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펄러 마지막 이야기"
록펠러와 여자,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
록펠러는 은퇴 뒤에도 아침 6시면 일어나 신문을 읽은 뒤
집안과 정원을 돌아다니면서 일꾼들에게 잔돈을 건네주곤 했다.
록펠러는 스탠더드 오일 임원자리에서 물러난 뒤 골프에 재미를 붙였다.
그는 사업에서 그랬던 것처럼 골프도 열정적으로 임했다.
당시 골프는 새롭게 인기를 누리는 스포츠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는 스윙을 할 때는 사진을 찍거나 영화필름을 돌려 자신의 자세를 꼼꼼히 분석했다.
골프는 거의 매일 쳤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걸 가리지 않았다.
록펠러는 자신의 주치에게 100살 때 골프를 함께 치겠다고 장담을 하고 다녔다.
록펠러는 갈수록 늘어나는 손자, 손녀를 모아놓고
동전을 나눠주면서 절약의 교훈을 가르쳤다.
“애들아, 돈을 쓸 때는 아주 아껴 써야 해.
그리고 너희들이 커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줄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돼.”
록펠러는 건강했지만 그의 가족은 그렇지 못했다.
아내는 점점 쇠약해져갔고 신경도 날카로워지기만 했다.
아내는 뇌졸중에 걸려 남은 인생을 거의 침대와 의자에서 생활해야 했다.
그는 여행을 좋아했지만 그 무렵에는 아내의 건강 때문에
거의 집에서 아내와 함께 지냈다.
그는 아내에게 책을 읽어주었고 정원도 개조해서
더 많은 화초를 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록펠러는 은퇴를 한 뒤에도 틈틈이 전화로 주식투자를 했다.
실제 돈을 벌기 위해서라기보다 머리회전을 위해서였다.
은퇴했다고 자신의 머리마저 녹스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돈에 대한 감각은 그대로였다.
개미들과 다른 투자행태였다.
주가가 오르면 팔고 내리면 사는 것이었다.
록펠러는 투자를 해야겠다고 느꼈을 땐 2000만달러까지 빌린 적도 있었다.
그가 투자한 회사는 포드자동차를 제치고
세계 1위의 자동차업체로 성장한 GM 주식도 포함돼 있었다.
한번은 시카고대가 무이자로 은행에 예치한 돈을
록펠러가 6%의 이자로 빌릴 적이 있었다.
그는 이 일에 대해 자선사업을 맡고 있는 게이츠목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난 돈이 노는 것을 그냥 놔둘 수가 없어요.
회전을 시켜요.”
록펠러의 돈은 그가 은퇴한 뒤에도 계속 불어났다.
은퇴 전 그가 한 투자에서 수익이 났기 때문이다.
어느 해에는 투자만으로 5800만달러를 벌어들였다.
그는 이렇게 불어나는 돈을 어떤 식으로 써야할지 고민에 빠졌다.
급진적인 사람들은 정부가 부를 재분배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록펠러는 정부가 부를 현명하게 분배할 능력이 있다고 믿지 않았다.
록펠러는 또다시 트러스트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사업에서의 트러스트가 아니라 자선에서의 트러스트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자선사업과 기업경영을 접목시키면 자금을 절약하는 것은 물론이요,
더 좋은 결과를 창출할 수 있는 효과적인 운영이 가능합니다.
자선사업이야말로 협동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 첫 번째 자선사업은 의료분야였다.
게이츠 목사는 자선사업을 위해 록펠러에게 그의 이름을 딴 연구소를 만들 것을 제안했다.
점점 커져가는 독점자본에 대한 비판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록펠러의 이름을 딴 자선단체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게이츠 목사가 제안한 연구소는 파리의 ‘파스퇴르 연구소’와 같은 의학연구기관이었다.
당시 많은 미국인들은 장티푸스와 디프테리아, 폐렴, 결핵 등의 질병을 앓고 있었다.
그러나 그 치료방법이나 약은 전혀 밝혀지지 않았다.
록펠러의 손자 역시 열병으로 사망했다.
록펠러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1901년 ‘록펠러 의학연구소’가 설립됐다.
록펠러 의학연구소는 파리의 파스퇴르 연구소와 베를린의 코흐 연구소를 모델로
뉴욕의 이스트사이드에 세워진 연구소로 대규모의 실험설비를 갖추고 있었다.
