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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적 인종은 없다?
생물학적 인종 개념이 성립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문화인류학 교과서에 나오는 구절을 살펴보자.
생물학적 인종 개념은 인류의 육체적 변이를 연구하는 데 쓸모가 있나?
아니다. 생물학적으로 정의된 인종은 아종을 가리키는데 현대 호모 사피엔스에는 아종이 없다. 우리 종 안의 생물학적 변이 중 절대 다수는 개체군들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체군들 내에 있다. 게다가 개체군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들은 서로 이웃하는 개체군들 사이에서 점차적으로 존재한다. 이런 이유들과 다른 이유들 때문에 인류학자들은 사회적 범주로서 인종이 의미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한편 생물학적 인종 개념이 오류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한다.
Is the Biological Concept of Race Useful for Studying Physical Variation in Humans?
No. Biologically defined, race refers to subspecies, and no subspecies exist within modern Homo sapiens. The vast majority of biological variation within our species occurs within populations rather than among them. Furthermore, the differences that do exist among populations occur in gradations from one neighboring population to another, without sharp breaks. For these and other reasons, anthropologists have actively worked to expose the fallacy of race as a biological concept while recognizing the significance of race as a social category. (『Cultural Anthropology: The Human Challenge』, William A. Haviland 외, 12판, 69쪽)
생물학자들 중에는 아예 아종(subspecies) 개념을 쓰지 않으려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아종 개념이 너무 애매해서 안 쓰느니만 못하다고 주장한다. 만약 아종 개념 자체를 쓰지 않는다면 생물학적 인종 개념이 성립할 수 없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속 편한 해결책이다.
많은 생물학자들이 아종 개념이 애매함에도 불구하고 쓸모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종이라는 용어를 포기하지 않으려고 한다. 위에서 인용한 문화인류학자 Haviland도 아종 개념 자체를 거부하는 것 같지는 않다. Haviland는 두 가지 근거를 대며 생물학적 인종 개념 즉 인간 아종 개념을 거부한다.
“개체군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들은 서로 이웃하는 개체군들 사이에서 점차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아종으로 분류할 수 없다는 주장을 먼저 살펴보자. Haviland가 아래의 글을 보게 된다면 뭐라고 할까?
번식 격리(reproductive isolation)라는 기준은 애매한 경우가 있다. 유기체들은 서로 이계교배(interbreed)를 할 수 없을 때 서로 다른 종에 속하는가? 아니면 그냥 이계교배를 하지 않을 때 서로 다른 종에 속하는가? 늑대, 코요테, 개는 서로 다른 종으로 여겨지지만 이계교배가 일어나며 – 말과 당나귀 사이에서 태어난 노새와는 달리 – 그렇게 태어난 자식은 보통 불임이 아니다. 닥스훈트(Dachshund)와 아리리쉬 울프하운드(Irish wolfhounds)는 같은 종으로 생각되지만 그 주인들이 명백히 인위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는 이상 박쥐와 돌고래 사이만큼이나 서로 번식적으로 격리되어 있다. 사실 메인(Maine) 주에 사는 흰꼬리 사슴(white-tailed deer)은 메사추세츠(Massachusetts) 주에 사는 흰꼬리 사슴과 이계교배를 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그렇게 멀리 여행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옮겨 놓는다면 분명히 이계교배를 할 수 있을 것이며 당연히 같은 종으로 분류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철학자들을 위해 주문 제작한 것 같은 실제 사례인, 북반구에서 북극을 중심으로 한 커다란 고리 모양의 지역에서 서식하는 재갈매기(herring gull)를 살펴보자.
