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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회(韓明澮)
시대 : 조선
생몰년 : 1415-1487(태종15-성종18)
본관 : 청주(淸州)
자 : 자준(子濬)
호 : 압구정(狎鷗亭)/사우당(四友堂)
시호: 충성(忠成)
활동분야 : 문신
1415(태종 15)∼1487(성종 18).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준(子濬), 호는 압구정(狎鷗亭)·사우당(四友堂).
예문관제학 상질(尙質)의 손자로, 기(起)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예문관대제학 이적(李逖)의 딸이다. 두 딸은 장순왕후(章順王后:睿宗妃)와 공혜왕후(恭惠王后: 成宗妃)이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불우한 소년시절을 보냈다. 글을 읽어서 성취한 바 있었으나 과거에는 늘 실패하였다.
1452년(문종 2) 문음으로 경덕궁직(敬德宮直)이 되었고, 이어 어린 단종이 즉위하여 김종서(金宗瑞) 등 대신이 집권하자, 친구인 교리(校理) 권람(權擥)의 주선으로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접근, 무사 홍달손(洪達孫) 등 30여명을 추천하여 그의 심복을 삼게 하였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심복 참모로서 대공을 세워 군기녹사(軍器錄事)가 되고 정난공신 1등으로 사복시소윤(司僕寺少尹)에 올랐다.
이듬해 동부승지가 되고,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좌부승지에 승진되고, 그해 가을 좌익공신(佐翼功臣) 1등으로 우승지가 되었다.
1456년(세조 2) 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을 좌절시키는 데 중요한 구실을 수행하고, 그들의 주살(誅殺)에 적극 협조함으로써 좌승지를 거쳐 도승지에 승진하고 1457년 이조판서에 올라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졌으며, 이어 병조판서가 되었다.
1459년 황해·평안·함길·강원 4도의 체찰사(體察使)를 지내고 1461년 상당부원군에 진봉되었으며, 이듬해 우의정에 이어, 1463년 좌의정을 거쳐 1466년 영의정이 되었다. 권람·신숙주(申叔舟) 등과 인척관계를 맺고 세조 치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1466년 이시애(李施愛)가 함경도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신숙주와 함께 반역을 꾀하였다는 혐의로 피체, 신문을 당하였으나 혐의가 없어 곧 석방되었다.
1468년 세조가 죽자 세조의 유교(遺敎)에 따라 원상(院相)으로서 서정(庶政)을 결재하였다. 같은해 남이(南怡)의 옥사(獄事)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공신(翊戴功臣) 1등에 책록되고, 1469년(예종 1) 다시 영의정에 복직되었으며, 이해에 예종이 죽고 성종이 즉위하자 병조판서를 겸임하였다.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1등에 책록되고 그해 영춘추관사로서 최항(崔恒)·신숙주 등과 함께 《세조실록》을 완성하였으며, 성종에게 학문을 진흥시킬 방안을 제시하였고, 서적이 부족한 성균관의 장서확충을 위하여 경사(經史)관계의 서적을 많이 인출하여 비치하게 하였다.
1484년 70세로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세조 즉위 이래 성종조까지 고관요직을 역임, 군국대사에 많이 참여하였는데, 세조는 특히 그를 총애하여 “나의 장량(張良)”이라고까지 하였다.
4차의 1등 공신으로 많은 토지와 노비를 상으로 받아 호부(豪富)를 누렸다. 세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충성(忠成)이다.
1504년(연산군 10)의 갑자사화 때 연산군의 생모 윤비(尹妃) 폐사(廢死)에 관련하였다 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가 뒤에 신원되었다.
1) 업적
한명회는 계유정난(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사건)의 공신으로 세조의 장자방(삼국지의 제갈공명같은 책사)이라 할 만큼 뛰어난 지략가였습니다. 질문자님 말씀대로 대단히 똑똑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조의 입장에서만 일을 했기 때문에 단종의 입장에서 보면 역적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암튼 경덕궁을 지키는 말단관리가 영의정까지 올라 조정을 좌지우지 했으니 대단한 인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아래는 한명회의 출세 과정입니다)
한명회는 1452년(문종 2) 문음으로 경덕궁직(敬德宮直)이 되었고, 이어 어린 단종이 즉위하여 김종서(金宗瑞) 등 대신이 집권하자, 친구인 교리(校理) 권람(權擥)의 주선으로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접근하여 무사 홍달손(洪達孫) 등 30여명을 추천하여 그의 심복을 삼게 하였습니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심복 참모로서 대공을 세워 군기녹사(軍器錄事)가 되고 정난공신 1등으로 사복시소윤(司僕寺少尹)에 올랐습니다.
