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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9 - 카페왕조 필리프 2세 부빈전투 승리로 프랑스 통일과 알비십자군에 루이 9세!
영국 플랜타지넷 왕조 3대왕 존 1세는 리처드 1세 동생으로 왕위에 오르긴 했지만 잉글랜드 내부
에서 평판이 안좋았으니 프랑스 내 견고해 보였던 플랜태저닛 영지의 귀족들은 하나둘 존 1세로
부터 이탈해 나갔는데... 1212년까지 필리프 2세는 과거 헨리 2세가 장악했던 플랜태저닛 영지
들을 하나, 둘씩 차지해 나갔으며... 급기야 플랜태저닛의 고토인 노르망디와 앙주마저 장악합니다.
봉건주의적 질서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던 이때에 필리프 2세는 왕령지 자체를 4배 가까이
확장하는 한편 여기에서 나온 재정과 세력을 바탕으로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제후·귀족들이 이탈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니 프랑스 왕국 내부에서는 필리프 2세
에게 유리한 상황이 조성되고 있었지만 신성 로마제국에서는 정반대의 상황이 전개됩니다.
영국 플랜태저닛 왕조에 적대적이었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가 1197년 사망하자, 친교황적
이자 호헨슈타우펜 가문의 경쟁자였던 벨펜 가문의 오토 4세가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의 지지로
대주교가 3명이나 포함된 선제후 7명이 뽑는 황제로 즉위했기 때문이었는데, 오토 4세의 어머니는
헨리 2세의 딸 마틸다였으니 그는 존 1세의 조카로서 잉글랜드와 긴밀한 유대 관계를 맺기 시작합니다.
연패를 설욕하려는 존1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오토 4세와 플랑드르 귀족과 연합하자 1214년 필리프
2세는 이들과 전쟁을 벌이는데... 1214년 7월 하순에 필리프 2세가 이끄는 프랑스군 7,000명은
잉글랜드-플랑드르-신성로마제국 연합군 9,000명과 플랑드르 지역 부빈(Bouvines) 에서 대치
했으니, 7월 27일 일요일에 연합군이 선제공격을 감행함으로써 그 유명한 부빈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부빈전투에서 프랑스왕 필리프2세가 승리하니 존1세와 오토4세는 도주했고 플랑드르 귀족들은 필리프
2세의 포로가 되었는데.... 이후 1214년 9월 18일 필리프 2세는 존 1세와 영토 구획을 결정하는
협정을 맺었으니, 존 1세는 필리프 2세의 정복을 모두 인정해야만했으며 모후 알리에노르로 부터
물려받은 아키텐 일부를 제외하고는 프랑스 왕국 내 다른 영토에 대한 권리들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팽창된 영토와 더불어 부빈 전투는 이후 필리프 2세와 카페 왕조에 확고한 이데올로기 하나를
선사하게 되니 ‘가장 기독교적인 왕(rex christianissimus)’ 이라는 명칭인데.... 신이 정한
휴일인 일요일에 싸움을 시작한 존 1세와 오토 4세는 명백히 당시 교회에서 강조하고 있던 ‘신
의 휴전‘ 운동에 대한 도발이었으니 이들은 단순한 적이 아니라 반기독교적인 악마로 묘사됩니다.
감히 주일(일요일)에 전투를 하다니? 두 군주의 연합군은 영원한 분열과 악을 상징하는 숫자인
’2‘ 와 결부되어 머리 둘 달린 괴물로 묘사되고, 프랑스군은 필리프 2세 한명을 중심으로
프랑스인들로만 조직된 천상의 군대와 같이 묘사되었는데.... 하지만 필리프 2세에게 이러한
명칭을 부여하게 된 계기는 무엇보다도 부빈 전투 전후로 전개되었던 알비 십자군이었습니다.
알비란 현재 프랑스 남부 지방에 있는 도시 이름으로 이곳은 당시 툴루즈 백작령을 중심으로
널리 퍼져있던 기독교의 한 분파인 카타리교의 중심지였으니..... 즉 알비 십자군은 종교적인
차원에서 보면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 주도로 이단인 카타리도에 대한 정벌을 의미 했습니다.
리옹에 살던 상인 페트루스 발두스 Baldus 는 경건한 가톨릭교도로 자신이 정직한
만큼 성경의 문장도 정직하게 쓰였다고 여겼으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 보다 쉬우니라." (마태복음 19장 24절)
라는 예수님 말씀을 곧이곧대로 받아 들였으니.... 여기에서 모든 비극이 시작됩니다.
누가 너의 왼 뺨을 때리면 달려들지 말고 오른 뺨도 내어주며 누가 너의 윗옷을 벗기면 대항하지
말고 바지 까지 벗어서 주라는 말도 비슷한 비유입니다? “너의 모든 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을
도우라.” 는 성서의 가르침 에 따라 자신의 재산으로 빵과 밀가루를 사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는 사업을 접었으니 그의 행동은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했습니다.
