면 전쟁을 방불케 하는 육해공 입체작전으로 남부 레바논을 향해 진격을 개시하여 8일만에 이 지역을 완전히 석권하고 마는데,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군의 1차 레바논 침공이다.
이스라엘군의 이작전은 엄연한 주권국가인 레바논 영토를 무력 침공한 것임에는 틀림없는 것임인데도, 이런 침략자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남부 레바논에게 PLO와 싸우고 있던 기독교파 민병대였다.
기독교파 민병대는 이스라엘군을 저지하기 위해 달려오던 허약한 레바논 정부군에게 총질을 해대는 명백한 반역행위까지 할 만큼 이스라엘 침공군을 열렬히 환영한 것이다.
이 지역의 골치 아픈 PLO를 제거한데다 기독교 민병대의 적극적인 협조에 기분이 흡족해진 이스라엘은 민병대의 지도자 하다트 소령에게 이곳의 관할권을 일임하고 일단 철수한다.
이제 이스라엘이라는 든든한 후원자를 얻은 하다트는 마침내 이 남부지역이 레바논에서 독립한 자유 레바논임을 선언하고 자신이 국가 원수임을 자칭하는게 되는데, 이스라엘의 괴뢰정권이 생기게 된다.
<이스라엘의 전면침공>
이렇게 시리아와 이스라엘, 두 강국의 개입으로 레바논의 내전은 일단 진정되는 듯 하였으나 1978년에 들어서면서부터 레바논 주둔 시리아군의 태도가 돌아서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PLO만을 상대하던 것이 차차 기독교 민병대에 대해서도 탄압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무렵 마론파를 비롯한 레바논 기독교 세력은 이스라엘의 은밀한 지원에 힘입어 가장 큰 세력으로 거듭나 있었고, 이들은 이미 소화기 따위로 무장한 오합지졸의 게릴라 단체가 아니었다. 상당수의 대전차 화기와 전차까지 보유하여 웬만한 정규군 규모 이상으로 성장해 있던 그들은 시리아군에 대항하여 격렬한 전투를 전개하여 레바논 전토는 또 한번의 전화에 휩싸인다.
1980년, 급기야 기독교 민병대가 레바논 동부 베카고원의 요충지 샤브레를 점령하자 시리아는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시리아는 다시금 PLO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고, 이제 레바논 내전은 기독교파와 PLO가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대리전쟁을 수행하는 양상으로 변해버렸다.
기독교파가 밀릴 때마다 이스라엘은 공군기를 보내어 PLO의 거점을 폭격하는 노골적인 지원을 하였고, 이름뿐인 레바논 정부군은 이런 이스라엘군의 개입을 막을 힘이 없었으므로 그 몫은 시리아가 치루어야 했다.
시리아는 이스라엘의 전투기를 요격하기 위해 베카계곡에다 신형의 SA-6 게일풀을 비롯한 대규모 방공망을 배치하게 되는데, 사태가 이렇게 되자 4차 중동전 이후에 성립된 정전협정은 휴지조각이 된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시리아는 이스라엘 전투기의 레바논 영공 침입을 즉시 중지할 것을 요구했고, 이스라엘은 시리아의 대공 미사일 철거를 주장했다. 이런 와중에 1981년 4월 28일, 베카 고원 상공을 비행중이던 이스라엘 공군기가 시리아군의 헬기를 격추해 버리는 사태가 발생되었고, 이것을 도화선으로 위협용 정도였던 SAM미사일들이 격추용으로 이스라엘 전투기에 마구 쏘아지게 된다.
5~6월경에는 베카 고원 상공에서 양쪽의 공군기가 연일 공중전을 벌이는 지경으로 확대되어, 이제 레바논 땅 안에서 이스라엘과 시리아간의 실질적인 5차 중동전이 발생한 것이다.
이런 와중에 1982년 6월 3일 영국 런던 주재 이스라엘 대사가 PLO의 해외 공작원에 의해 피살이 되었다. 이미 전쟁준비를 착실히 해오던 이스라엘은 이를 구실삼아 전면적인 레바논 침공의 포문을 열게 되었고, 이제까지 시리아군과의 정면 대결을 피하기 위하여 남부 레바논 지역에 한정되던 작전 목표가, PLO의 본부가 있는 베이루트를 목표로 삼는다.
<갈릴리 평화작전>
1982년 6월 4일 오후 3시 이스라엘 최신예 F15, F16전투기 편대들이 레바논 국경을 넘어 PLO거점에 폭격을 퍼붓는 것을 시작으로 갈릴리 평화작전이 시작되었다.
곧이어 M60A1, 벤구리온, M113 젤다 장갑차들을 위시한 지상병력이 레바논 영내를 향해 쇄도해 들어갔다. 이 중에는 최초로 실전을 치르는 메르카바가 다수 포함되어 있었고, 이들은 곧장 국경에서 15Km 지점의 빌 난민촌에 거대한 포위망을 형성하고 집중공격을 개시했다.