뉴욕에 위치한 록펠러 의학연구소는 현재 록펠러 대학의 전신으로
미국 최초의 순수 민간 의학연구소였다.
그의 첫 손자가 병으로 사망한 뒤였다.
록펠러는 이 연구소에 6100만달러를 기부했다.
이 연구소는 설립된 지 몇 년이 안 돼 엄청난 성과를 보이기 시작한다.
초대 연구소장이었던 시몬 프렉스너 박사가
유행성 뇌막염을 치료할 수 있는 혈청을 개발해냄으로써
록펠러 의학연구소를 세계적인 연구소로 만들어갔다.
DNA가 유전적인 형질을 전달한다는 사실과 바이러스가
암의 원인이라는 점도 밝혀내며 의학적인 성과를 일궈냈다.
이 연구소에 몸담았던 의사들 중 19명이 노벨상을 수상했다.
게이츠 목사와 록펠러2세가 이 연구소의 이사가 됐다.
록펠러는 연구소를 자유로운 운영에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이곳을 단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다.
다음으로 록펠러는 교육에 눈을 돌렸다.
그는 교육 분야의 기부를 위해 일반교육재단을 설립했다.
이 재단은 전국적인 교육 사업을 펼쳤는데
약 1억3000만달러에 이르는 록펠러의 기부금으로
수천 개의 고등학교, 농업학교, 의대 등을 지원했다.
교육재단이라는 설립 취지에도 맞는 많은 교육 관련 자선사업도 추진했다.
록펠러가 예전부터 관심을 갖고 있었던 흑인교육을 위해서도 상당한 기부금이 나갔다.
미국의 흑인 교육의 선구자로 할 수 있는
북커 워싱턴과 같은 몇몇 전문가들의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록펠러의 일반 교육재단은 의과대학 지원에도 적극 나섰다.
미국의 전문의학교육을 개혁하고 표준화한 것이었다.
교육재단은 24개의 종합대학과 전문대학을 후원했는데 존스홉킨스대,
예일대, 하버드대, 컬럼비아대, 시카고대 등은 세계적인 의과대학으로 발돋움했다.
1900년 대통령 매킨리가 암살되자, 이듬해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26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공화당 소속의 전임 대통령인 매킨리는 기업 친기업적인 정책을 폈다.
루즈벨트 역시 공화당 소속이었다.
때문에 기업들은 기업에 적대적인 정책을 펴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다.
예상은 빗나갔다.
루즈벨트는 셔먼 독점 금지법(반트러스트법)을 앞세워
수십 개의 기업을 고소하며 독점기업을 상대로 개혁에 나섰다.
의회를 설득해 철도에서 파이프라인에 이르기까지
동일한 요금을 받지 않을 경우 징계해야 한다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루즈벨트가 기업에 강경책을 편 까닭은 독점기업을 규제하라는
여론이 너무나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여론을 이끌어 간 건, 언론이었다.
스탠더드 오일을 겨냥한 기사가 쏟아졌다.
그 중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건, 시사잡지 <맥클루어>에서
20여 차례 내보낸 ‘스탠더드 오일의 역사’라는 시리즈 기사였다.
이 기사는 책으로도 나오게 된다.
잡지 편집장이자 작가인 아이다 타벨의 아버지와 오빠는
유전지역에서 스탠더드 오일과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녀는 록펠러가 존경하는 나폴레옹의 전기 작가였다.
스탠더드 오일의 독점 역사를 스캔들이나 들추어내는 기사에 견줘
그녀의 기사는 매우 침착하고 설득력이 있었다.
그녀는 록펠러의 ‘놀라운 천재성’과 ‘성취능력’은 인정하면서도
스탠더드 오일의 스파이 활동, 가격 전쟁, 법원 회피 등의 자료를 토대로
“록펠러는 강요와 사기를 일삼았다”고 결론지었다.
또 “스탠더드 오일은 미국인 모두의 기업이기 때문에
시민들이 나서서 이런 기업의 횡포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타벨은 그녀의 아버지가 죽은 뒤 자기 아버지의 옛 숙적
록펠러를 ‘공정성’이라는 잣대를 갖고 공격했다.
그녀는 록펠러의 표정이 “간사하고 잔인하며
형용하기 어려운 혐오감을 자아낸다”고 했고,
포레스트 힐 저택은 “저속함과 흉측함이 상징”이라고 비판했다.