가톨릭 신학자들의 성서 해석은 너무나도 복잡했으니.... 말 그대로 해석하면 쉬울 것을! 그는 자기
돈으로 성서를 지역 언어로 번역한후 프로방스 지방에 배포했으니 이때부터‘가난한 사람들
(pauperes)’이라고 불리는 발두스의 추종 세력인 발도파 (Waldenses) 가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참으로 위험스럽게도 "성서 말씀대로 살고자" 했습니다. 청빈한 삶, 가난한 사람을
돕는 삶, 신자와 수도자 사이에 평등 함을 유지하는 삶을 추구했고.... 당시 교황
과 교회는 이러한 삶에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점차 깨닫게 되었습니다.
라틴어 성서를 사용하지 않고 기존 교회에 비판을 아끼지 않는 이들을 그대로 둘 수
는 없는 일? 중세 종교재판의 기초를 닦은 것으로 알려진 교황 루키우스 3세가
활동을 금지시켰는데도.... 이들은 지속적으로 “청빈한 신앙생활”을 계속했고
스페인에서 독일, 이탈리아 남부와 헝가리에 이르는 지역으로 운동이 확산되었습니다.
두 번째로‘선량한 사람들(순수파)’이란 교파가 교황을 불편하게 했으니 이미 이단으로 판정받은
카타리파인 알비파(Albigenses) 를 가리키는 말로 이들은 프랑스 남부 툴루즈의 알비시를
근거로 활동하면서 성서에 근거한 삶 외에 아무것도 몰랐던 선량하고 순진한 사람들 이었습니다.
원래 순수파들은 마니교적 이원론에 바탕을 둔 교리로 그리스도교 신은 영적인 것만을
창조하였으며 반신(反神) 악마는 신에게 반기를 든 인간을 물질속에 가두었으므로
인간은 물질적인 것으로 부터 해방 되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으니....
물질(결혼, 육고기 섭취, 사유 재산 등) 과 관련된 모든 것을 배척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알비파(카타리파)는 발칸반도, 북 이탈리아, 남 프랑스를 거쳐 12세기 중엽 프랑스
툴루즈 지방의 알비 Albi 에 전파되면서 세력을 크게 떨쳤는데 금욕적인
계율을 지켰으며.... 대중 앞에서의 성서 낭독과 통과의례(通過儀禮) 등을
중시하였으니 통과 의례를 통하여 일반 신자는 완전한 자, 즉 '카타리’ 가 됩니다.
카타리교도에 대해 교황은 도미니코 수도회를 중심으로 이단 심문을 통한 설득 작업을 벌여
나가고 있었으나 툴루즈 백작 및 남부 프랑스 귀족들이 카타리교를 신봉 및 후원하고
있어서 상황은 간단치 않았으니.... 이러한 상황에서 1208년 교황 대사 피에르 드 카세텔노
가 암살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인노켄티우스 3세 교황은 바로 무력 개입을 결정 합니다.
1209년 인노켄티우스 3세 교황이 발도피와 카타리파(알비파) 두 이단에 대해 공식적으로 십자군 파견
을 선포 하자 북부 프랑스와 영국, 오스트리아, 폴란드 등지의 범법자와 돈이 궁한 귀족 등이 이런
인생 일대에 "한몫을 챙길수 있는 절호의 기회" 를 놓치지 않으려고 선착순! 을 외치며 몰려들었습니다.
40일 동안 십자군 으로 활동하는 자에게는 “빚에 대한 이자가 탕감" 될 것이고....
"과거와 미래의 죄" 가 사해질 뿐 아니라, 일정 기간 동안 "사법적 대상 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는.... 엄청난 제안(?)을 로마 교황청 으로 부터 받았기 때문입니다!
비록 결혼 문제로 파문을 받은 적이 있었지만 전통적으로 프랑스 왕권이 친교황적인 정책을 유지했고
또 알비시가 형식적으로는 프랑스 왕국에 속했기 때문에 인노켄티우스 3세는 필리프 2세에게 원정
을 부탁하니 1213년 필리프 2세는 시몽 드 몽포르 4세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알비 십자군을 조직
하고 카타르교도에 대한 진압에 들어가는데 십자군 참가자들은 재물과 토지에 눈먼 자들이 많았습니다.
십자군의 실상은 숭고한 종교적 대의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으니... 먼저 알비 십자군은 누가 이단인지
정확히 판별할수 없는 상황에서 이단으로 의심되는 남프랑스 지방 사람들에 대한 엄청난 학살을
자행하고 재물과 토지를 강탈했으며, 또한 정치적 차원에서 북부 프랑스 왕이 아직 자신의 권위
에 굴복하지 않은 남부 프랑스 제후들과 귀족들을 무자비하게 복속시키는 정복전쟁이기도 했습니다.
베지에시를 점령한 군인들이 선량한 가톨릭교도와 이단자를 가려내기 위해 우왕좌왕하자
따라온 교황청의 사절이 말했습니다. “아들들이여, 가서 모두 죽이시오. 주께선 당신
의 백성들을 알아보실 것이오.” Caedite eos. Novit enim Dominus qui sunt eius.
누가 이단인지 번거롭게 가려내지 말고 남자든 여자든 노인과 어린아이 까지 보이는
대로, 닥치는대로 모두 다 죽이라는 것이니..... 어린애 하나도 살려두지 말라는 말입니다!
