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 절: 붓다 시대의 종교사상계 1. 사회변동과 계급제도의 붕괴 2. 정통 바라문의 사상 3. 사문들의 출현
제2 절: 샤카무니의 생애 1. 탄생과 젊은 날들 2. 출가. 구도. 깨달음 3. 최초의 설법과 교화활동 4. 인류의 영원한 스승
근본불교 제1 절: 근본불교
제2 절:붓다가 발견한 진리 1. 연기법 2. 12연기
제3 절 사성제 1. 고성제 2. 집성제 3. 멸성제 4. 도성제
제4 절 오온-무아 1. 색온 2. 수온 3. 상온 4. 행온 5. 식온
제5 절 삼법인 1. 제행무상인 2. 제법무아인 3. 열반적정인
제6 절 일체법 1.5온 12처 18계
제7 절 윤회와 업 1. 윤회 2. 업 3. 과보 4. 윤회의 주체문제
초기불교의 주요개념 1. 37조도품 2. 불교의 세계관
부파불교
샤카무니 붓다
제1절 붓다 시대의 종교사상계
1. 사회변동과 계급제도의 붕괴
불교는 붓다 샤카무니(Buddha Sakyamuni)의 깨달음과 가르침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이 새로운 종교의 출발은 붓다가 태어나신 B.C 6세기 무렵 인도의 시대 사정과도 무관하지 않다. 당시 인도는 강대한 신흥왕국의 출현과 도시의 형성 등으로 급격한 정치·사회적 변화가 나타나고, 이에 따라 종교사상계 또한 매우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이런 시대 배경 속에서 불교가 새로운 종교 사상으로서 그 모습을 세상에 드러낸 것이다. 불교의 출발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인도문명의 큰 흐름과 함께 붓다 당시의 정치·사회적 변동부터 살펴 보기로한다. 인도의 고대 문명은 B.C 3000년 경부터 개척되기 시작하여 대략 1000년 동안에 걸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른바 인더스 문명이 그것이다. 오늘날 인더스강 유역의 하라파(Harapp )와 모핸조다로(Mohenjo-daro)등 도시 유적들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수준 높은 이 고대 문명은 문다(Munda)족·드라비다(Dravida)족 등을 비롯하여 일찍부터 인도 대륙에 살아 온 여러 종족들에 의해 이룩되어 왔다. 그러나 이후 인도의 문명은 멀리 코카서 스(Caucasus) 지방으로부터 인더스강 상류의 판잡(Panjab, 五河) 지방에 침입해 온 아리야(Arya)인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아직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는 않지만 아리야인들은 대략 B.C 16∼13세기 무렵 인도에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이 문다족·드라비다족과 같은 선주민(先住民)들을 정복하고 대륙의 중심으로 이동하면서 후기 인도문명의 형성에 새 주역이 된 것이다. 처음 판잡지방에 침입해왔던 아리야인들은 B.C 11∼9세기 무렵에는 이미 갠지스강 상류 지방으로 이주하였고, 시대가 흐름에 따라 계속 동방으로 진출하여 B.C 6∼5세기 무렵에는 갠지스강 중류 지방에 정착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함께 이 지방에는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현저한 변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먼저 당시 존재하고 있던 여러 부족이 점차 통합하여 국가형태를 이루었고, 그것은 다시 군소 국가의 병합을 통해 강대한 국가체제를 형성해 나갔다. 초기 불교의 경전에 의하면, 이 무렵 인도에는 16대국이 있었다고 전한다. 대국 가운데서도 특히 강성했던 나라는 마가다(Magadha), 코살라(Kosala), 밤사(Va sa), 아반티(Avanti) 등이었으며, 전제적인 국왕이 통치하는 군주정체의 이들 4대국에 의해 군소 국가들은 점차 정복 합병되어 갔다. 그리하여 붓다 시대에이들 나라는 이미 간지스강 중류지방에 각각 강대한 신흥 왕국으로서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신흥왕국의 중심지는 도시(nagara)였는데, 특히 간지스강 중류 지방의 여러 도시가 경제적으로 크게 번성하였다. 처음 이 지방으로 이주해 온 아리야인 사회는 변함없이 종전과 같은 씨족제(氏族制) 농촌사회의 촌락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였다. 그러나 점차 농업 생산이 증대되고 인구의 증가 및 상공업의 발달이 촉진됨에 따라 곳곳에 도시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붓다 시대에도 많은 도시가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 경전에 따르면 특히 번창하였던 대도시로서, 참파(Campa, 앙가의 수도)·라자그리하(Rajagrha, 마가다의 수도)·쉬라바스티(Sr vasti, 코살라의 수도)·사케타(Saketa, 코살라의 도시)·코삼비(Kosambi, 밤사의 수도)·바라나시(Baranasi, 카시의 수도)의 6대 도시를 들고 있다. 동방의 신흥 왕국들은 새로운 도시를 중심으로 성립하여, 이른바 도시국가의 양상을 띠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같은 국가적 정세에 부응하여 사회의 구성도 점차 변모해 나갔다. 인도에 있어 사회 구성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들 수 있는 것은 계급제도이다. 이는 아리야인들이 간지스강 상류지방에 이주하였던 시대에 확립된 것으로, 일반적으로 사성(四姓) 계급제도라고 한다. 이 제도에 따르면, 사회는 사제자(司祭者)이며 지식인들인 브라흐마나(Brahmana, 婆羅門), 무사 또는 왕족들인 크샤트리야(K atriya,刹帝利), 상인·서민들인 바이샤(Vai ya,毘舍), 노예· 육체노동자들인 수드라(S dra,首陀羅)의 4가지 커다란 집단들, 즉 카스트(cast)로 갈라진다. 따라서 이를 흔히 '카스트제도'라고 부르지만 원래 카스트란 개개의 계급집단을 가리키는 말이다. 어쨌든 이는 인도 아리야인의 사회구성을 특징짓는 계급제도로서, 이것을 기반으로하여 바라문교(婆羅門敎, Brahanism)가 성립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바야흐로 붓다 시대 이르러 이러한 계급제도가 점차 변모하고 있었다. 이 같은 변모와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것은, 정치적 패자(覇者)로서의 국왕과 경제적 실력자들인 자산가(資産家)들의 등장이다. 국왕(rajan)은 종전의 농촌 사회에 있어서는 단순히 부족의 수장(首長)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동방의 신흥왕국에서는 이들이 지방적 분권(分權)이기는 하지만 이미 국가의 지배자로서 그 지위를 갖기에 이르렀다. 또 자산가(gahapati, 居士)란 도시를 배경으로한 상업 자본가나 지방의 거대한 토지의 소유자를 가리킨다. 이 시대에 이르러 이들은 서민 계급과는 구별되는 하나의 사회적 신분으로 간주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장자(長者)로 불리우는 직업조합의 장(長)들은 상업 자본가들의 대표로서 사회적으로 중요한 지위에 있었다.이처럼 국왕이나 자산가가 사회에 커다란 세력을 갖게 됨에 따라 예로부터 내려오던 계급제도는 점차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한편 아리야인들이 동방으로 진출함으로써 증가되기 시작한 원주민과의 혼혈등으로 인해, 인종적으로도 계급 붕괴의 현상이 가속화되어 갔다. 그리하여 브라흐마나 문헌에는 사성(四姓)을 열거할 경우 반드시 바라문·왕족·서민·노예의 순서로하여 바라문을 최상위에 두고 있지만 그러나 초기불교의 성전에는 거의 대부분이 왕족·바라문·서민·노예의 순서로 나타난다. 즉 붓다의 시대에는 이미 바라문과 왕족의 위치가 바뀌어 있는 것이다. 원래부터 바라문 세력은 농촌사회를 중심으로 뿌리를 내려왔다. 따라서 여전히 농촌에서는 바라문이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지만, 신흥 도시들을 중심으로 한 사회에서는 그들의 옛날의 권위는 더 이상 지켜지지 않게 된 것이다.
2. 정통 바라문(婆羅門)의 사상 정치·경제적 변화 등을 포함하여 사회가 크게 변동함에 따라 종교 사상계에도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었다. 당시 철학 또는 종교에 관한 사상계는 크게 정통적인 바라문(婆羅門)과 이들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사문(沙門)의 두 그룹으로 나눌 수 있는데, 먼저 바라문의 사상부터 알아본다. 바라문의 사상은 한마디로 베다(Veda 陀)·브라흐마나(Br hmana 梵書)·아라냐카( ra yaka 森林書)·우파니샤드(Upani ad,奧義書)라는 일련의 문헌들을 통해 전개된 종교사상들을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의 전개과정은 보통 3기로 구분되기도 한다. 베다는 인도에 이주해 온 아리야인들의 우주와 인간에 대한 사유방법과 종교적 지식을 모아 편찬한 성전의 명칭으로, 4가지 베다서가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이고 그 성립이 오랜 것은 리그베다( g-veda)로서 B.C 1500∼1000년 경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시기를 베다시대라 하며 바라문 문화의 제1기에 해당한다. 신들을 찬미하는 시가(詩歌) 모음집인 리그베다에는 무수한 자연신들이 등장한다. 대개 태양이나 불, 바람, 강과 같은 자연 현상의 다양한 힘들, 또는 추상적인 관념 등이 신격화 되어 천신(天神, deva)으로서 숭배·찬미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신들 가운데 인드라(Indra)는 신체적 특징과 큰 위력을 갖춘 최고의 천신으로 묘사되고 있다. 신들의 거룩한 행위에 대한 찬미 외에도 리그베다는 부(富), 다산(多産), 장수(長壽), 승전(勝戰) 등과 같이 인간 에게 유익한 것들을 간구하는 기원을 함께 담고 있다. 그러나 자연신교적(自然神敎的)이며 다신교적(多神敎的)인 경향을 반영하는 이 시기에도, 근원적인 세계의 원리를 탐구하는 사유가 싹트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 중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우주창조에 관한 찬가(讚歌)들이다. 즉 우주와 모든 존재는 전능의 힘을 지닌 비스바카르만(Vi vakarman, 造一切神)이 '집을 짓듯이' 만들었다고 하거나, 또는 모든 피조물들의 주(主)라고 불리우는 아버지 신인 프라자파티(Praj pati, 生主神)가 우주를 출생시 켰다고 한다. 우주의 근원에 관한 이런 사유들이 리그베다의 노래를 통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신들에 대한 찬미·기원과 관련하여 베다시대 인도인들의 삶속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은 의례(儀禮)와 제사(祭祀)였다. B.C 1000∼800년 경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브라흐마나(Brahmana, 梵書)는 곧 이러한 의례와 제사에 관한 규정을 자세하게 밝힌 문헌들이다. 따라서 제사가 중심이 되었던 이 시대를 브라흐마나, 즉 범서(梵書)시대라고 부르며, 바라문 문화의 제2기이다. 사람들은 크고 작은 인간의 문제를 신에게 고하거나 빌기 위해 의례를 행하고 제사를 드렸다. 이러한 의례 또는 제사의 형식이 처음에는 간단하였고 그 목적도 단순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것은 점점 복잡하고 정교하게 되어 많은 제단(祭壇)과 제사를 관장하는 여러 사제자(司祭者)들이 필요하게 되었을 것 또한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변화에 비추어 볼 때 의례와 제사는 이제 우주와 신들을 움직일 수 있는 신비한 힘을 가지는 일종의 성스러운 기술로 간주되었다. 리그베다 외에 삼마베다(S ma-veda)·야주르 베다(Yajur -veda)·아타르바 베다( tharva-veda)의 3베다는 신에 대한 권청(勸請) 또는 제사의식의 축문 및 주구집(呪句集)으로서, 브라흐마나 시대에 성립된 것들이다. 이런 베다서들이 이 시대에 성립되고 있는 것도 의례와 제사의 효과를 더욱 높여 신들을 쉽게 움직이기 위함에서 였을 것이다. 신들을 움직이려면 의례와 제사의 절차를 빈틈없이 준수하여 거행해야 했던 만큼, 그것을 전담할 수 있는 것도 오로지 사제자들 뿐이었다. 따라서 신을 움직이게 하는 제사의 전담자는 큰 권능을 갖게 되었으며, 이들은 제사에 관한 권능 뿐 아니라 사회적 지위 또한 향상·강화되어 갔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사제가 세상을 지배하는 사제지상주의(司祭至上主義) 사회를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브라흐마나에서는 베다시대의 자연신교적 종교사상이 더욱 발전되어 범신론적(汎神論的) 우주론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우주를 창조한 인격신(人格神)으로서 브라흐만(Brahman 梵神)이 상정되어 그가 우주 자연 등 일체를 성립시킨 다음, 스스로 그 일체 속으로 들어갔다고 생각하였다. 그런 뜻에서 브라흐만은 우주를 창조한 인격신인 동시에 우주의 본질이기도 한 셈이다. 이같은 일원론적(一元論的) 범신론(汎神論)의 견지에서 사제자들은 그들 스스로를 브라흐만과 직결된 종성(種姓)이라고 주장하였다. 아리야인들에 의해 구상된 인도의 4성계급제도는, 이처럼 사제자 즉 바라문을 중심으로 형성된 사회체제인 것이다. 사제자들이 브라흐만과 직결된 종성(種姓)임을 주장하며, 바라문 중심주의 제사 지상주의에 빠져 있을 때 이런 현실에 회의를 느껴 새로운 의식을 갖는 사람들이 나오게 된다. 우파니샤드(Upani ad, 奧義書) 시대의 사상가들이 바로 그들이다. 의례와 제사를 만능으로 삼는 지나친 종교적 색체가 반성이 되고 철학적 사색이 심화된 이 시기는 B.C 800 - 600년 경으로, 바라문 문화의 제3기이다. 이 시대의 문헌은 새로운 의식을 지닌 사상가들이 숲 속에서 비의(秘義)를 노래한 내용의 아라냐카( ra yaka)와 그 중에서도 특히 철학적 사색이 더욱 체계화된 일단의 우파니샤드가 있다. 우파니샤드는 '가까이 앉는다'는 의미에서 나온 말이다. 스승과 제자가 가까이 앉아 서로 은밀하게 주고 받은 가르침을 모아 이룩한 성전이라는 뜻이다. 이 우파니샤드에서는 제사보다 지식을 더욱 고차원적인 해탈의 열쇠로 간주하였다. 의례와 제사 대신에 사색을 통한 지적(知的) 추구가 더욱 중시된 것이다. 따라서 우파니샤드의 사상가들은 우주의 질서와 그 이면(裡面)의 통일성에 관해서 사색하였고, 절대적 존재와 개체적 자아(自我)의 한계에 대하여 탐구하였다. 그리하여 브라흐마나 시대의 일원론적인 범신론(汎神論)은 이 시대에 이르러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우파니샤드는 세계의 다양성의 배후, 즉 모든 신들과 피조물들, 인간과 자연의 이면에 하나의 절대적 동일성인 최고의 브라흐만이 존재한다는 사상을 펼치고 있다. 브라흐만은 전우주이며,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이라고 일컬어진다. 이렇게 브라흐만을 우주와 동일시함으로써 우파니샤드는 모든 것 안에서 브라흐만을 보고 브라흐만 안에서 모든것을 본다. 인도인들은 모든 자연의 사물들 안에 브라흐만의 내재성(內在性)을 인정하는 한편, 동시에 창조된 세계를 뛰어 넘는 브라흐만의 초월성에 대해서도 성찰했다. 브라흐만은 세계 전체를 포괄하되 세계를 훨씬 초월하며, 또 그 자신의 일부분으로써 온 우주에 편재(遍在)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처럼 우주에 있어서 절대적 통일성의 원리가 통찰되는 가운데 그것은 인간 존재의 동일성으로 파악되기도 하였다. 즉 우주의 근원인 동시에 보편적 원리로서의 브라흐만과 인간 내면의 핵심인 아트만(Atman, 神我·個我)은 동일한 존재라는, 우파니샤드의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이 곧 그것이다. 아트만은 '호흡하다(at)'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말이다. 그것이 점차 생기(生氣)·신체(身體)를 의미하게 되고 나아가 자아·영혼을 의미하는 말로 발전하였 다. 그리고 마침내는 가장 종교적이며 철학적인 의미에서의 자기 본질이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 우파니샤드에 있어서, 자기 본질인 아트만은 동시에 우주 그 자체의 본질이다. 아트만은 만물에 내재하여 우주의 모든 존재를 지탱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우주의 근본이며 보편적인 원리인 브라흐만과 다른 것이 아니다. 이것이 범아일여(梵我一如)의 기본적 의미이다. 우파니샤드 사상가들은 이같은 보편적 자아와 개체적 자아가 동일하다는 존재의 통일성을 체득하기 위해 스승의 지도 아래 학습하거나 성찰하고 명상·요가 등의 수련을 병행하기도 하였다. 정통 바라문의 종교 및 사상은 이상과 같이 3기로 구분되는 오랜 세월동안에 걸쳐 전개되어 왔거니와, 불교는 이러한 사상과 종교적 수행법이 발전되어 가던 시대에 출현하여 '무아(無我)'를 주장하였다. 무아(無我)의 '아(我)'는 곧 아트만에 해당한다. 그러면 불교의 무아(無我)와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아(我)는 어떤 관계에 있으며 어떻게 다른 것일까. 이는 당시 종교 사상의 상황에 있어서 불교의 위치와 직결되는 문제이므로 제Ⅲ장 근본불교에서 다시 검토하기로 한다.
3. 사문(沙門)들의 출현
우파니샤드 시대에 있어서 심오한 철학적 사유와 높은 종교적 실천이 행해지는 가운데서도, 바라문의 의례와 제사는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사제자들에 의한 의례와 제사는 아직도 전통과 권위가 인정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상황의 변동은 이같은 종교 사상에도 큰 변화를 몰아왔다. 사람들은 그동안 만능으로 여겨왔던 제사의 한계를 깨닫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이를 넘어서는 보다 높은 세계를 발견하기 위해 다양한 사상적 노력을 기울이는 경향이더욱 현저해진 것이다. B.C 600 - 500년 경에 바라문의 사상에 맞서 새로운 우주·인생관을 제시하면서 자유로운 사상활동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대거 출현하고 있음은 이런 사정을 반증해준다. 이 새로운 사상가들을 사문(沙門, r mana)이라고 부른다. 붓다 역시 이같은 사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사문이란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며, '몸을 괴롭게 하는 사람'이라는 정도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는 말이다. 이들은 바라문의 법전(法典)에서 규정하고 있는 네 가지 생활 단계에 그대로 따르지 않았다. 네가지 생활 단계란, ① 스승 밑에서 학습하는 청년 시절의 범행기(梵行期) ② 가정에서 생활하며 가장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가주기(家住期) ③ 가정과 재산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숲 속에 들어가 은거(隱居)하는 임서기(林捿期) ④ 숲 속의 거처까지 버리고 완전히 무소유(無所有)로 걸식·편력의 생활에 들어가는 유행기(遊行期)의 4주기(四住期)를 말한다. 사문들은 이런 규정에 얽매이지 않고 편리한 시기에 출가(出家)하여 무리 지어 숲 속에 은거하거나 홀로 편력하였다. 또는 높은 종교적 경지를 얻고자 욕망을 억제하고 극도의 고행(苦行)을 실천하는 자들도 있었다. 사상과 관습에 있어서 매우 혁신적이었던 이들은 정통 바라문의 입장에서 보면 이단(異端)의 사상가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대체로 바라문 이외의 사상가들은 흔히 사문으로 불리웠다. 그런데 당시 바라문을 포함하여 이들 사문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주장하고 제시하는 사상은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였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62견(見)으로, 자이나교에서는 363견으로 분류하여 정리하고 있을 정도이다. 이는 불교나 자이나교의 입장에서 각각 이단적 견해라고 생각되는 것을 62종 또는 363종으로 열거한 것이다. 이러한 분류 방법은 기계적으로 맞추어 놓은 것도 포함하고 있어, 이를 그대로 당시 사상계의 실태라고 볼 수는 없다. 어쨌든 이런 설명을 통해 당시 사상계에 얼마나 많은 견해가 제시되고 있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다양한 사상의 내용이나 그 주장자에 관해서는 거의 밝혀져 있지 않다. 다만 사문들 가운데 몇 사람의 이름과 그들의 사상이 불교의 초기경전에 속하는 사문과경(沙門果經) 등에 나타나 있다. 이른바 육사외도설(六師外道說)이 그것이다. 여기서 외도설(外道說)이란 불교와는 '다른 길의 사상'이라는 뜻으로 쓰인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붓다와 같은 시대의 인물들로, 모두 특징 있는 견해를 표명한 자유 사상가들로서 유명하다.
'육사외도(六師外道)'의 견해를 간단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푸라나 캇사파(Purana Kassapa) - 도덕부정론(道德否定論) 당시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던 선악의 행위와 그 행위가 초래하게 될 미래의 과보(果報)를 모두 부정하였다. 살생·도둑질·간음·거짓말을 해도 악을 행한다고 할 수 없으며, 악의 과보도 생기지 않는다. 또 제사·베품·극기·진실한 말 등을 행해도 선행이라고 할 수 없으며, 그 과보 또한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체의 도덕 관념을 부정했던 그는 노예계급 출신이었다고 한다.
2) 파쿠다 캇챠야나(Pakuda Kacc yana) - 7요소설(七要素說) 인간 존재는 지(地)·수(水)·화(火)·풍(風)의 4 가지 원소와 고(苦)·락(樂)·생명(生命,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본다. 이 7요소(要素)는 실재(實在)하는 것으로서 불변이므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괴롭히거나 즐겁게 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는 고(苦)와 락(樂)까지도 단순한 느낌의 내용이 아니라 실재하는 요소로 이해하였으며, 따라서 인간의 생명(영혼) 또한 의지 작용이 불가능한 물질적 요소로 취급하였다.
3) 막칼리 고살라(Makkhali Gos la) - 숙명론(宿命論) 모든 존재의 구성 요소로서 지(地)·수(水)·화(火)·풍(風)·허공(虛空)·득(得)·실(失)·고(苦)·락(樂)·생(生)·사(死)·영혼(靈魂)의 12요소(要素)가 있다고 한다. 다른 요소들을 성립시키는 순수 공간으로서의 허공과 득(得)·실(失)·생(生)·사(死)·영혼(靈魂) 같은 추상적 관념까지를 실체시(實體視)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인간의 의지에 근거한 행위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업(業)에 의한 윤회전생(輪廻轉生)을 부정하는 등 일종의 결정론적(決定論的) 숙명론을 주장하였다.
4) 아지타 케사캄발린(Ajta - Kesakambalin) - 유물론(唯物論) 지·수·화·풍의 4가지 물질적 원소만이 참된 실재라고 인정하고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인간은 죽음과 함께 단멸(斷滅)하고 신체는 모두 4가지 원소로 환원된다. 내세와 같은 것도 있을 수 없고 선악에 대한 과보도 없으며 현세가 인생의 전부라 하였다. 그는 철저한 유물론자였으며 생의 가치면에서는 쾌락주의의 입장을 취했다.
5) 산자야 벨라티풋다(Sa jaya Bela hiputta) - 회의론(懷疑論) 진리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서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불가지론적(不可知論的) 입장에서,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관한 한 확정적인 대답은 주지 않았다. 그는 내세의 존재나 선악의 과보 등의 질문에 대해 언제나 애매한 대답을 하여 판단을 중지한 것이다. 이 때문에 그의 주장은 '뱀장어처럼 미끄러워 잡기 어려운 교설[抱鰻論]'로 일컬어진다. 붓다의 뛰어난 두 제자 사리풋다와 목갈라나는 본래 이 산자야의 제자였다.
6) 니간타 나타풋타(Niga tha N taputta) - 자이나교 자이나(Jaina)교의 개조(開祖) 마하비라(Mah v ra) 혹은 지나(Jina)를 불교에서는 니간타 나타풋타로 부른다. 그는 우선 산자야의 회의론을 극복하기 위해 상대주의적 인식론(相對主義的 認識論, Sy d - v da)을 수립한 다음, 이에 입각하여 이원론적(二元論的) 우주론을 제시하였다. 즉 모든 존재는 영혼(命, J va)과 비영혼(非命, aj va)의 2 부분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영혼이란 지수화풍(地水火風), 동식물, 인간 등 모든 존재에 내재(內在)하는 하나 하나의 생명을 실체시(實體視) 한 것이다. 비영혼은 영혼 이외의 일체를 말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법(法,dharma, 운동의 조건)·비법(非法, adharma, 정지의 조건)·허공( k a)·물질(pudgala)의 4 가지가 포함된다.
이것과 영혼을 합해 '5실체(五實體)'라 한다. 마하비라는 이같은 이론을 바탕으로 윤회하는 생존으로부터의 해탈(解脫)의 길을 가르쳤다. 업(業)을 비영혼 즉 물질로 보고, 이 업 물질(業物質)에 의해 영혼이 속박됨으로써 윤회가 되풀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해탈을 얻기 위해서는 고행을 실천할 것이 강조된다. 과거의 업을 소멸하는 한편 새로운 업의 유입을 방지하여 영혼을 정화하기 위해서는 육체(물질)에 고통을 주는 고행이 최상의 방법이라는 입장이다. 그러므로 자이나교는 고행을 비롯하여 감각의 억제, 정욕으로부터의 자유로움, 세상으로부터의 초연함, 무소유, 그리고 나체(裸體), 참회와 같은 수행이 강조된다. 이같은 고행주의 또한 그 이론적 근거로서 5실체설(五實體說)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지만, 사문들 가운데서도 해탈(解脫)사상을 말하기 시작한 것은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이상에서 6사(六師)를 중심으로 사문들의 대체적인 사상경향을 살펴 보았다. 정통 바라문의 사상과 함께 이들 사문들의 다양한 주장과 견해는 붓다 시대의 종교 사상이 상당한 수준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다시 이들 2 계통의 사상을 정리해 말하면, 그것은 정통 바라문의 전변설(轉變說,priama - vada)과 이에 대응하는 사문들의 적취설(積聚說, rambha - vada)로 요약할 수 있다. 즉 자아(自我)나 세계는 유일한 브라흐만(梵)에서 유출 전변했다고 보는 것이 전변설이다. 이에 대해 적취설은 그러한 유일의 절대자를 인정하지 않는 대신 개개의 요소를 불멸의 실재로 믿고, 그것들이 모여 인간과 세계 등 일체가 성립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2가지 사고 방식의 기초가 붓다 시대에 이미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또한 종교적 수행방법으로는 요가(yoga)와 선정(禪定)을 닦아 해탈을 실천하려는 수정주의(修定主義)와 고행을 통해 마음을 속박하고 있는 미혹의 힘을 끊고 해탈을 이루고자 하는 고행주의(苦行主義)의 2가지가 대표적인 것이었다. 반드시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이 같은 수행방법은 대체로 전자가 전변설에 입각한 것이라면 후자는 적취설에 바탕을 두고 있다. 붓다시대 인도의 종교 사상을 대체로 이상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지만, 앞서 말한 대로 이 시대에 정통적인 바라문 사상은 이미 그 빛을 상실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대신할 만한 새로운 종교 사상의 권위 또한 아직은 확립되어 있지 못하였다. 사문과 같은 자유로운 사상가들이 등장하여 다양한 견해와 교설을 주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같은 현실 속에서, 당시 사람들이 종교적 또는 사상적으로 심한 방황과 혼란을 겪었을리라는 것 또한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제2장 샤카무니 붓다 제2절 샤카무니의 생애
1. 탄생과 젊은 날들
붓다의 성은 고타마(Gotama)이고 본래의 이름은 싯다르타((Siddh rtha)이다. 붓다(Buddha)라는 말은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중국 사람들은 이를 '불타(佛陀)'로 적거나 '각자(覺者)'라고 번역하였고, 우리는 '부처님'이라고 부른다. 고오타마 싯다르타가 진리를 깨달은 이후부터 그는 붓다로 불리우게 되었다. 우리들이 흔히 사용하고 있는 샤카무니( kyamuni, 釋迦牟尼)라는 명칭은 '샤카족 출신의 성자(聖者, muni)'라는 의미이다. 그 래서 샤카무니 붓다라고 할 때는 '샤카족의 성자로서 붓다가 되신 분'정도의 뜻을 갖는다. 이 밖에도 붓다는 여러 가지 다른 명칭으로 불리우기도 한다. 전통적로는 여래십호(如來十號)라하여 10가지 이름이 있다. 여래(如來,Tathagata)-진리 그대로 세상에 오신 분, 정변지(正遍知, Samyaksambuddha)-우주 일체의 현상을 두루 깨달은 분, 세간해(世間解, Lokavit)-세상 일체의 일을 모두 아는 분, 천인사(天人師, Devamanu ya st )-하늘의 존재들과 사람들의 스승, 세존(世尊, Bhagavat)-온갖 공덕을 갖추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 등이 그것이다. 이같은 명칭들은 모두 붓다가 이룩한 깨달음 또는 그의 인격적인 위대함을 표현하고 있다. 붓다 샤카무니의 생애는 불전문학(佛傳文學)이라고 불리우는 일군의 현존 경전들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러한 경전들은 모두 붓다의 입멸(入滅)후 수 세기를 지나 작성되었으며 위대한 교조(敎祖)를 찬양할 목적으로 서술된 것들이어서, 과장과 비현실적인 표현들이 자주 나타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붓다의 전기를 기록한 사람들의 두터운 신앙심과 그들이 구사하는 풍부한 종교 문학적 상징성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럴 경우에도 그들이 초기 경전에 산재하는 단편적인 내용들을 원천 자료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이 붓다의 역사적인 생애를 이해하는데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붓다는 히말라야 기슭에 위치한 샤카족이 세운 왕국 카필라바스투(Kapilavastu) 왕국의 숫도다나(Suddhodana 淨飯王) 왕과 마야(Maya 摩耶) 왕비의 외 아들로 태어났다. 카필라바스투는 현재의 네팔 남쪽, 인도와 접경해 있는 타라이(Tarai) 분지의 틸라우라코트(Tilaurakot)로 추정되고 있는 곳이다. 샤카족은 농업에 종사하면서 주로 벼농사를 짓던 작은 부족이었고, 카필라바스투는 그 당시 인도에서 가장 강성한 나라였던 코살라(Kosala)의 부속 국가였다. 마야 왕비는 당시의 풍속에 따라 아기를 낳기 위해 친정인 콜리(Koli)성으로 가던 도중, 룸비니(Lumbini)라는 동산에서 싯다르타를 낳게 되었다. 불전문학의 전설에 의하면, 마야 왕비가 룸비니 동산에 이르러 휴식을 취하던 중 꽃이 만발한 무우수(無憂樹) 아래에 서서 나뭇 가지를 손으로 잡는 순간 아기가 오른쪽 옆구리로 태어났다고 한다. 이것이 싯다르타의 우협탄생(右脇誕生) 설화이다. 붓다의 탄생 연대에 대해서는 확실한 것은 말할 수가 없다. 북쪽으로 전해지는 문헌(북방불교 전승)에 의하면 붓다는 B.C 463년에 탄생하여 B.C 383년에 열반하신 것으로 되어 있으며, 남쪽으로 전해지는 문헌(남방불교 전승) 자료는 B.C 566년에 태어나고 B.C 486년에 입멸하신 것으로 되어 있다. 이 2 연대 사이에는 약 100년의 차이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남방불교 전승인 B.C 566 - 486년의 연대를 사용하고 있다. 이 연대 외에도 세계 불교인들이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연대가 있다. 이것은 1956년 네팔의 카트만두에서 열린 제4차 불교도 대회 때 정한 것이다. 즉 1956년이 붓다가 입멸하신지 2500년에 해당하는 남방불교의 전통에 근거하여 붓다의 연대를 B.C 624 - 544년으로 정하였다. 이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사용하고 있는 연대보다 58년이 더 많은 것이다. 또한 탄생날짜 역시 확실하게 알 수가 없다. 북방에서는 전통적으로 음력 4월8일을 붓다의 탄생일로 생각해오고 있다. 그러나 남방불교 전통에 의하면, 인도 달력으로 2월인 바이샤카(vai kha)월의 보름달이 되는 날이다. 이는 태양력으로 4월 또는 5월의 만월(滿月)일에 해당된다. 마야 왕비는 아기를 낳은 지 7일만에 세상을 떠났고, 동생인 마하 파자파티(Mah p japati - Gautami)가 양모가 되어 싯다르타를 키웠다. 비록 어머니를 일찍 잃기는 했지만 싯다르타는 한 나라의 왕자로서 온갖 것이 다 갖추어진 환경 속에서 자라났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봄·가을 그리고 여름과 겨울을 위한 궁전 등 '3시전(三時殿)'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만을 위해 만들어진 연못도 있었다고 한다. 의복도 당시에 가장 고급이었던 카시산 옷감으로 만들어 입었고, 먼지와 햇볕을 막기 위해 일산(日傘)을 든 시종을 항상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또한 그는 왕자로서 갖추어야 할 여러 가지 지식과 학문을 고루 교육 받았고 훌륭한 기예(技藝)들을 익혔다. 그리고 16세에 이웃 나라의 야소다라(Ya odhar )공주와 결혼하였다. 이와 같이 싯다르타는 온갖 호화로움과 극진한 보살핌 속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생활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싯다르타는 부족함이 없는 왕궁의 생활에 마음을 빼앗기기 보다는 인간이나 세계와 같은 보다 본질적인 문제들에 관해 깊은 사색에 잠기는 일이 많았다. 인생의 여러 가지 문제들 가운데서도 특히 그를 괴롭히는 것은 생·노·병·사와 같은 삶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들이었다. 아버지 숫도다나 왕과 양모 마하파자파티는 이런 왕자를 조심스럽게 지켜 보면서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싯다르타가 훌륭하게 자라나 장차 왕위를 잇고 카필라를 강성한 나라로 만들어 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그런 세속의 일 보다는 항상 근본적인 인간의 문제에 더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 때문에 그들은 혹시 왕자가 출가(出家)하여 수행자가 되지나 않을까 하고 더욱 염려하였다. 싯다르타를 서둘러 결 혼시킨 것도 실은 이같은 걱정과 염려에서였다.
2. 출가·구도·깨달음
부모와 주위 사람들의 염려와 보살핌 속에서도 인간 문제에 대한 싯다르타의 사색과 번민은 계속되었다. 그것은 결국 싯다르타 스스로 출가를 향해가는 도정이기도 했다. 왕궁의 호화로운 생활을 떨쳐 버리고 그가 출가의 결심을 하게 되는 장면을 불전문학 라리타비스타라(Laritavistara, 普曜經, 大方大莊嚴經)는 4문유관(四門遊觀)의 전설로써 그것을 묘사해 놓고 있다. 싯다르타는 카필라바스투의 동·남·서쪽 성문 밖으로 산책을 나갔다. 도중에 그는 각 성문 밖에서 몹시 쇠잔하고 추해진 노인과, 괴로움으로 신음하는 병자와, 슬픔의 장례 행렬을 차례로 목격한다. 여기서 늙고, 병들고, 죽는 인생의 괴로움의 문제를 세삼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다시 북쪽 성문 밖으로 나갔다가 나무 아래 단정히 앉아 수도하는 한 수행자를 만난다. 이 만남은 앞의 경우들과는 달리 그에게 큰 기쁨과 희망을 주었다. 그리하여 싯다르타는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도 출가 수행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사문유관을 사실 그대로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이는 곧 젊은 날 싯다르타의 생활모습과 번민의 한 단면을 상징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왕궁의 호화로운 생활도 싯다르타에게는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하고 있을 때, 아들 라훌라(Rahula)가 태어났다. 그는 이제 출가를 결행할 때가 왔다고 생각하였다. 드디어 어느 날 밤 싯다르타는 남 몰래 왕궁을 빠져나와 출가 구도(求道)의 길을 나섰다. 그 때 그의 나이는 29세였다. 싯다르타가 뒷날 진리를 깨달아 붓다가 된 다음, 그는 자신의 출가 동기를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내가 출가한 것은 병듦이 없고, 늙음이 없고, 죽음이 없고, 근심 걱정 번뇌가 없고, 더러움이 없는, 가장 안온한 행복의 삶(열반)을 얻기 위해서였다.([증아함] 권56 라마경);
이 세상에 만약 늙고, 병들고, 죽는 이 3가지가 없었다면 여래(如來, 붓다)는 세상에 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 ([잡아함] 권14, 346경)
사문유관의 도식적인 묘사나 이같은 붓다 자신의 술회는 다같이 싯다르타의 절실한 출가 동기가 무엇이었던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 그는 일찍부터 늙고 병들고 죽는 것에 대하여 생각했고, 그 필연적인 인생의 괴로움을 슬퍼하였으며, 불완전한 인간 세상의 모순을 괴로워했다. 그 끝에 마침내 그러한 것들을 모두 해결할 수 있는 참삶의 길을 찾아 왕궁을 버리고 출가를 단행했던 것이다. 그것은 진리의 길을 찾아 세속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던져버린, 참으로 '위대한 버림' 바로 그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사문(沙門), 즉 출가 구도자가 된 싯다르타에게 이제 중요한 것은 자신을 이끌어 줄 스승을 찾는 일이었다. 그 편력(遍歷)의 길에 나선 싯다르타가 맨 처음 만난 수행자는 바가바(Bhagava)라는 고행자였다. 그는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하늘에 태어나는 것을 목적으로 고행을 닦고 있었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우선 이들 고행자들의 목적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원하는 일 또한 생과 사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이 아니었기 때문 이다. 그래서 그들을 떠난 싯다르타는 다시 브라흐만(Brahman,梵天)과 해와 달과 불을 섬기는 사람들을 만난다. 여기서도 그는 역시 자신이 닦을 만한 수행이 아니라고 판단하게 된다. 이렇게 싯다르타는 구도의 편력은 계속되었다. 카필라바스투에서 동남쪽으로 약 1000리 거리에 위치한 바이샬리(Vais li)로 가서는 알라라 칼라마(Alara Kalama)를 만나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나 역시 그 가르침에 만족할 수 없어 길을 떠난 그는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 당시 가장 큰 나라였던 마가다(Magadha)국의 수도 라자그리하(Rajagriha, 王舍城)에 닿았다. 신흥의 도시 라자그리하는 당시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답게 수많은 사문들과 사상가들이 모여 드는 곳이기도 하였다. 싯다르타는 그곳에서 우드라카 라마푸트라(Udraka Ramaputra)라는 큰 스승을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다. 바이샬리에서 헤어진 알라라 칼라마와 함께 우드라카 라마푸트라는 당시 가장 명망 높은 수행자들이었다. 선정(禪定), 즉 정신통일에 의해서 정신적 작용이 완전히 정지되어 고요한 경지에 도달함으로써 해탈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 이들의 수행 목적이었다. 선정주의자(禪定主義者), 또는 수정주의자(修定主義者)라고도 불리우는 이들의 지도 아래, 싯다르타는 그들이 해탈의 경지라고 인정하는 최고 단계에까지 도달하였다. 그러나 이것 역시 모든 괴로움이 없는 완전한 경지는 아니었다. 정신통일이란 끊임없이 반복할 수밖에 없는 경지이며, 정신적 작용의 완전한 정지 또한 결국 죽음에 이르러야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수행의 목적과 방법을 혼동한 채 오로지 수행을 반복하고 있는 셈이었다. 이같은 모순을 알게된 싯다르타는 더 이상 수정주의자들의 가르침을 답습하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동안 스승으로 삼아왔던 우드라카 라마푸트라와도 작별하였다. 그는 전통적인 수행자들로부터는 더 이상 기대할 바가 없음을 깨닫고, 다시 라자그리하에서 남쪽으로 80㎞가량 떨어진 우루벨라(Uruvela) 마을의 네란자라(Neranjara, 泥連禪河)강 근처의 숲 속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고행림(苦行林)으로 불리우던 이곳은 현재의 보드가야(Bodhgaya) 동쪽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새로운 결심으로 맹렬한 고행을 시작했는데, 여기에는 그동안의 수행 중에 그를 따르던 5명의 수행자들도 함께 하였다. 이 때 새롭게 시작한 싯다르타의 고행은 하늘에 태어나기를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정신의 자유를 얻기 위한 고행으로서, 일차적으로는 육체를 조복(調伏)받는 일이었다. 그러나 극심한 고행으로도 그는 해탈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 자신 일찍이 왕궁의 생활에서 경험했던 온갖 즐거움과 쾌락이 인간에게 궁극적인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했던 것처럼, 고행 또한 그러하였다. 여기서 극단의 육체적인 고행이 무익함을 깨달은 싯다르타는 어느 날 네란자라 강물에 들어가 더러워진 몸을 씻었다. 그리고 때마침 근처를 지나던 우루벨라 촌의 수자타(Sujata)라는 처녀로부터 우유죽을 공양받고 기력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당시 관행으로 볼 때 고행자가 몸을 씻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일은 곧 고행의 포기를 의미하는 일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함께 도를 닦아온 5명의 수행자들은 싯다르타가 이제 수행을 포기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수행자로서는 이미 타락한 싯다르타의 곁을 떠나버렸다. 어떻든 정신 집중을 위한 수정(修定)에 이어 육체를 괴롭히는 고행(苦行)까지 버림으로써, 싯다르타는 이제 전통적인 수행방법을 모두 떠난 셈이 되었다. 수정주의나 고행주의는 당시 종교 철학 사상을 대표하는 전변설(轉 說)과 적취설(積聚說)을 그 이론적 근거로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이같은 사상이나 수행방법을 모두 버린 것이어서, 이제는 따로 구해야할 스승이 존재하지 않았다. 또 그에게 스승이 될만한 사람이 달리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이제야말로 스스로 구도의 길을 개척해 나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결국 그는 혼자서 네란자라 강을 건너, 서쪽 언덕 가까운 곳에 그늘이 무성한 한 핍발라(Pippala) 나무 밑에 자리를 잡았다. "도를 이루지 못하면 결코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굳게 결심하였다. 실로 오랫동안 방황하던 구도자 싯다르타는 이제 미로(迷路)에서 벗어나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메던 길을 혼자 개척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의 수행은 치열하고 철저하게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마침내 싯다르타는 진리를 깨달았다. 드디어 깨달은 사람, 즉 붓다(Buddha)가 된 것이다. 왕궁을 떠나 출가하여 구도 수행해온지 6년만이었고, 그의 나이 35세 때였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당시 인도의 종교사상은 우주의 근원이나 인간의 근본을 유일한 브라흐만에 있다고 보거나, 또는 다수의 물질적 요소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지금 싯다르타에 있어서는 그러한 외부 객관에 대한 비현실적 관찰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는 인간을 괴롭게하고 자유를 구속하는 것은 결코 외부의 어떤 것이 아니라 각자의 내심(內心)에 그 원인이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안으로 눈을 돌려, 그 무한한 자유와 무고안온(無苦安穩)의 행복을 자신의 마음에서 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는 생노병사에는 근본적인 원인이 있으며, 바로 그것의 결과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 원인은 다름 아닌 인간의 마음 깊숙히 깃들어 있는 무명(avidya), 즉 진리에 대한 무지(無知)와 그것 때문에 발생하게 되는 욕망이었다. 이것을 깨달은 싯다르타는 이 무명과 욕망으로부터 비롯한 인간의 모든 괴로움이 연기(緣起)하는 모습을 체계적으로 관찰하여, 마침내 그 무명과 욕망을 없앰으로써 무고안온(無苦安穩)의 열반(涅槃)을 증득(證得)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불전은 싯다르타의 이러한 일찍이 없었던 깨달음을 수하항마(樹下降魔)라는 설화를 통해 극적으로 묘사해 놓고 있다. 싯다르타가 핍발라 나무 아래서 마군(魔軍)을 항복 받음으로써 붓다가 되었다는 내용이다. 즉 마왕 파피야(Mara Papiya, 魔王 波洵)와 그의 부하들은 수행중인 싯다르타 앞에 나타나 온갖 위협과 유혹으로 그의 성도(成道)를 방해하였다. 그러나 그는 끝내 동요됨이 없었고 결국 마왕에게서 항복을 받아낸다. 여기서 마(魔)란 자기 내면에서 일어나는 심각한 정신적 갈등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싯다르타는 이처럼 자신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온갖 욕망과 회의와 불안과 같은 정신적 갈등과도 싸워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는 그것을 넘어서서 무상정등정각(Anuttara-samyak-sa bodhi 無上正等正覺), 즉 더없이 높고 바르고 참된 깨달음을 이룬 붓다가 된 것이다.
3. 최초의 설법과 교화 활동
위없는 깨달음을 얻은 뒤에도, 붓다는 자신이 깨달은 내용을 고요히 음미하며 계속 깊은 법열(法悅)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사람들은 끝없이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고통 속에서, 무엇이 행복이며 어떤 것이 괴로움인지 조차 모르고 살고 있는 것이 또한 현실이었다. 이에 붓다는 법열의 자리로부터 몸을 일으켰다.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세상 사람들을 구제해야 한다는 자비의 빛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실로 거룩한 붓다의 길, 불교는 여기서부터 비롯된다고 말할 수 있다. 당시 인도의 종교사상계 뿐만 아니라 인류의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여는 이와 같은 불교의 출발에 대해, 불전은 역시 설화적으로 그 광경을 표현해 놓고 있다. 브라흐만이 붓다 앞에 나와 경배를 올리고, 세상에 나아가 법을 설해 주실 것을 거듭 3 번이나 간곡하게 청했다는 것이다. 이른 바 범천권청(梵天勸請)의 이야기이다. 새로운 가르침을 펴기 위하여 붓다는 길을 나섰다. 그가 보드가야의 보리수 밑을 떠나 처음으로 향한 곳은 바라나시(V r asi) 근방의 녹야원(Mrgad ya, 鹿野苑)이었다. 그곳에는 앞서 싯다르타가 타락했다고 생각하고 그의 곁을 떠났던 다섯 수행자들이 도를 닦고 있었다. 붓다는 누구보다도 이들에게 법을 설하기 위해 보드가야로부터 600리나 되는 먼 길을 걸어 그곳으로 간 것이다. 다섯 수행자는 어느 날 싯다르타가 자기네들을 향해 오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였다. 그가 성도(成道)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그들은, '수행을 포기하고 타락한' 싯다르타를 아는 체하지도 말고 맞아 주지도 않기로 서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붓다가 점점 가까이 이르자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함께 일어나 자리를 권하였다고 한다. 진리를 깨달은 이의 그 빛나는 얼굴과 자신에 찬 걸음걸이, 형언하기 어려운 위엄과 자비의 힘 앞에 그들은 압도 당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붓다는 이들에게 고와 락의 양 극단을 떠난 중도(中道)의 길과, 고(苦)·집(集)·멸(滅)·도(道)의 사성제(四聖諦) 등에 대한 가르침을 폈다. 자상하게 반복하여 법을 설하고, 함께 명상하는 가운데 여러 날이 지났다. 그러던 중 5명의 수행자 가운데 카운디냐( jn ta Kau dinya, 阿若 陳如)가 가장 먼저 붓다의 가르침을 깨달았다. 이어 다른 4명의 수행자들도 차례로 그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붓다로부터 가르침을 듣고 깨달은 이들 다섯 수행자는 붓다의 최초 제자들이 되었다.녹야원에서 베풀어진 최초의 가르침은 흔히 '초전법륜(初轉法輪)'으로 불리운다. '처음으로 법의 수레바퀴를 굴렸다'는 뜻이다. 여기서 말하는 '법'이란 '진리'를 가리키는 것으로, 붓다의 이 첫 설법은 불교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불교의 구체적인 출발이 이 초전법륜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즉 초전법륜을 통해 불(Buddha, 佛, 가르침을 연 붓다)·법(Dharma, 法, 붓다가 발견한 진리)·승(Sa gha, 僧, 불법을 받들고 실천하는 사람들 또는 그 모임)의 교단 구성요소가 모두 갖추어진 것이다. 이 3가지 요소는 교단 구성의 핵심이기 때문에 '3가지 보배' 즉 '3보(三寶)'라고 부른다. 다섯명의 수행자들이 붓다에게 귀의하여 제자가 된 직후, 바라나시의 한 장자의 아들로서 인생을 비관하고 번민하던 야사(Yasa)가 설법을 듣고 붓다 밑으로 출가하였다. 뒤 따라 그의 부모와 아내도 붓다에게 귀의함으로써 이들은 불교교단 최초의 재가(在家) 신자가 되었다. 즉 출가 제자인 비구(Bhiku, 比丘)에 이어 남자 신도인 우파사카(Up saka, 優婆塞), 여자 신도인 우파시카(Upasika, 優婆夷)가 된 것이다. 또한 야사의 친구 4명과 다른 친구들 50명도 감화를 받고 그를 따라 출가하여 붓다의 제자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60명의 출가 제자를 거느리게 된 붓다는, 이제 진리를 세상에 널리 전하기 위하여 제자들에게 전도의 길을 떠나도록 권하였다.비구들이여, 자 전도를 떠나거라.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기고, 모든 사람들[人天]의 이익과 행복과 안락을 위하여. 그리고 두 사람이 한 길을 가지마라. 비구들아,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며, 조리와 표현을 갖춘 법(法=진리)을 설하여라. 또 원만 무결하고 청정한 범행(梵行)을 설하여라..... 비구들아, 나도 또한 법을 설하기 위해 우루벨라(Uruvela)의 세나니가마(將軍村)로 가리라.(SN. 係蹄; 잡아함, 繩索經)
초기 경전에서 볼 수 있는 이와같은 전도에 관한 말씀은 확실히 붓다의 '전도선언(傳道宣言)'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제자들에게 전도의 길을 떠나도록 한 붓다는 그 자신도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지난 날의 수행 장소였던 우루벨라로 되돌아 갔다. 그곳에는 불을 섬기는 사화외도(事火外道)로서 당시 마가다국 빔비사라(Bimbis ra)왕의 존경을 받고 있던 카샤파(Ka yapa) 3형제와, 그들이 거느린 1000명의 수행자들이 있었다. 붓다는 그들에게 법을 설하여 모두 제자로 삼았다. 그런 뒤 다시 라자그리하로 가서 빔비사라왕을 귀의시켜 재가 제자로 만들었다. 왕은 붓다와 그의 비구 제자들을 위하여 라자그리하 근방에 있던 죽림 동산에 절을 지어 붓다에게 기증했다. 이것이 불교 교단 최초의 절인 죽림정사(竹林精舍)이다. 이로부터 불교는 왕사성을 중심으로 하여 그 교세가 크게 확장되어 갔다. 그 중에서도 이곳에서 훌륭한 제자들을 얻게 된 것은 불교 교단의 가장 큰 수확이었다. 수많은 제자들 중에서도 훌륭한 제자 열 사람을 10대 제자라 하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인물은 사리푸트라(S riputra, 舍利弗)와 마우드갈랴야나(Maudgalayana, 目連) 그리고 마하카샤파(Mah kassapa, 大迦葉)라고 할 수 있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죽림정사시절에 붓다의 제자가 되었다. 특히 사리푸트라와 마우드갈랴야나는 당시 6사 외도의 한 사람인 산자야(Sa jaya)의 제자로서 두 사람은 어려서부터 친한 친구 사이였다. 이들은 매우 명석하고 학문과 식견이 뛰어나 스승의 학설(회의론)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사리푸타가 어느 날 붓다의 제자 아쉬바짓(Asvajit, 馬勝)으로부터 "이 세상에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 이루어 졌으므로 절대적인 것이 없다"는 붓다의 가르침 일부를 전해듣고 크게 기뻐하여 친구 마우드갈랴야나와 함께 스승 산자야의 제자 250명을 데리고 붓다에게로 가서 제자가 되었다. 분별력과 이해력이 누구보다도 뛰어나 불교의 진리를 간접으로 한마디만 듣고도 크게 깨달을 수 있었던 사리푸트라는 붓다의 제자 중에서도 지혜가 제일이며 그 친구 마우드갈라야나는 신통(神通)이 제일이었다. 그들이 붓다를 도와서 불교의 신흥 교단에 기여한 바는 매우 컸었다. 이어 붓다는 고향 카필라바스투를 방문하였다. 이때 부왕(父王)을 비롯한 많은 친척과 그곳 사람들을 교화하고, 그의 이복동생인 난다(Nanda)와 아들 라훌라(R hula)를 출가시켰다. 뿐만 아니라 아난다(Ananda, 阿難) 데바닷다(Devadatta) 아누룻다(Anurudha)등 사촌 동생들과 적지 않은 샤카족 사람들이 출가하여 붓다의 제자가 되었다. 한편 이 보다 뒷 날의 일이지만, 여성들의 출가도 허용되었다. 붓다를 양육했던 이모 마하파자파티와 부인 야소다라를 비롯한 많은 샤카족 여성들이 출가한 것이다. 이는 곧 비구니(Bhik uni) 승단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붓다의 재가 신도들 가운데 단연 손꼽힐만한 사람은 쉬라바스티( r vasti, 舍衛城)의 수닷타(Sudatta, 須達多) 장자였다. 그의 귀의는 붓다의 활동 범위를 넓히고 서북 쪽으로 확대시키는데 절대적인 기여를 했다. 대부호였던 그는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사람들에게 의복과 음식 등 많은 것을 제공했기 때문에 급고독장자(An thapindika, 給孤獨長者)라고도 불리웠다. 장자는 라자그리하에서 붓다를 만나 귀의한 뒤, 쉬라바스티로 돌아가 제타(Jeta)왕자 소유의 동산인 제타바나(Jetavana, 祇園)를 구입하여 그 곳에다 정사를 세워 승단에 기증했다. 이것이 기원정사(祇園精舍)로서, 죽림정사와 함께 초기 불교교단의 2대 근거지가 되었다. 이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 여러 계통의 종교인들과 국왕, 또는 평민이나 천민을 가릴 것 없이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붓다에게 귀의해서 제자로서 또는 재가 신도로서 그의 가르침을 따르고 실천했다. 그의 교화기간도, 녹야원의 첫 설법을 시작으로해서 쿠시나가라에서 열반에 들 때까지 45년이라는 긴 세월이었다. 붓다의 가르침은 빠른 속도로 간지스강 중류지방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전파되어 나갔다. 초기 경전에 나오는 지명으로 붓다의 교화활동 반경을 추정해보면, 북쪽으로는 카필라바스투, 남쪽으로는 보드가야, 동쪽으로는 앙가(A ga)국의 참파((Campa), 서쪽으로는 카우샴비(Kau mbi)에 이르는, 간지스강 중류의 동서 약550㎞ 남북 약 350㎞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4. 영원한 인류의 스승
붓다는 우주와 인생의 보편타당한 진리를 가장 바르고 참되게 깨달은 정각자(正覺者)이며, 모자람 없는 인격을 갖춘 위대한 인간의 교사이기도 하였다. 그는 자신이 깨달은 진리와 참 삶의 길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일깨우기 위해 여러 가지 교화방법을 사용하였다. 붓다의 가르침의 특성은 다양한 교화 방법에 있다고도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은 크게 위의교화(威儀敎化)와 설법교화(說法敎化)의 2가지로 구분할 수가 있다. 위의교화란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상대방에게 감화를 주고 마음을 일깨워주는 방법이다. 녹야원에서 5 명의 수행자들을 처음 만났을 때 붓다는 한 마디 말이 없이도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또 칼을 들고 달려드는 살인자 앙굴리말라(A gulim la)와 아자타사트루(Aj tasatru)왕이 붓다를 시기하여 풀어 놓은 술에 취한 코끼리를 굴복시킨이야기 등이 그 좋은 예이다. 이에 비해 설법교화는 언설(言說)에 의한 것으로 가장 보편적인 교화방법이었다. 그런데 붓다의 설법 방식은 매우 다양하고 독특한 점이 많다. 체계적 논리적으로 진리를 설하는가 하면, 노래의 형식인 게송(偈頌)으로서 그것을 다시 요약해 말하기도 하고, 때로는 비유나 인연담(因緣談)으로 사람들을 교화하기도 했다. 여러 형식의 문답을 통한 대화도 붓다가 즐겨 사용한 방법중의 하나이다. 이것은 주로 제자들을 상대로 하거나 또는 다른 종교인들과의 사이에서 행해졌다. 이밖에 위의교화와는 또 달리, 침묵 그 자체로써 상대방에게 하나의 대답을 주는 일도 있었다. 붓다의 이와 같은 여러 가지 교화 방법과 가르침에 의해, 불교의 교세는 빠르게 확대되어 갔다. 당시 인도의 종교 사상계에서 볼 때 붓다는 한 사람의 사문(沙門)에 불과했다. 그런 붓다의 가르침이 계층에 구별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화를 끼치면서 급속하게 번져 나간 것이다. 이에 위협을 느낀 기성 종교인들은 붓다와 그의 교단을 질시하고 음해를 가해왔다. 바라문들이 여인을 시켜 임신을 한 것처럼 꾸며 붓다의 아이를 가졌다고 사람들에게 외 치게하여 망신을 주고자 하는가 하면, 탕녀(蕩女)를 죽여 묻어 놓고는 붓다의 교단에서 한 짓이라고 모함하기도 하였다. 갖가지 방법의 비방과 모함이 소용없자 심지어는 음식에 독약을 넣어 붓다를 살해하려고까지 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오히려 붓다를 더 유명하게 만들었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가르침에 더욱 더 귀 기울이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붓다의 가르침은 인간의 근본적인 괴로움을 해결하게 하는 진리의 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인간의 현실생활을 보다 진실하고 이익되게 하는 것이었으며, 행복의 삶을 이루게 하는 가르침이기도 했다. 붓다는 외도(外道)의 잘못된 가르침에 빠져 살인을 저지르던 앙굴리말라를 구제한 일도 있었고, 인생을 고민하는 젊은이에게 삶의 진실을 일깨워주고, 허영과 교만에 찬 여성으로 하여금 참된 길을 걷게도 하였다. 나라를 다스리는 국왕에게는 정법(正法)에 의한 선정(善政)을 설하는가 하면, 이웃 나라 사이의 전쟁을 미리 막아 평화로운 국교를 유지케 한 일도 있었다. 이런 가르침과 교화로,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어디서나 환영받았다. 그러나 붓다도 그 말년에는 몇가지 불행한 일들을 겪어야 했다. 사촌동생인 데바닷타(Devadatta)가 교단의 분열을 꾀하였고, 몇 차례나 붓다의 살해를 기도하기까지 하였다. 또 코살라의 프라세나지트 왕의 아들 비두다바(Vidudabha)가 즉위하자, 그는 왕자 시절에 샤카족에게서 받았던 수모를 갚기 위해 카필라바스투를 침공하여 샤카족을 멸망시켜 버리고 말았다. 붓다의 아들 라훌라, 그리고 두 큰 제자 사리푸트라와 목갈라나가 먼제 세상을 떠난 것도 붓다에게는 커다란 아픔이 되었다. 붓다는 80세를 끝으로 45년간의 긴 교화 활동의 막을 내렸다. 그는 충실한 시자(侍者)였던 사촌동생 아난다와 함께 라자그리하의 영취산(靈鷲山)을 뒤로하고 마지막 전도여행 길을 떠났다. 도중 바이샬리에서 우안거(雨安居)를 보내면서 심한 병에 걸렸다. 병이 위독해지자 그는 3개월 후에 열반(Nirvana, 涅槃)에 들 것을 아난다에게 예고하였다.그 후 건강이 다소 회복되어 다시 여행을 계속하던 붓다는 파바(P v )라는 마을에서 대장장이 아들 춘다(Cunda)로부터 음식 공양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이 탈이 되어 심한 식중독을 앓게 되자, 붓다는 쿠시나가라(Ku inagara) 변두리의 사라나무 숲으로 들어가 2 그루의 큰 사라나무 사이에 자리를 펴고 누웠다. 이곳에서 붓다는 소식을 듣고 모여 든 제자들과 신도들에게 마지막으로 그의 가르침에 대해 질문할 것이 있으면 묻도록 하였다. 대중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만 흘렀다. 이에 붓다는 아난다를 비롯한 여러 제자들에게 마지막 유훈을 남겼다.
