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등산학교 5주차 - 1
- 조금씩 다가오는 바위 -
[교육일정]
5월 31일(토)
14:00 단산 집결
14:30~17:50 암벽 훈련
18:00~19:50 석식
20:00~ 자유시간 및 취침
6월 1일(일)
05:00~05:30 기상 및 구보
05:30~07:50 조식
08:00~11:50 단산 용아릉 릿지
12:00~13:00 중식
13:30~18:00 암벽등반 실기 마무리 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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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파가 익어가는 계절
내 어릴 때 보리가 익어갈 즈음 메탁기(탈곡기)를 쫓아다니며 비파를 많이 따먹었던 기억이 있다. 동네 비파나무의 비파가 익어가는 것을 보니 보리수확을 하는 계절이 다가오는 것 같다. 이제 우리 동네에서는 보리밭을 구경할 수 없다. 그 옛날의 보리밭은 전부 귤밭이 되었다.
2008. 5. 31. 토요일
이제 드디어 단산암장을 끝으로 등산학교의 사실상 마지막 일정이다. 등산학교의 대미를 장식할 2박 3일의 한라산 동서종주가 남아있지만 걷는 것은 무대뽀 걸어도 되는 것이고 암벽처럼 신경쓸 일은 없으므로 큰 부담이 없다.
점심을 먹고 낮 12시 30분 김규완 군의 차로 영천산악회팀들이 모여 현정필 이사의 사무실로 이동한다. 부모님께서 땡볕에 밭에서 일을 하시는데 도와드리지도 못하고 배낭을 꾸리고 집을 나서는 게 영 부담스럽고 마음이 편치 않다.
몇 년 전에 올래에 심어둔 더덕이 잘 자라고 있다.
서귀포에서 모기약과 물파스 등을 구입하고 안덕면 사계리 산방산 인근의 단산을 향하여 출발한다. 초하의 시원한 녹색지대가 펼쳐지는 것을 보면서 오늘도 바위와 한바탕 씨름하러 가는 길이다. 이 나라에 산시인들이 많이 있지만 시인 이성부만큼 산과 바위에 대하여 천착한 시인도 없을 것이다. 단산의 암장을 오르내리며 이성부 시인의 바위시들을 떠올려보기로 한다.
제주월드컵경기장
제주월드컵경기장을 지나고 군산의 마중을 받으며 조각공원을 지나 산방산을 좌측에 끼고 돌아 들어가면 우측으로 단산의 모습이 나타난다.
산방산 쪽에서 보는 단산
바굼지오름, 바구미오름, 破軍山으로 불리는 단산(簞山, 158m)은 오름의 형태가 거대한 박쥐가 날개를 편 모습을 연상케 한다고 하여 바굼지오름이라고도 한다. 미상불 오름능선이 박쥐의 날개같이 생겼다.
'바굼지'는 바구니의 제주방언이나 원래 '바구미'였던 것이 '바굼지'와 혼동되어 한자표기도 한자이 뜻을 빌어 簞山(단산)으로 표기하게 되었다는 설명이 있다. 여기선 '簞'은 도시락, 소쿠리, 대로 만든 둥근 그릇을 뜻하는 '단'이다. 이 말을 듣고 다시 오름의 형상을 보니 가운데 움푹 들어간 것이 바구니와 같이 생긴 것 같기도 하다.
이 일대 밭은 대부분 마농(마늘)밭이고 마농수확이 한창이다. 대정향교 안내판을 따라 포장농로를 따라 들어가면 대정향교 주차장이 나온다.
대정항교
제주도 지방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된 대정항교는 제주의 향교 중 가장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옛날의 지방교육기관이다. 향교와 관련된 사진들은 [오름, 그 始原의 숨결을 따라]에 올려놓는다.
오후 2시 집결 후 인원과 장비점검을 마치고 단산 암장으로 이동한다. 차를 타고 농로를 따라가다가 길상태가 좋지 아니하여 뒤돌아와 포장도로를 따라 산방산이 마주보이는 단산 들머리로 진입한다.
좌측의 단산과 우측의 산방산, 이 농로를 따라가면 단산암장으로 가는 들머리가 나온다.
단산 암장 입구에서
대개 암장 입구에서 로프(독일어로는 자일<Seil>)를 짊어지는 사람들은 그럴 듯하게 폼을 잡고 있지만 '시다'(下) 내지 똘마니들이다. 군대에서도 지휘관은 썬글라스에 지휘봉 하나만 들고 다니고 밑에 쫄따구들이 무거운 장비들을 지고 다닌다(사진은 기사안의 특정사실과 관계없으므로 오해는 말기를).
단산 좌측은 릿지코스이고, 우측에 직벽 코스가 있다. 바위 밑둥까지 10여분 오르막을 올라서면 거대한 바위가 앞을 가로막고 있다.
나팔꽃과 비슷한 메꽃
앞을 가로막고 있는 바위 밑에서 3개의 조로 나뉘어 암벽훈련에 들어간다. 먼저 선봉 1조는 좌측에서 35m의 직등코스를 오른다.
확보를 위하여 오경훈 강사가 로프를 걸며 능숙하게 올라가고 있다.
인접조들이 훈련하고 있는 우측으로 한라산의 자태가 들어온다. 우측의 산은 산방산.
선등자확보, 고리8자매듭으로 안전벨트와 로프를 연결하고 발힘에 의지하여 직벽 바위를 조심스레 타고 오른다. 바위벽과 거의 수직 자세를 유지하면서 발에 힘을 주어야 하지 추락위험때문에 몸을 바위에 밀착시켰다가는 아차 하는 순간에 얼굴을 그냥 바위대패로 밀어버리고 온몸이 걸레조각이 되는 수가 있다.