십자군 전쟁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시몽 드 몽포르 라는 인물이 있었으니 제4차십자군
원정을 다녀온 인물로 베지에와 카르카손을 정복 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워 그 지역을
부여 받았는데...... 약속한 40일이 지나자 대부분 전사들은 전리품에 만족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시몽 드 몽포르 그는 여전히 배가 고팠으니.... 툴루즈 백작인 레몽 6세
의 오래된 영토 까지 모두 차지하였는데 툴루즈 백작은 이단을 완전히 제거
하는데 실패해서 가톨릭과 프랑스 왕으로 부터 땅을 몰수당한 상태 였습니다.
이제 몽포르 는 자신을 툴루즈 백작 겸 베지에와 카르카손 자작임과 동시에 나르본 공작
이라고 칭했으니 세가지 작위를 가진 것은 역사적으로도 유래가 드물 것인데 그러나
그의 과한 욕심은 화를 불렀으니 전열을 가다듬은 레몽 6세의 반격을 받고 살해당합니다.
많은 발도파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포기한 대가로 목숨을 건졌으나 신앙을 포기할수
없었던 사람들은 공격의 손길이 닿기 힘든 이탈리아와 가까운 피에몬테 계곡으로
숨어들었으며 그곳에서 종교개혁 때 까지 자신들만의 교회를 일구며 숨어서 살았습니다.
700년이 지난 지금도 신앙적 후손들이 세계 곳곳에 존재하고 있다는데 반대로 카타리파
로도 불리는 알비파는 운이 나빴으니 숱한 이단 법정의 고문 과 박해와 교수형
을 당한 끝에.... 그들의 이름은 1350년 이후 역사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고야 말았습니다.
교회에서는 이단에 맞서 이단 심문제도를 만들었으며 또한 이들의 융성은 탁발수도회
의 발달 을 가져오기도 했다는데.... 알비파를 모두 죽인후 로마 교황청은 가톨릭의
위엄 을 보이고자 그들의 근거지 알비시에 위압적인 세실 대성당 을 건축했던 것입니다?
제가 가지는 의문은 그들이 설사 이단 이라면... “가톨릭“ 이나 ”그리스도교“, ”기독교“ 라는
명칭만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면 될 일이지 "로마 교황청이 그들을 모두 죽일 권리" 가
어디 있다는 것일까요? "대량 살인을 할 권리는 누가 준 것일까요?" 또 이단 이라고 사람들
을 죽인다면 가톨릭교회의 어떤 기준대로 "일반 가톨릭 교인과 이단자들을 구별" 해야지요?
36년간 100만명의 사람들을 죽였다는데 이단자가 아닌 일반 교인들도 엄청 죽었습니다.
이후 중세의 마녀 사냥은 주로 남편이 죽어 과부가 된 부유한 여인 들을 대상으로
했는데 이는 마녀의 집과 땅이며 재산 을 "밀고자와 가톨릭 교회 그리고 왕" 이
사이좋게 3분해 차지 했기 때문이니.... 가난한 자는 죽여봐야 손에 쥐는게 없지요?
그러니 도시와 마을의 주민 전체를 모두 알비파로 몰아 모조리 몰살 시켜야 그들의
집과 밭이며 재산을 십자군과 로마 가톨릭 교회 그리고 프랑스 왕이 3등분 나눌
수 있으니 구태여 누가 이단인지 심사할 필요 가 있을까요? 더욱이 그들이 자신
들은 선량한 가톨릭교도 라고 주장하면 실제로 단기간에 가려낼 방법도 없습니다?
그런데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는 평소에 마녀 사냥은 여자가 마녀인지 아닌지 가려내는 훌륭한(?)
방법이 있었으니, 혐의자를 묶은채 물에 빠트리면 물은 개끗한 속성을 가지고 있으니
마녀라면 물 밖으로 내쳐지기 때문에 떠오른다고 믿었으니 여자가 물위로 떠오르지 않고
익사하게 되면 마녀라는 혐의를 벗게 되지만 이미 죽은후 이고, 떠오르면 마녀임이 증명
되었으므로 화형을 당하게 되니 어느쪽이든 100% 죽이는게 로마 가톨릭 교회의 방식 이었습니다.
그런데 "선량한 사람들" 이라고 불리었던 저 불쌍한 카타리파(알비파) 는 저런 엉터리 선택
조차도 없이 보이는대로 모두 다 무차별 죽임을 당했던 것 인데.... 그리고 이 과정에서 원인
부터 결과 까지 기록은 가톨릭교회측에서 작성했습니다. 그러니까 죽은 사람들은 말이 없고
우리는 죽인 사람들인 가톨릭교회측이 작성한 자료 및 기록만 가지고 당시를 추측하는 것입니다.
당시 프랑스는 왕의 직할 영지는 파리와 오를레앙등으로 극히 적고 전국이 10개의 대제후들의 나라로
갈라져 있었는데.... 알비 십자군전쟁을 치른 1215년 이후 상전백해라고 프랑스 전역에 걸쳐 필리프
2세의 왕권은 감히 도전할 세력이 없을 정도로 급격히 성장했으니 서프랑키아 지역으로 국한해
본다면 샤를마뉴와 경건제 루이 1세 이래로 이렇게 왕국이 하나의 왕 아래 통합된 적이 없었습니다.