자기 자신에게 귀의하고 법에 귀의하며 남에게 귀의하지 말라. 자기 스스로를 광명으로 하여 법을 광명으로 삼아 남을 광명으로 삼지 말라.<대반열반경> 태어나고 시작된 모든 것을 반드시 멸하고 끝나는 법이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힘써 해탈을 구하라.<대반열반경>이렇게 최후의 가르침을 남긴 뒤에, 붓다는 북쪽으로 머리를 두고 서쪽을 향해 누워 고요히 열반에 들었다. 이를 흔히 입멸(入滅)라고도 표현한다. 이 것은 붓다가 80세되는 해 바이샤카(Vaisaka)달의 보름날(滿月日) 밤이었다. 붓다가 열반에 들자 제자들과 신도들은 붓다의 유해(遺骸)를 화장했다. 붓다의 몸에서는 많은 사리(Sarira, 舍利)가 나왔다. 장례에는 여덟나라의 왕들도 참석했는데, 이들이 서로 사리를 차지하려는 바람에 자칫 분쟁이 일어날 뻔햇다. 다행히 한 바라문의 중재로 사리는 8 몫으로 똑같이 나누어졌다. 사리를 담았던 그릇과 유해를 태운 재를 얻어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각자 자기 나라로 가지고 돌아가서 탑을 세워 모셨다. 이것이 불탑 (佛塔)의 효시로서, 붓다가 열반에 든 다음 불교도들은 이 탑을 그들의 신앙대상으로 삼았다. 한편 붓다가 열반에 든 다음 그의 제자들이 가장 먼저 해야 했던 일은 붓다가 남긴 가르침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붓다의 가르침이 잊혀져 버리기 전에 그것을 모아 확정해 두는 일이 무엇보다도 필요하였고, 또한 붓다가 없는 승단의 기강이 헤이해 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이를 서둘러야 했다. 이와 같이 붓다의 가르침을 정리하는 것을 결집(結集)이라고 말하는데, 당시 이런 작업은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함께 구송(口頌)해서 했기 때문에 합송(合頌, Samg ti)이라고도 부른다. 불전의 결집은 역사상 여러차례 되풀이 되었다. 그 가운데 제 1회 결집은 붓다가 열반에 든 후 맞이하게 된 첫 우기(雨期)의 안거(安居) 때 라자그리하 부근의 바이바라산 중턱의 칠엽굴(七葉窟)에서 행해졌다. 결집을 위해 덕이 높은 비구 제자 5백명이 선출되었으며 상수제자(上首弟子) 마하카샤파가 총 책임자가 되어 모임을 주관하였다. 이 첫 결집에서 법(法) 즉 경(經,Sutra)의 암송자로 아난다가, 그리고 율(律,Vinaya)의 암송을 위해서는 우팔리 (Upali)가 뽑혔다. 아난다는 붓다의 시자(侍者)로서 가장 오랫동안 붓다를 모시고 있었으므로 그의 가르침을 누구보다도 많이 들어 알고 있었다. 또 우팔리는 붓다가 계(戒)를 설할 때마다 붓다를 돕기 위해 그의 곁에 있었으므로 계율에 있어서는 교단 내에 제일인자로 꼽혔었다. 이 2 제자들이 붓다의 가르침을 들은 대로 기억해내어 외우면 거기에 참석했던 모든 비구들이 그 진위를 토론하고 하나씩 정리해 나갔다. 그런 다음 목소리를 함께하여 합송하면서 그들의 기억 속에 그것을 간직해 갔다. 붓다의 가르침, 즉 오늘에 남겨진 불교의 경과 율은 이렇게해서 편집되어진 것이다. 붓다는 2500여년 전에 세상을 살다 가신 분이다. 그러나 생애를 통해 보았듯이, 그의 구도(求道)와 성도(成道) 그리고 교화(敎化)와 입멸(入滅)의 과정은 참으로 위대한 일생이었다. 그는 당시 모든 사람들에게 잊을 수 없는 감명과 깨달음을 주었다. 또한 오늘에 와서도 붓다는 여전히 헤아릴 수 없는 정신적 깊이와 도덕적 위대성을 지닌 지혜와 자비의 인물로 이 시대의 사람들 앞에 다가온다. 붓다는 모든 인류의 영원한 스승인 것이다.
근본불교(根本佛敎)
제1절 붓다가 발견한 진리
1. 근본불교
근본 불교란 붓다가 가르침을 처음으로 펴기 시작한 이후부터 불멸후 100년경에 있었던 최초의 교단 분열 이전까지의 불교를 말한다. 다른 이름으로는 원시불교, 초기불교, 또는 고대불교라고도 부른다. 이 기간의 불교는 붓다가 직접 가르친 불교이고, 또한 붓다의 제자들이 그들의 스승으로 부터 받은 가르침을 자신들의 제자들에게 그대로 전한 불교이다. 아직 교단이 분열되기 전이었으므로 붓다의 가르침은 다른 주장 없이 대체로 그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붓다의 탄생연대를 기원전 566년으로 보면, 붓다가 35세에 도를 이루어 처음으로 가르치기 시작했으므로 불교가 시작된 것은 기원전 531(=566-35)년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붓다가 입멸(入滅)한 것은 기원전 486년이고, 교단의 첫 분열은 그로부터 약 100년 뒤인 386년경에 일어났다. 따라서 근본 불교란 대략 기원전 531년에서 386년까지의 불교라고 할 수 있다. 붓다 자신은 아무것도 글로 쓰지는 않았다. 그의 모든 가르침은 '말'로써 베풀어 졌다. 그 직계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붓다의 가르침을 한 곳에 모아서 경전의 형태로 정리한 것은 붓다가 입멸한 직후였지만 문자로써 한 것이 아니고 말로써 했다. 붓다가 열반한 바로 그해 안거(安居)때, 제자들이 한 곳에 모여 스승에게서 들었던 가르침들을 기억해 내어 서로 확인한 뒤 암송해서 머리 속에 정리했다. 이것이 제1차 결집(結集: samgiti)이다. 이 결집에서 편집된 경전(經典)은 붓다가 행한 45년간의 가르침이 모두 망라된 것은 아니었다. 붓다의 수많은 가르침 가운데서 결집에 참석했던 제자들이 기억해 낼 수 있었던 것만이었고, 또한 출가 수행자들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던 내용들이었다. 재가 신도들에게 베풀었던 붓다의 수많은 가르침은 대부분 제외되었다. 이렇게 결집된 붓다의 가르침은 먼저 직계 제자들의 기억 속에 간직되었다가 다시 다른 사람들의 기억 속으로 전달되면서 수 백년간 계승되어 내려왔다. 이 첫 결집이 역사적인 사실이었다 해도 그 때 만들어진 경전에 대해서 우리는 거의 아는 바가 없다. 분명한 것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경전들은 그 첫 결집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첫 결집이 있은지 약 100년후 다시 결집이 행해졌는데 이것이 제2차 결집이다. 그 이후에도 몇 번의 결집이 더 있었다. 초기의 경전은 모두 제자들의 기억에서 기억으로 전래되었기 때문에 세월과 더불어 잘못 전해지기도 하고, 그 자신들의 해석이 보태지기도 하면서 내용이 변하는 일도 있었다. 그래서 그것을 바로 잡아 경전의 원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결집이 필요했다. 붓다의 가르침이 문자로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1세기 후반부터 였다. 그러나 문자로 된 최초의 경전은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그 내용이 어떤 것이었는지 알 수 없다. 현재 우리에게 전승되고 있는 가장 오래된 경전은 여러 가지 사실로 미루어 보아 최초의 문자 결집때 만들어진 경전과 동일한 내용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이와 같은 사정이므로 현재의 자료로서 붓다가 가르친 내용을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근본불교를 말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인가. 그렇다고는 할 수없다. 최초에 만들어진 경전과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경전사이에는 그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가 있겠지만, 그러나 그 핵심은 동일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경전이 오랜 세월동안 변천하면서 성립되었다고는 해도 현재의 경전은 최초의 경전을 바탕으로 해서 이루어져 온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오래된 경전, 특히 아함경(阿含經,Agama) 에서 볼 수 있는 중심교리들은 붓다가 직접 가르쳤던 내용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초기 경전에 나오고 있는 여러 가지 교리들 가운데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붓다의 깨달음의 내용인 연기법, 그리고 연기법의 응용내지 실천 이론들인 12연기, 4성제, 오온-무아, 3법인, 윤회와 업등이라고 할 수 있다.
제2절 붓다가 발견한 진리 1. 연기법(緣起法) 경전에서는 붓다가 발견한 진리를 '법'(法) 이라 하고 있다. "붓다는 법을 깨달았다.", 또는 "바른 법(正法)을 성취했다"라고 말하고 있다. '법'이란 산스크리트어 Dharma[達磨]를 번역한 말이다. '다르마'는 "유지(維持)하다, 보전(保全)하다"라는 동사 'DHR'를 어근으로 한 명사로서 규범(規範),의무, 사회질서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주원리(宇宙原理), 보편적 진리(普遍的眞理)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붓다는 법(法)을 깨달았다. 정법(正法)을 성취했다."라는 말은 현대적인 표현으로 "붓다는 진리를 발견했다. 진리를 이해했다."라는 말과 같다. 붓다가 발견한 '법'(法)의 내용을 알 수 있는 자료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는 아슈바지트(Asvajit :阿濕毘)비구와 뒷날 붓다의 제일 제자[上首弟子]가 된 사리푸트라(Sariputra:舍利弗) 사이에 있었던 대화이다. 이들 두 사람의 만남은 고타마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이루어 붓다가 된지 얼마 되지 않은 때의 일이었다. 사리푸트라는 라자그리하(Rajagrha:王舍城) 근방에서 산자야(Sanjaya)라는 유명한 스승 밑에서 수행하고 있었다. 그는 어느 날 아침 탁발하러 나온 아슈바지트 비구(比丘)를 만나게 되었다.아슈바지트는 붓다가 도(道)를 이룬 뒤 처음으로 제자가 된 5명의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사리푸트라는 그 비구의 수행자다운 모습과 행동에 감동을 받고 가까이 가서, "그대는 누구이며, 스승의 이름은 무엇이며,어떤 진리[法]를 배웠소"라고 물었다.
아슈바지트는 "나는 나이가 어리고 집을 떠난지도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이치를 잘 설명할 수 없으니 이제 간략히 요점만을 말하겠소."라고 하면서, 붓다로부터 받았던 가르침에 대해 말해 주었다. 그때 아슈바지트가 사리푸트라에게 설명해준 내용은 짤막한 한 수의 시(詩)로 전해지고 있다. 모든 것은 원인에서 생긴다.(諸法從緣起) 부처님은 그 원인을 설하셨다(如來說是因) 모든 것은 원인에 따라 소멸한다(彼法因緣盡)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是大沙門說) 이 시에서 말하고 있는 붓다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정리하면,"모든 존재[諸法]는 여러 가지 원인에 의해서 생기게 되고, 그 원인들이 소멸되면 존재도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 시(詩)는 일반적으로 '연기법송'(緣起法頌)이라 부른다. 왜냐하면 그 내용이 연기법(緣起法)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리푸트라는 아슈바지트로 부터 이 가르침을 듣고 크게 깨닫게 되었다.그 때까지 그 어느 누구에게서도 들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내용이었다. 그는 곧 그의 친구 마우드갈랴야나(Maudgalyayana:目 連)와 함께 스승 산자야를 떠나 붓다의 제자가 되었다. 중아함(中阿含)의 상적유경(象跡喩經)에서는 붓다가 깨달아 가르친 진리가 '연기법'(緣起法)이라는 것을 좀 더 분명하게 전하고 있다. 그것을 사리푸트라가 "여러분, 부처님[世尊]께서는 또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일 연기(緣起)를 보면 법(法)을 보고, 법을 보면 연기를 본다.'" 라고 비구들에게 가르친 것에서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본다'라는 것은 '이해한다'라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연기법을 이해하는 사람은 법(法)을 이해하고, 법을 이해하 는 사람은 연기법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다른 곳에서는 붓다 자신이 비구들에게 "(그대들이) 만약 연기를 보면 법을 보는 것이고, 바르게 법을 보면 나[붓다]를 보는 것이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렇다면 연기법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연기(緣起)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 '프라티탸사뭇파다'(pratityasamutpada)를 번역한 것이다. 이 것은 'pratitya'와 'samutpada'라는 2 개의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 'pratitya'는 '...때문에[緣]','...에 의해서' 또는 '말미암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samutpada'는 '태어남', '형성(形成)', '생김[起]'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연기란 '...때문에 태어 나는 것', '...을 말미암아 생기는 것' 이라는 말임을 알 수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모든 존재는 그것을 성립시키는 여러 가지 "원인이나 조건 때문에 생기는 것"이고, "원인이나 조건을 말미암아서 형성되는 것"이라는 것이다.경전에서는 이 연기의 원리를 좀 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잡아함 335)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此有故 彼有), 이것이 생기기 때문에 저것이 생긴다(此起故 彼起).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此無故 彼無), 이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저것이 사라진다(此滅故 彼滅). 여기에서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와 "이것이 생기기 때문에 저것이 생긴다."라는 구절로써 존재의 발생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다"와 "이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저것이 사라진다"라는 구절로서 존재의 소멸을 설명하고 있다. 모든 존재는 그것을 형성시키는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만이, 그리고 상호관계에 의해서 만이 존재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한다는 것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결국 연기법이란 존재의 '관계성'(關係性)을 말하는 것이다. 연기법을 경전의 다른 곳에서는 '상의성'(相依性)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있다. 붓다는 '연(緣)'이라는 경전에서 연기를 설명하면서 "비구들이여, 연기란 무엇인가.....그것은 상의성이다. 나는 이것을 깨닫고 이것을 이해하다."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마하코티카(Mahakottika)비구는 이 상의성에 대해 사리푸트라에게 갈대 단의 비유를 가지고 설명하고 있다. "비유하면 3개의 갈대가 아무 것도 없는 땅[空地]위에 서려고 할 때 서로 의지해야 설 수 있는 것과 같다. 만일 그 가운데 1개를 제거해 버리면 2 개의 갈대는 서지 못하고, 만일 그 가운데서 2개의 갈대를 제거해 버리면 나머지 1개도 역시 서지 못한다. 그 3개의 갈대는 서로 의지[相依]해야 설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좀더 부연해서 설명하면 A, B, C라는 3 요소가 모여 어떤 존재를 이루고 있을 경우 이들 3 요소는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인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A가 원인이 될 때는 B와 C는 A의 조건이 되고, B가 원인이 될 때는 A와 C는 B의 조건이 된다. 역시 C가 원인이 될 때는 A와 B는 C의 조건이 된다. 경전에서 들고 있는 비유에서처럼 A,B,C라는 3개의 갈대 가운데서 어느 한 갈대가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다른 2개의 갈대가 있기 때문이다, 즉 "이 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 인 것이다. 3개의 갈대 가운데서 1개의 갈대라도 없어지면 다른 2개의 갈대도 서 있을 수 없게 된다. 즉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도 없다"는 것이 된다. 연기법이란 이처럼 모든 존재는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관계를 가지므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고, 그 관계가 깨어질 때 존재도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연기법을 존재의 '관계성의 법칙(關係性法則)', 또는 '상의성의 법칙(相依性法則)'이라고 말 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것은 바로 존재의 보편적인 법칙이고 그 이법(理法)이다.연기의 원리에 의하면 어떠한 존재도 우연히 생겨났거나 또는 혼자서 존재하는 것은 없다. 모든 존재는 그 존재를 성립시키는 여러 가지 원인이나 조건에 의해서 생겨나게 된다. 서로는 서로에게 원인이 되기도 하고 조건이 되기도 하면서 함께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다르게 말하면 존재를 성립시키는 원인이나 조건이 변하거나 없어질 때 존재 또한 변하거나 없어져 버린다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전적으로 상대적이고 상호의존적이다. 그것은 공간적으로도, 그리고 시간적으로도 서로 관계를 가짐으로서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는 홀로 존재하는 것도 있을 수 없고, 영원한 것도, 그리고 절대적인 것도 있을 수 없다. 여기에서 한 가지 생각해야 할 점은 연기법을 때로는 인과법칙(因果法則), 즉 '원인과 결과의 법칙'처럼 말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연기법은 '인과법칙'이라고 하기보다는 '상의성의 법칙'으로 보아야 더 정확 할 것이다. 만약 붓다가 발견한 진리가 인과법칙이었다고 한다면 붓다는 인과법칙을 발견한 최초의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고, 불교의 진리가 독창적인 것이 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과법칙은 붓다 이전에 이미 다른 종교와 사상에서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연기법을 설명할 때 가장 기초가 되고 있는,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 라는 말은, '이것'이 원인이 되어서 그 결과로서 '저것'이 있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것'과 '저것'은 동시에 서로를 존재하게 하는 필수적인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저것이 사라진다."라는 말도, '이것'이 사라지는 결과로서 '저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이것'과 '저것'은 동시에 사라지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인과(因果)의 법칙에서는 '이것'이 원인이 되어서, 그 결과로서 '저것'이 존재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과 '저것'은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 예를 들면 꽃과 열매는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 꽃이 원인이 되고 그 결과로서 열매가 있게 된다. 이것은 동시성(同時性)을 말하고 있는 연기법과는 다른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연기법에서 인과적(因果的)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어떤 사물이 존재하는 것은 역시 원인과 결과라는 관계에 의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 인과성(因果性)은 후기불교에서 많은 발전을 보게 되고, 그것을 설명하는 다양한 교리들이 나오게 된다. 그래서 연기법이 '상의성의 법칙'이라기 보다는 '원인결과의 법칙'처럼 이해되어져서, 이 2 가지 개념을 명확하게 구별하기가 어렵게 되고 말았다. 연기법은 붓다가 만든 것이 아니다. 역시 붓다 이외의 다른 어떤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이것은 존재의 이법(理法)으로서 존재와 더불어 있어 온 것이다. 그러므로 연기법은 붓다와 같은 어느 한 사람이 세상에 출현하거나 하지 않거나 하는 사실과는 관계없이 존재한다. 붓다는 단지 이 법칙을 처음으로 발견했을 뿐이다.경전에서는 붓다 자신이 이 사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한 제자가 이 문제에 대해 "세존이시여,이른바 연기법은 세존께서 만드신 것입니까, 다른 사람이 만든 것입니까."라고 질문을 했다. 붓다는 "연기법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붓다[如來]가 세상에 나오거나 세상에 나오지 않거나 진리의 세계[法界]에 항상 존재하고 있다. 붓다는 이 법을 자신이 깨닫고, 옳게 깨달음을 이룬 뒤에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가르치는 것이다."라고 답했다. 즉 붓다는 연기법의 발견자이지 발명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단지 그는 존재의 법칙인 이 연기법을 처음으로 발견해서 그것을 자신의 문제를 위해, 그리고 중생들의 문제를 위해 응용, 실천했을 뿐이다. 붓다는 이와 같은 사실을 오래된 길[古道]의 비유를 가지고 설명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이 광야(曠野)를 여행하다가 옛사람이 다니던 오래된 길을 만났다. 그는 그 길을 따라갔다가 사람이 살지 않는 한 옛성을 발견했다.그곳에는 왕궁과 동산과 목욕 못과 깨끗한 숲이 있었다. 그는 이 옛 성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 모두 그곳으로 가서 행복하게 살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 비유에서 여행자는 옛 길과 옛 성을 발견했을 뿐이지 그 길과 성을 자신이 개척하고 만든 것은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붓다도 옛 사람들이 밟았던 길을 따라 수행한 결과 법(法)을 깨달아 붓다가 되었고, 그것을 여러 사람들에게 가르쳐 많은 이익이 되게 하였다는 것이다. 붓다가 깨달은 연기법은 붓다보다 우위를 차지한다. 중요한 것은 법(法), 즉 진리이지 사람이 아니다. 붓다로부터 불교가 시작되었다는 의미에서 붓다의 존재는 중요하지만, 그러나 법보다는 하위를 차지한다.붓다 자신도 법에 의해서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한 인간에서 붓다로 되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 역시 불교가 목표로 하는 최고의 이상인 열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붓다라는 한 인격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가르친 법(法), 즉 진리를 이해 하고 그것을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심지어 고타마 싯다르타 자신 역시 붓다가 된 뒤에도 그가 발견한 법(法)에 의지하고 법에 따라 살았다는 것이다. 잡아함의 존중경(尊重經)에 의하면, 붓다는 정각(正覺)을 이룬 뒤 앞으로 어떤 사람을 스승으로 모시고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했다. 그러나 정각을 이룬 그가 이 세상에서 스승으로 모시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그는 그 자신이 발견한 진리[法]를 의지하고 그 진리를 따라 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붓다는 "오직 바른 법[正法]이 있어서 나로 하여금 스스로 깨달아 정각을 이룩하게 하였다. 나는 그것을 공경하고 존중하며, 받들 어 섬기고 공양하면서, 그것을 의지해 살리라." 라고 뜻을 정했다는 것이다. 붓다는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고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쳤다. 그들이 의지하고 따라야 할 것은 사물이나 재산이나 사람이 아니라 오직 법(法)이라는 것이었다. 붓다는 임종을 앞에 두고서도 역시 제자들에게 그의 사후에 그 자신을 스승으로 삼으라고 말하는 대신 "법을 너희들의 스승으로 삼으라."[法歸依]고 가르쳤다. 붓다는 그를 대신해서 승단을 이끌어갈 후계자를 정하지 않았고, 제자들 역시 스승이 돌아가신 후 그들 중의 어떤 한 사람을 승단의 책임자로 정해 붓다의 대신이 되게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붓다가 가르쳐준 법을 그들의 스승으로 삼았고 법을 의지해 살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법'이 중요하다고 해서 법에 집착해서는 안된다. 법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수단일 뿐이지 목적이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법'조차도 버려야 한다. 이것을 중아함(22경)에서는 뗏목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즉 뗏목에 의지해서 강을 건넌 사람은 그 뗏목을 강변에 버려야 한다. 뗏목이 많은 이익을 주었다고 해서 강을 건넌 후에도 그것에 집착한다면 어리석은 일이다. 이처럼 법에도 집착해서는 않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연기법이 붓다가 해결하고자 했던 문제와 무슨 관계가 있었으며, 실제로 붓다는 연기법으로서 무엇을 해결했는가. 그리고 연기법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연기법이 진리라고 해도 붓다 자신의 문제와 관계가 없었다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 인간의 문제와 관계가 없다면 그것은 무의미한 것일 뿐이다. 연기법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붓다 자신의 문제를 포함한 우리 인간 모두의 문제와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임에 틀림없다. 붓다가 그의 전 생애에 걸쳐 해결하고자 했던 것은 인생의 고(苦:duhkha)문제 였다. 그가 출가한 것도, 6년에 걸쳐 힘든 수행을 한 것도, 그리고 성도(成道)후 45년간 쉬지 않고 모든 노력을 기울려 사람들을 가르친 것도 苦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붓다의 가르침의 처음과 끝은 '苦와 고에서의 해탈'이었다. 경전에서는 이것을 기회 있을 때마다 말하고 있다. 잡아함의 삼법경(三法經)에서 붓다는 "(고의 문제가 없었다면) 모든 붓다 세존께서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설사 세상에 나왔다 하더라도) 세상 사람들은 모든 붓다, 여래께서, 깨달으신 법을 사람들을 위해 널리 말씀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였을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다른 곳에서 붓다는 그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나는 단지 고와 고에서의 해탈만을 가르친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붓다가 발견한 연기법과 고(苦) 문제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가.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라든지, 또는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다"라고 하는 이 단순한 원리가 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하는가. 연기법의 입장에서 보면 고(苦)의 고유성(固有性) 또는 실재성(實在性)은 인정될 수 없다. 고(苦)는 신이나 절대자와 같은 어떤 존재가 우리를 벌주기 위해서 만든 것도 아니고, 우연히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그것은 어떤 원인과 조건에 의하여 생긴 것이다.따라서 고를 발생시키는 원인과 조건을 제거해 버린다면 고도 사라지게 될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것을 장아함의 대본경(大本經)에서 붓다는 "고(苦)는 성인(聖人)들이 만든 것이 아니다.역시 인연이 없이 (홀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변하는 (성질을 가진 ) 이 고를 지혜를 가진 사람은 끊어 없앤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붓다는 그가 해결하고자 했던 고 문제에 연기법을 응용해서, 연기법의 원리에 따라 해결할 수 있었다. 즉 붓다는 먼저 苦를 발생시키는 원인을 추구한 뒤 그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고에서 벗어 날 수 있었다. 그것이 열반이었다. 열반이란 "고의 소멸" 또는 "고에서의 해탈"을 의미한다. 결국 연기법은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응용해 고(苦)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붓다는 그 자신의 문제를 해결한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가르쳤다. 그래서 고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가지 설명과 방법을 고안해 낼 필요가 있었다. 사람들은 지혜의 수준이나 그들의 성향, 또는 처해있는 상황이 모두 달랐으므로 그것에 맞추기 위해 여러 가지 교리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것이 불교에서 다양한 교리들이 생겨나게 된 이유이다. 무아(無我)이론이 그것이고 무상(無常)이론이 그것이다. 사성제(四聖諦), 12연기(緣起), 공(空)의 교리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불교의 모든 교리의 유일한 목표는 고의 해결, 즉 열반의 성취일 뿐이다. 한 경에서는 이것을 "모든 강물은 바다로 향한다. 붓다의 모든 가르침도 한 곳으로 향한다. 즉 고와 고의 소멸로 향한다"라고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연기법은 불교의 모든 교리들의 사상적,이론적 근거가 된다. 붓다의 모든 가르침은 그 설명이나 형태가 어떠하든 간에 모두 연기법을 그 근거로 삼고 있다. 불교의 모든 교리들은 연기의 원리를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 응용이론들이다. 그것들은 연기(緣起)라는 하나의 샘에서 흘러나온 크고 작은 물줄기와 같은 것이다. 모든 존재는 왜 무아인가, 세계는 왜 무상하며 왜 공(空)인가. 그것은 연기적(緣起的)이기 때문에 무아이고 무상이고 공인 것이다.
2. 12연기(緣起)
초기경전에는 '연기법'을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 여러 가지 연기의 형식이 나오고 있다. 그 가운데서 가장 완성된 모습을 갖춘 연기가 12연기이다. 이것을 때로는 12인연(因緣)이라 부르기도 한다.12연기란 무명(無明), 행(行), 식(識), 명색(名色), 육입(六入),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이다. 12연기로써 때로는 생멸 변화하는 세계와 인생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 교리의 근본 목적은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인 '고(苦)'가 어떻게 해서 생겨나고, 또 어떻게 해서 사라지는가를 밝히는 것이다. 12연기를 관찰하는 방법에는 순관(順觀)과 역관(逆觀)이 있다. 순관이란 "무명을 조건으로 해서 행이 있고, 행(行)을 조건으로 해서 식(識)이 있고, 식을 조건으로 해서 명색(名色)이 있다." 그리고 계속해서 "육입,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가 있다."라고 관찰하는 것이다. 마지막 항목인 '노사(老死)'는 다른 말로 '고(苦)'라고 할 수 있다. 즉 순관은 고의 발생과정을 설명하는 방법이다. 이렇게 보는 연기를 역시 유전연기(流轉緣起)라고도 부른다. 그것은 존재가 무명과 욕망 등으로 말미암아 윤회의 세계에서 생사를 되풀이[流轉] 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연기(緣起)이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역관이란 고가 소멸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방법이다. "무명이 소멸하기 때문에 식이 소멸하고, 식이 소멸하기 때문에 명색이 소멸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노사의 소멸까지를 설명한다.이렇게 보는 연기를 역시 환멸연기(還滅緣起)라고도 한다. 그것은 존재가 무명과 욕망을 없앰으로서 생사유전(生死流轉)의 세계에서 벗어나 열반으로 돌아가는[還滅] 과정을 설명하는 연기이기 때문이다. 초기경전에서는 많은 곳에서 12연기를 말하고 있지만 그 설명은 한결 같지 않다. 자세하지도 않고 일관되어 있지도 않다. 특히 각 항목[支] 사이의 관계에 대해 만족할 만한 설명을 하는 곳은 없다. 따라서 여러 경전의 설명을 참고해서 12연기를 이해하지 않을 수 없다.
1). 무명(無明: avidya) 무명이란 글자 그대로 '명(明:智慧)이 없다'는 말이다. 올바른 법[正法], 즉 진리에 대한 무지를 가리킨다. 구체적으로는 연기의 이치에 대한 무지이고, 사성제(四聖諦)에 대한 무지이다. 고(苦)는 진리에 대한 무지 때문에 생기므로, 무명은 모든 고를 일으키는 근본원인이다.
2).행(行: samskara) 무명을 조건으로 해서 행이 있다. 행이란 행위, 즉 업(業:karman)을 가리킨다. 행에는 몸으로 짓는 신행(身行=身業)과 언어로 짓는 구행(口行=口業)과 마음으로 짓는 의행(意行=意業)등 3행이 있다. 행(行=業)은 진리에 대한 무지, 즉 무명 때문에 짓게 되고, 그것을 지은 존재의 내부에 반드시 잠재적인 힘[潛在力]의 형태로 남게된다. 3).식(識: vijnana) 행(行)을 조건으로 해서 식이 있다. 식은 인식작용으로서,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등 6식이 있다. 식이란 표면적인 의식뿐 아니라 잠재의식도 포함한다. 꽃을 볼 경우 꽃이라는 인식이 일어나게 되는 것은 전에 꽃을 본 경험이 잠재의식 상태로 남아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꽃을 보았다'는 '과거의 경험'은 과거의 행(위)이다. 따라서 과거의 행(行)이 없다면 현재의 인식작용이 일어 날 수 없다. 그래서 "행을 조건으로 해서 식이 있다."고하는 것이다.
4).명색(名色: namarupa) 식(識)을 조건으로 해서 명색이 있다. 명(名:nama)이란 정신적인 것을, 그리고 색(色:rupa)이란 물질적인 것을 가리킨다.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은 모두 인식의 대상이다. 식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인식의 대상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명색[對象=境]을 조건으로 해서 식이 있다"라고 하지 않고, "식을 조건으로 해서 명색이 있다"라고 되어 있다. 이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 항인 6입(六入)과 함께 설명하지 않으면 안된다.
5). 6입(六入, 또는 六處: sadayatana) 명색을 조건으로 해서 6입(入)이 있다. 6입이란 눈(眼),귀(耳),코(鼻),혀(舌),몸(身),마음(意)등의 6 가지의 감각기관, 즉 6근(根)이다. 이것은 인식 기관이다. "명색을 조건으로 해서 6입이 있다."라는 것을 좀 더 풀이해서 말하면 "인식의 대상[境]인 명색을 조건으로 해서 인식의 기관[根]인 육입이 있다."라는 말이 된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여기에서 식, 명색, 6입 등 3항목[三支]은, 시간적으로 선후의 관계로 보지 말고 동시적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식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인 명색과 그것을 인식 할 수 있는 기관인 6입이 동시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위에서 본 것처럼, 식이 행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식을 행 다음에 놓은 것이다. 6).촉(觸: sparsa) 6입을 조건으로 해서 촉이 있다. 촉이란 지각(知覺)을 일으키는 일종의 '심적(心的)인 힘'이다. 촉에도 눈, 귀, 코, 혀,몸,마음등 6개의 감각기관에 의한 6촉(六觸)이 있다. 촉은 6입에 의해서 생긴다고 되어 있지만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6입만에 의해서가 아니고 식(識), 명색[境], 6입[根]등 3요소가 함께 함으로서 발생하게 된다. 그래서 수성유경(手聲喩經)에서는 "(根.境.識등) 3요소가 모여서 촉을 만든다"[三事和合成觸]라고 하는 것이다. 7).수(受: vedana) 촉을 조건으로 해서 수(受)가 있다. 수란 즐거운 감정[樂受],괴로운 감정[苦受], 즐거움도 괴로움도 아닌 감정[不苦不樂受]과 그 감수(感受)작용을 말한다. 감각기관[根]과, 그 대상[境], 그리고 인식작용[識]등 3 요소가 만날 때 거기에서 지각(知覺)을 일으키는 '심적인 힘'[觸]이 생기게 되고, 그 다음 수가 발생하게 된다. 그러므로 "수는 촉을 조건으로 해서 있다."고 하는 것이다.
8).애(愛: trisna) 수를 조건으로 해서 애가 있다. 애란 갈애(渴愛)로서 욕망을 말한다. 좋아하는 것을 만나거나 싫어하는 것을 만나게 되면 그것에 애착심이나 증오심을 일으키게 된다. 증오심 역시 애(愛)의 일종이다. 고.낙등의 감수작용(感受作用)이 심하면 심할 수록 거기에서 일어나는 애착심과 증오심도 커진다. 그래서 "수를 조건으로 해서 애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9).취(取: upadana) 애를 조건으로 해서 취가 있다. 취는 취착(取着)의 의미로서 올바르지 못한 집착이다. 맹목적인 애증(愛憎)에서 발생하는 강렬한 애착을 가리킨다. 어떤 대상에 대해 욕망이 생기면 뒤따라 그것에 집착심을 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애를 조건으로 해서 취가 있다"라고 하는 것이다.
10).유(有 : bhava) 취를 조건으로 해서 유가 있다. 유(有)란 존재를 말한다. 초기 경전에서는 취를 조건으로 해서 어떻게 존재가 있게 되는 가를 설명해 놓은 곳을 찾기는 어렵다. 업설(業說)에 의하면, 집착[取]때문에 업(業)이 만들어지고, 업은 생(生)을 있게 하는 조건이 된다. 따라서 '유'를 '업'이라고 본다면, "취를 조건으로해서 유가 있다"라는 말은 "집착을 조건으로 해서 업이 있다."라는 것이 된다. 두 번째 항목인 '행'을 무명으로 인해 생기는 소극적인 업이라고 한다면, 유는 '애'와 '취'를 조건으로 해서 생기는 적극적인 업이라고할 수 있다. 11).생(生: jati) 유를 조건으로 해서 생이 있다. 유(有), 즉 업(業)은 생을 있게 하는 원인이기 때문에 "유에 의해서 생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12).노사(老死: jara-marana)와 우비고수뇌(憂悲苦愁惱) 생을 조건으로 해서 늙음과 죽음등 여러가지 고가 있다. 생이 있게 되면 필연적으로 늙음과 죽음이 있게 된다. 그리고 다른 여러 가지 고, 즉 근심(憂),비애(悲), 고통(苦), 번뇌(愁), 번민(惱)등이 발생하는 것이다.
제3절 4성제(四聖諦)
4성제(聖諦)에서 '제'(諦:satya)란 '진리' 또는 '진실'을 의미한다. 따라서 4성제란 "4가지의 성스러운 진리"라는 말이다.이것은 고성제(苦聖諦),집성제(集聖諦),멸성제(滅聖諦),도성제(道聖諦)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간단하게 '고, 집, 멸, 도'라고도 한다. 4성제를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고'와 '고의 원인', 그리고 '고의 소멸'과 '고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 4성제는 불교의 모든 교리 가운데서 가장 중요하다. 붓다가 녹야원(鹿野苑)에서 5명의 제자들[五比丘]에게 처음으로 법을 설했을 때로부터 시작해서, 쿠시나가라(Kusinagara)에서 반열반(般涅槃)에 들 때까지 45년 동안 가장 많이 설한 가르침이 바로 이 4성제이다. 중아함의 상적유경(象跡喩經)에서는 4성제의 중요성을 코끼리 발자국에 비유해서 설명하고 있다. 코끼리의 발자국이 넓고 커서 모든 짐승의 발자국 가운데서 제일인 것처럼, 4성제도, '한량없는 좋은 법[善法]'이 모두 그 가운데로 들어오기 때문에, '일체법(一切法) 가운데서 제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4성제의 가르침은 불교의 궁극 목표인 '고(苦)에서의 해탈'을 위해 만들어진 가장 구체적이면서도 간단한 교리이다. 붓다는 인생의 '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의사가 병을 치료할 때와 같은 방법을 사용했다. 의사가 먼저 병을 진단하듯이 붓다는 인생의 실상인 '고'를 말하고[고성제], 병의 원인을 찾아내듯이 고의 원인을 규명했다[집성제]. 그리고 병 치료후의 건강상태를 말하듯이 고가 소멸된 상태, 즉 열반을 설명했고[멸성제], 마지막으로 병의 치료방법을 말하는 것처럼 열반에 이르는 길을 제시했다[도성제].
1. 고성제(苦聖諦)
불교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살아간다는 것은 고(苦)이고, 이 고에서 어떻게 벗어나는가를 설명해 놓은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이것을 붓다는 한 경에서 "나는 단지 고와 고의 소멸[열반]만을 가르칠 뿐이다"라고 표현하고 있다.불교의 모든 것이 '고와 고의 소멸'을 위한 것이라면, 무엇보다도 먼저 인생이 고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 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고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을 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병자가 병을 치료받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그 자신이 병에 걸렸다는 것을 인식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면 불교에서 말하는 고(苦)란 무엇인가. 고라는 말인 'duhkha'를 일반적으로 '괴로움','고통', '슬픔'등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것보다 훨씬 더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신체적, 생리적인 고통, 또는 일상적인 불안이나 고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두흐카'를 현대적인 말로 표현하면 '자신이 하고자 하는대로 되지 않는 것',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모든 것은 고다'[一切皆苦]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고를 구체적으로 설명할 때는 4고 또는 8고를 말한다. 태어남, 늙음, 병듦, 죽음[生老病死]등의 4고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愛別離苦],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는 고[怨憎會苦],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求不得苦], 5온(五蘊)의 집착에서 생기는 고[五取蘊苦; 五陰盛苦]등의 4고를 합쳐서 8고이다. 또한 고를 성질에 따라 고고(苦苦), 괴고(壞苦), 행고(行苦)등 3종으로 나누기도 한다.
고고란, 추위, 배고픔, 부상을 당했을 때 느끼는 것과 같은 고를 말한다. 이것은 원래부터 괴로움의 조건에서 생기는 고다. 괴고는 애착을 가지고 있는 대상이 파괴되거나 사라져 버릴 때 느끼는 고를 말한다.부귀와 권력을 누리던 사람이 그것을 잃어버리거나, 또는 애지중지하던 물건이 없어져 버릴 때 느끼는 고통이 여기에 해당된다.
행고란 무상함을 조건으로 해서 느끼게되는 고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끊임없이 변하는 현실[老,病,死]앞에서 느끼게 되는 괴로움이다.
2. 집성제(集聖諦)
집(集)이란 'samudaya'라는 말을 번역한 것으로서 '불러모으다'[招集]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집성제(集聖諦)에서는 '고를 일으키는 원인'을 밝힌다. 고의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가운데서 가장 근본적인 것은 욕망(欲望:trsna)이다.
5관(五官)의 관능적인 욕망은 물론이고, 재산과 권력에 대한 애착이나 사상, 신앙에 대한 집착 등도 욕망이다. 인생의 모든 불행, 싸움, 괴로움은 욕망에서 비롯된다. 욕망은 고의 뿌리이다. 경(經)에서는 이것을 "고의 원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가 있다. 그것은 욕망이다." "무릇 모든 괴로움이 생기는 것은 모두 다 욕망으로 말미암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욕망은 인생을 이끌어 가는 동력(動力)일 뿐 아니라 또한 인생을 지배하는 힘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욕망의 구체화라고 할 수있다. 인간은 욕망이 있기 때문에 살아 갈 수 있다. 그러나 욕망은 주인이 노예를 부리듯이 인간을 마음대로 부린다. 인간은 한없이 욕망하고, 욕망때문에 끝없이 고통을 당한다. 인간은 욕망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지만, 그러나 그것을 채워준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욕망은 채워주면 채워 줄수록 더 커질 뿐 결코 충족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다에 빠진 사람이 바닷물을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이 더 심해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사람들은) 비록 히말라야산 만한 순금덩어리를 얻는다 해도 만족할 줄을 모를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욕망을 구체적으로 욕애(欲愛), 유애(有愛), 무유애(無有愛)등 3종으로 나눈다. 욕애란 5욕(五欲), 즉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욕망을 가리킨다. 유애란 존재에 대한 욕망이다. 오래도록 살고 싶다든지 죽은 후에 천상에 태어나서 영원히 살고 싶어하는 등의 욕망이다. 무유애는 무존재(無存在)로 되고자 하는 욕망, 즉 사후에 허무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욕망을 가리킨다.
3.멸성제(滅聖諦)
멸(滅)이란 열반(涅槃)을 번역한 말이다. 그리고 열반은 'nirvana'를 음역한 것이다. 열반은 "소멸"(消滅)의 의미를 가진 말로서 "고가 소멸된 상태"를 가리킨다. 고가 완전히 없어진 상태, 다른 말로 표현하면 '고에서의 완전한 해방'이다. 현대적인 의미로는 '최고의 행복'이라고 할 수 있다[涅槃第一樂]. 열반은 불교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이고 이상(理想)이다.불교에서 가르치는 모든 교리와 실천은 오로지 열반을 얻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을 잡아함에서는 "바다는 한 가지 맛, 그것은 짠맛이다. 마찬가지로 붓다의 가르침[法과 律]도 한가지 맛, 그것은 고와 열반[苦滅]의 맛이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열반은 현재의 생(生)에서 성취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열반이 아니다. 열반에 도달한 사람은 괴로움의 원인인 욕망을 다스릴 수 있으므로 욕망 때문에 발생되는 괴로움, 즉 정신적인 괴로움에서는 벗어나지만 아직 육체가 남아 있기 때문에 병이나 부상을 입었을 때 받게 되는 육체적인 괴로움은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에 성취하는 열반을 '생존의 근원(生存根源)이 남아있는 열반' 즉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이라 한다. 여기에서 '생존의 근원'[餘依]이란 육체를 말하는 것이다. 유여의열반을 이룬 사람이 죽으면 다시 육체를 받아 태어나지 않게 된다. 이것을 '생존의 근원이 남아 있지 않는 열반' 즉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이라고 한다. 이 무여의열반은 '완전한 열반'(般涅槃: parinirvana)으로서 정신적, 육체적인 일체의 고가 모두 소멸된 열반이다. 우리는 열반을 언어로 설명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머리로서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체험의 세계일 뿐이다. 아직 열반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에게 열반을 설명해 주어도 그는 그것을 이해 할 수 없다. 마치 땅위에 올라가서 산책하고 돌아온 거북이가 물고기에게 땅위에서는 헤엄칠 수 없다고 아무리 설명을 해주어도 물고기는 그것을 전혀 이해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4. 도성제(道聖諦)
도(道)란 열반에 이르는 길이다. 이것은 중도(中道)라고도 부르는 것으로 양극단(兩極端)을 떠난 중간의 길이다. 즉 지나치게 쾌락적인 생활도, 반대로 극단적인 고행생활도 아닌, 몸과 마음의 조화를 유지 할 수 있는 "적당한 상태의 길"을 말한다. 소나경(Sona經)은 중도를 거문고 줄의 비유로써 설명하고 있다. 거문고 줄은 지나치게 팽팽해도, 그와 반대로 지나치게 느슨해도 좋은 소리를 낼 수 없다. 거문고가 가장 좋은 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그 줄이 적당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이처럼 열반을 얻기 위한 수행의 길도 극단적인 고행이나 지나친 쾌락적인 행을 피하고 중도를 실천해야 한다. 이 중도를 구체적으로 말한 것이 8정도(八正道)이다.
8정도(八正道)
1) 정견(正見) - 바른 견해이다. 4성제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다. 즉 고의 발생과 고의 소멸, 그리고
고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바르게 아는 것이다.
2) 정사(正思) - 바른 생각, 즉 바른 마음가짐이다. 구체적으로는 탐욕스러운 생각, 성내는 생각,
해치려는 생각을 가지지 않고, 온화한 마음, 자비스러운 마음, 청정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3) 정어(正語) - 바른 말이다. 거짓말[妄語], 이간시키는 말[兩舌],욕하는 말[惡口], 꾸며대는 말
[綺語]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말, 성실한 말, 필요한 말을 하는 것이다. 4) 정업(正業) - 바른 행위이다. 살생(殺生), 도둑질 [偸盜], 음란한 짓[邪淫]을 하지 않고, 다른
존재들의 목숨을 구해주고, 보시(布施)하고, 청정한 생활을 하는 것이다. 5) 정명(正命) - 바른 생활이다. 정당한 방법으로 의식주를 구하는 것이다. 특히 출가수행자의 경우
에는 재가신도의 바른 신앙에서 우러나는 보시를 받아 생활하는 것이다.
6) 정정진(正精進) - 바른 노력이다. 이미 생긴 선(善)은 더욱 자라도록 노력하고, 아직 생기지 않은
선은 생기도록 노력하고, 이미 생긴 악(惡)은 끊도록 노력하고, 아직 생기지 않은 악은 생기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7) 정념(正念) - 바른 기억이다. 자기자신이나 그 주변의 것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기억해서, 반성
하고 바른 의식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8) 정정(正定) - 바른 정신집중 또는 정신 통일이다. 마음을 한 점에 집중하는 것[心一境性]을 말한다.
정(定, samadhi)을 닦는 구체적인 방법이 선(禪, dhyana)이기 때문에 때로는 2가지를 합해서 선정
(禪定)이라고도 한다.
8정도는 그 순서대로 실천해야 한다. 왜냐하면 정견을 닦아야 정사가 생기게 되고 정사를 닦아야 정어를 할 수 있게 된다. 나머지 항목[支]들도 마찬가지다. 8정도의 마지막 목표는 정정(正定)이다.
8항목 가운데서 앞의 7항목은 모두 정정에 이르기 위한 준비 단계이다. 정정을 닦아 지혜(prajna)를 얻게 되고, 지혜를 가짐으로써 열반을 성취 할 수 있는 것이다.
제4절 오온-무아(五蘊.無我) 5온(五蘊)의 온(蘊:skandha)은 '모임'[集合]이라는 뜻이다. 때로는 '음(陰)'이라고도 번역했다.
5온은 좁은 의미로는 인간존재를 가리킨다. 인간은 물질적인 요소인 색(色=육체)과 정신적인 요소인 수
(受),상(想),행(行),식(識)등 5개의 요소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5온이 넓은 의미로 쓰일 때는 일체존재를 가리킨다. 이 경우에는 색은 물질전체를, 그리고 수.상.행.식은 정신 일반을 말한다. 인간 존재만을 특별히 구별해서 말할 때는 5온이라는 말 대신에 5취온(五取蘊)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것은 5온으로 이루어져 있는 존재를 고정적인 자아[自我: atman]라고 생각하고, 그것에 집착[取: upadana]한다는 의미에서이다.
1. 색온(色蘊: rupa)
색이란 육체를 가리킨다. 육체는 물질적인 4가지 기본 요소인 4대(四大: mahabhuta)와 이 4대에서 파생된 물질인 4대소조색(四大所造色)으로 이루어져 있다. 4대란 지,수,화,풍으로서, 지(地)는 뼈, 손톱, 머리카락등 육체의 딱딱한 부분이고, 수(水)는 침,혈액, 오줌등 액체부분이다. 화(火)는 체온이고 풍(風)은 몸속의 기체, 즉 위장 속의 가스 같은 것을 가리킨다. 4대소조색이란 4대로 이루어진 5종의 감각 기관[五根]인 눈(眼),귀(耳).코(鼻), 혀(舌), 몸(身)등이다.
2. 수온(受蘊: vedana)
수란 감수(感受=감정)와 그 작용이다. 수(受)는 내적인 감각기관들과 그 것에 상응하는 외적인 대상들과의 만남에서 생긴다. 수에는 성질 상 3종이 있다. 즉 고수(苦受)와 낙수(樂受), 그리고 불고불낙수(不苦不樂受)이다. 낙수란 즐거운 감정이고, 고수란 괴로운 감정이다. 그리고 불고불낙수란 사수(捨受)라고도 하는 것으로서, 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닌 감정을 가리킨다. 3. 상온(想蘊 : samjna)
상은 개념(槪念) 또는 표상(表象)과 그 작용을 말한다. 상 역시 감각기관들과 그 것에 해당되는 대상들과의 만남에서 생긴다. 상은 대상들을 식별하고, 그 대상들에 이름을 부여한다. 붉은 꽃을 볼 경우 먼저 지각(知覺)에 의해 인식 작용이 생기게 되고, 그 다음 '붉은 꽃'이라는 개념을 만드는 작용이 일나게 된다. 이때 '붉은', 또는 '꽃'이라는 개념 또는 그 작용이 상(想)이다.
4. 행온(行蘊 :samskara)
행, 즉 samskara란 '형성하는 힘'[形成力]이라는 뜻을 가진 말이지만, 여기서는 특히 의지작용(意志作用: cetana)을 가리킨다. 인간이 동물과 달리 윤리 생활을 할 수 있고 업(業: karma)을 짓게 되는 것은 이 행의 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넓은 의미로서의 행은 수,상,식을 제외한 모든 정신작용과 그 현상이다. 예를 들면 기억,상상, 추리등이 여기에 속한다. 5.식온(識 : vijnana)
식은 일반적으로 분별(分別), 인식(認識) 및 그 작용을 말한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식(識)의 영역은 대상을 인식하는데 까지 가지 않는다. 그 전 단계인 주의작용(注意作用)일 뿐이다. 예를 들면 붉은 꽃을 볼 때 안식(眼識)이 일어나게 되는데 안식은 눈앞에 '무엇이' 나타난 것만을 알뿐이다. '붉다' '꽃이다'라고 아는 것은 식이 아니고 상(想)의 작용이다. 식 역시 감각기관들과 그 것에 해당되는 대상들과의 만남에서 생긴다
5온이론은, 인간 존재란 색, 수, 상, 행, 식등 5 가지 요소가 어떤 원인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잡아함경에서는 이것을 "마치 여러 가지 목재(材木)를 한데 모아 세상에서 수레라 일컫는 것처럼 모든 온(蘊=要素)이 모인 것을 거짓으로 존재[衆生]라 부른다."라고 비유로써 설명하고 있다. 수레는 바퀴, 차체(車體), 축(軸)등 여러 요소가 모였을 때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것일 뿐, 이 요소들과 관계없이 홀로 존재할 수는 없다.인간 존재도 마찬가지다. 색,수,상,행,식등 5 요소가 모일 때 비로소 인간이라는 존재도 성립할 수 있게 된다. 5온이론에 의하면 다른 종교에서 말하고 있는 영혼같은 것을 인정할 수 없다. 수,상,행,식과 같은 정신현상은 영혼과 같은 존재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감각기관과 그 기관에 관계되는 대상과의 만남에서 생긴 된다. 눈[眼], 귀[耳], 코[鼻], 혀(舌), 마음[意:생각을 맡은 기관]등과 여기에 상응하는 물질[色], 소리[聲], 냄새[香], 맛[味], 감촉할 수 있는 것[觸], 생각[法]이 서로 만날 때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설식(舌識),신 식(身識),의식(意識)등의 여러 가지 정신현상이 발생한다. 즉 6 가지 감각기관[六根]과 그것에 관계하는 6가지 대상[六境]이 합칠 때 6가지 식[六識]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수성유경(手聲喩經)에서는 "비유하면 두 손이 서로 마주쳐서 소리를 내는 것처럼, 눈[眼]과 물질[色: 對象]을 인연하여 안식이 생긴다."(다른 5식도 동일하다)라고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감각기관과 그 대상이 만나서 식이 발생하면, 식 이외의 다른 정신 현상들, 즉 수, 상 ,행등도 함께 일어나게 된다. 그것을 아함경의 여러 곳에서는 "눈과 물질을 인연하여 안식이 생긴다. 이 3가지[眼.色.識]가 합친 것이 촉(觸=여기서는 접촉)이다. 촉과 함께 수,상,행[思]이 생긴다.(이,비,설,신,의도 동일하다.)"라고 말하고 있다.(잡아함 273; 305)5온이론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 존재란 5개의 요소로 이루어져 있고, 이 각 요소들은 모두 비실체(非實體)적인 것이므로, 이와 같은 요소들로 이루어 진 인간 존재 역시 비실체적이라는 것이다. 거기에는 고정불변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것을 여러 경전에서는 비유를 들어 색(色)은 거품덩어리 같고, 수(受)는 거품 방울 같고, 상(想)은 신기루 같고, 행(行)은 바바나줄기 같고, 식(識)은 허깨비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거품덩어리, 거품방울, 신기루, 바바나 줄기, 허깨비들은 어느것 하나 실체적인 것이 아니다. 이들 실체적이 아닌 요소들로 이루어 진 존재가 실체적인 것일 수 없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무아(無我:anatman)라고 표현한다. 이 '무아(無我)'라는 말에서 '아(我)'란 '고정불변하는 실체적(實體的)인 아'(我;atman)를 의미한다. 인간 존재에는 그와 같은 '아(我)'는 없다는 것이고, 역시 인간은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하다[非我]. 결국 인간은 "무아적 존재" 인 것이다.
이 5온이론, 즉 무아이론는 초기불교에서 후기불교까지 전 불교사상사를 통해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역시 불교를 다른 종교 및 사상과 구별짓게 하는 가장 독특한 교리이기도 하다. 경전에서 붓다는 이 무아이론을 수없이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두 말할 것도 없이 고(苦)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였다. 붓다에 의하면 고는 욕망 때문에 생기고 욕망은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때문에 발생한다.
