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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Yonaguni: Dilemmas of a Frontier Island in the East China Sea
저자: 개번 매코맥 Gavan McCormack
출처: 아시아-태평양 저널 (The Asia- Pacific Journal), 2012년 10월 1일, 제10권 제40호(출처 클릭)
번역: 김레베카
유나구니 섬은 작고 전혀 개발 안된 섬으로 대만에 가까이 있다. 거주민들은 대게 농민들이고 환경은 매우 깨끗하다. 그러나 지금은 미국이 일본을 압박해서 여기에 군사기지를 지으려고 하고 있는데, 제주에서 해군기지가 지어지고 있는 것 역시 마찬가지 이유에서이다. 사람들은 여기에 대해 자세히 알아야만 한다. (백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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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구니: 동중국해의 한 최전방 섬이 가진 딜레마
Yonaguni: Dilemmas of a Frontier Island in the East China Sea
개번 매코맥 Gavan McCormack
“정상화”된지 50년도 넘었지만 일본과 중국 간의 관계는 너무나도 비정상적이어서 9월로 예정됐던 (관계 정상화) 기념식마저도 취소되어야 했다.
동중국해 전체, 특히 센카쿠/댜오위다오钓鱼岛 열도 인근 유역에서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데, 이곳은 일본, 중국 그리고 대만의 어선과 순찰선들이 서로 자기 영토라 주장하면서 상시적으로 위협적인 행동을 하고 있는 곳이다. 일국적이고 또 얼마간은 전지구적인 관심이 일종의 “오키나와 문제”에 집중되고 있다. 이 ‘오키나와 문제’는 최근까지만 해도 거의 전적으로 오키나와 본토의 맥락에서만 보여져왔다. 즉, 오키나와에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기지”인 후텐마 해군 공군 기지가 반환 약속이 있은 지 16년이 넘는 지금까지도 기노완시 한 가운데에 버티고 있고, 그것을 북부 나고시에 있는 헤노코의 새 기지로 이전하기 위한 작업들은 중단된 상태로 남아있으며, 심각한 논란의 대상인 수직이착륙 항공기 오스프리(tilt-rotor MV-22 Osprey)를 도입하기 위한 계획이 분노에 휩싸인 전체 현민들을 단합시켜 일어나게 만들어다는 식으로 말이다. 요나구니는 일본 정부와 미국 정부가 강요하려고 하고 있는 의제와 결국에 가서는 냉전을 대신하게 될 평화와 협력의 질서를 위한 지역의 갈망 사이에서 벌어지는 경쟁에 새로운 경지를 열어준다.
2012년 9월 24일, 요나구니 주민회는 특별회의를 열어 섬에 자위대를 유치할 것이냐의 문제를 주민투표에 붙이자는 안건을 3:2로 부결시켰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타사토 치요키씨가 주민회에서 행한 연설문이 아래에 첨부되어 있다. 다른 곳에서는 큰 관심을 갖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이날의 결정이야말로 오바마 정부의 아시아로의 “회귀”(pivot)가 동북아시아 지역의 지역 공동체들을 건드리는 방식을 미시적으로 보여준다.
요나구니는, 만일 자위대 유치 논란이 실제로 이행에 옮겨진다면,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동아시아 냉전에서 최전방의 역할을 맡게 된다. 중국의 제1 해상방위선 내에, 그것도 맹렬한 각축전이 벌어지고 있는 센카쿠/댜오위다오 섬과 대만에 가장 가까운 일본 영토 안에 군사력을 확대하겠다는 일본의 결정은 중국에게는 불가피하게도 일종의 도발로 밖에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이정도로나 막중한 선택에 맞닥뜨려진 섬은 몇 개 되지 않는다.
태평양을 군사화하기
중국의 관점에서 보면 오키나와 열도는 중국과 태평양 사이에 끼어든 일종의 거대한 해양 만리장성이나 다를 바가 없다. 미국은 자국 해군력의 60퍼센트(항공모함 6척에 “미해군이 가진 순양함, 구축함, 연안전투함과 잠수함 대다수”)를 2020년까지 중국이 빤히 보이는 태평양 지역에 집중시키겠다고 발표했고(1) 역내의 세 우방인 일본, 남한, 대만의 군사력 또한 지속적으로 증강시켜왔는데, 이로 인해 극동에 자리 잡은 이 섬나라들은 새롭게 엄청난 압박 아래 처해졌다. 중국으로서는 미국의 행보가 도발이자 위협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미국의 국방전략가들은 그들이 중국의 군력증강이 불러온 위협에 대응하고 있을 뿐이라고 강력히 주장한다. 그들은 중국의 전략을 “A2/AD” (반접근/지역거부) 전략의 일종으로 본다. 그들에 의하면 중국은 한반도로부터 제주도를 거쳐 오키나와, 대만, 필리핀(황해, 동해, 동중국해를 포함하는 중국의 “근해들”)로 이어지는 ‘제1도련선島鍊線’(2)을 내세우고 있고, 유사시에 문제의 해상에서 적대적 접근을 물리치기 위한 전력을 개발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또한 중국 해군의 작전력을 “원해遠海”에까지 확장시키겠다는 장기적 목표(2050년이나 그 이후까지)을 갖고 오가사와라, 마리아나사스, 팔라우에서 인도네시아에 이르는 ‘제2도련선’에 의해 경계 지워진 문제의 해상에서 상당한 정도로 군사력을 키워가고 있다. 다시 말해 중국은 2050년이나 그 무렵에 이르면 군사기지나 전략적 동맹관계들을 지금보다 더 갖고 있지 않더라도 지금의 미국과 유사한 강대국이 되어있어야 한다는 장기적인 목표를 갖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제1도련선과 제2도련선 (출처: 미 전략예산평가센터 Center for Strategic and Budgetary Assessments, 2010)
중국에 대해 전략적이고 전술적인 우위를 지키고 “A2/AD” 기도도 미리 꺾으려는 의도로, 미국은 “공해전투(Air-Sea Battle)” 개념과 “태평양 압박(Pacific Tilt)” 독트린이라 부르는 것을 발전시켰다. 전자의 이름으로 육, 해, 공, 우주, 사이버 공간을 넘나드는 작전수행들을 조율해 전지구적인 우세를 유지하고 거기에 대한 어떠한 도전도 좌절시키고자 하는 결의, 그리고 후자의 이름으로 미국의 전지구적 전략의 초점을 중동과 아프리카로부터 동아시아로 이동시킨 것은 오키나와에 심대한 함의를 끼치게 된다. 이러한 변동 속에서 오키나와 같은 섬이야말로 “최전선”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전면의 요나구니 섬을 포함한 제도의 일부는 중국의 제1도련선을 형성한다. (요나구니를 포함한) 오키나와에게 주어진 임무가 오키나와를 최전선으로 변모시킴에 따라, 오키나와는 이제 다른 모든 최전선 국가들이 그렇듯 날로 고조되어가는 위험요소(노출과 취약성)를 떠안게 되었다. 이는 또한 도민의 4분의 1이 넘는 인명이 살육 당했고 섬 자체도 잿더미가 되어버렸던 1945년 오키나와 전투 당시에 실제로 “최전선”의 운명 아래 놓여 있었던 오키나와의 역사를 상기시킨다.