필리프 2세는 이전 카페 왕들을 괴롭히던 지방분권적 권력파편화를 일거에 극복하고 전 왕국
에 걸쳐 모든 제후들이 프랑스 왕 아래 복종할 수밖에 없는 중앙집권화된 봉건 질서를
이루어 냈으니..... 그것은 위그 카페 부터 루이 7세 까지 전개되던 원심적 봉건주의
와는 전혀 다른, 역사학자 마르크 블로크가 제2차 봉건제라고 부르는 정치 질서였습니다.
이후 존 1세의 실정에 저항하는 일부 잉글랜드 귀족들의 부탁으로 세자 루이(훗날 루이 8세) 가
잉글랜드 원정을 감행했으나.... 프랑스왕의 급성장을 경계하는 교황의 비협조적 태도와
당대의 뛰어난 기사 윌리엄 마셜의 저항으로 실패하고 말았는데, 남부 프랑스의 저항도
지속되었으며 필리프 2세와 그의 아들 루이 8세는 지속적으로 이곳에 대한 원정을 감행했습니다.
필리프 2세는 1223년 7월 14일에 사망함으로써 격정적이고도 파란만장했던 그의 삶을 끝냈는데....
지방분권적 봉건적 폭력들이 잦아든 왕국에는 서서히 평화와 질서가 확립되어 가기 시작했고
고딕 문화와 스콜라 철학을 중심으로 하는 중세 문화의 번영을 준비하기 시작했으니 필리프
2세는 성왕 루이 9세를 중심으로 한 13세기 프랑스 대번영의 기초를 확고히 놓은 왕이었습니다.
루이 8세(1223–1226) 는 1223년 프랑스 왕위에 즉위했는데 이전에도 부왕 필리프 2세를
도와 프랑스 전역을 다니며 전공을 세워 ‘사자’ 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1217년에는
잉글랜드 원정을 감행했으나 실패했고 즉위 후 1226년에는 다시 한번 반 카타르
십자군을 조직해 카타르 비호 세력인 툴루즈 백작을 굴복시켰으나 이질에 걸려 요절합니다.
루이 8세는 카페 왕들과 달리 부왕 생존시 축성식을 받지 않았는데 필리프 2세 이후로 세자의 축성식
을 안해도 될 만큼 왕위계승에 대한 우려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필리프 2세의 업적으로
카페왕조는 이제 프랑스 전역에 걸쳐 정당성을 지녀 안정적인 왕위 계승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루이 8세의 정치 및 군사적 활동은 필리프 2세 치세 당시부터 시작되었으며 1210년 이후
전개된 잉글랜드 및 남부 프랑스에 대한 원정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는데...
1214년 부빈전투 이전에 아키텐에서 잉글랜드 왕 존 1세에게 거둔 대승에서
용맹한 모습을 보여 이때 부터 그는 ‘사자왕(le Lion)’ 이라는 명예로운 별칭을 얻었습니다.
1215년 잉글랜드 귀족들은 존 1세에게 “대헌장(Magna Carta)”을 제시하였는데 존 1세는 받아들이는
척 하다가 보복을 감행했으며..... 이듬해 1216년 존 1세가 사망하고 어린 헨리 3세가 즉위하자
영국내의 반 플랜태저닛 귀족들은 프랑스 왕세자 루이 8세에게 헨리 3세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를 것을 제안했는데... 하지만 루이 8세는 윌리엄 마셜 등의 잉글랜드군에 패배해 퇴각 합니다.
루이 8세는 ‘가장 기독교적인 왕’ 이라는 명성을 그대로 이어가고자 했으니 유대인들에게
돈을 빌리지 말 것을 명령함으로써 국가의 정책을 교회의 교리에 부합하게 만들고자
했지만 당시 샹파뉴 정기시를 통해 샹파뉴를 새로운 경제의 중심지로 만들고 있던
샹파뉴 백작 티보 4세는 이러한 루이 8세의 정책에 공공연히 반대를 표하기도 하였습니다.
1225년 루이 8세는 필리프 2세 당시에 정복된 남부 랑그독 지역에 대한 십자군 원정을 감행했는데
이미 시몽 드 몽포르 4세의 정복 직후부터 남부 랑그독 지역에서는 종교와 결합된 정치적 갈등이
크게 확산되고 있었으니 카타르교에 대한 십자군은 곧 북부 프랑스 침략군으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툴루즈 백작 레몽 7세는 알비 십자군의 빌미였던 카타르파를 비호하고 있는 것으로
의심받고 있었으니 결국 1225년 부르주 공의회에서 레몽 7세를 파문에 처하고 다시
한번 십자군 원정을 천명했는데 루이 8세는 이 결정을 받아들여 툴루즈로 공격에 나섰으니
3개월간 원정으로 툴루즈 백작령 곳곳이 점령당했고 결국 백작 레몽 7세는 포로가 되었습니다.