록펠러는 타벨에게 비공식적으로는 서로 통화했지만
공식적인 토론 제의는 거절했다.
그는 친구에게 이를 이렇게 설명했다.
“잘못된 생각을 가진 여자와는 한 마디도 말하고 싶지 않아.”
<에브리바디스>에서도 ‘미친 자금’이라는 기사로
스탠더드 오일 임원들의 주식 조작사건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언론의 비판은 록펠러의 아들인 록펠러2세로 이어졌다.
록펠러2세가 아버지만큼 약탈적이지만 경영능력은 아버지만 못하다고 평가 절하했다.
잡지 <코스모폴리탄>은 “장점도 단점도 없는 평범한 사람의 전형이다”라는 기사를 실었다.
록펠러는 친구에게 “나나 다른 부자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해도 상관없지만,
내 아들에게는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라며 분노하기도 했다.
그 즈음 록펠러의 아버지 빅빌이 사망했다.
뉴욕의 <월드>는 빅빌의 이중 결혼 생활을 폭로했다.
록펠러 가족은 빅 빌을 어머니 엘리자의 무덤 옆에 묏자리를 마련했으나
어머니의 무덤 옆자리를 빈곳으로 남겨두어야 했다.
언론은 록펠러가 10만달러를 아내가 다녔던 연합교회 선교회에 기부한 사실도 크게 보도했다.
많은 목회자들과 정치인들은 록펠러의 기부에 대해 “더러운 돈”이라며 비난했다.
하지만 마크 트웨인은 <하퍼스 위클리>에서 “자선사업을 하려면 반드시 돈이 있어야 한다”며
“사람들은 매일 나에게서 기부금을 받아가면서
왜 나만큼 좋은 일을 하려는 록펠러의 기부금은 거부하는가?”라고 록펠러를 옹호했다.
록펠러는 “내가 어쩌다 끔찍한 괴물이 되었는지 모르겠다”며 한탄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더 좋은 날이 오리라는 희망은 버리지 않았다.
“당신 기자들은 우리 회사에 좋은 이미지를 사회에 심는데 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결국 연방정부는 스탠더드 오일을 리베이트, 산업스파이, 거래 위반 혐의로 고소했다.
21개의 주정부 고소가 뒤따랐다.
오하이오 한 곳에서만 무려 939건의 고소장이 제출됐다.
재판 중 경쟁을 통해 충분히 독립 운영이 가능한 많은 회사들을
스탠더드 오일이 매입해 버렸다는 증언이 쏟아졌다.
록펠러는 빗발치는 고소 사건에서 이어지는 소환을 피하려고 했다.
자신의 거처를 밝히지 않고 사라지는가 하면 도청당할까 싶어 전화도 받지 않았다.
1심 선고가 있던 날, 록펠러는 여느 때처럼 포레스트힐에서 골프를 치고 있었다.
상대는 기자였다.
얼마 뒤 법원에 갔던 심부름꾼 소년이 달려왔고,
록펠러는 아이에게 동전을 주면서 편지를 읽게 했다.
소년이 편지를 읽은 뒤 편지를 주머니에 넣으며 함께
골프를 치던 기자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럼, 계속 하실까요?”
그리곤 페어웨이 가운데로 160야드 멀리로 샷을 날렸다.
“벌금이 얼마나 나왔습니까?” 참다못한 기자가 물었다.
“최고 벌금액이 2924만달러입니다.”
록펠러는 이렇게 대답하고 티를 가리켰다.
“이번은 당신 차례군요. 드라이브 샷을 하시겠습니까?”
기록적인 벌금을 물게 된 상황에다 비까지 내렸지만 록펠러는
그날 9홀에 53타를 치는 좋은 성적을 올렸다.
골프가 다 끝날 즈음 록펠러는 “이번에 판결을 내린 랜디스 판사는
우리가 벌금을 다 갚는 걸 보지 못하고 죽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사실 그랬다.
스탠더드 오일은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 문제를 논의하고자 록펠러를 백악관으로 불렀다.
록펠러는 건강상의 이유를 대며 스탠더드 오일의 새로운 사장 아치볼드를 대신 보냈다.
록펠러의 아들 록펠러2세는 세계 최대 부자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평범한 가정의 아이들보다 용돈을 풍족하게 써 본적이 없었다.