오키나와 본섬 안과 주변의 중무장한 미군의 존재는 이미 중국에 대한 도발과 마찰을 불러왔다. 그러나 현재 오키나와에서 야에야마 제도를 통해 요나구니에까지 이르는 남서부쪽으로 약 500~600km에 이르는 해역(그러니까 대만과 중국 본토 양쪽과 모두 가까운) 내에는 군사시설이 전혀 없다. 방어시설이 따로 없어도 이 지역의 섬들은 냉전 기간 내내 평화롭고 안전했다. 미국과 일본과의 새로운 전략은 이 섬들을 호전적인 장벽으로 둔갑시킬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있으며, 잠재적으로 중국을 그 “제1차” 방어선 안에 억제해 넣고 있다.
요나구니
요나구니는 일본 “본토(proper)”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있는 섬으로, 대만의 수도인 타이페이에 훨씬 더 가까이 있고(200km도 채 안떨어져있다), 오키나와의 나하시보다도 중국 본토의 푸저우福州시에 더 가까이 있으며(나하로부터는 약 640km, 푸저우로부터는 약 370km), 일본 본섬의 수도로부터는 2천km 정도나 떨어져 있다. 맑은 날에는 해안에서 대만의 산들을 볼 수 있다.
우주에서 본 오키나와. 요나구니(타이페이 남동쪽으로 찍힌 푸른 점)는 너무 작아 명명되고 있지도 않다.
어떤 측면에서 보더라도 요나구니는 둘레가 27.5 km이고 면적이 29 km²인 그저 작은 섬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구니 섬은 풍요로운 문화와 ‘두난 무누이(ドゥナンムヌイ)’라 불리는 고유어를 갖고 있다. 두난 무누이는 일본 “방언”의 일종이 아니라 독자적인 하나의 언어인데, 일본어와 공유하고 있는 동족어가 현대 독일어가 현대 영어와 공유하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더 적다. 유엔이 “심하게 위기에 처한(severely endangered)” 언어로 분류하기는 했지만, 요나구니 섬에서는 일상생활 속에서 꾸준히 사용되는 언어이다.(3) 그러나 요나구니는 본토에서 가장 먼 지점, 그것도 최전선 구역에 자리 잡은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요나구니는 오래도록 재정적, 인구학적, 사회 경제적 위기로 인해 고통 받아 왔고, 이러한 문제들은 이제 군사적이고도 전략적인 압력으로 인해 더더욱 복잡해지고 있다.
도쿄는 두말할 것도 없이 요나구니(를 포함한 야에야마 제도)를 일본 영토에 통합된 영역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요나구니의 지위는 그 공식적인 정의가 뜻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애매모호한 상태에 있어 왔다.
이리자키 곶, 일본의 최서단. (사진: 시바 히로모토, 2011년 11월 촬영.)
이 섬들은 오랜 동안 (오키나와의 옛 이름인) 류큐 왕국에 속해있었으나 그 존재가 너무나 주변적이었던지라, 1879년 근대 일본에 복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도쿄는 그 일 년 뒤에 이 섬들을 거래를 목적으로 중국에 양도하기까지 했다. 야에야마 열도를 중국에 양도하는 대신 일본은 “최혜국 대우”를 받으며 중국 내륙에 진출할 수 있는 보장을 중국으로부터 받아내는 거래였다. 다시 말해 메이지 시대의 일본은 이 열도를 주변부의 일부로만 파악했고, 중국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주요 제국주의 세력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희생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은 북부는 일본에, (요나구니를 비롯한) 남부는 중국에, 그리고 오키나와 본토는 예전의 류큐 왕국처럼 독자적인 국가로 두는 삼분 방식을 제안했다. 양측이 어떻게 자기들의 이해관계에 맞게 이 섬들을 분할할 것인가를 두고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기회는 지나가버렸다. 일본측의 제안은 “유령 조약”이 되어버렸다.(4) 다시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통해 일본은 (오키나와와 함께) 요나구니를 버리게 되고, 이 섬들은 이후 19년 동안 미군정에 귀속되게 된다.
뿐만이 아니라 일본 제국의 융성기 동안 요나구니는 인접국인 대만과 경제적, 사회적으로 매우 가까운 유대관계를 발전시키면서 제국의 말기와 전후 초기까지 번성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번성하던 암시장을 미국이 들어와 모두 폐쇄해버리기 전까지는 말이다.(5) 그러나 어쨌거나 미군이란 존재가 없었기에 1972년의 류큐 왕국(미군의 통제 하에 있었던) 정리(오키나와 반환)가 요나구니에 끼친 영향은 그리 크지 않았다. 냉전기, 중국 본토와 대만 간의 관계 교착기를 통틀어 요나구니는 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손무기를 든 경찰 두 명이면 충분했을 정도로 조용한 섬으로 남아있었다.
학교, 병원, 중요 산업기반 등이 부족했던 탓에 요나구니의 인구는 1947년 12,000여명으로 정점을 친 이후 1999년 1,850명(780 가구), 2012년 1,534명(753 가구)으로 꾸준히 줄어들었다.(6) 이는 일본 전체, 특히 지방과 도서지역이 직면해 있는 인구 자연 감소의 고도로 집중된 판본을 구성한다. 중등교육을 마친 청소년은 섬을 떠나게 되는데, 대다수가 한번 떠나면 다시는 섬으로 되돌아오지 않는다. 이때의 특히나 가슴 아픈 작별은 “15살의 출발(15の 旅立ち)”이라는 이름의 사회현상으로 알려져 있다.
21세기 초 일본의 재정 위기가 심화되고 문제의 해결을 위해 신자유주의적인 처방들이 적용되기 시작하면서, 도쿄 역시 사회기반시설과 공공서비스를 위한 교부금을 대폭 삭감했고, 이는 경기 위축과 하락 주기를 가속화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2011년 말 호카마 슈키치 요나구니 정장은 1990년대만 해도 30억에서 40억 엔 수준이었던 연례 교부금이 매년 약 1억 5천만 엔씩 삭감되어 2011년에는 약 20억 엔(2백 50만 달러)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털어놓았다. (7) 하락에 대한 체감은 도쿄가 요나구니 섬의 지방검찰사무소와 세관감시서, 그리고 특별지역기상관측소를 폐쇄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더더욱 고조되었다.(8)요나구니는 전형적인 “카소(過疎)”, 즉 과소지역으로 전락했다. 세계적으로 가장 역동적인 지역의 한 중심에 자리 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날로 더 증대되어만 가는 압박에도 불구하고, 요나구니는 일본에서도 전례 없이 주변적이고 또 홀대받는 지역이 되었다.