루이 8세는 툴루즈 백작령을 왕령지에 편입시키고자 했지만 티보 4세는 이러한 시도에 반대
를 표했으며 봉신으로서의 원정 의무가 끝났다는 점을 내세우며 티보 4세는 샹파뉴로
되돌아갔는데 얼마후 루이 8세는 급작스럽게 이질에 걸려 11월 8일 짧은 생을 마감
했으니.... 그 뒤를 이어 이제 열두살 밖에 안된 세자 루이(루이 9세) 가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1229년 4월 12일 툴루즈의 백작 레몽 7세와 프랑스가 파리 조약을 맺었으니 이 조약의 결과
로 레몽 7세 소유의 툴루즈 일부 영지를 프랑스의 왕 루이 9세에게 양도하고 레몽 7세
의 외동딸과 루이 9세의 형제가 결혼하게 되었으니.... 이로써 알비 십자군이 종결되었습니다.
성 루이 9세(1226–1270) 는 열두살이 되던 1226년 어머니 블랑슈를 섭정으로 왕위
에 올랐는데 즉위 직후 전개된 봉건 제후들과 잉글랜드왕 헨리 3세의 반란
을 진압했고 기독교적인 이상에 따라 왕국에 정의와 질서를 확립하고 여러
개혁들을 실시했으니 프랑스는 사회, 경제, 문화 등의 방면에서도 큰 발전을 이룹니다.
그는 프란체스코에도 깊은 공감을 표하면서 금욕과 청빈, 자선을 직접 실행했으니... 치세
말기에 두차례에 걸쳐 십자군을 조직하여 원정을 떠났으나 성공하지는 못했으며
특히 1270년에 떠난 마지막 십자군 원정에서 그는 풍토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유럽에서 가장 기독교적인 왕의 상징적 인물로 여겨집니다.
루이 9세는 3년간의 짧은 치세를 뒤로 한채 사망한 루이 8세 와 카스티야의
공주 블랑슈 사이 넷째 아들로 형들은 다 요절했으며 9살 되던 해에
조부 필리프 2세가 사망했고 12살이 되던 해에 부왕 루이 8세가 사망했습니다.
필리프 2세는 손자가 커 나가는 과정을 보았고 손자 루이 9세는 필리프 2세의 생전을 기억
하는데 평균수명이 짧았던 중세에는 매우 드문 현상이었으니 어린 루이 9세에게
조부 의 모습과 업적은 매우 큰 영향을 미쳤으며 또한 모후 블랑슈는 매우 신심이
독실해 어린 루이 9세에게 일찍부터 교회의 가르침에 입각하여 왕세자 교육을 시켰습니다.
갑작스러운 왕의 서거와 어린 왕의 즉위로 정국이 불안해 질수 있으니 축성식은 빠른 날짜
인 11월 29일에 거행되었는데 1227년에서 1228년까지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한
외국인 왕비가 주도하는 왕정은 반대하는 귀족들의 반란에 직면해야 했으며 더군다나
이 반란에는 숙부 필리프 위르펠은 물론 잉글랜드왕 헨리 3세 까지 개입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후 블랑슈의 선처로 감옥에서 풀려난 플랑드르 백작 페랑과 루이 8세 이후 관계 개선이
이루어진 샹파뉴 백작 티보 4세의 도움으로 루이 9세와 블랑슈는 위험을 피할 수 있었으니
1230~31년 동안에는 역으로 루이 9세가 직접 원정군을 이끌고 이 반란군들을 진압해 나갔습니다.
아직 17살의 나이에 불과했지만 군대를 지휘하는 루이 9세의 모습과 모후 블랑슈의
정치력은 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던 많은 봉건 귀족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고 이들은 점차 루이 9세와 블랑슈를 인정하기 시작했으니 1234년 20세가
된 루이 9세는 프로방스 백작 레몽-베랑제 4세의 딸 마르그리트와 결혼식을 올립니다.
이로부터 루이 9세의 권위는 별 탈 없이 프랑스 전역에 걸쳐 인정받았고 더 이상 그에 대한 봉건
귀족들의 도전을 받지 않았으나 1240년대에 들어와 또 다시 루이 9세는 전장으로 뛰어들어야
했으니..... 아키텐 지역 귀족들과 툴루즈 백작, 그리고 잉글랜드 왕 헨리 3세가 필리프 2세
로 부터 부당한 처우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서로 동맹을 맺고 봉기를 일으켰기 때문이었습니다.
1242년 생통주 전쟁에서 승리는 루이 9세에게 돌아갔으니 툴루즈 백작은 무릎을 꿇었고....
헨리 3세는 5년 동안의 휴전을 요구했으나 전쟁이 재개되지는 않았고, 루이 9세는 헨리
3세가 프랑스 왕국에 속한 퐁트브로 수도원에 방문할수 있도록 허락했는데 플랜태저닛
왕조의 기원인 앙주 지방에 위치해 있었으며 헨리 2세와 리처드 1세의 납골당이 있었습니다.
1258년 영국왕 헨리 3세는 루이 9세에게 과거 조상들의 영토(노르망디, 앙주, 푸아투 등)을
요구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루이 9세와 평화조약을 맺었고 1259년에 헨리 3세는 프랑스
서남부 아키텐 영지를 두고 루이 9세에게 봉건 신서를 행했으니 헨리 3세는 거듭되는
실정으로 시몽 드 몽포르 5세가 이끄는 잉글랜드 귀족들의 저항에 직면해 있던 때였습니다.