그는 아버지처럼 매일 출납 장부를 썼다.
자기 마음대로 어떤 모험적인 일을 해보지도 못한 고독한 황태자였다.
그는 브라운대에 들어가기 전까지 혼자서 여행을 다녀본 적도 없었고,
여자 친구를 사귀는 일도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다.
그는 대학에서 미식축구경기를 구경하고 댄스파티에 가고
여자 친구를 사귀면서 다른 세상을 알게 된다.
그는 첫 댄스파티에서 나중에 아내가 될 여자를 운명적으로 만났다.
그녀는 로드아일랜드의 유명한 공화당 상원의원 넬슨 올드리치의 딸 애비 올드리치였다.
밝고 명랑하며 사교성이 넘치는 매력적인 여자였다.
애비는 내성적이던 록펠러2세가 사회성을 가지게 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춤을 추는 것은 유흥에 물드는 것이라며 댄스파티 참가를 금지했다.
그는 3학년이 되기 전 여름방학에 수염을 기르고 자유분방한 옷차림으로
친구와 자전거를 타고 유럽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록펠러2세는 4학년 때 미식축구팀 선수로 뛰었다.
그는 경기 때마다 항상 아버지를 초청했고 록펠러는
가족의 의무로 생각해서 늘 아들의 팀을 응원하러 경기장을 찾았다.
이따금 경기장에서 모자를 흔들며 브라운대학팀을
열심히 응원하고 있는 록펠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록펠러2세는 대학을 졸업한 뒤 스탠더드 오일 본사에
연봉 6000만달러를 받는 신입사원으로 입사했다.
이미 스탠더드 오일을 은퇴한 아버지는 아들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록펠러2세는 자신이 아무 할 일 없이
사무실이나 지키고 있다는 기분이 들 만큼 적응을 하지 못했다.
“월급을 타면서도 나는 아무런 성취감을 느끼지 못했다.
나는 그곳에서 일반 직원들이 하는 일조차 따라갈 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 자기 몫의 일을 하고 있었지만 나에게는 뚜렷한 일거리가 없었다.”
그 무렵 록펠러2세는 자신이 능력을 검증받고 싶다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때 그는 데이비드 라마라는 한 투자자를 만났다.
그는 수많은 회사들의 비밀 정보를 많이 알고 있는, 그야말로 전문가였다.
록펠러2세는 그의 꾐에 빠져서 100만달러가 넘는 돈을 투자했다.
물론 돈은 6%의 이자를 주기로 하고 아버지에게서 빌린 것이었다.
결과는 참담하게 끝이 났다.
데이비드 라마는 희대의 주식 사기꾼이었고,
록펠러2세를 노리고 물밑작업을 하면서 그를 기다린 낚시꾼이었던 것이다.
100만달러라는 거액을 한방에 날린 록펠러2세는 참담한 심정이 됐다.
그 즈음 한 사람이 그를 찾아오겠다고 했다.
금융계의 거물 JP모건이었다.
그는 카네기와의 협상을 통해 US스틸이라는 세계 최대 규모의 철강회사를 조직했다.
JP모건은 록펠러가 갖고 있는 철광석 광산을 자신에게 매각하기를 바랐다.
JP모건이 록펠러를 만나 광산 매각 건을 꺼내자,
록펠러는 그 문제는 자신의 아들의 사무실에 얘기하자고 했다.
아들에게 협상력을 키워주기 위해서였다.
며칠 뒤 아들의 사무실에서 3명이 만났다.
수줍음을 많이 탔던 록펠러2세는 협상에서도 수줍은 태도를 보였지만,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협상하는 장면을 지켜본 록펠러는
“철강황제, 아주 잘했군.
하지만 내 아들도 만만치 않다는 걸 명심하게”라고 말했다.
록펠러는 금융자본가인 JP모건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JP모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모건 회장은……. 아주 거만하고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어요.”
결국 협상은 타결됐다.
록펠러가 철광석을 파는 대신 US스틸의 주식을 받고, 록펠러 부자는 US스틸의 이사회 멤버가 됐다.
록펠러와 아들은 얼마동안은 US스틸의 중역회의에 참석했지만 결국 주식을 팔아버렸다.