“오키나와 방식”을 찾아서
요나구니는 근대 일본 국가가 성립하기 이전, 무장되어 있지 않았고 바다에 대한 자유접근 원칙을 갖고 있었던 류큐 왕국이 활기찬 문화와 개방 사회 기조를 유지하면서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공동체들 사이의 독자적인 무역 중개국으로서 번창해나가던 시절의 사회적 기억을 오키나와와 공유하고 있다. 그러한 기억은 정치와 정체성, 더불어 무역과 투자와 관련해서 많은 시사점을 준다. 냉전이 종식된 이후로 오키나와는 국가의 관례적인 경계들을 가로지르고 뛰어넘어 이웃들과 더 긴밀한 관계를 맺는 것을 통해 과거의 영광을 되살리려고 노력해왔다. 오타 마사히데 현지사 재임시절(1990~1998) 시작된 “국제(Cosmpolitan) 도시” 프로젝트는 일국적 공간에서의 주변성을 지역적 공간 안에서의 중심성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였다. 그 프로젝트는 다가오는 21세기를 위한 “국제” 도시로서의 이미지를 오키나와에 투사했다.(9)
그러나 이 “국제 도시” 오키나와는 2015년까지 오키나와의 군사기지를 다른 곳으로 옮기거나 폐쇄하는 “행동 프로그램”이라는 또 다른 정책에 의존해 있었다. 국제 도시 오키나와는 포스트-기지 시대의 탈무장된 오키나와가 될 것이었다. 그러나 그 양자를 따로 보기를 거부함으로써 오타 현지사는 양쪽 어느 쪽과 관련해서도 도쿄를 설득시키는 데에 실패했다. 관료들은 관료제적 통제를 느슨하게 해 오키나와가 자체적으로 필요한 주도권을 쥐고 자치적인 지방이 되는 시나리오를 내켜하지 않았다. 도쿄의 목적은 오키나와 정책의 근본적인 원칙을 예나 지금이나 “기지 우선주의”, 곧 미국을 위한 군사시설들을 조달하고 일본을 위한 중요 군사력 대부분을 섬 안에 집중해 두는 것에 있었고, 거기에 관한 한 타협이란 없을 예정이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오타 현지사와 오키나와의 다른 많은(아마도 대다수일) 주민이 보기에는, 오키나와의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목표들은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군사기지가 축소되고 종국적으로는 전부 폐쇄되는 것을 촉구하고 있었다. 2010년 3월, 공식적인 문서로는 최초로 ‘오키나와 21세기 비전’이란 문서에 미군기지는 “오키나와 발전으로 가는 길에 놓인 거대한 장애물”이며 “오키나와가 끊임없이 극복하려고 분투해야만 할” 짐이라고 기술되었다. (10)이 ‘비전’은 오키나와가 한때는 매우 활발한 관광은 물론이고 오키나와 섬과 인접국들 사이의 자유롭거나 적어도 상당부분 직접적인 통치 바깥에 있었던 사람, 물자, 자본의 교류들로 이어진 지역 내의 중심지로서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요나구니 방식”을 찾아서
요나구니 섬 또한 좀 더 작은 규모로 이기는 하나 요나구니가 인접국들과 대결과 군사적 무장은 피하면서 상대적으로 “개방된 국경”의 형태와 지역 협력 프레임 안에서 상호 협력해나가는 자치의 섬으로 남을 길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해왔다. 요나구니는 21세기가 시작되면서부터 의미심장한 선택들을 연이어 해야만 했다. 2004년 10월 요나구니는 주민투표를 통해 야에야마 제도에 인접한 이시가키, 타케토미 섬과 병합하지 않기로 선택했다. (11) 이어서 요나구니 자체만의 미래를 위한 청사진인 “비전” 공약을 작성해 2005년 초에 채택했는데 (12), 그 주된 테마는 자율, 자치, 공생이었다. ‘비전’은 섬이 전통적으로 갖고 있던 고립과 소원됨이라는 부정적인 특징들을 지역적인 상호 연결성이라는 프레임을 채택하는 것을 통해 긍정적인 특징들로 변형시키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요나구니는 수도인 도쿄로부터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대만 해안과 중국 본토로부터는 상대적으로 가까웠고 홍콩과 마닐라와는 더더욱 가까웠다(각각 800km, 1,000km 거리). ‘비전’이 보여주는 요나구니의 미래는 그러한 인접성을 유리함으로 돌려놓는 데에 달려있었다.
2005년 “비전”의 핵심은 대만과의 긴밀한 관계를 개방(또는 회복)하는 것이었다. 요나구니와 좀 더 광범위하게는 오키나와에서는 일본이라는 민족국가 경계 내에서의 주변성을 인접국들과의 관계맺음을 통해 보상하려는 움직임이 반복적으로 있어왔다. 그러나 고도로 민감한 국경이 대만해협을 통해 요나구니와 아에야마 제도에 근접해 지나간다는 사실로 인해 그러한 일체의 지역적인 프로젝트는 냉전이 끝나기 이전까지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1982년 요나구니는 대만의 화롄花蓮시와 자매시 결연을 맺었고, 2007년에는 일본의 시나 정 단위로서는 최초로 그곳에 사무소를 열었다. 화롄 자매시 결연 20주년을 맞아 2012년 35명의 대만인이 수상스키로 요나구니 해변을 수놓았고, 이는 정치적인 의지만 있다면 이 두 지역 사이의 틈이 그 얼마나 쉽게 다리놓아질 수 있는가를 선명하게 보여주었다.(13) 1999년 4월에는 아에야마 제도의 세 지사들과 대만 화롄, 일란宜蘭, 다이토台東 시의 세 시장이 “국경 교류 증진에 대한 공동 협약”을 체결했다. 정기 항로를 개설하고 관광, 교육, 무역에 있어서 보다 더 긴밀한 국경교류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 목적이었고(14), 양자들 간의 관계는 희망적으로나마 “국경을 넘어 마치 가족 같은 근친성을 유지하면서 두 지역을 연계하는” 것으로서 묘사됐다. 그러나 아직까지 교류는 미미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2012년 해상에서 그토록 화려한 수상스키가 펼쳐졌음에도 불구하고, 13년이 다 되도록 영공이나 공해상의 정기 항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요나구니가 기지 적합지라고? (사진: 시바 히로모토, 2011년 11년 촬영.)
요나구니 사람들은 근해를 건너 교육, 통상, 고용이 흔히 벌어지곤 하던 식민주의 시기에 요나구니와 대만 사이에 존재했던 통합적인 연계들을 되돌이켜보았다. 또한 연이어진 짧은 제국 붕괴기에 요나구니는 어떤 중앙 정부의 통제에서도 벗어나 비록 원론적으로는 항만 운영이 불법이었고 무역 역시 “암적으로(black)”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중계무역항으로서 번창했다.
그러나 일본 관료들은 요나구니 섬이 “공개 영해” 특별구역 문제를 협상하는 데 필요한 자치권을 요나구니에 허여할 정도로 민족국가의 연대관계를 느슨하게 하는 것에 반대하고 있다. 2005년에는 그 10년 전 오타 현지사의 “국제 도시” 프로젝트에 반대했던 것처럼 요나구니 프로젝트에 반대했고, 그 당시 중국으로의 홍콩 반환을 위한 청사진이자 일본을 위해서도 국가 통합의 연대관계를 느슨하게 하는 데 좋은 모델처럼 회자됐었던 “일 국가, 이 체제” 공식에도 매료되지 않았다. 섬의 소나이 항은 “주요” 내지 “공개” 항으로서의 자격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고, 국제 운항을 위해 운영한다면 복잡한 입출국수속, 공중보건, 검역 조치들을 요청하게 될 것이었다. 국제해상인명안전협약(ILOS, International Convention for the Safety of Life at Sea)을 요건을 충족시키는 기준들을 마련해야할 것은 물론이었다.
