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찰방 서문영(徐文永)
[생졸년] 1662년(현종 3)~1739년(영조 15) / 壽 77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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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방 서공 묘갈명(察訪徐公墓碣銘) - 이재(李縡,1680~1746) 찬(撰)
선비 가운데 낮은 관직에 있으면서 행실은 고상하고 세속과 뒤섞여 있으면서 뜻은 고결한 경우를 나는 찰방 서문영(徐文永) 공에게서 보았다. 공은 자가 영숙(永叔)이니 달성(達城) 사람이다. 서씨(徐氏)의 족보에는 신라의 아간대부 신일(神逸)과 고려의 군기 소윤 한(閈)이 있는데, 그 선조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다고 한다.
국조(國朝)의 목사 미성(彌性)이 현감 거광(居廣)을 낳았으니 이분이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의 형님이다. 3대가 내려와 휘 해(嶰)는 퇴도(退陶)의 문인이니 판중추부사 휘 성(渻)을 낳고, 이분은 우의정 휘 경우(景雨)를 낳았다. 공의 부친 부사과 휘 유리(裕履)는 그 측실 소생이다. 외조부는 함릉부원군(咸陵府院君) 이해(李澥)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탁월하여 얽매이지 않았으며, 장성해서는 몸을 낮추고 행실을 닦았다. 벗을 데리고 보개산(寶蓋山)에 들어가 독서하였는데 일 년이 지나서 돌아오니 문사가 크게 진보하였다. 일찍이 회덕(懷德)의 판교(板橋)에 있는 우암(尤菴) 선생에게 가서《대학》을 배우고 돌아왔다.
기사년(1689년, 숙종 15), 곤성(坤聖 인현왕후(仁顯王后))이 사제(私第)로 물러나자 오 양곡(吳陽谷 오두인(吳斗寅))을 비롯한 여러 공들이 간언하다 죽음을 당하였고 임금의 위엄이 맹렬하게 떨쳤다. 공은 성규헌(成揆憲)과 함께 상소를 올려 쟁론하였는데 금령으로 올리지 못하였으나, 사론(士論)이 훌륭하게 여겼다. 승문원 이문학관을 거쳐 의영고(義盈庫) 중부 주부, 귀후서 별제 등을 역임하였고 중간에 제술관을 지냈다. 외직으로는 평구(平丘)와 경양(景陽)의 찰방을 지냈다.
공이 비록 마지못해 가난 때문에 벼슬살이했지만 평소의 성품은 고요하여 두문불출하였다. 종족 가운데 현달한 이들이 많았지만 청탁하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교유하는 자들은 모두 한 시대의 명사였고 백정(白丁)과 같은 잡류들은 절대 출입한 적이 없었다.
성품이 또 돈독하고 확실하여 시비와 선악의 구분에 있어선 단호하였다. 77세의 나이로 금강산(金剛山)을 유람하려고 하자 벗이 만류하니, 공이 말하기를
“내가 죽어서 돌아오지 못한들 무슨 해가 있겠는가.”
하고, 두 아들을 데리고 갔다.
이듬해 기미년(1739, 영조 15), 성상께서 동조(東朝 대비전)에 잔치를 올리고 기로연(耆老宴)의 물품과 비용을 하사하였는데 공 또한 포함되었다. 온갖 잔치 물품을 마련하여 족친들과 더불어 즐기고 시를 수창하며 감축하는 뜻을 부쳤다. 10월 21일 병환 없이 세상을 떠났고, 이듬해 정월 10일 영평(永平) 거사동(居士洞) 해좌(亥坐)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공은 집안에서의 행실이 독실하여 어버이가 살아계실 적에는 오십의 나이에도 색동옷을 입었고, 어버이의 뜻을 미리 알아서 즐겁게 해드렸다. 또 선조를 받드는 여러 일에는 곡진하게 정성을 바쳤으니, 크고 작은 제사에 병환이 있지 않으면 남에게 대신 시키지 않았으며 여든의 나이에도 한결같았다.
고아가 된 조카를 장가보내는 일을 자식보다 먼저 하였으며, 종인(宗人) 가운데 곤궁하여 떠돌아다니는 경우가 있으면 전답을 나누어주어 생계를 꾸리게 하였다. 자제를 가르칠 적에는 공부 과정을 엄하게 세워 과거공부 외에 마음을 쓸 곳이 있음을 알게 하였으며, 세상에서 경박하고 허황되며 구차하게 시류(時流)를 좇는 것을 깊이 경계하였다.