따라서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고의 근본 원인이다.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제거되지 않는 한 고는 계속해서 발생하게 된다. "마치 뿌리가 다치지 않으면 나무는 설사 (윗 부분이) 잘리더라도 원기 왕성하게 다시 싹이 돋아 나오는 것처럼" 고(苦)도 계속 발생하게 된다고 법구경(法句經)에서는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우리 존재 속에 소위 말하는 영혼과 같은 고정불변하고 실체적인 '내'(atman)가 있다고 믿는데서 생긴다. 따라서 그와 같은 존재가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이해할 때 그 믿음은 사라지게 된다. 그래서 이 5온-무아(五蘊-無我) 교리는 인간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을 하나하나 분석하면서 우리 존재가 '무아적'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나[我]도 없고 나의 것[我所]도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이해할 때 우리들은 무엇에 집착할 것이며, 누구에게 분노를 품을 것이며, 무엇에 두려움을 느끼겠는가. 이것은 붓다와 팃사(Tissa)비구 사이에 있었던 문답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붓다는 팃사비구에게 "만일 색(色:육체)에 대해서 탐냄을 떠나고 욕망을 떠나고 생각을 떠났는데도 그 색이 변하거나 달라지면 그때 너는 근심, 슬픔, 번민, 괴로움이 생기겠느냐." 라고 묻는다. 팃사는 "아닙니다"라 고 대답한다. 수, 상, 행, 식등 다른 4온에 대해서도 같은 문답을 한다.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깨트려지면 우리는 우리 존재가 변해도, 외부세계가 변해도 영향을 받지 않게 된다.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숲속의 나무들을 베어서 가져가도 우리들이 근심하거나 슬퍼하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나무들은 '아(我)도 아니고 아소(我所:나의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아함경에서는 무아이론을 불에 비유하고 있다. 불이 모든 초목을 태워서 사라지게 할 수 있는 것처럼 무아이론은 욕망과 고(苦)를 사라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붓다는 제자들에게 무아이론을 실천하라고 되풀이해서 말하고 있다. 경전에서는 때로 그것을 과격한 표현을 사용해서 나타내기도 한다. 붓다의 가장 큰 제자였던 샤리푸트라(Sariputra)는 야마카(Yamaka)비구에게 오온[인간존재]에 대해서 "그것은 병(病)과 같고 종기(腫氣)와 같으며 가 시와 같고 죽음과 같으며 무상하고 괴로우며 공(空)이요 내[我]가 아니며 내것[我所]이 아니라고 관찰한다. 그래서 거기에 집착하지도 않고 그것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라고 가르친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보다 효과적으로 사라지게 할 수 있고 그 결과 욕망을 없엘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고(苦)를 제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무아이론에서 유의해야 할 점은 '아(我)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해서 상식적인 차원에서 말하는 '나' 또는 '자기'와 같은 존재까지도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태어나서 성장하고 한 생을 살다가 죽는 '나'는 인정한다. 단지 이와 같은 존재를 영원한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일상적으로 말하는 '나'란 비실체적인 몇 가지 요소들이 모여서 일시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임시적인 존재'일 뿐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가짜 나'(假我)라고 부른다. 이 '가짜 나'의 존재는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제5절 3법인(三法印) 법인(法印: dharma mudra)이란 '법의 표지'(標識)라는 말이다. 3법인은 불교의 특징을 가장 단적으로 잘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불교의 깃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것은 불교를 다른 종교나 사상과 구별하기위해 하나의 기준이 된다. 3법인과 일치하는 사상이면 불교이고 그 반대이면 불교가 아니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3법인은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一切皆苦)의 형식이 사용되기도 하지만, 무상과 무아의 개념 속에 논리적으로 고(苦)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일체개고 대신에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넣어서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의 형식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1.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
제행(諸行: sarva samskara)에서, 제(諸, sarva)는 '일체' 또는 '모든'의 뜻이다. 그리고 행(行) 즉 samskara는 '함께'라는 의미의 접두사 sam과 '하다, 만들다'라는 의미의 동사 KR가 결합되어 이루어진 것으로서, '만들어 진 것'[爲作]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제행이란 '일체의 만들어진 것', 다시 말하면, 물질적 정신적인 모든 현상을 가리킨다. 현대적인 표현으로는 '모든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무상은 anitya를 번역한 말로서, nitya 즉, '항상'(恒常)의 반대 의미이다. 무상이란 글자 그대로 "항상함이 없다", "변화하고 변천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제행무상'이란 "모든 존재는 항상함이 없이 변화하는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존재하는 그대로의 자연계와 인간계를 볼 때 모든 것은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바뀌고 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산이나 바위 같은 것들은 불변적인 것 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한시도 쉬지 않고 변하고 있다. 자연도 인간도, 그리고 물질적인 것도, 정신적인 것도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다. 쉬지 않고 흐르는 물처럼 단 한 순간도 가만히 머물러 있는 것은 없다. 존재란 여러 요소들이 여러가지 조건에 의하여 모여있는 집합체에 불과하기 때문에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와 조건들이 변하거나 사라지면 존재 역시 변하거나 사라진다. 그런데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은 고정불변적인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존재도 무상한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제행무상이라는 설명은 현대 과학에서 하고 있는 주장과 같다. 물질은 겉으로 보기에 고정되어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에너지의 흐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자는 원자핵을 중심으로 해서 전자(電子)와 중간자(中間子)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운동체이다. 이와 같은 원자로 구성되어 있는 물질 역시 고정 불변한 것일 수는 없다. 무상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무상이라는 말은 "인생은 무상하다." 또는 "세월은 무상한 것이다." 등과 같이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수가 많다. 무상하기 때문에 살아 가는 것이 괴로운 것이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무상한 것은 고다" 라고 되풀이 해서 말하고 있다. 젊은 사람이 늙어가고 건강한 사람이 병들기도 하고, 부귀를 누리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그것을 잃어 버리게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일들은 괴로움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무상하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 갈 수가 있다. 변하기 때문에 아이가 어른이 되고 병든 사람이 건강을 되찾는다. 만물이 태어나고 자라는 것도 무상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악한 사람이 착한 사람으로 되기도 하고,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 부귀를 누릴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제행이 무상하다.'라고 하는 것은 모든 존재에 대한 객관적 관찰에 의해서 내려진 결론이다. 이것은 값싼 감상주의나 비관적인 현실관이 아니다. 제행무상인은 불교가 모든 존재를 보는 관점이므로 불교의 존재관(存在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2.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 제법(諸法: sarva dharma)이란 제행(諸行)과 마찬가지로 '모든 존재'를 의미한다.
그래서 때로는 '제법'과 '제행'을 같은 말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이들 2개의 말은 다르다. 위에서 본 것처럼 '제행'에서 '행'은 'samskara'이고 '제법' 에서 '법'은 'dharma'이다. 제법은 제행보다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무아(無我:anatman)라는 말은 "아(我)가 없다." 또는 "아(我)가 아니다."[非我]라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아(我,atman)란 생멸변화를 벗어난 영원하고 불멸적인 존재인 실체(實體) 또는 본체(本體)를 말한다. 따라서 '제법무아'는 "모든 존재에는 고정불변 하는 실체적인 아(我)가 없다."라는 의미이다. 역시 그것은 "실체적인 아[實體的我]가 아니다." 라는 뜻이기도 하다. "제행이 무상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비교적 쉽게 받아들이지만,"제법이 무아(無我)하다."라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는 그와 반대다. 눈에 보이는 현상은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기는 쉬워도 존재의 배후에 영혼과 같은 실체적인 존재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붓다 당시에도, 그리고 현재에도 불교 이외의 다른 종파에서는 대부분 불생불멸의 영원한 존재로서의 본체를 인정하고 있다. 그것을 '아'(我: atman)' 또는 '범'(梵: brahman)이라 하기도 하고, '영혼'[生存原理: jiva], 절대자, 신이라고 이름하기도 한다. 이것은 개체적인 실체[我]를 가리키기도 하고 우주적인 실체[梵]를 말하기도 한다. 불교에서는 이와 같은 실체적인 존재를 인정 할 수가 없다. 모든 존재[諸法]는 비실체적인 여러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서 시시각각으로 변하면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존재가 무아적일 것은 물론이고, 역시 그 속에 고정불변한 실체적인 아(我)가 없다는 것도 당연한 귀결이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제법무아라고 해서 현상적인 존재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부정하고 있는 것은 단지 '고정불변하는 실체적인 아(我)'일 뿐이다. 제법무아인은 불교의 실체관(實體觀)이라고 할 수있다. '고정불변적인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불교의 관점이다. 제법무아 이론은 불교만이 가르치고 있는 가장 독특한 것이다.
3.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
'열반'과 '적정(寂靜; santi)'은 동의어로서, 열반의 의미가 바로 '적정'이다. 열반에 대해서는 4성제의 멸성제에서 이미 설명했지만 좀더 부연한다면, 열반이란 'nirvana'의 음역으로서 글자 그대로는 소멸(消滅)을 의미한다. 그것은 '불어서 끄다'[吹消]라는 뜻을 가진 어근 'VA'에다 부정접두사 'nir'가 결합되어 이루어진 말로서 '불어서 꺼진 상태'를 뜻한다. 즉 "불타고 있는 것과 같은 괴로움[苦]이 완전히 소멸된 상태"를 의미한다.. 그래서 초기 경전에서는 열반을 "탐욕의 사라짐[貪慾滅盡], 분노의 사라짐[瞋喪滅盡], 어리석음의 사라짐[愚痴滅盡], 이것을 이름하여 열반이라 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인생에서 괴로움을 일으키는 요소들인 탐욕심, 분노심, 어리석음[3毒]이 모두 소멸되었을 때 인생은 더 이상 괴로운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열반의 상태는 '고요하고, 괴로움이 없이 편안[無苦安穩] 한 것'임에 틀림없다. 이것을 'santi' , 즉 '적정(寂靜)'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열반의 이와같은 상태를 한 경에서는 비유해서 "마치 마른 나뭇단을 많이 넣고 매우 뜨겁게 달군 큰 가마에서 불타고 있던 사람이 천신만고 끝에 거기에서 벗어나 시원한 장소로 도망쳐 나왔을 때, 그가 느끼는 최상의 안락과 같은 것" 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경전에서는 열반이란 말을 멸(滅), 적(寂), 불사(不死), 최상의 안락(安樂)등 여러 가지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현대적인 표현으로 하면 "최고의 행복"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있다. 모든 고(苦), 번뇌가 소멸된 상태는 바로 행복이기 때문이다. 열반은 불교에서 추구하는 궁극의 목적이자 최고의 이상이다. 불교의 모든 가르침은 결국 이 열반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열반적정인은 불교의 이상관(理想觀)이라고 할 수 있다..
3법인은 각 법인(法印)을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연결된 하나의 실천이론으로 볼 수도 있다. 제행이 '무상'하다는 사실을 바로 이해하면 제법이 '무아' 하다는 것도 알 수 있게 된다. 제행이 무상하고 제법이 무아하다는 것을 확실히 이해하면 우리는 욕망과 집착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게된다. 그리고 모든 욕망과 번뇌를 떠날 때 우리는 열반에 이르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제6절 일체법(一切法) - 5온(蘊).12처(處).18계(界)
일체법이란 '일체의 존재'를 말한다. 앞에서 이미 말했듯이 불교가 목표로 하는 것은 오직 한가지 뿐이다. 인간 문제의 해결,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간 고(苦)의 해결이다. 그런데 불교 경전에서는 인간 문제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어 보이는 일체법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가르침을 펴고 있다. 이것은 불교가 자연과학이나 철학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가 일체법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이해 함으로서 인간의 문제를 보다 효과적으로 풀기 위해서 이다. 우리는 일체법의 참된 모습을 확실하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에 집착하고, 집착함으로서 그것이 변하거나 사라질때 괴로워 하게 되는 것이다. 일체법을 분류하는데는 여러 가지방법이 있다. 대상은 한 가지 이지만 상황에 따라 다른 설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설명 할 수도 있고 좀 더 자세하게 할 수도 있다. 물질을 위주로 설명 할 수도 있고, 반대로 정신을 위주로 할 수도 있다. 일체법을 이해하는 사람의 성향이나 능력, 또는 수준에 따라 다른 설명들이 필요한 것이다. 초기 경전에 나오고 있는 일체법의 분류 방법 가운데서 가장 일반적이고 구체적인 것은 5온, 12처, 18계이다. 정신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람을 위해서는 5온을, 그리고 물질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람을 위해서는 12처를, 또 정신과 물질 모두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람을 위해서는 18계를 설해서 물질과 정신이 모두 실체적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1. 5온(五蘊: skhanda )
5온에 대해서는 위에서 이미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존재와 관계된 것이 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나의 존재'란 5개의 요소로 이루어 진 것, 그리고 그것은 실체적인 아(我)가 아니라는 것, 즉 무아(無我)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5온으로서 일체법을 설명할 때는 5온이 개인 존재만이 아니라 일체의 만물을 가리키는 것이다. 일체법은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5온 가운데서 색온(色蘊)은 물질 전체를 말하는 것이고, 수온(受蘊), 상온(想蘊), 행온(行蘊), 식온(識 )등 4온은 정신일반을 가리키는 것이다. 일체법은 이와같은 5개의 요소가 결합해서 항상 변하면서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서 어디에도 실체적인 것이 없다. 결국 일체법은 무아이고 무실체적이라는 것이다. 5온을 설하는 대상은 물질은 끊임 없이 변하는 것으로서 무상하다는 것을 이해하지만 정신은 실체적인 것으로서 영원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래서 5온이론에서는 정신적인 것도 실체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 물질 부분보다는 정신부분에 대한 설명을 훨씬 더 상세하게 하고 있다. 5온은 상근기(上根機)에 속하는 사람을 위한 설명이다. 근기란 붓다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능력이다. 상근기, 즉 법을 이해하는 능력이 가장 뛰어난 사람은 5온에 대한 설명만 들어도 일체법이 실체적이 아니라는 것[無我]을 이해 할 수 있다.
2. 12처(十二處, ayatana)
12처의 처(處)는 ayatana에서 번역된 말로서 구역(舊譯)에서는 '입'(入)이라고 했다. 이말은 'ayat'와 'ana'로 이루어져 있는데, 'ayat'는 '들어오는' 의 뜻이고, 'ana'는 '것'과 '곳'이라는 2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ayatana라는 말은 '들어 오는 곳'[處] 또는 '들어 오는 것'[入]이라는 의미이다. 12처란 눈[眼根], 귀[耳根], 코[鼻根], 혀[舌根], 몸[身根], 마음[意根]등 6개의 감각기관[6根]과 그것에 상응하는 6개의 대상, 즉 빛깔과 형태[色境], 소리[聲境], 냄새[香境], 맛[味境].닿을 수 있는것[觸境], 생각[法境]등을 합친 것이다.보는 작용은 눈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듣는 작용은 귀를 통해서, 냄새 맡는 것은 코를 통해서, 맛보는 것은 혀를 통해서, 감촉은 몸(몸의 각 부위에 있는 피부)을 통해서, 생각은 마음[意]을 통해서 이루어 진다. 이들 눈,귀,코,혀,몸,마음[眼耳鼻舌身意]등을 6개의 기관이라는 이라는 의미에서 6근(根)이라 부르고, 6내처(六內處)라고도 한다. 6근의 근은 기관(器官)이라는 의미 이외에, 기관이 가지고 있는 기능까지를 포함한다. 안근이라고 해서 안구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볼수 있는 눈의 기능까지 포함한다. 6근에서 제6의 의근(意根)은 기능만 존재하지 실제로 구체적인 기관은 없다. 그러나 여기에서 의식(意識)이 생기므로 일종의 기관임에는 틀림없다. 6근에 상응하는 바깥 세계의 대상, 즉 빛깔과 형태,소리, 냄새,맛, 닿을 수 있는것, 생각[色聲香味觸法]등을 6경(六境)이라 부르고, 6외처(六外處)라고도 한다. 정신작용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감각기관과 거기에 상응하는 대상이 만나야 된다. 즉 눈에는 빛깔, 또는 형태가, 귀에는 소리가, 혀에는 맛이, 몸[피부]에는 첩촉할 수 있는 것이, 마음[意根]에는 생각[法]이 만나야 한다. 여기에서 법을 '생각'이라고 말했지만 좀더 정확하게 말한다 면, 마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말한다. 12처 가운데서 '11처(處)에 포함되지 않는 모든 현상' 이다. 12처란, 다시 말해서 6근과 6경, 즉 6내처와 6외처를 합친 것으로서 다음과 같이 표시 할 수 있다. 6근 6경 1) 안처(眼處)--- 7) 색처(色處) 2) 이처(耳處)----8) 성처(聲處) 3) 비처(鼻處)----9) 향처(香處) 6내처 4) 설처(舌處)--- 10) 미처(味處) 6외처 5) 신처(身處)----11) 촉처(觸處) 6) 의처(意處)----12) 법처(法處)
이 우주에 존재하고 있는 존재의 수는 셀 수 없이 많다. 그러나 이것을 요약해서 분류하면 주관계(主觀界)와 객관계(客觀界)로 나눌수 있다. 주관계를 구성하는 요소가 6근[6내처]이고, 또 객관계를 이루고 있는 요소가 6경[6외처]으로서 이것을 합친 것이 12처이다. 이와 같은 분류방법은 일체 존재의 주체인 인간의 인식능력을 중심으로 구분해서 체계화한 것이다. 일체법에서 12처를 논하는 근본 목적은 역시 제법무아의 진리를 밝히는데 있다. 특히 이것은 물질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물질이 실체라고 생각하거나, 물질 가운데 실체적인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설해진다. 일체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12종의 요소에는 고정 불변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 12처에 의해서 주관계와 객관계를 모두 포섭하고, 이 모든 것들은 무상이고 무아라고 하는 것이다. 12처는 중근기(中根機), 즉 법을 이해하는 능력에 있어서 중간 수준에 속하는 사람을 위한 가르침이다.
3. 18계(十八界, dhatu) 18계의 계(界)는 dhatu를 번역한 말로서, 구성요소, 또는 영역,종류의 뜻이다. 18계란 12처 즉 6근과 6경에 6식(識)을 합친 것이다. 18계의 분류 방법은 '근.경.식(根.境.識)의 3사화합(三事和合)이라는 원리에서 나온 것이다. 무엇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식 기능을 가지고 있는 기관[根]과 인식의 대상[境]과 인식작용[識]의 3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눈을 통해서 빛깔이나 형상을 보기 때문에 그것을 식별하는 작용이 일어나게 된다. 그것을 안식(眼識)이라 한다. 귀로서 소리를 듣기 때문에 이식(耳識)이, 코로서 냄새를 맡기 때문에 비식(鼻識)이, 몸으로 무엇을 접촉하기 때문에 신식(身識)이, 마음으로 무엇을 생각하기 때문에 의식(意識)이 일어 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6식(識)이다.이것을 아함경에서는[手聲喩經] 손뼉 소리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즉 "비유하면, 두 손이 서로 마주쳐 소리를 내는 것과 같다. 이와같이 눈과 빛깔을 인연하여 안식이 생긴다.(나머지 5 識도 마찬가지다)" 이 비유에서 한 손은 기관[根]과 같은 것이고 다른 한 손은 대상[境]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손뼉 소리는 식(識)과 같다. 18계의 상호 관계를 표시해 보면 다음과 같이 된다.
18계설에서는 일체의 존재를 이와같은 18계의 요소로 분류했다. 이때는 12처의 경우와는 달리 6근과 6경을 합쳐서 객관계로 보고, 6식을 주관계로 보았다. 18계에서는 일체존재를 12처에서 보다 상세하게 분류한 것이다. 12처를 설명할 때 보았듯이 일체를 구성하고 있는 12가지 요소 모두가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요소들이 만나서 생기게 된 식(識) 역시 실체적인 것일 수는 없다. 객관세계의 모든 것, 즉 물질적인 것도 실체가 없는 것이지만, 주관세계의 것, 즉 정신적인 것도 실체가 없는 것임에 틀림없다. 비유에서처럼 손뼉 소리를 낼 수 있는 2 손바닥도 실체(實體)적인 것이 아니지만, 실체적이 아닌 그 2 손바닥이 마주쳐서 일으킨 소리 역시 실체적이 아닌 것은 명백하다. 결국 18계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일체법은 물질적인 것에서도, 그리고 정신적인 것에서도 변하지 않고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18계를 설할 대상자는 물질과 정신에 모두 어두운 사람이다. 이와같은 사람은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모두를 실체적이고 영원하다고 믿는 것이다. 18계설은 이와 같은 사람을 위해 물질과 정신의 참모습을 보여 줌으로서 그것에 대한 집착을 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18계설은 하근기(下根機), 즉 법을 이해하는 능력이 가장 낮은 사람을 위한 가르침이다.
제7절 윤회(輪廻)와 업(業)
1. 윤회(samsara)
'윤회'(輪廻)라는 말은 samsara를 번역한 것이다. 이것은 'sam'과 sara라는 두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 'sam'은 '함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sara'는 '달리다. 빠르게 움직이다. 건너다.'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 'SR'에서 유래한 말이다. 따라서 samsara를 글자 그대 번역하면 '함께 달리는 것','함께 건너는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중국의 번역가들은 이 것을 윤회, 즉 '도는 것'이라고 번역했다. 경전에서는 윤회를 중생들이 여러 세계를 수레바퀴가 돌아가듯 그렇게 돌고 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한 존재가 죽으면 이 세상이나 다른 세상에 새로운 몸을 받아 태어나게 되고, 그곳에서 살다가 죽으면 다시 그곳이나 다른 세상에 태어난다. 죽는다는 것은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태어난다는 것은 죽는 다는 것을 의미한다. 존재는 여러 가지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삶과 죽음을 끝없이 되풀이한다. 그래서 이것을 "도는 것", 즉 윤회라고 한 것이다. 윤회의 원리는 간단하다.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에 짓는 모든 업(業 =行爲)은 틀림없이 결과를 낳게 되고, 그 결과가 다음 생(生)을 존재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업의 결과가 남아있는 동안에는 윤회는 계속된다. 그러나 업의 결과가 모두 소비되어서 없어지면 윤회는 끝나게 된다. 이것이 해탈, 또는 열반이다. 윤회는 욕계(欲界),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등 3계(三界: 3개의 세계), 또는 지옥도(地獄途), 아귀도(餓鬼途), 축생도(畜生途),아수라(阿修羅途), 인간도(人間途), 천상도(天上途)등 6도(六途: 6개의 세계)를 통해 전개된다. 3계와 6도는 다른 것 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동일한 세계다. 단지 그것을 구분하는 방법의 차이 때문에 다르게 설명되고 있을 뿐이다. 욕계란 욕망의 생활을 하는 존재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지옥, 아귀,축생, 아수라, 인간, 그리고 저급한 신들이 사는 세계다. 색계는 욕망을 떠났으나 아직 육체를 가지고 있는 존재들이 사는 곳이다. 이곳에 있는 존재들은 '천상의 존재'(天上存在), 또는 '신'(神)이라 불린다. 그러나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존재로서의 신은 아니다. 천상에서 살 수 있는 선업(善業)의 결과가 다하면 다시 다른 세계로 윤회전생하는 존재들이다. 이들의 육체는 미묘한 물질로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의 육안으로는 볼 수 없다. 무색계는 욕망은 말할 것도 없지만 육체조차도 없는 존재들이 사는 세계다. 이들은 순전히 정신적인 존재들이다. 지옥, 아귀, 축생등 3도는 나쁜 세계이므로 악도(惡途)라 한다. 지옥은 주로 땅밑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 사는 중생들은 업이 다 할 때까지 긴 세월동안 극심한 고통을 받는다. 아귀도에 사는 중생들은 목구멍이 바늘처럼 가는 반면, 배는 대단히 큰 존재들로서 항상 배고픔과 목마름 때문에 끊임없이 고통을 받는다. 축생도는 모든 종류의 벌레들, 물고기, 새, 짐승들이 사는 곳이다. 아수라도는 항상 신들[諸天]을 상대로 싸움을 하는 존재들이 사는 곳이다. 인간과 천상의 2도(途)는 선업을 지은 존재들이 사는 좋은 세계로 선도(善途)라 한다. 6도 가운데서 인간도는 중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은 큰 특혜다. 인간도에는 고(苦)도 있지만 그러나 이곳에서만이 수도를 할 수 있고 열반을 성취할 수 있다. 윤회의 원인이 되는 업(業)도 인간도에서만 짓게 된다. 왜냐하면 이 곳에서만 윤리적인 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다른 5도에서는 업을 소비할 뿐이다. '윤회'라는 말은 끊임없이 돌고 도는 순환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윤회하는 존재는 6개의 세계[六途]를 순서에 따라 차례대로 죽고 태어나면서 순환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도에서 목숨을 마치고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기도 하고 지옥이나 축생도에 떨어 질 수도 있다. 역시 천상에서 목숨을 마치고 인간도에나 지옥도에 태어날 수도 있다. 윤회의 시작은 알 수 없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시작이 없다'[無始]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 끝은 알 수 있다. 붓다 처럼 법을 깨쳐 더 이상 업을 짓지 않게 되고, 이미 지은 업이 모두 소멸되면 윤회의 바퀴는 멈추게 되는 것이다.
2. 업(業, karma)
업(業)이라는 말은 karma을 번역한 것이다. karma은 '완수하다, 만들다, 하다'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 KR가 그 어원으로, '활동' '일' '행위'등으로 번역된다. 그러나 경전에서는 일반적으로 '업'이라 하고 있다. 업은 육체로 짓는 행위인 신업(身業), 언어로 짓는 행위인 구업(口業), 마음으로 짓는 행위인 의업(意業)등 3업(三業)으로 구분한다. 3업을 세분하면 10업이 된다. 1).살생(殺生): 산목숨을 죽이는 것 2).투도(偸盜): 다른 사람이 주지 않은 물건을 훔치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취하는 것. 3).사음(邪淫): 부모와 형제와 자매로부터 보호되고 있는 여자를 범하는 것. 4).망어(妄語):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자신을 위하고 남을 위하고 혹은 재물을 위해 거짓말하는 것. 5).양설(兩舌):이간시키는 말로서 사람들을 갈라지게 하고 당파를 만들게 하는 것. 6).악구(惡口): 추한 말, 즉 욕을 하는 것. 7).기어(綺語): 꾸며대는 말, 즉 진실이 아닌 것을 말하고, 뜻이 아닌 것을 말하고, 법(法)이 아닌 것을 말하는 것. 8).탐(貪): 남의 재물과 모든 생활 기구를 엿보고 구하고 바라면서, 그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 9).진(瞋): 미워하고 성내는 것. 10).사견(邪見): 삿된 소견, 구체적으로 말하면 업과 그 과보를 믿지 않고, 이 세상과 저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 10업 가운데서 살생, 투도, 사음은 신업이고, 망어, 양설, 악구, 기어는 구업에 속하고 탐, 진, 사견은 의업이다. 업을 성질상으로 분류해서 선업(善業), 악업(惡業), 무기업(無記業)으로 나누기도 한다. 선업은 착한 행위로서 좋은 과보를 내게 되고, 악업은 악한 행위로서 나쁜 과보를 내게 된다. 무기업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중성적인 행위로서 과보를 낼 수 없다. 업이론은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라는 "인과(因果)의 법칙"위에 성립되어 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선한 행위와 악한 행위라는 "윤리적인 법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업 이론은 인과성과 윤리성의 2중 구조를 가지고 있다. 업이론의 인과성은 자연법칙에서와 같은 것이지만, 그 윤리성, 즉 선한 행위에는 좋은 결과가 나오고 악한 행위에는 나쁜 결과가 초래된다는 것은 종교적인 것이다. 업을 행할 때 업[행위] 그 자체는 순간적으로 끝나 버린다. 그러나 업은 그것을 행한 존재 속에 반드시 어떤 흔적이나 세력을 남기게 된다. 마치 향(香)을 태울 때 향이 다 타서 사라진 뒤에도 향기가 옷에 배어들어 남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업이 남긴 이 세력을 업력(業力)이라 하는데, 이것은 잠재적인 에너지로 되어서 존재 속에 머물러 있다가 기회가 오면 반드시 거기에 상응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업력은 존재들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들로 하여금 살아가게 하는 동력(動力)으로 작용하고, 죽은 뒤에는 그들의 미래를 만드는 에너지로 된다. 업은 절대로 그냥 소멸되지 않는다. 이 생(生)에서 뿐만 아니라 여러 생을 통해서 틀림없이 그 결과를 나타내게 된다. 그래서 업은 존재의 현재의 운명뿐만 아니라 미래의 운명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존재의 모든 것은 업에 의해서 만들어지게 된다. 사람으로 태어날 업을 지었으면 다음 생에 사람으로 태어나게 되고 짐승이 될 업을 지었으면 짐승으로 태어나게 된다. 한 존재가 현재 가지고 있는 모든 것, 즉 모습,성격, 환경, 태어 난 국토, 수명의 길고 짧음, 육체적인 조건 등은 그 존재가 과거에 지은 업의 결과이다. 역시 현재 짓고 있는 업은 그 존재의 미래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재료가 된다. 이처럼 존재의 모든 것은 업에 의해 결정된다. 업은 개인의 운명뿐 아니라 공동체의 운명도 결정한다. 단체나 사회의 운명은 그 단체나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들이 짓는 업에 의해 결정된다. 한 존재는 그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개인 업, 즉 불공업(不共業)을 짓는 것과 동시에, 역시 그 존재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의 운명을 결정하는 공업(共業)도 짓게 된다. 업은 존재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궁극원리(窮極原理)이다. 인간의 행위를 업(業)이라고 했지만 그러나 모든 행위가 업은 아니다. 업다운 업이 되기 위해서는 과보(果報)를 초래할 능력을 가지고 있는 행위여야 한다. 그렇지 못한 행위는 업이 아니다. 과보를 초래할 수 있는 업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2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 의도적인 행위여야 한다. 무의식적으로 행해진 행위는 과보를 초래할 힘을 가지지 못한다. 둘째, 윤리적인 행위여야 한다. 즉 선한 행위이거나 악한 행위여야 한다.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행위, 즉 무기업은 중성적인 업으로서 무정란(無精卵)과 같은 것이다. 이 업은 과보를 초래할 능력이 없다. 따라서 이 무기업은 엄밀한 의미에서 업이라고 할 수 없다. 업은 인간만이 지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만이 의도된 행위와 윤리 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동물의 행동은 본능적인 것일 뿐 의지작용이 밑바탕이 된 행위는 아니다. 역시 동물들은 윤리 생활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6도(六途) 가운데서 인간도에서만 업을 짓고, 나머지 5도에서는 업을 소비할 뿐이다.
3. 과보(果報)
업이 지어지면 틀림없이 그 결과가 타나게 된다. 그것을 과보(果報:phala)라 한다. 업과 과보의 관계는 식물에 비유해서 설명될 수 있다. 씨앗을 심으면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가 열린다. 열매의 맛과 성질은 전적으로 그 씨앗을 따른다. 마찬가지로 업을 지으면 그것은 성숙하게 되고 언젠가는 반드시 과보를 초래한다. 그리고 과보의 성질은 전적으로 업의 성질에 좌우 된다. 예를 들어 같은 밭에 고추 씨앗과 가지 씨앗을 심은 뒤 동일한 조건 아래에서 고추와 가지를 키우더라도 그 결과는 완전히 다르게 나타난다. 고추 씨앗의 결과는 고추로 나타나게 되고, 가지 씨앗의 결과는 가지로 나타나게 된다. 고추와 가지의 모양과 맛은 그것들을 키우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이미 그 씨앗 속에 들어 있다. 업과 과보의 원리도 이와 같은 것이다. 업이 일단 결정되고 나면 그 과보는 피 할 수 없다. 그것은 절대로 그냥 소멸되지 않는다. 언젠가는 업을 지은 사람에게 그 결과가 나타나고야 만다. 여기에는 어떠한 예외도 있을 수 없다. 법구경(法句經)에서는 이것을 "하늘에도 바다에도 산중 동굴에도 사람이 악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곳은 아무데도 없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업은 개인의 의지작용(意志作用)에 의해 짓는 것이므로 전적으로 개인적인 것이다. 자신이 지은 업을 다른 존재에게 이전시킬 수 있다거나 다른 사람이 지은 업의 과보를 자기가 대신 받을 수는 없다. 설사 그것이 선업의 과보일지라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업의 원리를 "자신이 짓고 자신이 받는 원리",즉 자작자수(自作自受)의 원리, 또는 자업자득(自業自得)의 원리라고 하는 것이다.
업이 일단 이루어지면 그 성질에 따라 틀림없이 그 과보가 있게 된다고 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산술적(算術的)인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2개의 똑같은 업을 지었다 해도 그 결과는 반드시 동일하지는 않다. 상황에 따라 그 결과는 다르게 나타난다. 예를 들면 똑 같은 보시를 하더라도 그 보시를 누구에게 하는가에 따라 그 과보는 다르다.음식물을 짐승에게 주는 것보다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 결과가 더 크고, 범부에게보다는 수행자에게 주는 것이 더욱 큰 과보를 초래하게 된다. 수행자에게 하는 보시보다는 도를 이룬 붓다와 같은 존재에게 하는 것이 훨씬 더 큰 과보를 받을 수 있다. 짐승을 죽여도 죄가 되지만 사람이나 성인(聖人)을 죽이면 그 죄는 더욱 무겁다. 이와 같은 원리는 붓다가 코살라국의 프라세나짓왕에게 한 설명을 보면 더 잘 이해 할 수 있다. "대왕이여 알아야 하오. 마치 저 농부가 땅을 잘 다루고 잡초를 없앤 뒤에 좋은 종자를 좋은 밭에 뿌리면 거기에서 나오는 수확은 한량이 없지마는 그 농부가 땅을 잘 다루지 않고 잡초들을 없애지 않고서 종자를 뿌리면 그 수확은 말할 것도 못되는 것과 같소." 즉 같은 넓이의 밭에 같은 양의 종자를 심는다해도 밭의 상태에 따라 수확의 양도 다르게 나 타나는 것처럼 업의 과보가 나타나는 것도 동일하다. 업이 일단 결정된 뒤에는 외부의 영향은 미칠 수 없다고 했지만, 그러나 업을 지은 사람의 노력에 따라 예상되는 결과를 다소 변화시킬 수 있다. 업을 지은 뒤에 다시 어떤 업을 짓느냐에 따라 이미 결정된 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과보를 나타나지 않게 할 수 있다거나 완전히 다른 것으로 되게 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경전에서는 이것을 소금물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한 움큼의 소금을 한 잔의 물 속에 넣으면 그 물은 짜서 마실 수 없게 되지만 그것을 큰 그릇의 물 속에 넣으면 마실 수 있는 물이 된다. 한 잔 속의 물에 넣은 소금의 양과 큰그릇의 물에 넣은 소금의 양은 동일 하지만 물의 양에 따라 소금물의 농도가 다르게 되므로 마실 수 있는 물이 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한 물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이미 결정된 업도 우리의 노력에 의해 그 결과를 어느 정도까지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나쁜 업을 지었어도 그 뒤에 좋은 업을 많이 지으면 이미 지은 나쁜 업에 대한 과보는 나쁘게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원리 때문에 업 이론은 기계론적인 이론이 아니게 된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자신의 의지와 노력에 의해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과보가 나타나는 시기는 업의 성질과 업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다. 그것은 곡식이 종자에 따라 싹이 나오는 시기가 다른 것과 같다. 또한 동일한 종자라 해도 온도나 습도등 종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싹이 일찍 나오기도 하고 늦게 나오기도 한다. 업의 과보가 나타나는 시기도 이와 같아서 일정하지가 않다. 과보가 나타나는 시기를 3 종류로 나눈다. 이 생에서 지어서 이 생에서 그 과보가 나타나 업을 순현업(順現業), 그 과보가 다음 생에 나타나는 업을 순생업(順生業), 차후생 또는 여러 생에 걸쳐 나타나는 업을 순후업(順後業)이라 한다. 그리고 과보가 나타나는 시기가 정해진 업을 정업(定業)이라하고 그 반대인 것, 즉 과보가 나타나는 시기가 정해지지 않은 업을 부정업(不定業)이라고 한다. 업을 지으면 틀림없이 그 과보를 받게 되지만 그 결과는 항상 동일하지는 않다. 수많은 변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업을 지으면 어떤 과보를 받는다고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대체로 선업을 지은 사람은 천상이나 인간계, 즉 선도(善途)에 태어나고, 악업을 지은 사람은 주로 지옥, 아귀 축생의 세계, 즉 악도(惡途)에 태어난다고 말 할 수 있다. 경전에 의하면 악업을 지은 사람은 설사 인간계에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 해도 다음과 같은 나쁜 조건 속에 있게 된다는 것이다. 즉 살생(殺生) 업을 많이 지으면 건강이 좋지 않거나 일찍 죽게 되고, 투도(偸盜)업을 많이 지으면 가난하게 태어난다. 사음(邪淫) 업을 많이 지으면 가족들이 정숙하지 못하게 되고, 망어(妄語)업을 많이 지으면 말에 신용도 없고 다른 사람에게 멸시를 받게 된다. 양설(兩舌) 업을 많이 지으면 정신이 안정되지 못해서 항상 불안 속에 살게 되고 가정불화가 많을 뿐 아니라 친구들에게 버림을 받게 된다. 악구(惡口)업을 많이 짓는 사람은 얼굴이 못생 기고 듣기 싫은 목소리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항상 미움을 받게 된다. 기어(綺語)업을 많이 지으면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고 친척들이 흩어진다. 탐욕(貪慾)업과 화를 내는 업[瞋喪]을 많이 지으면 다음 생에서도 탐욕심과 화를 많이 내게 된다. 그리고 사견(邪見) 업을 많이 짓는 사람은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마음이 어지러워 안정되지 않는다. 그리고 문화중심지에 태어날 기회를 가질 수 없게 되어서 붓다의 가르침을 들을 수 없다. 심하면 귀머거리, 장님, 벙어리가 되고 선법(善法)과 악법(惡法)을 구별할 수 없게 된다.
4. 윤회의 주체문제(主體問題)
우리는 일반적으로 인간이 죽으면 육체는 소멸하지만 영혼은 계속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윤회를 한다면 바로 이 영혼이 다른 몸을 받아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힌두교와 자이나교는 어떤 존재가 죽어 육체가 사라지면 영혼과 같은 존재인 아트만(atman)이나 지바(jiva)가 윤회를 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무아(anatman)를 주장하는 불교에서는 이와 같은 윤회의 주체를 인정할 수 없다. 불교에 의하면 인간 존재란 비실체적(非實體的)인 몇 개의 요소들[五蘊]이 어떤 조건에 의해서 임시적으로 모여 있는 하나의 집합체에 불과한 것이다. 여기에 고정 불변하는 어떤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존재가 사라질 때 '누가' 또는 '무엇이', 그리고 '어떻게' 이 생(生)에서 다음 생으로 윤회전생(輪廻轉生)하게 되는 것인가. 사실 윤회의 주체(主體)를 인정하지 않는 불교에서 이 문제는 가장 설명하기 어려운 것 중의 하나다. 부파불교 시대에 이르러 이 문제는 부파간에 하나의 중요한 교리적인 쟁점이 되지만, 초기 경전에서도 이미 이 문제와 관련한 몇 가지 설명이 등장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 가장 확실한 설명을 해주고 있는 곳은 잡아함(335)의 제일공경(第一空經)이다. 이 경에 의하면 윤회를 위해서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영혼과 같은 어떤 것이 반드시 옮겨 가야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윤회란 고정불변하는 어떤 주체가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옮아 가는것'[移轉]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가 변화하면서 '계속'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을 붓다는 "업과 과보는 있지만 그것을 짓는 존재는 없다. 이 존재(此陰: 죽는 존재)가 사라지고 다른 존재(異陰: 태어나는 존재)가 서로 계속된다"[有業報而 無作者 此陰滅已 異陰相續]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것을 다른 곳에서는 우유의 비유로써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인도에서는 우유로써 4종의 요리를 만들 수 있다. 즉 "우유가 낙(酪)이 되고 , 낙이 생소(生 )로 되고, 생소가 숙소(熟 )로 되고, 숙소가 제호(醍 )로 된다." 우유가 낙에서 제호로 될 때 우유에서 제호까지 변하지 않고 계속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유가 변해서 낙이 되고, 낙이 변해서 생소로 된다. 그리고 생소는 변해서 숙소로 되고 숙소가 변해서 제호로 된다. 낙은 더 이상 우유가 아니고 생소 역시 더 이상 낙이 아니다. 우유에서 제호 사이에는 동일성은 없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우유 없이는 낙이 있을 수 없고, 낙 없이는 생소도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숙소 없이는 제호도 생길 수 없다. 물이나 기름과 같은 다른 물질로서는 아무리 우유에서와 같은 조건을 갖추어 준다해도 낙이나 소나 제호는 얻을 수 없다. 나비의 비유를 들어 이것을 좀 더 쉽게 설명할 수 있다. 나비의 알(卵)은 애벌레로, 그리고 애벌레에서 번데기로 변하고 번데기에서 결국 나비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알의 상태에서 나비로 되는 전 과정을 거치면서 어떤 고정불변하는 것이 전달되지는 않는다. 알이 변해서 애벌레로 되고, 그리고 애벌레가 변해서 번데기로, 번데기가 변해서 나비로 되는 것일 뿐이다. 알과 나비는 같은 것이 아니다. 그리고 알의 상태에서 나비로 되기까지 변하지 않고 옮겨가는 '어떤 것'은 없지만 알과 나비 사이에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나비 알속에는 이미 나비가 될 수있는 조건이 들어 있다. 그래서 나비는 나비알에서만 나오지, 모기 알에서는 나올 수 없다. 비유에서와 마찬가지로 무아윤회이론에서도 한 존재가 다른 존재로 윤회할 때 고정불변하는 영혼과 같은 실체가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 존재 전체가 변화해서 다른 존재로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업(karman)이다. 한 존재가 살아 있을 때 지은 업은 잠재적인 에너지, 즉 업력(業力) 상태로 그 존재 속에 축적되어 있다가 존재가 죽으면 그 업력이 작용해서 다음 존재를 만든다는 것이다. 과거에 지은 업은 현재의 존재를 만들었고, 현재 짓는 업은 미래의 존재를 만든다. 업의 성질에 따라 우리는 천상의 존재가 되기도 하고 축생(畜生)이 되기도 한다. 여기에 아트만(atman)과 같은 윤회의 주체가 반드시 있어야 할 필요성은 없다. 나비의 알이 나비로 되는데 고정불변한 어떤 요소가 없어도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직 문제가 남아 있다. 현재의 존재에서 다음 존재로 넘어가는 영혼과 같은 것이 없다면 현재의 존재가 지은 업의 결과[果報]는 누가 받게 되는가. 윤회와 업사상의 중심이 되는 것은, "자신이 지은 업은 자신이 그 결과를 받는다."라는 자업자득(自業自得)의 원리인데, 업을 짓는 존재와 그 과보를 받는 존재가 동일하지 않다면 이 원리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우유와 나비 알의 비유에서처럼 전자와 후자가 동일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원리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우유와 제호(醍 )는 같은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우유의 질이 좋지 않을 때는 그 결과인 제호도 질이 좋지 않을 것이다. 나비의 알이 병든 것이라고 한다면 그 알이 변해서 되는 나비 역시 건강한 나비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우유와 제호, 또는 나비의 알과 나비는 동일한 것이 아니라고 해서 우유나 나비 알이 가진 결함에 대한 결과를 제호나 나비가 받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다. 좀 후기 경전이긴 하지만 <밀린다판하>에서는 이것을 망고의 비유로서 재미있게 설명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남의 망고밭에서 망고를 훔치다가 주인에게 붙잡혔다. 그러나 망고 도둑은 그 나무 주인에게 자신은 죄가 없다고 주장한다. 도둑의 논리는 주인이 심은 망고는 이미 오래전에 땅속에서 썩어 버렸고, 자신이 딴 망고는 주인이 심은 그 망고와는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그럴 듯 하지만 결국 망고나무 주인이 심은 망고가 자라서 망고나무가 되고 그 결과로서 현재의 망고 열매가 열였기 때문에 현재의 망고는 그 나무를 심은 사람의 것임에 틀림없다. 현재의 망고와 과거의 망고는 동일한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것이다. 무아윤회이론에서의 과보 문제도 마찬 가지다. 과거의 존재와 현재의 존재는 다르지만 과거의 존재가 지은 업의 결과는 현재의 존재가 받게 된다. 밀린다판하에서 나가세나 장노는 이것을 간단하게 한 마디로 결론을 내린다."다시 태어나는 자는 죽은 자와 다르다. 그러나 그는 죽은 자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그는 죽은자가 지은 업(의 과보)에서 벗어 날 수 없다."
초기불교의 주요개념
1. 삼십칠조도품(三十七助道品)
'도품'이란 불교의 지고한 목적인 깨달음을 실현하고 또한 지혜를 얻기 위한 실천도의 종류란 뜻이다. 여기에 37항이 있으므로 삼십칠도품(三十七道品)이라 하는 것은 아래의 일곱 가지를 합한 것이다.
① 사념처(四念處)는 삼십칠조도품 중 첫 번째의 수행도로서, 범부의 상(상) 낙(樂) 아(我) 정(淨)의 네가지 치우친 견해를 깨뜨리는 것이다. 첫째 : 육신은 죽으면 썩어지는 부정한 것이라고 관한다. 둘째 : 음행, 재물 등 우리의 마음에 즐거움이라고 느껴지는 것들은 진정한 즐거움이 아니라고 관한다. 셋째 : 우리의 마음은 대상에 따라 늘 변화하고 생멸하는 무상한 것이라고 관한다. 넷째 : 앞의 세 가지를 제외하고는 일체만유에는 실로 자아라고 할 실체가 없으며 내가 없으므로 내 것이라고 할 것도 없다고 관한다.
② 사정근(四正勤)은 삼십칠조도품 가운데 제2의 수행도로서 네 가지 바른 노력으로 태만한 마음과 장애를 끊도록 하는 것이다. 첫째 : 아직 나타나지 않은 악을 방지하기 위해 부지런히 감관을 단속하는 것이다. 둘째 : 이미 생긴 악을 끊기 위해 노력하는 것. 셋째 : 아직 나타나지 않은 선을 나타내기 위해 힘쓰는 것. 넷째 : 이미 나타난 선을 증장시키도록 노력하는 것.
③ 사여의족(四如意足)은 삼십칠조도품 가운데 세 번째 수행도로서 이를 여의족(如意足)이라 하는 것은 이에 의해 쌓은 정력(定力)으로서 여러 가지의 신변(神變)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여의(如意)는 뜻대로 자유자재한 신통의 뜻이다. 이 정(淨)을 얻는 수단에 욕여의족, 정진여의족, 심여의족, 사유여의족의 네 가지로 이것은 각기 서원과 노력과 심념(心念)과 관혜(觀慧)의 힘에 의하여 일어난 힘을 말한다.
④ 오근(五根) : 근(根)이라 함은 뛰어난 작용이 있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곧 올바른 깨달음의 길로 나가게 하는데, 뛰어난 작용을 하는 것이므로 힘써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신근(信根) 불,법,승(佛.法.僧)에 대해 무너지지 않는 깨끗한 믿음 ·근근(勤根)인 사정근 ·염근(念根)인 사념처 ·정근(定根), 즉 사선(四禪) ·혜근(慧根)이라 하며,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사성제(四聖제)를 바르게 아는 것을 말한다. ⑤ 오력(五力)에서 '력'이란 악을 쳐부수는 힘이 있음을 뜻한다. 오근을 닦을 때 얻어지는 힘이다. ·신력(信力) : 불법을 믿고 다른 것을 믿지 않는 것. ·진력(進力) : 선을 짓고 악을 폐하기에 부지런한 것. ·염력(念力) : 사상을 바로 가지고 사특한 생각을 버리는 것. ·정력(定力) : 선정(禪定)을 닦아 어지러운 생각을 없애는 것. ·혜력(慧力) : 지혜를 닦아 불교의 진리인 4제(제)를 깨닫는 것.
⑥ 칠각지(七覺支)란 7종의 법이 깨달음의 지혜를 도와준다는 뜻으로 각지(覺支)라고 하는데 이는 차례로 일어나서 그것을 닦아 익혀 나가게 된다. ·택법각분(擇法覺分) : 지혜로 모든 법을 살펴서 선한 것은 골라내고 악한 것은 버리는 것. ·정진각분(精進覺分) : 쓸데없는 고행은 그만두고 바른도에 전력하여 게으르지 않는 것. ·희각분(喜覺分) : 참된 법을 얻어 기뻐하는 것. ·제각분(除覺分) : 그릇된 견해,번뇌를 끊어버릴 때에 능히 참되고 거짓됨을 알아서 올바른 선근을 기르는 것. ·사각분(捨覺分) : 바깥 경계에 집착하던 것을 버리는 것. ·정각분(定覺分) : 정에 들어서 번뇌 망상을 일으키지 않는다. ·염각분(念覺分) : 불도를 수행함에 있어 잘 생각하여 정(定)과 혜(慧)를 고르게 하는 것. 마음이 혼침(昏沈)하면 택법각분, 정진각분, 희각분으로 마음을 일깨우고 마음이 들떠서 흔들리면 제각분,
우주의 기원에 관한 관심은 본질적으로 형이상학적의 범주에 속한다. 거친 자연 속에 내던져진 인간들에게 있어서 가장 원초적 의문은 자연과 우주의 근원에 대한 의문이었다. 그것을 체계화하고 논리화해온 노력이 철학과 종교의 근본 과제 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에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형태를 크 게 벗어나지 않는다.
첫째는 우주 전변설 宇宙轉變說 이다. 즉, 태초에 어떤 절대자 혹은 근원적 힘에 의하여 우주가 생성 유지된다는 생각이다. 기독교의 천지 창조론 같은 것이 대표적 실례이지만, 중국 신화, 한국신화 등에서도 주류를 이루는 사고 경향 이다. 둘째는 적취설 積聚說 이다. 이를테면 다 多 에서 다가 생성되었다는 입장이 다. 본래부터 우주는 혼돈의 상태였고, 혼돈이 가라앉으면서 많은 존재들이 저 절로 생겨났다는 주장이다. 셋째는 인연설 因緣說 이다. 태초의 절대자에 대한 주장은 억지 논리에 불과하 다는 반성에서부터 출발한다.
사물의 생성과 소멸에는 필연적인 인과 因果가 상존하며, 그 인연의 실타래가 바로 우주의 비밀이라는 입장이다.
불교 같은 종교가 가장 대표적인 예가 될수 있다.
물론 이와 같은 세 가지 입장은 각자의 선명한 논리 구조와 함께, 치명적인 모순성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해겔이 말한 대로 인간, 그 자체가 이미 모순이 다. 이성 자체에도 모순이 깃들어 있으며, 생명의 기원 또한 논리적이지는 않은 것이다. 따라서 어느 쪽이 더 논리적이냐 하는 논쟁은 무의미하다. 다만 우주의 생성에 대한 인간 사색의 흔적을 더듬어 보는 일로 만족할 따름이다. 동양인에게 있어서 이와 같은 사색의 흔적은 이미 기원전 10여 세기로 부터 비롯된다. 이 글에서는 불교의 우주관을 중심으로 인도와 중국의 경우에 관해서도 간략하게 언급하고자 한다. 중국의 천지 창조 신화는 다양한 장르를 갖고 전개된다. 전변설의 가장 대표격으로는 반고 盤古신화가 꼽힐 수 있고, 주자학의 경우에는 역 易 의 세계관을 들 수 있다.
반고 신화에 의하면 천지가 개벽하기 이전의 우주는 달걀 속 같았다. 달걀 껍질에 꽉 막힌 우주는 칠흙 같은 어두움과 혼돈에 휩싸인 이른바 카오스의 상태였다. 반고는 이 달걀 같은 우주 속에서 무의식의 깊은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가 무의식의 상태에 있은 지 1만 8000년, 드디어 그는 잠에서 깨어난다. 그는 곧 숨이 막히고 답답하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고, 그 공포와 절망을 이기지 못해서 달걀 껍질을 깨버렸다. 온 우주가 진동하면서 굉음이 천지를 뒤흔들었 다. 이 상황 속에서 우주의 청명한 정기는 하늘로 훨훨 날고 있었다. 한편 혼탁한 물체들은 아래로 처져내려 갔다. 하늘과 땅이 갈라졌지만, 반고는 이 둘이 서로 엉킬 것을 염려했다. 그래서 반고는 머리로 하늘을 이고 땅을 두 발로 눌렀다. 반고는 우주가 다시 혼돈과 암흑에 휩싸이지 않게 하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였다. 위대한 천지 창조자인 반고는 그 거대한 몸을 눕혔다.
그는 죽은 것이다. 그의 육신은 죽어서도 썩지 않았다. 반고의 입김은 바람과 구름이 되었다. 그의 목소리는 뇌성으로 변했다. 왼쪽 눈은 태양으로, 오른쪽 눈은 달로 변하여 세상을 밝게 비추었다. 온 몸은 대지를 둘러싸고, 그의 손발은 대지의 네 극이며, 다섯 개의 명산이 되었다. 혈맥은 하천으로 변하여 흘렀고, 근육은 사방을 연결하는 도로가 되었다. 살은 기름진 옥토로 변하고, 머리털이나 수염은 하늘의 별이 되었다. 피부의 털은 화초와 수목으로 피어났고, 치아나 뼈는 오색 영롱한 금은 보석으로 바뀌었다. 땀방울은 비와 이슬이 되어 대지를 적신다. 반고는 죽어서도 온 세상을 풍요롭게 하였고, 아름답게 보살펴주었던 것이다.[ 중국 신화의 모티브는 Tien(天) 에 대한 외경 畏敬 이다. 이외 에도 <<회남자>>, <<장자>> 등에 나타나는 천지 창조설도 같은 맥락이다.
김열규, <<동양의 신 들>>(한국능력개발사,1978),pp.208-210 ]
2.인도의 신화(Tad Ekam의 변형)
태초에는 무 無 도 없고 유 有 도 없고, 공계 空界도 없고, 또한 天界도 없 었다. 무엇이 이를 뒤덮었던가? 그것은 어디에 있었던가? 누가 이를 옹호했던 가? 저 물은 어떻게 있었으며, 밑없는 깊이는 어떻게 있었던가? 그때에는 죽음도 없고 불사不死/Amrta 도 없었으며, 낮과 밤의 구별도 없었다. 오직 타드에 캄 Tad Ekam/that Oneness/彼唯一者 만이 소리도 없이 스스로 호흡하고 있었으며, 그 밖에는 일찍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암흑 뿐이었다. 이 모든 것은 암흑에 뒤덮힌 빛 없는 파동계 波動界 였다.
허공으로 둘러싸인 원자 原子 /Abhu는 그 자신의 열 熱 의 힘으로 태어났다. 그것이 전개되어 처음으로 애욕 愛慾/Kama 이 생겼고, 이것은 식 識의 최초의 종자였다. 실로 누가 이를 알리오. 누가 지금 여기서 이를 설명할 수 있으리오. 그는 어디로부터 생겨나왔으며, 어디로부터 이 조화가 나오는가? 여러 신들도 천지 창조 이후에 생겨났으며, 그렇다며 그 어디로부터 생겨났는지를 아는 자는 누구냐? 그는 알리라. 이 조화의 원천을 아는 사람은 최고천 最高天 에서 이 세계를 관장하고 있다. 그는 진실로 알리라. 그러나 아마 그도 또한 모르리라. [<<리그베다>>, Nasadasiya Sukha, X,129.pp.1-6;졸저,<<인도철학사상사>>(경서원,1980),pp.20-21. 이 신 화의 패턴은 근원적 세계 원리의 모색이며 Tad Ekam->Kama->Manas라는 도식을 나타낸다.]
즉, 유일자에서 천지 창조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설명인데, 인도 신화에서 보이는 절대자는 이 외에도 원인 原人/Puraush, 도 道/Rta, 시간 時間/Kala 등이 있다. 특히 제일 마지막 구절에 보이는 절대자에 대한 회의 懷疑 가 관심을 끈다. 불교학자들은 이를 유일신교에서 범신론 汎神論에 이르는 과정으로 파악 하고 있다. 이 사상을 보다 세련되게 다듬은 것이 우달라카 Uddalaka의 존재론 이다. 그는 우파니샤드 Upanisad에 등장하는 철인 哲人인데, 우주 창조의 근원을 사트 Sat라고 설명하였다.
즉, 태초에 우주에는 사트만이 존재하였다. 이 사트는 스스로 생각하였다. 내가 많아지리라. 번식하리라 고. 그는 불 Tapas을 처음으로 만들었다. 그 불은 물 Apas을 만들었다. 어디에서나 고열 苦熱을 느끼면 사람이 땀을 흘리는 것이 그 까닭이다. 그때에 불로 말미암아 물이 생긴다고 했다. 그 물은 곡식을 만들어냈다. 이때 사트는 다시 생각했다. 내가 아트만 Atman으로서 지 地, 수 水, 화 火, 풍 風 속에 들어가 명색 名色/Namarupa을 전개하리 라. 결국 만유 萬有 는 지,수,화의 삼대 요소로 구성되었으며, 그 세가지 요소가 사물을 전개시킨다. 사트는 만물을 만들었지만, 다시 그 안에 용해됨으로써 사물은 신 자체가 된다.
이 신화에서 가장 주목되는 부분은 사트의 존재 변화 이유이다. 즉, 천지 창조의 절대자가 완전무결하다면, 왜 불완전한 세계를 만들었으냐 하는 의문이 제기 될 수 밖에 없다. 언제나 그 해명은 궁색하기 마련인데, 이곳에서는 내가 많아 지리라. 번식하리라 는 의지로 해석하고 있다. 또 그것이 애욕이 근본이라는 부 연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불교는 이와 같은 가설 假說을 모두 부정한다. 즉, 절대자에 대한 천지 창조설과 본래 사물이 존재했다는 주 장을 부정하면서 인연설이라는 새로운 우주론을 펼쳐 나가게 되는 것이다.