일국적 경계들 넘어선 협력에 기초한 자치와 자조를 향한 요나구니의 희구가 도쿄에 의해 좌절되자, 다른 종류의 “비전”이 지지를 받기 시작했다. 2007년 국방성이 던진 암묵적인 신호에 따라 방위협회防衛協会의 요나구니 지회가 결성됐고, 이들은 자위대 중심의 미래를 섬에 요청하기 시작했다.(15) 방위협회는 방위성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전국 조직으로서, 전직 자위대 임원이나 관련자도 다수 포함하고 있다.
같은 해 6월, 미 해군의 소해함掃海艦 ‘가디언’(the USS Guardian)과 소해함 ‘패트리어트’(USS Patriot)가 요나구니의 소나이 항에 기항했는데, 이는 1972년 오키나와가 반환된 이후 처음으로 이루어진 미군의 오키나와 민항 체류였다. 그 당시 “선원 휴식”이라는 미명으로 이루어졌던 이 기항은 사실상 정보를 수집하고 일본의 대중국 전방 지역을 군사화할 계획을 미리 실행에 옮겨보면서 일본을 중국, 대만과의 적대관계에 끌어들이고자 한 미국의 은밀한 작전이었다. 나하시의 미국 총영사 케빈 마허(Kevin Maher)는 “군작전상 의미심장한” 이 행사는 “미 해군이 오키나와의 민항을 기항지로 삼은 중요 선례”가 되었으며, 부두는 네 대의 “미군 소해정”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깊고 또 상업용 비행장도 가까운 거리에 있어 “대만해협에서 발생할 유사시 사태에” 지원용 헬리콥터가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했다.(16) 정확히 마허가 권고한 대로 2009년에는 이시가키 섬에, 2010년에는 미야코 섬에 또 다른 미 해군의 기항이 뒤를 이었고, 해상자위대의 함정들 역시 이시가키와 타케토미를 방문했다.(17)
2008년 5월, 자민당 정부가 여전히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동안, 새로 개설된 방위협회 요나구니 지회는 섬 당국인 요나구니 정의회町議会에 자위대를 정식 초청할 것과 섬에 기지를 개설할 것을 (514명의 서명을 넣어) 청원했다. 몇 달 뒤인 9월, 요나구니 정의회는 4 대 1로 그 청원을 받아들이는 결의안을 채택했고, 2009년 6월에는 공식적으로 방위성과 육상 자위대 막료장을 방문했다. 2005년 선출됐고 2009년 재선된 호카마 슈키치 정장은 이 기간 동안 요나구니 “비전” 프로젝트에 대한 열정적인 지지자에서 기지 신설의 찬성자로 입장을 번복했다. 그는 2009년 8월 재선됐는데, 선거 운동 당시에는 기지 문제에 대한 결정 이전에 반드시 사전 설명회와 토론회를 갖겠다는 약속 이외에는 기지 문제를 적극적으로 거론하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 분명히 드러난 사실이지만 2009년 당시의 관료정치는 곧 닥칠 자민당의 붕괴(예상대로 그해 8월 말에 그대로 실현됐다) 이전에 주요 군사동맹과 협약을 맺으려 광적으로 분투하고 있었고, 호카마 정장에게 가해진 압력은 같은 달인 2009년 8월 그가 재선되기 직전과 직후에 특히 가중되고 있었다. (18) 그러나 기지 문제는 선거전에서 결코 중심적이지 않았고, 따라서 선거결과 역시 그와 관련된 어떠한 공약도 포함하고 있지 않았다.
미국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지역 단위의 ‘동아시아 공동체’의 창설에 집중하겠다는 공약과 함께 지난 9월 성립된 하토야마 유키오 민주당 정부는 처음에는 변경지역에 자위대를 파견하는 것에 극구 반대했다. 키타자와 토시미 방위성 장관은 그러한 조치는 이웃 국가들에 의해 쓰잘데 없는 도발로 간주될 수도 있다고 선언했다.(19) 그러나 민주당은 곧 입장을 전환했다. 2009-2010년의 하토야마 정부에 대항해서 마침내는 파멸시킨 관료정치 세력 또한 전략적으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진 변경지대의 섬에 자신들의 주도권을 강요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중국과 가깝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겠다는 공약과 ‘동아시아 공동체’를 건설하겠다는 하토야마의 약속은 이내 유야무야되어버리고 말았다. 그 대신에 나온 것은 오키나와에 미군기지 병력을 증강하겠다는 약속, 외곽 제도에 자위대를 유치하겠다는 약속이었다.
2010년 9월, 센카쿠(댜오위) 열도 인근 해역에서 중국 어선과 일본 해양경비선이 충돌하면서 동중국해에서의 긴장은 점점 더 고조되어갔고, 이는 요나구니 섬 같은 곳에 자위대를 비정기적으로 파견할 것이 아니라 영구적으로 주둔시켜야한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 전반적인 원칙은 2010년 12월 일본 내각이 채택한 ‘국가방위계획요강’ 안에 자세히 설명되었다. ‘요강’은 중국의 군사 현대화를 “일본을 둘러싼 안보 환경”의 일부로 인식하면서 미국과의 기존의 안보 접점들을 더 강화할 것을 강조했고, 기존의 “기본 방위력” 개념을 “역동적 방위력”이라는 새 개념으로 대체할 것을 주장했으며, 오키나와 제도에 자위대의 존재감을 상당 부분 강화할 계획임을 적시했다.(20) 2011년 10월, “일-미 상호 역동적 방위 협력”이란 개념은 동중국해에 자위대 활동을 증대시킴으로써 중국에 대항한 “억지력의 창들”을 굳게 닫아걸려는 기획의 일환으로서 정의되었다.(21) 요나구니의 천5백 명 주민은 13억 중국인들에 맞선 “억지력의 창”이라는 모호하기 한이 없는 역할에 내맡겨졌다.
2011년 8월, 민주당은 자위대(의 해상순시부대)를 요나구니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고 공표했고, 이를 위한 측량조사, 입지 선정, 매입을 위해 10억 엔에 달하는 예산을 따로 책정해놓았다. 맨 처음 파견될 자위대의 숫자는 그리 크지 않을 것이어서, 요나구니에 약 백 명, 미야코와 이시가키에는 각각 2백 명 정도가 예상됐다.
호카마 정장은 요나구니 섬이 별다른 대안이 없다고 믿었다. 그가 “중국 위협론” 따위를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것(자위대를 섬에 유치하는 것)만이 일본의 관심을 요나구니 섬에 집중시키고, 정부의 지원과 또 지역 산업을 활성화시켜 도산 상태를 막아줄 젊은층이라는 새 피를 섬에 유입시킬 유일한 방법처럼 보이기 때문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22)호카마 정장은 요나구니(그리고 인접한 야에야마 제도)가 오키나와가 겪었던 것 같은 공습, 점령, 기지화 문제로 인한 고통은 겪지 않았지만,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일본 정부로부터의 지속적인 보상, 곧 공공 기본설비 투자의 혜택도 전혀 입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오키나와의 기노완이나 나고 시는 더 이상의 군사기지는 싫다고 나오고 있는 시기였는데도, 요나구니의 호카마 정장은 21세기 초반의 위기 속에서 경제발전 측면에서 오키나와를 “따라잡는” 유일한 길은 오키나와의 전철을 밟아 해군뿐만이 아니라 자위대를 유치하는 것이라고 결론 내린 듯 했다.