영국에서 북아메리카로 서쪽으로 가면서 재갈매기를 살펴보면 재갈매기로 알아볼 수는 있지만 영국의 형태와는 조금 다른 갈매기를 보게 된다. 모습이 점점 변하는 것을 보면서 시베리아까지 따라가 보자. 이 연속체의 이 지점쯤에서 갈매기는 영국에서 작은검은등갈매기(lesser black-backed gull)라고 부르는 형태와 더 비슷하게 생겼다. 시베리아에서 러시아를 지나 북유럽으로 가면서 갈매기는 점점 영국의 작은검은등갈매기와 비슷해지는 쪽으로 변한다. 마침내 유럽에서 고리는 완성된다. 지리적으로 극단적인 두 형태가 만나서 완벽하게 구분되는 두 종을 형성한다: 재갈매기와 작은검은등갈매기는 그 모습에서도 구분되며 자연 상태에서는 이계교배를 하지 않는다. [Mark Ridley 1985, p. 5]
“잘 정의된” 종들이 분명히 존재하며 그 기원을 설명하려는 것이 다윈의 책이 목표였다. 하지만 그는 종 개념의 “원리에 입각한” 정의를 찾으려는 노력을 포기하라고 한다.
The criterion of reproductive isolation is vague at the edges. Do
organisms belong to different species when they can’t interbreed, or when they just don’t interbreed? Wolves and coyotes and dogs are considered to be
different species, and yet interbreeding does occur, and – unlike mules, the offspring of horse and donkey – their offspring are not in general sterile. Dachshunds and Irish
wolfhounds are deemed to be of the same species, but unless their owners
provide some distinctly unnatural arrangements, they are about as
reproductively isolated as bats are from dolphins. The white-tailed deer in
And finally – a true-life example seemingly made to order for philosophers – consider the herring gulls that live in the Northern Hemisphere, their range forming a broad ring around the North Pole.
As we look at the herring gull, moving westwards from
“Well-defined” species certainly do exist – it is the purpose of Darwin’s book to explain their origin – but he discourages us from trying to find a “principled” definition of the concept of a species. (『Darwin's Dangerous Idea: Evolution and the Meanings of Life』, Daniel C. Dennett, 45쪽)
재갈매기와 작은검은등갈매기는 고리 종(ring species)이라고 부르는 것을 형성한다. 이 사례에서 두 종은 칼로 자르듯이 분리되지 않으며 하나의 연속체를 형성한다. Haviland가 일관성 있게 주장하려면 재갈매기와 작은검은등갈매기를 두 종으로 나누면 안 될 것이다.
생물 분류학에서 종 개념이 주인공이다. 하지만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종 개념조차도 상당히 애매하다. 아종 개념이 종 개념보다 더 애매하다는 점을 부정할 생물학자는 없어 보인다. 따라서 아종 개념을 버리지 않기로 결심했다면 “개체군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들은 서로 이웃하는 개체군들 사이에서 점차적으로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생물학적 인종이 없다고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우리 종 안의 생물학적 변이 중 절대 다수는 개체군들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체군들 내에 있”기 때문에 아종으로 나눌 수 없다는 주장은 어떤가? 이것 역시 제대로 된 논거가 아니다. 아종 개념을 정의할 때 “개체군 간의 변이가 개체군 내의 변이보다 더 커야 한다”는 조건을 포함시키는 생물학자는 없어 보인다. 심지어 그런 조건은 종 개념에도 없다. “생물학적 변이 중 절대 다수는 개체군들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체군들 내에 있”다 하더라도 같은 장소에 있어도 서로 교배를 거의 하지 않는다면 있다면 다른 종으로 분류한다.
아종 개념을 쓰기로 했다면 종 개념보다 더 엄밀하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인간에게 아종 개념을 적용할 때만 종 개념보다 더 엄격하기를 요구한다. 그리고 그런 요구를 만족할 수 없으니 인간에게는 아종 개념을 적용할 수 없다고 우긴다.
위에서 인용한 글에서 Haviland는 생물학적 인종 개념은 거부하지만 개체군이라는 용어는 사용하고 있다. 아종으로 부르든 개체군으로 부르든 어떤 면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예컨대 “인종들 사이에 선천적 IQ 차이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냥 “인간 개체군들 사이에 선천적 IQ 차이가 있다”고 말만 살짝 바꾸면 되기 때문이다. 생물학적 인종 개념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결국 원하는 것은 “인간 집단 간 선천적 IQ 차이가 없다”는 명제인 것 같다. 이것은 인종 개념을 부정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종 간 선천적 IQ 차이가 있다”나 “인간 개체군 간 선천적 IQ 차이가 있다”나 그들에게는 끔찍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피부색만 다를 뿐이다?
