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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계명
시122:6~9; 요일5:1~5
오늘 함께 드린 기도문 속에, “주님께서 친히 창조의 파트너로 삼으신 이 땅의 모든 어버이들의 마음을 위로하시고, 달려갈 길 다 마치는 그날까지 주님과 동행하는 지복을 누리게 하십시오.”라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정말 이 땅의 어버이들은 하나님께서 창조의 파트너로 삼으신 사람들입니다. 이 어버이들로 말미암아 자녀들이 이 땅에 생존하며 양육되고 번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이들을 위로하시고, 달려갈 길 다 마치는 그 날까지 늘 동행하시는 은총을 내려주시기를 빕니다.
신생아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아이는 완전 무방비 상태로 태어나게 됩니다. 열 달 동안 자신의 일부였던 엄마의 안전한 탯 속에서 분리되어, 모든 것이 적대적일 수 있는 이 세상에 던져질 때, 이 아이는 너무나 불완전 합니다. 완전히 다른 외계에 벌거벗은 몸뚱이 하나 가지고 태어난 것입니다. 부모가 그들을 보호하고 양육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이 아이는 한 시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부모는 하나님의 창조 파트너로서, 자신의 아이를 보살핍니다. 그 덕분으로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고 또 우리 자녀들도 살고 있습니다.
물론 부모도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온전한 사랑을 주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부모가 줄 수 있는 사랑에는 많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도 불완전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부모도 늘 두려움에 사로잡히던 불완전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 또 우리도 부모로서 두려움에 사로잡히던 불완전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아는 것은 부모와 우리, 그리고 우리 자녀들에게 도움이 됩니다. 우리는 그 한계로 인해, 완전한 사랑을 하지는 못했지만, 할 수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 사랑을 받고 이 자리까지 왔고, 또 우리 자녀들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랑의 반대말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미움, 무관심, 적대감... 등등,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요한서신의 저자는 사랑의 반대를 두려움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4장 18절 말씀을 함께 읽어 봅시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두려움은 징벌과 관련이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에니어그램에서 보면, 각 사람의 성격은 그 사람이 갖는 기본적인 두려움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합니다. 모든 성격은 자신의 두려움을 가리는 일종의 가면이라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면,어떤 사람이 자신의 진정한 본질을 잃어버림으로써, 어떤 특정한 두려움에 사로잡히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 두려움을 보상하기 위해서 기본적인 욕망을 갖게 되고, 그 욕망이 왜곡됨으로써 성격이 형성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 봅시다. 어떤 아이가 자신의 진정한 본질을 잃어버리자, 자신이 악하고 부도덕하고 결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이 아이는 어린 시절부터 실수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무의식적 메시지를 계속 받게 됩니다. 그래서 이 두려움을 보상하고자 하는 기본적인 욕망이 생깁니다. 이 기본적인 욕망은 모든 인간이 당연하게 갖는 욕구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기본적인 욕망이 이상화되고 과도하게 추구되면서 왜곡됩니다. 이렇게 해서 비판적인 완벽주의라는 성격이 만들어진다는 겁니다.
또 다른 예를 하나만 더 들어 봅시다. 어떤 사람의 기본적인 두려움은 자신이 사랑받을 가치가 없을까봐 두려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너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는 무의식적 메시지를 듣고 자랍니다. 너 자신의 필요만 충족시키게 되면 사랑받지 못한다고 생각을 한 것이지요. 이 아이는 사랑받을 가치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사랑받고자 하는 기본적인 욕망을 발전시킵니다. (여기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욕망이 이상화되고 과도하게 추구되면서 무조건 필요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구로 왜곡됩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은 자신의 진정한 욕구는 보려고 하지 않고 남의 욕구만을 충족시켜 주려는 성격으로 굳어집니다.
어쨌든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두려움은 우리의 왜곡된 성격을 낳는다고 하는 것입니다.사람은 자신이 가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 자신이 중요한 존재가 아닌 것에 대한 두려움,쓸모없고 무능하게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당하거나 통제 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자기 혼자 떨어져 나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등등, 두려움으로 인해서 보상적인 욕망을 발전시킵니다. 두려움은 우리를 온전한 모습으로 자라지 못하게 하고, 우리를 왜곡시킵니다.
물론, 현실적인 두려움은 우리를 조심하게 만들기도 하고, 위험한 장소를 피하게도 하고, 우리의 기본적인 욕구를 어떻게 충족할 것인지를 고민하게도 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생존하도록 기여한 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몸속에 깊이 뿌리박힌 비이성적인 두려움은 우리를 쓸데없이 긴장하게 하고, 과도하게 불안하게 하며, 친밀한 관계를 맺지 못하게 하며, 우리가 해내야 할 것을 해내지 못하게 하면서, 우리가 가진 진정한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나 외에 것은(아니 진정한 의미에서 나 자신까지, 하나님까지) 적으로 보면서,수용하기 보다는 저항하고 방어하고 회피하며, 내맡기기 보다는 통제하려는 자세로 살아왔습니다. 이것이 지금도 얼마나 끈질기게 작용하고 있는지요?
이것을 오늘 요한서신의 표현대로 하면, 우리로 하여금 사랑을 알지 못하게 하고 사랑하지 못하게 했다는 겁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졌고, 따라서 우리의 삶을 사랑하지 못하게 했고, 우리의 부모나 자녀, 남편이나 아내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하게 했고, 우리 곁에 우리의 이웃으로 준 많은 이들을 사랑하지 못하게 했다는 겁니다.