요나구니 섬의 가장 가깝고도 중요한 이웃 섬인 이시가키 시에서는 2010년 9월, 보수적인 시장과 시의회가 선출되어 근본적인 변화와 16년에 걸친 “개혁” 정부를 끝내겠다고 선포했다. 이시가키와 오키나와 제도 전체에 걸쳐 지방 정부가 냉전 기간 동안 미국이나 일본의 해군 함정이 주둔하거나 기항하는 것에 저항하면서 배타적으로 민간 지위를 유지해왔던 것에 비해, 나카야마 요시타카의 새 행정부는 자위대가 섬에 기항하도록 문을 열었으며, 센카쿠/댜오위 제도에도 일본의 주권과 통제력을 좀 더 강화할 것을 요청하기 시작했다. 일본 전역에서 오키나와 섬과 대만 사이의 일본 국방력에 난 500-600km에 달하는 “틈”을 메울 것과 관련된 논란이 특히 우익 담론에 나타나기 시작했다.(23)
그러나 요나구니는 다른 생각을 갖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자위대가 주둔한다고 해서 어떤 경제적인 혜택이 있겠는가를 의심하기 시작했고, 군대의 주둔으로 인해 이웃인 중국이 의구심을 갖고 적대적인 대항 조치를 취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했다. 한 신문은 자위대가 50년 동안이나 주둔했는데도 꾸준히 인구가 감소되어온 큐슈와 남한 사이에 있는 쓰시마 섬을 예로 들면서, “안보 민족주의”가 반드시 불경기를 잡지는 못할 것이라고 지적했다.(24) 미군기지 반대(“비전”의 원칙을 옹호하는) 조직이 “요나구니 개혁 연합”이라는 이름으로 결성됐고 2010년에는 소속 회원 두 명이 정의회에 진출했으며, 2011년에는 자위대 유치 의사 표명을 무효화하기 위한 청원서에 주민 556명(전체 유권자의 약 46%)의 지지연명을 모아냈다.(25) 그 이전에 기지 유치 찬성 청원에 연명했던 사람은 총 514명(유권자의 43%)이었으므로, 섬의 공론은 양분된 것처럼 보인다. [오키나와 타임즈]가 2011년 8월 설문조사한 바에 따르면 요나구니의 자위대 유치에 대한 야에야마 섬에서의 반대 비율은 56.5%에 달했다.(26) 9월 초 [류큐신문]이 행했던 조사에서는 반대 비율이 73.3%로 더 높게 나왔다.(27) 결국 2011년 말, 방위성과 요나구니 정이 공동주최한 “설명회”가 열렸고, 2015년까지 자위대를 주둔시키기 위해 입지 선정과 개발을 위한 예상 부지 검토에 들어갔다는 답변이 나왔다.(28)
2012년, 기지 프로젝트에 반대하는 이들은 두 번째로 청원서를 작성해서 이번에는 정 당국이 섬의 입장을 결정할 수 있도록 지방 주민투표를 실시해줄 것을 요청했다. 청원서는 588명(정확한 집계 결과 544명)이 지지연명했는데, 이는 섬 유권자의 45%를 약간 밑도는 수치였다.(29)바로 이 청원서를 정의회는 9월 24일 표결에 붙였는데, 결과는 주민투표 안을 거부하고 청원을 무효화하는 것이었다.(30) 호카마 정장은 “극도로 애석한” 결과였다고 표명했다. 비록 그 자신이 기지 유치 찬성자였지만, 그는 이 문제를 두고 양분된 민의의 골이 더 깊어지지 않을까 염려했다.(31)
그 다음의 수순은, 비록 반대자들에 의해 그 진의가 흐려지기는 했지만, “퇴출” 선거를 요구하는 것이다. 지방자치법에 따르면 유권자의 3분의 1이 요청할 경우, 60일 안에 새 선거를 치르도록 되어있다. 주민투표를 요청했던 주민이 훨씬 더 많은 숫자임을 생각할 때, 이는 곧 충족될 수 있을 만한 요건이다. 일본 정부로 말하자면, 섬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숫자가 명백히 기지 주둔에 반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둔 결정을 밀어붙일 것이냐, 아니면 상상컨대는 계획 자체를 미루거나 취소해야할 것이냐, 양자택일에 직면해 있다. 모리모토 방위성 장관이 남서부 지역의 안보가 “현재 최우선 과제가 되었다”고 공언하고 있는 만큼 (32), 또한 2015년까지의 기지 개설 계획에 변함이 없는 만큼, 일본이 뒤로 물러설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기지 유치 프로젝트를 둘러싼 투쟁은 당분간 더 격렬히 계속될 전망이다.
결론
요나구니를 포함한 야에야마 제도의 일간지 [매일신문]은 섬의 우려를 이렇게 사설에 실었다: “민주당 정부는 기지 문제와 관련해서 이전의 자민당 정권보다도 훨씬 더 미국에 종속적인 입장을 보여왔고,” “기지 유치로 인한 부담을 덜어준다는 약속 또한 기지를 제도 전체로 확산시켜 이 변경지역을 미-일 군사요새로 둔갑시키기 위한 의도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33)
현재 센카쿠/댜오위 제도에 특히 집중되어 있는 동아시아의 영토 분쟁 문제는 포괄적인 타결, 그리고 인근 국가와 주민들의 이해관계에 맞는 평화와 협력의 지역 질서 건설 프로젝트의 일부로서 해결될 것이거나, 아니면 적대와 군사적 무장을 더 고조시키게 될 것이다. 전자의 증거는 현재로서는 보기가 쉽지 않다. 후자가 실현된다면 요나구니 같은 곳들은 더더욱 취약해지고 분열될 것이다.
기지 반대 포스터, 요나구니, 2011년 11월. (사진: 시바 히로모토)
요나구니 섬은 인구가 천5백명 남짓에 불과해 작을지는 모르나 이 섬과 인근의 야에야마 제도는 일본 역사에 전례가 없을 만큼 중차대한 선택의 압박에 직면해 있다. 요나구니 주민들이 원하는 것은 군대의 주둔이 아니라 15살 이상의 청소년들이 섬에서 유출되는 흐름을 지체시켜 줄 고등학교이고, 대만과 중국 동부와 정상적인 상업, 관광, 교육의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국가가 통제를 해제해주는 것이다. 현재로서는 일본의 국방 관계자도 일본의 맹방인 워싱턴도 그러한 열망에 그 어떠한 동조도 보내고 있지 않다. 양측이 합의한 지역 방위 계획은 오히려 섬에 군사력을 증강시키고 전방의 해역 전체에 걸쳐 중국에 대한 적대를 고조시키는 것을 요구하고 있다. 요나구니 정은 갈수록 강도를 더 해가는, 일본 전체와 주변 지역에 심대한 영향을 끼칠 이 투쟁의 최선선에서 기노완시, 나고시, 타카에 마을, 아니 오키나와 전체와 연대하고 있다.
요나구니: 누구의 섬인가? 어떤 미래인가?
타사토 치요키
아래는 타사토 치요키 씨가 2012년 9월 24일 요나구니 정의회에서 행한 연설문이다. 이날 의회는 자위대 유치를 둘러싼 주민투표 실시 여부와 관련된 토론을 위한 특별 회의를 개최했다. 타사토 씨는 요나구니 정의회의 의원으로서 요나구니 개혁연합에서도 출중한 인물이다. 자위대의 요나구니 주둔을 위한 기지 개설 여부를 주민투표에 붙이자는 발의안은 3대 2로 부결되었다.