발의 힘만으로 올라야 한다고는 하지만 손가락, 손톱의 힘까지 죽을 힘을 다하여 조그만 바위틈새에 쏟아부어야 한다. 한순간도 방심이 허용되지 않는 것이 바로 암벽이다. 까딱하면 바로 제삿날이 될 수도 있는 것이 암벽이다. 무수천에서 1차 교육을 받은 효과가 있는지는 몰라도 처음에는 겁나게 보이던 바위가 친근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어서 들어오세요
칼바위 벼랑바위 바람 이는 바위
무서워하지 말고
망설이이만 말고
천천히 천천히 기어오르세요
온몸을 솟구쳐 꿈을 펼치세요
나를 가지세요
- 이성부, <바위의 말> 부분
단체로 자기확보줄에 의지하여 허공에 떠있는 1조
간신히 확보지점에 올라선 후 제일 먼저 할 일은 자기확보줄을 거는 일이다. 자기확보줄은 바로 생명줄이고 안전줄이다. 이 조그만 줄이 2톤의 무게를 지탱해준다. 먼저 올라온 사람들은 후미가 전부 올라올 때까지 한 두시간을 자기확보줄에 의지하여 허공에 떠 있어야 한다.
매킨리 등 해외원정산행을 할 때는 이 확보줄에 매달려 밥도 먹고 잠도 자야 한다. 물론 허공에 매달려 똥도 싸야 한다. 그 똥은 그대로 비닐봉지에 담아 회수하여 내려가야 한다.
처음에는 웅크려들던 몸이 자기확보줄을 믿고 떠 있으니 한결 편하다. 내 발 아래 펼쳐지는 하계의 세상이 너무나 아름답다. 산방산도 형제섬도, 송악산과 가파도, 마라도까지 안전에 일망무제로 펼쳐지는 파노라마.
우리가 원시성을 그리워하거나
그 내음에 나를 온통 담그고 싶어지는
까닭을 오늘에사 알겠다
지난 날로 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탄생임을
깨닫는 이 놀라움
비로소 완전한 자유가 나를 가로 막는다
- 이성부, <바위타기 2> 부분
산방산과 우측의 용머리도 보인다.
멀리 송악산과 우측의 가파도가 흐릿하게 보인다.
마을과 농토, 이 땅에 사는 사람들
인위적인 것들은 없다. 모두 자연스럽고 편안한 풍경이다. 자연은 바로 평화이다.
자기확보지점에 전원이 모인 후 다시 마지막 정상부분으로 바위를 타고 오른다. 1조는 거의 낙오없이 그리고 남들에게 민폐를 끼침이 없이 순조롭게 완등하였다.그러나 산은 오르면 내려가는 일이 기다리고 있다. 정상에 오른 자는 내려갈 준비를 하여야 한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오르막 못지 않게 내리막 하강도 중요하다.
대부분의 등산사고는 내려갈 때, 하강시에 발생한다. 비행기사고도 이륙할 때보다는 착륙시에 발생한다. 내려가는 길이라고 방심했다가는 생의 전부를 잃을 수도 있다. 로프 2동을 고리와 벨트로 연결하여 좌우측 손으로 조절하면서 내려가면 된다. 물론 몸을 'ㄴ'자 형상으로 만들어 다리를 넓게 벌리고 바로 착지 지점을 확인하고 바위를 툭툭 차면서 내려가면 그리 어렵지 않게 내려갈 수 있다.
하강
바위가 손짓하며 나를 부를 때
내 정신은 이미 발정난 수캐처럼 헐떡거린다
끓는 피 뜨거워
나는 이미 나를 주체할 수 없다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또 다른 문화적 악령이
쫒겨나는 순간이다
천경자의 뱀들 사람의 편안함을 무너뜨려
사람들 아프게 새로 눈뜨듯이
- 이성부, <바위타기 5> 부분
그래도 하강은 기분좋은 일이다.
하강완료 직전
1조는 직벽 코스를 무난히 그리고 빨리 끝낸 바람에 여유롭게 휴식시간을 갖는다. 오후 6시가 되어가면서 교육일정을 마무리한다.
로프 회수
보람찬 하루 일을 끝마치고서 야영장 복귀 중
풀밭이 아닌 대정향교 주차장에서 야영을 하기로 하니 모기에 물릴 일은 없을 것 같다. 각조별로 취사를 하고 식사시간을 갖는다. 지금까지 우리조는 거의 새깡님이 살림꾼으로 우리 조의 민생고를 해결하고 있다. 나로서는 바쁘다는 핑계로 조그만 기여도 못하고 있으니 새깡님에게 감사할 뿐이다.
이번 5주차의 식사준비는 막내 오재근 군이 맡아 시장을 봐왔다. 재근 군의 어머니는 전에는 남편(오문필 교장선생님) 등산수발을 드시더니 이제는 아들 등산준비 수발까지 들어야 하는 행복한 처지가 되었다.
전 같았으면 저녁식사를 마치고 2시간의 야간강의가 이어졌지만 이제 등산학교도 말년이고 단산에서는 야간교육이 없어 더 없이 널널한 자유시간을 갖는다. 밤하늘의 별들은 명징하고 그 하늘 밑에서 바위타기를 즐긴 산꾼들이 자연과 한몸이 된다. 4기의 구랏발 이범종님의 만담으로 밤시간이 가는 줄 모른다. 너무 많이 먹어 소화를 시켜야 한다는 명목으로 사계리 해안까지 걸어갔다 오면서 약속시간 1시간을 10분 초과한 벌로 한밤중에 오리걸음까지 한 후 침낭속으로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