흑인은 백인에 비해 피부가 검다.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리고 내가 알기로는 흑인이 백인에 비해 선천적으로 피부가 검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사실상 없다. 게다가 피부색의 선천적 차이가 자연 선택에 의한 적응의 결과라는 것에도 대체로 동의하는 것 같다.
피부에 있는 멜라닌은 자외선을 차단한다. 자외선이 피부암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차단하는 것이 적응적이다. 하지만 인간은 피부에서 자외선을 이용해서 비타민 D를 합성한다. 자외선을 너무 차단하면 비타민 D 결핍으로 구루병에 걸릴 수 있다. 따라서 자외선을 적절한 수준에서 차단해야 한다. 적도에 가까운 지방일수록 자외선이 더 강하기 때문에 흑인이 백인에 비해 선천적으로 멜라닌을 더 많이 만들도록 진화했다는 것이 진화론자들의 설명이다. 나는 이런 설명을 인종주의적 사이비과학이라며 거부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피부색의 경우에는 실제로 인종 사이에 차이가 나며, 그 차이는 선천적이며, 그 차이가 생긴 이유를 진화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Rushton은 다른 차이들에 대해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선천적 차이는 피부색에서만 난다(just skin deep)고 이야기한다.
J. Philippe Rushton의 입장에 대해서는 『Race, Evolution, And Behavior: A Life History Perspective』를 참조하라. 『Race, Evolution, and Behavior』은 3판(2000)까지 나왔으며 축약판(2nd Special Abridged Edition)을 인터넷에서 볼 수 있다.
http://www.charlesdarwinresearch.org/Race_Evolution_Behavior.pdf
인간의 육체에는 피부 말고도 온갖 것들이 있다. 과연 인종 간 선천적 차이가 피부색에만 있을까? 지난 10~20만 년 동안 인간의 온갖 유전자들 중에 피부색에 영향을 끼치는 유전자에게만 돌연변이나 자연 선택이나 유전자 표류(genetic drift, 유전자 부동)가 허용된 것일까? 이것은 말도 안 된다.
실제로 각 인종들은 온갖 육체적 측면에서 차이가 난다. 인종마다 또는 개체군마다 키가 다르며, 얼굴 생김새가 다르며, 젖가슴의 크기가 다르며, 음경과 고환의 크기가 다르며, 심폐 능력이 다르며, 시력이 다르며, 눈동자 색깔이 다르며, 머리카락 색깔과 모양이 다르며, 성인의 젖 소화 능력이 다르며, 말라리아에 대한 면역력이 다르며, 초경 시기가 다르며, 뇌 크기가 다르다. 그리고 그것들 중 상당 부분은 선천적 차이임이 분명하다.
“피부색만 다르다(just skin deep)”를 외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정말 피부색 차이만 선천적이고 다른 육체적 차이는 몽땅 후천적이라고 믿는 것인가? 아니면 실제로 하고 싶은 말은 “육체적 차이만 선천적이다”라는 것이며 “피부색 차이”라는 표현은 육체적 차이를 상징하는 말인가?
그렇다면 지난 10~20만 년 동안 인간의 육체에 영향을 끼치는 유전자에게만 돌연변이가 일어나고 인간의 정신에 영향을 끼치는 유전자에게는 돌연변이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단 말인가? 어떻게 이런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인종주의를 싫어하는 신이 인간 진화를 인도해서 정신적으로는 다양해지지 않도록 인도했단 말인가? 만약 인종 간 정신적 차이가 없었으면 하는 자신의 소망이 지난 10~20만 년 동안의 인간 진화를 지배했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대단한 과대망상이다. 돌연변이, 자연 선택, 유전자 표류 등은 여러분의 소망이나 이데올로기 따위는 개의치 않고 작동한다.