저는 주민투표 발의안에 찬성하는 입장으로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전후 67년을 통틀어, 요나구니는 단 한 뼘도 군사기지에 할애되어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이 섬 위에 독자적인 문화와 평화의 섬을 이룩했고, 온갖 종류의 난관을 극복해가면서 요나구니의 자연이 가진 풍요로움과 조화를 이루며 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렇게 역사의 흐름 속에 진화해온 독립과 자치의 정신과 지혜를 우리는 잊지 말고 후세에 전해 내려줘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8년 전인 2004년, (지자체들의) “헤이세이(平成) 대합병” (34) 시절, 이시가키 시와 타케토미 마을과의 합병이라는 사태 앞에서 엇비슷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 그때에도 우리는 “섬의 미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으며 “어떤 종류의 요나구니를 우리의 아이들에게 물려줄 것인가”를 두고 길고 격렬한 토론 과정을 거쳤었습니다.
그 당시 요나구니 주민들에게 합병과 비합병의 이점과 불리한 점들을 설명해주었던 사람은 오츠지 요시카네 정장이었습니다. “섬의 미래를 생각해보기 위한 마을회의”를 소집하면서 그는 섬의 미래가 될 중등학교 학생 나이 이상의 거의 모든 주민에게 의견 발표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주민 개개인이 공평하고도 편파성 없는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필요한 정보를 제공한 이후, 그는 중등학교 학생 나이 이상의 모든 주민들이 다 참여하는 주민투표를 실시했고 이는 전국적인 관심을 끌었습니다. 요나구니 유권자의 합의(consensus)에 기초한 주민 대다수의 견해를 획득한 다음, 정의회는 자율과 자치를 지키겠노라는 선언을 채택했고, 합병 없이 기존의 선거구 경계를 그대로 유지하기로 하면서 야에야마 군 합병위원회에서 탈퇴했습니다.
주권의 근원인 섬 주민들의 희망에 근거해서, 섬을 분열시켰던 합병의 문제는 민주적이고 평화로운 방식으로 해결됐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당시 얻었던 교훈을 실천에 옮겨야합니다. 그리고 섬에 사는 주민이라면 누구도 빠짐없이 이 자위대 파견이라는 문제에 진지하게 대처해야만 합니다.
자위대가 요나구니에 주둔하느냐 마느냐의 문제 뒤에는 또 다른 문제가 숨어있는데, 바로 미군입니다.
때는 2007년 6월 24일, 사세보 해군기지에서 온 소해정掃海艇 두 척이 요나구니 부두에 들어왔을 때입니다. 해군 함정이 요나구니의 민간항구인 소나이 항에 들어온 것은 오키나와 반환 이후 처음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내부고발 폭로 싸이트인 위키리크스가 유출한 2007년 6월 27일자 “극비” 전신을 통해 (35), 오키나와의 미국 총영사가 요나구니는 “대만 해협에서 유사시에 공격기뢰 대항 작전을 위한 중추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며 위기 시에 소나이 항을 이용할 가능성을 검토해볼 것을 미국 정부에 제안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2010년 12월 17일 일본 내각이 ‘신방위대강’을 결정한 때로부터 3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당시 미국 총영사였던 케빈 마허 씨는 이후에 그의 책 [결단하지 못하는 일본] 안에 이 일에 대해 썼습니다. 대만 해협이나 센카쿠 열도, 또는 야에야마 제도에서 전투가 벌어질 경우, 미군은 작전 상 대만에 매우 가까이 있는 이시가키와 요나구니 제도의 항만들을 이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문제의 기항은 요나구니 섬의 항만시설 상태가 어떠한지 먼저 파악하기 위해 사전 조사가 필요하다는 판단에 근거해서 실시되었다. 또 다른 목적은 선원들의 휴식과 지역주민들과의 교류에 있었다. 물론 이러한 섬들에 미 해군의 함정이 기항하는 것은 민감한 일이기 때문에, 기항의 진짜 이유와 관련된 명시적인 언급은 기자 브리핑 현장에서는 없었다.”(36)
마허는 또한 예측상 “미 해군 함정들이 그러한 항만 시설들을 사용하길 원할 수도 있음을 미국은 일본 측에 알리고 싶어할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37) 요나구니 섬에서 대만에 가장 가까운 지점은 불과 110km 거리이고, 유사시 사태가 터지기를 기다렸다가 마지막 순간에 항구 활용을 위한 준비를 서두른다면 그때는 너무 늦을 것이라는 겁니다.
마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물론 미국 함정이 요나구니 항구에 입항하기 이전에 높은 수준의 교류가 상당 기간 동안 진행되어 왔다. 조지 W. 부시 행정부와 네그로폰테 국무부 부장관은 미국 함정들이 항구에 기항하도록 실질적인 허가를 내렸다. 미국 정부는 ‘요나구니는 일본의 영토이므로 그곳에 미군 함정이 드나드는 것에 대해 중국이 반대를 하든 말든 상관할 바 없다. 아니, 반대하라고 하라’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38)
다른 말로 하자면, “대만 해협에서의 유사시에 대비해서 요나구니를 소해정 해군기지로 만들라”는 마허의 언급이야말로 요나구니 섬에 닥친 비극의 시작입니다. 미군과 자위대의 요나구니 주둔 문제는 서로 긴밀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요나구니에 해상경비대를 파견하겠다는 국방성의 저 끈질긴 의도 뒤에 숨은 진짜 기획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또한 “전략예산분석센터(CSBA, Center for Strategic and Budgetary Analysis)”에서 2010년 5월 18일에 낸 보고서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류큐 열도의 지리학은 대잠수함작전對潛水艦作戰(ASW)을 위해 각별히 유리할 수도 있다.” (39) 보고서는 사세보에서 시작해서 가고시마, 아마미 제도, 오키나와 본섬, 미야코 섬을 거쳐 이시가키와 요나구니 제도에 이르는 열도선에서의 군사력 증강의 중요성을 특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도민들은 미해군의 소해정들이 2007년 군사적 탐사를 목적으로 우리 섬에 입항했던 일 뒤에 숨은 현실을 어렵더라도 끈질기게 숙고해야만 하고, 자위대의 파견도 바로 그러한 관점에서 재고해봐야 합니다. 회피할 수 없는 결론에 이르게 할 합의와 공통된 이해를 위해 전력투구해야만 합니다.