이듬해 동부승지가 되고,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좌부승지에 승진되고, 그해 가을 좌익공신(佐翼功臣) 1등으로 우승지가 되었습니다.
1456년(세조 2) 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을 좌절시키는 데 중요한 구실을 수행하고, 그들의 주살(誅殺)에 적극 협조함으로써 좌승지를 거쳐 도승지에 승진하고 1457년 이조판서에 올라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졌으며, 이어 병조판서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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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9년 황해·평안·함길·강원 4도의 체찰사(體察使)를 지내고 1461년 상당부원군에 진봉되었으며, 이듬해 우의정에 이어, 1463년 좌의정을 거쳐 1466년 영의정이 되었습니다. 권람·신숙주(申叔舟) 등과 인척관계를 맺고 세조 치정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2) 암살당했다던데..
아닙니다. 73세까지 살다가 병이 들어 사망하였는데 후일..연산군이 무덤을 파헤치고 시체의 머리를 잘라내는 부관참시를 감행하였습니다.
(아래는 한명회의 말년을 적은 것입니다.)
폐비 윤씨가 비극적인 종말을 맞은 뒤 5년이란 세월이 더 흐른다.
그 동안에도 한명회는 끈질기게 생명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동안 한명회는 정경부인 민씨와도 사별을 했다. 그는 적막한 연화방 집에 누워서 지난 35년의 세월을 되돌아보고 있었다.
단종, 세조, 예종, 성종의 4대를 거치는 그 35년. 그러나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왕비가 되었던 두 따님은 스물을 넘기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고 외아들 한 보는 아직도 미관말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한명회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나랏일을 걱정했다. 폐비윤씨의 사사문제가 목에 걸린 가시처럼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분명 그 일로 큰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던 것이다. 그것까지 자신이 해결하고 갈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이제 한명회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인수대비는 한명회의 병이 위중하다는 사실을 듣고 성종에게 한명회를 특별히 보살필 것을 당부했다. 이에 성종은 좌승지 한언과 내시 김처선을 보내 한명회를 돌보게 했다.
성종 18년 11월 14일.
한명회는 김처선의 도움을 받으며 관복을 입기 시작했다. 좌승지 한언 등이 이유를 물었지만 그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관복을 다 입은 한명회는 북쪽을 향해 네 번 절을 하였다. 탈진한 듯이 절을 마친 그는 옆으로 쓰러졌다. 김처선과 한언이 얼른 그를 부축했다. 한명회는 한언의 품에 안긴 채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임금과 대비들의 만수무강을 빌고는 눈을 감았다.
이때 한명회의 나이 73세였다.
한명회(韓明澮:1415~1487)
1466년 세조11년 정월, 신숙주의 뒤를 이어 좌의정 한명회가 영의정에 오르니,
그때 한명회는 벼슬길에 들어선지 겨우 13년만이요 나이는 52세였다.
한명회는 태종때의 영의정 한상경의 형이며
조선개국과 함께 명나라로부터『조선』이라는 국호를 받아 온 공으로,
예문춘추관태학사에 오른 한상질(韓尙質)의 손자였으며,
일찍 세상을 뜬 한기(韓起)의 두 아들 중 맏이로 개성에서 태어났는데,
청빈했던 할아버지의 곤궁한 가세에, 부모마져 일찍 여의니,
그는 어려운 생계를 피할 수 없었다.
자를 자준(子濬), 호를 압구정(鴨鷗亭), 또는 사우당(四友堂)이라 했던 한명회는,
잉태한지 일곱달만에 태어난 칠삭동이에,
몰골이 제대로 안되어 내다 버리고자하는 것을 여종이 낡은 솜옷에 싸두었더니,
몇 달이 지나서야 형체가 갖추어졌고, 세살들어 비로소 사람다운 모습을 드러내기는 했으나,
커서도 얼굴이 아래가 너무 넓게 퍼지고,
위는 좁고 뾰죽하여 마치 손으로 잡아 늘인 듯 길쭉한데다,
주먹코에 눈은 크고 동자가 바로 잡히지 않은 사팔뜨기로 극히 못 생겼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그의 종조부 한상경은, 한명회를 ‘가문의 천리마’ 라며 달리보아 오랫동안 거두어 길렀고,
중추원사 민대생(閔大生)은 이런 한명회를 보살펴 셋째 사위로 삼았다.
