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부처님께서 음행을 금하도록 하신 데는 특히 중요한 몇 가지 뜻이 간직되어 있다.
첫째, 중생의 음행은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모든 기멸심(起滅心)을 조장하고, 번뇌의 뿌리가 되어 해탈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모든 생사는 음행으로부터 비롯된다. 생사를 뛰어 넘어 해탈과 열반의 저 언덕에 이르려면 먼저 생사의 근원인 기멸심과 번뇌를 초월해야 하는데, 음행은 번뇌와 기멸심을 근원적으로 조장할 뿐이다.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출가중의 음행을 전적으로 금하신 것이고, 재가중에게는 사음만을 금하도록 하신 것이다.
둘째, 음행은 청정하지 못한 비범행(非梵行)이요, 물들고 추한 행인 염오행(染汚行)이기 때문이다.
거룩하지 못한 행위는 밝은 마음을 어둡게 만들고 청정한 마음을 탁하게 물들이며, 어둡고 탁한 마음은 결국 생사윤회의 씨앗이 될 뿐이다.
사람들은 흔히 식욕도 본능이요 음행도 본능이며 명예욕도 본능이라고 하면서 탐욕심 때문에 생겨나는 갖가지 문제들을 방치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본능을 핑계삼아 생겨나는 문제들을 내버려둔다고 하여 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밝은 지혜를 등진 채, 무명심(無明心)에 바탕을 둔 맹목적이고 충동적인 본능은 결과적으로 어둡고 추한 업장만을 조장시킬 뿐이다.
탐욕심이 축적본능이고 잘 살려고 하는 당연한 욕구라고 하여 아무런 절제 없이 무한정으로 추구하다보면, 상대방에게 피해를 줄 뿐 아니라 온갖 비리와 불의까지 돌아볼 줄 모르는 추한 존재로 돌변하여 버린다.
화를 내는 진심(嗔心)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인간이 ‘일어나는 화를 어떻게 하랴’하는 마음가짐으로 행동한다면, 이 세계는 곧 폭력과 무질서와 아비규환(阿鼻叫喚)의 현장으로 바뀔 것이다.
실로 우리의 마음 밑바닥에는 맑고 자비롭고 슬기로움이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슬기로운 마음이 그릇되이 흐르면 어리석은 우치심(遇痴心)이 솟아나고, 자비하고 인자한 마음이 잘못 흐르면 성을 내는 진심으로 탈바꿈하며, 거룩하고 청정한 마음이 거꾸로 흐르면 음심이 발동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음행은 우리의 청정한 본성을 탐욕의 굴레로 얽어매고 가리우는 것이요, 그로 말미암아 모든 생사윤회의 세계가 전개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음행을 하지 말 것을 거듭거듭 강조하신 것이다.
보다 자세한 이유는 부처님께서 음계를 제정하신 그 때의 일을 통하여 분명히 알 수가 있다.
부처님께서 바이샬리에 계실 때의 일이다. 때마침 흉년이 들어 비구들은 걸식을 하기가 매우 힘이 들었다. 그 때 바이샬리 부근의 칼란다카 마을 출신으로, 그 고장에서 재산이 제일 많은 집의 아들이었던 수제나(須提那) 비구는 생각하였다.
‘요즈음처럼 걸식하기가 어려운 때에 여러 스님들을 우리 고향 가까이에 모시고 가서 먹을 것 입을 것에 대한 걱정없이 수행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해 드린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 기회에 우리 친족들도 보시를 하여 복덕을 지을 수 있으리라.’
그는 부처님을 모시고 칼란다카 마을 근처로 옮겨갔고, 수제나의 어머니는 아들이 여러 스님들과 함께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아들을 찾아갔다.
“수제나야, 네 아버지가 돌아기신 후 집안에 남자가 없으니 많은 재산을 관리할 수가 없구나. 네가 다시 돌아와 집안을 돌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나 청정한 생활을 즐기며 도를 닦고 있었던 수제나로서는 몇 번이고 간청하는 어머니의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튿날 아들을 찾아온 어머니는 다시 간청을 했다.