록펠러는 골프 파트너에게 “내 인생 최고의 재산은 바로 내 아들이오”라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
스탠더드 오일에서 횡령 문제가 불거졌을 때,
록펠러2세는 아버지에게 회사를 이끌고 있던 아치볼드의 해임을 건의했다.
하지만 록펠러는 반독점 소송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를 해고할 수는 없다며 거절했다.
그러자 록펠러2세는 스탠더드오일의 부사장직을 사임하겠다고 했다.
록펠러는 그렇게 하라고 했다.
록펠러는 아들이 반독점에 휘말린 회사 보다 자신이 벌이고 있던 자선사업을 맡아주길 바랬던 것이었다.
그때부터 록펠러2세는 회사 경영보다는 자선사업에 더 몰두하게 됐다.
평소 차분하고 수줍음이 많으면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록펠러2세는
게이츠 목사와 함께 사회공헌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세계 최대 부자 록펠러의 마지막 꿈은
1911년 5월5일 미국 대법원은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 해체를 결정했다.
에드워드 D. 화이트 미연방 대법원장은 2만 단어의 의견서를 49분 동안 웅얼거리며 읽었다.
결론은 “스탠더드 오일이 경쟁사가 정유 업계에서 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부당한 조치를 취했다”는 것이었다.
골프에 푹 빠져 있던 록펠러는 포칸티코에서 골프를 치고 있을 때 이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는 함께 골프를 치던 한 목사에게 스탠더드 오일 주식을 사라고 말했다.
록펠러는 동료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사랑하는 친구, 우리는 대법원의 명령에 따라야 하네.
멋진 우리 가족, 스탠더드 오일은 이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네.”
결국 스탠더드 오일은 34개 회사로 해체됐다.
저지스탠더드오일(엑슨), 캘리포니아스탠더드오일(셰브런),
뉴욕스탠더드오일(모빌) 같은 석유회사가 스탠더드 오일에서 분리하면서 태어났다.
이들 회사의 투자자들은 지분율에 따라 주식을 재배당 받았다.
록펠러는 사실상 석유사업에서 은퇴했다.
목사에게 “주식을 사라”는 록펠러의 말은 적중했다.
얼마 안 돼 분리된 기업의 주식이 월스트리트에서 거래되기 시작하자마자 유례없는 상종가를 쳤다.
그동안 사기 힘들었던 스탠더드 오일의 주식을
보통 사람들도 살 수 있게 돼 일반인의 매집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들 기업의 주식 가치는 5개월 만에 4배로 늘어났다.
스탠더드 오일의 주가가치는 이후 10년 동안 다섯 배가 늘어났고,
록펠러는 1913년께 재산이 3배로 불어나 약 9억달러의 대부호가 됐다.
트러스트 해체가 오히려 그의 재산을 부풀려주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트러스트 해체에 앞장섰던 시오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은 1912년 한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요즘 월스트리트에서는 이런 기도가 유행한다고 합니다.
오, 은혜로우신 하나님! 제발 한 번만 더 해체되게 해주소서.”
록펠러는 아들에게 상당한 유산을 넘겼고, 아들은 가끔 아버지에게 선물로 이를 보답하려고 했다.
한때 아들이 아버지에게 롤스로이스를 선물하려 하자,
록펠러는 차 대신 현금으로 달라고 한 뒤 이를 자선사업에 기부했다.
또 모피코트를 선물했을 때 록펠러는 그런 사치는 부릴 수 없다면서
“난 아들이 그런 선물을 해 줄 능력이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한다”고 말했다.
록펠러는 이 모피 코트를 다시 아들에게 주었고, 아들은 수년 동안 이를 입고 다녔다.
록펠러는 아들을 유산 상속자로 보지 않고 동료자선가로 여겼다.
록펠러는 아들에게 “내 아들이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재산을 쓰기 원한다”는 쪽지를 남겼고, 아들도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아버지가 재산을 관리해 오신 것처럼 양심적으로 관리할 것이며 현명하고 관대하게 재산을 사용하겠습니다.”
록펠러의 기부사업을 체계적으로 시작한 곳이 바로 록펠러재단이다.
이 재단은 1910년 록펠러2세의 장인인 넬슨 올드리치 상원의원이 설립인가 서류를 제출해
1913년 뉴욕 주가 인가함으로써 설립됐다.
