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안리에서......,
지르박에 솜사탕을 싣고
김 채 석
가끔 광안리 바닷가에 가면 만나는 풍경이 있는데 바다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도 아니고, 즐비한 횟집이나 카페의 간판도 아니고, 바다 스포츠를 즐기는 풍경도 아니고, 유독 바다를 찾는 수많은 사람 속에 추억의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풍경. 바로 솜사탕을 파는 연로하신 어른과 리어카처럼 생긴 기계가 그것이다.
내가 유년을 보낸 곳은 소읍으로 도시도 아니고 그렇다고 시골도 아닌, 조금은 어정쩡한 곳으로 송정리라는 곳이다. 출신 예술인으로는 국창 임방울과 ‘떠나가는 배’로 대표되는 용아 박용철의 고향으로, 통일주체대의원이라는 허수아비들에 의해 전두환이 장충체육관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난 후 시로 승격되더니, 자칭 보통사람이라는 노태우의 시절 광주시 광산구로 편입되어버렸다. 하지만 지금도 그곳 사람들은 광산구라는 이름보다 그냥 송정리라 부른다.
그 송정리를 대표하는 번화가가 있는데 서울의 명동과 같은 이름의 명동이다. 빵집에 여학생을 만나러 가거나, 양화점에서 구두를 맞추러 가거나, 양복점에 옷을 가봉하러 가거나, ‘영자의 전성시대’라는 영화를 보러 가거나, 심지어 젊은 객기를 부리다가 유치된 친구를 만나러 가는 일본식 붉은 벽돌집의 경찰서도 모두 명동을 중심에 두고 있었다.
그런 명동 길에 잊히지 않는 풍경이 있는데 솜사탕 리어카를 밀고 가는 아저씨의 모습이다. 칼을 갈라고 소리치는 아저씨의 목소리는 초근목피도 연명하지 못한 사람처럼 겨우 입 밖으로 흩어지고, 얼굴엔 버짐에 머리엔 된통 부스럼투성이에 무거운 아이스케키 통을 울러 맨 소년의 목소리 또한 배고프기는 마찬가지로 참으로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솜사탕 아저씨는 전파사 앞을 지날 때마다 스피커 통에서 울려 퍼지는 음악에 맞춰 스텝을 밟았다.
나와 친구들은 그 아저씨를 볼 때마다 키득키득 웃으면서 솜사탕 아저씨라고 부르지 않고 지루박 아저씨라고 불렀다. 솜사탕 리어카를 밀고 가면서도 음악이 흘러나오면 리어카는 파트너가 되었다. 스텝을 밟는 발놀림도 현란했고 혼자서 턴을 하는 모습은 한 손을 높이 들고 크게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 목에는 종기가 아물지 않는지 언제나 이명래 고약이 붙어 있었다.
요즘이야 스포츠 댄스니 해서 부부가 함께 추는 하나의 레크리에이션 정도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누구네 여편네는 춤바람이 났다느니, 누구네 마누라가 시장바구니를 들고 카바레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느니 하며 소문도 무성했다. 한때 제비족이라는 말이 유행어가 될 정도로 이들에게 잘못 인연이 되면 돈 잃고, 가정 잃고 했던 건 지나친 비약이 아니라 사실인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고 보면 이런 사회적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 내가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정비석이라는 작가의 ‘자유부인’에서 다루고 있었다. 오영수 문학 ‘갯마을’에서 해순이의 원시적인 이야기로 바닷가의 삶을 다루듯이, 정비석은 8. 15해방 이전에는 순이라는 이름의 여인을 통해서 깊은 산 속에서 숯을 구워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토속적인 건강함을 ‘성황당’을 통해서 보여주었다. 이랬던 작가는 해방과 더불어 찾아온 퇴폐풍조와 함께 도덕적으로 상실되어가는 애정 윤리에 일침을 가하고자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유교사상과 함께 지배해온 봉건적 질서는 여성에게만 모든 것을 강제하고 책임을 물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남자 귀신은 없다. 결국, 여자 귀신뿐이라는 것은 여성의 한을 표출 또는 보복. 앙갚음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다. 이러하듯 얽매임으로부터의 자유는 경술국치와 함께 신여성이나 모던걸이라는 이름으로 탈 봉건화 되어갔다. 그러면서 전통적 가치관도 하나 둘 붕괴하여갔다. 이때 시대로부터 너무나 앞서나갔거나 시대를 잘 못 타고난 여성들이 있었는데 나혜석이나 윤심덕과 같은 여성이다.
그러다가 한국전쟁과 함께 양키문화가 급속 유입되면서 과도기적 혼란을 겪게 되는데 바로 정비석이 이야기하는 ‘자유부인’이 그것이다. 너무나 오래전에 읽은 기억 속에 국문학과 교수의 부인은 떠밀리듯 동창회에 참석하면서 창문을 열고 들어온 상큼한 바깥 공기와 같은 세상을 보면서 동요되어 양품점에 취직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브레이크를 밟을 때 밟지 못하고 남편의 제자와 춤추러 다니다가 종내는 가정파탄이라는 추돌사고 직전에 이른다.
한편, 남편 또한 타이피스트에게 접근하나 그녀가 결혼하는 바람에 헛꿈이나 헛물. 헛발질과 같이 세상의 일은 어찌 보면 뜻대로 마음먹은 대로 호락호락하지 않는 것이 이치이듯이 제자는 부인의 오빠의 딸과 결혼해서 미국유학 길에 오르자 부인은 질투와 함께 울분을 삭이지 못하지만, 탈선의 끝에 남편의 이해는 좌절의 부인을 다시 한 가정의 정숙한 부인으로 컴백시킨다.