물론 레바논 국경에는 UN에서 파견된 프랑스, 이탈리아군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평화유지군이란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그저 멀리서 바라만 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UN이 United Nothing이 되어 버렸다.
PLO 게릴라의 부녀자가 뒤섞인 난민 캠프에다 대고 전차포를 퍼부어 댈 수 없었기에 이스라엘과 게릴라사이에는 치열한 총격전과 백병전이 일어났다.
PLO 게릴라들은 RPG-7과 AK소총등으로 결사적인 항전을 시도했지만 그들의 화력이 오랬동안 전쟁을 준비해온 이스라엘 정규군을 능가할 수는 없는 일이었고, 1000여명이 그들 처자와 부모의 눈앞에서 목숨을 잃어가며, 틸 시는 그렇게 이스라엘에게 점령이 되었다.
이에 반해 이스라엘군의 주력부대는 베이루트를 향해 일로북상을 계속 중이었고, 마침내 이들은 레바논 산의 뷰포트 성채에 도달하게 된다.
중세시대 십자군 전쟁 당시 축성된 이 견고한 바위 요새는 점령하기만 하면 멀리 레바논 평원을 한눈에 감제할 수 있는 유리한 지형이었는데, 이 험준한 산 정상에 자리잡고 있기에 전차로 공략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스라엘의 골라니 여단은, 갈고리 로프를 이용하여 이 태고의 암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하였다.
이 요새를 둘러싼 치열한 소화기의 총격전에서 단연 빛을 발휘한 것이 이스라엘군의 가릴 자동 소총이었다. 이전까지 사용하고 잇던 무거운 벨기에제 FN소총은 이 무렵부터 AK소총을 국산화시킨 이 가릴소총으로 대체가 되어 있었기에 이 요새의 정상에 다윗의 별을 꽂을 수가 있었고, 주력 기갑부대가 베이루트를 향해서 진격을 계속할 수가 있었다.
이들이 베이루트로 향하는 공격로 우측편에는 거대한 골란 고원이 펼쳐져 있었고 이것은 아랍의 평화 유지군(시리아군)의 대부대가 배치되어 있는 곳이었다.
명분상 이스라엘 침공군은 ‘PLO의 의장 아라파트를 잡아라’ 였지만, 대규모의 전력을 투입한 이들의 실제목표는 T72 전차등의 소련제 최신예 무기로 중무장을 하여 무서운 세력으로 부상하는 시리아군을 이 기회에 철저하게 때려 부수기 위함이었다.
아랍 평화 유지군이라는 명분을 달고 있던 시리아군이 공격해 들어오는 이스라엘군을 구경하고 있을 리 만무했고, 곧 양측의 소부대간의 충돌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이스라엘은 이것을 핑계로 베카 고원의 시리아 SAM발사 기지들을 F4펜톰 편대가 슈라크 미사일로 때려잡자, 시리아 전투기들도 이스라엘 기갑부대에 폭격을 가하기 시작하는 등, 남의 집에서의 두 불청객의 난투극이 시작되었다.
이스라엘은 시리아의 전투기에 대항하여 M741 발칸으로 저공으로 공습해오는 시리아군의 미그기를 격추시키었고, 개전 4일째인 10일, 드디어 양측의 전차전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시리아군의 주력은 그때가지도 베일에 가려진 신비의 전차로 불리던 T72였고 이스라엘은 최초의 자국산 전차인 메르카바를 선두로, 이 두종의 신형전차의 대결은 세계의 군사 전문가들을 술렁이게 했다.
6월 10일 아침 7시경, 베이루트와 다마스커스를 잇는 다마스커스 도로에 포진하고 있던 시리아군이 진격해오는 이스라엘 기갑부대 1개 중대 병력을 향해 AT3 Sagger 미사일을 발사, 두 대의 M60 마가크 전차가 불타오르는 것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후 계속된 6시간에 걸친 기갑전투의 결과 시리아군 전차 200여대가 고철이 되어 이스라엘의 완벽한 승리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주권 국가 레바논을 무력으로 침공한 이스라엘에 대해 세계의 여론이 엄청난 비난을 퍼붓기 시작했고, 여기에다 이 무렵 전 세계에 확산되고 있던 반미 감정으로 입장이 미묘해진 미국이 이스라엘을 설득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이스라엘 정부는 6월 11일 0시를 기해 정전을 결의했다.
<지옥의 베이루트>
6월 11일로 일단 정전이 이루어졌지만, 전투는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이스라엘군이 본국으로 철수 하지 않은 채 여전히 베이루트 외곽을 포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정전명령 1시간 전에 이스라엘의 크필 전투기가 PLO본부 건물에 로켓탄을 명중 시킨바 있었지만 그들이 노린 아라파트 의장은 겨우 목숨을 건졌다.