“네 뜻이 정 그렇다면 자식이나 하나 낳아다오. 대를 이을 수 있는 자식을 낳게 해준다면 너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도록 해 주겠다.”
그것마저 거절할 수 없게 된 아들이 말하였다.
“그 말씀이라면 어머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그때는 계율이 정해지기 전이므로 수제나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아내와 동침을 하였다. 그러나 아내와의 동침을 한 뒤부터 수제나의 마음은 항상 편치 않았고, 우울해 하는 그를 보고 이상하게 여긴 스님들이 물었다.
“항상 마음이 밝던 스님이 요즈음 들어 우울한 표정을 자주 지으십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한숨을 내쉰 수제나는 자초지종을 말하였고, 마침내 부처님도 그 사실을 아시게 되었다. 부처님은 수제나에게 말씀하였다.
“네가 한 바는 옳지 못하다. 위의가 아니며, 사문의 법이 아니며, 청정한 행이 아니며, 수순(隨順)하는 행이 아니며, 할 바가 아니다. 이 청정한 법 가운데에서 애욕을 다 끊어 없애고 열반을 얻어야 할 것이어늘, 어찌하여 옛 아내와 부정한 음행을 저질렀느냐?”
부처님은 이어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차라리 남근(男根)을 독사의 입 속에 넣을지언정 여자의 몸에 대지 말라. 이와 같은 인연은 악도에 떨어져 헤어날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 애욕은 착한 법을 태워버리는 불꽃과 같아서 모든 공덕을 없애버린다. 애욕은 얽어 묶는 밧줄과 같고 시퍼런 칼날과 밟는 것과 같고 험한 가시덤불에 들어가는 것과 같고 성난 독사를 건드리는 것과 같고 더러운 시궁창 같은 것이다. 모든 부처님들은 애욕을 떠나 도를 깨닫고 열반의 경지에 들어간 것이니라.”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불사음계를 불교의 모든 계율 중 첫 번째 계율로 제정하여 널리 지키게 하였다.
한 비구의 음행을 계기로 삼아 불사음계를 제정하신 부처님의 근본 뜻을 새겨보면, 음욕을 맑혀 생사윤회의 쇠사슬을 끊게 하고 열반의 궁전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한다는 깊은 의도가 깃들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따라서 출가승려는 음행을 아주 끊어 열반의 주춧돌을 철저히 놓아야 하고, 재가불자들 또한 청정을 근본으로 삼아 삿된 음행을 멀리하여야만 한다.
그렇다고 하여 재가불자들마저 스님들처럼 아주 단음(斷淫)을 하라는 것은 아니다. 재가의 부인들 중에는 남편을 옆에 오지도 못하게 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조금 정도가 지나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제 불사음계를 범하면 어떠한 과보를 받게 되는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불사음(不邪淫) – 불사음계를 범한 과보
<십선업도경>에서는 불사음계를 잘 지키면 네 가지 공덕을 성취하게 된다고 하였다.
① 모든 본능의 감각기관을 잘 조절할 수 있다.
② 시끄러운 비난을 길이 여읜다.
③ 세상이 다 칭찬을 한다.
④ 정숙한 배우자를 얻게 된다.
이와는 반대로 <화엄경> 이지품(二地品)에서는, “사음의 죄를 범하면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진다.”고 정의한 다음,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더라도 정숙하지 못한 배우자를 만나거나 뜻에 맞지 않는 가족을 만나게 된다.”고 하였다.
또한 사음을 행한 과보로는 복을 깎아내리고 주위사람의 존경을 잃으며, 병을 얻거나 신용을 잃고 패가 망신을 하게 된다는 것 등을 들고 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재가불자들로 하여금 불사음계를 지킬 것을 거듭거듭 강조하였고, 오랜 세월동안 우리나라를 비롯한 불교문화권에서는 이 가르침을 준수하여 살아왔다.
하지만 지금의 현실은 어떠한가?
-일타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