재단 사업은 건강분야에 집중됐고 당시 성장 분야였던
정신과학과 분자생물학, 유전학이라는 신생학문의 정착을 후원했다.
재단 운영은 게이츠 목사와 록펠러 2세가 맡았다.
록펠러 자손들은 록펠러 재단을 통해 100년 이상 경영, 자선, 정치, 예술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이 재단은 21세기에 이른 지금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록펠러2세는 ‘러들러 학살’로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게 된다.
록펠러는 6만달러를 투자해 콜로라도 연료&강철이라는 광산의 경영권을 사들였는데,
록펠러2세는 이 회사의 이사로 있었다.
1913년 9월 광부들은 노동조합 인정과 임금 10% 인상, 사측의 노동법규 준수를 요구했다.
하지만 록펠러2세는 광부들의 요구를 거절했다.
회사는 노조를 해산시키면서 파업 노동자를 내쫓았다.
이듬해 4월20일 아침 콜로라도 민병대가 파업 중인 광부들을 향해 기관총을 쏘았다.
사망자 17명. 어린아이가 대부분이었다.
기관총 난사와 불길 속에서 겁에 질려 피신하지 못한 여자 2명과 어린 아이 11명이 죽었다.
파업참가자 400명 중 332명이 체포됐지만 민병대 장교 한 사람만 가벼운 처벌을 받았을 뿐이었다.
1915년 3월12일 뉴저지 레이크우드의 골프하우스에 있던 록펠러와 아들은 연이어 날아온 전보를 받았다.
먼저 온 전보는 록펠러의 아내가 위독하다는 내용이었다.
뒤이어 온 전보는 아내가 사망했다는 내용이었다.
아내의 임종을 보지 못한 록펠러는 무척 괴로워하며 눈물을 흘렸다.
아들은 처음으로 아버지 록펠러가 우는 모습을 보았다.
부자는 북행 열차를 타고 뉴욕의 포칸티코로 향했다.
아내의 장례식을 치른 록펠러는 아내를 위해 7400만달러를 기부해서
‘로라 스펠만 록펠러 기념재단’을 설립했다.
이 재단에선 교회와 선교사를 후원했고 초기 사회학 분야의 연구를 지원했다.
록펠러는 죽은 아내를 기념하기 위해 ‘로라 스펠만 록펠러 기념비’라는 이름으로
7400만달러의 재단을 설립했다.
이 재단은 나중에 록펠러 재단에 합병됐다.
두 재단에 록펠러는 5억3000만달러라는 천문학저긴 금액을 기부했다.
그 무렵 록펠러는 은둔자의 모습에서 탈바꿈해 언론과의 접촉을 피하지 않았고
회고록과 자서전을 집필하는 등 자신의 모습을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다.
록펠러의 전기 작가는 <뉴욕월드>의 편집장 윌리엄 인글리스로, 그는 1917년 자서전 집필에 들어갔다.
록펠러는 전기작가에게 스탠더드 오일의 성공에 대해 “미국의 기업 역사상 가장 놀라운 사건은 못 되더라도,
가장 놀라운 사건 중에 하나는 됩니다”라고 말했다.
록펠러는 동전을 나눠주는 재미에도 푹 빠져 있었다. 처음에는 5센트짜리로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아이들에게는 5센트, 어른에게는 10센트짜리를 나눠주었다.
그 동전은 큰 인기를 모았다.
세계 최대 갑부가 만진 동전을 받음으로써 자기에게도 돈 버는 재능이 전해질지 모른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록펠러는 80살이 훨씬 넘은 나이에도 주식투자를 계속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아들에게 준 돈을 다시 빌려다가 투자하기도 했다.
1929년 10월24일 대공황의 첫 충격파가 밀어닥치자 주식 시장은 반 토막이 났다.
곧바로 록펠러는 주식시장을 부양하기 위해 주식 100만주를 매입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극심한 불경기로 그의 재산은 700만달러로 대폭 줄어들어들었다.
대공황 당시 아들은 맨해튼의 중심가에 록펠러센터를 건립하기로 결정했다.
록펠러2세는 록펠러센터의 건립을 통해 어려움에 빠진 뉴욕시의 재정에 기여하면서
상업적인 성공 기회도 얻을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어려운 경제상황에서 대규모 공사를 벌여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주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록펠러센터는 건축비만 1억2000만달러에 이르는 대규모 공사였다.