아무튼, 솜사탕 아저씨가 리어카를 밀고 가면서 전파사의 스피커를 통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신바람 나게 스텝을 밟던 시절은 내가 고교에 입학한 때로 해외펜팔이 유행이었다. 그래서 나도 펜팔을 했다. 미국의 오하이오 주 아일런턴인가 하는 곳에 사시는 사십 대 중반의 남자로 한번은 편지에 부부가 함께 댄스파티에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그때 알았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댄스문화는 남편이 보는 앞에서 다른 파트너와 자연스럽게 춤을 추고, 부인이 보는 앞에서 자연스럽게 즐기는 양적인 것에 반해 우리나라는 남편이나 부인이 서로 알면 절대 안 되는, 음적인 문화로 변질하여 많은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 나의 인식이고 그 인식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이런 나에게 모 회사의 총무과장 시절 옆 부서인 경리과장은 토요일 오후만 되면 키도 크고 딱 어울리겠다며 나를 꼬드겼다. 사교춤을 추면 예쁜 여자도 많다며 A4용지에 지르박의 스텝을 발 모양과 함께 그려 1번 2번 표시도 하고, 쿵 하면 왼발이 나가고, 6박의 춤이라던가. 워킹과 턴, 걷고 돌고, 찍고 걷고 등 온갖 오지랖을 떨어가며 유혹했다. 심지어는 사무실 바닥에 분필로 스텝을 그려가며 나를 끓어드리려 했지만, 나는 예술과 외설을 따로 분리해 구분하지 못하는, 해야 할 것과 해서는 안 되는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분별력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한마디로 양식에 어긋나는 일을 하는 것에 대해 용서를 해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사교춤이든 뭐든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은 존중한다. 하지만 한때 가정파탄의 정거장 같았던 카바레는 스포츠 댄스라는 이름으로 부전시장이나 동래시장. 자갈치시장 주변에 가면 지금도 성행하고 있다. 모두가 들어갈 때는 혼자 또는 여자들끼리 남자들끼리 들어가지만, 나올 때는 대부분 기러기 짝짓듯이 쌍쌍이 되어 나온다. 부부는 아니다. 그러고선 주변의 식당이나 주점. 여관이나 모텔로 들어서는 것을 쉽게 목도하기 때문이다. 나이는 대부분 60대, 70대이지만, 세 살 버릇 여든 간다고 제 버릇 남 주지 못하는 게 사람이다.
이렇게 사교춤에 대해 별반 좋은 인식을 하지 못하는 나는 내 나이 철부지였을 때, 전파사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지르박 춤이라기보다는 남들에게 웃음을 선물하면서 솜사탕을 광고하며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한 수단이자 방편이었음을 충분히 안다. 당시만 해도 개발독재다 유신이다 뭐다 해서 참으로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이때 지루박 아저씨는 솜사탕이야말로 가족의 생계나 자식의 학비를 책임지는 원천으로 솜사탕 기계의 원심분리기는 리어카 안에서 돌고, 아저씨는 밖에서 돌지만, 어릿광대 같은 스텝은 짙은 분장에 감춰진 피에로의 비애처럼 마음으로 흘려보내는 작은 눈물이 강물이 되어 흘렀음을 충분히 안다.
그 시절의 아버지 어머니 누이들은 모두가 조세희 문학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와 같이 자본가 계층이 아닌 도시 빈민 노동자와 같은 계층으로, 경제 생산과 소비 및 분배 구조에서 억압받고 소외당하는 하층민으로, 난장이는 한쪽 손가락을 셀만큼의 직업을 가졌다. 그러나 달리 극빈이라는 지옥에 살면서 이에서 벗어나는 천국을 꿈꾸지만, 벗어날 수도 없었고 벗어난 적도 없었다. 결국, 벽돌 공장 굴뚝에 올라가 달을 향해 종이비행기를 날리고 떨어져 죽는 난장이. 하지만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무허가 판자촌이 헐리고 비상계엄이나 긴급조치 등 암울하기만 했던 시절을 깡그리 무시해버리는 솜사탕 아저씨의 모습이 낡은 시간의 서랍 속에서 쓸쓸한 몇 장의 풍경처럼 떠올려질 때마다 키득키득 웃었던 게 부끄럽고, 묘한 비애감과 함께 휴지 장처럼 꾸깃꾸깃한 내 마음에 짙은 슬픔만 묻어 운다. 그림자는 길어지고 찬바람이 불어오는 이 계절에......,
첫댓글 아마 솜사탕 아저씨도 한 춤 했었나 봅니다. 칼갈이 아저씨~양화점, 양복점, 가봉,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단어입니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읽으면서 답답~했던 기억이 납니다. 잘 읽었습니다.
장미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저는 지금도 답답합니다.
그런데 닉네임이 예쁘군요.
제가 살고 있는 모라동 우리 아파트의 긴 담장에 붉은
넝쿨 장미가 생각이 나네요.
감사합니다.
이 글, 참 재미있고 좋습니다. 채석 쌤, 여기 올리지 마시고 조금 다듬어서 <BS공모전>에 응모해 보세요.^^
감사합니다.
정화 선생님!
초고 후 딱 한 번 읽었습니다.
그러니 시간 내서 다듬어
보렵니다.
감사합니다.
책으로 읽는것 보다 이렇게 읽어니 또한 깊은 재미가 있네요 채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