어느 스님이 한명회를 보고 “머리위에 빛이 있으니 몇 년 안으로 반드시 큰 뜻을 얻으리라”하였으나,
과거시험에는 늘 실패하였다. 이에 의기소침하던 한명회의 운명은,
절친했던 친구 권람(權擥)에 의해 풀렸다.
나이 한살 아래인 권람은 이미 문과에 장원급제한 신진관료로 마침 수양의 핵심 막료였다.
보다 못해 권람은 수양에게 부탁, 한명회에게 한자리를 얻어 주니,
개성의 고려궁궐인 경덕궁 궁직이였다.
이로써 호구지책을 얻은 한명회는 수양의 둘도 없는 책사로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느날 한명회는 점술에 능한 술객 하나를 권람에게 데리고 갔다.
그 술객은 권람의 상을 보고 “머지 않아 큰 벼슬을 하겠오” 하더니,
“장차 나라에 큰 정변이 일어 많은 벼슬아치들이 다칠 것이고,
정변의 승리자는 당신들 두 사람이 될 것 같다” 고 떠 벌이더니,
한명회를 유심히 쳐다 보고는 “귀한 몸이 되어 영의정30년은 지내겠오.
눈에는 살기가 등등하니 인명을 많이 해 할 것이오, 어쩌면 액운이 따를 지도 모르지만
살아생전에는 아무 염려가 없겠오”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한명회는 날아 오를듯이 기뻤고,
권람도 술객의 말을 믿고 수양과 보다 적극적으로 일을 꾸미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에 한명회의 운명과 수양의 야욕은 따스한 햇볕아래 옥토에서 솟는 새싹처럼 힘이 찼다.
이리하여 계유정난을 거쳐 수양이 왕위에 오르니,
한명회는 일등공신으로 권력의 중심에 들어, 쉽게 영의정자리를 차지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권람은 술객의 말대로 일찍 좌의정에 올라 관직은 높았으나 50세 나이로 이미 죽고 말았다.
한명회는 다섯 번 영의정을 역임하며 한통을 치다가 물러났는데,
성종7년 다시 왕의 부름에 좌의정으로 국정을 살피게 되었다.
그때 교활하기 그지없던 유자광(柳子光)이, 민심을 등에 업고 한명회를 모질게 헐뜯으니,
그동안의 뇌물욕심 등 쌓인 흠이 들어난 한명회는 결국 배겨내지 못해 자리를 잃었다.
그는 분에 못이겨 도끼로 자기 정강이를 찍어버리고 은신하다가,
성종18년 11월 73세 나이로 숨지고 말았다.
결코 누린 영화만큼 복된 임종은 아니었다.
성종은 그에게 충성공(忠誠公)으로 시호를 내리고 세조의 묘정에 배향하게 하였다.
한명회는 아들 보(堡)와 네 딸을 두었는데, 한보는 음보로 관직에 나가 공조참판에 이르렀고,
맏딸은 세종의 사위 윤사로(尹師路)의 며느리, 둘째는 신숙주의 맏며느리,
셋째와 넷째딸은 각각 예종·성종의 왕후가 되었다가 둘 다 요절하여 한명회의 속을 태우니,
세상 민심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라 했다.
한명회의 손자 한경침(韓景琛)은 성종의 사위가 되므로써
그의 가문은 겹겹으로 왕실과 인연을 얽은 셈이다.
또 다른 손자 한경기(韓景琦)는 연산군때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사람으로 벼슬을 피했으나,
국가원훈의 적손으로 억지기용 당해, 관직이 돈녕부정에 이르렀다.
한명회의 아우 한명진(韓明?)도 형의 입김으로 정난공신3등에 올랐는데
관직은 전구서승(典廐署丞)에 머물렀다.
한말의 독립운동가 한용운이 한명진의 9대손으로 전해진다.
한명회는 폭군연산에 의해 폐비윤씨의 죽음에 가담된 인물로 꼽혀 부관참시되는 화를 입었으나,
중종반정으로 복관되었다. 충청남도 천안시 수신면 속창리에 한명회의 묘역이 있고,
묘역에는 판서 서거정이 지은 신도비와, 후손들이 그를 제향하고자 세운 충성사(忠誠祠)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