마치 부친 존 1세가 “대헌장” 을 제시 받았던 것 처럼 왕권을 제약하는 “옥스포드 조항” 을
제시 받았는데, 프랑스에서 루이 9세의 왕권이 확고해져 가고있는 시기에 잉글랜드에서
헨리 3세는 결정적으로 의회에 의해 왕권이 제약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으며 또한 1258년
에 루이 9세는 아라곤 왕국과 협상을 통해 남부 프랑스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확고히 합니다.
루이 9세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신실하게 따르는 세속 군주이길 원했고 왕국 전체에 정의
와 평화를 확립하길 원했으니 제 2의 솔로몬과 같은 정의로운 재판관임을 내세웠으니
헨리 3세와 잉글랜드 귀족들 사이에 옥스포드 조항을 둘러싼 분쟁을 중재하기도
했고 플랑드르 백작령에서 발생한 작위 계승을 둘러싼 무력 분쟁을 조정하기도 합니다.
영주들의 상속 분쟁은 객관적인 제3자 프랑스왕의 기준에 따라 중재되고 조정되기 때문
에 루이 9세의 정치적 위상은 점점 높아져 갔으며, 필리프 2세때 세워진 지방 행정관
들에 대한 실사를 통해 직권남용과 부정부패의 시정에 나섰으며 이와 함께 고리
대금업을 금지시키고 화폐개혁을 통해 양화를 구축하여 경제 질서의 안정을 꾀했습니다.
이러한 모든 조치들은 기존에 왕권에 의해 발생된 문제들이 빈번했다 할지라도 개혁
과 시정의 주체 또한 왕이라는 점을 보여주면서 왕국 내 신민들에게 왕권에 대한
신뢰감을 제고했으니 이는 인민들에게 왕정의 실책은 고귀한 왕명을 왜곡한
중간관리들의 무능과 부패 때문이라는‘배반당한 왕권’의 신화를 형성하게 됩니다.
13세기 중반 루이 9세 치하 프랑스는 번영 일로에 있었으니 개간지 팽창을 통해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었고 샹파뉴 지역은 북해의 무역권과 지중해 무역권이
만나는 제3의 교역권을 형성했으며... 당시 고딕 건축의 전성기로 파리 시테 섬의
왕실 예배당인 생트 샤펠 (Sainte Chapelle) 은 고딕 건축의 화려함을 자랑 합니다.
파리대학은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로 대표되는 스콜라 철학의 중심지로 학문적
위상을 높였으며 성 프란체스코의 청빈사상에 감화되었으니 그는 옷과 식사에 최대한 검소함과
금욕적 태도를 유지했으며 몸소 사회적 약자들을 돌봤으니 나병 환자와 맹인들을 왕실 구호소
에서 돌봐주고 빈민에게 세족식을 하는등 성 프란체스코를 실천하는 이상적 군주로 비춰졌습니다.
하지만 랑그독 지역 카타르파나 유대인에 대한 탄압은 기독교적 이상에 충실한 루이 9세
의 행적들과 함께 동전의 양면을 이루니 조부 필리프 2세처럼 ‘가장 기독교적인 왕’
을 보여주기 위해 애썼는데 필리프 2세처럼 교황의 충실한 오른팔이 아니라
교황과는 무관하게..... 예수와 성 프란체스코의 이상에 충실한 군주라는 의미 였습니다.
이때 신성로마제국과 시칠리아 왕국에서는 중세 서유럽에서 가장 개성있는 인물 황제 프리드리히 2세
가 교황권과 정면으로 충돌했는데 그는 프리드리히 1세의 손자로 분열된 모습을 보인 독일보다
단일한 왕권을 확립할수 있었던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에 서유럽 최초의 중앙집권적인 일인
지배체제(monarchia) 를 구축했으니 이탈리아 중부에 위치한 교황과 격렬한 충돌을 초래 합니다.
루이 9세는 둘 사이의 분쟁에 끼어들지 않기위해 조심했는데 교황들, 그 중에서도 인노켄티우스
4세는 신성로마제국 프리드리히 2세와의 대립에서 늘 수세에 처해 루이 9세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루이 9세는 중립을 지키기 위해 신중하게 처신하자 1243년 인노켄티우스 4세
는 로마의 상황이 불안하다며 프랑스 왕국 내 리옹시로 거처를 옮기고는 공의회를 소집합니다.
프리드리히 2세는 리옹시로 진격하려 했으나 루이 9세의 개입으로 단념했는데, 교황과 황제
사이에 중립을 지키는 루이 9세의 모습은 더 이상 조부 필리프 2세처럼 일방적으로
교황의 권위에 매달리는 세속 군주가 아니었으니, 또 교황을 지원할수 없었던
현실적인 이유로는........ 그가 당시 헨리 3세와 생통주 전쟁 중이었다는 사실도 있었습니다.
생통주 전쟁이 끝나고 루이 9세는 1244년 겨울부터 이질로 의심되는 병에 걸려 죽음의 문턱까지 가는
듯이 보였지만 그러나 몇주 후 루이 9세는 기적같이 완쾌되었고 자신의 쾌유를 신에게 돌리면서
십자군 원정을 떠나기로 결정했는데 모후 블랑슈는 물론이고 측근들 모두 그의 결정에 반대 했습니다.