현재는 일본과 미국의 정부가 오키나와 주민들을 무시하고 또 실질적으로 차별하면서 그 위험한 수직이착륙기 오스프리를 이르면 이달에 무력으로 배치하려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들은 현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존권과는 무관하게 군사적 필요에서 무력으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오스프리를 후텐마 기지에 배치하고 자위대를 요나구니에 주둔시키는 것은 구조적으로 서로 매우 유사한 일입니다. 한번 후텐마에 배치되면 그 오스프리가 얼마 안가 요나구니로 날아올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자위대의 요나구니 파견 문제는 양국의 동맹에 힘입어 오키나와의 기지들을 확장해서 요나구니까지 미국의 아시아 전략의 일부로서 이용하겠다는 기획의 일부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섬의 미래에 짙은 어둠이 드리워져 있다는 우려를 낳고 있는 문제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들과 또한 오년, 심 년, 아니 오십년 뒤의 이 섬의 미래를 생각해볼 때, 우리가 진정 가까운 미래만 생각하고 “인구 감소를 막기 위해”라든가 “지역 경제를 활성화시키기 위해서” 요나구니를 “자위대 섬”으로 둔갑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기지가 유치되는 장소는 단지 전쟁에 휘말릴 위험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의도되거나 되지 않은 사건들도 끊임없이 일어나는데, 희생자는 늘 지역 주민입니다. 곧 우리, 우리 가족들, 아이들, 조부모님들, 친척과 친구들과 같은 사람들이기 마련입니다. 요나구니가 자위대 섬이 되고 그 결과 요나구니 주민들이 고통을 받게 된다면, 기지 프로젝트를 지지했던 정치인들과 그들과 결탁한 이들은 앞으로 섬 전체의 비판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선조들은 그 어떠한 난관이 닥쳐도 독립과 자율의 정신으로 이 섬을 평화의 섬으로 건립했습니다. 우리 ‘두난토(요나구니)’ 사람들은 이 사실을 절대 잊으면 안됩니다.
기지에 찬성하는 이들은 2009년의 정장 선거와 2010년의 정의회 선거가 대부분 자위대 유치를 찬성하는 이들의 승리로 끝났다고 말하고 있는데, 과연 사실일까요?
정장, 정의회 선거는 주민, 농업, 관광 증진, 복지 사이의 연계를 포함한 숱한 문제들에 집중되어 있었고, 자위대 파견은 특별히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포함한 마을주민들은 정장과 정의회에 자위대 파견 문제에 대해 설명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자위대 파견의 장점과 단점들”, “자위대 파견이 섬의 인구감소를 막을 것이라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또 “미-일 합동 군사기지 이용에 포함된 위험요인들” 등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수도 없는 질문들 앞에서 아무런 답변도 없었습니다. 회의에 참석했던 자위대 관계자와 정장은 짜기라도 한 양 자위대 파견은 이미 확정된 문제라고 말할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우리는 선출된 다수이고, 이것이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이며, “대표적인 다수가 입장을 바꾸기에는 이미 늦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치인들과 관료들의 독선적인 회피에 불과했습니다.
섬은 현재 자위대 파견 문제를 두고 사실상 양분되어 있고, 주권의 소유자인 요나구니 주민들은 지방자치법에 따라 청원권을 행동에 옮겼습니다. 유권자 중의 절반에 달하는 544명의 주민이 지지연명한 청원서는 정장이 “섬 주민 자신들이 스스로 결정해야할 그들의 미래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 “지방주민투표법”을 발효시켜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요나구니 국민에 의해 행정권을 위임받은 사람들은 이 점을 심각하게 생각해야만 할 것입니다. 유권자 다수의 희망에 부합해서 통치하는 것이 민주 국가에서 정치적이고 행정적인 임무를 수행하는 자들의 본연의 의무이기 때문에, 이제 우리 앞에 놓인 이 초안에 부합하도록 문제의 조례가 이행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만일 이 발의안이 거부된다면 이는 민주주의를 거역하는 심각한 타격이 될 것이며, 주권의 실질적인 소유자인 요나구니 주민들은 더더욱 분노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이들 주민들이 “의회가 의회로서 작동하고 있지 않다”는 판단과 원칙 아래 “의회의 임원들을 해고”할 수밖에 없다고 느끼게 된다면, 섬의 여론은 갈수록 더 양분될 것이고 이로 인해 지방 정부 또한 나쁜 영향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막아야만 합니다.
따라서 저는, 요나구니의 주권자인 요나구니 주민들의 합의에 기초해서, 이 주민투표 발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킬 것을 요청합니다. 자위대 파견 문제에 대해 민주적이고 평화로운 해결책을 요구하면서, 저는 이 발의안을 지지합니다.
개번 매코맥은 호주국립대학의 명예교수이다. [아시아-태평양 저널]의 편집자이자 사토코 오카 노리마츠와 함께 [저항하는 제도 - 일본과 미국에 대항하는 오키나와]의 공저자이기도 하다.
동저자의 연관 기사:
• 들썩이는 바다: 일본의 태평양, 동중국해 영토(와 권리주장) (Troubled Seas: Japan’s Pacific and East China Sea Domains (and Claims)).http://japanfocus.org/-Gavan-McCormack/3821
• 작은 제도, 큰 문제: 센카쿠/댜오위 섬과 중국-일본 관계에서 역사와 지리가 갖는 중요성 (Small Islands – Big Problem: Senkaku/Diaoyu and the Weight of History and the Weight of History and Geography in China-Japan Relations)http://japanfocus.org/-Gavan-McCormack/3464
각주
(1) 미국 국방부 장관 레온 파네타의 기조 연설, “아시아-태평양을 향한 미국의 균형 재정립(The US Rebalance Towards the Asia-Pacific)”. 제 11차 IISS 아시아 안보정상회의, 총회의 제1 세션. 싱가포르 샹그릴라 호텔, 2012년 6월 2일. http://www.iiss.org/conferences/the-shangri-la-dialogue/shangri-la-dialogue-2012/speeches/first-plenary-session/leon-panetta/
(2) 예를 들어 얀 반 톨 외 공저, “공해전투: 작전개념 시론(AirSea Battle: A Point-of-Departure Operational Concept)”, 워싱턴, D.C., 전략예산분석센터(Center for Strategic and Budgetary Assessment), 2010년 5월 18일, pp. 11-13을 참조. 이러한 개념적 방어선들은 거의 대응하는 중국측의 전략적 개념들 일부를 반영하고 있을 수도, 반영하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전반적인 요지 -제1도련선(“근해”) 안에서는 해군의 우세 확립에 집중하고, 제2도련선(“중-원해”) 안에서는 자유 작전권을 확립하고- 는 타당한 근거를 갖추고 있다.
(3) 피자 바이론(Fija Bairon), 마티어스 브렌진저(Matthias Brenzinger), 패트릭 하인리히(Patrick Heinrich), “류큐 제도와 새로운, 위협에 처한 일본의 언어들(The Ryukyus and the new, but endangered, languages of Japan)”, [아시아-태평양 저널(The Asia-Pacific Journal)], 일본 초점(Japan Focus), 2009년 5월 9일.
(4) 자세한 것은 개번 매코맥, 사토코 오카 노리마츠가 공저한 [저항하는 제도: 오키나와가 일본과 미국에 맞서다( Resistant Islands: Okinawa Confronts Japan and the United States)]의 제 1장을 볼 것. “유령 조약”에 대해서는 사토 마사루, “일본 정부에 의해 1952년 오키나와가 떨어져나갔었음을 생각하라,” [주간수요일週刊金曜日], 2012년 5월 11일, pp. 24-25 참조.
(5) 오우치 타로, [밀무역의 섬: 나의 재생에의 회상], 나하, 오키나와 타임즈 사(沖縄タイムス社), 2002.
(6) “두난(요나구니 말로 요나구니의 뜻)의 괴로움” 제 2부, [류큐신보], 2012년 7월 8일.
(7) 호카마 정장,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2011년 11월 15일.