II. 불교에서 본 세계 ·자연 ·우주
1. 우주의 생성과 소멸
앞서 살핀 중국이나 인도 신화의 경우와 비교할 때, 불교의 우주론은 선명하게 설명되고 있지 않다. 팔만대장경의 방대한 가르침 속에서도 분명하게 불교적 우주론을 설명하는 경전은 많지 않다. 간혹 있다 하더라도 상당히 관념적이고 애매모호하다. 그 까닭은 불교가 이 문제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관여하기를 꺼려했기 때문이다. 석가세존은 삶의 목표를 깨달음으로 선언하였다. 그리고 우주의 기원에 대한 논의는 그 깨달음의 완성에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고 파악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러 경전들 속에 나타난 불교적 우주론을 정리하여 이해하는 도리밖에는 없다. 불교의 우주적 신화론을 나타내는 경전들로서는 <<세기경 世紀經>>,<<대방광불화엄경 大方廣佛華嚴經>> 등을 꼽을 수 있다.
불교에서는 우주의 기원을 업業으로 설명한다. 카르마 Karma라는 인도 말을 옮긴 것인데, 그것은 행위 자체, 또 행위로부터 빚어지는 갖가지 과보 果報 들을 의미하는 말이다. 불교에서는 생명있는 것들을 총칭하여 중생이라고 하는 데, 그 중생들의 생성 소멸은 업에 의하여 주도된다고 설명한다. 업 가운데 가장 근원적인 것은 무명업 無明業/Avidya 이다. 사물을 명료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늘 이기적으로 판단하게 하는 근본이다. 이 무명업으로부터 갖가지 번뇌가 생기고, 이 번뇌들의 집합이 또 다른 생존 형태를 결정짓는다. 이것을 윤회 Samsara라고 말한다.업과 윤회는 전생 前生, 금생 今生, 후생 後生의 삼생 三生을 관통하는 광폭한 힘 이다. 이 경우 무명업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를 명확히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닭과 달걀의 관계와 마찬가지다. 만약 어떤 근본이 있어서 다른 것을 생성한다는 수직적 사고를 갖는 한, 이것은 결코 설명될 수 없다. 닭과 달걀은 어느 것이 먼저 생성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닭이 있으려면 달걀이 있어야 하고, 달걀이 있으려면 닭이 있어야 한다. 그 둘은 서로의 필요성, 즉 인연에 의하여 생겨난 것일 따름이다. 따라서 무명업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느냐 하는 물음은 이미 인과론적 사고에서 벗어난 견해일 따름이다. [불교의 인과론을 생사의 윤회 유전 관계로 설명한 것을 십이연기 十二 緣起라 한다. 그러나 근본적인 무명업의 최초 생성에 관해서는 설명되지 않는다. 무명처럼 노사 老死까지 이르는 열두 단계는 다만 둥근 원의 순환 관계처럼 서로 얽혀 있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 업보의 전개가 바로 우주요, 자연이며, 삼라만상이다. 불교에서는 이 업보의 전개로서 누릴 수 있는 생명 형태를 여섯 갈래라고 설명한다.
지옥 : 가장 고통받는 삶의 형태. 아귀 : 굶주림에 시달려야 하는 생존 형태. 축생 : 짐승들의 세계, 난폭하고 이성적이지 못한 삶. 수라 : 폭력만이 존재하는 생존 형태. 인 : 인간들의 삶. 천 : 하늘나라의 신적인 존재. 이별의 아픔이 남는 세계.
위의 셋을 삼악도 三惡道, 밑의 셋을 삼선도 三善道라 하며, 통틀어 육도윤회 六道輪廻라 말한다. 태초의 우주에는 중생들의 업력 業力이 있었다. 그에 따라 허공에 바람이 불기 시작하여 풍륜 風輪이 생긴다. 이 풍륜 위에 구름이 일어나며, 또 다시 수륜 水輪이 생긴다. 이 수륜 위에 다시 바람이 일어나 금륜 金輪을 생기게 한다. 금륜 위에 수미산이 솟고, 이것을 중심으로 하여 그 주위에 일곱 산이 생긴다. 이들 산과 산 사이에 물이 고여 여덟 바다가 생기는데 수미산 부근의 일곱 산 사이에 생긴 바다를 내해 內海라고 하며, 그들과 바깥 세계와 의 사이에 생긴 바다를 外海라고 한다. 이 외해 속에 사대주 四大洲가 있어서 수미산의 동서남북에 위치 한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세계(지구)는 수미산의 남쪽섬부주 贍部洲이다. 우주의 중앙에 있는 수미산은 절반이 물에 잠겨 있고, 그 위가 지상으로 솟아 있는데, 해와 달, 별들이 수미산을 싸고 허공을 맴돈다.
중생들이 모여 사는 세계는 수미산의 남쪽 섬부주이지만, 그 중턱에서부터 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다. 중생의 경계는 크게 욕계 欲界, 색계 色界, 무색계 無色界의 삼계 三界로 나뉜다. 욕계는 욕심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즉, 소유욕으로 파탄이 빚어지고, 희로애락이 상존하는 바, 그 정도에 따라 앞 서 말한 육도 윤회가 있게 된다.욕계 다음의 세계가 색계이다. 욕심은 멸하였지 만 물질 은 남아 있다. 즉, 소멸에 따른 고통은 감수해 야 하는 세계이다. 색계 는 크게 나누면 사선천 四禪天이지만, 세분하면 십팔천 十八天이 된다. 마지막 의 세계를 무색계라고 한다. 물질마저도 버렸지만, 관념 만은 남아 있는 세계 이다. 즉, 관념적인 아픔, 사랑 등이 남아 있는 세계이다. 이도 세분하면 네 가 지로 나눌 수 있다.
다음에 이들 세계가 생성 소멸하는 시간적 단위에 대해서 살펴본다. 우주는 성 成, 주 住, 괴 壞, 공 空 의 네 가지 단계를 반복한다. 그 네 기간의 단위는 겁 劫 이다. 이 겁은 칼파 Kalpa 라는 시간 단위로서 무한한 시간 개념이다. 앞서 말한 우주와 수미산의 생성 기간을 成劫 이라고 한다. 다음에 주겁 住劫 이라는 시대가 온다. 세계는 큰 변동이 없지만 중생들의 과보에는 많은 변화가 있다. 초기의 중생들은 형색이 아름답고 빛을 내며, 하늘을 날 수도 있고 수명도 장구 한다. 그러나 좋은 음식, 맛에 탐착함으로써 차츰 몸이 더러워진다. 우선 남녀 의 성별이 생겨나고, 갖가지 이기적 욕심 때문에 싸움이 벌어진다. 할 수 없이 그것을 다스리기 위해 국왕을 뽑게 되고 형벌이 제정된다.
그러나 중생의 악업은 더욱 무거워지고, 동시에 수명이 짧아져서 마침내 10세에 머물게 된다. 삼재 三災 의 괴로움이 닥칠 때, 드디어 중생들은 반성하기 시작하여 다시 선행을 행하게 된다. 동시에 수명도 증가하여 8만 세에 이르러 풍요로운 사회가 된다. 그러나 또다시 욕심과 악업이 성해지면서 수명이 10세로 감소된다. 인간 수명은 이와 같이 증감을 반복하는데, 그 횟수는 17번이나 된다. 그 다음에 오는 시기가 괴겁 壞劫 이다. 중생들의 파멸 이 시작되는 시기인데, 그 순서는 지옥부터이다. 지하에서 차례로 파괴되어 끝내 천상이 무너진다. 그 이후 화,수,풍의 삼재가 발생하여 풍륜으로부터 색계 제 3천에 이르는 영역 이 모조리 파괴된다. 이 괴겁이 지나면 공겁 空劫 이 온다. 이것은 오직 허공 만이 존재하는 시기이다. 공겁의 다음에는 또다시 중생들의 업력에 의하여 성, 주,괴,공이 반복적으로 된다는 것이다. 즉, 우주는 끝없는 생성,소멸이 반복되 는 과정이며, 공간적으로 보면 그 중심은 수미산의 중턱이라는 것이다. 괴겁의 단게를 오탁 五濁/Panca-Kasaya 이라고도 한다. 즉, 수명뿐만이 아니고, 갖가지 의 좋지 못한 현상들이 일어난다는 뜻이다.
① 명탁 命濁 : 중생들의 평균 수명이 줄어든다. ② 겁탁 劫濁 : 자연 파괴가 가속화된다. ③ 번뇌탁 煩惱濁 : 쾌락주의, 도덕적 문란이 팽배해진다. ④ 견탁 見濁 : 고행과 형식주의가 예찬되며, 종교 집회가 대형화한다. ⑤ 중생탁 衆生濁 : 중생들의 능력이 평균치보다 저하된다.
이것이 불교적 말세 의식을 이루게 되지만, 또 다른 생성의 희망을 갖는다는 면 에서 여전히 낙천적 우주관이라고 볼 수 있다.
2. 수미산
수미산은 인도어 수메루 Sumeru의 음역이다. 전체 높이를 16만 유순이라고 했는데, 1유순을 약 7킬로미터로 본다면 112만 킬로미터에 해당한다. 그 중 절반은 바다 속에 잠겨 있고, 8만 유순 정도가 지상으로 솟아 있다. 앞서 말한 중생들의 경계를 수미산의 공간 배치대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즉, 먼저 범천 梵天(색계의 가장 아래에 위치)이 하생하고, 계속해서 욕계 육천에 해당하는 타화 자재천 他化自在天, 화락천 化樂天, 도솔천, 야마천 夜摩天이 하생하는데, 여기 까지가 수미산의 윗부분이며, 중생들의 입장에서는 하늘나라이다. 다음에 수미산의 중턱 부분인데, 이곳에는 도리천, 사왕천 四王天 등이 위치한다. 인간이 사는 곳은 그 제일 밑부분으로서 이른바 사대주 四大洲 이다.
축생의 경우에는 바다에 생겨나는데, 혹은 육지나 허공을 맴돌기도 한다. 악귀는 그 밑으로서 염마왕국이 그 본거지이나 역시 떠돌아다닌다. 그 밑이 지옥취로서, 지옥을 맴도는 중생들이다. 그 밖에도 아수라가 있는데, 이들은 일정한 거처가 없다. 그저 수미산 주변을 맴돌면서 천상의 도리천과 항상 싸움을 일으킨다. 이렇게 해서 육도의 중생들이 각기 수미산 기슭을 근거로 하여 태어나고 사라지는데, 그 전체의 기간은 20소겁 小劫쯤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은 이와 같은 세계를 초월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하늘나라에 태어난다는 관념은 고대의 인도인들이나 불교인들에게 있어서는 고통스러운 생명의 연장일 뿐이라는 상념에 젓게 하는 것이다. 즉, 윤회의 가치관을 가진 불교인들에게 있어서는 태어남의 사실 자 체가 고통으로 인식되는 독특한 내세관을 갖게 한다.
3. 삼계
삼게 三界는 고뇌다. 성난 불과 같이, 골짜기의 메아리, 환각의 물거품과 같으니라. 여래는 삼계를 초월하는 열반의 법을 설하노라(<<방광장엄경 方廣莊嚴經>> 중에서 필자 초역). 우주를 삼계로 인식하는 것은 고대 인도인들의 공통된 사고 방식이다. 즉, 우주를 하늘,허공, 대지의 삼계로 구분하고, 그 각각의 세계에 신이 살고 있다고 믿은 것이다. 불교 또한 이와 같은 사고를 답습하지만, 그 개념은 판이하다. 우선 신에 대한 불교의 입장은 매우 비판적이다. 인도 신화에서의 신은 서양의 경우아 마찬가지로 절대자이면서 동시에 인격적이다. 즉, 신성 神性과 인간성을 공유하는 신적 존재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예컨대 인도의 신은 불사不死, 영원의 존재이다. 또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며, 인간들의 찬양에 귀기울인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신적인 존재 또한 육도 윤회속에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보다는 행복하지만, 그 역시 죽음의 고통을 피할 길 없는 불 완전한 존재로 보고 있다. 따라서 하늘나라 또한 욕계 육천 欲界六天의 하나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신이 거의 모두 인도 신화에 연원을 갖고 있 음을 분명하다. 불교의 호법신인 제석천 帝釋天은 인드라 Indra의 변형이다.
인도 신화에서 뇌성벽력의 주재자인 인드라가 불교로 수용되면서 선신 善神이 된 다. 또 관세음보살은 루드라 Rudra의 변형이다. 원래 태풍의 신이었으나 나중에 가축 증식의 신격으로 바뀌었다. 루드라가 불교에서는 자비의 화신으로 변형된 것이다. 심지어는 삼신불 三身佛의 주체인 법신불 法身佛/Vairocana 또한 우파니샤드에 나오는 변자재신 /Virocana의 변형이다. 불교는 이와 같이 인도의 신격을 계승하면서도 독특한 자기화의 과정을 겪으면 서도 모든 신을 수용하는 것이다.
이 삼계에 대한 소박한 믿음도 불교 고유의 것이라기보다는 인도적 연원을 답습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이 삼계는 허공, 하늘,대지 따위의 즉 물적 구분이 아니라 매우 섬세한 철학적 구분이다. 욕계 육천 가운데 가장 낮은 것이 사왕천이고, 가장 높은 것은 타화자재천이다. 그런데 이 욕심의 세계를 섹스와 관련하여 설명하면 인간 의식의 단계를 어느 정도 선명하게 짐작할 수 있다. 즉, 사왕천에서는 남녀가 서로를 소유해야만 만족한다. 성교라는 구체적 행위를 통해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위의 하늘인 야마천계에서는 포옹 정도로 만족한다. 그 이상의 구체적 행위가 없이도 서로의 사랑이 확인된다. 그 위의 하늘은 도솔천인데, 이곳에서는 서로가 손을 잡는 행위로 만족한다. 그위의 하늘이 화락천인데, 멀리서 마주보면서 만족하는 세계이다. 마지막의 타화자재천에서는 영상을 그리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세계이다. 여기까 지는 욕계의 사랑이지만, 색계,무색계로 올라갈 때 그 승화 昇華의 단계를 짐작 할 수 있다. 욕계가 소유의 사랑이었다면 색계는 소유하지 않는, 철저한 관념의 사랑이다. 반면 무색계는 관념마저 초월하는 사랑이다. 흔히 사랑의 단계를 에로스니, 아가페니 하는 구분으로 이해하지만, 이 삼계 속에 나타나는 불교적 사랑관은 퍽 흥미로운 대비라고 생각한다.
4. 삼천대천 세계
성,주,괴,공을 되풀이하는 세계를 우리는 지구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주 속에는 실로 무한한 세계가 상존한다. 서로 다른 1천 세계를 합해서 1소천 小千 세계라고 한다. 이 1소천 세계를 1000배 한 것을 1중천 中千 세계라고 한다. 이 1중천 세게를 다시 1000배 한것을 1대천 大千 세계라고 한다. 이 소천,중천,대천 세계를 통틀어서 삼천대천 三千大千 세계라고 한다. 이것을 한 부처님이 통솔하는 세계라고 보고, 또 다시 백천만억 부처님이라는 표현을 하기 때문에 실로 세계를 무량,무변하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마치 허공의 먼지처럼, 갠지스 강의 모래알 수처럼, 광대 무변한 세계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의 세계관을 말할 때, 우리는 무한의 세계관이라는 단서를 붙이지 않을 수 없다.
사다카타 아키라는 이 소천을 은하계에 비유했는데, 그것은 적절한 대비이다. 1000의 1000배를 중천 세계로 보고, 그 100만의 세계에 대한 1000배, 즉 10억의 세계를 대천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이 관념을 우주 속에 있는 모든 생명들의 세계로 환원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60억 가까운 인간들이 모여 살지만, 서로 얼굴을 맞대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것은 생활의 터전, 언어의 장벽, 즉 서로의 세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또 짐승, 미생물의 세계로까지 생각을 확대시켜 나간다면, 가히 그 세계는 사량 思量할 수 없는 무한으로 치닫고 만다. 삼천대천 세계는 바로 그 점을 상징하고 있으며, 그 은유를 갖가지 방편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III. 극락과 지옥
1. 팔열지옥 팔한지옥
지옥은 나라카 Naraka의 의역이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구사론 俱舍論>>이라 는 논서에 이에 대한 설명이 있다. 지옥은 지하에 있는 것으로 묘사되며 극악한 죄를 저지른 이들이 고통을 받는 곳이라고 설명된다. 가장 고통받는 곳을 무간 지옥 Avici 이라고 하며, 그 위로 팔열지옥 八熱地獄이 있다.
이들 지옥에서 당하는 고통의 질에 관해서는 지면 관계상 생략한다. 주로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잔옥한 방법에 의해 고통을 받는다고 설명된다. 더욱 기막힌 점은 고통의 끝이 결코 죽음이 아니라는 안식 安息 일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이곳에서는 또 다시 태어나고 고통을 받는 일이 무수히 반복된다는 것이다. 또 이들 지옥에 떨어지는 업을 짓는 이들에 대해서도 상세한 언급이 있으나 이 곳에서는 생략한다. [보다 상세한 논급으로는 E.Conze 編, 졸역, <<불교의 성 전>>(고려원,1985)및 대장경 가운데 <<정법념처경 正法念處經>>, 원신 源信의 <<왕생요집 往生要集>>등을 참조할 것.]
이들 지옥은 모두 여덟이지만, 한 지옥마다 네 개의 별도로 열려진 문을 갖고 있다. 이 하나의 문마다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부 副 지옥이 있기 때문에 결국 여덟 지옥은 128개의 부지옥을 가진다는 말이다.
① 당외 唐畏 부지옥 ② 시분 屍糞 부지옥 ③ 봉인 鋒刃 부지옥 ④ 열하 熱河 부지옥
① 에서는 뜨거운 재 속을 걷게 되고, ② 에서는 시체와 똥의 수렁에 빠지며 구더기에게 골수가 빨리게 된다. ③ 에서는 칼날이 무성한 길을 걸으면서 온몸이 찢기우고, ④ 는 끓어오르는 탕 속에 던져진다.
[Atata,Hahava,Huhuva 등은 모두 의성어이다. 즉, 인도어에서 고통받거 나, 괴로움 때문에 내는 비명, 신음 소리를 지옥의 이름으로 설정한 것이다. 첫 번째의 Arbuda는 원래 천연두란 의미이고, 두번째의 Nirabuda는 부스럼이 생겨 서 온 몸이 짓무리는 일종의 문둥병 같은 병을 가리킨다. 이 모든 고통들이 추위로서 생긴다는 의미에서, 이 팔한지옥은 그대로 병명이나 고통 소리를 명칭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불교에서 말하는 지오근 팔열지옥과 128 개의 부지옥, 그리고 팔한지옥을 합쳐 도합 144지옥이 된다. 그러나 앞서 말한 <<구사론>> 에서는 이것에 덧붙여서 외로운 지옥을 말하고 있다. 이 지옥에 관해서는 구체적인 설명이 없지만, 강,산,들,지하 등에 산재해 있다고 하였다. 짐작건데 다른 이와 함께 겪는 고통이 아니라, 혼자만이 당해야 하는 각종 압박이나 스트레스 등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듯하다. 이것을 합할 경우에는 모두 145개의 지옥이 되는 셈이다.
2. 정토의 세계
불교에서 말하는 이상 세계는 극락 혹은 정토 淨土로 불린다. 가장 기쁜 곳이라는 의미에서 수카바티 Sukhavati, 즉 극락이라고 한다. 이에 관한 언급으로 << 아미타경 >> 등이 있는데, 대체로 그 세계를 묘사하면 다음과 같다. 극락에는 일곱 겹의 난간, 구슬로 장식된 그물, 일곱 겹의 가로수가 있다. 그 곳의 중앙에는 연못이 있는데, 금,은,유리,수정이 네 가지 보물로 장식되어 있다. 하늘에서는 음악 소리가 들려오고, 하루 종일 만다라꽃 Mandarava 이 하늘 거리며 대지에 흩날릴 때면 황금빛 지면에 수북이 쌓인다. 이 정토의 중생들은 매일 아침 옷을 단정하게 입고, 꽃대바구니에 이 꽃들을 담아서 다른 세계의 10 만억 부처님이 계시는 곳으로 가서 공양한다.
식사는 하루 한 끼인데, 식사 후에는 산책을 즐긴다. 또 극락에는 아름다운 새들이 무수한데, 그 가운데서도 가릉빈가 迦陵頻伽/Kalavinka 가 가장 아름답다. 이 새들의 소리는 모두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데, 중생들은 이 소리를 듣고 부처님과 그 가르침을 생각하게 된다. 또 산들바람이 불어오면, 네 가지 보배로 장식된 가로수나 구슬로 장식된 그물들이 기묘한 소리를 내는데, 그것은 참 아름다운 교향곡과도 같다. 이 나라에는 아미타 Amita 라고 부르는 부처님이 계신다. 그는 한량 없는 목숨을 지닌 분으로서 언제나 이곳을 염원하는 이들의 지주 支柱가 된다. 또 그는 협시보살로서 관세음보살,대세지보살이 계신다. 만약 이 나라에 태어나고자 한다면 염불만이 첩경이다. 즉, 지심으로 나무아미타불 을 염하게 되면 임종시에 아미타불이 그를 영접하여 이 정토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정토왕생의 염불비원 念佛悲願 이라고 한다. 정토사상은 대승불교의 중,후기에 생겨난 사상이다. 즉, 초기의 불교에서는 지옥에 대한 설명은 장황했지만 내세관은 괄목한 만한 것이 적었다. 대승불교로 넘어오면서 확고한 내세관이 나타나는 바 그것이 바로 정토사상이다. 정토 신앙은 민중적 보편성과 함께 왕생의 인연이 비교적 단순하다는 면에서 엄청난 호응을 얻는다. 우리 나라의 경우에도 신라의 삼국통일 직후부터 유행하였고, 근자에 이르기까지 가장 폭넓은 지지를 얻고 있는 사상 형태이다. 그러나 고려 말엽에 선종이 유행하면서 이 정토에 대한 관념은 조금씩 변형된다.
<<유마경>>의 가름침대로 마음이 맑아야 정토가 맑아진다.는 대승적 해석이 유행하게 된다. 선가에서는 이 정토를 어떤 실재적이고, 구상적인 세계로 파악하는 일을 거부한다. 심저이 육조혜능은 십 만 팔천 리를 지나야 정토가 있다는 경전의 가르침을 우리 몸 안에 있는 십악 팔사라고까지 설명한다. 즉, 정토에 왕생하려면 염불의 공덕 때문이 아니라 마음을 맑게 갖는 수련 생활이 필요함을 역설하기에 이른다. 따라서 정토사상은 고도의 철학성 을 갖춘 자력과 타력의 조화로서 이해되기도 한다. 단순히 서방에 왕생하기를 기원하는 타력 신앙의 자세가 아니라, 내 몸을 닦는 자력 의지가 선행해야 한다는 논리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이 극락과 지옥에 대한 논의는 거 의 대부분의 불교 사상가들에 의해서 상징과 은유로 이해되어 왔다. 즉, 민중 들의 도덕성 제고를 위한 시청각적 의미가 강하다고 인식되었던 것이다.
IV. 남기는 말
신화의 세계는 상징 symbol'이다. 특히 종교의 우주관에서는 절제된 은유 속에 담긴 의미를 해석해내는 일 이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불교는 지금부터 2600여 년 전의 가르침이다. 가학적 지식이나 인지의 발달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격세지감이 든다. 따라서 불교적 우주관을 절대시하고 권위를 부여하는 일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오히려 그 속에 담긴 상징성에 천착하는 자세가 필요하리라고 본다. 불교의 우주관은 석가를 중심으로 한 고대 불교인들의 우주의 상상력이다. 물론 그 가운데는 다소 황당무계한 내용도 있고, 놀랄 만큼 과학적 토대가 갖추어진 상황 설명도 있다. 그러나 전체를 흐르는 맥락은 업과 윤회라는 등식이다. 또 이 윤회가 영겁회귀로서 반복된다는 주장이다.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우주를 주재하는 힘의 근원을 결코 인격적으로 파악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불교적 용어로는 다르마 Dharma 가 바로 그것이다. 섭리, 질서, 원리, 진리 등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다르마야 말로 우주를 관통하는 근원적 힘이다. 그러나 다르마는 비인격적일 뿐 아니라 초인격적이다. 이 궁극적 원천을 불교에서는 일심,진여, 법계, 여여 등으로 묘사하고 있다. 우주의 기원과 소멸에 대한 불교의 견해는 매우 낙관적이다. 불교에도 종말론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정법, 상법, 말법 등의 시대 구분이 불교적 종말론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종말을 영원한 파멸로 이해하지 않는다. 종말의 끝은 새로운 출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말법 중생들에 대한 경종의 의미만이 부여될 뿐 위기 의식으로까지 발전할 개연성은 전혀 없는 것이다. 지면 관계상 대승불교의 법계론에 관해서 상세하게 언급하지 못했다. 또 불교의 우주관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중국 신화, 특히 유가의 관점에 자세하게 서술 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기회 있는 대로 보정 발표할 예정이다.
계간 과학사상 제 10호 1994년 가을호 Written by 정병조(동국대 교수,불교철학)
* 삼계(三界) 28천(天)
부파불교(部派佛敎)
1. 불멸이후 불교 교단의 발전
부처님께서 입멸하신 직후의 불교교단은 중인도에 퍼져 있던 지방교단에 불과했다. 부처님의 탄생지인 룸비니와 입멸지인 구시나가라는 중인도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깨달음을 얻은 붓다가야는 중인도와 남부에 있으며, 처음으로 법을 설한 초전법륜지인 사르나트는 중인도의 서부에 있다. 이 네 곳은 '사대영장(四大靈場)'으로서, 불멸 후에는 부처님을 사모하는 신자들의 순례참배지로서 성황을 이루었다. 초기의 불교도들이 생각한 중국(中國)도 중인도를 중심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불멸 후에는 서방 및 서남방으로 전도가 진행되고 불교교단은 서서히 이 두 방면으로 발전했다. 이것은 중인도의 남방은 빈댜 산맥의 고원에 의해 가로막혀 있고 동방은 고열미개의 땅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특히 먼저 서남쪽으로 전도가 진행되었다. 서방에 불교가 발전한 것은 그보다 조금 늦었다. 그것은 서방은 바라문교의 세력이 강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쇼카왕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불교교단은 인도 각지에 진출, 정착해 가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웃자인을 중심으로 하는 서인도의 불교교단은 튼튼한 기반을 구축하고 있었다. 부파분열이 일어난 후에도 상좌부계의 분별부가 강력하여 이 계통의 불교가 이 시대를 전후하여 멀리 실론까지 교세를 확장하였다. 이것이 남방상좌부라는 부파로 정착하여 현재의 남방불교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그들이 서인도의 방언을 기초로 하여 만든 성전어가 팔리어로서, 남방상좌부의 문헌은 팔리어로 전승되고 있다. 이에 대해 아쇼카왕의 전후에 마투라에서 서북인도의 간다라, 카슈미르에 걸쳐서도 불교의 교세가 확장되었다. 이곳의 중심이 되었던 교단은 같은 상좌부 계통의 다른 부파인 설일체유부였으며, 그들은 후에 산스크리트어로 경전을 편찬하였다. 대승불교가 중앙아시아, 중국으로 전파되면서 그들의 문헌은 주로 중국에 소개되었는데 이것을 통칭 '북전(北傳)'이라고 하며, 반대로 남방상좌부의 전승을 '남전(南傳)'이라고 한다.
2. 불교교단의 분열
부처님은 자신의 입멸 이후 교단이 의지해야 할 것으로 법을 내세웠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法)이라는 것은 45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서 행해졌고, 또 그 내용도 논리적으로 정리된 것이 아니라 그 상대에 따라 달라져 복잡미묘한 것이었다. 나아가 당시의 가르침은 문자에 의한 체계적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의 구전(口傳)에 의한 암송으로서 전달되었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불멸이후 불교 교단은 곧 부처님의 교설을 일정한 형태로 보존하고자 공식적인 합의를 거치기로 하였다. 그 결과 제 1 결집이 이루어졌다.
(1) 제 1 결집 제 1 결집은 왕사성결집이라고도 하는데, 부처님께서 입멸한 해에 왕사성에서 500명의 비구들이 모여서 행한 것이다. 결집이란 교법의 합송(合誦)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비구들이 집회에서 편집된 성전을 함께 외움으로써 그것을 불설로 승인하는 것이었다. 1차 결집에서는 마하가섭이 회의를 소집하고 사회를 보았으며, 우팔리가 율(律)을, 아난다가 경(經)을 암송하였다. 당시 우팔리는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서도 율에, 그리고 아난다는 경에 가장 뛰어났었다고 한다. 이 모임에 참석했던 모든 비구들은 전원일치로 우팔리와 아난다의 암송 내용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이었다고 승인하였다. 이렇게 하여 율과 경의 내용이 확정되어 후대에 전해지게 되었다. 제 1 결집에 대해서는 주의해야 할 다음과 같은 특징적인 사실이 있다. 첫째, 이 결집은 출가승단의 사람들, 특히 그 대표라 할 만한 상좌비구들이 개최한 것으로 재가신도들은 여기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이 사실은 결집된 법과 율의 성격을 규정하는데 커다란 의의를 갖는다. 훗날의 대승경전 출현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둘째, 이 결집은 500명의 아라한들이 모인 집회에서 '합의'에 의해 이루어졌다. 부처님은 생전에 교단을 통제할 후계자를 지목하지 않았으며, 승가의 조직도 서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멸이후 교단이 혼란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남기신 가르침의 수집 확인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승가에 이러한 합의의 관습이 성립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세째, 법과 율은 이때 합송(合誦)된 것이며 그후에도 오랫동안 입에 의해 전승되었다.
이것이 문자로 씌어지게 된것은 적어도 200년 뒤의 일이다. 네째, 이러한 결집의 시도는 당시 불교승가 전체의 의향이 반영된 것은 아니며 단순히 마하가섭을 중심으로 한 일파, 혹은 마가다 일대에 한정된 지방적인 회합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있다.
(2) 근본분열(根本分裂)
불멸 후 100년 경, 제 2 결집이 이루어진다. 이 시기에 불교교단은 중인도의 테두리를 넘어 서방으로 확대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 바이샬리의 비구들이 정법(淨法, 계율에 어긋나지 않음. 합법적인 일)이라 하여 시행하고 있는 10가지 문제에 대해 그것에 반대하는 사람들과의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다. 서인도 출신의 야샤스라는 비구가 마가다지방의 바이샬리로 갔을 때 그는 비구들이 쇠로 만든 발우에 물을 채우고 상가를 위한다고 하면서 금전, 은전을 집어넣는 것을 보고 경악하였다. 본래 무일물(無一物)을 표방하는 비구는 금전을 받는 것은 물론, 손을 대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다. 유행편력의 생활에서 승원생활로 변화되었다고는 하지만, 당시의 서인도의 비구들에게 금전을 받는 것은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관행이었다. 야샤스는 그것이 비법(非法)임을 지적하였으나 바이 샬리의 비구들로부터 빈축을 사게되어, 서방의 비구들에게 응원을 청하였다. 야샤스는 이 비구들의 도움을 받아 금전을 받는 행위 등을 포함한 여러가지 일에 대해 동, 서의 불교교단이 대화할 기회를 마련하였다. 양쪽에서 각각 4명씩 판정인을 내세워 심의를 하였는데, 결국 이 자리에 모인 700명의 장로들은 이 문제를 포함한 십사(十事)를 비법으로 단정하였다.여기에서 문제가 되었던 10사는 각 율전에 따라 다른 점이 있으나, 대체로 다음과 같다.
1. 뿔로 만든 그릇에 소금을 축적하는 관행(角鹽淨) 2. 수행자는 정오가 지나면 식사해서는 안되는데, 정오를 지나 해 그림자가 손가락 두 마디 정도를 지난 시간까지 식사시간을 연장하는 관행(二指淨) 3. 다른 부락(에 가서 음식을 취하는 관행(他聚落淨) 4. 동일한 교구 안의 다른 주처에서 포살을 따로이 행하는 관행(住處淨) 5. 일을 결정함에 우연히 비구가 전원 모이지 않아, 먼저 참석한 사람들로 결정을 하고 뒤에 늦게 온 사람들의 동의를 예상하여 정족수가 부족하여 도 의결을 행하는 관행(隨意行) 6. 석존과 아사리의 습관에 따르는 관행(久住淨) 7. 식사 후에도 응고하지 않은 우유를 마시는 관행 (生和合淨) 8. 나무나 그 열매의 즙을 발효시켜 아직 알콜이 되지 않은 음료를 마시는 관행 (飮門樓伽酒淨) 9. 테두리에 장식이 없는 방석의 크기에 관한 관행 (無緣坐具淨) 10. 금,은을 받는 관행(金銀淨)
이상의 십사는 그 일이 크건 작건 실제적 필요성이 대두되어 당시의 교단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생겼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열번째의 금전을 받을 것인가의 여부가 가장 중요한 테마였을 것이다. 이러한 점은 바이샬리의 논쟁을 기록한 여러 율을 검토하여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이는 불교교단의 발전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의를갖는다. 10사의 논쟁은 야사가 서방의 비구들에게 응원을 요청했기 때문에 동서비구의 싸움이 되었던 것 같지만, 동쪽의 비구들 중에도 10사에 반대한 비구가 있었다. 따라서 이것은 계율을 융통성있게 지키고 예외를 인정하려고 하는 관용파(지법자,持法者)의 비구와 끝까지 계율을 엄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엄격파(지율자,持律者) 비구들간의 대립이었다고 볼수 있다. 불타가 입멸한 지 100년 쯤 되면 상가의 확대와 함께 비구의 수도 늘어나고 사고방식의 차이도 생기기 때문에, 교단에 이러한 대립이 일어나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 회의에서는 엄격파의 주장이 전면적으로 통과된 듯 한데, 이것은 장로비구들 중에서 엄격파가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장로비구가 대표로 선발되었기 때문에 10사는 모두 '비사(非事)'로 판정된 것이다. 그러나 이 결정에 승복하지 않는 비구들이 많았던 것 같다. 그 때문에 이것이 교단분열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즉, 이 결정에 승복하지 않는 비구들이 모여 대중부를 만들었기 때문에 이로써 교단은 상좌부와 대중부로 분열했다고 한다. 이것을 '근본분열(根本分裂)'이라고 한다. 대중부에는 사람의 수가 많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이 명칭에 관용파 비구들의 수가 많았다는 사실이 암시되어 있다. 북방불교에 전해진 자료(이부종륜론)에 따르면 근본분열의 원인은 대천이라는 비구가 아라한의 경지에 관하여 밝힌 다섯 가지 견해에 대한 대립(大天의 五事)에 의한 것이라 한다.
다섯 가지 견해는 다음과 같다.
1. 여소유(余所有) ; 천마에게 유혹당할 때는 아라한일지라도 더러움이 새어나갈 때가 있다. 2. 무지(無知) ; 아라한에게도 무지는 있다. 3. 유예(猶豫) ; 아라한에게도 의문이나 의혹은 남아있다 4. 타령입(他令入) ; 자신이 아라한이 되었다는 것을 타인이 알려줌으로써 아는 경우가 있다. 5. 도인성고기(道因聲故起) ; 도는 소리에 의해 일어난다.
이 五事는 상좌부 교단에서 최고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성자인 아라한을 비방한 것이다. 이 주장에 의해 교단의 화합이 위협받자 당시의 왕이 중재를 위해 집회를 열어주었다. 이때 표결에 의해 다수를 차지한 대천의 무리는 스스로 큰 집단임을 의미하는 대중부라고 자파를 명명하였고, 반면 소수파인 보수적 장로들은 기존의 입장을 고수하기로 공포하고 스스로를 상좌부라 칭하였다고 한다.아무튼 근본분열에 의해 한번 갈라진 교단은 다시 그 내부에서 분열을 계속하여 20개의 부파로 분립하게 된다. 이를 지말분열(枝末分裂)이라 하는데 당시의 분파를 남, 북 양전이 전하는 내용에 따라 도식화해보면 다음과 같다.
이렇게 원시교단이 상좌, 대중의 두 부파로 분열한 이후의 전통적인 교단의 불교를 부파불교라 한다.
3. 부파불교의 성격
불교교단의 정계(正系)는 원시교단을 계승하는 부파교단이었다. 즉 부처님의 직제자인 대가섭이나 아난 등에 의해 수지된 불교는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계승되어 부파교단으로 발전한 것이다. 따라서 부파교단의 불교는 제자의 불교, 배우는 입장의 불교이며 남에게 가르치는 입장의 불교는 아니다. 이러한 수동적인 불교였기 때문에 대승교도로부터 성문승(聲聞乘)이라 불렸다. 성문이란 부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 즉, 제자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부파불교 교리의 특징은 출가주의라는 점이다. 출가하여 비구가 되고 계율을 엄격하게 지키면서 수행한다. 재가와 출가의 구별을 엄격히 하고, 출가를 전제로 하여 교리나 수행형태를 조직하고 있다. 그리고 부파불교는 은둔적인 승원불교이다. 그들은 승원 깊숙이 숨어서 금욕생활을 하고 학문과 수행에 전념한다. 따라서 가두의 불교는 아니다. 타인의 구제보다는 먼저 자기의 수행의 완성을 목표로 하는 불교이다. 그 때문에 대승교도로부터 소승(小乘)이라고 불리고 천시되었다. 부파의 출가교단은 국왕이나 왕비 또는 대상인 등의 귀의와 경제적 지원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카스트제도를 엄격히 지키는 바라문교는 타국의 이민족이나 다른 계급과 자유로이 교제해야만 했던 상인들과 맞지 않았다. 이처럼 국왕이나 장자들의 원조에 의해 승단은 생활 걱정없이 출세간주의를 관철하여 연구와 수행에 주력할수 있었으며, 이로써 분석적이고 치밀한 불교교리 즉, 아비달마 불교가 성립할수 있게된 것이다. 이상에서 본 부파불교의 특성은 그 단점과 한계로만 보여지기 십상이다. 사실상 아비달마불교는 종종 불교의 번쇄철학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구사론을 비롯한 아비달마
논서를 읽을 때 우리는 지나치게 형식적이며 지나치게 사소한 문제에 관한 논의를 접하게 된다. 그 무수한 술어의 나열을 접하게 되면, 그들의 사상적 노작은 우리들에게는 전혀 무의미하고 비현실적이며 한가한 갈등으로 생각될 것이다. 번뇌를 끊고 행복을 추구한다는 부처님의 본지와는 한참 떨어진 것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사실상 아비달마는 아가마 경전의 어구에 집착하는 경우도 있으며, 전통적,보수적이거나 분석적, 형식적인 해석에 치우쳐 사상의 청신함과 발랄함을 잃어버린 점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기설법(對機說法, 방편설법)에 의해 단편적, 비체계적으로 설해진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서 불교의 기초적인 관념을 추출하고 이를 조직하여 장대한 사상적 건축물을 세운 것은 확실히 아비달마 논사의 공적이었다. 그들의 이러한 업적이 없었다면 후의 중관학설, 유가유식설 등의 대승불교철학의 출현은 불가능하였거나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4. 삼장의 성립
불교성전은 율과 경, 그리고 논(論)이라는 삼장(三藏)으로 구분된다. 삼장 중에서경과 율은 이미 오래 전에 성립하였고 논은 비교적 후세에 성립한 것이다. 부파불교시대의 각 부파는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법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에 착수하였는데, 이것을 아비달마(阿毘達磨, Abhidharma) 교학이라 한다. 그것은 '법(dharma)에 대한(abhi) 연구'라는 뜻이다. 이러한 연구는 물론 초기불교 당시에도 부분적으로 행해지고 있었지만, 부파의 성립으로 더욱 특색있게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각 부파는 자신들의 연구 성과를 결집하여 간직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문헌을 아비달마 문헌, 또는 논(論)이라고 부른다.모든 (유력한) 부파는 독자적인 아비달마를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종래의 경과 율에 논을 하나 더하여 삼장의 문헌을 갖추기에 이른다. 이런 삼장의 완성은 부파불교시대의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오늘날 부파불교시대의 부파의 삼장은 거의 산일되어버리고 현재 그 삼장이 비교적 완벽하게 남아있는 것은 팔리어로 된 실론 상좌부 계통의 삼장과, 범어에서부터 한역되어 보존되고 있는 설일체유부 계통의 삼장이다. 그러므로 아비달마교학의 내용을 아는 데는 이 팔리삼장과 한역삼장이 주요 자료가 된다.아비달마는 부파 중에서 가장 강대하였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서 현저하게 발달하였다. 유부에는 7론이 전해진다. 즉, 집이문족론(集異門足論) 20권, 법온족론(法蘊足論) 12권, 시설론(施設論) 7권, 식신족론(識身足論) 16권, 계신족론(界身足論) 3권, 품류족론(品類足論) 18권, 아비달마발지론(阿毘達磨發智論) 20권, 그 이역(異譯)인 아비담팔건도론 30권이 있다. 앞의 여섯을 육족론(六足論), 뒤의 발지론을 신론(身論)이라고도 한다. 스리랑카에 대한 불교전도는 아쇼카왕 치세시에 마힌다에 의해 행해졌다고 한다. 스리랑카의 왕 데바남피야 팃사는 마힌다에 귀의하여 수도 아누라다푸라에 대사(大寺)를 세웠다. 이것이 스리랑카 상좌부의 기원이다. 그후 2백여년이 지난 후 대승의 교학까지도 겸하여 배우는 무외산사(無畏山寺)가 건립되어 양파가 서로 논쟁을 했으나, 결국은 대사파의 전등(傳燈)이 유지되었다. 오늘날 버마, 타이, 캄보디아, 라오스 등에 전하고 있는 남방불교는 대사부 계통에 속한다.스리랑카의 상좌부에서도 7론이 작성되었는데 그 내용은 법집론(法集論), 분별론(分別論), 논사(論事), 인시설론(人施設論), 계론(界論), 쌍론(雙論), 발취론(發趣論)이다. 위의 두 부파 이외의 논장으로서는 사리불아비담론(舍利弗阿毘曇論, 법장부) 30권, 삼미저부론(三彌底部論, 정량부) 3권, 성실론(成實論, 경량부) 16권이 있다. 유부에 있어서는 육족론이나 발지론 이후 이들 논서에 대한 주석적 연구가 성행하였다. 이들 200년에 걸친 주석가(毘婆沙師)의 아비달마 연구를 집대성한 것이 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毘達磨大毘婆沙論) 200권이다. 이 논서의 성립으로 유부의 교학은 거의 확정되었지만 본론이 너무 방대하기에 그 교의를 적요한 강요서가 저술되었고, 이들 논서를 기초로 하여 유명한 세친(世親)의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이 성립되었다. 스리랑카에서도 1-2세기 경 많은 논사가 배출되어 주석서를 지었는 바, 붓다고사(佛音)의 청정도론(淸淨道論)이 가장 유명하다.
5. 부파불교의 교학체계
아비달마의 전개과정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3단계가 상정되고 있다. 그 첫 단계는 아가마 경전 자체 안에 이미 교설을 정리, 조직하거나 해설, 주석하는 소위 '아비달마적 경향'이 나타나 있는 단계이다. 둘째는 이 경향이 발전하여 경전 외에 아비달마로 불리는 별개의 문헌이 독립, 발전되어 갔던 시기이다. 그리고 셋째는 그 결과 아비달마는 단순히 아가마의 내용을 해석,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기초로 하여 장대한 교의체계를 수립했던 시기이다. 아비달마 교학은 아가마 교학을 분석하고, 종합함으로써 그 체계를 이루어 갔다. 분석적 방법이란 아가마의 가르침 중 중요한 것을 선택하여 하나 하나 그 의미를 상세히 주석하고 해설하는 것이다. 종합적 방법이란 아가마에 수록되어 있는 갖가지 교설을 정리, 안배하는 것을 말한다. 아가마를 종합하는 수속으로는 수와 관계된 교설을 그 수에 따라 一法, 二法, 三法과 같은 순서로 병렬시키는 방법(소위 '法數'에 의한 정리)이며, 또 하나는 가르침의 내용의 주제에 따라 유별하여 배열하는 방법(소위 '相應'에 의한 정리)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독립한 아비달마는 강력하게 발전하여 새로운 문헌들을 성립시켰다. 부파불교에 있어서의 논장의 체계가 공고히 된 것은 4세기경이 되어서이다. 이들 부파불교들은 대승불교가 출현하여 그 세력을 확산하는 동안에도 여전히 당당하게 존재하면서 자신의 교학체계들을 발전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4세기를 지나면서 부파불교는 그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지적 완성에 도달하여 그 이후에도 인도에서 무려 800여년은 더 존속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의 큰 진전은 없었다.실론에서 상좌부가 충실히 불교의 전통을 고수하고 있던 방면, 인도본토에서는 상좌부의 맥이 끊어지고 상좌부의 일분파로서 서북부의 간다라와 카쉬미르지방에서 성행하던 설일체유부가 사상적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4세기 경 바수반두는 설일체유부의 교의체계를 간결하게 요약한 논서인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명실상부 부파불교의 교학을 대표하는 명저로서 인도에서 뿐만 아니라 중국, 한국에서도 부파교학의 입문서로 연구되었다. 그 내용은 계(界), 근(根), 세간(世間), 업(業), 수면(睡眠), 현성(賢聖), 지(智), 정(定), 파아(破我)의 9품으로 구성되어 있고, 발지론의 입장을 답습하면서 아비담심론에 따라 수정을 가했다. 또 유부 교의를 체계화함에 있어서 비바사사(주석가)의 설을 고집하지 않고, 다른 부파 특히 경량부설까지도 참조하여 비판적 태도로 저술한 점에 특색이 있다. '구사론'이 불교학의 기초이론으로써 오랫동안 평가되어온 것은 그 교의가 정연한 체계로 논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특기할 학설은 제법(諸法) 즉, 모든 존재를 5위(位) 75법(法)으로 포괄하려는 논리이다. 75법이란 존재를 분석하여 얻은 요소들의 전체를 가리키며, 이 존재는 색(色), 심(心), 심소(心所), 심불상응행(心不相應行), 무위(無爲)의 다섯 가지 범주에 포괄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구사론은 전 존재를 법에 의해서 분류하였는데 그 법을 존재요소로서 실체시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예를 들어 푸른 병은 깨어지면 없어진다. 그러나 그 청색이라고 하는 것은 병이 깨어져도 존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을 자성(自性)을 갖는 것이라고 하며 법(法)이라고 부른다. 그리하여 유부교학에서는 실재론적 경향을 중시하게 되어 삼세실유 법체항유(三世實有 法體恒有 ; 법의 실체는 과거, 현재, 미래에 있어서 항상 실재한다)를 주장하게 되었고, 이러한 법의 실체화는 후에 대승불교의 용수에 와서 크게 비판받게 되었다. 부파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강력했고, 또한 대승불교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유부의 교설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유부의 유(有)의 철학의 이해 없이는 그 안티테제로서의 반야(般若)의 공(空)의 사상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6. 설일체유부의 교학
부파의 여러 학파 가운데 아마 가장 많은 아비다르마 논서를 낳고 그리고 학문적으로 가장 강력한 부파로 성장한 것이 서북인도에 세력을 뻗치고 있던 사르바아스티바아디인 파이다. 이 학파의 이름은 '모든 것이 있다고 주장하는 자'를 의미하고 보통 한역명으로는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혹은 줄여서 유부라고 알려지고 있다. 설일체유부는 상좌부의 계통에 속한다. 비교적 일찍 상좌부에서 지말분열해서 독립했다. 이 학파의 철학체계는 장기간에 걸쳐 여러가지 발전을 거쳐서 완성된 것이지마는 '모든 것이 있다'라고 하는 이 학파의 독특한 기본적 입장은 학파 분립의 당초부터 이미 구축되어 있었다.
(1) 유위(有爲)와 무위(無爲)
모든 존재는 변화한다는 무상(無常)의 가르침은 부처님의 가장 기본적인 교설이다. 일체의 존재는 모두 시간과 함께 변화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무상한 것을 있는 그대로 무상하다고 보려하지 않는다. 그러한 것에 대해 당치않은 욕망을 품고 집착하며 괴로워한다. 무상한 것을 무상하다고 알고, 그리고 거기에 대해 집착을 떠나라고 하는 것이 불교의 기본적 교의이며 올바른 지혜이다. 그런데 평상적인 인간은 무지로 말미암아 무상한 것에 상주성을 기대한다. 이 기대가 어긋날 때, 실망과 노여움을 느낀다. 무아인 것에 대해 '나'를 의식하고 '나의 것'을 의식한다. 이 의식으로 말미암아 요구, 갈망이 생기고 고뇌한다. 기대해서는 안될 것을 기대하고 의식해서는 안될 것을 의식하는 곳에 번뇌에 의한 업이 있다. 그 결과는 고이다. 무지를 떠나 무상을 무상으로 알고, 무아를 무아로 아는 올바른 지혜를 얻음으로써 인간은 번뇌의 구속에서 해방된다. 이렇게 보면 현실에서부터 시작하여 무루(無漏)의 깨달음의 영역으로 진행하는 불교의 실천체계는 이 간명한 무상, 고, 무아의 가르침에 남김없이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엄밀히 설명하는 것이 아비달마의 임무라고 아비달마논사들은 생각했던 것이다.설일체유부의 경우에는 '일체가 존재한다'라는 주장을 하나의 이론에 의해 정밀한 학설로 전개하고 이를 가지고 무상과 무아를 논증하려한 것이다. 무엇때문에 모든 것은 무상한가. '연기(緣起)'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여러 가지 원인을 연하여 결과로서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독자적으로, 자주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그것을 나타나게 하는 원인 여하에 따라 존재한다는 점에서 상주불변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듯 '모든 것은 인과의 관계 위에서 생겨난다'는 견해는 모든 것은 오직 하나의 원인, 혹은 원인없이 우연히 생겨난다는 견해에 대한 불교의 입장이다. 이처럼 무릇 현실에 있어서 인간 생존에 관계하는 일체의 사실은 연기한 것이지만 그것 을 또한 유위(有爲)라고도 한다. 유위라는 것은 '(여러가지 원인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라는 정도의 의미이다. 연기하고 있으며, 유위이며, 무상인 이세상의 모든 것을 무상하다고 확실히 앎으로써 그것들에 대한 욕망과 집착이 소멸할 때 괴로움이 소멸된 열반, 깨달음의 세계가 전개되는 것이다. 깨달음의 세계는 이제 더 이상 인과에 속박되지 않는다. 그러한 구속을 받지 않기 때문에 바로 무위(無爲)이다.
(2) 유루(有漏)와 무루(無漏)
무상한 것을 무상이라고 보지 않고 그것에 대해 욕망을 일으키고 거기에 집착함으로써 번뇌하는 현실의 세계를 유루(有漏)라고 한다. 그리고 무상을 무상으로 알아 욕망과 집착을 끊음으로써 전개되는 고요하고 편안한 깨달음의 세계를 무루(無漏)라고 한다. 여기서 유루라는 것은 '번뇌를 가진', '번뇌에 더럽혀진'이라고 하는 의미이며 무루는 그 반대의 의미이다. 불교의 목적은 고뇌하는 현실세계, 미혹한 세계를 떠나 열반, 깨달음의 경지로 들어가는 것이다. 즉 유위 유루의 세계로 부터 무위 무루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유위 유루의 세계는 사제에서 볼때 고제와 집제이며 무위 무루의 열반은 즉 멸제이다. 그리고 괴로움으로부터 그 소멸로 나아가는 방법 즉 도제는 아직 열반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유위이지만 이미 번뇌를 떠나있는 도정에 있기 때문에 무루이다.
(3) 다르마(dharma, 法)의 이론
설일체유부라는 명칭은 '모든 것은 존재한다고 설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이 부파는 독특한 다르마의 이론에 따라 모든 것은 무상하다는 것을 자세히 논증하여 연기 - 유위 - 무상의 이치를 분명히 밝히고자 하였다. 다르마라는 말은 극히 여러 의미를 지닌 말이어서 해석하기 곤란한 점이 있다. 내외의 많은 학자들이 의논을 거듭해 왔으나 그것을 종합하면 (1) 법칙, 법, 기준 (2) 도덕, 종교 (3) 속성, 성격 (4) 가르침 (5) 진리, 최고의 실재, (6) 경험적 사물 (7)존재의 형태 (8) 존재의 요소 등의 의미로 다르마라는 말이 쓰여지고 있다. 한역 불전에서는 이 모든 의미가 법이라는 하나의 역어 속에 포함되어 있다. 아비달마 논서에는 다르마라는 어휘를 위의 (6),(7),(8) 중의 어느 하나로 사용하고 있다. 경험적 세계의 모든 것, 존재, 현상은 복잡한 인과관계로 서로 얽힌 무수한 법(法)의 이합집산에 따라 유동적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 이같은 법의 이론의 기본적 입장이다. 완성된 설일체유부의 이론에 의하면 존재의 요소로서 법을 75가지로 분류하고 이것을 다시 다섯 가지 그룹으로 나누는데, 이것을 이른바 오위칠십오법(五位七十五法)이라고 한다. 오위라는 것은 색법(물질의 요소, 11), 심법(마음, 1), 심소법(마음의 작용, 46), 심불상응행법(물질도 마음도 아닌 관계, 능력, 상태 등을 나타내는 요소, 14) 및 무위법(3)을 말한다. 이러한 75가지의 법은 상호 다양한 인과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같은 인과관계 위에서 유동적으로 구성되고 있는 것이 현실세계이다. 그렇다고 할때 그러한 모든 것은 무상한 것이다.
모든 것이 존재한다고 하는 설일체유부의 주장은 바로 이러한 존재의 기본요소인 법(法, dharma)에 관한 것이다. 모든 것이라고 하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것을 의미하는데, 이 모든 것이 있다. 즉 존재한다는 주장은 모든 것이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을 통하여 존재한다는 생각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그렇다면 일체의 사물은 무상하다는 불교의 기본적 입장과 모순되지 않는가. 설일체유부에 의하면 유위의 다르마 전체에 공통된 성질에는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순간성(刹那滅)이며, 다른 하나는 삼세실유성(三世實有性)이다. 이 두 성질은 모순된 것으로 보이며, 사실 다른 학파로부터 격렬한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이나 실은 설일체유부의 입장에서는 이 둘에 의해 제행무상을 변증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책상 위에 있는 컵은 한 시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컵으로서 지속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그것을 '법의 이론'에서 본다면 실은 순간에 생겨나 소멸해 버리는 유위제'법'(有爲諸法)의 끊임없는 연속에 불과하다. 제'법'의 하나하나는 시간적 지속성을 전혀 갖지 않으며 다음 순간에 모두 소멸해버리는 찰나멸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번째 순간에도 그대로 컵이 거기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선행한 제법을 상속하여 그것과 동류의 법이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관계를 가지고 계속 생기하기 때문이다. 또한 세번째 순간 이후도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비지속적, 순간생멸적인 제법의 연속적, 비단절적인 생기 위에서 컵의 존재라고 하는 시간적 지속 현상이 우리의 경험적 세계의 사실로서 있을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법이 생기한다고 해도 무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며 소멸한다고 해도 무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생기라는 것은 '법'이 미래로부터 현재로 현현하는 것이며, 소멸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현재로부터 과거로 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에 나타난 이전의 법은 미래의 영역에 존재한다. 현재에서 과거로 사라진 이후의 법은 과거의 영역에 존재한다. 미래의 영역으로부터 나타나 과거의 영역으로 사라지는 동안의 한 순간의 법은 현재에 존재한다. 미래에도 존재하며 현재에도 존재하고 과거에도 존재한다. 법은 삼세 어디에서나 그 자체로서 변함없는 특성(自性)을 갖고 존재하고 있다. 다시 말해 삼세에 실유한다. 이와 같은 유부의 순간적 존재론에 대한 멋진 비유가 있다.
필림의 흐름은 리일에서 리일로 움직여 그침이 없으나 필림에 현상된 한 토막의 화면 그 자체는 처음의 리일 속에 있을 때도 램프에 조명될 때도 다음 리일에 감겨진 뒤에도 움직이거나 병하지 않고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스크린에 차례차례로 투사된 영상은 하나하나로서는 순간적이고 움직이지 않는 것이면서, 그것이 무수하게 부단히 연 속함으로써 변화하며 활동하고 시간적 경과를 가진 한편의 줄거리를 엮어간다. 첫 리일은 다르마의 경과라는 삼세 중의 미래의 영역에 해당하고, 램프에 의하여 조명되는 순간은 현재에 해당하고, 나중의 리일은 과거의 영역에 해당한다. 필림의 한 토막 한 토막이 곧 다르마, 엄밀히 말하면 같이 생하는 무수한 다르마의 집합이다. 그리고 스 크린에 영사된 영상의 활동변화에 의하여 엮어지는 이야기는 정녕 현실의 경험적 세계 즉 제행무상의 세계에 해당한다. 리일에서 리일로 필림이 흐르듯이 다르마의 시간은 횡으로 공간적으로 확대되어 있다. 스크린에 영사되는 이야기의 경과와 같이 경험적 시간은 그것을 종으로 관철한다. 그 두가지 시간의 교차점을 절대의 현재라고 할 수 있듯이 우리들 경험적 세계에 사는 자는 언제나 거기에서 있는 것이다.
