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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23일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주일 설교
제목 : ‘움직이는’ 교회(4) - 생각보다 더 낮은 곳으로!
본문 : 마태복음 9장 10절(9~13절)
예수께서 집에서 음식을 드시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자리를 같이 하였다. <새번역>
교회가 움직여야 할 방향은 언제나, 언제라도, 성경을 통해 알려 주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향하는 곳으로의 방향입니다. 사랑이 없는 곳으로 가서 사랑을 전하여 주고, 복음이 없는 곳에 가서 예수를 전하고, 희망이 없는 곳에서 희망의 불꽃을 피워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이런저런 방향에 대해서 많이 말할 수 있지만 예수님이 가신 길, 그 길을 고스란히 쫓아가는 것이 가장 정답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누가복음 4장 18~19절, 새번역>
예수님은 정말 말씀대로 이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기쁜 소식을 들었고, 포로 된 자들은 해방을 선포했으며, 눈먼 사람은 눈을 떴고, 억눌린 사람들은 자유를 얻었으며, 은혜의 해가 왔음을 가는 곳마다 환히 증명되었습니다. 너무도 멋진 사역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는 누구나 이런 사역을 위해 움직이고 싶어 합니다. 이런 사역을 위한 움직임이라면 기꺼이 감사함으로, 자원함으로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역 속으로 조금만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아주 커다란 벽을 만나게 됨을 알고 계십니까? 결코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쉽게 따라갈 수 없을 만한 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함께 하셨습니다. 멀찌감치 서서 명령하신 것이 아닙니다. 거리를 두고 대하신 것이 아닙니다. 함께! 하셨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아픈 이들과 같은 공간에서 함께 하셨습니다. 네. 여기까지는 우리도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다양한 형태로 복음이 필요한 이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이 동행 역시 우리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회당장에 집에 찾아가고, 백부장의 집에 찾아가서 함께 하신 것은 우리도 한 번쯤 경험해 보고 싶은 움직임입니다.
그런데 이제 점점 우리의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 자리로 예수님이 가십니다. 갑자기 길을 가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세리 앞에 서신 예수님이십니다. 많은 이들은 그 자리에 가는 것을 꺼리거나 두려워합니다. 혹시라도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로마에 빌붙어 유대인을 힘들게 만드는 세리에게 따끔하게 한 말씀 해 주려나 보다 기대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전혀 엉뚱한 말이 등장합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예수님은 그 세리를, 레위라고도 하는 마태를, 자신의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같이 있던 제자들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상종하고 싶지도 않은 세리가 갑자기 동고동락해야 할 제자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놀라기엔 이릅니다. 잠시 후 더 놀랄만한 자리가 만들어 집니다.
예수께서 집에서 음식을 드시고 계셨습니다. 새번역에서는 굳이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만 그 집은 바로 마태의 집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마태복음 9장 10절, 개역개정>
잠깐 이 구절을 해석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 분명히 제자들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함께 음식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예수님의 제자들은 놀라서, 아니 함께 하고 싶지 않아서, 그 자리에서 잠시 벗어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 모습을 보고, 예수의 제자들에게 편하게 질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마태까지는 백 번 양보해서 이해할 수 있었어도, 다른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어울려 식사하는 자리에까지는 있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예수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당신네 선생은 세리와 죄인과 어울려서 음식을 드시오?" <마태복음 9장 11절, 새번역>
바리새파 사람들의 질문은 지금 예수님의 제자들이 가진 질문과 동일했습니다. 제자들도 묻고 싶었습니다. ‘왜 예수님은 저들과 어울려 식사하시는 것일까?’, ‘도대체 왜 저런 이들과 함께 하시는 것일까?’