건강이 원정을 떠날 만큼 강건하지 못했으며 무엇보다 십자군 원정을 위해 군대와 재정을 장기간
준비해야 한다는 점 때문이었으니 결국 루이 9세의 원정은 훨씬후인 1248년에 6월에야
실행되는데 모후를 섭정으로 임명하였고 프리드리히 2세의 공격을 피해 리옹에 머물고
있던 인노켄티우스 4세를 만나 잉글랜드의 공격으로 부터 프랑스를 보호해 줄것을 약속받았습니다.
2만 5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집트로 향한 루이 9세는 1250년 이집트 만수라를 공격했으나
실패로 끝나니 봉신들이 귀국하기를 권했으나 예루살렘으로 갈 것을 결정했으니,
예루살렘에서 4년간 방어를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본국에서 모후 블랑슈가 사망
하고 막냇동생인 앙주 백작 샤를이 섭정에 나섰다는 소식을 듣고는 루이 9세는 귀국합니다.
제7차 십자군은 완전히 실패한 원정이었으니 프랑스 왕국에 이득은 없었고 막대한 재정을
소비했는데, 하지만 6년간의 십자군 원정기간 동안 프랑스는 평화로웠고 루이 9세는
그 누구보다 십자군과 성지 회복에 가장 적합한 왕이라는 이미지를 전 유럽에
심어주었으니..... 그것은 향후 즉위하는 모든 프랑스 왕들의 이상적 과업이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7차 십자군 원정을 통해 루이 9세는 지중해 세계 저 멀리에 원제국에 대한
정보를 접할 수 있었으니 이슬람 협공에 대해 제안하는 서한들과 함께 기욤 드 뤼브룩
과 같은 많은 선교사들을 원나라 조정으로 보냈으나 제대로 된 답변을 듣지는 못했습니다.
1264년 시칠리아 왕국에서는 교황 우르바누스 4세가 프리드리히 2세의 아들 만프레디를 제압
하기 위해 루이 9세의 막냇동생 앙주 백작 샤를을 끌어들이니 1266년 샤를은 만프레디를
제압하고 시칠리아의 왕위에 올랐는데 하지만 동부 지중해에서 십자군의 영향력은 위축
되어 가고 있었고 소식을 들은 루이 9세는 다시한번 십자군 원정에 대한 의지를 불태웁니다.
1267년 루이 9세는 십자군 원정을 제안했으니 누구도 찬성하는 자가 없었지만 그러나 루이
9세 의 형제들, 즉 푸아티에 백작 알퐁스와 시칠리아왕이 된 앙주 백작 샤를, 그리고
1259년 파리조약 이후 루이 9세와 화해를 한 잉글랜드왕 헨리 3세는 십자군 원정에
참여 의사를 밝혔고 이에 따라 교황의 후원 아래 또 한 번의 십자군이 조직되었습니다.
하지만 십자군의 행선지는 이집트도 예루살렘도 아닌 보다 서쪽에 시칠리아의 아래에
위치한 북아프리카 도시 튀니스였는데 아마도 시칠리아 왕국의 이해관계와 관련
되어 샤를의 입김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이니 1270년 7월 제8차 십자군이 조직되어
튀니지로 향했으나 보다 잘 준비되었던 이 원정은 어이없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도착한지 한달도 지나기 전에 많은 기사들이 뜨거운 한여름의 태양 아래 풍토병으로 쓰러져
갔고 세자 필리프 3세가 심하기 앓기 시작했으며 그의 동생 네베르 백작 장 트리스탕은
사망하고 말았는데 8월 25일 루이 9세 마저도 풍토병으로 사망하니 뒤늦게 도착한
시칠리아왕 샤를은 세자 필리프를 대신해서 이집트 술탄 무하마드와 협상을 진행했습니다.
병에서 회복된 필리프 3세는 머나먼 타지에서 루이 9세의 왕위를 계승하고 부친의 시신을
수습해 1271년 5월 프랑스로 귀국했는데 제8차 십자군은 가장 잘 준비된 것이었으나
가장 허망하게 끝나고 말았고 이후 십자군 계획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지만
그것은 동시에 루이 9세를 기독교적 이상에 가장 부합하는 인물로 확고하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13세기 말 프랑스 전역에서는 루이 9세를 성자로 시성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
했으니 수많은 번복을 거친 끝에 1297년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는 루이 9세를 성자로
시성했는데, 당시 프랑스왕 필리프 4세와 교황 사이 정치적 협상의 결과였지만
루이 9세는 당대인들의 생각에 충분히 성자로 시성될만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었습니다.
이제 루이 9세와 더불어 카페 왕조는 자신들의‘신성한 혈통’을 강하게 주장하기 시작했는데 하지만
기독교적 이상에 충실했던 루이 9세 업적은 이후 카페 왕들과 발루아 왕들에게 보편적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질서에서 벗어나 프랑스 국가 체제를 형성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부여해 주었습니다.