제1 절: 붓다 시대의 종교사상계 1. 사회변동과 계급제도의 붕괴 2. 정통 바라문의 사상 3. 사문들의 출현
제2 절: 샤카무니의 생애 1. 탄생과 젊은 날들 2. 출가. 구도. 깨달음 3. 최초의 설법과 교화활동 4. 인류의 영원한 스승
근본불교 제1 절: 근본불교
제2 절:붓다가 발견한 진리 1. 연기법 2. 12연기
제3 절 사성제 1. 고성제 2. 집성제 3. 멸성제 4. 도성제
제4 절 오온-무아 1. 색온 2. 수온 3. 상온 4. 행온 5. 식온
제5 절 삼법인 1. 제행무상인 2. 제법무아인 3. 열반적정인
제6 절 일체법 1.5온 12처 18계
제7 절 윤회와 업 1. 윤회 2. 업 3. 과보 4. 윤회의 주체문제
초기불교의 주요개념 1. 37조도품 2. 불교의 세계관
부파불교
샤카무니 붓다
제1절 붓다 시대의 종교사상계
1. 사회변동과 계급제도의 붕괴
불교는 붓다 샤카무니(Buddha Sakyamuni)의 깨달음과 가르침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이 새로운 종교의 출발은 붓다가 태어나신 B.C 6세기 무렵 인도의 시대 사정과도 무관하지 않다. 당시 인도는 강대한 신흥왕국의 출현과 도시의 형성 등으로 급격한 정치·사회적 변화가 나타나고, 이에 따라 종교사상계 또한 매우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이런 시대 배경 속에서 불교가 새로운 종교 사상으로서 그 모습을 세상에 드러낸 것이다. 불교의 출발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인도문명의 큰 흐름과 함께 붓다 당시의 정치·사회적 변동부터 살펴 보기로한다. 인도의 고대 문명은 B.C 3000년 경부터 개척되기 시작하여 대략 1000년 동안에 걸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른바 인더스 문명이 그것이다. 오늘날 인더스강 유역의 하라파(Harapp )와 모핸조다로(Mohenjo-daro)등 도시 유적들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수준 높은 이 고대 문명은 문다(Munda)족·드라비다(Dravida)족 등을 비롯하여 일찍부터 인도 대륙에 살아 온 여러 종족들에 의해 이룩되어 왔다. 그러나 이후 인도의 문명은 멀리 코카서 스(Caucasus) 지방으로부터 인더스강 상류의 판잡(Panjab, 五河) 지방에 침입해 온 아리야(Arya)인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아직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는 않지만 아리야인들은 대략 B.C 16∼13세기 무렵 인도에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이 문다족·드라비다족과 같은 선주민(先住民)들을 정복하고 대륙의 중심으로 이동하면서 후기 인도문명의 형성에 새 주역이 된 것이다. 처음 판잡지방에 침입해왔던 아리야인들은 B.C 11∼9세기 무렵에는 이미 갠지스강 상류 지방으로 이주하였고, 시대가 흐름에 따라 계속 동방으로 진출하여 B.C 6∼5세기 무렵에는 갠지스강 중류 지방에 정착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함께 이 지방에는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현저한 변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먼저 당시 존재하고 있던 여러 부족이 점차 통합하여 국가형태를 이루었고, 그것은 다시 군소 국가의 병합을 통해 강대한 국가체제를 형성해 나갔다. 초기 불교의 경전에 의하면, 이 무렵 인도에는 16대국이 있었다고 전한다. 대국 가운데서도 특히 강성했던 나라는 마가다(Magadha), 코살라(Kosala), 밤사(Va sa), 아반티(Avanti) 등이었으며, 전제적인 국왕이 통치하는 군주정체의 이들 4대국에 의해 군소 국가들은 점차 정복 합병되어 갔다. 그리하여 붓다 시대에이들 나라는 이미 간지스강 중류지방에 각각 강대한 신흥 왕국으로서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신흥왕국의 중심지는 도시(nagara)였는데, 특히 간지스강 중류 지방의 여러 도시가 경제적으로 크게 번성하였다. 처음 이 지방으로 이주해 온 아리야인 사회는 변함없이 종전과 같은 씨족제(氏族制) 농촌사회의 촌락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였다. 그러나 점차 농업 생산이 증대되고 인구의 증가 및 상공업의 발달이 촉진됨에 따라 곳곳에 도시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붓다 시대에도 많은 도시가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 경전에 따르면 특히 번창하였던 대도시로서, 참파(Campa, 앙가의 수도)·라자그리하(Rajagrha, 마가다의 수도)·쉬라바스티(Sr vasti, 코살라의 수도)·사케타(Saketa, 코살라의 도시)·코삼비(Kosambi, 밤사의 수도)·바라나시(Baranasi, 카시의 수도)의 6대 도시를 들고 있다. 동방의 신흥 왕국들은 새로운 도시를 중심으로 성립하여, 이른바 도시국가의 양상을 띠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같은 국가적 정세에 부응하여 사회의 구성도 점차 변모해 나갔다. 인도에 있어 사회 구성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들 수 있는 것은 계급제도이다. 이는 아리야인들이 간지스강 상류지방에 이주하였던 시대에 확립된 것으로, 일반적으로 사성(四姓) 계급제도라고 한다. 이 제도에 따르면, 사회는 사제자(司祭者)이며 지식인들인 브라흐마나(Brahmana, 婆羅門), 무사 또는 왕족들인 크샤트리야(K atriya,刹帝利), 상인·서민들인 바이샤(Vai ya,毘舍), 노예· 육체노동자들인 수드라(S dra,首陀羅)의 4가지 커다란 집단들, 즉 카스트(cast)로 갈라진다. 따라서 이를 흔히 '카스트제도'라고 부르지만 원래 카스트란 개개의 계급집단을 가리키는 말이다. 어쨌든 이는 인도 아리야인의 사회구성을 특징짓는 계급제도로서, 이것을 기반으로하여 바라문교(婆羅門敎, Brahanism)가 성립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바야흐로 붓다 시대 이르러 이러한 계급제도가 점차 변모하고 있었다. 이 같은 변모와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것은, 정치적 패자(覇者)로서의 국왕과 경제적 실력자들인 자산가(資産家)들의 등장이다. 국왕(rajan)은 종전의 농촌 사회에 있어서는 단순히 부족의 수장(首長)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동방의 신흥왕국에서는 이들이 지방적 분권(分權)이기는 하지만 이미 국가의 지배자로서 그 지위를 갖기에 이르렀다. 또 자산가(gahapati, 居士)란 도시를 배경으로한 상업 자본가나 지방의 거대한 토지의 소유자를 가리킨다. 이 시대에 이르러 이들은 서민 계급과는 구별되는 하나의 사회적 신분으로 간주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장자(長者)로 불리우는 직업조합의 장(長)들은 상업 자본가들의 대표로서 사회적으로 중요한 지위에 있었다.이처럼 국왕이나 자산가가 사회에 커다란 세력을 갖게 됨에 따라 예로부터 내려오던 계급제도는 점차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한편 아리야인들이 동방으로 진출함으로써 증가되기 시작한 원주민과의 혼혈등으로 인해, 인종적으로도 계급 붕괴의 현상이 가속화되어 갔다. 그리하여 브라흐마나 문헌에는 사성(四姓)을 열거할 경우 반드시 바라문·왕족·서민·노예의 순서로하여 바라문을 최상위에 두고 있지만 그러나 초기불교의 성전에는 거의 대부분이 왕족·바라문·서민·노예의 순서로 나타난다. 즉 붓다의 시대에는 이미 바라문과 왕족의 위치가 바뀌어 있는 것이다. 원래부터 바라문 세력은 농촌사회를 중심으로 뿌리를 내려왔다. 따라서 여전히 농촌에서는 바라문이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지만, 신흥 도시들을 중심으로 한 사회에서는 그들의 옛날의 권위는 더 이상 지켜지지 않게 된 것이다.
2. 정통 바라문(婆羅門)의 사상 정치·경제적 변화 등을 포함하여 사회가 크게 변동함에 따라 종교 사상계에도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었다. 당시 철학 또는 종교에 관한 사상계는 크게 정통적인 바라문(婆羅門)과 이들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사문(沙門)의 두 그룹으로 나눌 수 있는데, 먼저 바라문의 사상부터 알아본다. 바라문의 사상은 한마디로 베다(Veda 陀)·브라흐마나(Br hmana 梵書)·아라냐카( ra yaka 森林書)·우파니샤드(Upani ad,奧義書)라는 일련의 문헌들을 통해 전개된 종교사상들을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의 전개과정은 보통 3기로 구분되기도 한다. 베다는 인도에 이주해 온 아리야인들의 우주와 인간에 대한 사유방법과 종교적 지식을 모아 편찬한 성전의 명칭으로, 4가지 베다서가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이고 그 성립이 오랜 것은 리그베다( g-veda)로서 B.C 1500∼1000년 경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시기를 베다시대라 하며 바라문 문화의 제1기에 해당한다. 신들을 찬미하는 시가(詩歌) 모음집인 리그베다에는 무수한 자연신들이 등장한다. 대개 태양이나 불, 바람, 강과 같은 자연 현상의 다양한 힘들, 또는 추상적인 관념 등이 신격화 되어 천신(天神, deva)으로서 숭배·찬미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신들 가운데 인드라(Indra)는 신체적 특징과 큰 위력을 갖춘 최고의 천신으로 묘사되고 있다. 신들의 거룩한 행위에 대한 찬미 외에도 리그베다는 부(富), 다산(多産), 장수(長壽), 승전(勝戰) 등과 같이 인간 에게 유익한 것들을 간구하는 기원을 함께 담고 있다. 그러나 자연신교적(自然神敎的)이며 다신교적(多神敎的)인 경향을 반영하는 이 시기에도, 근원적인 세계의 원리를 탐구하는 사유가 싹트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 중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우주창조에 관한 찬가(讚歌)들이다. 즉 우주와 모든 존재는 전능의 힘을 지닌 비스바카르만(Vi vakarman, 造一切神)이 '집을 짓듯이' 만들었다고 하거나, 또는 모든 피조물들의 주(主)라고 불리우는 아버지 신인 프라자파티(Praj pati, 生主神)가 우주를 출생시 켰다고 한다. 우주의 근원에 관한 이런 사유들이 리그베다의 노래를 통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신들에 대한 찬미·기원과 관련하여 베다시대 인도인들의 삶속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은 의례(儀禮)와 제사(祭祀)였다. B.C 1000∼800년 경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브라흐마나(Brahmana, 梵書)는 곧 이러한 의례와 제사에 관한 규정을 자세하게 밝힌 문헌들이다. 따라서 제사가 중심이 되었던 이 시대를 브라흐마나, 즉 범서(梵書)시대라고 부르며, 바라문 문화의 제2기이다. 사람들은 크고 작은 인간의 문제를 신에게 고하거나 빌기 위해 의례를 행하고 제사를 드렸다. 이러한 의례 또는 제사의 형식이 처음에는 간단하였고 그 목적도 단순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것은 점점 복잡하고 정교하게 되어 많은 제단(祭壇)과 제사를 관장하는 여러 사제자(司祭者)들이 필요하게 되었을 것 또한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변화에 비추어 볼 때 의례와 제사는 이제 우주와 신들을 움직일 수 있는 신비한 힘을 가지는 일종의 성스러운 기술로 간주되었다. 리그베다 외에 삼마베다(S ma-veda)·야주르 베다(Yajur -veda)·아타르바 베다( tharva-veda)의 3베다는 신에 대한 권청(勸請) 또는 제사의식의 축문 및 주구집(呪句集)으로서, 브라흐마나 시대에 성립된 것들이다. 이런 베다서들이 이 시대에 성립되고 있는 것도 의례와 제사의 효과를 더욱 높여 신들을 쉽게 움직이기 위함에서 였을 것이다. 신들을 움직이려면 의례와 제사의 절차를 빈틈없이 준수하여 거행해야 했던 만큼, 그것을 전담할 수 있는 것도 오로지 사제자들 뿐이었다. 따라서 신을 움직이게 하는 제사의 전담자는 큰 권능을 갖게 되었으며, 이들은 제사에 관한 권능 뿐 아니라 사회적 지위 또한 향상·강화되어 갔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사제가 세상을 지배하는 사제지상주의(司祭至上主義) 사회를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브라흐마나에서는 베다시대의 자연신교적 종교사상이 더욱 발전되어 범신론적(汎神論的) 우주론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우주를 창조한 인격신(人格神)으로서 브라흐만(Brahman 梵神)이 상정되어 그가 우주 자연 등 일체를 성립시킨 다음, 스스로 그 일체 속으로 들어갔다고 생각하였다. 그런 뜻에서 브라흐만은 우주를 창조한 인격신인 동시에 우주의 본질이기도 한 셈이다. 이같은 일원론적(一元論的) 범신론(汎神論)의 견지에서 사제자들은 그들 스스로를 브라흐만과 직결된 종성(種姓)이라고 주장하였다. 아리야인들에 의해 구상된 인도의 4성계급제도는, 이처럼 사제자 즉 바라문을 중심으로 형성된 사회체제인 것이다. 사제자들이 브라흐만과 직결된 종성(種姓)임을 주장하며, 바라문 중심주의 제사 지상주의에 빠져 있을 때 이런 현실에 회의를 느껴 새로운 의식을 갖는 사람들이 나오게 된다. 우파니샤드(Upani ad, 奧義書) 시대의 사상가들이 바로 그들이다. 의례와 제사를 만능으로 삼는 지나친 종교적 색체가 반성이 되고 철학적 사색이 심화된 이 시기는 B.C 800 - 600년 경으로, 바라문 문화의 제3기이다. 이 시대의 문헌은 새로운 의식을 지닌 사상가들이 숲 속에서 비의(秘義)를 노래한 내용의 아라냐카( ra yaka)와 그 중에서도 특히 철학적 사색이 더욱 체계화된 일단의 우파니샤드가 있다. 우파니샤드는 '가까이 앉는다'는 의미에서 나온 말이다. 스승과 제자가 가까이 앉아 서로 은밀하게 주고 받은 가르침을 모아 이룩한 성전이라는 뜻이다. 이 우파니샤드에서는 제사보다 지식을 더욱 고차원적인 해탈의 열쇠로 간주하였다. 의례와 제사 대신에 사색을 통한 지적(知的) 추구가 더욱 중시된 것이다. 따라서 우파니샤드의 사상가들은 우주의 질서와 그 이면(裡面)의 통일성에 관해서 사색하였고, 절대적 존재와 개체적 자아(自我)의 한계에 대하여 탐구하였다. 그리하여 브라흐마나 시대의 일원론적인 범신론(汎神論)은 이 시대에 이르러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우파니샤드는 세계의 다양성의 배후, 즉 모든 신들과 피조물들, 인간과 자연의 이면에 하나의 절대적 동일성인 최고의 브라흐만이 존재한다는 사상을 펼치고 있다. 브라흐만은 전우주이며,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이라고 일컬어진다. 이렇게 브라흐만을 우주와 동일시함으로써 우파니샤드는 모든 것 안에서 브라흐만을 보고 브라흐만 안에서 모든것을 본다. 인도인들은 모든 자연의 사물들 안에 브라흐만의 내재성(內在性)을 인정하는 한편, 동시에 창조된 세계를 뛰어 넘는 브라흐만의 초월성에 대해서도 성찰했다. 브라흐만은 세계 전체를 포괄하되 세계를 훨씬 초월하며, 또 그 자신의 일부분으로써 온 우주에 편재(遍在)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처럼 우주에 있어서 절대적 통일성의 원리가 통찰되는 가운데 그것은 인간 존재의 동일성으로 파악되기도 하였다. 즉 우주의 근원인 동시에 보편적 원리로서의 브라흐만과 인간 내면의 핵심인 아트만(Atman, 神我·個我)은 동일한 존재라는, 우파니샤드의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이 곧 그것이다. 아트만은 '호흡하다(at)'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말이다. 그것이 점차 생기(生氣)·신체(身體)를 의미하게 되고 나아가 자아·영혼을 의미하는 말로 발전하였 다. 그리고 마침내는 가장 종교적이며 철학적인 의미에서의 자기 본질이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 우파니샤드에 있어서, 자기 본질인 아트만은 동시에 우주 그 자체의 본질이다. 아트만은 만물에 내재하여 우주의 모든 존재를 지탱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우주의 근본이며 보편적인 원리인 브라흐만과 다른 것이 아니다. 이것이 범아일여(梵我一如)의 기본적 의미이다. 우파니샤드 사상가들은 이같은 보편적 자아와 개체적 자아가 동일하다는 존재의 통일성을 체득하기 위해 스승의 지도 아래 학습하거나 성찰하고 명상·요가 등의 수련을 병행하기도 하였다. 정통 바라문의 종교 및 사상은 이상과 같이 3기로 구분되는 오랜 세월동안에 걸쳐 전개되어 왔거니와, 불교는 이러한 사상과 종교적 수행법이 발전되어 가던 시대에 출현하여 '무아(無我)'를 주장하였다. 무아(無我)의 '아(我)'는 곧 아트만에 해당한다. 그러면 불교의 무아(無我)와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아(我)는 어떤 관계에 있으며 어떻게 다른 것일까. 이는 당시 종교 사상의 상황에 있어서 불교의 위치와 직결되는 문제이므로 제Ⅲ장 근본불교에서 다시 검토하기로 한다.
3. 사문(沙門)들의 출현
우파니샤드 시대에 있어서 심오한 철학적 사유와 높은 종교적 실천이 행해지는 가운데서도, 바라문의 의례와 제사는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사제자들에 의한 의례와 제사는 아직도 전통과 권위가 인정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상황의 변동은 이같은 종교 사상에도 큰 변화를 몰아왔다. 사람들은 그동안 만능으로 여겨왔던 제사의 한계를 깨닫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이를 넘어서는 보다 높은 세계를 발견하기 위해 다양한 사상적 노력을 기울이는 경향이더욱 현저해진 것이다. B.C 600 - 500년 경에 바라문의 사상에 맞서 새로운 우주·인생관을 제시하면서 자유로운 사상활동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대거 출현하고 있음은 이런 사정을 반증해준다. 이 새로운 사상가들을 사문(沙門, r mana)이라고 부른다. 붓다 역시 이같은 사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사문이란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며, '몸을 괴롭게 하는 사람'이라는 정도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는 말이다. 이들은 바라문의 법전(法典)에서 규정하고 있는 네 가지 생활 단계에 그대로 따르지 않았다. 네가지 생활 단계란, ① 스승 밑에서 학습하는 청년 시절의 범행기(梵行期) ② 가정에서 생활하며 가장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가주기(家住期) ③ 가정과 재산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숲 속에 들어가 은거(隱居)하는 임서기(林捿期) ④ 숲 속의 거처까지 버리고 완전히 무소유(無所有)로 걸식·편력의 생활에 들어가는 유행기(遊行期)의 4주기(四住期)를 말한다. 사문들은 이런 규정에 얽매이지 않고 편리한 시기에 출가(出家)하여 무리 지어 숲 속에 은거하거나 홀로 편력하였다. 또는 높은 종교적 경지를 얻고자 욕망을 억제하고 극도의 고행(苦行)을 실천하는 자들도 있었다. 사상과 관습에 있어서 매우 혁신적이었던 이들은 정통 바라문의 입장에서 보면 이단(異端)의 사상가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대체로 바라문 이외의 사상가들은 흔히 사문으로 불리웠다. 그런데 당시 바라문을 포함하여 이들 사문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주장하고 제시하는 사상은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였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62견(見)으로, 자이나교에서는 363견으로 분류하여 정리하고 있을 정도이다. 이는 불교나 자이나교의 입장에서 각각 이단적 견해라고 생각되는 것을 62종 또는 363종으로 열거한 것이다. 이러한 분류 방법은 기계적으로 맞추어 놓은 것도 포함하고 있어, 이를 그대로 당시 사상계의 실태라고 볼 수는 없다. 어쨌든 이런 설명을 통해 당시 사상계에 얼마나 많은 견해가 제시되고 있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다양한 사상의 내용이나 그 주장자에 관해서는 거의 밝혀져 있지 않다. 다만 사문들 가운데 몇 사람의 이름과 그들의 사상이 불교의 초기경전에 속하는 사문과경(沙門果經) 등에 나타나 있다. 이른바 육사외도설(六師外道說)이 그것이다. 여기서 외도설(外道說)이란 불교와는 '다른 길의 사상'이라는 뜻으로 쓰인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붓다와 같은 시대의 인물들로, 모두 특징 있는 견해를 표명한 자유 사상가들로서 유명하다.
'육사외도(六師外道)'의 견해를 간단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푸라나 캇사파(Purana Kassapa) - 도덕부정론(道德否定論) 당시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던 선악의 행위와 그 행위가 초래하게 될 미래의 과보(果報)를 모두 부정하였다. 살생·도둑질·간음·거짓말을 해도 악을 행한다고 할 수 없으며, 악의 과보도 생기지 않는다. 또 제사·베품·극기·진실한 말 등을 행해도 선행이라고 할 수 없으며, 그 과보 또한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체의 도덕 관념을 부정했던 그는 노예계급 출신이었다고 한다.
2) 파쿠다 캇챠야나(Pakuda Kacc yana) - 7요소설(七要素說) 인간 존재는 지(地)·수(水)·화(火)·풍(風)의 4 가지 원소와 고(苦)·락(樂)·생명(生命,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본다. 이 7요소(要素)는 실재(實在)하는 것으로서 불변이므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괴롭히거나 즐겁게 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는 고(苦)와 락(樂)까지도 단순한 느낌의 내용이 아니라 실재하는 요소로 이해하였으며, 따라서 인간의 생명(영혼) 또한 의지 작용이 불가능한 물질적 요소로 취급하였다.
3) 막칼리 고살라(Makkhali Gos la) - 숙명론(宿命論) 모든 존재의 구성 요소로서 지(地)·수(水)·화(火)·풍(風)·허공(虛空)·득(得)·실(失)·고(苦)·락(樂)·생(生)·사(死)·영혼(靈魂)의 12요소(要素)가 있다고 한다. 다른 요소들을 성립시키는 순수 공간으로서의 허공과 득(得)·실(失)·생(生)·사(死)·영혼(靈魂) 같은 추상적 관념까지를 실체시(實體視)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인간의 의지에 근거한 행위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업(業)에 의한 윤회전생(輪廻轉生)을 부정하는 등 일종의 결정론적(決定論的) 숙명론을 주장하였다.
4) 아지타 케사캄발린(Ajta - Kesakambalin) - 유물론(唯物論) 지·수·화·풍의 4가지 물질적 원소만이 참된 실재라고 인정하고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인간은 죽음과 함께 단멸(斷滅)하고 신체는 모두 4가지 원소로 환원된다. 내세와 같은 것도 있을 수 없고 선악에 대한 과보도 없으며 현세가 인생의 전부라 하였다. 그는 철저한 유물론자였으며 생의 가치면에서는 쾌락주의의 입장을 취했다.
5) 산자야 벨라티풋다(Sa jaya Bela hiputta) - 회의론(懷疑論) 진리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서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불가지론적(不可知論的) 입장에서,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관한 한 확정적인 대답은 주지 않았다. 그는 내세의 존재나 선악의 과보 등의 질문에 대해 언제나 애매한 대답을 하여 판단을 중지한 것이다. 이 때문에 그의 주장은 '뱀장어처럼 미끄러워 잡기 어려운 교설[抱鰻論]'로 일컬어진다. 붓다의 뛰어난 두 제자 사리풋다와 목갈라나는 본래 이 산자야의 제자였다.
6) 니간타 나타풋타(Niga tha N taputta) - 자이나교 자이나(Jaina)교의 개조(開祖) 마하비라(Mah v ra) 혹은 지나(Jina)를 불교에서는 니간타 나타풋타로 부른다. 그는 우선 산자야의 회의론을 극복하기 위해 상대주의적 인식론(相對主義的 認識論, Sy d - v da)을 수립한 다음, 이에 입각하여 이원론적(二元論的) 우주론을 제시하였다. 즉 모든 존재는 영혼(命, J va)과 비영혼(非命, aj va)의 2 부분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영혼이란 지수화풍(地水火風), 동식물, 인간 등 모든 존재에 내재(內在)하는 하나 하나의 생명을 실체시(實體視) 한 것이다. 비영혼은 영혼 이외의 일체를 말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법(法,dharma, 운동의 조건)·비법(非法, adharma, 정지의 조건)·허공( k a)·물질(pudgala)의 4 가지가 포함된다.
이것과 영혼을 합해 '5실체(五實體)'라 한다. 마하비라는 이같은 이론을 바탕으로 윤회하는 생존으로부터의 해탈(解脫)의 길을 가르쳤다. 업(業)을 비영혼 즉 물질로 보고, 이 업 물질(業物質)에 의해 영혼이 속박됨으로써 윤회가 되풀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해탈을 얻기 위해서는 고행을 실천할 것이 강조된다. 과거의 업을 소멸하는 한편 새로운 업의 유입을 방지하여 영혼을 정화하기 위해서는 육체(물질)에 고통을 주는 고행이 최상의 방법이라는 입장이다. 그러므로 자이나교는 고행을 비롯하여 감각의 억제, 정욕으로부터의 자유로움, 세상으로부터의 초연함, 무소유, 그리고 나체(裸體), 참회와 같은 수행이 강조된다. 이같은 고행주의 또한 그 이론적 근거로서 5실체설(五實體說)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지만, 사문들 가운데서도 해탈(解脫)사상을 말하기 시작한 것은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이상에서 6사(六師)를 중심으로 사문들의 대체적인 사상경향을 살펴 보았다. 정통 바라문의 사상과 함께 이들 사문들의 다양한 주장과 견해는 붓다 시대의 종교 사상이 상당한 수준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다시 이들 2 계통의 사상을 정리해 말하면, 그것은 정통 바라문의 전변설(轉變說,priama - vada)과 이에 대응하는 사문들의 적취설(積聚說, rambha - vada)로 요약할 수 있다. 즉 자아(自我)나 세계는 유일한 브라흐만(梵)에서 유출 전변했다고 보는 것이 전변설이다. 이에 대해 적취설은 그러한 유일의 절대자를 인정하지 않는 대신 개개의 요소를 불멸의 실재로 믿고, 그것들이 모여 인간과 세계 등 일체가 성립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2가지 사고 방식의 기초가 붓다 시대에 이미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또한 종교적 수행방법으로는 요가(yoga)와 선정(禪定)을 닦아 해탈을 실천하려는 수정주의(修定主義)와 고행을 통해 마음을 속박하고 있는 미혹의 힘을 끊고 해탈을 이루고자 하는 고행주의(苦行主義)의 2가지가 대표적인 것이었다. 반드시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이 같은 수행방법은 대체로 전자가 전변설에 입각한 것이라면 후자는 적취설에 바탕을 두고 있다. 붓다시대 인도의 종교 사상을 대체로 이상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지만, 앞서 말한 대로 이 시대에 정통적인 바라문 사상은 이미 그 빛을 상실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대신할 만한 새로운 종교 사상의 권위 또한 아직은 확립되어 있지 못하였다. 사문과 같은 자유로운 사상가들이 등장하여 다양한 견해와 교설을 주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같은 현실 속에서, 당시 사람들이 종교적 또는 사상적으로 심한 방황과 혼란을 겪었을리라는 것 또한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제2장 샤카무니 붓다 제2절 샤카무니의 생애
1. 탄생과 젊은 날들
붓다의 성은 고타마(Gotama)이고 본래의 이름은 싯다르타((Siddh rtha)이다. 붓다(Buddha)라는 말은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중국 사람들은 이를 '불타(佛陀)'로 적거나 '각자(覺者)'라고 번역하였고, 우리는 '부처님'이라고 부른다. 고오타마 싯다르타가 진리를 깨달은 이후부터 그는 붓다로 불리우게 되었다. 우리들이 흔히 사용하고 있는 샤카무니( kyamuni, 釋迦牟尼)라는 명칭은 '샤카족 출신의 성자(聖者, muni)'라는 의미이다. 그 래서 샤카무니 붓다라고 할 때는 '샤카족의 성자로서 붓다가 되신 분'정도의 뜻을 갖는다. 이 밖에도 붓다는 여러 가지 다른 명칭으로 불리우기도 한다. 전통적로는 여래십호(如來十號)라하여 10가지 이름이 있다. 여래(如來,Tathagata)-진리 그대로 세상에 오신 분, 정변지(正遍知, Samyaksambuddha)-우주 일체의 현상을 두루 깨달은 분, 세간해(世間解, Lokavit)-세상 일체의 일을 모두 아는 분, 천인사(天人師, Devamanu ya st )-하늘의 존재들과 사람들의 스승, 세존(世尊, Bhagavat)-온갖 공덕을 갖추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 등이 그것이다. 이같은 명칭들은 모두 붓다가 이룩한 깨달음 또는 그의 인격적인 위대함을 표현하고 있다. 붓다 샤카무니의 생애는 불전문학(佛傳文學)이라고 불리우는 일군의 현존 경전들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러한 경전들은 모두 붓다의 입멸(入滅)후 수 세기를 지나 작성되었으며 위대한 교조(敎祖)를 찬양할 목적으로 서술된 것들이어서, 과장과 비현실적인 표현들이 자주 나타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붓다의 전기를 기록한 사람들의 두터운 신앙심과 그들이 구사하는 풍부한 종교 문학적 상징성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럴 경우에도 그들이 초기 경전에 산재하는 단편적인 내용들을 원천 자료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이 붓다의 역사적인 생애를 이해하는데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붓다는 히말라야 기슭에 위치한 샤카족이 세운 왕국 카필라바스투(Kapilavastu) 왕국의 숫도다나(Suddhodana 淨飯王) 왕과 마야(Maya 摩耶) 왕비의 외 아들로 태어났다. 카필라바스투는 현재의 네팔 남쪽, 인도와 접경해 있는 타라이(Tarai) 분지의 틸라우라코트(Tilaurakot)로 추정되고 있는 곳이다. 샤카족은 농업에 종사하면서 주로 벼농사를 짓던 작은 부족이었고, 카필라바스투는 그 당시 인도에서 가장 강성한 나라였던 코살라(Kosala)의 부속 국가였다. 마야 왕비는 당시의 풍속에 따라 아기를 낳기 위해 친정인 콜리(Koli)성으로 가던 도중, 룸비니(Lumbini)라는 동산에서 싯다르타를 낳게 되었다. 불전문학의 전설에 의하면, 마야 왕비가 룸비니 동산에 이르러 휴식을 취하던 중 꽃이 만발한 무우수(無憂樹) 아래에 서서 나뭇 가지를 손으로 잡는 순간 아기가 오른쪽 옆구리로 태어났다고 한다. 이것이 싯다르타의 우협탄생(右脇誕生) 설화이다. 붓다의 탄생 연대에 대해서는 확실한 것은 말할 수가 없다. 북쪽으로 전해지는 문헌(북방불교 전승)에 의하면 붓다는 B.C 463년에 탄생하여 B.C 383년에 열반하신 것으로 되어 있으며, 남쪽으로 전해지는 문헌(남방불교 전승) 자료는 B.C 566년에 태어나고 B.C 486년에 입멸하신 것으로 되어 있다. 이 2 연대 사이에는 약 100년의 차이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남방불교 전승인 B.C 566 - 486년의 연대를 사용하고 있다. 이 연대 외에도 세계 불교인들이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연대가 있다. 이것은 1956년 네팔의 카트만두에서 열린 제4차 불교도 대회 때 정한 것이다. 즉 1956년이 붓다가 입멸하신지 2500년에 해당하는 남방불교의 전통에 근거하여 붓다의 연대를 B.C 624 - 544년으로 정하였다. 이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사용하고 있는 연대보다 58년이 더 많은 것이다. 또한 탄생날짜 역시 확실하게 알 수가 없다. 북방에서는 전통적으로 음력 4월8일을 붓다의 탄생일로 생각해오고 있다. 그러나 남방불교 전통에 의하면, 인도 달력으로 2월인 바이샤카(vai kha)월의 보름달이 되는 날이다. 이는 태양력으로 4월 또는 5월의 만월(滿月)일에 해당된다. 마야 왕비는 아기를 낳은 지 7일만에 세상을 떠났고, 동생인 마하 파자파티(Mah p japati - Gautami)가 양모가 되어 싯다르타를 키웠다. 비록 어머니를 일찍 잃기는 했지만 싯다르타는 한 나라의 왕자로서 온갖 것이 다 갖추어진 환경 속에서 자라났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봄·가을 그리고 여름과 겨울을 위한 궁전 등 '3시전(三時殿)'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만을 위해 만들어진 연못도 있었다고 한다. 의복도 당시에 가장 고급이었던 카시산 옷감으로 만들어 입었고, 먼지와 햇볕을 막기 위해 일산(日傘)을 든 시종을 항상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또한 그는 왕자로서 갖추어야 할 여러 가지 지식과 학문을 고루 교육 받았고 훌륭한 기예(技藝)들을 익혔다. 그리고 16세에 이웃 나라의 야소다라(Ya odhar )공주와 결혼하였다. 이와 같이 싯다르타는 온갖 호화로움과 극진한 보살핌 속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생활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싯다르타는 부족함이 없는 왕궁의 생활에 마음을 빼앗기기 보다는 인간이나 세계와 같은 보다 본질적인 문제들에 관해 깊은 사색에 잠기는 일이 많았다. 인생의 여러 가지 문제들 가운데서도 특히 그를 괴롭히는 것은 생·노·병·사와 같은 삶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들이었다. 아버지 숫도다나 왕과 양모 마하파자파티는 이런 왕자를 조심스럽게 지켜 보면서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싯다르타가 훌륭하게 자라나 장차 왕위를 잇고 카필라를 강성한 나라로 만들어 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그런 세속의 일 보다는 항상 근본적인 인간의 문제에 더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 때문에 그들은 혹시 왕자가 출가(出家)하여 수행자가 되지나 않을까 하고 더욱 염려하였다. 싯다르타를 서둘러 결 혼시킨 것도 실은 이같은 걱정과 염려에서였다.
2. 출가·구도·깨달음
부모와 주위 사람들의 염려와 보살핌 속에서도 인간 문제에 대한 싯다르타의 사색과 번민은 계속되었다. 그것은 결국 싯다르타 스스로 출가를 향해가는 도정이기도 했다. 왕궁의 호화로운 생활을 떨쳐 버리고 그가 출가의 결심을 하게 되는 장면을 불전문학 라리타비스타라(Laritavistara, 普曜經, 大方大莊嚴經)는 4문유관(四門遊觀)의 전설로써 그것을 묘사해 놓고 있다. 싯다르타는 카필라바스투의 동·남·서쪽 성문 밖으로 산책을 나갔다. 도중에 그는 각 성문 밖에서 몹시 쇠잔하고 추해진 노인과, 괴로움으로 신음하는 병자와, 슬픔의 장례 행렬을 차례로 목격한다. 여기서 늙고, 병들고, 죽는 인생의 괴로움의 문제를 세삼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다시 북쪽 성문 밖으로 나갔다가 나무 아래 단정히 앉아 수도하는 한 수행자를 만난다. 이 만남은 앞의 경우들과는 달리 그에게 큰 기쁨과 희망을 주었다. 그리하여 싯다르타는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도 출가 수행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사문유관을 사실 그대로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이는 곧 젊은 날 싯다르타의 생활모습과 번민의 한 단면을 상징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왕궁의 호화로운 생활도 싯다르타에게는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하고 있을 때, 아들 라훌라(Rahula)가 태어났다. 그는 이제 출가를 결행할 때가 왔다고 생각하였다. 드디어 어느 날 밤 싯다르타는 남 몰래 왕궁을 빠져나와 출가 구도(求道)의 길을 나섰다. 그 때 그의 나이는 29세였다. 싯다르타가 뒷날 진리를 깨달아 붓다가 된 다음, 그는 자신의 출가 동기를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내가 출가한 것은 병듦이 없고, 늙음이 없고, 죽음이 없고, 근심 걱정 번뇌가 없고, 더러움이 없는, 가장 안온한 행복의 삶(열반)을 얻기 위해서였다.([증아함] 권56 라마경);
이 세상에 만약 늙고, 병들고, 죽는 이 3가지가 없었다면 여래(如來, 붓다)는 세상에 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 ([잡아함] 권14, 346경)
사문유관의 도식적인 묘사나 이같은 붓다 자신의 술회는 다같이 싯다르타의 절실한 출가 동기가 무엇이었던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 그는 일찍부터 늙고 병들고 죽는 것에 대하여 생각했고, 그 필연적인 인생의 괴로움을 슬퍼하였으며, 불완전한 인간 세상의 모순을 괴로워했다. 그 끝에 마침내 그러한 것들을 모두 해결할 수 있는 참삶의 길을 찾아 왕궁을 버리고 출가를 단행했던 것이다. 그것은 진리의 길을 찾아 세속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던져버린, 참으로 '위대한 버림' 바로 그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사문(沙門), 즉 출가 구도자가 된 싯다르타에게 이제 중요한 것은 자신을 이끌어 줄 스승을 찾는 일이었다. 그 편력(遍歷)의 길에 나선 싯다르타가 맨 처음 만난 수행자는 바가바(Bhagava)라는 고행자였다. 그는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하늘에 태어나는 것을 목적으로 고행을 닦고 있었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우선 이들 고행자들의 목적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원하는 일 또한 생과 사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이 아니었기 때문 이다. 그래서 그들을 떠난 싯다르타는 다시 브라흐만(Brahman,梵天)과 해와 달과 불을 섬기는 사람들을 만난다. 여기서도 그는 역시 자신이 닦을 만한 수행이 아니라고 판단하게 된다. 이렇게 싯다르타는 구도의 편력은 계속되었다. 카필라바스투에서 동남쪽으로 약 1000리 거리에 위치한 바이샬리(Vais li)로 가서는 알라라 칼라마(Alara Kalama)를 만나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나 역시 그 가르침에 만족할 수 없어 길을 떠난 그는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 당시 가장 큰 나라였던 마가다(Magadha)국의 수도 라자그리하(Rajagriha, 王舍城)에 닿았다. 신흥의 도시 라자그리하는 당시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답게 수많은 사문들과 사상가들이 모여 드는 곳이기도 하였다. 싯다르타는 그곳에서 우드라카 라마푸트라(Udraka Ramaputra)라는 큰 스승을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다. 바이샬리에서 헤어진 알라라 칼라마와 함께 우드라카 라마푸트라는 당시 가장 명망 높은 수행자들이었다. 선정(禪定), 즉 정신통일에 의해서 정신적 작용이 완전히 정지되어 고요한 경지에 도달함으로써 해탈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 이들의 수행 목적이었다. 선정주의자(禪定主義者), 또는 수정주의자(修定主義者)라고도 불리우는 이들의 지도 아래, 싯다르타는 그들이 해탈의 경지라고 인정하는 최고 단계에까지 도달하였다. 그러나 이것 역시 모든 괴로움이 없는 완전한 경지는 아니었다. 정신통일이란 끊임없이 반복할 수밖에 없는 경지이며, 정신적 작용의 완전한 정지 또한 결국 죽음에 이르러야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수행의 목적과 방법을 혼동한 채 오로지 수행을 반복하고 있는 셈이었다. 이같은 모순을 알게된 싯다르타는 더 이상 수정주의자들의 가르침을 답습하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동안 스승으로 삼아왔던 우드라카 라마푸트라와도 작별하였다. 그는 전통적인 수행자들로부터는 더 이상 기대할 바가 없음을 깨닫고, 다시 라자그리하에서 남쪽으로 80㎞가량 떨어진 우루벨라(Uruvela) 마을의 네란자라(Neranjara, 泥連禪河)강 근처의 숲 속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고행림(苦行林)으로 불리우던 이곳은 현재의 보드가야(Bodhgaya) 동쪽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새로운 결심으로 맹렬한 고행을 시작했는데, 여기에는 그동안의 수행 중에 그를 따르던 5명의 수행자들도 함께 하였다. 이 때 새롭게 시작한 싯다르타의 고행은 하늘에 태어나기를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정신의 자유를 얻기 위한 고행으로서, 일차적으로는 육체를 조복(調伏)받는 일이었다. 그러나 극심한 고행으로도 그는 해탈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 자신 일찍이 왕궁의 생활에서 경험했던 온갖 즐거움과 쾌락이 인간에게 궁극적인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했던 것처럼, 고행 또한 그러하였다. 여기서 극단의 육체적인 고행이 무익함을 깨달은 싯다르타는 어느 날 네란자라 강물에 들어가 더러워진 몸을 씻었다. 그리고 때마침 근처를 지나던 우루벨라 촌의 수자타(Sujata)라는 처녀로부터 우유죽을 공양받고 기력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당시 관행으로 볼 때 고행자가 몸을 씻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일은 곧 고행의 포기를 의미하는 일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함께 도를 닦아온 5명의 수행자들은 싯다르타가 이제 수행을 포기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수행자로서는 이미 타락한 싯다르타의 곁을 떠나버렸다. 어떻든 정신 집중을 위한 수정(修定)에 이어 육체를 괴롭히는 고행(苦行)까지 버림으로써, 싯다르타는 이제 전통적인 수행방법을 모두 떠난 셈이 되었다. 수정주의나 고행주의는 당시 종교 철학 사상을 대표하는 전변설(轉 說)과 적취설(積聚說)을 그 이론적 근거로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이같은 사상이나 수행방법을 모두 버린 것이어서, 이제는 따로 구해야할 스승이 존재하지 않았다. 또 그에게 스승이 될만한 사람이 달리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이제야말로 스스로 구도의 길을 개척해 나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결국 그는 혼자서 네란자라 강을 건너, 서쪽 언덕 가까운 곳에 그늘이 무성한 한 핍발라(Pippala) 나무 밑에 자리를 잡았다. "도를 이루지 못하면 결코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굳게 결심하였다. 실로 오랫동안 방황하던 구도자 싯다르타는 이제 미로(迷路)에서 벗어나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메던 길을 혼자 개척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의 수행은 치열하고 철저하게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마침내 싯다르타는 진리를 깨달았다. 드디어 깨달은 사람, 즉 붓다(Buddha)가 된 것이다. 왕궁을 떠나 출가하여 구도 수행해온지 6년만이었고, 그의 나이 35세 때였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당시 인도의 종교사상은 우주의 근원이나 인간의 근본을 유일한 브라흐만에 있다고 보거나, 또는 다수의 물질적 요소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지금 싯다르타에 있어서는 그러한 외부 객관에 대한 비현실적 관찰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는 인간을 괴롭게하고 자유를 구속하는 것은 결코 외부의 어떤 것이 아니라 각자의 내심(內心)에 그 원인이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안으로 눈을 돌려, 그 무한한 자유와 무고안온(無苦安穩)의 행복을 자신의 마음에서 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는 생노병사에는 근본적인 원인이 있으며, 바로 그것의 결과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 원인은 다름 아닌 인간의 마음 깊숙히 깃들어 있는 무명(avidya), 즉 진리에 대한 무지(無知)와 그것 때문에 발생하게 되는 욕망이었다. 이것을 깨달은 싯다르타는 이 무명과 욕망으로부터 비롯한 인간의 모든 괴로움이 연기(緣起)하는 모습을 체계적으로 관찰하여, 마침내 그 무명과 욕망을 없앰으로써 무고안온(無苦安穩)의 열반(涅槃)을 증득(證得)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불전은 싯다르타의 이러한 일찍이 없었던 깨달음을 수하항마(樹下降魔)라는 설화를 통해 극적으로 묘사해 놓고 있다. 싯다르타가 핍발라 나무 아래서 마군(魔軍)을 항복 받음으로써 붓다가 되었다는 내용이다. 즉 마왕 파피야(Mara Papiya, 魔王 波洵)와 그의 부하들은 수행중인 싯다르타 앞에 나타나 온갖 위협과 유혹으로 그의 성도(成道)를 방해하였다. 그러나 그는 끝내 동요됨이 없었고 결국 마왕에게서 항복을 받아낸다. 여기서 마(魔)란 자기 내면에서 일어나는 심각한 정신적 갈등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싯다르타는 이처럼 자신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온갖 욕망과 회의와 불안과 같은 정신적 갈등과도 싸워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는 그것을 넘어서서 무상정등정각(Anuttara-samyak-sa bodhi 無上正等正覺), 즉 더없이 높고 바르고 참된 깨달음을 이룬 붓다가 된 것이다.
3. 최초의 설법과 교화 활동
위없는 깨달음을 얻은 뒤에도, 붓다는 자신이 깨달은 내용을 고요히 음미하며 계속 깊은 법열(法悅)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사람들은 끝없이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고통 속에서, 무엇이 행복이며 어떤 것이 괴로움인지 조차 모르고 살고 있는 것이 또한 현실이었다. 이에 붓다는 법열의 자리로부터 몸을 일으켰다.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세상 사람들을 구제해야 한다는 자비의 빛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실로 거룩한 붓다의 길, 불교는 여기서부터 비롯된다고 말할 수 있다. 당시 인도의 종교사상계 뿐만 아니라 인류의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여는 이와 같은 불교의 출발에 대해, 불전은 역시 설화적으로 그 광경을 표현해 놓고 있다. 브라흐만이 붓다 앞에 나와 경배를 올리고, 세상에 나아가 법을 설해 주실 것을 거듭 3 번이나 간곡하게 청했다는 것이다. 이른 바 범천권청(梵天勸請)의 이야기이다. 새로운 가르침을 펴기 위하여 붓다는 길을 나섰다. 그가 보드가야의 보리수 밑을 떠나 처음으로 향한 곳은 바라나시(V r asi) 근방의 녹야원(Mrgad ya, 鹿野苑)이었다. 그곳에는 앞서 싯다르타가 타락했다고 생각하고 그의 곁을 떠났던 다섯 수행자들이 도를 닦고 있었다. 붓다는 누구보다도 이들에게 법을 설하기 위해 보드가야로부터 600리나 되는 먼 길을 걸어 그곳으로 간 것이다. 다섯 수행자는 어느 날 싯다르타가 자기네들을 향해 오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였다. 그가 성도(成道)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그들은, '수행을 포기하고 타락한' 싯다르타를 아는 체하지도 말고 맞아 주지도 않기로 서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붓다가 점점 가까이 이르자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함께 일어나 자리를 권하였다고 한다. 진리를 깨달은 이의 그 빛나는 얼굴과 자신에 찬 걸음걸이, 형언하기 어려운 위엄과 자비의 힘 앞에 그들은 압도 당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붓다는 이들에게 고와 락의 양 극단을 떠난 중도(中道)의 길과, 고(苦)·집(集)·멸(滅)·도(道)의 사성제(四聖諦) 등에 대한 가르침을 폈다. 자상하게 반복하여 법을 설하고, 함께 명상하는 가운데 여러 날이 지났다. 그러던 중 5명의 수행자 가운데 카운디냐( jn ta Kau dinya, 阿若 陳如)가 가장 먼저 붓다의 가르침을 깨달았다. 이어 다른 4명의 수행자들도 차례로 그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붓다로부터 가르침을 듣고 깨달은 이들 다섯 수행자는 붓다의 최초 제자들이 되었다.녹야원에서 베풀어진 최초의 가르침은 흔히 '초전법륜(初轉法輪)'으로 불리운다. '처음으로 법의 수레바퀴를 굴렸다'는 뜻이다. 여기서 말하는 '법'이란 '진리'를 가리키는 것으로, 붓다의 이 첫 설법은 불교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불교의 구체적인 출발이 이 초전법륜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즉 초전법륜을 통해 불(Buddha, 佛, 가르침을 연 붓다)·법(Dharma, 法, 붓다가 발견한 진리)·승(Sa gha, 僧, 불법을 받들고 실천하는 사람들 또는 그 모임)의 교단 구성요소가 모두 갖추어진 것이다. 이 3가지 요소는 교단 구성의 핵심이기 때문에 '3가지 보배' 즉 '3보(三寶)'라고 부른다. 다섯명의 수행자들이 붓다에게 귀의하여 제자가 된 직후, 바라나시의 한 장자의 아들로서 인생을 비관하고 번민하던 야사(Yasa)가 설법을 듣고 붓다 밑으로 출가하였다. 뒤 따라 그의 부모와 아내도 붓다에게 귀의함으로써 이들은 불교교단 최초의 재가(在家) 신자가 되었다. 즉 출가 제자인 비구(Bhiku, 比丘)에 이어 남자 신도인 우파사카(Up saka, 優婆塞), 여자 신도인 우파시카(Upasika, 優婆夷)가 된 것이다. 또한 야사의 친구 4명과 다른 친구들 50명도 감화를 받고 그를 따라 출가하여 붓다의 제자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60명의 출가 제자를 거느리게 된 붓다는, 이제 진리를 세상에 널리 전하기 위하여 제자들에게 전도의 길을 떠나도록 권하였다.비구들이여, 자 전도를 떠나거라.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기고, 모든 사람들[人天]의 이익과 행복과 안락을 위하여. 그리고 두 사람이 한 길을 가지마라. 비구들아,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며, 조리와 표현을 갖춘 법(法=진리)을 설하여라. 또 원만 무결하고 청정한 범행(梵行)을 설하여라..... 비구들아, 나도 또한 법을 설하기 위해 우루벨라(Uruvela)의 세나니가마(將軍村)로 가리라.(SN. 係蹄; 잡아함, 繩索經)
초기 경전에서 볼 수 있는 이와같은 전도에 관한 말씀은 확실히 붓다의 '전도선언(傳道宣言)'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제자들에게 전도의 길을 떠나도록 한 붓다는 그 자신도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지난 날의 수행 장소였던 우루벨라로 되돌아 갔다. 그곳에는 불을 섬기는 사화외도(事火外道)로서 당시 마가다국 빔비사라(Bimbis ra)왕의 존경을 받고 있던 카샤파(Ka yapa) 3형제와, 그들이 거느린 1000명의 수행자들이 있었다. 붓다는 그들에게 법을 설하여 모두 제자로 삼았다. 그런 뒤 다시 라자그리하로 가서 빔비사라왕을 귀의시켜 재가 제자로 만들었다. 왕은 붓다와 그의 비구 제자들을 위하여 라자그리하 근방에 있던 죽림 동산에 절을 지어 붓다에게 기증했다. 이것이 불교 교단 최초의 절인 죽림정사(竹林精舍)이다. 이로부터 불교는 왕사성을 중심으로 하여 그 교세가 크게 확장되어 갔다. 그 중에서도 이곳에서 훌륭한 제자들을 얻게 된 것은 불교 교단의 가장 큰 수확이었다. 수많은 제자들 중에서도 훌륭한 제자 열 사람을 10대 제자라 하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인물은 사리푸트라(S riputra, 舍利弗)와 마우드갈랴야나(Maudgalayana, 目連) 그리고 마하카샤파(Mah kassapa, 大迦葉)라고 할 수 있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죽림정사시절에 붓다의 제자가 되었다. 특히 사리푸트라와 마우드갈랴야나는 당시 6사 외도의 한 사람인 산자야(Sa jaya)의 제자로서 두 사람은 어려서부터 친한 친구 사이였다. 이들은 매우 명석하고 학문과 식견이 뛰어나 스승의 학설(회의론)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사리푸타가 어느 날 붓다의 제자 아쉬바짓(Asvajit, 馬勝)으로부터 "이 세상에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 이루어 졌으므로 절대적인 것이 없다"는 붓다의 가르침 일부를 전해듣고 크게 기뻐하여 친구 마우드갈랴야나와 함께 스승 산자야의 제자 250명을 데리고 붓다에게로 가서 제자가 되었다. 분별력과 이해력이 누구보다도 뛰어나 불교의 진리를 간접으로 한마디만 듣고도 크게 깨달을 수 있었던 사리푸트라는 붓다의 제자 중에서도 지혜가 제일이며 그 친구 마우드갈라야나는 신통(神通)이 제일이었다. 그들이 붓다를 도와서 불교의 신흥 교단에 기여한 바는 매우 컸었다. 이어 붓다는 고향 카필라바스투를 방문하였다. 이때 부왕(父王)을 비롯한 많은 친척과 그곳 사람들을 교화하고, 그의 이복동생인 난다(Nanda)와 아들 라훌라(R hula)를 출가시켰다. 뿐만 아니라 아난다(Ananda, 阿難) 데바닷다(Devadatta) 아누룻다(Anurudha)등 사촌 동생들과 적지 않은 샤카족 사람들이 출가하여 붓다의 제자가 되었다. 한편 이 보다 뒷 날의 일이지만, 여성들의 출가도 허용되었다. 붓다를 양육했던 이모 마하파자파티와 부인 야소다라를 비롯한 많은 샤카족 여성들이 출가한 것이다. 이는 곧 비구니(Bhik uni) 승단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붓다의 재가 신도들 가운데 단연 손꼽힐만한 사람은 쉬라바스티( r vasti, 舍衛城)의 수닷타(Sudatta, 須達多) 장자였다. 그의 귀의는 붓다의 활동 범위를 넓히고 서북 쪽으로 확대시키는데 절대적인 기여를 했다. 대부호였던 그는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사람들에게 의복과 음식 등 많은 것을 제공했기 때문에 급고독장자(An thapindika, 給孤獨長者)라고도 불리웠다. 장자는 라자그리하에서 붓다를 만나 귀의한 뒤, 쉬라바스티로 돌아가 제타(Jeta)왕자 소유의 동산인 제타바나(Jetavana, 祇園)를 구입하여 그 곳에다 정사를 세워 승단에 기증했다. 이것이 기원정사(祇園精舍)로서, 죽림정사와 함께 초기 불교교단의 2대 근거지가 되었다. 이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 여러 계통의 종교인들과 국왕, 또는 평민이나 천민을 가릴 것 없이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붓다에게 귀의해서 제자로서 또는 재가 신도로서 그의 가르침을 따르고 실천했다. 그의 교화기간도, 녹야원의 첫 설법을 시작으로해서 쿠시나가라에서 열반에 들 때까지 45년이라는 긴 세월이었다. 붓다의 가르침은 빠른 속도로 간지스강 중류지방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전파되어 나갔다. 초기 경전에 나오는 지명으로 붓다의 교화활동 반경을 추정해보면, 북쪽으로는 카필라바스투, 남쪽으로는 보드가야, 동쪽으로는 앙가(A ga)국의 참파((Campa), 서쪽으로는 카우샴비(Kau mbi)에 이르는, 간지스강 중류의 동서 약550㎞ 남북 약 350㎞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4. 영원한 인류의 스승
붓다는 우주와 인생의 보편타당한 진리를 가장 바르고 참되게 깨달은 정각자(正覺者)이며, 모자람 없는 인격을 갖춘 위대한 인간의 교사이기도 하였다. 그는 자신이 깨달은 진리와 참 삶의 길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일깨우기 위해 여러 가지 교화방법을 사용하였다. 붓다의 가르침의 특성은 다양한 교화 방법에 있다고도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은 크게 위의교화(威儀敎化)와 설법교화(說法敎化)의 2가지로 구분할 수가 있다. 위의교화란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상대방에게 감화를 주고 마음을 일깨워주는 방법이다. 녹야원에서 5 명의 수행자들을 처음 만났을 때 붓다는 한 마디 말이 없이도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또 칼을 들고 달려드는 살인자 앙굴리말라(A gulim la)와 아자타사트루(Aj tasatru)왕이 붓다를 시기하여 풀어 놓은 술에 취한 코끼리를 굴복시킨이야기 등이 그 좋은 예이다. 이에 비해 설법교화는 언설(言說)에 의한 것으로 가장 보편적인 교화방법이었다. 그런데 붓다의 설법 방식은 매우 다양하고 독특한 점이 많다. 체계적 논리적으로 진리를 설하는가 하면, 노래의 형식인 게송(偈頌)으로서 그것을 다시 요약해 말하기도 하고, 때로는 비유나 인연담(因緣談)으로 사람들을 교화하기도 했다. 여러 형식의 문답을 통한 대화도 붓다가 즐겨 사용한 방법중의 하나이다. 이것은 주로 제자들을 상대로 하거나 또는 다른 종교인들과의 사이에서 행해졌다. 이밖에 위의교화와는 또 달리, 침묵 그 자체로써 상대방에게 하나의 대답을 주는 일도 있었다. 붓다의 이와 같은 여러 가지 교화 방법과 가르침에 의해, 불교의 교세는 빠르게 확대되어 갔다. 당시 인도의 종교 사상계에서 볼 때 붓다는 한 사람의 사문(沙門)에 불과했다. 그런 붓다의 가르침이 계층에 구별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화를 끼치면서 급속하게 번져 나간 것이다. 이에 위협을 느낀 기성 종교인들은 붓다와 그의 교단을 질시하고 음해를 가해왔다. 바라문들이 여인을 시켜 임신을 한 것처럼 꾸며 붓다의 아이를 가졌다고 사람들에게 외 치게하여 망신을 주고자 하는가 하면, 탕녀(蕩女)를 죽여 묻어 놓고는 붓다의 교단에서 한 짓이라고 모함하기도 하였다. 갖가지 방법의 비방과 모함이 소용없자 심지어는 음식에 독약을 넣어 붓다를 살해하려고까지 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오히려 붓다를 더 유명하게 만들었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가르침에 더욱 더 귀 기울이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붓다의 가르침은 인간의 근본적인 괴로움을 해결하게 하는 진리의 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인간의 현실생활을 보다 진실하고 이익되게 하는 것이었으며, 행복의 삶을 이루게 하는 가르침이기도 했다. 붓다는 외도(外道)의 잘못된 가르침에 빠져 살인을 저지르던 앙굴리말라를 구제한 일도 있었고, 인생을 고민하는 젊은이에게 삶의 진실을 일깨워주고, 허영과 교만에 찬 여성으로 하여금 참된 길을 걷게도 하였다. 나라를 다스리는 국왕에게는 정법(正法)에 의한 선정(善政)을 설하는가 하면, 이웃 나라 사이의 전쟁을 미리 막아 평화로운 국교를 유지케 한 일도 있었다. 이런 가르침과 교화로,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어디서나 환영받았다. 그러나 붓다도 그 말년에는 몇가지 불행한 일들을 겪어야 했다. 사촌동생인 데바닷타(Devadatta)가 교단의 분열을 꾀하였고, 몇 차례나 붓다의 살해를 기도하기까지 하였다. 또 코살라의 프라세나지트 왕의 아들 비두다바(Vidudabha)가 즉위하자, 그는 왕자 시절에 샤카족에게서 받았던 수모를 갚기 위해 카필라바스투를 침공하여 샤카족을 멸망시켜 버리고 말았다. 붓다의 아들 라훌라, 그리고 두 큰 제자 사리푸트라와 목갈라나가 먼제 세상을 떠난 것도 붓다에게는 커다란 아픔이 되었다. 붓다는 80세를 끝으로 45년간의 긴 교화 활동의 막을 내렸다. 그는 충실한 시자(侍者)였던 사촌동생 아난다와 함께 라자그리하의 영취산(靈鷲山)을 뒤로하고 마지막 전도여행 길을 떠났다. 도중 바이샬리에서 우안거(雨安居)를 보내면서 심한 병에 걸렸다. 병이 위독해지자 그는 3개월 후에 열반(Nirvana, 涅槃)에 들 것을 아난다에게 예고하였다.그 후 건강이 다소 회복되어 다시 여행을 계속하던 붓다는 파바(P v )라는 마을에서 대장장이 아들 춘다(Cunda)로부터 음식 공양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이 탈이 되어 심한 식중독을 앓게 되자, 붓다는 쿠시나가라(Ku inagara) 변두리의 사라나무 숲으로 들어가 2 그루의 큰 사라나무 사이에 자리를 펴고 누웠다. 이곳에서 붓다는 소식을 듣고 모여 든 제자들과 신도들에게 마지막으로 그의 가르침에 대해 질문할 것이 있으면 묻도록 하였다. 대중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만 흘렀다. 이에 붓다는 아난다를 비롯한 여러 제자들에게 마지막 유훈을 남겼다.