Tooby & Cosmides 비판
여기에서는 「The Psychological Foundations of Culture(1992)」만 다룰 것이다. 그 이후에 이 문제와 관련하여 Tooby & Cosmides의 의견이 어떤 식의 변화를 겪었는지 추적하지는 않았다. 우선 세 구절을 상당히 길게 인용해 보겠다.
1 단계. 급격한 역사적 변화와 다수의 자연 발생적인 인간의 “교차-양육 실험들(cross-fostering experiments)”의 존재는 인간 집단 간의 조금이라도 중요한 행동의 차이가 집단들 사이의 유전적 차이 때문이라는 인종주의적 생각을 효과적으로 반박한다. 모든 곳의 유아는 똑 같은 상태에서 태어나며 같은 발달 잠재력, 진화한 심리, 또는 생물학적 자질을 가지고 태어난다. 이것은 전통적으로는 인류의 정신적 통일성(the psychic unity of humankind)이라고 알려졌던 원리다. 뒤이어 이 세기 동안에 일어났던, 유전학과 인간 발달에 대한 지식의 증가 때문에 모든 집단의 유아가 본질적으로 같은 기본적 인간 설계와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결론이 강하게 경험적으로 뒷받침되었다. 이제는 현대 전기 이동(electrophoretic) 기술에 의해 직접 탐지할 수 있는, 인간의 유전적 변이는 거의 대부분이 기능적인 측면에서는 하찮은 생화학적 차이에 한정되어 있어서 우리의 복잡한 기능적 설계는 보편적이며 종-전형적(species-typical, 종-고유의)이다(Tooby & Cosmides, 1990a). 또한 존재하는 변이의 대부분은 “인종들” 사이에 또는 개체군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압도적으로 개인 사이에 그리고 개체군 내에 존재한다. 유전적 변이의 이런 알려진 분포를 고려해 볼 때, 유전적 변이는 왜 많은 행동들이 집단 내에서는 공유되는 반면 집단들 간에는 공유되지 않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 즉, 유전적 변이는 왜 인간 집단들이 생각과 행동에서 서로 극적으로 다른지를 설명할 수 없다. (의미 심장하게도, 이것은 현 상태의 SSSM이 올바른 유리한 특성이며 통합된 인과 모델에 변형 없이 통합된다. 하지만 왜 이것이 참으로 드러나는지는 복잡한, 진화한, 심리학적 또는 생리학적 적응들 – SSSM 추종자들이 명시적으로 또는 암시적으로 부인하는 어떤 것 – 에 의존한다.)
Step 1. The existence of rapid historical change and the multitude of spontaneous human "cross-fostering experiments" effectively disposes of the racialist notion that human intergroup behavioral differences of any significance are attributable to genetic differences between groups. Infants everywhere are born the same and have the same developmental potential, evolved psychology, or biological endowment – a principle traditionally known as the psychic unity of humankind. The subsequent growth of knowledge over this century in genetics and human development has given strong empirical support to the conclusion that infants from all groups have essentially the same basic human design and potential. Human genetic variation, which is now directly detectable with modem electrophoretic techniques, is overwhelmingly sequestered into functionally superficial biochemical differences, leaving our complex functional design universal and species-typical(Tooby & Cosmides, 1990a). Also, the bulk of the variation that does exist is overwhelmingly inter-individual and within-population, and not between "races" or populations. By the nature of its known distribution, then, genetic variation cannot explain why many behaviors are shared within groups, but not between groups. That is, genetic variation does not explain why human groups dramatically differ from each other in thought and behavior. (Significantly, this is the only feature of the SSSM that is correct as it stands and that is incorporated unmodified into the Integrated Causal Model. Why it turns out to be true, however, depends on the existence of complex evolved psychological and physiological adaptations – something explicitly or implicitly denied by adherents of the SSSM.)