예수님 시대에 ‘죄인’은 단지 ‘사악한 사람’만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종교적으로 타락한 사람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추방된 사람, 천대받는 직업을 가진 사람, 이방인과 사마리아인, 특정 분파에서 해석하는 대로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까지 아우르는 말’입니다. 쉽게 말해 ‘사회에서 소외당한 이들’입니다. 비주류이고, 손가락질받는 이들, 그들과 지금 예수님이 함께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고, 바리새파 사람들도 비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바리새파 사람들의 질문에 답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똑같은 질문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떻게 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 질문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대신 대답하십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에게도, 제자들에게도 모두에게 해 주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서 말씀하셨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자비요, 희생제물이 아니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태복음 9장 12~13절, 새번역>
예수님은 스스로를 병든 사람과 죄인의 친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친구이기에 마땅히 함께 하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 등 손가락질 받고, 소외받았던 이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것이 조금도 꺼려지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들 역시 구원받아야 할 한 사람이었고, 존귀한, 온 천하보다도 귀한 한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자들이고, 바리새파 사람들이고, 우리들입니다. 그들과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제법 낮은 곳으로 갔다고 생각했는데, 겸손과 섬김이 몸에 조금은 배인 것 같았는데, 사실은 어느 누구라도 다 할 수 있는 거기까지만 움직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에 빠져 고민할 찰나, 그 고민을 더욱 증폭시키는 이들과 관련하여서 더 충격적인 말이 예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게 됩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는데,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해라' 하고 말하였다. 그런데 맏아들은 대답하기를 '싫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 뒤에 그는 뉘우치고 일하러 갔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대답하기를, '예,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서는, 가지 않았다. 그런데 이 둘 가운데서 누가 아버지의 뜻을 행하였느냐?" 예수께서 이렇게 물으시니, 그들이 대답하였다. "맏아들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을 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오히려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옳은 길을 보여 주었으나,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다. 그러나 세리와 창녀들은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치지 않았으며, 그를 믿지 않았다." <마태복음 21장 28~32절, 새번역>
지금 이렇게 함께 식사하는 자리도 이해할 수가 없는데, 저들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믿음을 가졌다고 하는 말은 모두에게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설마 세리와 창기들이 우리보다 믿음이 낫다고요?! 사실이라면 제자들에게 이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 말입니까? 우리 역시 이 말을 들으면서 각 자 느끼는 마음이 있으실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동역자 여러분! 움직이는 교회는 생각보다 더 낮은 곳으로 움직이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내가 생각해 온 기준이 아니라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기준으로 옮겨가야 하는 교회입니다. 내가 생각할 때 이 정도 움직임이면 충분하다는 기준은 사실, 세상 그 누구도 동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기준입니다. 그건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할 수 있는 영역과 방향입니다. 교회가 아니어도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기준은 생각보다 더 낮은 곳입니다. 아니, 어쩌면 훨씬 더 낮은 곳입니다.
세리와 창기와 죄인들과 밥을 먹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 준다는 것, 세상을 섬기겠노라 말하는 우리 사전에는 없는 이야기들이었습니다. 무엇인가 깨끗하고, 거룩하고, 그래도 섬기고 나면 칭찬 들을 만한 사람과 무리가 아니라 세리와 창기와 죄인들과 밥을 먹고, 그들을 섬기고, 그들을 위해 움직여야 한다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소외 받은 이들과 함께 소외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왕이면 내가 하는 움직임이 누구라도 알아주면 좋을 움직임이라는 생각이 있다면 더더욱 힘든 움직임이 그들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큰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건 어린이의 순수함에 대한 표현이 아닙니다. 당시 어린이의 입지는 현재의 어린이들의 입지와 확연히 다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권이라는 거의 어린이에게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숫자에도 포함되지 않았고, 어린이의 말은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어린이처럼 자기를 낮추라고 말씀하십니다. 더 낮아질 것도 없는 어린이처럼, 생각보다 훨씬 더 낮은 곳으로 나를 움직여야 합니다. 그래야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라 불리는 움직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 하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18장 5절, 새번역>
지금 세리와 죄인과 창기들을 받아들이기도 어려운 순간에, 어린이를 받아들여야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떠나가는 것입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대체 얼마나 더 낮아져야 합니까? 어린이를 사람으로도 대접하지 않던 시대에, 어린이를 영접해야 한다는 거룩한 말까지 써가시면서 우리를 더 낮은 곳으로 권면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래야 예수님을 영접하는 움직임이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확실히 느끼는 바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낮은 곳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치 훨씬 더 낮아지는 것에 대해서 부담스러워하는 우리의 마음을 알고 있는 듯 그 낮아짐의 움직임이 무엇이고 어떤 것인지에 대해 알려 주고 싶어 하는 이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솔선수범한 이야기를 바울은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이 정도는 낮아져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낮은 곳으로 가는 움직임이라고 말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 6~8절, 새번역>
하나님이, 신이, 자기를 비우는데 어디까지 비웁니까?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이 되셨습니다. 사람이 되시고 나서도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시는 움직임을 보이신 분이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이 정도는 되어야 낮아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보여야 할 움직임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움직여야 할 범위입니다.
어떻습니까? 두렵고 걱정되십니까? 그렇다면 그에 따른 결론도 꼭 알고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용기를 내서 우리의 생각보다 더 낮은 곳으로, 예수님이 가신 곳으로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 9절, 새번역>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마태복음 23장 12절, 새번역>
움직이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더 낮은 곳으로 움직이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거기까지가 아닌, 이쯤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거기까지 보다도 더, 힘들다고 생각했던 것보다 더, 낮은 곳으로 움직이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 땅에 모든 소외 받는 이들의 친구가 되어주는 곳까지,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기까지,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과 같이, 신이 인간이 되어 십자가에 죽은 것과 같이, 움직이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결단 찬양 – 낮은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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