자기 자신에게 귀의하고 법에 귀의하며 남에게 귀의하지 말라. 자기 스스로를 광명으로 하여 법을 광명으로 삼아 남을 광명으로 삼지 말라.<대반열반경> 태어나고 시작된 모든 것을 반드시 멸하고 끝나는 법이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힘써 해탈을 구하라.<대반열반경>이렇게 최후의 가르침을 남긴 뒤에, 붓다는 북쪽으로 머리를 두고 서쪽을 향해 누워 고요히 열반에 들었다. 이를 흔히 입멸(入滅)라고도 표현한다. 이 것은 붓다가 80세되는 해 바이샤카(Vaisaka)달의 보름날(滿月日) 밤이었다. 붓다가 열반에 들자 제자들과 신도들은 붓다의 유해(遺骸)를 화장했다. 붓다의 몸에서는 많은 사리(Sarira, 舍利)가 나왔다. 장례에는 여덟나라의 왕들도 참석했는데, 이들이 서로 사리를 차지하려는 바람에 자칫 분쟁이 일어날 뻔햇다. 다행히 한 바라문의 중재로 사리는 8 몫으로 똑같이 나누어졌다. 사리를 담았던 그릇과 유해를 태운 재를 얻어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각자 자기 나라로 가지고 돌아가서 탑을 세워 모셨다. 이것이 불탑 (佛塔)의 효시로서, 붓다가 열반에 든 다음 불교도들은 이 탑을 그들의 신앙대상으로 삼았다. 한편 붓다가 열반에 든 다음 그의 제자들이 가장 먼저 해야 했던 일은 붓다가 남긴 가르침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붓다의 가르침이 잊혀져 버리기 전에 그것을 모아 확정해 두는 일이 무엇보다도 필요하였고, 또한 붓다가 없는 승단의 기강이 헤이해 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이를 서둘러야 했다. 이와 같이 붓다의 가르침을 정리하는 것을 결집(結集)이라고 말하는데, 당시 이런 작업은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함께 구송(口頌)해서 했기 때문에 합송(合頌, Samg ti)이라고도 부른다. 불전의 결집은 역사상 여러차례 되풀이 되었다. 그 가운데 제 1회 결집은 붓다가 열반에 든 후 맞이하게 된 첫 우기(雨期)의 안거(安居) 때 라자그리하 부근의 바이바라산 중턱의 칠엽굴(七葉窟)에서 행해졌다. 결집을 위해 덕이 높은 비구 제자 5백명이 선출되었으며 상수제자(上首弟子) 마하카샤파가 총 책임자가 되어 모임을 주관하였다. 이 첫 결집에서 법(法) 즉 경(經,Sutra)의 암송자로 아난다가, 그리고 율(律,Vinaya)의 암송을 위해서는 우팔리 (Upali)가 뽑혔다. 아난다는 붓다의 시자(侍者)로서 가장 오랫동안 붓다를 모시고 있었으므로 그의 가르침을 누구보다도 많이 들어 알고 있었다. 또 우팔리는 붓다가 계(戒)를 설할 때마다 붓다를 돕기 위해 그의 곁에 있었으므로 계율에 있어서는 교단 내에 제일인자로 꼽혔었다. 이 2 제자들이 붓다의 가르침을 들은 대로 기억해내어 외우면 거기에 참석했던 모든 비구들이 그 진위를 토론하고 하나씩 정리해 나갔다. 그런 다음 목소리를 함께하여 합송하면서 그들의 기억 속에 그것을 간직해 갔다. 붓다의 가르침, 즉 오늘에 남겨진 불교의 경과 율은 이렇게해서 편집되어진 것이다. 붓다는 2500여년 전에 세상을 살다 가신 분이다. 그러나 생애를 통해 보았듯이, 그의 구도(求道)와 성도(成道) 그리고 교화(敎化)와 입멸(入滅)의 과정은 참으로 위대한 일생이었다. 그는 당시 모든 사람들에게 잊을 수 없는 감명과 깨달음을 주었다. 또한 오늘에 와서도 붓다는 여전히 헤아릴 수 없는 정신적 깊이와 도덕적 위대성을 지닌 지혜와 자비의 인물로 이 시대의 사람들 앞에 다가온다. 붓다는 모든 인류의 영원한 스승인 것이다.
근본불교(根本佛敎)
제1절 붓다가 발견한 진리
1. 근본불교
근본 불교란 붓다가 가르침을 처음으로 펴기 시작한 이후부터 불멸후 100년경에 있었던 최초의 교단 분열 이전까지의 불교를 말한다. 다른 이름으로는 원시불교, 초기불교, 또는 고대불교라고도 부른다. 이 기간의 불교는 붓다가 직접 가르친 불교이고, 또한 붓다의 제자들이 그들의 스승으로 부터 받은 가르침을 자신들의 제자들에게 그대로 전한 불교이다. 아직 교단이 분열되기 전이었으므로 붓다의 가르침은 다른 주장 없이 대체로 그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붓다의 탄생연대를 기원전 566년으로 보면, 붓다가 35세에 도를 이루어 처음으로 가르치기 시작했으므로 불교가 시작된 것은 기원전 531(=566-35)년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붓다가 입멸(入滅)한 것은 기원전 486년이고, 교단의 첫 분열은 그로부터 약 100년 뒤인 386년경에 일어났다. 따라서 근본 불교란 대략 기원전 531년에서 386년까지의 불교라고 할 수 있다. 붓다 자신은 아무것도 글로 쓰지는 않았다. 그의 모든 가르침은 '말'로써 베풀어 졌다. 그 직계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붓다의 가르침을 한 곳에 모아서 경전의 형태로 정리한 것은 붓다가 입멸한 직후였지만 문자로써 한 것이 아니고 말로써 했다. 붓다가 열반한 바로 그해 안거(安居)때, 제자들이 한 곳에 모여 스승에게서 들었던 가르침들을 기억해 내어 서로 확인한 뒤 암송해서 머리 속에 정리했다. 이것이 제1차 결집(結集: samgiti)이다. 이 결집에서 편집된 경전(經典)은 붓다가 행한 45년간의 가르침이 모두 망라된 것은 아니었다. 붓다의 수많은 가르침 가운데서 결집에 참석했던 제자들이 기억해 낼 수 있었던 것만이었고, 또한 출가 수행자들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던 내용들이었다. 재가 신도들에게 베풀었던 붓다의 수많은 가르침은 대부분 제외되었다. 이렇게 결집된 붓다의 가르침은 먼저 직계 제자들의 기억 속에 간직되었다가 다시 다른 사람들의 기억 속으로 전달되면서 수 백년간 계승되어 내려왔다. 이 첫 결집이 역사적인 사실이었다 해도 그 때 만들어진 경전에 대해서 우리는 거의 아는 바가 없다. 분명한 것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경전들은 그 첫 결집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첫 결집이 있은지 약 100년후 다시 결집이 행해졌는데 이것이 제2차 결집이다. 그 이후에도 몇 번의 결집이 더 있었다. 초기의 경전은 모두 제자들의 기억에서 기억으로 전래되었기 때문에 세월과 더불어 잘못 전해지기도 하고, 그 자신들의 해석이 보태지기도 하면서 내용이 변하는 일도 있었다. 그래서 그것을 바로 잡아 경전의 원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결집이 필요했다. 붓다의 가르침이 문자로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1세기 후반부터 였다. 그러나 문자로 된 최초의 경전은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그 내용이 어떤 것이었는지 알 수 없다. 현재 우리에게 전승되고 있는 가장 오래된 경전은 여러 가지 사실로 미루어 보아 최초의 문자 결집때 만들어진 경전과 동일한 내용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이와 같은 사정이므로 현재의 자료로서 붓다가 가르친 내용을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근본불교를 말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인가. 그렇다고는 할 수없다. 최초에 만들어진 경전과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경전사이에는 그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가 있겠지만, 그러나 그 핵심은 동일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경전이 오랜 세월동안 변천하면서 성립되었다고는 해도 현재의 경전은 최초의 경전을 바탕으로 해서 이루어져 온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오래된 경전, 특히 아함경(阿含經,Agama) 에서 볼 수 있는 중심교리들은 붓다가 직접 가르쳤던 내용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초기 경전에 나오고 있는 여러 가지 교리들 가운데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붓다의 깨달음의 내용인 연기법, 그리고 연기법의 응용내지 실천 이론들인 12연기, 4성제, 오온-무아, 3법인, 윤회와 업등이라고 할 수 있다.
제2절 붓다가 발견한 진리 1. 연기법(緣起法) 경전에서는 붓다가 발견한 진리를 '법'(法) 이라 하고 있다. "붓다는 법을 깨달았다.", 또는 "바른 법(正法)을 성취했다"라고 말하고 있다. '법'이란 산스크리트어 Dharma[達磨]를 번역한 말이다. '다르마'는 "유지(維持)하다, 보전(保全)하다"라는 동사 'DHR'를 어근으로 한 명사로서 규범(規範),의무, 사회질서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주원리(宇宙原理), 보편적 진리(普遍的眞理)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붓다는 법(法)을 깨달았다. 정법(正法)을 성취했다."라는 말은 현대적인 표현으로 "붓다는 진리를 발견했다. 진리를 이해했다."라는 말과 같다. 붓다가 발견한 '법'(法)의 내용을 알 수 있는 자료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는 아슈바지트(Asvajit :阿濕毘)비구와 뒷날 붓다의 제일 제자[上首弟子]가 된 사리푸트라(Sariputra:舍利弗) 사이에 있었던 대화이다. 이들 두 사람의 만남은 고타마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이루어 붓다가 된지 얼마 되지 않은 때의 일이었다. 사리푸트라는 라자그리하(Rajagrha:王舍城) 근방에서 산자야(Sanjaya)라는 유명한 스승 밑에서 수행하고 있었다. 그는 어느 날 아침 탁발하러 나온 아슈바지트 비구(比丘)를 만나게 되었다.아슈바지트는 붓다가 도(道)를 이룬 뒤 처음으로 제자가 된 5명의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사리푸트라는 그 비구의 수행자다운 모습과 행동에 감동을 받고 가까이 가서, "그대는 누구이며, 스승의 이름은 무엇이며,어떤 진리[法]를 배웠소"라고 물었다.
아슈바지트는 "나는 나이가 어리고 집을 떠난지도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이치를 잘 설명할 수 없으니 이제 간략히 요점만을 말하겠소."라고 하면서, 붓다로부터 받았던 가르침에 대해 말해 주었다. 그때 아슈바지트가 사리푸트라에게 설명해준 내용은 짤막한 한 수의 시(詩)로 전해지고 있다. 모든 것은 원인에서 생긴다.(諸法從緣起) 부처님은 그 원인을 설하셨다(如來說是因) 모든 것은 원인에 따라 소멸한다(彼法因緣盡)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是大沙門說) 이 시에서 말하고 있는 붓다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정리하면,"모든 존재[諸法]는 여러 가지 원인에 의해서 생기게 되고, 그 원인들이 소멸되면 존재도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 시(詩)는 일반적으로 '연기법송'(緣起法頌)이라 부른다. 왜냐하면 그 내용이 연기법(緣起法)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리푸트라는 아슈바지트로 부터 이 가르침을 듣고 크게 깨닫게 되었다.그 때까지 그 어느 누구에게서도 들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내용이었다. 그는 곧 그의 친구 마우드갈랴야나(Maudgalyayana:目 連)와 함께 스승 산자야를 떠나 붓다의 제자가 되었다. 중아함(中阿含)의 상적유경(象跡喩經)에서는 붓다가 깨달아 가르친 진리가 '연기법'(緣起法)이라는 것을 좀 더 분명하게 전하고 있다. 그것을 사리푸트라가 "여러분, 부처님[世尊]께서는 또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일 연기(緣起)를 보면 법(法)을 보고, 법을 보면 연기를 본다.'" 라고 비구들에게 가르친 것에서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본다'라는 것은 '이해한다'라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연기법을 이해하는 사람은 법(法)을 이해하고, 법을 이해하 는 사람은 연기법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다른 곳에서는 붓다 자신이 비구들에게 "(그대들이) 만약 연기를 보면 법을 보는 것이고, 바르게 법을 보면 나[붓다]를 보는 것이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렇다면 연기법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연기(緣起)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 '프라티탸사뭇파다'(pratityasamutpada)를 번역한 것이다. 이 것은 'pratitya'와 'samutpada'라는 2 개의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 'pratitya'는 '...때문에[緣]','...에 의해서' 또는 '말미암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samutpada'는 '태어남', '형성(形成)', '생김[起]'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연기란 '...때문에 태어 나는 것', '...을 말미암아 생기는 것' 이라는 말임을 알 수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모든 존재는 그것을 성립시키는 여러 가지 "원인이나 조건 때문에 생기는 것"이고, "원인이나 조건을 말미암아서 형성되는 것"이라는 것이다.경전에서는 이 연기의 원리를 좀 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잡아함 335)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此有故 彼有), 이것이 생기기 때문에 저것이 생긴다(此起故 彼起).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此無故 彼無), 이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저것이 사라진다(此滅故 彼滅). 여기에서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와 "이것이 생기기 때문에 저것이 생긴다."라는 구절로써 존재의 발생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다"와 "이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저것이 사라진다"라는 구절로서 존재의 소멸을 설명하고 있다. 모든 존재는 그것을 형성시키는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만이, 그리고 상호관계에 의해서 만이 존재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한다는 것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결국 연기법이란 존재의 '관계성'(關係性)을 말하는 것이다. 연기법을 경전의 다른 곳에서는 '상의성'(相依性)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있다. 붓다는 '연(緣)'이라는 경전에서 연기를 설명하면서 "비구들이여, 연기란 무엇인가.....그것은 상의성이다. 나는 이것을 깨닫고 이것을 이해하다."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마하코티카(Mahakottika)비구는 이 상의성에 대해 사리푸트라에게 갈대 단의 비유를 가지고 설명하고 있다. "비유하면 3개의 갈대가 아무 것도 없는 땅[空地]위에 서려고 할 때 서로 의지해야 설 수 있는 것과 같다. 만일 그 가운데 1개를 제거해 버리면 2 개의 갈대는 서지 못하고, 만일 그 가운데서 2개의 갈대를 제거해 버리면 나머지 1개도 역시 서지 못한다. 그 3개의 갈대는 서로 의지[相依]해야 설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좀더 부연해서 설명하면 A, B, C라는 3 요소가 모여 어떤 존재를 이루고 있을 경우 이들 3 요소는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인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A가 원인이 될 때는 B와 C는 A의 조건이 되고, B가 원인이 될 때는 A와 C는 B의 조건이 된다. 역시 C가 원인이 될 때는 A와 B는 C의 조건이 된다. 경전에서 들고 있는 비유에서처럼 A,B,C라는 3개의 갈대 가운데서 어느 한 갈대가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다른 2개의 갈대가 있기 때문이다, 즉 "이 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 인 것이다. 3개의 갈대 가운데서 1개의 갈대라도 없어지면 다른 2개의 갈대도 서 있을 수 없게 된다. 즉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도 없다"는 것이 된다. 연기법이란 이처럼 모든 존재는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관계를 가지므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고, 그 관계가 깨어질 때 존재도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연기법을 존재의 '관계성의 법칙(關係性法則)', 또는 '상의성의 법칙(相依性法則)'이라고 말 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것은 바로 존재의 보편적인 법칙이고 그 이법(理法)이다.연기의 원리에 의하면 어떠한 존재도 우연히 생겨났거나 또는 혼자서 존재하는 것은 없다. 모든 존재는 그 존재를 성립시키는 여러 가지 원인이나 조건에 의해서 생겨나게 된다. 서로는 서로에게 원인이 되기도 하고 조건이 되기도 하면서 함께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다르게 말하면 존재를 성립시키는 원인이나 조건이 변하거나 없어질 때 존재 또한 변하거나 없어져 버린다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전적으로 상대적이고 상호의존적이다. 그것은 공간적으로도, 그리고 시간적으로도 서로 관계를 가짐으로서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는 홀로 존재하는 것도 있을 수 없고, 영원한 것도, 그리고 절대적인 것도 있을 수 없다. 여기에서 한 가지 생각해야 할 점은 연기법을 때로는 인과법칙(因果法則), 즉 '원인과 결과의 법칙'처럼 말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연기법은 '인과법칙'이라고 하기보다는 '상의성의 법칙'으로 보아야 더 정확 할 것이다. 만약 붓다가 발견한 진리가 인과법칙이었다고 한다면 붓다는 인과법칙을 발견한 최초의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고, 불교의 진리가 독창적인 것이 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과법칙은 붓다 이전에 이미 다른 종교와 사상에서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연기법을 설명할 때 가장 기초가 되고 있는,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 라는 말은, '이것'이 원인이 되어서 그 결과로서 '저것'이 있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것'과 '저것'은 동시에 서로를 존재하게 하는 필수적인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저것이 사라진다."라는 말도, '이것'이 사라지는 결과로서 '저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이것'과 '저것'은 동시에 사라지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인과(因果)의 법칙에서는 '이것'이 원인이 되어서, 그 결과로서 '저것'이 존재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과 '저것'은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 예를 들면 꽃과 열매는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 꽃이 원인이 되고 그 결과로서 열매가 있게 된다. 이것은 동시성(同時性)을 말하고 있는 연기법과는 다른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연기법에서 인과적(因果的)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어떤 사물이 존재하는 것은 역시 원인과 결과라는 관계에 의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 인과성(因果性)은 후기불교에서 많은 발전을 보게 되고, 그것을 설명하는 다양한 교리들이 나오게 된다. 그래서 연기법이 '상의성의 법칙'이라기 보다는 '원인결과의 법칙'처럼 이해되어져서, 이 2 가지 개념을 명확하게 구별하기가 어렵게 되고 말았다. 연기법은 붓다가 만든 것이 아니다. 역시 붓다 이외의 다른 어떤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이것은 존재의 이법(理法)으로서 존재와 더불어 있어 온 것이다. 그러므로 연기법은 붓다와 같은 어느 한 사람이 세상에 출현하거나 하지 않거나 하는 사실과는 관계없이 존재한다. 붓다는 단지 이 법칙을 처음으로 발견했을 뿐이다.경전에서는 붓다 자신이 이 사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한 제자가 이 문제에 대해 "세존이시여,이른바 연기법은 세존께서 만드신 것입니까, 다른 사람이 만든 것입니까."라고 질문을 했다. 붓다는 "연기법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붓다[如來]가 세상에 나오거나 세상에 나오지 않거나 진리의 세계[法界]에 항상 존재하고 있다. 붓다는 이 법을 자신이 깨닫고, 옳게 깨달음을 이룬 뒤에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가르치는 것이다."라고 답했다. 즉 붓다는 연기법의 발견자이지 발명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단지 그는 존재의 법칙인 이 연기법을 처음으로 발견해서 그것을 자신의 문제를 위해, 그리고 중생들의 문제를 위해 응용, 실천했을 뿐이다. 붓다는 이와 같은 사실을 오래된 길[古道]의 비유를 가지고 설명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이 광야(曠野)를 여행하다가 옛사람이 다니던 오래된 길을 만났다. 그는 그 길을 따라갔다가 사람이 살지 않는 한 옛성을 발견했다.그곳에는 왕궁과 동산과 목욕 못과 깨끗한 숲이 있었다. 그는 이 옛 성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 모두 그곳으로 가서 행복하게 살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 비유에서 여행자는 옛 길과 옛 성을 발견했을 뿐이지 그 길과 성을 자신이 개척하고 만든 것은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붓다도 옛 사람들이 밟았던 길을 따라 수행한 결과 법(法)을 깨달아 붓다가 되었고, 그것을 여러 사람들에게 가르쳐 많은 이익이 되게 하였다는 것이다. 붓다가 깨달은 연기법은 붓다보다 우위를 차지한다. 중요한 것은 법(法), 즉 진리이지 사람이 아니다. 붓다로부터 불교가 시작되었다는 의미에서 붓다의 존재는 중요하지만, 그러나 법보다는 하위를 차지한다.붓다 자신도 법에 의해서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한 인간에서 붓다로 되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 역시 불교가 목표로 하는 최고의 이상인 열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붓다라는 한 인격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가르친 법(法), 즉 진리를 이해 하고 그것을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심지어 고타마 싯다르타 자신 역시 붓다가 된 뒤에도 그가 발견한 법(法)에 의지하고 법에 따라 살았다는 것이다. 잡아함의 존중경(尊重經)에 의하면, 붓다는 정각(正覺)을 이룬 뒤 앞으로 어떤 사람을 스승으로 모시고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했다. 그러나 정각을 이룬 그가 이 세상에서 스승으로 모시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그는 그 자신이 발견한 진리[法]를 의지하고 그 진리를 따라 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붓다는 "오직 바른 법[正法]이 있어서 나로 하여금 스스로 깨달아 정각을 이룩하게 하였다. 나는 그것을 공경하고 존중하며, 받들 어 섬기고 공양하면서, 그것을 의지해 살리라." 라고 뜻을 정했다는 것이다. 붓다는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고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쳤다. 그들이 의지하고 따라야 할 것은 사물이나 재산이나 사람이 아니라 오직 법(法)이라는 것이었다. 붓다는 임종을 앞에 두고서도 역시 제자들에게 그의 사후에 그 자신을 스승으로 삼으라고 말하는 대신 "법을 너희들의 스승으로 삼으라."[法歸依]고 가르쳤다. 붓다는 그를 대신해서 승단을 이끌어갈 후계자를 정하지 않았고, 제자들 역시 스승이 돌아가신 후 그들 중의 어떤 한 사람을 승단의 책임자로 정해 붓다의 대신이 되게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붓다가 가르쳐준 법을 그들의 스승으로 삼았고 법을 의지해 살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법'이 중요하다고 해서 법에 집착해서는 안된다. 법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수단일 뿐이지 목적이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법'조차도 버려야 한다. 이것을 중아함(22경)에서는 뗏목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즉 뗏목에 의지해서 강을 건넌 사람은 그 뗏목을 강변에 버려야 한다. 뗏목이 많은 이익을 주었다고 해서 강을 건넌 후에도 그것에 집착한다면 어리석은 일이다. 이처럼 법에도 집착해서는 않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연기법이 붓다가 해결하고자 했던 문제와 무슨 관계가 있었으며, 실제로 붓다는 연기법으로서 무엇을 해결했는가. 그리고 연기법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연기법이 진리라고 해도 붓다 자신의 문제와 관계가 없었다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 인간의 문제와 관계가 없다면 그것은 무의미한 것일 뿐이다. 연기법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붓다 자신의 문제를 포함한 우리 인간 모두의 문제와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임에 틀림없다. 붓다가 그의 전 생애에 걸쳐 해결하고자 했던 것은 인생의 고(苦:duhkha)문제 였다. 그가 출가한 것도, 6년에 걸쳐 힘든 수행을 한 것도, 그리고 성도(成道)후 45년간 쉬지 않고 모든 노력을 기울려 사람들을 가르친 것도 苦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붓다의 가르침의 처음과 끝은 '苦와 고에서의 해탈'이었다. 경전에서는 이것을 기회 있을 때마다 말하고 있다. 잡아함의 삼법경(三法經)에서 붓다는 "(고의 문제가 없었다면) 모든 붓다 세존께서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설사 세상에 나왔다 하더라도) 세상 사람들은 모든 붓다, 여래께서, 깨달으신 법을 사람들을 위해 널리 말씀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였을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다른 곳에서 붓다는 그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나는 단지 고와 고에서의 해탈만을 가르친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붓다가 발견한 연기법과 고(苦) 문제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가.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라든지, 또는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다"라고 하는 이 단순한 원리가 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하는가. 연기법의 입장에서 보면 고(苦)의 고유성(固有性) 또는 실재성(實在性)은 인정될 수 없다. 고(苦)는 신이나 절대자와 같은 어떤 존재가 우리를 벌주기 위해서 만든 것도 아니고, 우연히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그것은 어떤 원인과 조건에 의하여 생긴 것이다.따라서 고를 발생시키는 원인과 조건을 제거해 버린다면 고도 사라지게 될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것을 장아함의 대본경(大本經)에서 붓다는 "고(苦)는 성인(聖人)들이 만든 것이 아니다.역시 인연이 없이 (홀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변하는 (성질을 가진 ) 이 고를 지혜를 가진 사람은 끊어 없앤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붓다는 그가 해결하고자 했던 고 문제에 연기법을 응용해서, 연기법의 원리에 따라 해결할 수 있었다. 즉 붓다는 먼저 苦를 발생시키는 원인을 추구한 뒤 그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고에서 벗어 날 수 있었다. 그것이 열반이었다. 열반이란 "고의 소멸" 또는 "고에서의 해탈"을 의미한다. 결국 연기법은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응용해 고(苦)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붓다는 그 자신의 문제를 해결한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가르쳤다. 그래서 고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가지 설명과 방법을 고안해 낼 필요가 있었다. 사람들은 지혜의 수준이나 그들의 성향, 또는 처해있는 상황이 모두 달랐으므로 그것에 맞추기 위해 여러 가지 교리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것이 불교에서 다양한 교리들이 생겨나게 된 이유이다. 무아(無我)이론이 그것이고 무상(無常)이론이 그것이다. 사성제(四聖諦), 12연기(緣起), 공(空)의 교리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불교의 모든 교리의 유일한 목표는 고의 해결, 즉 열반의 성취일 뿐이다. 한 경에서는 이것을 "모든 강물은 바다로 향한다. 붓다의 모든 가르침도 한 곳으로 향한다. 즉 고와 고의 소멸로 향한다"라고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연기법은 불교의 모든 교리들의 사상적,이론적 근거가 된다. 붓다의 모든 가르침은 그 설명이나 형태가 어떠하든 간에 모두 연기법을 그 근거로 삼고 있다. 불교의 모든 교리들은 연기의 원리를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 응용이론들이다. 그것들은 연기(緣起)라는 하나의 샘에서 흘러나온 크고 작은 물줄기와 같은 것이다. 모든 존재는 왜 무아인가, 세계는 왜 무상하며 왜 공(空)인가. 그것은 연기적(緣起的)이기 때문에 무아이고 무상이고 공인 것이다.
2. 12연기(緣起)
초기경전에는 '연기법'을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 여러 가지 연기의 형식이 나오고 있다. 그 가운데서 가장 완성된 모습을 갖춘 연기가 12연기이다. 이것을 때로는 12인연(因緣)이라 부르기도 한다.12연기란 무명(無明), 행(行), 식(識), 명색(名色), 육입(六入),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이다. 12연기로써 때로는 생멸 변화하는 세계와 인생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 교리의 근본 목적은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인 '고(苦)'가 어떻게 해서 생겨나고, 또 어떻게 해서 사라지는가를 밝히는 것이다. 12연기를 관찰하는 방법에는 순관(順觀)과 역관(逆觀)이 있다. 순관이란 "무명을 조건으로 해서 행이 있고, 행(行)을 조건으로 해서 식(識)이 있고, 식을 조건으로 해서 명색(名色)이 있다." 그리고 계속해서 "육입,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가 있다."라고 관찰하는 것이다. 마지막 항목인 '노사(老死)'는 다른 말로 '고(苦)'라고 할 수 있다. 즉 순관은 고의 발생과정을 설명하는 방법이다. 이렇게 보는 연기를 역시 유전연기(流轉緣起)라고도 부른다. 그것은 존재가 무명과 욕망 등으로 말미암아 윤회의 세계에서 생사를 되풀이[流轉] 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연기(緣起)이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역관이란 고가 소멸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방법이다. "무명이 소멸하기 때문에 식이 소멸하고, 식이 소멸하기 때문에 명색이 소멸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노사의 소멸까지를 설명한다.이렇게 보는 연기를 역시 환멸연기(還滅緣起)라고도 한다. 그것은 존재가 무명과 욕망을 없앰으로서 생사유전(生死流轉)의 세계에서 벗어나 열반으로 돌아가는[還滅] 과정을 설명하는 연기이기 때문이다. 초기경전에서는 많은 곳에서 12연기를 말하고 있지만 그 설명은 한결 같지 않다. 자세하지도 않고 일관되어 있지도 않다. 특히 각 항목[支] 사이의 관계에 대해 만족할 만한 설명을 하는 곳은 없다. 따라서 여러 경전의 설명을 참고해서 12연기를 이해하지 않을 수 없다.
1). 무명(無明: avidya) 무명이란 글자 그대로 '명(明:智慧)이 없다'는 말이다. 올바른 법[正法], 즉 진리에 대한 무지를 가리킨다. 구체적으로는 연기의 이치에 대한 무지이고, 사성제(四聖諦)에 대한 무지이다. 고(苦)는 진리에 대한 무지 때문에 생기므로, 무명은 모든 고를 일으키는 근본원인이다.
2).행(行: samskara) 무명을 조건으로 해서 행이 있다. 행이란 행위, 즉 업(業:karman)을 가리킨다. 행에는 몸으로 짓는 신행(身行=身業)과 언어로 짓는 구행(口行=口業)과 마음으로 짓는 의행(意行=意業)등 3행이 있다. 행(行=業)은 진리에 대한 무지, 즉 무명 때문에 짓게 되고, 그것을 지은 존재의 내부에 반드시 잠재적인 힘[潛在力]의 형태로 남게된다. 3).식(識: vijnana) 행(行)을 조건으로 해서 식이 있다. 식은 인식작용으로서,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등 6식이 있다. 식이란 표면적인 의식뿐 아니라 잠재의식도 포함한다. 꽃을 볼 경우 꽃이라는 인식이 일어나게 되는 것은 전에 꽃을 본 경험이 잠재의식 상태로 남아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꽃을 보았다'는 '과거의 경험'은 과거의 행(위)이다. 따라서 과거의 행(行)이 없다면 현재의 인식작용이 일어 날 수 없다. 그래서 "행을 조건으로 해서 식이 있다."고하는 것이다.
4).명색(名色: namarupa) 식(識)을 조건으로 해서 명색이 있다. 명(名:nama)이란 정신적인 것을, 그리고 색(色:rupa)이란 물질적인 것을 가리킨다.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은 모두 인식의 대상이다. 식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인식의 대상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명색[對象=境]을 조건으로 해서 식이 있다"라고 하지 않고, "식을 조건으로 해서 명색이 있다"라고 되어 있다. 이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 항인 6입(六入)과 함께 설명하지 않으면 안된다.
5). 6입(六入, 또는 六處: sadayatana) 명색을 조건으로 해서 6입(入)이 있다. 6입이란 눈(眼),귀(耳),코(鼻),혀(舌),몸(身),마음(意)등의 6 가지의 감각기관, 즉 6근(根)이다. 이것은 인식 기관이다. "명색을 조건으로 해서 6입이 있다."라는 것을 좀 더 풀이해서 말하면 "인식의 대상[境]인 명색을 조건으로 해서 인식의 기관[根]인 육입이 있다."라는 말이 된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여기에서 식, 명색, 6입 등 3항목[三支]은, 시간적으로 선후의 관계로 보지 말고 동시적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식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인 명색과 그것을 인식 할 수 있는 기관인 6입이 동시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위에서 본 것처럼, 식이 행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식을 행 다음에 놓은 것이다. 6).촉(觸: sparsa) 6입을 조건으로 해서 촉이 있다. 촉이란 지각(知覺)을 일으키는 일종의 '심적(心的)인 힘'이다. 촉에도 눈, 귀, 코, 혀,몸,마음등 6개의 감각기관에 의한 6촉(六觸)이 있다. 촉은 6입에 의해서 생긴다고 되어 있지만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6입만에 의해서가 아니고 식(識), 명색[境], 6입[根]등 3요소가 함께 함으로서 발생하게 된다. 그래서 수성유경(手聲喩經)에서는 "(根.境.識등) 3요소가 모여서 촉을 만든다"[三事和合成觸]라고 하는 것이다. 7).수(受: vedana) 촉을 조건으로 해서 수(受)가 있다. 수란 즐거운 감정[樂受],괴로운 감정[苦受], 즐거움도 괴로움도 아닌 감정[不苦不樂受]과 그 감수(感受)작용을 말한다. 감각기관[根]과, 그 대상[境], 그리고 인식작용[識]등 3 요소가 만날 때 거기에서 지각(知覺)을 일으키는 '심적인 힘'[觸]이 생기게 되고, 그 다음 수가 발생하게 된다. 그러므로 "수는 촉을 조건으로 해서 있다."고 하는 것이다.
8).애(愛: trisna) 수를 조건으로 해서 애가 있다. 애란 갈애(渴愛)로서 욕망을 말한다. 좋아하는 것을 만나거나 싫어하는 것을 만나게 되면 그것에 애착심이나 증오심을 일으키게 된다. 증오심 역시 애(愛)의 일종이다. 고.낙등의 감수작용(感受作用)이 심하면 심할 수록 거기에서 일어나는 애착심과 증오심도 커진다. 그래서 "수를 조건으로 해서 애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9).취(取: upadana) 애를 조건으로 해서 취가 있다. 취는 취착(取着)의 의미로서 올바르지 못한 집착이다. 맹목적인 애증(愛憎)에서 발생하는 강렬한 애착을 가리킨다. 어떤 대상에 대해 욕망이 생기면 뒤따라 그것에 집착심을 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애를 조건으로 해서 취가 있다"라고 하는 것이다.
10).유(有 : bhava) 취를 조건으로 해서 유가 있다. 유(有)란 존재를 말한다. 초기 경전에서는 취를 조건으로 해서 어떻게 존재가 있게 되는 가를 설명해 놓은 곳을 찾기는 어렵다. 업설(業說)에 의하면, 집착[取]때문에 업(業)이 만들어지고, 업은 생(生)을 있게 하는 조건이 된다. 따라서 '유'를 '업'이라고 본다면, "취를 조건으로해서 유가 있다"라는 말은 "집착을 조건으로 해서 업이 있다."라는 것이 된다. 두 번째 항목인 '행'을 무명으로 인해 생기는 소극적인 업이라고 한다면, 유는 '애'와 '취'를 조건으로 해서 생기는 적극적인 업이라고할 수 있다. 11).생(生: jati) 유를 조건으로 해서 생이 있다. 유(有), 즉 업(業)은 생을 있게 하는 원인이기 때문에 "유에 의해서 생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12).노사(老死: jara-marana)와 우비고수뇌(憂悲苦愁惱) 생을 조건으로 해서 늙음과 죽음등 여러가지 고가 있다. 생이 있게 되면 필연적으로 늙음과 죽음이 있게 된다. 그리고 다른 여러 가지 고, 즉 근심(憂),비애(悲), 고통(苦), 번뇌(愁), 번민(惱)등이 발생하는 것이다.
제3절 4성제(四聖諦)
4성제(聖諦)에서 '제'(諦:satya)란 '진리' 또는 '진실'을 의미한다. 따라서 4성제란 "4가지의 성스러운 진리"라는 말이다.이것은 고성제(苦聖諦),집성제(集聖諦),멸성제(滅聖諦),도성제(道聖諦)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간단하게 '고, 집, 멸, 도'라고도 한다. 4성제를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고'와 '고의 원인', 그리고 '고의 소멸'과 '고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 4성제는 불교의 모든 교리 가운데서 가장 중요하다. 붓다가 녹야원(鹿野苑)에서 5명의 제자들[五比丘]에게 처음으로 법을 설했을 때로부터 시작해서, 쿠시나가라(Kusinagara)에서 반열반(般涅槃)에 들 때까지 45년 동안 가장 많이 설한 가르침이 바로 이 4성제이다. 중아함의 상적유경(象跡喩經)에서는 4성제의 중요성을 코끼리 발자국에 비유해서 설명하고 있다. 코끼리의 발자국이 넓고 커서 모든 짐승의 발자국 가운데서 제일인 것처럼, 4성제도, '한량없는 좋은 법[善法]'이 모두 그 가운데로 들어오기 때문에, '일체법(一切法) 가운데서 제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4성제의 가르침은 불교의 궁극 목표인 '고(苦)에서의 해탈'을 위해 만들어진 가장 구체적이면서도 간단한 교리이다. 붓다는 인생의 '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의사가 병을 치료할 때와 같은 방법을 사용했다. 의사가 먼저 병을 진단하듯이 붓다는 인생의 실상인 '고'를 말하고[고성제], 병의 원인을 찾아내듯이 고의 원인을 규명했다[집성제]. 그리고 병 치료후의 건강상태를 말하듯이 고가 소멸된 상태, 즉 열반을 설명했고[멸성제], 마지막으로 병의 치료방법을 말하는 것처럼 열반에 이르는 길을 제시했다[도성제].
1. 고성제(苦聖諦)
불교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살아간다는 것은 고(苦)이고, 이 고에서 어떻게 벗어나는가를 설명해 놓은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이것을 붓다는 한 경에서 "나는 단지 고와 고의 소멸[열반]만을 가르칠 뿐이다"라고 표현하고 있다.불교의 모든 것이 '고와 고의 소멸'을 위한 것이라면, 무엇보다도 먼저 인생이 고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 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고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을 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병자가 병을 치료받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그 자신이 병에 걸렸다는 것을 인식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면 불교에서 말하는 고(苦)란 무엇인가. 고라는 말인 'duhkha'를 일반적으로 '괴로움','고통', '슬픔'등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것보다 훨씬 더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신체적, 생리적인 고통, 또는 일상적인 불안이나 고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두흐카'를 현대적인 말로 표현하면 '자신이 하고자 하는대로 되지 않는 것',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모든 것은 고다'[一切皆苦]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고를 구체적으로 설명할 때는 4고 또는 8고를 말한다. 태어남, 늙음, 병듦, 죽음[生老病死]등의 4고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愛別離苦],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는 고[怨憎會苦],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求不得苦], 5온(五蘊)의 집착에서 생기는 고[五取蘊苦; 五陰盛苦]등의 4고를 합쳐서 8고이다. 또한 고를 성질에 따라 고고(苦苦), 괴고(壞苦), 행고(行苦)등 3종으로 나누기도 한다.
고고란, 추위, 배고픔, 부상을 당했을 때 느끼는 것과 같은 고를 말한다. 이것은 원래부터 괴로움의 조건에서 생기는 고다. 괴고는 애착을 가지고 있는 대상이 파괴되거나 사라져 버릴 때 느끼는 고를 말한다.부귀와 권력을 누리던 사람이 그것을 잃어버리거나, 또는 애지중지하던 물건이 없어져 버릴 때 느끼는 고통이 여기에 해당된다.
행고란 무상함을 조건으로 해서 느끼게되는 고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끊임없이 변하는 현실[老,病,死]앞에서 느끼게 되는 괴로움이다.
2. 집성제(集聖諦)
집(集)이란 'samudaya'라는 말을 번역한 것으로서 '불러모으다'[招集]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집성제(集聖諦)에서는 '고를 일으키는 원인'을 밝힌다. 고의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가운데서 가장 근본적인 것은 욕망(欲望:trsna)이다.
5관(五官)의 관능적인 욕망은 물론이고, 재산과 권력에 대한 애착이나 사상, 신앙에 대한 집착 등도 욕망이다. 인생의 모든 불행, 싸움, 괴로움은 욕망에서 비롯된다. 욕망은 고의 뿌리이다. 경(經)에서는 이것을 "고의 원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가 있다. 그것은 욕망이다." "무릇 모든 괴로움이 생기는 것은 모두 다 욕망으로 말미암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욕망은 인생을 이끌어 가는 동력(動力)일 뿐 아니라 또한 인생을 지배하는 힘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욕망의 구체화라고 할 수있다. 인간은 욕망이 있기 때문에 살아 갈 수 있다. 그러나 욕망은 주인이 노예를 부리듯이 인간을 마음대로 부린다. 인간은 한없이 욕망하고, 욕망때문에 끝없이 고통을 당한다. 인간은 욕망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지만, 그러나 그것을 채워준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욕망은 채워주면 채워 줄수록 더 커질 뿐 결코 충족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다에 빠진 사람이 바닷물을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이 더 심해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사람들은) 비록 히말라야산 만한 순금덩어리를 얻는다 해도 만족할 줄을 모를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욕망을 구체적으로 욕애(欲愛), 유애(有愛), 무유애(無有愛)등 3종으로 나눈다. 욕애란 5욕(五欲), 즉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욕망을 가리킨다. 유애란 존재에 대한 욕망이다. 오래도록 살고 싶다든지 죽은 후에 천상에 태어나서 영원히 살고 싶어하는 등의 욕망이다. 무유애는 무존재(無存在)로 되고자 하는 욕망, 즉 사후에 허무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욕망을 가리킨다.
3.멸성제(滅聖諦)
멸(滅)이란 열반(涅槃)을 번역한 말이다. 그리고 열반은 'nirvana'를 음역한 것이다. 열반은 "소멸"(消滅)의 의미를 가진 말로서 "고가 소멸된 상태"를 가리킨다. 고가 완전히 없어진 상태, 다른 말로 표현하면 '고에서의 완전한 해방'이다. 현대적인 의미로는 '최고의 행복'이라고 할 수 있다[涅槃第一樂]. 열반은 불교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이고 이상(理想)이다.불교에서 가르치는 모든 교리와 실천은 오로지 열반을 얻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을 잡아함에서는 "바다는 한 가지 맛, 그것은 짠맛이다. 마찬가지로 붓다의 가르침[法과 律]도 한가지 맛, 그것은 고와 열반[苦滅]의 맛이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열반은 현재의 생(生)에서 성취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열반이 아니다. 열반에 도달한 사람은 괴로움의 원인인 욕망을 다스릴 수 있으므로 욕망 때문에 발생되는 괴로움, 즉 정신적인 괴로움에서는 벗어나지만 아직 육체가 남아 있기 때문에 병이나 부상을 입었을 때 받게 되는 육체적인 괴로움은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에 성취하는 열반을 '생존의 근원(生存根源)이 남아있는 열반' 즉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이라 한다. 여기에서 '생존의 근원'[餘依]이란 육체를 말하는 것이다. 유여의열반을 이룬 사람이 죽으면 다시 육체를 받아 태어나지 않게 된다. 이것을 '생존의 근원이 남아 있지 않는 열반' 즉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이라고 한다. 이 무여의열반은 '완전한 열반'(般涅槃: parinirvana)으로서 정신적, 육체적인 일체의 고가 모두 소멸된 열반이다. 우리는 열반을 언어로 설명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머리로서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체험의 세계일 뿐이다. 아직 열반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에게 열반을 설명해 주어도 그는 그것을 이해 할 수 없다. 마치 땅위에 올라가서 산책하고 돌아온 거북이가 물고기에게 땅위에서는 헤엄칠 수 없다고 아무리 설명을 해주어도 물고기는 그것을 전혀 이해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4. 도성제(道聖諦)
도(道)란 열반에 이르는 길이다. 이것은 중도(中道)라고도 부르는 것으로 양극단(兩極端)을 떠난 중간의 길이다. 즉 지나치게 쾌락적인 생활도, 반대로 극단적인 고행생활도 아닌, 몸과 마음의 조화를 유지 할 수 있는 "적당한 상태의 길"을 말한다. 소나경(Sona經)은 중도를 거문고 줄의 비유로써 설명하고 있다. 거문고 줄은 지나치게 팽팽해도, 그와 반대로 지나치게 느슨해도 좋은 소리를 낼 수 없다. 거문고가 가장 좋은 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그 줄이 적당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이처럼 열반을 얻기 위한 수행의 길도 극단적인 고행이나 지나친 쾌락적인 행을 피하고 중도를 실천해야 한다. 이 중도를 구체적으로 말한 것이 8정도(八正道)이다.
8정도(八正道)
1) 정견(正見) - 바른 견해이다. 4성제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다. 즉 고의 발생과 고의 소멸, 그리고
고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바르게 아는 것이다.
2) 정사(正思) - 바른 생각, 즉 바른 마음가짐이다. 구체적으로는 탐욕스러운 생각, 성내는 생각,
해치려는 생각을 가지지 않고, 온화한 마음, 자비스러운 마음, 청정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3) 정어(正語) - 바른 말이다. 거짓말[妄語], 이간시키는 말[兩舌],욕하는 말[惡口], 꾸며대는 말
[綺語]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말, 성실한 말, 필요한 말을 하는 것이다. 4) 정업(正業) - 바른 행위이다. 살생(殺生), 도둑질 [偸盜], 음란한 짓[邪淫]을 하지 않고, 다른
존재들의 목숨을 구해주고, 보시(布施)하고, 청정한 생활을 하는 것이다. 5) 정명(正命) - 바른 생활이다. 정당한 방법으로 의식주를 구하는 것이다. 특히 출가수행자의 경우
에는 재가신도의 바른 신앙에서 우러나는 보시를 받아 생활하는 것이다.
6) 정정진(正精進) - 바른 노력이다. 이미 생긴 선(善)은 더욱 자라도록 노력하고, 아직 생기지 않은
선은 생기도록 노력하고, 이미 생긴 악(惡)은 끊도록 노력하고, 아직 생기지 않은 악은 생기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7) 정념(正念) - 바른 기억이다. 자기자신이나 그 주변의 것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기억해서, 반성
하고 바른 의식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8) 정정(正定) - 바른 정신집중 또는 정신 통일이다. 마음을 한 점에 집중하는 것[心一境性]을 말한다.
정(定, samadhi)을 닦는 구체적인 방법이 선(禪, dhyana)이기 때문에 때로는 2가지를 합해서 선정
(禪定)이라고도 한다.
8정도는 그 순서대로 실천해야 한다. 왜냐하면 정견을 닦아야 정사가 생기게 되고 정사를 닦아야 정어를 할 수 있게 된다. 나머지 항목[支]들도 마찬가지다. 8정도의 마지막 목표는 정정(正定)이다.
8항목 가운데서 앞의 7항목은 모두 정정에 이르기 위한 준비 단계이다. 정정을 닦아 지혜(prajna)를 얻게 되고, 지혜를 가짐으로써 열반을 성취 할 수 있는 것이다.
제4절 오온-무아(五蘊.無我) 5온(五蘊)의 온(蘊:skandha)은 '모임'[集合]이라는 뜻이다. 때로는 '음(陰)'이라고도 번역했다.
5온은 좁은 의미로는 인간존재를 가리킨다. 인간은 물질적인 요소인 색(色=육체)과 정신적인 요소인 수
(受),상(想),행(行),식(識)등 5개의 요소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5온이 넓은 의미로 쓰일 때는 일체존재를 가리킨다. 이 경우에는 색은 물질전체를, 그리고 수.상.행.식은 정신 일반을 말한다. 인간 존재만을 특별히 구별해서 말할 때는 5온이라는 말 대신에 5취온(五取蘊)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것은 5온으로 이루어져 있는 존재를 고정적인 자아[自我: atman]라고 생각하고, 그것에 집착[取: upadana]한다는 의미에서이다.
1. 색온(色蘊: rupa)
색이란 육체를 가리킨다. 육체는 물질적인 4가지 기본 요소인 4대(四大: mahabhuta)와 이 4대에서 파생된 물질인 4대소조색(四大所造色)으로 이루어져 있다. 4대란 지,수,화,풍으로서, 지(地)는 뼈, 손톱, 머리카락등 육체의 딱딱한 부분이고, 수(水)는 침,혈액, 오줌등 액체부분이다. 화(火)는 체온이고 풍(風)은 몸속의 기체, 즉 위장 속의 가스 같은 것을 가리킨다. 4대소조색이란 4대로 이루어진 5종의 감각 기관[五根]인 눈(眼),귀(耳).코(鼻), 혀(舌), 몸(身)등이다.
2. 수온(受蘊: vedana)
수란 감수(感受=감정)와 그 작용이다. 수(受)는 내적인 감각기관들과 그 것에 상응하는 외적인 대상들과의 만남에서 생긴다. 수에는 성질 상 3종이 있다. 즉 고수(苦受)와 낙수(樂受), 그리고 불고불낙수(不苦不樂受)이다. 낙수란 즐거운 감정이고, 고수란 괴로운 감정이다. 그리고 불고불낙수란 사수(捨受)라고도 하는 것으로서, 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닌 감정을 가리킨다. 3. 상온(想蘊 : samjna)
상은 개념(槪念) 또는 표상(表象)과 그 작용을 말한다. 상 역시 감각기관들과 그 것에 해당되는 대상들과의 만남에서 생긴다. 상은 대상들을 식별하고, 그 대상들에 이름을 부여한다. 붉은 꽃을 볼 경우 먼저 지각(知覺)에 의해 인식 작용이 생기게 되고, 그 다음 '붉은 꽃'이라는 개념을 만드는 작용이 일나게 된다. 이때 '붉은', 또는 '꽃'이라는 개념 또는 그 작용이 상(想)이다.
4. 행온(行蘊 :samskara)
행, 즉 samskara란 '형성하는 힘'[形成力]이라는 뜻을 가진 말이지만, 여기서는 특히 의지작용(意志作用: cetana)을 가리킨다. 인간이 동물과 달리 윤리 생활을 할 수 있고 업(業: karma)을 짓게 되는 것은 이 행의 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넓은 의미로서의 행은 수,상,식을 제외한 모든 정신작용과 그 현상이다. 예를 들면 기억,상상, 추리등이 여기에 속한다. 5.식온(識 : vijnana)
식은 일반적으로 분별(分別), 인식(認識) 및 그 작용을 말한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식(識)의 영역은 대상을 인식하는데 까지 가지 않는다. 그 전 단계인 주의작용(注意作用)일 뿐이다. 예를 들면 붉은 꽃을 볼 때 안식(眼識)이 일어나게 되는데 안식은 눈앞에 '무엇이' 나타난 것만을 알뿐이다. '붉다' '꽃이다'라고 아는 것은 식이 아니고 상(想)의 작용이다. 식 역시 감각기관들과 그 것에 해당되는 대상들과의 만남에서 생긴다
5온이론은, 인간 존재란 색, 수, 상, 행, 식등 5 가지 요소가 어떤 원인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잡아함경에서는 이것을 "마치 여러 가지 목재(材木)를 한데 모아 세상에서 수레라 일컫는 것처럼 모든 온(蘊=要素)이 모인 것을 거짓으로 존재[衆生]라 부른다."라고 비유로써 설명하고 있다. 수레는 바퀴, 차체(車體), 축(軸)등 여러 요소가 모였을 때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것일 뿐, 이 요소들과 관계없이 홀로 존재할 수는 없다.인간 존재도 마찬가지다. 색,수,상,행,식등 5 요소가 모일 때 비로소 인간이라는 존재도 성립할 수 있게 된다. 5온이론에 의하면 다른 종교에서 말하고 있는 영혼같은 것을 인정할 수 없다. 수,상,행,식과 같은 정신현상은 영혼과 같은 존재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감각기관과 그 기관에 관계되는 대상과의 만남에서 생긴 된다. 눈[眼], 귀[耳], 코[鼻], 혀(舌), 마음[意:생각을 맡은 기관]등과 여기에 상응하는 물질[色], 소리[聲], 냄새[香], 맛[味], 감촉할 수 있는 것[觸], 생각[法]이 서로 만날 때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설식(舌識),신 식(身識),의식(意識)등의 여러 가지 정신현상이 발생한다. 즉 6 가지 감각기관[六根]과 그것에 관계하는 6가지 대상[六境]이 합칠 때 6가지 식[六識]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수성유경(手聲喩經)에서는 "비유하면 두 손이 서로 마주쳐서 소리를 내는 것처럼, 눈[眼]과 물질[色: 對象]을 인연하여 안식이 생긴다."(다른 5식도 동일하다)라고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감각기관과 그 대상이 만나서 식이 발생하면, 식 이외의 다른 정신 현상들, 즉 수, 상 ,행등도 함께 일어나게 된다. 그것을 아함경의 여러 곳에서는 "눈과 물질을 인연하여 안식이 생긴다. 이 3가지[眼.色.識]가 합친 것이 촉(觸=여기서는 접촉)이다. 촉과 함께 수,상,행[思]이 생긴다.(이,비,설,신,의도 동일하다.)"라고 말하고 있다.(잡아함 273; 305)5온이론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 존재란 5개의 요소로 이루어져 있고, 이 각 요소들은 모두 비실체(非實體)적인 것이므로, 이와 같은 요소들로 이루어 진 인간 존재 역시 비실체적이라는 것이다. 거기에는 고정불변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것을 여러 경전에서는 비유를 들어 색(色)은 거품덩어리 같고, 수(受)는 거품 방울 같고, 상(想)은 신기루 같고, 행(行)은 바바나줄기 같고, 식(識)은 허깨비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거품덩어리, 거품방울, 신기루, 바바나 줄기, 허깨비들은 어느것 하나 실체적인 것이 아니다. 이들 실체적이 아닌 요소들로 이루어 진 존재가 실체적인 것일 수 없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무아(無我:anatman)라고 표현한다. 이 '무아(無我)'라는 말에서 '아(我)'란 '고정불변하는 실체적(實體的)인 아'(我;atman)를 의미한다. 인간 존재에는 그와 같은 '아(我)'는 없다는 것이고, 역시 인간은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하다[非我]. 결국 인간은 "무아적 존재" 인 것이다.
이 5온이론, 즉 무아이론는 초기불교에서 후기불교까지 전 불교사상사를 통해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역시 불교를 다른 종교 및 사상과 구별짓게 하는 가장 독특한 교리이기도 하다. 경전에서 붓다는 이 무아이론을 수없이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두 말할 것도 없이 고(苦)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였다. 붓다에 의하면 고는 욕망 때문에 생기고 욕망은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때문에 발생한다.