윌리엄 블레이크는 “우리는 사랑의 빛을 품는 것을 배우기 위해 잠시 이 땅에 머물러 있나니”라고 말했는데, 이 땅을 사랑을 배우는 학교가 아니라, 두려움의 전쟁터로만 경험하다가 세상을 떠나면, 우리는 헛 산 것이 되겠지요. 사실은 이것이 가장 두려운 심판입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두려움은 징벌과 관련이 있습니다.”라는 말씀이 말해주듯이, 두려움은 모든 것을 징벌적인 관점에서 생각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도 늘 징벌하시는 하나님으로 이해했고, 나 자신도 늘 내가 잘했나 못했나로 평가했고, 우리의 이웃도 그렇게 평가를 했다는 거지요.
오늘 요한일서 본문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말씀은 바로 이 문제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한번 읽어서는 그렇게 명쾌하게 들어오지가 않습니다. 사실은 오늘 말씀은 그 앞의 4장부터, 적어도 4장 7절 이하부터 같이 읽어봐야 합니다. 읽어보면, 요한일서의 말씀은 요한복음의 말씀과 비슷합니다. 같은 공동체에서 나온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너무 흔하게 쓰이는 말이라서 이 말의 의미가 많이 묻히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드러났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당시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몸은 별 의미가 없고, 따라서 그분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도 아무 의미가 없다, 우리 몸도 그렇게 중요하지 않고, 깨달음을 통한 영적 지식만이 중요하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이 세상에서 지지고 볶고 사는 것, 심지어 서로 사랑하는 것조차 별 의미가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요한일서의 저자는 예수의 죽음은 실제적이었으며(가상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을 맛봤으면, 그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든 드러나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근본적으로 우리 안에 있는 두려움을 내쫓아 버리기 때문에, 우리 안에 두려움이 사라질 때 우리는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지키기 어려운 무거운 짐도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이긴 증거라는 겁니다.
사랑하는 살림교우 여러분, 우리는 수많은 두려움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불안하게 하고, 긴장하게 하고, 저항하고 거부하고 회피하고 방어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랑하며 창조적으로 살아야 할 에너지의 대부분을 이런 쓸데없는 일을 하는데 쏟아 붓게끔 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의 본성은 사랑이지 두려움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이 사실(진리)를 기억하며 살 수 있을까요?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아마도 요한일서가 쓰여지던 때는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의 기억이 훨씬 강력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분의 감화력과 그분의 능력을 맛본 사람들의 기억이 더 생생했을테니까요. 그러나 우리도 성령의 감화를 통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 그리고 지금도 우리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기억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밀려오는 두려움과 불안을 맛볼 수밖에 없지만, 그때마다 우리는 다시 방향을 돌려 하나님의 사랑으로 되돌아 갑니다. 이렇게 되면, 놀라운 일이 벌어지는데, 두려움과 불안은 사실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인도자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때 우리는 복된 두려움이여, 복된 불안이여,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늘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도 두려움과 불안에 떠는 사람들이지만, 우리 곁에 있는 우리의 형제자매, 우리의 이웃들도 두려움과 불안에 떠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도 아직 사랑의 빛을 오로지 품지 못하여 늘 판단 받을까 평가받을까 두려워하는 사람들이지만, 우리 형제자매, 우리의 이웃도 그렇다는 겁니다. 특별히 아주 공격적이어서, 혹은 내게 적대적이어서, 내가 두려워하는 사람, 내가 겁내하는 사람도 사실은 매우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두려움을 공격적인, 혹은 적대적인 태도로 가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분명 두려움의 어두움을 끌어안고 있을 것입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개가 훨씬 무섭게 짖는 법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면, 훨씬 우리의 압력은 제거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압력이 제거되면, 상대편의 압력도 분명히 낮아질 것입니다.
사랑하라는 계명은 밖에서 온 어떤 규율이 아닙니다. 사랑의 계명은 내 안에서 들리는 사랑의 음성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깊은 중심에서, 두려워마라, 내니 안심하라고 말씀하시는 말씀을 깊이 받아들이면서, 나도 너를 판단하지 않는다, 이제 가서 죄짓지 말고(=두려워하지 말고) 살아라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깊이 느끼면서, 내 삶이 얼마나 든든하고 안전한 하나님의 사랑 위에 세워졌는지를 깨닫는 데서 사랑의 계명은 시작되고 완성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는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하라는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을 승리하게 하는 힘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기도는 이 세상의 두려움 때문에 질식하는 사람들이 내 쉴 수 있는 거룩한 호흡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도하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우리가 안다면, 우리 뼛속까지 박혀 있는 두려움은 조금씩 조금씩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 시편 122편 중의 말씀으로 한번 복을 빌어 봅시다. “평화가 내 안에 깃들기를 빕니다.” “평화가 당신에게 깃들기를 빕니다.” 한번, 내가 힘들어 하는 사람을 떠올려 보십시오. “하나님의 평화가 당신에게 깃들기를 빕니다.” 축복해 보십시오.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의 평화가 깃들기를 빕니다.”
첫댓글 두려움을 몰아내는 사랑~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