( 「The Psychological Foundations of Culture」, John Tooby & Leda Cosmides, 『The Adapted mind: evolutionary psychology and the generation of culture(Jerome H. Barkow, Leda Cosmides, John Tooby 편집, 1992)』, 25쪽, http://www.psych.ucsb.edu/research/cep/papers/pfc92.pdf )
이 과정에서, 어떤 종류의 선천론적 요소든 그것과 명시적으로 관련된 것이라면 모든 접근법이 의심을 받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근본적으로 갈리는 – 심지어 반대되는 – 프로그램들과 주장들이 20세기 사회 과학자들의 마음 속에서는 지속적으로 융합되었다. 가장 중요하게는 적응론적 진화 생물학과 행동 유전학을 구분하지 못했다. 우리의 보편적, 유전된, 종-전형적 설계에 대한 적응론적 탐구가 개인 간 또는 개인들의 집합 간 차이 중 어느 부분이 유전자의 차이 때문인지를 묻는 행동 유전학이 서로 상당히 구분됨에도 불구하고 적응론적 진화 생물학에 전형적인 범종적(panspecific) 선천론과 행동 유전학의 유전자형(idiotypic) 선천론이 서로 혼동되었다(Tooby and Cosmides, 1990a). 분명히, 복잡하게 조직된 보편적 인간 본성에 대한 주장들은 바로 그 성격 때문에 인종주의적 설명에 참여할 수 없다. 실로, 그런 주장들은 인종주의적 접근법의 중심 가정들과 모순된다. 하지만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적응론적 접근법들과 행동 유전학이 다수의 사회 과학자들의 마음 속에서는 풀리지 않게 얽힌 상태로 남아 있다.
In this process, all approaches explicitly involving nativist elements of whatever sort became suspect. In consequence, fundamentally divergent – even opposing – programs and claims have become enduringly conflated in the minds of 20th-century social scientists. Most significant was the failure to distinguish adaptationist evolutionary biology from behavior genetics. Although the adaptationist inquiry into our universal, inherited, species-typical design is quite distinct from the behavior genetics question about which differences between individuals or sets of individuals are caused by differences in their genes, the panspecific nativism typical of adaptationist evolutionary biology and the idiotypic nativism of behavior genetics became confused with each other(Tooby and Cosmides, 1990a). Obviously, claims about a complexly organized, universal human nature, by their very character, cannot participate in racist explanations. Indeed, they contradict the central premises of racialist approaches. Yet, despite this fact, adaptationist approaches and behavior genetics remain inextricably intertwined in the minds of the majority of social scientists.
( 「The Psychological Foundations of Culture」, John Tooby & Leda Cosmides, 『The Adapted mind: evolutionary psychology and the generation of culture(Jerome H. Barkow, Leda Cosmides, John Tooby 편집, 1992)』, 35쪽, http://www.psych.ucsb.edu/research/cep/papers/pfc92.pdf )
첫째,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튼튼한(robust, 안정되게 발달하는) 보편적 인간 본성에 대한 모델들을 바로 그 성격 때문에 집단 간 차이에 대한 인종주의적 설명에 참여할 수 없다. 이것이 인간 본성을 무엇이든 보편적인 것으로 정의하는 정의 수법(definitional
trick)일 뿐인 것은 아니다. 선택이 보통 복잡한 적응들을 보편적 또는 거의 보편적이
되도록 만드는 경향이 있음을 믿을 만한 강한 이유들이 있다. 따라서 사소한, 표면적, 비기능적 형질들에 아무리 많은 변이가 있을지라도 인간은
복잡한, 종-전형적, 종-특유의 적응들의 구조를 공유함에 틀림 없다. 오래 사는 성적 번식자이기
때문에 만약 우리의 복잡한 적응들의 근저에 있는 유전자들이 개인마다 다양하다면 복잡한 적응들은 매 세대마다 일어나는 성적 재조합의 무작위적 과정에
의해 파괴될 것이다. 성적 재조합과 결합된 선택은 특히 인간과 같이 열린 개체군 구조(open population structure)이며 오래 사는 종의 경우에는 생리적이든 심리적이든 적등들의 통일성을
강제하는 경향이 있다(Tooby & Cosmides, 1990b). 물론 실증적으로는, 『그레이 해부학 교과서(Gray's Anatomy)』의 어느 쪽을