지지부진한 정전상태가 4일이 경과한 6월 15일, 이스라엘군은 다시 공격을 개시했다. 이미 시리아군은 격퇴되어 지원군이 없는 PLO지만 그들은 결사적으로 항전했다.
PLO는 다른 아랍군에서 쓰다 버린 구식의 전차를 다수 보유하고 있었고, ZSU23실카 같은 자주대공포도 갖추고 이스라엘 공군기에 맞섰다.
이들은 유태인에 대한 치열한 적개심으로 무장하고 베이루트 시가지에 신출귀몰해서 이스라엘군에게 축차적인 희생을 안겨주었다.
이스라엘로서는 최신예 소련제 무기로 무장한 시리아의 정규군보다 이들이 더 까다로운 상대였던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군은 전술을 바꿔서 전차대는 시외곽을 포위한 채 보병을 대거 투입하여 베이루트의 골목 골목을 누비며 한집 한집씩 분쇄해 들어갔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M109 155mm자주포로 PLO게릴라들이 은신한 콘크리트 건물에다 직접 사격을 가하여 건물이 무너져 내리면 자욱한 먼지가 걷히기도 전에 보병들이 폐허 속으로 뛰어 들어가 백병전을 치루는 방식으로 혈전을 치룬 끝에 이스라엘군은 마침내 베이루트 국제공항을 점령하기에 이른다.
이런 중에 이스라엘을 향해 서계의 비난 여론은 높아만 갔고, 이를 의식한 이스라엘은 6월 25일 또 한번의 일방적인 정전을 발표하게 된다.
<엑소더스>
이스라엘군이 레바논 국경을 넘은 지도 두달이 지난 8월 14일, 베이루트를 포위한 이스라엘 전차에 매달린 확성기가 시내를 향해 왕왕대기 시작했다.
"곧 일제 공격이 시작된다. 무고한 시민들은 집에서 나와 해안으로 피신하라. 이 시간 이후 시내에서 발견되는 모든 사람은 게릴라로 간주, 사살될 것이다."
곧이어 대혼란이 일어났다. 집단 공포 상태에 빠진 사람들은 앞다투어 이미 폐허가 된 집에서 빠져나와 해안으로 달려 나갔고, 이스라엘군의 자주포들은 시내 한복판에다 포격을 퍼 붓기 시작했다. 그들은 베이루트라는 도시 하나를 지구상에서 아예 소멸시켜 버릴 기세였고, 전멸의 위기에 몰린 PLO의 사령관 압지하드장군은 무장 투쟁을 포기하고 레바논에서 철수할 것을 결정한다.
이스라엘로서야 그들의 씨를 말려버리고 싶었겠지만, 이미 레바논 침공으로 인해 국제적인 여론이 그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는 상태에서 또다시 문제를 확대할 필요는 없었다.
결국 PLO가 전차및 기타 중화기들을 모두 이스라엘군에 넘겨주고 자위를 위한 최소한의 소화기만을 소지한 채로 그리스와 튀니지아로 철수한다는 선에서 합의가 이루어진다. 갈 곳이 없는 이들에게 절반쯤은 인도적 차원에서, 또 절반은 UN에 의해서 이 두 나라에서는 이들의 거처를 마련해주겠다고 마지못해 동의한 결과이다.
이렇게 이스라엘로 넘겨진 무기 중에는 100여대의 T34전차와 20여대의 T55/54, 레바논 정부군으로부터 노획한 AMX-13전차까지 끼어있어 이들의 무장해제를 집행하던 이스라엘군은 놀랄 수 밖에 없었다.
8월 19일부터 철수가 시작되었고, 레바논 내에 남겨진 팔레스티나들은 통곡했다. 이제 레바논 전토는 실질적으로 이스라엘에 점령되었고, 그들의 아들, 남편들은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고 있었다. 이제 그들 앞에는 더욱 숨을 죽인 비참한 생존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베이루트 항구를 떠나는 배위에 늘어선 PLO전사들은 하늘에 대고 AK소총을 일제히 발사하며 다시 돌아올 것을 다짐한다.
<전후>
한때 중동의 파리라고 불리던 아름다운 도시 베이루트는 폐허화 되었고, 그런 중에서도 일견 평화가 자리잡아가는 듯하다. 1983년 이후로도 국내 기독교와 회교 두라즈파, 헤즈볼라간의 충돌은 계속되었고 이들에 의해 애꿎은 평화유지군이 피격되는 사건도 종종 발생했다.
1983년에 철수를 시작하여 1986년에 완전 철수를 끝낸 이스라엘군은 철수 기간 동안 증오로 인해 총을 든 약소자(부녀자, 소년, 노인)등에 의해 약 600여명이 희생되었으며, 1984년에는 다국적 평화 유지군도 레바논에서 철수하였다.