록펠러센터에는 오페라하우스를 비롯한 상업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뮤직홀과
극장, 상점 등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록펠러재단은 뉴욕시가 대공황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뉴욕의 수도관을 자비로 묻어주고 뉴욕시민들에게
평생 수도요금을 내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혜택을 안겨주기도 했다.
경제공황 당시 부자에 대한 적대감이 다시 커져갔지만 록펠러에 대한 국민 반응은 조금씩 좋아졌다.
90살의 나이에 그의 몸무게는 40킬로그램도 나가지 않았다.
승마, 산책, 골프를 하는 시간도 줄어들었다.
이제는 간호사와 산소호흡기가 필요해졌고, 항상 다른 의료진들이 그의 옆에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록펠러는 인생의 마지막 목표를 이루고 싶었다.
그의 마지막 목표는“정말 나는 100살까지 살고 싶어서요”였다.
록펠러의 99번째 생일이 며칠 앞으로 다가온 1937년 5월22일.
그는 이따금 산소 호흡기를 대고 있어야 했지만 정신은 맑은 상태였다.
그날 그는 몸이 불편한지 간호사에게 자주 몸을 일으켜달라고 부탁했다.
그의 요구대로 간호사가 몸을 좀 더 일으켜 주자 “음, 훨씬 좋군”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잠이 든 것처럼 보였다.
자정이 지나고 새벽이 다가오고 있을 때 그는 심장마비를 일으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거두었다. 새벽 4시5분이었다.
그날은 록펠러가 어려서부터 좋아했던 요일인 주일이었다.
그는 100% 시장 독점을 아쉽게 이루지 못했듯이
100살까지 살고 싶다는 목표도 아쉽게 도달하지 못했다.
록펠러는 록펠러센터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완공 2년 전에 숨을 거두었다.
죽기 몇 년 전, 록펠러는 헨리포드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천국에서 함께 만납시다.”
이른 새벽 록펠러 2세는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정신없이 포컨티코로 달려왔다.
하지만 아버지의 심장은 이미 멎어 있었다.
록펠러의 장례식 날, 그는 20년 만에 처음으로 클리블랜드로 돌아왔다.
이날 스탠더드 오일 본사는 물론 미국 전역과 전 세계의 수많은 기업들이
일제히 5분 동안 일을 멈추고 묵념을 했다.
그는 레이크뷰의 지하 콩트리트 돔에 안치돼 아내 로라와 어머니 엘리자 옆에 영원히 잠들었다.
록펠러가 남긴 유산은 2600만달러 정도였다.
이 엄청난 재산은 그가 그렇게 싫어했던 세금을 무는 데 들어갔다.
록펠러는 5명의 자녀와 15명의 손자와 손녀, 11명의 증손자와 증손녀를 두었다.
록펠러는 돈 뿐만이 아닌 많은 유산을 남겼다.
그는 24개의 대학과 4928개의 교회를 지어 사회에 헌납했다.
스탠더드 오일에서 독립한 회사 가운데 세브론과 같은 회사는 독립한 뒤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
모빌과 엑손으로 분리된 두 회사는 1999년 다시 합병했다.
예전의 스탠더드 오일에 견주면 시장 점유율은 줄었지만,
그래도 이 회사는 세계에서 가장 큰 석유 회사가 됐다.
그의 개인적인 자선 사업 중에서 일반교육재단은 가장 오랫동안 원래 모습을 유지했지만
록펠러재단과 록펠러대, 시카고대가 그의 자선사업 분야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으로 지금도 기억되고 있다.
록펠러 자손들은 기업경영과 자선사업 분야 뿐 아니라 예술와 정치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록펠러는 예술은 무시했고 정치는 혐오했다.
하지만 손자인 넬슨 알드리치 록펠러는 뉴욕 주지사와 부통령에까지 올랐다.
넬슨의 남동생 윈드롭은 아칸소 주지사가 됐고,
사촌인 존 D 록펠러 4세는 웨스트버지니아 주지사와 상원의원 의원이 됐다.
그의 이름을 물려받은 아들 록펠러2세는
아버지와 거의 비슷한 수준의 재산을 갖고 자선사업을 꾸준히 추진했다.
록펠러2세는 1960년 86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살아생전 “존 D. 록펠러는 아버지 단 한 분뿐입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