따라서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고의 근본 원인이다.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제거되지 않는 한 고는 계속해서 발생하게 된다. "마치 뿌리가 다치지 않으면 나무는 설사 (윗 부분이) 잘리더라도 원기 왕성하게 다시 싹이 돋아 나오는 것처럼" 고(苦)도 계속 발생하게 된다고 법구경(法句經)에서는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우리 존재 속에 소위 말하는 영혼과 같은 고정불변하고 실체적인 '내'(atman)가 있다고 믿는데서 생긴다. 따라서 그와 같은 존재가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이해할 때 그 믿음은 사라지게 된다. 그래서 이 5온-무아(五蘊-無我) 교리는 인간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을 하나하나 분석하면서 우리 존재가 '무아적'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나[我]도 없고 나의 것[我所]도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이해할 때 우리들은 무엇에 집착할 것이며, 누구에게 분노를 품을 것이며, 무엇에 두려움을 느끼겠는가. 이것은 붓다와 팃사(Tissa)비구 사이에 있었던 문답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붓다는 팃사비구에게 "만일 색(色:육체)에 대해서 탐냄을 떠나고 욕망을 떠나고 생각을 떠났는데도 그 색이 변하거나 달라지면 그때 너는 근심, 슬픔, 번민, 괴로움이 생기겠느냐." 라고 묻는다. 팃사는 "아닙니다"라 고 대답한다. 수, 상, 행, 식등 다른 4온에 대해서도 같은 문답을 한다.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깨트려지면 우리는 우리 존재가 변해도, 외부세계가 변해도 영향을 받지 않게 된다.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숲속의 나무들을 베어서 가져가도 우리들이 근심하거나 슬퍼하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나무들은 '아(我)도 아니고 아소(我所:나의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아함경에서는 무아이론을 불에 비유하고 있다. 불이 모든 초목을 태워서 사라지게 할 수 있는 것처럼 무아이론은 욕망과 고(苦)를 사라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붓다는 제자들에게 무아이론을 실천하라고 되풀이해서 말하고 있다. 경전에서는 때로 그것을 과격한 표현을 사용해서 나타내기도 한다. 붓다의 가장 큰 제자였던 샤리푸트라(Sariputra)는 야마카(Yamaka)비구에게 오온[인간존재]에 대해서 "그것은 병(病)과 같고 종기(腫氣)와 같으며 가 시와 같고 죽음과 같으며 무상하고 괴로우며 공(空)이요 내[我]가 아니며 내것[我所]이 아니라고 관찰한다. 그래서 거기에 집착하지도 않고 그것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라고 가르친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보다 효과적으로 사라지게 할 수 있고 그 결과 욕망을 없엘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고(苦)를 제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무아이론에서 유의해야 할 점은 '아(我)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해서 상식적인 차원에서 말하는 '나' 또는 '자기'와 같은 존재까지도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태어나서 성장하고 한 생을 살다가 죽는 '나'는 인정한다. 단지 이와 같은 존재를 영원한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일상적으로 말하는 '나'란 비실체적인 몇 가지 요소들이 모여서 일시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임시적인 존재'일 뿐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가짜 나'(假我)라고 부른다. 이 '가짜 나'의 존재는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제5절 3법인(三法印) 법인(法印: dharma mudra)이란 '법의 표지'(標識)라는 말이다. 3법인은 불교의 특징을 가장 단적으로 잘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불교의 깃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것은 불교를 다른 종교나 사상과 구별하기위해 하나의 기준이 된다. 3법인과 일치하는 사상이면 불교이고 그 반대이면 불교가 아니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3법인은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一切皆苦)의 형식이 사용되기도 하지만, 무상과 무아의 개념 속에 논리적으로 고(苦)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일체개고 대신에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넣어서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의 형식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1.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
제행(諸行: sarva samskara)에서, 제(諸, sarva)는 '일체' 또는 '모든'의 뜻이다. 그리고 행(行) 즉 samskara는 '함께'라는 의미의 접두사 sam과 '하다, 만들다'라는 의미의 동사 KR가 결합되어 이루어진 것으로서, '만들어 진 것'[爲作]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제행이란 '일체의 만들어진 것', 다시 말하면, 물질적 정신적인 모든 현상을 가리킨다. 현대적인 표현으로는 '모든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무상은 anitya를 번역한 말로서, nitya 즉, '항상'(恒常)의 반대 의미이다. 무상이란 글자 그대로 "항상함이 없다", "변화하고 변천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제행무상'이란 "모든 존재는 항상함이 없이 변화하는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존재하는 그대로의 자연계와 인간계를 볼 때 모든 것은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바뀌고 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산이나 바위 같은 것들은 불변적인 것 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한시도 쉬지 않고 변하고 있다. 자연도 인간도, 그리고 물질적인 것도, 정신적인 것도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다. 쉬지 않고 흐르는 물처럼 단 한 순간도 가만히 머물러 있는 것은 없다. 존재란 여러 요소들이 여러가지 조건에 의하여 모여있는 집합체에 불과하기 때문에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와 조건들이 변하거나 사라지면 존재 역시 변하거나 사라진다. 그런데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은 고정불변적인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존재도 무상한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제행무상이라는 설명은 현대 과학에서 하고 있는 주장과 같다. 물질은 겉으로 보기에 고정되어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에너지의 흐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자는 원자핵을 중심으로 해서 전자(電子)와 중간자(中間子)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운동체이다. 이와 같은 원자로 구성되어 있는 물질 역시 고정 불변한 것일 수는 없다. 무상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무상이라는 말은 "인생은 무상하다." 또는 "세월은 무상한 것이다." 등과 같이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수가 많다. 무상하기 때문에 살아 가는 것이 괴로운 것이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무상한 것은 고다" 라고 되풀이 해서 말하고 있다. 젊은 사람이 늙어가고 건강한 사람이 병들기도 하고, 부귀를 누리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그것을 잃어 버리게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일들은 괴로움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무상하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 갈 수가 있다. 변하기 때문에 아이가 어른이 되고 병든 사람이 건강을 되찾는다. 만물이 태어나고 자라는 것도 무상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악한 사람이 착한 사람으로 되기도 하고,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 부귀를 누릴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제행이 무상하다.'라고 하는 것은 모든 존재에 대한 객관적 관찰에 의해서 내려진 결론이다. 이것은 값싼 감상주의나 비관적인 현실관이 아니다. 제행무상인은 불교가 모든 존재를 보는 관점이므로 불교의 존재관(存在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2.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 제법(諸法: sarva dharma)이란 제행(諸行)과 마찬가지로 '모든 존재'를 의미한다.
그래서 때로는 '제법'과 '제행'을 같은 말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이들 2개의 말은 다르다. 위에서 본 것처럼 '제행'에서 '행'은 'samskara'이고 '제법' 에서 '법'은 'dharma'이다. 제법은 제행보다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무아(無我:anatman)라는 말은 "아(我)가 없다." 또는 "아(我)가 아니다."[非我]라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아(我,atman)란 생멸변화를 벗어난 영원하고 불멸적인 존재인 실체(實體) 또는 본체(本體)를 말한다. 따라서 '제법무아'는 "모든 존재에는 고정불변 하는 실체적인 아(我)가 없다."라는 의미이다. 역시 그것은 "실체적인 아[實體的我]가 아니다." 라는 뜻이기도 하다. "제행이 무상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비교적 쉽게 받아들이지만,"제법이 무아(無我)하다."라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는 그와 반대다. 눈에 보이는 현상은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기는 쉬워도 존재의 배후에 영혼과 같은 실체적인 존재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붓다 당시에도, 그리고 현재에도 불교 이외의 다른 종파에서는 대부분 불생불멸의 영원한 존재로서의 본체를 인정하고 있다. 그것을 '아'(我: atman)' 또는 '범'(梵: brahman)이라 하기도 하고, '영혼'[生存原理: jiva], 절대자, 신이라고 이름하기도 한다. 이것은 개체적인 실체[我]를 가리키기도 하고 우주적인 실체[梵]를 말하기도 한다. 불교에서는 이와 같은 실체적인 존재를 인정 할 수가 없다. 모든 존재[諸法]는 비실체적인 여러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서 시시각각으로 변하면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존재가 무아적일 것은 물론이고, 역시 그 속에 고정불변한 실체적인 아(我)가 없다는 것도 당연한 귀결이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제법무아라고 해서 현상적인 존재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부정하고 있는 것은 단지 '고정불변하는 실체적인 아(我)'일 뿐이다. 제법무아인은 불교의 실체관(實體觀)이라고 할 수있다. '고정불변적인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불교의 관점이다. 제법무아 이론은 불교만이 가르치고 있는 가장 독특한 것이다.
3.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
'열반'과 '적정(寂靜; santi)'은 동의어로서, 열반의 의미가 바로 '적정'이다. 열반에 대해서는 4성제의 멸성제에서 이미 설명했지만 좀더 부연한다면, 열반이란 'nirvana'의 음역으로서 글자 그대로는 소멸(消滅)을 의미한다. 그것은 '불어서 끄다'[吹消]라는 뜻을 가진 어근 'VA'에다 부정접두사 'nir'가 결합되어 이루어진 말로서 '불어서 꺼진 상태'를 뜻한다. 즉 "불타고 있는 것과 같은 괴로움[苦]이 완전히 소멸된 상태"를 의미한다.. 그래서 초기 경전에서는 열반을 "탐욕의 사라짐[貪慾滅盡], 분노의 사라짐[瞋喪滅盡], 어리석음의 사라짐[愚痴滅盡], 이것을 이름하여 열반이라 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인생에서 괴로움을 일으키는 요소들인 탐욕심, 분노심, 어리석음[3毒]이 모두 소멸되었을 때 인생은 더 이상 괴로운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열반의 상태는 '고요하고, 괴로움이 없이 편안[無苦安穩] 한 것'임에 틀림없다. 이것을 'santi' , 즉 '적정(寂靜)'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열반의 이와같은 상태를 한 경에서는 비유해서 "마치 마른 나뭇단을 많이 넣고 매우 뜨겁게 달군 큰 가마에서 불타고 있던 사람이 천신만고 끝에 거기에서 벗어나 시원한 장소로 도망쳐 나왔을 때, 그가 느끼는 최상의 안락과 같은 것" 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경전에서는 열반이란 말을 멸(滅), 적(寂), 불사(不死), 최상의 안락(安樂)등 여러 가지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현대적인 표현으로 하면 "최고의 행복"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있다. 모든 고(苦), 번뇌가 소멸된 상태는 바로 행복이기 때문이다. 열반은 불교에서 추구하는 궁극의 목적이자 최고의 이상이다. 불교의 모든 가르침은 결국 이 열반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열반적정인은 불교의 이상관(理想觀)이라고 할 수 있다..
3법인은 각 법인(法印)을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연결된 하나의 실천이론으로 볼 수도 있다. 제행이 '무상'하다는 사실을 바로 이해하면 제법이 '무아' 하다는 것도 알 수 있게 된다. 제행이 무상하고 제법이 무아하다는 것을 확실히 이해하면 우리는 욕망과 집착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게된다. 그리고 모든 욕망과 번뇌를 떠날 때 우리는 열반에 이르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제6절 일체법(一切法) - 5온(蘊).12처(處).18계(界)
일체법이란 '일체의 존재'를 말한다. 앞에서 이미 말했듯이 불교가 목표로 하는 것은 오직 한가지 뿐이다. 인간 문제의 해결,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간 고(苦)의 해결이다. 그런데 불교 경전에서는 인간 문제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어 보이는 일체법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가르침을 펴고 있다. 이것은 불교가 자연과학이나 철학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가 일체법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이해 함으로서 인간의 문제를 보다 효과적으로 풀기 위해서 이다. 우리는 일체법의 참된 모습을 확실하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에 집착하고, 집착함으로서 그것이 변하거나 사라질때 괴로워 하게 되는 것이다. 일체법을 분류하는데는 여러 가지방법이 있다. 대상은 한 가지 이지만 상황에 따라 다른 설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설명 할 수도 있고 좀 더 자세하게 할 수도 있다. 물질을 위주로 설명 할 수도 있고, 반대로 정신을 위주로 할 수도 있다. 일체법을 이해하는 사람의 성향이나 능력, 또는 수준에 따라 다른 설명들이 필요한 것이다. 초기 경전에 나오고 있는 일체법의 분류 방법 가운데서 가장 일반적이고 구체적인 것은 5온, 12처, 18계이다. 정신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람을 위해서는 5온을, 그리고 물질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람을 위해서는 12처를, 또 정신과 물질 모두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람을 위해서는 18계를 설해서 물질과 정신이 모두 실체적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1. 5온(五蘊: skhanda )
5온에 대해서는 위에서 이미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존재와 관계된 것이 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나의 존재'란 5개의 요소로 이루어 진 것, 그리고 그것은 실체적인 아(我)가 아니라는 것, 즉 무아(無我)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5온으로서 일체법을 설명할 때는 5온이 개인 존재만이 아니라 일체의 만물을 가리키는 것이다. 일체법은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5온 가운데서 색온(色蘊)은 물질 전체를 말하는 것이고, 수온(受蘊), 상온(想蘊), 행온(行蘊), 식온(識 )등 4온은 정신일반을 가리키는 것이다. 일체법은 이와같은 5개의 요소가 결합해서 항상 변하면서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서 어디에도 실체적인 것이 없다. 결국 일체법은 무아이고 무실체적이라는 것이다. 5온을 설하는 대상은 물질은 끊임 없이 변하는 것으로서 무상하다는 것을 이해하지만 정신은 실체적인 것으로서 영원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래서 5온이론에서는 정신적인 것도 실체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 물질 부분보다는 정신부분에 대한 설명을 훨씬 더 상세하게 하고 있다. 5온은 상근기(上根機)에 속하는 사람을 위한 설명이다. 근기란 붓다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능력이다. 상근기, 즉 법을 이해하는 능력이 가장 뛰어난 사람은 5온에 대한 설명만 들어도 일체법이 실체적이 아니라는 것[無我]을 이해 할 수 있다.
2. 12처(十二處, ayatana)
12처의 처(處)는 ayatana에서 번역된 말로서 구역(舊譯)에서는 '입'(入)이라고 했다. 이말은 'ayat'와 'ana'로 이루어져 있는데, 'ayat'는 '들어오는' 의 뜻이고, 'ana'는 '것'과 '곳'이라는 2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ayatana라는 말은 '들어 오는 곳'[處] 또는 '들어 오는 것'[入]이라는 의미이다. 12처란 눈[眼根], 귀[耳根], 코[鼻根], 혀[舌根], 몸[身根], 마음[意根]등 6개의 감각기관[6根]과 그것에 상응하는 6개의 대상, 즉 빛깔과 형태[色境], 소리[聲境], 냄새[香境], 맛[味境].닿을 수 있는것[觸境], 생각[法境]등을 합친 것이다.보는 작용은 눈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듣는 작용은 귀를 통해서, 냄새 맡는 것은 코를 통해서, 맛보는 것은 혀를 통해서, 감촉은 몸(몸의 각 부위에 있는 피부)을 통해서, 생각은 마음[意]을 통해서 이루어 진다. 이들 눈,귀,코,혀,몸,마음[眼耳鼻舌身意]등을 6개의 기관이라는 이라는 의미에서 6근(根)이라 부르고, 6내처(六內處)라고도 한다. 6근의 근은 기관(器官)이라는 의미 이외에, 기관이 가지고 있는 기능까지를 포함한다. 안근이라고 해서 안구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볼수 있는 눈의 기능까지 포함한다. 6근에서 제6의 의근(意根)은 기능만 존재하지 실제로 구체적인 기관은 없다. 그러나 여기에서 의식(意識)이 생기므로 일종의 기관임에는 틀림없다. 6근에 상응하는 바깥 세계의 대상, 즉 빛깔과 형태,소리, 냄새,맛, 닿을 수 있는것, 생각[色聲香味觸法]등을 6경(六境)이라 부르고, 6외처(六外處)라고도 한다. 정신작용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감각기관과 거기에 상응하는 대상이 만나야 된다. 즉 눈에는 빛깔, 또는 형태가, 귀에는 소리가, 혀에는 맛이, 몸[피부]에는 첩촉할 수 있는 것이, 마음[意根]에는 생각[法]이 만나야 한다. 여기에서 법을 '생각'이라고 말했지만 좀더 정확하게 말한다 면, 마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말한다. 12처 가운데서 '11처(處)에 포함되지 않는 모든 현상' 이다. 12처란, 다시 말해서 6근과 6경, 즉 6내처와 6외처를 합친 것으로서 다음과 같이 표시 할 수 있다. 6근 6경 1) 안처(眼處)--- 7) 색처(色處) 2) 이처(耳處)----8) 성처(聲處) 3) 비처(鼻處)----9) 향처(香處) 6내처 4) 설처(舌處)--- 10) 미처(味處) 6외처 5) 신처(身處)----11) 촉처(觸處) 6) 의처(意處)----12) 법처(法處)
이 우주에 존재하고 있는 존재의 수는 셀 수 없이 많다. 그러나 이것을 요약해서 분류하면 주관계(主觀界)와 객관계(客觀界)로 나눌수 있다. 주관계를 구성하는 요소가 6근[6내처]이고, 또 객관계를 이루고 있는 요소가 6경[6외처]으로서 이것을 합친 것이 12처이다. 이와 같은 분류방법은 일체 존재의 주체인 인간의 인식능력을 중심으로 구분해서 체계화한 것이다. 일체법에서 12처를 논하는 근본 목적은 역시 제법무아의 진리를 밝히는데 있다. 특히 이것은 물질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물질이 실체라고 생각하거나, 물질 가운데 실체적인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설해진다. 일체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12종의 요소에는 고정 불변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 12처에 의해서 주관계와 객관계를 모두 포섭하고, 이 모든 것들은 무상이고 무아라고 하는 것이다. 12처는 중근기(中根機), 즉 법을 이해하는 능력에 있어서 중간 수준에 속하는 사람을 위한 가르침이다.
3. 18계(十八界, dhatu) 18계의 계(界)는 dhatu를 번역한 말로서, 구성요소, 또는 영역,종류의 뜻이다. 18계란 12처 즉 6근과 6경에 6식(識)을 합친 것이다. 18계의 분류 방법은 '근.경.식(根.境.識)의 3사화합(三事和合)이라는 원리에서 나온 것이다. 무엇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식 기능을 가지고 있는 기관[根]과 인식의 대상[境]과 인식작용[識]의 3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눈을 통해서 빛깔이나 형상을 보기 때문에 그것을 식별하는 작용이 일어나게 된다. 그것을 안식(眼識)이라 한다. 귀로서 소리를 듣기 때문에 이식(耳識)이, 코로서 냄새를 맡기 때문에 비식(鼻識)이, 몸으로 무엇을 접촉하기 때문에 신식(身識)이, 마음으로 무엇을 생각하기 때문에 의식(意識)이 일어 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6식(識)이다.이것을 아함경에서는[手聲喩經] 손뼉 소리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즉 "비유하면, 두 손이 서로 마주쳐 소리를 내는 것과 같다. 이와같이 눈과 빛깔을 인연하여 안식이 생긴다.(나머지 5 識도 마찬가지다)" 이 비유에서 한 손은 기관[根]과 같은 것이고 다른 한 손은 대상[境]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손뼉 소리는 식(識)과 같다. 18계의 상호 관계를 표시해 보면 다음과 같이 된다.
18계설에서는 일체의 존재를 이와같은 18계의 요소로 분류했다. 이때는 12처의 경우와는 달리 6근과 6경을 합쳐서 객관계로 보고, 6식을 주관계로 보았다. 18계에서는 일체존재를 12처에서 보다 상세하게 분류한 것이다. 12처를 설명할 때 보았듯이 일체를 구성하고 있는 12가지 요소 모두가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요소들이 만나서 생기게 된 식(識) 역시 실체적인 것일 수는 없다. 객관세계의 모든 것, 즉 물질적인 것도 실체가 없는 것이지만, 주관세계의 것, 즉 정신적인 것도 실체가 없는 것임에 틀림없다. 비유에서처럼 손뼉 소리를 낼 수 있는 2 손바닥도 실체(實體)적인 것이 아니지만, 실체적이 아닌 그 2 손바닥이 마주쳐서 일으킨 소리 역시 실체적이 아닌 것은 명백하다. 결국 18계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일체법은 물질적인 것에서도, 그리고 정신적인 것에서도 변하지 않고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18계를 설할 대상자는 물질과 정신에 모두 어두운 사람이다. 이와같은 사람은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모두를 실체적이고 영원하다고 믿는 것이다. 18계설은 이와 같은 사람을 위해 물질과 정신의 참모습을 보여 줌으로서 그것에 대한 집착을 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18계설은 하근기(下根機), 즉 법을 이해하는 능력이 가장 낮은 사람을 위한 가르침이다.
제7절 윤회(輪廻)와 업(業)
1. 윤회(samsara)
'윤회'(輪廻)라는 말은 samsara를 번역한 것이다. 이것은 'sam'과 sara라는 두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 'sam'은 '함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sara'는 '달리다. 빠르게 움직이다. 건너다.'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 'SR'에서 유래한 말이다. 따라서 samsara를 글자 그대 번역하면 '함께 달리는 것','함께 건너는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중국의 번역가들은 이 것을 윤회, 즉 '도는 것'이라고 번역했다. 경전에서는 윤회를 중생들이 여러 세계를 수레바퀴가 돌아가듯 그렇게 돌고 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한 존재가 죽으면 이 세상이나 다른 세상에 새로운 몸을 받아 태어나게 되고, 그곳에서 살다가 죽으면 다시 그곳이나 다른 세상에 태어난다. 죽는다는 것은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태어난다는 것은 죽는 다는 것을 의미한다. 존재는 여러 가지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삶과 죽음을 끝없이 되풀이한다. 그래서 이것을 "도는 것", 즉 윤회라고 한 것이다. 윤회의 원리는 간단하다.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에 짓는 모든 업(業 =行爲)은 틀림없이 결과를 낳게 되고, 그 결과가 다음 생(生)을 존재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업의 결과가 남아있는 동안에는 윤회는 계속된다. 그러나 업의 결과가 모두 소비되어서 없어지면 윤회는 끝나게 된다. 이것이 해탈, 또는 열반이다. 윤회는 욕계(欲界),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등 3계(三界: 3개의 세계), 또는 지옥도(地獄途), 아귀도(餓鬼途), 축생도(畜生途),아수라(阿修羅途), 인간도(人間途), 천상도(天上途)등 6도(六途: 6개의 세계)를 통해 전개된다. 3계와 6도는 다른 것 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동일한 세계다. 단지 그것을 구분하는 방법의 차이 때문에 다르게 설명되고 있을 뿐이다. 욕계란 욕망의 생활을 하는 존재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지옥, 아귀,축생, 아수라, 인간, 그리고 저급한 신들이 사는 세계다. 색계는 욕망을 떠났으나 아직 육체를 가지고 있는 존재들이 사는 곳이다. 이곳에 있는 존재들은 '천상의 존재'(天上存在), 또는 '신'(神)이라 불린다. 그러나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존재로서의 신은 아니다. 천상에서 살 수 있는 선업(善業)의 결과가 다하면 다시 다른 세계로 윤회전생하는 존재들이다. 이들의 육체는 미묘한 물질로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의 육안으로는 볼 수 없다. 무색계는 욕망은 말할 것도 없지만 육체조차도 없는 존재들이 사는 세계다. 이들은 순전히 정신적인 존재들이다. 지옥, 아귀, 축생등 3도는 나쁜 세계이므로 악도(惡途)라 한다. 지옥은 주로 땅밑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 사는 중생들은 업이 다 할 때까지 긴 세월동안 극심한 고통을 받는다. 아귀도에 사는 중생들은 목구멍이 바늘처럼 가는 반면, 배는 대단히 큰 존재들로서 항상 배고픔과 목마름 때문에 끊임없이 고통을 받는다. 축생도는 모든 종류의 벌레들, 물고기, 새, 짐승들이 사는 곳이다. 아수라도는 항상 신들[諸天]을 상대로 싸움을 하는 존재들이 사는 곳이다. 인간과 천상의 2도(途)는 선업을 지은 존재들이 사는 좋은 세계로 선도(善途)라 한다. 6도 가운데서 인간도는 중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은 큰 특혜다. 인간도에는 고(苦)도 있지만 그러나 이곳에서만이 수도를 할 수 있고 열반을 성취할 수 있다. 윤회의 원인이 되는 업(業)도 인간도에서만 짓게 된다. 왜냐하면 이 곳에서만 윤리적인 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다른 5도에서는 업을 소비할 뿐이다. '윤회'라는 말은 끊임없이 돌고 도는 순환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윤회하는 존재는 6개의 세계[六途]를 순서에 따라 차례대로 죽고 태어나면서 순환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도에서 목숨을 마치고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기도 하고 지옥이나 축생도에 떨어 질 수도 있다. 역시 천상에서 목숨을 마치고 인간도에나 지옥도에 태어날 수도 있다. 윤회의 시작은 알 수 없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시작이 없다'[無始]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 끝은 알 수 있다. 붓다 처럼 법을 깨쳐 더 이상 업을 짓지 않게 되고, 이미 지은 업이 모두 소멸되면 윤회의 바퀴는 멈추게 되는 것이다.
2. 업(業, karma)
업(業)이라는 말은 karma을 번역한 것이다. karma은 '완수하다, 만들다, 하다'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 KR가 그 어원으로, '활동' '일' '행위'등으로 번역된다. 그러나 경전에서는 일반적으로 '업'이라 하고 있다. 업은 육체로 짓는 행위인 신업(身業), 언어로 짓는 행위인 구업(口業), 마음으로 짓는 행위인 의업(意業)등 3업(三業)으로 구분한다. 3업을 세분하면 10업이 된다. 1).살생(殺生): 산목숨을 죽이는 것 2).투도(偸盜): 다른 사람이 주지 않은 물건을 훔치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취하는 것. 3).사음(邪淫): 부모와 형제와 자매로부터 보호되고 있는 여자를 범하는 것. 4).망어(妄語):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자신을 위하고 남을 위하고 혹은 재물을 위해 거짓말하는 것. 5).양설(兩舌):이간시키는 말로서 사람들을 갈라지게 하고 당파를 만들게 하는 것. 6).악구(惡口): 추한 말, 즉 욕을 하는 것. 7).기어(綺語): 꾸며대는 말, 즉 진실이 아닌 것을 말하고, 뜻이 아닌 것을 말하고, 법(法)이 아닌 것을 말하는 것. 8).탐(貪): 남의 재물과 모든 생활 기구를 엿보고 구하고 바라면서, 그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 9).진(瞋): 미워하고 성내는 것. 10).사견(邪見): 삿된 소견, 구체적으로 말하면 업과 그 과보를 믿지 않고, 이 세상과 저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 10업 가운데서 살생, 투도, 사음은 신업이고, 망어, 양설, 악구, 기어는 구업에 속하고 탐, 진, 사견은 의업이다. 업을 성질상으로 분류해서 선업(善業), 악업(惡業), 무기업(無記業)으로 나누기도 한다. 선업은 착한 행위로서 좋은 과보를 내게 되고, 악업은 악한 행위로서 나쁜 과보를 내게 된다. 무기업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중성적인 행위로서 과보를 낼 수 없다. 업이론은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라는 "인과(因果)의 법칙"위에 성립되어 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선한 행위와 악한 행위라는 "윤리적인 법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업 이론은 인과성과 윤리성의 2중 구조를 가지고 있다. 업이론의 인과성은 자연법칙에서와 같은 것이지만, 그 윤리성, 즉 선한 행위에는 좋은 결과가 나오고 악한 행위에는 나쁜 결과가 초래된다는 것은 종교적인 것이다. 업을 행할 때 업[행위] 그 자체는 순간적으로 끝나 버린다. 그러나 업은 그것을 행한 존재 속에 반드시 어떤 흔적이나 세력을 남기게 된다. 마치 향(香)을 태울 때 향이 다 타서 사라진 뒤에도 향기가 옷에 배어들어 남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업이 남긴 이 세력을 업력(業力)이라 하는데, 이것은 잠재적인 에너지로 되어서 존재 속에 머물러 있다가 기회가 오면 반드시 거기에 상응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업력은 존재들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들로 하여금 살아가게 하는 동력(動力)으로 작용하고, 죽은 뒤에는 그들의 미래를 만드는 에너지로 된다. 업은 절대로 그냥 소멸되지 않는다. 이 생(生)에서 뿐만 아니라 여러 생을 통해서 틀림없이 그 결과를 나타내게 된다. 그래서 업은 존재의 현재의 운명뿐만 아니라 미래의 운명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존재의 모든 것은 업에 의해서 만들어지게 된다. 사람으로 태어날 업을 지었으면 다음 생에 사람으로 태어나게 되고 짐승이 될 업을 지었으면 짐승으로 태어나게 된다. 한 존재가 현재 가지고 있는 모든 것, 즉 모습,성격, 환경, 태어 난 국토, 수명의 길고 짧음, 육체적인 조건 등은 그 존재가 과거에 지은 업의 결과이다. 역시 현재 짓고 있는 업은 그 존재의 미래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재료가 된다. 이처럼 존재의 모든 것은 업에 의해 결정된다. 업은 개인의 운명뿐 아니라 공동체의 운명도 결정한다. 단체나 사회의 운명은 그 단체나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들이 짓는 업에 의해 결정된다. 한 존재는 그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개인 업, 즉 불공업(不共業)을 짓는 것과 동시에, 역시 그 존재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의 운명을 결정하는 공업(共業)도 짓게 된다. 업은 존재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궁극원리(窮極原理)이다. 인간의 행위를 업(業)이라고 했지만 그러나 모든 행위가 업은 아니다. 업다운 업이 되기 위해서는 과보(果報)를 초래할 능력을 가지고 있는 행위여야 한다. 그렇지 못한 행위는 업이 아니다. 과보를 초래할 수 있는 업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2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 의도적인 행위여야 한다. 무의식적으로 행해진 행위는 과보를 초래할 힘을 가지지 못한다. 둘째, 윤리적인 행위여야 한다. 즉 선한 행위이거나 악한 행위여야 한다.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행위, 즉 무기업은 중성적인 업으로서 무정란(無精卵)과 같은 것이다. 이 업은 과보를 초래할 능력이 없다. 따라서 이 무기업은 엄밀한 의미에서 업이라고 할 수 없다. 업은 인간만이 지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만이 의도된 행위와 윤리 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동물의 행동은 본능적인 것일 뿐 의지작용이 밑바탕이 된 행위는 아니다. 역시 동물들은 윤리 생활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6도(六途) 가운데서 인간도에서만 업을 짓고, 나머지 5도에서는 업을 소비할 뿐이다.
3. 과보(果報)
업이 지어지면 틀림없이 그 결과가 타나게 된다. 그것을 과보(果報:phala)라 한다. 업과 과보의 관계는 식물에 비유해서 설명될 수 있다. 씨앗을 심으면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가 열린다. 열매의 맛과 성질은 전적으로 그 씨앗을 따른다. 마찬가지로 업을 지으면 그것은 성숙하게 되고 언젠가는 반드시 과보를 초래한다. 그리고 과보의 성질은 전적으로 업의 성질에 좌우 된다. 예를 들어 같은 밭에 고추 씨앗과 가지 씨앗을 심은 뒤 동일한 조건 아래에서 고추와 가지를 키우더라도 그 결과는 완전히 다르게 나타난다. 고추 씨앗의 결과는 고추로 나타나게 되고, 가지 씨앗의 결과는 가지로 나타나게 된다. 고추와 가지의 모양과 맛은 그것들을 키우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이미 그 씨앗 속에 들어 있다. 업과 과보의 원리도 이와 같은 것이다. 업이 일단 결정되고 나면 그 과보는 피 할 수 없다. 그것은 절대로 그냥 소멸되지 않는다. 언젠가는 업을 지은 사람에게 그 결과가 나타나고야 만다. 여기에는 어떠한 예외도 있을 수 없다. 법구경(法句經)에서는 이것을 "하늘에도 바다에도 산중 동굴에도 사람이 악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곳은 아무데도 없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업은 개인의 의지작용(意志作用)에 의해 짓는 것이므로 전적으로 개인적인 것이다. 자신이 지은 업을 다른 존재에게 이전시킬 수 있다거나 다른 사람이 지은 업의 과보를 자기가 대신 받을 수는 없다. 설사 그것이 선업의 과보일지라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업의 원리를 "자신이 짓고 자신이 받는 원리",즉 자작자수(自作自受)의 원리, 또는 자업자득(自業自得)의 원리라고 하는 것이다.
업이 일단 이루어지면 그 성질에 따라 틀림없이 그 과보가 있게 된다고 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산술적(算術的)인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2개의 똑같은 업을 지었다 해도 그 결과는 반드시 동일하지는 않다. 상황에 따라 그 결과는 다르게 나타난다. 예를 들면 똑 같은 보시를 하더라도 그 보시를 누구에게 하는가에 따라 그 과보는 다르다.음식물을 짐승에게 주는 것보다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 결과가 더 크고, 범부에게보다는 수행자에게 주는 것이 더욱 큰 과보를 초래하게 된다. 수행자에게 하는 보시보다는 도를 이룬 붓다와 같은 존재에게 하는 것이 훨씬 더 큰 과보를 받을 수 있다. 짐승을 죽여도 죄가 되지만 사람이나 성인(聖人)을 죽이면 그 죄는 더욱 무겁다. 이와 같은 원리는 붓다가 코살라국의 프라세나짓왕에게 한 설명을 보면 더 잘 이해 할 수 있다. "대왕이여 알아야 하오. 마치 저 농부가 땅을 잘 다루고 잡초를 없앤 뒤에 좋은 종자를 좋은 밭에 뿌리면 거기에서 나오는 수확은 한량이 없지마는 그 농부가 땅을 잘 다루지 않고 잡초들을 없애지 않고서 종자를 뿌리면 그 수확은 말할 것도 못되는 것과 같소." 즉 같은 넓이의 밭에 같은 양의 종자를 심는다해도 밭의 상태에 따라 수확의 양도 다르게 나 타나는 것처럼 업의 과보가 나타나는 것도 동일하다. 업이 일단 결정된 뒤에는 외부의 영향은 미칠 수 없다고 했지만, 그러나 업을 지은 사람의 노력에 따라 예상되는 결과를 다소 변화시킬 수 있다. 업을 지은 뒤에 다시 어떤 업을 짓느냐에 따라 이미 결정된 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과보를 나타나지 않게 할 수 있다거나 완전히 다른 것으로 되게 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경전에서는 이것을 소금물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한 움큼의 소금을 한 잔의 물 속에 넣으면 그 물은 짜서 마실 수 없게 되지만 그것을 큰 그릇의 물 속에 넣으면 마실 수 있는 물이 된다. 한 잔 속의 물에 넣은 소금의 양과 큰그릇의 물에 넣은 소금의 양은 동일 하지만 물의 양에 따라 소금물의 농도가 다르게 되므로 마실 수 있는 물이 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한 물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이미 결정된 업도 우리의 노력에 의해 그 결과를 어느 정도까지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나쁜 업을 지었어도 그 뒤에 좋은 업을 많이 지으면 이미 지은 나쁜 업에 대한 과보는 나쁘게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원리 때문에 업 이론은 기계론적인 이론이 아니게 된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자신의 의지와 노력에 의해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과보가 나타나는 시기는 업의 성질과 업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다. 그것은 곡식이 종자에 따라 싹이 나오는 시기가 다른 것과 같다. 또한 동일한 종자라 해도 온도나 습도등 종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싹이 일찍 나오기도 하고 늦게 나오기도 한다. 업의 과보가 나타나는 시기도 이와 같아서 일정하지가 않다. 과보가 나타나는 시기를 3 종류로 나눈다. 이 생에서 지어서 이 생에서 그 과보가 나타나 업을 순현업(順現業), 그 과보가 다음 생에 나타나는 업을 순생업(順生業), 차후생 또는 여러 생에 걸쳐 나타나는 업을 순후업(順後業)이라 한다. 그리고 과보가 나타나는 시기가 정해진 업을 정업(定業)이라하고 그 반대인 것, 즉 과보가 나타나는 시기가 정해지지 않은 업을 부정업(不定業)이라고 한다. 업을 지으면 틀림없이 그 과보를 받게 되지만 그 결과는 항상 동일하지는 않다. 수많은 변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업을 지으면 어떤 과보를 받는다고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대체로 선업을 지은 사람은 천상이나 인간계, 즉 선도(善途)에 태어나고, 악업을 지은 사람은 주로 지옥, 아귀 축생의 세계, 즉 악도(惡途)에 태어난다고 말 할 수 있다. 경전에 의하면 악업을 지은 사람은 설사 인간계에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 해도 다음과 같은 나쁜 조건 속에 있게 된다는 것이다. 즉 살생(殺生) 업을 많이 지으면 건강이 좋지 않거나 일찍 죽게 되고, 투도(偸盜)업을 많이 지으면 가난하게 태어난다. 사음(邪淫) 업을 많이 지으면 가족들이 정숙하지 못하게 되고, 망어(妄語)업을 많이 지으면 말에 신용도 없고 다른 사람에게 멸시를 받게 된다. 양설(兩舌) 업을 많이 지으면 정신이 안정되지 못해서 항상 불안 속에 살게 되고 가정불화가 많을 뿐 아니라 친구들에게 버림을 받게 된다. 악구(惡口)업을 많이 짓는 사람은 얼굴이 못생 기고 듣기 싫은 목소리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항상 미움을 받게 된다. 기어(綺語)업을 많이 지으면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고 친척들이 흩어진다. 탐욕(貪慾)업과 화를 내는 업[瞋喪]을 많이 지으면 다음 생에서도 탐욕심과 화를 많이 내게 된다. 그리고 사견(邪見) 업을 많이 짓는 사람은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마음이 어지러워 안정되지 않는다. 그리고 문화중심지에 태어날 기회를 가질 수 없게 되어서 붓다의 가르침을 들을 수 없다. 심하면 귀머거리, 장님, 벙어리가 되고 선법(善法)과 악법(惡法)을 구별할 수 없게 된다.
4. 윤회의 주체문제(主體問題)
우리는 일반적으로 인간이 죽으면 육체는 소멸하지만 영혼은 계속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윤회를 한다면 바로 이 영혼이 다른 몸을 받아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힌두교와 자이나교는 어떤 존재가 죽어 육체가 사라지면 영혼과 같은 존재인 아트만(atman)이나 지바(jiva)가 윤회를 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무아(anatman)를 주장하는 불교에서는 이와 같은 윤회의 주체를 인정할 수 없다. 불교에 의하면 인간 존재란 비실체적(非實體的)인 몇 개의 요소들[五蘊]이 어떤 조건에 의해서 임시적으로 모여 있는 하나의 집합체에 불과한 것이다. 여기에 고정 불변하는 어떤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존재가 사라질 때 '누가' 또는 '무엇이', 그리고 '어떻게' 이 생(生)에서 다음 생으로 윤회전생(輪廻轉生)하게 되는 것인가. 사실 윤회의 주체(主體)를 인정하지 않는 불교에서 이 문제는 가장 설명하기 어려운 것 중의 하나다. 부파불교 시대에 이르러 이 문제는 부파간에 하나의 중요한 교리적인 쟁점이 되지만, 초기 경전에서도 이미 이 문제와 관련한 몇 가지 설명이 등장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 가장 확실한 설명을 해주고 있는 곳은 잡아함(335)의 제일공경(第一空經)이다. 이 경에 의하면 윤회를 위해서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영혼과 같은 어떤 것이 반드시 옮겨 가야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윤회란 고정불변하는 어떤 주체가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옮아 가는것'[移轉]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가 변화하면서 '계속'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을 붓다는 "업과 과보는 있지만 그것을 짓는 존재는 없다. 이 존재(此陰: 죽는 존재)가 사라지고 다른 존재(異陰: 태어나는 존재)가 서로 계속된다"[有業報而 無作者 此陰滅已 異陰相續]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것을 다른 곳에서는 우유의 비유로써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인도에서는 우유로써 4종의 요리를 만들 수 있다. 즉 "우유가 낙(酪)이 되고 , 낙이 생소(生 )로 되고, 생소가 숙소(熟 )로 되고, 숙소가 제호(醍 )로 된다." 우유가 낙에서 제호로 될 때 우유에서 제호까지 변하지 않고 계속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유가 변해서 낙이 되고, 낙이 변해서 생소로 된다. 그리고 생소는 변해서 숙소로 되고 숙소가 변해서 제호로 된다. 낙은 더 이상 우유가 아니고 생소 역시 더 이상 낙이 아니다. 우유에서 제호 사이에는 동일성은 없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우유 없이는 낙이 있을 수 없고, 낙 없이는 생소도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숙소 없이는 제호도 생길 수 없다. 물이나 기름과 같은 다른 물질로서는 아무리 우유에서와 같은 조건을 갖추어 준다해도 낙이나 소나 제호는 얻을 수 없다. 나비의 비유를 들어 이것을 좀 더 쉽게 설명할 수 있다. 나비의 알(卵)은 애벌레로, 그리고 애벌레에서 번데기로 변하고 번데기에서 결국 나비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알의 상태에서 나비로 되는 전 과정을 거치면서 어떤 고정불변하는 것이 전달되지는 않는다. 알이 변해서 애벌레로 되고, 그리고 애벌레가 변해서 번데기로, 번데기가 변해서 나비로 되는 것일 뿐이다. 알과 나비는 같은 것이 아니다. 그리고 알의 상태에서 나비로 되기까지 변하지 않고 옮겨가는 '어떤 것'은 없지만 알과 나비 사이에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나비 알속에는 이미 나비가 될 수있는 조건이 들어 있다. 그래서 나비는 나비알에서만 나오지, 모기 알에서는 나올 수 없다. 비유에서와 마찬가지로 무아윤회이론에서도 한 존재가 다른 존재로 윤회할 때 고정불변하는 영혼과 같은 실체가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 존재 전체가 변화해서 다른 존재로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업(karman)이다. 한 존재가 살아 있을 때 지은 업은 잠재적인 에너지, 즉 업력(業力) 상태로 그 존재 속에 축적되어 있다가 존재가 죽으면 그 업력이 작용해서 다음 존재를 만든다는 것이다. 과거에 지은 업은 현재의 존재를 만들었고, 현재 짓는 업은 미래의 존재를 만든다. 업의 성질에 따라 우리는 천상의 존재가 되기도 하고 축생(畜生)이 되기도 한다. 여기에 아트만(atman)과 같은 윤회의 주체가 반드시 있어야 할 필요성은 없다. 나비의 알이 나비로 되는데 고정불변한 어떤 요소가 없어도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직 문제가 남아 있다. 현재의 존재에서 다음 존재로 넘어가는 영혼과 같은 것이 없다면 현재의 존재가 지은 업의 결과[果報]는 누가 받게 되는가. 윤회와 업사상의 중심이 되는 것은, "자신이 지은 업은 자신이 그 결과를 받는다."라는 자업자득(自業自得)의 원리인데, 업을 짓는 존재와 그 과보를 받는 존재가 동일하지 않다면 이 원리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우유와 나비 알의 비유에서처럼 전자와 후자가 동일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원리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우유와 제호(醍 )는 같은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우유의 질이 좋지 않을 때는 그 결과인 제호도 질이 좋지 않을 것이다. 나비의 알이 병든 것이라고 한다면 그 알이 변해서 되는 나비 역시 건강한 나비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우유와 제호, 또는 나비의 알과 나비는 동일한 것이 아니라고 해서 우유나 나비 알이 가진 결함에 대한 결과를 제호나 나비가 받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다. 좀 후기 경전이긴 하지만 <밀린다판하>에서는 이것을 망고의 비유로서 재미있게 설명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남의 망고밭에서 망고를 훔치다가 주인에게 붙잡혔다. 그러나 망고 도둑은 그 나무 주인에게 자신은 죄가 없다고 주장한다. 도둑의 논리는 주인이 심은 망고는 이미 오래전에 땅속에서 썩어 버렸고, 자신이 딴 망고는 주인이 심은 그 망고와는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그럴 듯 하지만 결국 망고나무 주인이 심은 망고가 자라서 망고나무가 되고 그 결과로서 현재의 망고 열매가 열였기 때문에 현재의 망고는 그 나무를 심은 사람의 것임에 틀림없다. 현재의 망고와 과거의 망고는 동일한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것이다. 무아윤회이론에서의 과보 문제도 마찬 가지다. 과거의 존재와 현재의 존재는 다르지만 과거의 존재가 지은 업의 결과는 현재의 존재가 받게 된다. 밀린다판하에서 나가세나 장노는 이것을 간단하게 한 마디로 결론을 내린다."다시 태어나는 자는 죽은 자와 다르다. 그러나 그는 죽은 자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그는 죽은자가 지은 업(의 과보)에서 벗어 날 수 없다."
초기불교의 주요개념
1. 삼십칠조도품(三十七助道品)
'도품'이란 불교의 지고한 목적인 깨달음을 실현하고 또한 지혜를 얻기 위한 실천도의 종류란 뜻이다. 여기에 37항이 있으므로 삼십칠도품(三十七道品)이라 하는 것은 아래의 일곱 가지를 합한 것이다.
① 사념처(四念處)는 삼십칠조도품 중 첫 번째의 수행도로서, 범부의 상(상) 낙(樂) 아(我) 정(淨)의 네가지 치우친 견해를 깨뜨리는 것이다. 첫째 : 육신은 죽으면 썩어지는 부정한 것이라고 관한다. 둘째 : 음행, 재물 등 우리의 마음에 즐거움이라고 느껴지는 것들은 진정한 즐거움이 아니라고 관한다. 셋째 : 우리의 마음은 대상에 따라 늘 변화하고 생멸하는 무상한 것이라고 관한다. 넷째 : 앞의 세 가지를 제외하고는 일체만유에는 실로 자아라고 할 실체가 없으며 내가 없으므로 내 것이라고 할 것도 없다고 관한다.
② 사정근(四正勤)은 삼십칠조도품 가운데 제2의 수행도로서 네 가지 바른 노력으로 태만한 마음과 장애를 끊도록 하는 것이다. 첫째 : 아직 나타나지 않은 악을 방지하기 위해 부지런히 감관을 단속하는 것이다. 둘째 : 이미 생긴 악을 끊기 위해 노력하는 것. 셋째 : 아직 나타나지 않은 선을 나타내기 위해 힘쓰는 것. 넷째 : 이미 나타난 선을 증장시키도록 노력하는 것.
③ 사여의족(四如意足)은 삼십칠조도품 가운데 세 번째 수행도로서 이를 여의족(如意足)이라 하는 것은 이에 의해 쌓은 정력(定力)으로서 여러 가지의 신변(神變)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여의(如意)는 뜻대로 자유자재한 신통의 뜻이다. 이 정(淨)을 얻는 수단에 욕여의족, 정진여의족, 심여의족, 사유여의족의 네 가지로 이것은 각기 서원과 노력과 심념(心念)과 관혜(觀慧)의 힘에 의하여 일어난 힘을 말한다.
④ 오근(五根) : 근(根)이라 함은 뛰어난 작용이 있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곧 올바른 깨달음의 길로 나가게 하는데, 뛰어난 작용을 하는 것이므로 힘써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신근(信根) 불,법,승(佛.法.僧)에 대해 무너지지 않는 깨끗한 믿음 ·근근(勤根)인 사정근 ·염근(念根)인 사념처 ·정근(定根), 즉 사선(四禪) ·혜근(慧根)이라 하며,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사성제(四聖제)를 바르게 아는 것을 말한다. ⑤ 오력(五力)에서 '력'이란 악을 쳐부수는 힘이 있음을 뜻한다. 오근을 닦을 때 얻어지는 힘이다. ·신력(信力) : 불법을 믿고 다른 것을 믿지 않는 것. ·진력(進力) : 선을 짓고 악을 폐하기에 부지런한 것. ·염력(念力) : 사상을 바로 가지고 사특한 생각을 버리는 것. ·정력(定力) : 선정(禪定)을 닦아 어지러운 생각을 없애는 것. ·혜력(慧力) : 지혜를 닦아 불교의 진리인 4제(제)를 깨닫는 것.
⑥ 칠각지(七覺支)란 7종의 법이 깨달음의 지혜를 도와준다는 뜻으로 각지(覺支)라고 하는데 이는 차례로 일어나서 그것을 닦아 익혀 나가게 된다. ·택법각분(擇法覺分) : 지혜로 모든 법을 살펴서 선한 것은 골라내고 악한 것은 버리는 것. ·정진각분(精進覺分) : 쓸데없는 고행은 그만두고 바른도에 전력하여 게으르지 않는 것. ·희각분(喜覺分) : 참된 법을 얻어 기뻐하는 것. ·제각분(除覺分) : 그릇된 견해,번뇌를 끊어버릴 때에 능히 참되고 거짓됨을 알아서 올바른 선근을 기르는 것. ·사각분(捨覺分) : 바깥 경계에 집착하던 것을 버리는 것. ·정각분(定覺分) : 정에 들어서 번뇌 망상을 일으키지 않는다. ·염각분(念覺分) : 불도를 수행함에 있어 잘 생각하여 정(定)과 혜(慧)를 고르게 하는 것. 마음이 혼침(昏沈)하면 택법각분, 정진각분, 희각분으로 마음을 일깨우고 마음이 들떠서 흔들리면 제각분,
우주의 기원에 관한 관심은 본질적으로 형이상학적의 범주에 속한다. 거친 자연 속에 내던져진 인간들에게 있어서 가장 원초적 의문은 자연과 우주의 근원에 대한 의문이었다. 그것을 체계화하고 논리화해온 노력이 철학과 종교의 근본 과제 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에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형태를 크 게 벗어나지 않는다.
첫째는 우주 전변설 宇宙轉變說 이다. 즉, 태초에 어떤 절대자 혹은 근원적 힘에 의하여 우주가 생성 유지된다는 생각이다. 기독교의 천지 창조론 같은 것이 대표적 실례이지만, 중국 신화, 한국신화 등에서도 주류를 이루는 사고 경향 이다. 둘째는 적취설 積聚說 이다. 이를테면 다 多 에서 다가 생성되었다는 입장이 다. 본래부터 우주는 혼돈의 상태였고, 혼돈이 가라앉으면서 많은 존재들이 저 절로 생겨났다는 주장이다. 셋째는 인연설 因緣說 이다. 태초의 절대자에 대한 주장은 억지 논리에 불과하 다는 반성에서부터 출발한다.
사물의 생성과 소멸에는 필연적인 인과 因果가 상존하며, 그 인연의 실타래가 바로 우주의 비밀이라는 입장이다.
불교 같은 종교가 가장 대표적인 예가 될수 있다.
물론 이와 같은 세 가지 입장은 각자의 선명한 논리 구조와 함께, 치명적인 모순성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해겔이 말한 대로 인간, 그 자체가 이미 모순이 다. 이성 자체에도 모순이 깃들어 있으며, 생명의 기원 또한 논리적이지는 않은 것이다. 따라서 어느 쪽이 더 논리적이냐 하는 논쟁은 무의미하다. 다만 우주의 생성에 대한 인간 사색의 흔적을 더듬어 보는 일로 만족할 따름이다. 동양인에게 있어서 이와 같은 사색의 흔적은 이미 기원전 10여 세기로 부터 비롯된다. 이 글에서는 불교의 우주관을 중심으로 인도와 중국의 경우에 관해서도 간략하게 언급하고자 한다. 중국의 천지 창조 신화는 다양한 장르를 갖고 전개된다. 전변설의 가장 대표격으로는 반고 盤古신화가 꼽힐 수 있고, 주자학의 경우에는 역 易 의 세계관을 들 수 있다.
반고 신화에 의하면 천지가 개벽하기 이전의 우주는 달걀 속 같았다. 달걀 껍질에 꽉 막힌 우주는 칠흙 같은 어두움과 혼돈에 휩싸인 이른바 카오스의 상태였다. 반고는 이 달걀 같은 우주 속에서 무의식의 깊은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가 무의식의 상태에 있은 지 1만 8000년, 드디어 그는 잠에서 깨어난다. 그는 곧 숨이 막히고 답답하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고, 그 공포와 절망을 이기지 못해서 달걀 껍질을 깨버렸다. 온 우주가 진동하면서 굉음이 천지를 뒤흔들었 다. 이 상황 속에서 우주의 청명한 정기는 하늘로 훨훨 날고 있었다. 한편 혼탁한 물체들은 아래로 처져내려 갔다. 하늘과 땅이 갈라졌지만, 반고는 이 둘이 서로 엉킬 것을 염려했다. 그래서 반고는 머리로 하늘을 이고 땅을 두 발로 눌렀다. 반고는 우주가 다시 혼돈과 암흑에 휩싸이지 않게 하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였다. 위대한 천지 창조자인 반고는 그 거대한 몸을 눕혔다.
그는 죽은 것이다. 그의 육신은 죽어서도 썩지 않았다. 반고의 입김은 바람과 구름이 되었다. 그의 목소리는 뇌성으로 변했다. 왼쪽 눈은 태양으로, 오른쪽 눈은 달로 변하여 세상을 밝게 비추었다. 온 몸은 대지를 둘러싸고, 그의 손발은 대지의 네 극이며, 다섯 개의 명산이 되었다. 혈맥은 하천으로 변하여 흘렀고, 근육은 사방을 연결하는 도로가 되었다. 살은 기름진 옥토로 변하고, 머리털이나 수염은 하늘의 별이 되었다. 피부의 털은 화초와 수목으로 피어났고, 치아나 뼈는 오색 영롱한 금은 보석으로 바뀌었다. 땀방울은 비와 이슬이 되어 대지를 적신다. 반고는 죽어서도 온 세상을 풍요롭게 하였고, 아름답게 보살펴주었던 것이다.[ 중국 신화의 모티브는 Tien(天) 에 대한 외경 畏敬 이다. 이외 에도 <<회남자>>, <<장자>> 등에 나타나는 천지 창조설도 같은 맥락이다.
김열규, <<동양의 신 들>>(한국능력개발사,1978),pp.208-210 ]
2.인도의 신화(Tad Ekam의 변형)
태초에는 무 無 도 없고 유 有 도 없고, 공계 空界도 없고, 또한 天界도 없 었다. 무엇이 이를 뒤덮었던가? 그것은 어디에 있었던가? 누가 이를 옹호했던 가? 저 물은 어떻게 있었으며, 밑없는 깊이는 어떻게 있었던가? 그때에는 죽음도 없고 불사不死/Amrta 도 없었으며, 낮과 밤의 구별도 없었다. 오직 타드에 캄 Tad Ekam/that Oneness/彼唯一者 만이 소리도 없이 스스로 호흡하고 있었으며, 그 밖에는 일찍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암흑 뿐이었다. 이 모든 것은 암흑에 뒤덮힌 빛 없는 파동계 波動界 였다.
허공으로 둘러싸인 원자 原子 /Abhu는 그 자신의 열 熱 의 힘으로 태어났다. 그것이 전개되어 처음으로 애욕 愛慾/Kama 이 생겼고, 이것은 식 識의 최초의 종자였다. 실로 누가 이를 알리오. 누가 지금 여기서 이를 설명할 수 있으리오. 그는 어디로부터 생겨나왔으며, 어디로부터 이 조화가 나오는가? 여러 신들도 천지 창조 이후에 생겨났으며, 그렇다며 그 어디로부터 생겨났는지를 아는 자는 누구냐? 그는 알리라. 이 조화의 원천을 아는 사람은 최고천 最高天 에서 이 세계를 관장하고 있다. 그는 진실로 알리라. 그러나 아마 그도 또한 모르리라. [<<리그베다>>, Nasadasiya Sukha, X,129.pp.1-6;졸저,<<인도철학사상사>>(경서원,1980),pp.20-21. 이 신 화의 패턴은 근원적 세계 원리의 모색이며 Tad Ekam->Kama->Manas라는 도식을 나타낸다.]
즉, 유일자에서 천지 창조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설명인데, 인도 신화에서 보이는 절대자는 이 외에도 원인 原人/Puraush, 도 道/Rta, 시간 時間/Kala 등이 있다. 특히 제일 마지막 구절에 보이는 절대자에 대한 회의 懷疑 가 관심을 끈다. 불교학자들은 이를 유일신교에서 범신론 汎神論에 이르는 과정으로 파악 하고 있다. 이 사상을 보다 세련되게 다듬은 것이 우달라카 Uddalaka의 존재론 이다. 그는 우파니샤드 Upanisad에 등장하는 철인 哲人인데, 우주 창조의 근원을 사트 Sat라고 설명하였다.
즉, 태초에 우주에는 사트만이 존재하였다. 이 사트는 스스로 생각하였다. 내가 많아지리라. 번식하리라 고. 그는 불 Tapas을 처음으로 만들었다. 그 불은 물 Apas을 만들었다. 어디에서나 고열 苦熱을 느끼면 사람이 땀을 흘리는 것이 그 까닭이다. 그때에 불로 말미암아 물이 생긴다고 했다. 그 물은 곡식을 만들어냈다. 이때 사트는 다시 생각했다. 내가 아트만 Atman으로서 지 地, 수 水, 화 火, 풍 風 속에 들어가 명색 名色/Namarupa을 전개하리 라. 결국 만유 萬有 는 지,수,화의 삼대 요소로 구성되었으며, 그 세가지 요소가 사물을 전개시킨다. 사트는 만물을 만들었지만, 다시 그 안에 용해됨으로써 사물은 신 자체가 된다.
이 신화에서 가장 주목되는 부분은 사트의 존재 변화 이유이다. 즉, 천지 창조의 절대자가 완전무결하다면, 왜 불완전한 세계를 만들었으냐 하는 의문이 제기 될 수 밖에 없다. 언제나 그 해명은 궁색하기 마련인데, 이곳에서는 내가 많아 지리라. 번식하리라 는 의지로 해석하고 있다. 또 그것이 애욕이 근본이라는 부 연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불교는 이와 같은 가설 假說을 모두 부정한다. 즉, 절대자에 대한 천지 창조설과 본래 사물이 존재했다는 주 장을 부정하면서 인연설이라는 새로운 우주론을 펼쳐 나가게 되는 것이다.