펼치더라도 전 세계 개별 인간들의 해부학적 세부 사항을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다는 사실은 인간의 복잡한 생리적 적응들이 두드러지게
In the first place, as discussed, models of a robust, universal human nature by their very character cannot participate in racist explanations of intergroup differences. This is not just a definitional trick of defining human nature as whatever is universal. There are strong reasons to believe that selection usually tends to make complex adaptations universal or nearly universal, and so humans must share a complex, species-typical and species-specific architecture of adaptations, however much variation there might be in minor, superficial, nonfunctional traits. As long-lived sexual reproducers, complex adaptations would be destroyed by the random processes of sexual recombination every generation if the genes that underlie our complex adaptations varied from individual to individual. Selection in combination with sexual recombination tends to enforce uniformity in adaptations, whether physiological or psychological, especially in long-lived species with an open population structure, such as humans(Tooby & Cosmides, 1990b). Empirically, of course, the fact that any given page out of Gray's Anatomy describes in precise anatomical detail individual humans from around the world demonstrates the pronounced monomorphism present in complex human physiological adaptations. Although we cannot yet directly "see" psychological adaptations (except as described neuroanatomically), no less could be true of them. Human nature is everywhere the same.
( 「The Psychological Foundations of Culture」, John Tooby & Leda Cosmides, 『The Adapted mind: evolutionary psychology and the generation of culture(Jerome H. Barkow, Leda Cosmides, John Tooby 편집, 1992)』, 38쪽, http://www.psych.ucsb.edu/research/cep/papers/pfc92.pdf )
Tooby & Cosmides는 “근본적으로 갈리는 – 심지어 반대되는 – 프로그램들과 주장들이” 혼동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들이 주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진화 심리학과 행동 유전학이 유전자 결정론이라는 이름으로 한 묶음으로 비판 받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 집단 간의 조금이라도 중요한 행동의 차이가 집단들 사이의 유전적 차이 때문이라는 인종주의적 생각”이라는 구절에서 나는 Rushton의 『Race, Evolution, And Behavior』를 떠올렸다. 실제로 Tooby & Cosmides가 Rushton을 염두에 두었는지 여부는 확실히 모르겠다.
어쨌든 “모든 곳의 유아는 똑 같은 상태에서 태어나며 같은 발달 잠재력, 진화한 심리, 또는 생물학적 자질을 가지고 태어난다”라고 주장하는 Tooby & Cosmides와는 달리 Rushton은 백인이 흑인에 비해 선천적으로 지능이 높은 것을 비롯하여 온갖 정신적 측면에서 선천적 차이를 보인다고 주장한다. Rushton은 행동 유전학을 남용하여 인종주의를 정당화한다는 비난을 가장 많이 받는 것 같다.
나는 진화 심리학과 행동 유전학의 연구 초점이 서로 다르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그렇다고 서로 반대되는 것은 아니다. 두 과학 분과가 반대될 수 있다는 이야기는 과학 분과 사이의 통일성을 강조하는 Tooby & Cosmides의 생각에 비추어 볼 때 이상해 보인다. 오직 둘 중 하나가 사이비과학일 때에만 두 분과가 반대(?)될 수 있을 것이다. Tooby & Cosmides가 행동 유전학이 사이비과학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다.
진화 심리학과 관련된 논쟁에서는 백지론을 강하게 공격하는 Tooby & Cosmides가 인종 차이 문제에 대해서는 백지론을 펼치고 있다. Tooby & Cosmides는 정신적인 면에서 보이는 인종 간 선천적 차이에 대한 주장을 덮어놓고 인종주의적이라고 낙인 찍는 것 같다.