또한 루이 9세의 오랜 치세를 거쳐 프랑스 왕국의 인민들은 봉건적인 질서를 확고히 벗어나 왕에
대한 강한 신뢰감과 충성심을 보내게 되었으니 이제 카페 왕조 초기와 달리 프랑스 왕은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감히 무시할수 없는 상징 권력을 지니게 되었는데 필리프 2세가 왕권을
확장시켰다면 루이 9세는 확장된 왕국을 왕권을 중심으로 강력하게 접합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필리프 3세(1271–1285) 는 1270년 루이 9세가 제8차 십자군 도중 튀니지에서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는데 왕령지 확장과 내치를 통한 왕권 강화와 왕국의 질서 확립에 힘을
쏟았으며 1282년 아라곤왕 페레 3세의 사주로 발생한 시칠리아 만종 사건으로..... 시칠리아에서
프랑스인들이 축출당하자 1285년 아라곤을 침략했다가 필리프 3세는 풍토병에 걸려 사망합니다.
필리프 3세는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었기 때문에 궁정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으니 루이
9세는 유약한 성격을 극복시키고 왕재로 키우기 위해 훌륭한 선생님들을 붙여 두었고
스스로도 세자를 위해 『루이 9세의 가르침(Les Enseignements)』을 집필하기도 했으니
1262년 에는 아라곤 왕국과의 동맹 관계 차원에서 아라곤의 공주인 이자벨과 결혼을 합니다.
필리프 3세가 25세가 되던 1270년에 루이 9세와 함께 제8차 십자군에 출정하였으나 무더위와
풍토병으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병상에 누웠는데 8월 3일에는 동생 장 트리스탕이, 25일에는
부왕 루이 9세가 사망했으니 병상에 누워 있던 필리프 3세는 튀니지에서 스스로를 왕이라고
‘용감하게’ 선언할 수는 있었지만 실제 원정 관련 일들을 숙부 샤를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앙주 백작 샤를은 얼마 전에 시칠리아 왕위에 오른 자로서 자신에게 유리하게 결정했으나 그의
협상 덕택에 프랑스 십자군은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는데 귀국 도중 필리프 3세는 매형
나바라왕 티보 2세의 사망 소식과 부인 이자벨의 사망 소식을 듣게되니 1271년 5월 21일
파리로 돌아온 필리프 3세는 루이 9세의 장례를 치루고는 8월 15일에 축성식을 거행 합니다.
필리프 3세가 즉위할때 잉글랜드에서는 1272년 시몽 드 몽포르 5세 일파를 축출하고 에드워드
1세가 왕위에 올랐고 신성로마제국에서는 대공위 기간이 끝나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 1세가 제위에 올랐으니 각 왕국 및 도시국가, 제후령 간의 뚜렷한 경계들이 형성되니,
서유럽 정치 체제들이 발전해 가면서..... 십자군과 관련한 이상과 현실의 격차는 더욱 커집니다.
특히 프랑스 왕들에게 루이 9세로 대표되는 십자군은 여전히 자신들의 정체성을 강화시켜주는 강력한
상징 권력으로 인식되었는데.... 문제는 십자군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복잡다단한 현실적 문제
들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었으니 때문에 필리프 3세는 당장의 내치에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했습니다.
필리프 3세는 왕령지를 확장해 나갔는데 전쟁은 왕국의 평화를 깨뜨릴수 있기 때문에 상속자
가 없는 영지를 왕령지에 통합하거나 국고로 매입하는 방식을 선호했으며, 지지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왕령지의 일부나 다양한 권리를 양도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여전히 자신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아르마냑 및 푸아티아 귀족들에게는 무력을 통한 정복을 행하기도 합니다.
결혼 정책을 통해 주요한 지지 세력들을 확보했으니 1274년에 필리프 3세는 브라반트 공작의 딸
마리와 재혼했고 사촌동생 아르투아 여백작 마틸드를 신성로마제국의 부르고뉴 백작과
약혼시켰으며 아들 필리프 4세는 나바라 여왕 잔과 약혼시켰는데, 나바라 왕가는 샹파뉴
백작 가문으로서 아들 필리프와 잔의 결혼으로 나바라와 샹파뉴에 이중의 지지 세력을 확보합니다.
1282년 시칠리아 앙주 백작 샤를의 지배에 저항하는 봉기가 발생해 프랑스 귀족들이 축출되는
사태가 일어났으니‘시칠리아 만종 사건’이라 불리는데... 아라곤 왕 페레 3세의 사주로
이루어진 대학살 사건이었으며 동시에 그는 시칠리아왕 만프레디의 딸 콘스탄차와
결혼한후 스스로를 만프레디의 후계자로 내세우며 시칠리아 왕국의 계승권을 주장했습니다.
이에 교황 마르티누스 4세는 페레 3세를 파문에 처했으며 1285년 샤를 1세가 사망하자
필리프 3세는 아라곤 십자군을 내세우며 피레네 산맥을 지나 아라곤의 동부지역인
카탈루냐의 지로나(Girona)시를 공격했지만, 역시 무더운 지중해 지역 풍토병이 프랑스
군을 엄습했고 결국 필리프 3세는 제대로 공격도 못해보고 10월 5일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필리프 3세는 루이 9세와 마찬가지로 십자군 원정 도중에 타향에서 사망하고 말았으며 그리고 그의
적수였던 페레 3세 또한 한달 후 사망했는데..... 필리프 3세의 뒤를 이어 세자 필리프 4세가
왕위를 계승했으니 이제 프랑스왕국은 이 ‘대리석 왕’ 과 더불어 전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