지금 레바논에는 기독교파가 이끄는 합법적인 정부가 질서 회복과 국가 재건에 안간힘을 쓰고는 있지만 이 나라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끝
<레바논 사태의 두 얼굴...시오니즘과 이슬람 聖戰>
해외 유대인 속속 이스라엘 귀국
무슬림 `레바논 성전' 동참 줄이어
(서울=연합뉴스) 김화영 기자 = 이스라엘과 레바논 헤즈볼라의 충돌이 2주일을 넘긴 전쟁의 와중에서 900명에 가까운 해외 유대인들이 최근 이스라엘로 잇따라 영구 귀국했다.
반면 이란과 이라크에서는 헤즈볼라의 `레바논 성전(聖戰)'에 동참하기 위해 수백명이 레바논을 향해 떠나 종교간 대결 양상이 더욱 짙어지고 있다.
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유대인들은 조상이 살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되돌아간 것이어서, 19세기말 시오니즘(구약성경에 하느님이 유대인에게 준 땅으로 기술된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를 건설하자는 운동)이 다시 번지는 듯한 분위기이다.
25일 2대의 비행기편으로 텔아비브의 벤 구리온 공항에 도착한 유대인들은 모두 650명. 프랑스에서 하루에 이만한 규모의 유대인이 돌아온 것은 지난 1970년 이래 최대 규모라고 AP통신은 전했다. 이에 앞서 지난주에는 미국과 캐나다에 살던 유대인 230명이 이스라엘로 돌아왔다.
북부에서는 헤즈볼라가 2주일전부터 1천300발의 로켓을 쏘고 있지만, 벤 구리온 공항은 환영 열기로 가득했다. 이스라엘 전통 음악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이스라엘 정부의 고위 관리들이 공항까지 마중나가 이들을 반겼다.
유대교 대제사장인 슬로모 아마르가 이들을 축복했고, 에후드 올메르트 총리가 직접 환영사를 하면서 "우리는 강한 민족이다. 장기전을 견뎌낼 힘을 갖고 있다"고 독려했다.
10개월된 아들을 안고 프랑스 마르세이유에서 날아온 사브리나와 제라르 사반 부부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우리의 군인과 조국을 믿는다. 그들이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며 이스라엘 국기를 흔드는 아들을 향해 "곧 꼬마 군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는 전쟁이 귀국하려는 결심을 굳혀주었다고 털어놓았다. 프랑스 니스에서 온 요한나 세바그는 "헤즈볼라와의 전쟁이 더 많은 용기를 주었다"면서 "우리가 고국 정착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세계에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아내와 함께 도착한 메이르 부블리도 "전쟁이 터졌다고 겁쟁이처럼 귀국 계획을 취소하기는 싫었다"면서 "추호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다"며 전쟁은 자신들의 결심을 흔들어놓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스라엘의 이민정책을 관장하는 준 정부기관인 유대인기구(AJ)에 따르면 올해 프랑스에서만 작년의 3천5명보다 많은 3천500명의 유대인이 영구 이주할 계획이다. 2002년부터 프랑스에서 고조되기 시작한 반(反)유대주의에 대한 두려움이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란의 유대인 2만5천여명은 자신들의 유대주의를 시오니즘과는 구분 짓는 성향을 보이고 있다.
이란 의회의 유일한 유대인 의원인 모리스 모다메드는 이스라엘에 어떠한 동정이라도 표현하면 이란 당국과 강경 이슬람 단체의 `타도' 대상이 된다면서 "우리는 이란인이고, 이란의 최고 가치를 위해 일한다. 다행히도 전쟁은 이곳 유대인 공동체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이란의 유대인들은 상당수 이스라엘에 친척이 있는데도 불구, 이러한 상황을 인식하고 이란 정부의 `이스라엘 파괴' 주장에도 공식적으로는 침묵해 왔으며, 지난주에는 이슬람 정권의 시선을 의식한 듯 남부 시라즈시(市)의 유대인들이 친(親)헤즈볼라 집회까지 주최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이슬람권에서는 청년들이 속속 헤즈볼라에 대한 `원군'을 자임, 전쟁터로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이란에서는 26일 10대 청소년에서 노인까지 이르는 60여명의 자원자가 레바논에서 벌어지고 있는 `성전'에 동참하기로 결의, 이미 레바논을 향해 떠난 다른 200명의 자원자에 가세했다.
이라크 남부도시 바스라에서도 헤즈볼라와 함께 싸울 이라크인들의 모집이 이뤄지고 있어 이스라엘-헤즈볼라의 충돌은 점점 종교적 대결로 전개되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모바일로 보는 연합뉴스 7070+NATE/ⓝ/ez-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