(8) 호카마 정장의 언급, 사쿠라이 요시코와의 대담 중에서, 2009년 9월 2월. 사쿠라이 요시코, “특집: 국방 최전선을 짊어진 최단의 섬 ‘요나구니’ 르뽀”, [주간신조週刊新潮], 2009년 10월 1일.
(9) http://www.pref.okinawa.jp/96/kokusaitoshi/
(10) “오키나와 21세기 비전,” 나하, 오키나와 현, 2010년 3월. http://www.pref.okinawa.jp/21vision/index.html/
(11) 개표율 70.5%, 득표율 62.8 % 대 33.7 %, 글렌 D. 후크(Glenn D. Hook), “글로벌화, 지역화에 대한 소리- 오키나와 현 및 요나구니의 경우”, 후루카이 토시아키 편, [지역의 시대와 섬의 자치], 도쿄, 중앙대학교, 2006, pp. 93-123 중에서, p. 111 참조.
(12) 오키나와와 요나구니 정, “요나구니, 자립에 향하는 비전 -자립, 자치, 공생- 아시아를 연결하는 국경의 섬 요나구니” 보고서, 2005년 3월.
(13) “‘주민 투표 조례를 부결’ 주민 간에 대화의 길을 찾아라”, [오키나와 타임즈], 2012년 9월 26일.
(14) “‘고향 교류를 촉진하는 공동 선언’을 조인, 대만 동부 지역과 세 개 자치체 수장”, [아에야마 매일신문], 2009년 4월 16일.
(15) “두난의 괴로움”, 제 4부, [류큐신보], 2012년 7월 12일.
(16) 2011년 위키리크스의 폭로. “미 해군의 첫 오키나와 기항, 성공적(First USN civilian port call in Okinawa a success),” 케빈 마허, 비밀 전문, 2007년 6월 27일. 매코맥, 노리마츠 공저, 앞의 책도 참조.
(17) 마에다 사와코, “요동하는 아에야마의 교과서 선정”, 평화철학센터, 2011년 9월 16일. http://peacephilosophy.blogspot.kr/2011/09/blog-post_16.html
(18) 더 자세한 사항은 매코맥, 노리마츠 공저, 앞의 책 참조.
(19) 키타자와, 2009년 9월 24일, “육상 자위대, 요나구니 배치를 부정. ‘인접국을 자극하는’ 방위성이 오늘 오키나와에 오다”, [오키나와 타임즈], 2009년 9월 25일.
(20) 일본 방위성, 빙위대강 요약문, 2011 회계년도.
(21) 스기오 타카하시 (일본 방위성), “일-미 방위협력 안에서 ‘접근거부’ 전략에 대처하기 - ‘공해전투 공조’를 향하여(Counter A2/AD in Japan-US Defense Cooperation - Toward ‘Allied Air-Sea Battle’)”,
(22)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2011년 11월 15일.
(23) 사쿠라이 요시코, “특집: 국방 최전선을 짊어진 최단의 섬 ‘요나구니’ 르뽀”, [주간신조], 2009년 10월 1일.
(24) “‘대마도와 요나구니’, 국경의 섬을 교류의 거점으로”, [오키나와 타임즈] 사설, 2011년 10월 14일.
(25) 전체 연명자 수는 2,331명이었고, 이 중 1,775 명은 요나구니에 적을 둔 주민이 아니었다. “육상 자위대를 유치하겠다는 결의를 철회하라”, [야에야마 매일신문], 2011년 11월 21일.
(26) 마에다, 앞의 책에서 인용.
(27) [류큐신보], 2011년 9월 7일. 와타세 나츠히코, “요나구니 섬에 자위대는 필요한가”, 세계, 2012년 2월, pp. 144-152 중 p. 150에서 인용.
(28) “자위대 후방지를 가리켜보이는 마을과 방위성 주민 설명회, 요나구니”, [류큐신보], 2011년 11월 18일.
(29) “"588 명분의 서명을 제출", [야에야마 매일 신문], 2012년 7월 25일.
(30) “요나구니 주민투표 조례안, 반대가 더해져 부결”, [오키나와 타임즈], 2012년 9월 24일.
(31) “요나구니, 민의를 물을 기회가 멀어지다”, [오키나와 타임즈], 2012년 9월 25일.
(32) 치코 할란(Chico Harlan), “중국의 부상浮上과 함께 일본은 우향 전환하다(With China’s rise, Japan shifts to the right)”, [워싱턴 포스트(The Washington Post)], 2012년 9월 21일.
(33) “내일은 헌법 기념일. 조용하게 된 개헌 논의, 그 한 걸음으로”, [야에야마 매일신문], 2012년 5월 2일.
(34) 역자 주: ‘헤이세이 대합병’은 21세기 초 일본에서 진행된 기초자치단체인 시정촌의 대규모 통폐합을 의미한다. 당시 연호가 헤이세이(平成)이기 때문에 헤이세이 대합병이라 부른다. 2001년 1월 26일, 695시 2186정 566촌 등 3477개의 기초자치단체는 이후 대대적인 통폐합 작업을 거치면서 2011년 11월 현재, 786시 749정 184촌 등 1719개로 절 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35) 케빈 마허 총영사, 나하, “ “미 해군의 첫 오키나와 기항, 성공적”, 2007년 6월 27일, 나하, 비밀 전문.
(36) 케빈 미 (케빈 마허), [결정 내리지 못하는 일본(The Japan that can’t decide)], 문춘신서文春新書, 821호, 2011, p. 163.
(37) 상게서.
(38) [결정 내리지 못하는 일본], p. 137.
(39) 얀 반 톨 외 공저, “공해전투: 작전개념 시론(AirSea Battle: A Point-of-Departure Operational Concept)”, 워싱턴, D.C., 전략예산분석센터(CSBA), 2010년 5월 18일, pp. 32. CSBA 보고서는 또한 다음을 포함하고 있다: “류큐 열도가 가진 지리학적 이점을 취할 수 있는 공해전투 장벽을 세우기 위한 미 해군과의 군사협력작전 계획을 준비할 것.” (p. 92.)
(번역: 김레베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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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무라 선생이 김레베카 선생께 4월 6일 보낸 다사토 지요키 보고와 사진이 나온 기사
nisiyamatookinawa.web.fc2.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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昼食後、田里千代基(たさと ちよき)・町会議員より報告を受けました。
4.『与那国・自立へのビジョン 自立・自治・共生』を掲げて
報告する田里千代基さん
与那国は日本の最先端に位置しているが、辺境の地になっている。
島袋 純・琉球大学助教授(現・教授)を座長、吉元政矩(よしもと まさのり)・
貿易のためではなく生活権のための開港として「国境離島型開港」
次に、ITを使った町づくりである。現在、
2006年に「国境交流特区2006」構想を国に申請した。「
与那国花蓮縣交流発展協会が入っているビル
私がまだ町役場にいた2009年4月、石垣市長、竹富町長、
また台湾と与那国とで災害防災医療協定を締結した。
田里さんはこのように概略、報告されました。
첫댓글 레바카님 !, 수고해주진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 변함없는 전사 최성희 선생님 ...투쟁하시는 모든분들께 멀리서 미안한 마음만 갖고 있네요. '구글'은 우리의 동해를 인정하지 않는군요. 병기라도 해주지 !
각주까지 다시 다 재편집하셔서 이렇도록 꼼꼼하고 정성스럽게 올려주신 최성희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모두 무탈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