한가로이 지낼 적에는 국희(局戲)를 가까이 하지 않으며 “우리 아이들이 이 놀이를 알게 될까 걱정이다.”라고 하였다. 만년에는 《심경》을 좋아하여 비록 공무에 바쁠 때라도 반드시 한두 장(章)을 읽고 말하기를 “일찍 이 맛을 알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라고 하고 출입할 적에 반드시 휴대하였다.
한번은 풍랑을 만나 배가 거의 뒤집힐 지경인지라 배 안의 사람들은 모두 울부짖었는데, 공만은 옷깃을 여미고 단정하게 앉은 채로 끊임없이 시를 읊조렸으니, 여기서 공의 학문의 깊이를 징험할 수 있다. 관직에 있을 적에는 한결같이 근약(謹約)함으로 스스로를 단속하여 털끝만큼도 이치에 어긋난 일을 행하지 않았으며, 전관(傳館 역참)을 창건하여 아전과 백성을 보살폈다.
평구(平丘)에서의 치적이 으뜸이었는데 죄가 아닌데도 체직되자 우인(郵人)이 달려가 호소하여 잉임(仍任)하기를 청하였다. 그 후로 자리가 빌 때마다 공이 다시 부임하기를 청하였지만 그렇게 되지 않으니, 송덕비를 세워 사모하였다.
아!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말단 관리라도 만물을 사랑하는 데 마음을 쓴다면 사람들에게 반드시 이로움을 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공을 보면 더욱 믿을 수 있는데, 안타깝게도 그 재능을 세상에 크게 시험하지 못하였다.
공은 선유(先儒)를 존모하여 김신재(金愼齋 김집(金集))의 기일이 되면 제수를 마련하여 부조하였는데, 작은 역참에 있으면서도 이처럼 했으니 훌륭하도다. 또 우옹(尤翁)에게 끝까지 수학하지 못한 점을 종신토록 한으로 여겼으니, 덕인을 좋아하는 마음은 더욱더 귀하게 여길 만하다.
공은 총 세 번 장가들었으니,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교리 수능(壽能)의 따님이고, 영산 신씨(靈山辛氏)는 군수 경원(景轅)의 따님이고,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진사 동표(東標)의 따님이다. 2남 1녀를 두었으니, 별제 종화(宗華), 종해(宗海)는 이씨 소생이고, 신덕혼(申德混)의 아내는 원배 소생이다.
손자 세 명은 명인(命寅), 명완(命完), 명복(命復)이다. 종해(宗海)는 나와 종유하였기에 찾아와서 명(銘)을 청하였다.
명은 다음과 같다.
팔십의 노인 / 八十之翁
비둘기가 새겨진 지팡이로 풍악산을 올랐네 / 楓岳鳩杖
만나는 자 신선이라 의심하고 / 遇者疑仙
시속에선 망녕되다고 하네 / 流俗謂妄
이 한 가지 일로 / 卽此一事
고상한 풍류를 알 수 있네 / 可見雅尙
맑게 빛나는 찬 얼음 / 炯然寒冰
마음과 용모가 이와 비슷하네 / 心貌相似
자신의 곧고 결백한 마음을 보존하며 / 保我貞白
저 저잣거리에 숨어지냈네 / 隱彼城市
독서의 즐거움을 / 讀書之樂
죽은 뒤에야 그만두었네 / 死而乃已
아, 이 세상에서 / 嗚呼斯世
어디서 공과 같은 이를 얻으리 / 何處得來
내 그 사람을 공경하여 / 我敬其人
명을 지어 슬픔을 담노라 / 作銘志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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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찰방 서공 묘갈 :
저자가 서문영(徐文永, 1662~1739)을 위해 쓴 묘갈문이다.
[주02] 말단 …… 것이다 :
정호(程顥)가 말하기를 “말단 관리도 만물을 사랑하는 데 마음을 쓴다면 백성에게 반드시 이로움을 줄 것이다.[一命之士, 苟存心
於愛物, 於人必有所濟.]”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小學 嘉言》
[주03] 비둘기가 새겨진 지팡이 :
구장(鳩杖)은 손잡이 부분에 비둘기 모양을 새긴 지팡이를 말한다. 옛날에 공로가 높은 늙은 신하에게 하사하던 물품이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