그들의 말대로 인간은 유성 생식을 하기 때문에 복잡한 적응이 인종마다 서로 근본적으로 다를 수는 없다. 그랬다가는 혼혈이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기본적인 구조가 같더라도 여러 가지 면에서 서로 다를 수 있다. 예컨대 기본적인 신체 구조가 인류 보편적이라 하더라도 인종들은 선천적으로 키가 서로 상당히 다를 수 있으며 실제로도 그렇다. 쿵산족이나 호텐토트족과 스웨덴인 사이의 평균 키 차이는 40cm 정도나 되며 이것이 순전히 영양 상태의 차이 때문은 아닌 듯하다. 신체적인 면에서 이런 상당한 선천적 차이가 있다면 정신적 측면 즉 지능이나 성격에서 상당한 선천적 차이가 없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정상적인 두 인간의 신체 사이에는 기본적인 차이가 없지만 키, 몸무게, 키와 다리 길이 사이의 비율 등에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정상적인 두 인간의 신체 사이에는 기본적인 차이가 없지만 달리기 능력, 시력 등에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정상적인 두 인간의 뇌 구조에는 기본적인 차이가 없지만 뇌의 성능에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인종 간에도 비슷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인종 간 평균 키에 차이가 있고 그 차이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선천적인 것 같다. 그것을 인정한다면 인종 간 IQ 차이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선천적일 가능성을 열어 두어야 한다.
Tooby & Cosmides는 개체군 간 차이보다는 개체군 내 차이가 압도적으로 크다는 이야기를 여기서 들려주고 있다.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이것은 개체군 사이에 선천적 키 차이나 선천적 IQ 차이가 없다는 근거로 쓰일 수 없다.
흑인이 백인이나 아시아인보다 선천적으로 IQ가 낮고, 자식 돌보기보다는 짝짓기에 집중하고, 더 공격적이어서 범죄자가 되기 싶고, 육체적 능력이 뛰어나다는 Rushton의 주장이 많은 사람들의 기분을 나쁘게 하고 있다.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기분 나쁘다고 거짓이고 사이비과학인가?
Rushton의 주장은 순전히 실증적으로 검증해야 할 문제다. 그것이 누군가의 기분을 상하게 하거나 누군가에 의해 나쁜 이데올로기로 악용될 수 있다고 과학적으로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정신적인 면에서는 인종 간 차이가 진화할 수 없다는 주장은 진화 생물학의 원리에 비추어 볼 때 말도 안 된다. 인종 간 신체적 차이가 진화할 수 있다면 정신적 차이가 진화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다.
첫댓글 좋은 글이네요. 저는 진정 차이를 인정해야만 진정한 평등과 인류애가 구현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언뜻 상충되는 듯하지만 저 스스로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IQ 테스트를 정밀 분석하는 문제의 경우, 환경적 요소를 어떻게 통제하느냐는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한 IQ 테스트 차이가 있다고 해봐야 흑인의 IQ가 백인, 아시아인보다 낮다는 문제는 그렇게 큰 의미를 갖기 어렵습니다. 거기다 지능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게 처리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모든 면에서 우월한 지능이 존재한가에 대해서 저는 회의적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즉 IQ 차이가 난다는 게 사실이라 한들 그게 학습에 아주 큰 차이를 나타내는가에 대해서는 현대 교육학에서는 부정적입니다.
더구나 러스턴은 아직 주장을 하고 있을 뿐이지 주장의 신뢰성을 높이기 위한 효과적인 실험 수행을 해서 그 주장을 제대로 증명하지도 못했습니다. 일단 만족할만한 실험결과가 나오기 전에는 그의 주장은 신빙성이 있다 정도니 주류 과학자들이 무시할 만도 한거 같습니다.
IQ와 학습 결과 사이에는 커다란 상관 관계가 있습니다.
Rushton이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래 글을 보십시오.
<Race and IQ: A Theory-Based Review of the Research in Richard Nisbett’s Intelligence and How to Get It>
http://www.charlesdarwinresearch.org/2010%20Review%20of%20Nisbett.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