II. 불교에서 본 세계 ·자연 ·우주
1. 우주의 생성과 소멸
앞서 살핀 중국이나 인도 신화의 경우와 비교할 때, 불교의 우주론은 선명하게 설명되고 있지 않다. 팔만대장경의 방대한 가르침 속에서도 분명하게 불교적 우주론을 설명하는 경전은 많지 않다. 간혹 있다 하더라도 상당히 관념적이고 애매모호하다. 그 까닭은 불교가 이 문제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관여하기를 꺼려했기 때문이다. 석가세존은 삶의 목표를 깨달음으로 선언하였다. 그리고 우주의 기원에 대한 논의는 그 깨달음의 완성에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고 파악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러 경전들 속에 나타난 불교적 우주론을 정리하여 이해하는 도리밖에는 없다. 불교의 우주적 신화론을 나타내는 경전들로서는 <<세기경 世紀經>>,<<대방광불화엄경 大方廣佛華嚴經>> 등을 꼽을 수 있다.
불교에서는 우주의 기원을 업業으로 설명한다. 카르마 Karma라는 인도 말을 옮긴 것인데, 그것은 행위 자체, 또 행위로부터 빚어지는 갖가지 과보 果報 들을 의미하는 말이다. 불교에서는 생명있는 것들을 총칭하여 중생이라고 하는 데, 그 중생들의 생성 소멸은 업에 의하여 주도된다고 설명한다. 업 가운데 가장 근원적인 것은 무명업 無明業/Avidya 이다. 사물을 명료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늘 이기적으로 판단하게 하는 근본이다. 이 무명업으로부터 갖가지 번뇌가 생기고, 이 번뇌들의 집합이 또 다른 생존 형태를 결정짓는다. 이것을 윤회 Samsara라고 말한다.업과 윤회는 전생 前生, 금생 今生, 후생 後生의 삼생 三生을 관통하는 광폭한 힘 이다. 이 경우 무명업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를 명확히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닭과 달걀의 관계와 마찬가지다. 만약 어떤 근본이 있어서 다른 것을 생성한다는 수직적 사고를 갖는 한, 이것은 결코 설명될 수 없다. 닭과 달걀은 어느 것이 먼저 생성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닭이 있으려면 달걀이 있어야 하고, 달걀이 있으려면 닭이 있어야 한다. 그 둘은 서로의 필요성, 즉 인연에 의하여 생겨난 것일 따름이다. 따라서 무명업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느냐 하는 물음은 이미 인과론적 사고에서 벗어난 견해일 따름이다. [불교의 인과론을 생사의 윤회 유전 관계로 설명한 것을 십이연기 十二 緣起라 한다. 그러나 근본적인 무명업의 최초 생성에 관해서는 설명되지 않는다. 무명처럼 노사 老死까지 이르는 열두 단계는 다만 둥근 원의 순환 관계처럼 서로 얽혀 있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 업보의 전개가 바로 우주요, 자연이며, 삼라만상이다. 불교에서는 이 업보의 전개로서 누릴 수 있는 생명 형태를 여섯 갈래라고 설명한다.
지옥 : 가장 고통받는 삶의 형태. 아귀 : 굶주림에 시달려야 하는 생존 형태. 축생 : 짐승들의 세계, 난폭하고 이성적이지 못한 삶. 수라 : 폭력만이 존재하는 생존 형태. 인 : 인간들의 삶. 천 : 하늘나라의 신적인 존재. 이별의 아픔이 남는 세계.
위의 셋을 삼악도 三惡道, 밑의 셋을 삼선도 三善道라 하며, 통틀어 육도윤회 六道輪廻라 말한다. 태초의 우주에는 중생들의 업력 業力이 있었다. 그에 따라 허공에 바람이 불기 시작하여 풍륜 風輪이 생긴다. 이 풍륜 위에 구름이 일어나며, 또 다시 수륜 水輪이 생긴다. 이 수륜 위에 다시 바람이 일어나 금륜 金輪을 생기게 한다. 금륜 위에 수미산이 솟고, 이것을 중심으로 하여 그 주위에 일곱 산이 생긴다. 이들 산과 산 사이에 물이 고여 여덟 바다가 생기는데 수미산 부근의 일곱 산 사이에 생긴 바다를 내해 內海라고 하며, 그들과 바깥 세계와 의 사이에 생긴 바다를 外海라고 한다. 이 외해 속에 사대주 四大洲가 있어서 수미산의 동서남북에 위치 한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세계(지구)는 수미산의 남쪽섬부주 贍部洲이다. 우주의 중앙에 있는 수미산은 절반이 물에 잠겨 있고, 그 위가 지상으로 솟아 있는데, 해와 달, 별들이 수미산을 싸고 허공을 맴돈다.
중생들이 모여 사는 세계는 수미산의 남쪽 섬부주이지만, 그 중턱에서부터 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다. 중생의 경계는 크게 욕계 欲界, 색계 色界, 무색계 無色界의 삼계 三界로 나뉜다. 욕계는 욕심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즉, 소유욕으로 파탄이 빚어지고, 희로애락이 상존하는 바, 그 정도에 따라 앞 서 말한 육도 윤회가 있게 된다.욕계 다음의 세계가 색계이다. 욕심은 멸하였지 만 물질 은 남아 있다. 즉, 소멸에 따른 고통은 감수해 야 하는 세계이다. 색계 는 크게 나누면 사선천 四禪天이지만, 세분하면 십팔천 十八天이 된다. 마지막 의 세계를 무색계라고 한다. 물질마저도 버렸지만, 관념 만은 남아 있는 세계 이다. 즉, 관념적인 아픔, 사랑 등이 남아 있는 세계이다. 이도 세분하면 네 가 지로 나눌 수 있다.
다음에 이들 세계가 생성 소멸하는 시간적 단위에 대해서 살펴본다. 우주는 성 成, 주 住, 괴 壞, 공 空 의 네 가지 단계를 반복한다. 그 네 기간의 단위는 겁 劫 이다. 이 겁은 칼파 Kalpa 라는 시간 단위로서 무한한 시간 개념이다. 앞서 말한 우주와 수미산의 생성 기간을 成劫 이라고 한다. 다음에 주겁 住劫 이라는 시대가 온다. 세계는 큰 변동이 없지만 중생들의 과보에는 많은 변화가 있다. 초기의 중생들은 형색이 아름답고 빛을 내며, 하늘을 날 수도 있고 수명도 장구 한다. 그러나 좋은 음식, 맛에 탐착함으로써 차츰 몸이 더러워진다. 우선 남녀 의 성별이 생겨나고, 갖가지 이기적 욕심 때문에 싸움이 벌어진다. 할 수 없이 그것을 다스리기 위해 국왕을 뽑게 되고 형벌이 제정된다.
그러나 중생의 악업은 더욱 무거워지고, 동시에 수명이 짧아져서 마침내 10세에 머물게 된다. 삼재 三災 의 괴로움이 닥칠 때, 드디어 중생들은 반성하기 시작하여 다시 선행을 행하게 된다. 동시에 수명도 증가하여 8만 세에 이르러 풍요로운 사회가 된다. 그러나 또다시 욕심과 악업이 성해지면서 수명이 10세로 감소된다. 인간 수명은 이와 같이 증감을 반복하는데, 그 횟수는 17번이나 된다. 그 다음에 오는 시기가 괴겁 壞劫 이다. 중생들의 파멸 이 시작되는 시기인데, 그 순서는 지옥부터이다. 지하에서 차례로 파괴되어 끝내 천상이 무너진다. 그 이후 화,수,풍의 삼재가 발생하여 풍륜으로부터 색계 제 3천에 이르는 영역 이 모조리 파괴된다. 이 괴겁이 지나면 공겁 空劫 이 온다. 이것은 오직 허공 만이 존재하는 시기이다. 공겁의 다음에는 또다시 중생들의 업력에 의하여 성, 주,괴,공이 반복적으로 된다는 것이다. 즉, 우주는 끝없는 생성,소멸이 반복되 는 과정이며, 공간적으로 보면 그 중심은 수미산의 중턱이라는 것이다. 괴겁의 단게를 오탁 五濁/Panca-Kasaya 이라고도 한다. 즉, 수명뿐만이 아니고, 갖가지 의 좋지 못한 현상들이 일어난다는 뜻이다.
① 명탁 命濁 : 중생들의 평균 수명이 줄어든다. ② 겁탁 劫濁 : 자연 파괴가 가속화된다. ③ 번뇌탁 煩惱濁 : 쾌락주의, 도덕적 문란이 팽배해진다. ④ 견탁 見濁 : 고행과 형식주의가 예찬되며, 종교 집회가 대형화한다. ⑤ 중생탁 衆生濁 : 중생들의 능력이 평균치보다 저하된다.
이것이 불교적 말세 의식을 이루게 되지만, 또 다른 생성의 희망을 갖는다는 면 에서 여전히 낙천적 우주관이라고 볼 수 있다.
2. 수미산
수미산은 인도어 수메루 Sumeru의 음역이다. 전체 높이를 16만 유순이라고 했는데, 1유순을 약 7킬로미터로 본다면 112만 킬로미터에 해당한다. 그 중 절반은 바다 속에 잠겨 있고, 8만 유순 정도가 지상으로 솟아 있다. 앞서 말한 중생들의 경계를 수미산의 공간 배치대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즉, 먼저 범천 梵天(색계의 가장 아래에 위치)이 하생하고, 계속해서 욕계 육천에 해당하는 타화 자재천 他化自在天, 화락천 化樂天, 도솔천, 야마천 夜摩天이 하생하는데, 여기 까지가 수미산의 윗부분이며, 중생들의 입장에서는 하늘나라이다. 다음에 수미산의 중턱 부분인데, 이곳에는 도리천, 사왕천 四王天 등이 위치한다. 인간이 사는 곳은 그 제일 밑부분으로서 이른바 사대주 四大洲 이다.
축생의 경우에는 바다에 생겨나는데, 혹은 육지나 허공을 맴돌기도 한다. 악귀는 그 밑으로서 염마왕국이 그 본거지이나 역시 떠돌아다닌다. 그 밑이 지옥취로서, 지옥을 맴도는 중생들이다. 그 밖에도 아수라가 있는데, 이들은 일정한 거처가 없다. 그저 수미산 주변을 맴돌면서 천상의 도리천과 항상 싸움을 일으킨다. 이렇게 해서 육도의 중생들이 각기 수미산 기슭을 근거로 하여 태어나고 사라지는데, 그 전체의 기간은 20소겁 小劫쯤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은 이와 같은 세계를 초월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하늘나라에 태어난다는 관념은 고대의 인도인들이나 불교인들에게 있어서는 고통스러운 생명의 연장일 뿐이라는 상념에 젓게 하는 것이다. 즉, 윤회의 가치관을 가진 불교인들에게 있어서는 태어남의 사실 자 체가 고통으로 인식되는 독특한 내세관을 갖게 한다.
3. 삼계
삼게 三界는 고뇌다. 성난 불과 같이, 골짜기의 메아리, 환각의 물거품과 같으니라. 여래는 삼계를 초월하는 열반의 법을 설하노라(<<방광장엄경 方廣莊嚴經>> 중에서 필자 초역). 우주를 삼계로 인식하는 것은 고대 인도인들의 공통된 사고 방식이다. 즉, 우주를 하늘,허공, 대지의 삼계로 구분하고, 그 각각의 세계에 신이 살고 있다고 믿은 것이다. 불교 또한 이와 같은 사고를 답습하지만, 그 개념은 판이하다. 우선 신에 대한 불교의 입장은 매우 비판적이다. 인도 신화에서의 신은 서양의 경우아 마찬가지로 절대자이면서 동시에 인격적이다. 즉, 신성 神性과 인간성을 공유하는 신적 존재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예컨대 인도의 신은 불사不死, 영원의 존재이다. 또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며, 인간들의 찬양에 귀기울인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신적인 존재 또한 육도 윤회속에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보다는 행복하지만, 그 역시 죽음의 고통을 피할 길 없는 불 완전한 존재로 보고 있다. 따라서 하늘나라 또한 욕계 육천 欲界六天의 하나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신이 거의 모두 인도 신화에 연원을 갖고 있 음을 분명하다. 불교의 호법신인 제석천 帝釋天은 인드라 Indra의 변형이다.
인도 신화에서 뇌성벽력의 주재자인 인드라가 불교로 수용되면서 선신 善神이 된 다. 또 관세음보살은 루드라 Rudra의 변형이다. 원래 태풍의 신이었으나 나중에 가축 증식의 신격으로 바뀌었다. 루드라가 불교에서는 자비의 화신으로 변형된 것이다. 심지어는 삼신불 三身佛의 주체인 법신불 法身佛/Vairocana 또한 우파니샤드에 나오는 변자재신 /Virocana의 변형이다. 불교는 이와 같이 인도의 신격을 계승하면서도 독특한 자기화의 과정을 겪으면 서도 모든 신을 수용하는 것이다.
이 삼계에 대한 소박한 믿음도 불교 고유의 것이라기보다는 인도적 연원을 답습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이 삼계는 허공, 하늘,대지 따위의 즉 물적 구분이 아니라 매우 섬세한 철학적 구분이다. 욕계 육천 가운데 가장 낮은 것이 사왕천이고, 가장 높은 것은 타화자재천이다. 그런데 이 욕심의 세계를 섹스와 관련하여 설명하면 인간 의식의 단계를 어느 정도 선명하게 짐작할 수 있다. 즉, 사왕천에서는 남녀가 서로를 소유해야만 만족한다. 성교라는 구체적 행위를 통해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위의 하늘인 야마천계에서는 포옹 정도로 만족한다. 그 이상의 구체적 행위가 없이도 서로의 사랑이 확인된다. 그 위의 하늘은 도솔천인데, 이곳에서는 서로가 손을 잡는 행위로 만족한다. 그위의 하늘이 화락천인데, 멀리서 마주보면서 만족하는 세계이다. 마지막의 타화자재천에서는 영상을 그리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세계이다. 여기까 지는 욕계의 사랑이지만, 색계,무색계로 올라갈 때 그 승화 昇華의 단계를 짐작 할 수 있다. 욕계가 소유의 사랑이었다면 색계는 소유하지 않는, 철저한 관념의 사랑이다. 반면 무색계는 관념마저 초월하는 사랑이다. 흔히 사랑의 단계를 에로스니, 아가페니 하는 구분으로 이해하지만, 이 삼계 속에 나타나는 불교적 사랑관은 퍽 흥미로운 대비라고 생각한다.
4. 삼천대천 세계
성,주,괴,공을 되풀이하는 세계를 우리는 지구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주 속에는 실로 무한한 세계가 상존한다. 서로 다른 1천 세계를 합해서 1소천 小千 세계라고 한다. 이 1소천 세계를 1000배 한 것을 1중천 中千 세계라고 한다. 이 1중천 세게를 다시 1000배 한것을 1대천 大千 세계라고 한다. 이 소천,중천,대천 세계를 통틀어서 삼천대천 三千大千 세계라고 한다. 이것을 한 부처님이 통솔하는 세계라고 보고, 또 다시 백천만억 부처님이라는 표현을 하기 때문에 실로 세계를 무량,무변하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마치 허공의 먼지처럼, 갠지스 강의 모래알 수처럼, 광대 무변한 세계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의 세계관을 말할 때, 우리는 무한의 세계관이라는 단서를 붙이지 않을 수 없다.
사다카타 아키라는 이 소천을 은하계에 비유했는데, 그것은 적절한 대비이다. 1000의 1000배를 중천 세계로 보고, 그 100만의 세계에 대한 1000배, 즉 10억의 세계를 대천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이 관념을 우주 속에 있는 모든 생명들의 세계로 환원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60억 가까운 인간들이 모여 살지만, 서로 얼굴을 맞대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것은 생활의 터전, 언어의 장벽, 즉 서로의 세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또 짐승, 미생물의 세계로까지 생각을 확대시켜 나간다면, 가히 그 세계는 사량 思量할 수 없는 무한으로 치닫고 만다. 삼천대천 세계는 바로 그 점을 상징하고 있으며, 그 은유를 갖가지 방편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III. 극락과 지옥
1. 팔열지옥 팔한지옥
지옥은 나라카 Naraka의 의역이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구사론 俱舍論>>이라 는 논서에 이에 대한 설명이 있다. 지옥은 지하에 있는 것으로 묘사되며 극악한 죄를 저지른 이들이 고통을 받는 곳이라고 설명된다. 가장 고통받는 곳을 무간 지옥 Avici 이라고 하며, 그 위로 팔열지옥 八熱地獄이 있다.
이들 지옥에서 당하는 고통의 질에 관해서는 지면 관계상 생략한다. 주로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잔옥한 방법에 의해 고통을 받는다고 설명된다. 더욱 기막힌 점은 고통의 끝이 결코 죽음이 아니라는 안식 安息 일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이곳에서는 또 다시 태어나고 고통을 받는 일이 무수히 반복된다는 것이다. 또 이들 지옥에 떨어지는 업을 짓는 이들에 대해서도 상세한 언급이 있으나 이 곳에서는 생략한다. [보다 상세한 논급으로는 E.Conze 編, 졸역, <<불교의 성 전>>(고려원,1985)및 대장경 가운데 <<정법념처경 正法念處經>>, 원신 源信의 <<왕생요집 往生要集>>등을 참조할 것.]
이들 지옥은 모두 여덟이지만, 한 지옥마다 네 개의 별도로 열려진 문을 갖고 있다. 이 하나의 문마다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부 副 지옥이 있기 때문에 결국 여덟 지옥은 128개의 부지옥을 가진다는 말이다.
① 당외 唐畏 부지옥 ② 시분 屍糞 부지옥 ③ 봉인 鋒刃 부지옥 ④ 열하 熱河 부지옥
① 에서는 뜨거운 재 속을 걷게 되고, ② 에서는 시체와 똥의 수렁에 빠지며 구더기에게 골수가 빨리게 된다. ③ 에서는 칼날이 무성한 길을 걸으면서 온몸이 찢기우고, ④ 는 끓어오르는 탕 속에 던져진다.
[Atata,Hahava,Huhuva 등은 모두 의성어이다. 즉, 인도어에서 고통받거 나, 괴로움 때문에 내는 비명, 신음 소리를 지옥의 이름으로 설정한 것이다. 첫 번째의 Arbuda는 원래 천연두란 의미이고, 두번째의 Nirabuda는 부스럼이 생겨 서 온 몸이 짓무리는 일종의 문둥병 같은 병을 가리킨다. 이 모든 고통들이 추위로서 생긴다는 의미에서, 이 팔한지옥은 그대로 병명이나 고통 소리를 명칭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불교에서 말하는 지오근 팔열지옥과 128 개의 부지옥, 그리고 팔한지옥을 합쳐 도합 144지옥이 된다. 그러나 앞서 말한 <<구사론>> 에서는 이것에 덧붙여서 외로운 지옥을 말하고 있다. 이 지옥에 관해서는 구체적인 설명이 없지만, 강,산,들,지하 등에 산재해 있다고 하였다. 짐작건데 다른 이와 함께 겪는 고통이 아니라, 혼자만이 당해야 하는 각종 압박이나 스트레스 등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듯하다. 이것을 합할 경우에는 모두 145개의 지옥이 되는 셈이다.
2. 정토의 세계
불교에서 말하는 이상 세계는 극락 혹은 정토 淨土로 불린다. 가장 기쁜 곳이라는 의미에서 수카바티 Sukhavati, 즉 극락이라고 한다. 이에 관한 언급으로 << 아미타경 >> 등이 있는데, 대체로 그 세계를 묘사하면 다음과 같다. 극락에는 일곱 겹의 난간, 구슬로 장식된 그물, 일곱 겹의 가로수가 있다. 그 곳의 중앙에는 연못이 있는데, 금,은,유리,수정이 네 가지 보물로 장식되어 있다. 하늘에서는 음악 소리가 들려오고, 하루 종일 만다라꽃 Mandarava 이 하늘 거리며 대지에 흩날릴 때면 황금빛 지면에 수북이 쌓인다. 이 정토의 중생들은 매일 아침 옷을 단정하게 입고, 꽃대바구니에 이 꽃들을 담아서 다른 세계의 10 만억 부처님이 계시는 곳으로 가서 공양한다.
식사는 하루 한 끼인데, 식사 후에는 산책을 즐긴다. 또 극락에는 아름다운 새들이 무수한데, 그 가운데서도 가릉빈가 迦陵頻伽/Kalavinka 가 가장 아름답다. 이 새들의 소리는 모두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데, 중생들은 이 소리를 듣고 부처님과 그 가르침을 생각하게 된다. 또 산들바람이 불어오면, 네 가지 보배로 장식된 가로수나 구슬로 장식된 그물들이 기묘한 소리를 내는데, 그것은 참 아름다운 교향곡과도 같다. 이 나라에는 아미타 Amita 라고 부르는 부처님이 계신다. 그는 한량 없는 목숨을 지닌 분으로서 언제나 이곳을 염원하는 이들의 지주 支柱가 된다. 또 그는 협시보살로서 관세음보살,대세지보살이 계신다. 만약 이 나라에 태어나고자 한다면 염불만이 첩경이다. 즉, 지심으로 나무아미타불 을 염하게 되면 임종시에 아미타불이 그를 영접하여 이 정토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정토왕생의 염불비원 念佛悲願 이라고 한다. 정토사상은 대승불교의 중,후기에 생겨난 사상이다. 즉, 초기의 불교에서는 지옥에 대한 설명은 장황했지만 내세관은 괄목한 만한 것이 적었다. 대승불교로 넘어오면서 확고한 내세관이 나타나는 바 그것이 바로 정토사상이다. 정토 신앙은 민중적 보편성과 함께 왕생의 인연이 비교적 단순하다는 면에서 엄청난 호응을 얻는다. 우리 나라의 경우에도 신라의 삼국통일 직후부터 유행하였고, 근자에 이르기까지 가장 폭넓은 지지를 얻고 있는 사상 형태이다. 그러나 고려 말엽에 선종이 유행하면서 이 정토에 대한 관념은 조금씩 변형된다.
<<유마경>>의 가름침대로 마음이 맑아야 정토가 맑아진다.는 대승적 해석이 유행하게 된다. 선가에서는 이 정토를 어떤 실재적이고, 구상적인 세계로 파악하는 일을 거부한다. 심저이 육조혜능은 십 만 팔천 리를 지나야 정토가 있다는 경전의 가르침을 우리 몸 안에 있는 십악 팔사라고까지 설명한다. 즉, 정토에 왕생하려면 염불의 공덕 때문이 아니라 마음을 맑게 갖는 수련 생활이 필요함을 역설하기에 이른다. 따라서 정토사상은 고도의 철학성 을 갖춘 자력과 타력의 조화로서 이해되기도 한다. 단순히 서방에 왕생하기를 기원하는 타력 신앙의 자세가 아니라, 내 몸을 닦는 자력 의지가 선행해야 한다는 논리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이 극락과 지옥에 대한 논의는 거 의 대부분의 불교 사상가들에 의해서 상징과 은유로 이해되어 왔다. 즉, 민중 들의 도덕성 제고를 위한 시청각적 의미가 강하다고 인식되었던 것이다.
IV. 남기는 말
신화의 세계는 상징 symbol'이다. 특히 종교의 우주관에서는 절제된 은유 속에 담긴 의미를 해석해내는 일 이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불교는 지금부터 2600여 년 전의 가르침이다. 가학적 지식이나 인지의 발달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격세지감이 든다. 따라서 불교적 우주관을 절대시하고 권위를 부여하는 일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오히려 그 속에 담긴 상징성에 천착하는 자세가 필요하리라고 본다. 불교의 우주관은 석가를 중심으로 한 고대 불교인들의 우주의 상상력이다. 물론 그 가운데는 다소 황당무계한 내용도 있고, 놀랄 만큼 과학적 토대가 갖추어진 상황 설명도 있다. 그러나 전체를 흐르는 맥락은 업과 윤회라는 등식이다. 또 이 윤회가 영겁회귀로서 반복된다는 주장이다.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우주를 주재하는 힘의 근원을 결코 인격적으로 파악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불교적 용어로는 다르마 Dharma 가 바로 그것이다. 섭리, 질서, 원리, 진리 등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다르마야 말로 우주를 관통하는 근원적 힘이다. 그러나 다르마는 비인격적일 뿐 아니라 초인격적이다. 이 궁극적 원천을 불교에서는 일심,진여, 법계, 여여 등으로 묘사하고 있다. 우주의 기원과 소멸에 대한 불교의 견해는 매우 낙관적이다. 불교에도 종말론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정법, 상법, 말법 등의 시대 구분이 불교적 종말론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종말을 영원한 파멸로 이해하지 않는다. 종말의 끝은 새로운 출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말법 중생들에 대한 경종의 의미만이 부여될 뿐 위기 의식으로까지 발전할 개연성은 전혀 없는 것이다. 지면 관계상 대승불교의 법계론에 관해서 상세하게 언급하지 못했다. 또 불교의 우주관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중국 신화, 특히 유가의 관점에 자세하게 서술 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기회 있는 대로 보정 발표할 예정이다.
계간 과학사상 제 10호 1994년 가을호 Written by 정병조(동국대 교수,불교철학)
* 삼계(三界) 28천(天)
부파불교(部派佛敎)
1. 불멸이후 불교 교단의 발전
부처님께서 입멸하신 직후의 불교교단은 중인도에 퍼져 있던 지방교단에 불과했다. 부처님의 탄생지인 룸비니와 입멸지인 구시나가라는 중인도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깨달음을 얻은 붓다가야는 중인도와 남부에 있으며, 처음으로 법을 설한 초전법륜지인 사르나트는 중인도의 서부에 있다. 이 네 곳은 '사대영장(四大靈場)'으로서, 불멸 후에는 부처님을 사모하는 신자들의 순례참배지로서 성황을 이루었다. 초기의 불교도들이 생각한 중국(中國)도 중인도를 중심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불멸 후에는 서방 및 서남방으로 전도가 진행되고 불교교단은 서서히 이 두 방면으로 발전했다. 이것은 중인도의 남방은 빈댜 산맥의 고원에 의해 가로막혀 있고 동방은 고열미개의 땅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특히 먼저 서남쪽으로 전도가 진행되었다. 서방에 불교가 발전한 것은 그보다 조금 늦었다. 그것은 서방은 바라문교의 세력이 강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쇼카왕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불교교단은 인도 각지에 진출, 정착해 가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웃자인을 중심으로 하는 서인도의 불교교단은 튼튼한 기반을 구축하고 있었다. 부파분열이 일어난 후에도 상좌부계의 분별부가 강력하여 이 계통의 불교가 이 시대를 전후하여 멀리 실론까지 교세를 확장하였다. 이것이 남방상좌부라는 부파로 정착하여 현재의 남방불교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그들이 서인도의 방언을 기초로 하여 만든 성전어가 팔리어로서, 남방상좌부의 문헌은 팔리어로 전승되고 있다. 이에 대해 아쇼카왕의 전후에 마투라에서 서북인도의 간다라, 카슈미르에 걸쳐서도 불교의 교세가 확장되었다. 이곳의 중심이 되었던 교단은 같은 상좌부 계통의 다른 부파인 설일체유부였으며, 그들은 후에 산스크리트어로 경전을 편찬하였다. 대승불교가 중앙아시아, 중국으로 전파되면서 그들의 문헌은 주로 중국에 소개되었는데 이것을 통칭 '북전(北傳)'이라고 하며, 반대로 남방상좌부의 전승을 '남전(南傳)'이라고 한다.
2. 불교교단의 분열
부처님은 자신의 입멸 이후 교단이 의지해야 할 것으로 법을 내세웠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法)이라는 것은 45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서 행해졌고, 또 그 내용도 논리적으로 정리된 것이 아니라 그 상대에 따라 달라져 복잡미묘한 것이었다. 나아가 당시의 가르침은 문자에 의한 체계적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의 구전(口傳)에 의한 암송으로서 전달되었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불멸이후 불교 교단은 곧 부처님의 교설을 일정한 형태로 보존하고자 공식적인 합의를 거치기로 하였다. 그 결과 제 1 결집이 이루어졌다.
(1) 제 1 결집 제 1 결집은 왕사성결집이라고도 하는데, 부처님께서 입멸한 해에 왕사성에서 500명의 비구들이 모여서 행한 것이다. 결집이란 교법의 합송(合誦)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비구들이 집회에서 편집된 성전을 함께 외움으로써 그것을 불설로 승인하는 것이었다. 1차 결집에서는 마하가섭이 회의를 소집하고 사회를 보았으며, 우팔리가 율(律)을, 아난다가 경(經)을 암송하였다. 당시 우팔리는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서도 율에, 그리고 아난다는 경에 가장 뛰어났었다고 한다. 이 모임에 참석했던 모든 비구들은 전원일치로 우팔리와 아난다의 암송 내용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이었다고 승인하였다. 이렇게 하여 율과 경의 내용이 확정되어 후대에 전해지게 되었다. 제 1 결집에 대해서는 주의해야 할 다음과 같은 특징적인 사실이 있다. 첫째, 이 결집은 출가승단의 사람들, 특히 그 대표라 할 만한 상좌비구들이 개최한 것으로 재가신도들은 여기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이 사실은 결집된 법과 율의 성격을 규정하는데 커다란 의의를 갖는다. 훗날의 대승경전 출현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둘째, 이 결집은 500명의 아라한들이 모인 집회에서 '합의'에 의해 이루어졌다. 부처님은 생전에 교단을 통제할 후계자를 지목하지 않았으며, 승가의 조직도 서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멸이후 교단이 혼란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남기신 가르침의 수집 확인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승가에 이러한 합의의 관습이 성립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세째, 법과 율은 이때 합송(合誦)된 것이며 그후에도 오랫동안 입에 의해 전승되었다.
이것이 문자로 씌어지게 된것은 적어도 200년 뒤의 일이다. 네째, 이러한 결집의 시도는 당시 불교승가 전체의 의향이 반영된 것은 아니며 단순히 마하가섭을 중심으로 한 일파, 혹은 마가다 일대에 한정된 지방적인 회합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있다.
(2) 근본분열(根本分裂)
불멸 후 100년 경, 제 2 결집이 이루어진다. 이 시기에 불교교단은 중인도의 테두리를 넘어 서방으로 확대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 바이샬리의 비구들이 정법(淨法, 계율에 어긋나지 않음. 합법적인 일)이라 하여 시행하고 있는 10가지 문제에 대해 그것에 반대하는 사람들과의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다. 서인도 출신의 야샤스라는 비구가 마가다지방의 바이샬리로 갔을 때 그는 비구들이 쇠로 만든 발우에 물을 채우고 상가를 위한다고 하면서 금전, 은전을 집어넣는 것을 보고 경악하였다. 본래 무일물(無一物)을 표방하는 비구는 금전을 받는 것은 물론, 손을 대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다. 유행편력의 생활에서 승원생활로 변화되었다고는 하지만, 당시의 서인도의 비구들에게 금전을 받는 것은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관행이었다. 야샤스는 그것이 비법(非法)임을 지적하였으나 바이 샬리의 비구들로부터 빈축을 사게되어, 서방의 비구들에게 응원을 청하였다. 야샤스는 이 비구들의 도움을 받아 금전을 받는 행위 등을 포함한 여러가지 일에 대해 동, 서의 불교교단이 대화할 기회를 마련하였다. 양쪽에서 각각 4명씩 판정인을 내세워 심의를 하였는데, 결국 이 자리에 모인 700명의 장로들은 이 문제를 포함한 십사(十事)를 비법으로 단정하였다.여기에서 문제가 되었던 10사는 각 율전에 따라 다른 점이 있으나, 대체로 다음과 같다.
1. 뿔로 만든 그릇에 소금을 축적하는 관행(角鹽淨) 2. 수행자는 정오가 지나면 식사해서는 안되는데, 정오를 지나 해 그림자가 손가락 두 마디 정도를 지난 시간까지 식사시간을 연장하는 관행(二指淨) 3. 다른 부락(에 가서 음식을 취하는 관행(他聚落淨) 4. 동일한 교구 안의 다른 주처에서 포살을 따로이 행하는 관행(住處淨) 5. 일을 결정함에 우연히 비구가 전원 모이지 않아, 먼저 참석한 사람들로 결정을 하고 뒤에 늦게 온 사람들의 동의를 예상하여 정족수가 부족하여 도 의결을 행하는 관행(隨意行) 6. 석존과 아사리의 습관에 따르는 관행(久住淨) 7. 식사 후에도 응고하지 않은 우유를 마시는 관행 (生和合淨) 8. 나무나 그 열매의 즙을 발효시켜 아직 알콜이 되지 않은 음료를 마시는 관행 (飮門樓伽酒淨) 9. 테두리에 장식이 없는 방석의 크기에 관한 관행 (無緣坐具淨) 10. 금,은을 받는 관행(金銀淨)
이상의 십사는 그 일이 크건 작건 실제적 필요성이 대두되어 당시의 교단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생겼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열번째의 금전을 받을 것인가의 여부가 가장 중요한 테마였을 것이다. 이러한 점은 바이샬리의 논쟁을 기록한 여러 율을 검토하여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이는 불교교단의 발전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의를갖는다. 10사의 논쟁은 야사가 서방의 비구들에게 응원을 요청했기 때문에 동서비구의 싸움이 되었던 것 같지만, 동쪽의 비구들 중에도 10사에 반대한 비구가 있었다. 따라서 이것은 계율을 융통성있게 지키고 예외를 인정하려고 하는 관용파(지법자,持法者)의 비구와 끝까지 계율을 엄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엄격파(지율자,持律者) 비구들간의 대립이었다고 볼수 있다. 불타가 입멸한 지 100년 쯤 되면 상가의 확대와 함께 비구의 수도 늘어나고 사고방식의 차이도 생기기 때문에, 교단에 이러한 대립이 일어나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 회의에서는 엄격파의 주장이 전면적으로 통과된 듯 한데, 이것은 장로비구들 중에서 엄격파가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장로비구가 대표로 선발되었기 때문에 10사는 모두 '비사(非事)'로 판정된 것이다. 그러나 이 결정에 승복하지 않는 비구들이 많았던 것 같다. 그 때문에 이것이 교단분열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즉, 이 결정에 승복하지 않는 비구들이 모여 대중부를 만들었기 때문에 이로써 교단은 상좌부와 대중부로 분열했다고 한다. 이것을 '근본분열(根本分裂)'이라고 한다. 대중부에는 사람의 수가 많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이 명칭에 관용파 비구들의 수가 많았다는 사실이 암시되어 있다. 북방불교에 전해진 자료(이부종륜론)에 따르면 근본분열의 원인은 대천이라는 비구가 아라한의 경지에 관하여 밝힌 다섯 가지 견해에 대한 대립(大天의 五事)에 의한 것이라 한다.
다섯 가지 견해는 다음과 같다.
1. 여소유(余所有) ; 천마에게 유혹당할 때는 아라한일지라도 더러움이 새어나갈 때가 있다. 2. 무지(無知) ; 아라한에게도 무지는 있다. 3. 유예(猶豫) ; 아라한에게도 의문이나 의혹은 남아있다 4. 타령입(他令入) ; 자신이 아라한이 되었다는 것을 타인이 알려줌으로써 아는 경우가 있다. 5. 도인성고기(道因聲故起) ; 도는 소리에 의해 일어난다.
이 五事는 상좌부 교단에서 최고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성자인 아라한을 비방한 것이다. 이 주장에 의해 교단의 화합이 위협받자 당시의 왕이 중재를 위해 집회를 열어주었다. 이때 표결에 의해 다수를 차지한 대천의 무리는 스스로 큰 집단임을 의미하는 대중부라고 자파를 명명하였고, 반면 소수파인 보수적 장로들은 기존의 입장을 고수하기로 공포하고 스스로를 상좌부라 칭하였다고 한다.아무튼 근본분열에 의해 한번 갈라진 교단은 다시 그 내부에서 분열을 계속하여 20개의 부파로 분립하게 된다. 이를 지말분열(枝末分裂)이라 하는데 당시의 분파를 남, 북 양전이 전하는 내용에 따라 도식화해보면 다음과 같다.
이렇게 원시교단이 상좌, 대중의 두 부파로 분열한 이후의 전통적인 교단의 불교를 부파불교라 한다.
3. 부파불교의 성격
불교교단의 정계(正系)는 원시교단을 계승하는 부파교단이었다. 즉 부처님의 직제자인 대가섭이나 아난 등에 의해 수지된 불교는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계승되어 부파교단으로 발전한 것이다. 따라서 부파교단의 불교는 제자의 불교, 배우는 입장의 불교이며 남에게 가르치는 입장의 불교는 아니다. 이러한 수동적인 불교였기 때문에 대승교도로부터 성문승(聲聞乘)이라 불렸다. 성문이란 부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 즉, 제자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부파불교 교리의 특징은 출가주의라는 점이다. 출가하여 비구가 되고 계율을 엄격하게 지키면서 수행한다. 재가와 출가의 구별을 엄격히 하고, 출가를 전제로 하여 교리나 수행형태를 조직하고 있다. 그리고 부파불교는 은둔적인 승원불교이다. 그들은 승원 깊숙이 숨어서 금욕생활을 하고 학문과 수행에 전념한다. 따라서 가두의 불교는 아니다. 타인의 구제보다는 먼저 자기의 수행의 완성을 목표로 하는 불교이다. 그 때문에 대승교도로부터 소승(小乘)이라고 불리고 천시되었다. 부파의 출가교단은 국왕이나 왕비 또는 대상인 등의 귀의와 경제적 지원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카스트제도를 엄격히 지키는 바라문교는 타국의 이민족이나 다른 계급과 자유로이 교제해야만 했던 상인들과 맞지 않았다. 이처럼 국왕이나 장자들의 원조에 의해 승단은 생활 걱정없이 출세간주의를 관철하여 연구와 수행에 주력할수 있었으며, 이로써 분석적이고 치밀한 불교교리 즉, 아비달마 불교가 성립할수 있게된 것이다. 이상에서 본 부파불교의 특성은 그 단점과 한계로만 보여지기 십상이다. 사실상 아비달마불교는 종종 불교의 번쇄철학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구사론을 비롯한 아비달마
논서를 읽을 때 우리는 지나치게 형식적이며 지나치게 사소한 문제에 관한 논의를 접하게 된다. 그 무수한 술어의 나열을 접하게 되면, 그들의 사상적 노작은 우리들에게는 전혀 무의미하고 비현실적이며 한가한 갈등으로 생각될 것이다. 번뇌를 끊고 행복을 추구한다는 부처님의 본지와는 한참 떨어진 것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사실상 아비달마는 아가마 경전의 어구에 집착하는 경우도 있으며, 전통적,보수적이거나 분석적, 형식적인 해석에 치우쳐 사상의 청신함과 발랄함을 잃어버린 점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기설법(對機說法, 방편설법)에 의해 단편적, 비체계적으로 설해진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서 불교의 기초적인 관념을 추출하고 이를 조직하여 장대한 사상적 건축물을 세운 것은 확실히 아비달마 논사의 공적이었다. 그들의 이러한 업적이 없었다면 후의 중관학설, 유가유식설 등의 대승불교철학의 출현은 불가능하였거나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4. 삼장의 성립
불교성전은 율과 경, 그리고 논(論)이라는 삼장(三藏)으로 구분된다. 삼장 중에서경과 율은 이미 오래 전에 성립하였고 논은 비교적 후세에 성립한 것이다. 부파불교시대의 각 부파는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법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에 착수하였는데, 이것을 아비달마(阿毘達磨, Abhidharma) 교학이라 한다. 그것은 '법(dharma)에 대한(abhi) 연구'라는 뜻이다. 이러한 연구는 물론 초기불교 당시에도 부분적으로 행해지고 있었지만, 부파의 성립으로 더욱 특색있게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각 부파는 자신들의 연구 성과를 결집하여 간직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문헌을 아비달마 문헌, 또는 논(論)이라고 부른다.모든 (유력한) 부파는 독자적인 아비달마를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종래의 경과 율에 논을 하나 더하여 삼장의 문헌을 갖추기에 이른다. 이런 삼장의 완성은 부파불교시대의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오늘날 부파불교시대의 부파의 삼장은 거의 산일되어버리고 현재 그 삼장이 비교적 완벽하게 남아있는 것은 팔리어로 된 실론 상좌부 계통의 삼장과, 범어에서부터 한역되어 보존되고 있는 설일체유부 계통의 삼장이다. 그러므로 아비달마교학의 내용을 아는 데는 이 팔리삼장과 한역삼장이 주요 자료가 된다.아비달마는 부파 중에서 가장 강대하였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서 현저하게 발달하였다. 유부에는 7론이 전해진다. 즉, 집이문족론(集異門足論) 20권, 법온족론(法蘊足論) 12권, 시설론(施設論) 7권, 식신족론(識身足論) 16권, 계신족론(界身足論) 3권, 품류족론(品類足論) 18권, 아비달마발지론(阿毘達磨發智論) 20권, 그 이역(異譯)인 아비담팔건도론 30권이 있다. 앞의 여섯을 육족론(六足論), 뒤의 발지론을 신론(身論)이라고도 한다. 스리랑카에 대한 불교전도는 아쇼카왕 치세시에 마힌다에 의해 행해졌다고 한다. 스리랑카의 왕 데바남피야 팃사는 마힌다에 귀의하여 수도 아누라다푸라에 대사(大寺)를 세웠다. 이것이 스리랑카 상좌부의 기원이다. 그후 2백여년이 지난 후 대승의 교학까지도 겸하여 배우는 무외산사(無畏山寺)가 건립되어 양파가 서로 논쟁을 했으나, 결국은 대사파의 전등(傳燈)이 유지되었다. 오늘날 버마, 타이, 캄보디아, 라오스 등에 전하고 있는 남방불교는 대사부 계통에 속한다.스리랑카의 상좌부에서도 7론이 작성되었는데 그 내용은 법집론(法集論), 분별론(分別論), 논사(論事), 인시설론(人施設論), 계론(界論), 쌍론(雙論), 발취론(發趣論)이다. 위의 두 부파 이외의 논장으로서는 사리불아비담론(舍利弗阿毘曇論, 법장부) 30권, 삼미저부론(三彌底部論, 정량부) 3권, 성실론(成實論, 경량부) 16권이 있다. 유부에 있어서는 육족론이나 발지론 이후 이들 논서에 대한 주석적 연구가 성행하였다. 이들 200년에 걸친 주석가(毘婆沙師)의 아비달마 연구를 집대성한 것이 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毘達磨大毘婆沙論) 200권이다. 이 논서의 성립으로 유부의 교학은 거의 확정되었지만 본론이 너무 방대하기에 그 교의를 적요한 강요서가 저술되었고, 이들 논서를 기초로 하여 유명한 세친(世親)의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이 성립되었다. 스리랑카에서도 1-2세기 경 많은 논사가 배출되어 주석서를 지었는 바, 붓다고사(佛音)의 청정도론(淸淨道論)이 가장 유명하다.
5. 부파불교의 교학체계
아비달마의 전개과정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3단계가 상정되고 있다. 그 첫 단계는 아가마 경전 자체 안에 이미 교설을 정리, 조직하거나 해설, 주석하는 소위 '아비달마적 경향'이 나타나 있는 단계이다. 둘째는 이 경향이 발전하여 경전 외에 아비달마로 불리는 별개의 문헌이 독립, 발전되어 갔던 시기이다. 그리고 셋째는 그 결과 아비달마는 단순히 아가마의 내용을 해석,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기초로 하여 장대한 교의체계를 수립했던 시기이다. 아비달마 교학은 아가마 교학을 분석하고, 종합함으로써 그 체계를 이루어 갔다. 분석적 방법이란 아가마의 가르침 중 중요한 것을 선택하여 하나 하나 그 의미를 상세히 주석하고 해설하는 것이다. 종합적 방법이란 아가마에 수록되어 있는 갖가지 교설을 정리, 안배하는 것을 말한다. 아가마를 종합하는 수속으로는 수와 관계된 교설을 그 수에 따라 一法, 二法, 三法과 같은 순서로 병렬시키는 방법(소위 '法數'에 의한 정리)이며, 또 하나는 가르침의 내용의 주제에 따라 유별하여 배열하는 방법(소위 '相應'에 의한 정리)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독립한 아비달마는 강력하게 발전하여 새로운 문헌들을 성립시켰다. 부파불교에 있어서의 논장의 체계가 공고히 된 것은 4세기경이 되어서이다. 이들 부파불교들은 대승불교가 출현하여 그 세력을 확산하는 동안에도 여전히 당당하게 존재하면서 자신의 교학체계들을 발전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4세기를 지나면서 부파불교는 그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지적 완성에 도달하여 그 이후에도 인도에서 무려 800여년은 더 존속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의 큰 진전은 없었다.실론에서 상좌부가 충실히 불교의 전통을 고수하고 있던 방면, 인도본토에서는 상좌부의 맥이 끊어지고 상좌부의 일분파로서 서북부의 간다라와 카쉬미르지방에서 성행하던 설일체유부가 사상적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4세기 경 바수반두는 설일체유부의 교의체계를 간결하게 요약한 논서인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명실상부 부파불교의 교학을 대표하는 명저로서 인도에서 뿐만 아니라 중국, 한국에서도 부파교학의 입문서로 연구되었다. 그 내용은 계(界), 근(根), 세간(世間), 업(業), 수면(睡眠), 현성(賢聖), 지(智), 정(定), 파아(破我)의 9품으로 구성되어 있고, 발지론의 입장을 답습하면서 아비담심론에 따라 수정을 가했다. 또 유부 교의를 체계화함에 있어서 비바사사(주석가)의 설을 고집하지 않고, 다른 부파 특히 경량부설까지도 참조하여 비판적 태도로 저술한 점에 특색이 있다. '구사론'이 불교학의 기초이론으로써 오랫동안 평가되어온 것은 그 교의가 정연한 체계로 논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특기할 학설은 제법(諸法) 즉, 모든 존재를 5위(位) 75법(法)으로 포괄하려는 논리이다. 75법이란 존재를 분석하여 얻은 요소들의 전체를 가리키며, 이 존재는 색(色), 심(心), 심소(心所), 심불상응행(心不相應行), 무위(無爲)의 다섯 가지 범주에 포괄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구사론은 전 존재를 법에 의해서 분류하였는데 그 법을 존재요소로서 실체시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예를 들어 푸른 병은 깨어지면 없어진다. 그러나 그 청색이라고 하는 것은 병이 깨어져도 존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을 자성(自性)을 갖는 것이라고 하며 법(法)이라고 부른다. 그리하여 유부교학에서는 실재론적 경향을 중시하게 되어 삼세실유 법체항유(三世實有 法體恒有 ; 법의 실체는 과거, 현재, 미래에 있어서 항상 실재한다)를 주장하게 되었고, 이러한 법의 실체화는 후에 대승불교의 용수에 와서 크게 비판받게 되었다. 부파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강력했고, 또한 대승불교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유부의 교설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유부의 유(有)의 철학의 이해 없이는 그 안티테제로서의 반야(般若)의 공(空)의 사상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6. 설일체유부의 교학
부파의 여러 학파 가운데 아마 가장 많은 아비다르마 논서를 낳고 그리고 학문적으로 가장 강력한 부파로 성장한 것이 서북인도에 세력을 뻗치고 있던 사르바아스티바아디인 파이다. 이 학파의 이름은 '모든 것이 있다고 주장하는 자'를 의미하고 보통 한역명으로는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혹은 줄여서 유부라고 알려지고 있다. 설일체유부는 상좌부의 계통에 속한다. 비교적 일찍 상좌부에서 지말분열해서 독립했다. 이 학파의 철학체계는 장기간에 걸쳐 여러가지 발전을 거쳐서 완성된 것이지마는 '모든 것이 있다'라고 하는 이 학파의 독특한 기본적 입장은 학파 분립의 당초부터 이미 구축되어 있었다.
(1) 유위(有爲)와 무위(無爲)
모든 존재는 변화한다는 무상(無常)의 가르침은 부처님의 가장 기본적인 교설이다. 일체의 존재는 모두 시간과 함께 변화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무상한 것을 있는 그대로 무상하다고 보려하지 않는다. 그러한 것에 대해 당치않은 욕망을 품고 집착하며 괴로워한다. 무상한 것을 무상하다고 알고, 그리고 거기에 대해 집착을 떠나라고 하는 것이 불교의 기본적 교의이며 올바른 지혜이다. 그런데 평상적인 인간은 무지로 말미암아 무상한 것에 상주성을 기대한다. 이 기대가 어긋날 때, 실망과 노여움을 느낀다. 무아인 것에 대해 '나'를 의식하고 '나의 것'을 의식한다. 이 의식으로 말미암아 요구, 갈망이 생기고 고뇌한다. 기대해서는 안될 것을 기대하고 의식해서는 안될 것을 의식하는 곳에 번뇌에 의한 업이 있다. 그 결과는 고이다. 무지를 떠나 무상을 무상으로 알고, 무아를 무아로 아는 올바른 지혜를 얻음으로써 인간은 번뇌의 구속에서 해방된다. 이렇게 보면 현실에서부터 시작하여 무루(無漏)의 깨달음의 영역으로 진행하는 불교의 실천체계는 이 간명한 무상, 고, 무아의 가르침에 남김없이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엄밀히 설명하는 것이 아비달마의 임무라고 아비달마논사들은 생각했던 것이다.설일체유부의 경우에는 '일체가 존재한다'라는 주장을 하나의 이론에 의해 정밀한 학설로 전개하고 이를 가지고 무상과 무아를 논증하려한 것이다. 무엇때문에 모든 것은 무상한가. '연기(緣起)'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여러 가지 원인을 연하여 결과로서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독자적으로, 자주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그것을 나타나게 하는 원인 여하에 따라 존재한다는 점에서 상주불변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듯 '모든 것은 인과의 관계 위에서 생겨난다'는 견해는 모든 것은 오직 하나의 원인, 혹은 원인없이 우연히 생겨난다는 견해에 대한 불교의 입장이다. 이처럼 무릇 현실에 있어서 인간 생존에 관계하는 일체의 사실은 연기한 것이지만 그것 을 또한 유위(有爲)라고도 한다. 유위라는 것은 '(여러가지 원인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라는 정도의 의미이다. 연기하고 있으며, 유위이며, 무상인 이세상의 모든 것을 무상하다고 확실히 앎으로써 그것들에 대한 욕망과 집착이 소멸할 때 괴로움이 소멸된 열반, 깨달음의 세계가 전개되는 것이다. 깨달음의 세계는 이제 더 이상 인과에 속박되지 않는다. 그러한 구속을 받지 않기 때문에 바로 무위(無爲)이다.
(2) 유루(有漏)와 무루(無漏)
무상한 것을 무상이라고 보지 않고 그것에 대해 욕망을 일으키고 거기에 집착함으로써 번뇌하는 현실의 세계를 유루(有漏)라고 한다. 그리고 무상을 무상으로 알아 욕망과 집착을 끊음으로써 전개되는 고요하고 편안한 깨달음의 세계를 무루(無漏)라고 한다. 여기서 유루라는 것은 '번뇌를 가진', '번뇌에 더럽혀진'이라고 하는 의미이며 무루는 그 반대의 의미이다. 불교의 목적은 고뇌하는 현실세계, 미혹한 세계를 떠나 열반, 깨달음의 경지로 들어가는 것이다. 즉 유위 유루의 세계로 부터 무위 무루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유위 유루의 세계는 사제에서 볼때 고제와 집제이며 무위 무루의 열반은 즉 멸제이다. 그리고 괴로움으로부터 그 소멸로 나아가는 방법 즉 도제는 아직 열반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유위이지만 이미 번뇌를 떠나있는 도정에 있기 때문에 무루이다.
(3) 다르마(dharma, 法)의 이론
설일체유부라는 명칭은 '모든 것은 존재한다고 설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이 부파는 독특한 다르마의 이론에 따라 모든 것은 무상하다는 것을 자세히 논증하여 연기 - 유위 - 무상의 이치를 분명히 밝히고자 하였다. 다르마라는 말은 극히 여러 의미를 지닌 말이어서 해석하기 곤란한 점이 있다. 내외의 많은 학자들이 의논을 거듭해 왔으나 그것을 종합하면 (1) 법칙, 법, 기준 (2) 도덕, 종교 (3) 속성, 성격 (4) 가르침 (5) 진리, 최고의 실재, (6) 경험적 사물 (7)존재의 형태 (8) 존재의 요소 등의 의미로 다르마라는 말이 쓰여지고 있다. 한역 불전에서는 이 모든 의미가 법이라는 하나의 역어 속에 포함되어 있다. 아비달마 논서에는 다르마라는 어휘를 위의 (6),(7),(8) 중의 어느 하나로 사용하고 있다. 경험적 세계의 모든 것, 존재, 현상은 복잡한 인과관계로 서로 얽힌 무수한 법(法)의 이합집산에 따라 유동적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 이같은 법의 이론의 기본적 입장이다. 완성된 설일체유부의 이론에 의하면 존재의 요소로서 법을 75가지로 분류하고 이것을 다시 다섯 가지 그룹으로 나누는데, 이것을 이른바 오위칠십오법(五位七十五法)이라고 한다. 오위라는 것은 색법(물질의 요소, 11), 심법(마음, 1), 심소법(마음의 작용, 46), 심불상응행법(물질도 마음도 아닌 관계, 능력, 상태 등을 나타내는 요소, 14) 및 무위법(3)을 말한다. 이러한 75가지의 법은 상호 다양한 인과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같은 인과관계 위에서 유동적으로 구성되고 있는 것이 현실세계이다. 그렇다고 할때 그러한 모든 것은 무상한 것이다.
모든 것이 존재한다고 하는 설일체유부의 주장은 바로 이러한 존재의 기본요소인 법(法, dharma)에 관한 것이다. 모든 것이라고 하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것을 의미하는데, 이 모든 것이 있다. 즉 존재한다는 주장은 모든 것이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을 통하여 존재한다는 생각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그렇다면 일체의 사물은 무상하다는 불교의 기본적 입장과 모순되지 않는가. 설일체유부에 의하면 유위의 다르마 전체에 공통된 성질에는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순간성(刹那滅)이며, 다른 하나는 삼세실유성(三世實有性)이다. 이 두 성질은 모순된 것으로 보이며, 사실 다른 학파로부터 격렬한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이나 실은 설일체유부의 입장에서는 이 둘에 의해 제행무상을 변증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책상 위에 있는 컵은 한 시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컵으로서 지속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그것을 '법의 이론'에서 본다면 실은 순간에 생겨나 소멸해 버리는 유위제'법'(有爲諸法)의 끊임없는 연속에 불과하다. 제'법'의 하나하나는 시간적 지속성을 전혀 갖지 않으며 다음 순간에 모두 소멸해버리는 찰나멸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번째 순간에도 그대로 컵이 거기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선행한 제법을 상속하여 그것과 동류의 법이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관계를 가지고 계속 생기하기 때문이다. 또한 세번째 순간 이후도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비지속적, 순간생멸적인 제법의 연속적, 비단절적인 생기 위에서 컵의 존재라고 하는 시간적 지속 현상이 우리의 경험적 세계의 사실로서 있을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법이 생기한다고 해도 무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며 소멸한다고 해도 무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생기라는 것은 '법'이 미래로부터 현재로 현현하는 것이며, 소멸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현재로부터 과거로 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에 나타난 이전의 법은 미래의 영역에 존재한다. 현재에서 과거로 사라진 이후의 법은 과거의 영역에 존재한다. 미래의 영역으로부터 나타나 과거의 영역으로 사라지는 동안의 한 순간의 법은 현재에 존재한다. 미래에도 존재하며 현재에도 존재하고 과거에도 존재한다. 법은 삼세 어디에서나 그 자체로서 변함없는 특성(自性)을 갖고 존재하고 있다. 다시 말해 삼세에 실유한다. 이와 같은 유부의 순간적 존재론에 대한 멋진 비유가 있다.
필림의 흐름은 리일에서 리일로 움직여 그침이 없으나 필림에 현상된 한 토막의 화면 그 자체는 처음의 리일 속에 있을 때도 램프에 조명될 때도 다음 리일에 감겨진 뒤에도 움직이거나 병하지 않고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스크린에 차례차례로 투사된 영상은 하나하나로서는 순간적이고 움직이지 않는 것이면서, 그것이 무수하게 부단히 연 속함으로써 변화하며 활동하고 시간적 경과를 가진 한편의 줄거리를 엮어간다. 첫 리일은 다르마의 경과라는 삼세 중의 미래의 영역에 해당하고, 램프에 의하여 조명되는 순간은 현재에 해당하고, 나중의 리일은 과거의 영역에 해당한다. 필림의 한 토막 한 토막이 곧 다르마, 엄밀히 말하면 같이 생하는 무수한 다르마의 집합이다. 그리고 스 크린에 영사된 영상의 활동변화에 의하여 엮어지는 이야기는 정녕 현실의 경험적 세계 즉 제행무상의 세계에 해당한다. 리일에서 리일로 필림이 흐르듯이 다르마의 시간은 횡으로 공간적으로 확대되어 있다. 스크린에 영사되는 이야기의 경과와 같이 경험적 시간은 그것을 종으로 관철한다. 그 두가지 시간의 교차점을 절대의 현재라고 할 수 있듯이 우리들 경험적 세계에 사는 자는 언제나 거기에서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