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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시문학사 2
이종진
3. 모더니즘―상징주의, 아크메니즘, 미래파
상징주의1` 운동의 첫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던 1890년대 초는 러시아 시문학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이전의 10년 동안에 이미 시의 재생과 현실주의적 독단론에 대한 소심한 반작용의 움직임이 서서히 나타났다. 이렇나 움직임의 뒤를 이어서 러시아의 상징주의는 1900년과 1910년 사이 이 나라의 문학과 예술을 변형시키는 광범한 문화 운동으로 발전되었다.
이 운동을 일으킨 많은 시인들의 높은 수준의 장인 의식과 미학적 외형의 긴밀한 상관 관계는 20년대 이후에 유례가 없었으며, 제2의 러시아 시의 황금 시대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이 운동의 근본적인 힘은 프랑스에서 도입된 것으로서 브류소프와 같은 러시아 초기의 심볼리스트들은 보들레르, 베를레느, 그리고 말라르메의 시이론과 기법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이 운동은 다소 러시아적 근원을 지니고 있었다. 예컨대 쮸쩨프의 시 「침묵」 속에서 보이는 바처럼 상징주의자들의 감각의 세계 저쪽에 있는 실체(Realite)를 탐구하려는 노력에 대한 지지가 그것이다. 또한 펫뜨의 선율에 관한 실험 속에도 음악에 시예술을 접근시키려는 시도가 예시된다. 이들 시의 이론은 서구시의 그것과 아주 유사하다. 그것은 실체에 대한 시인의 개인적인 안목의 가치와 적절함에 대해 꼭 같이 고심하고 있는 점이고, 이 실체의 근원이 이상 속에, 초자연적인 세계에 존재한다는 신념, 그리고 가시적인 왕국과 불가시적인 왕국 사이의 진정한 교감을 통해서 존재한다는 신념 역시 비슷하다. 시인은 상징을 통해서만 실체를 밝혀낼 수 있다는 러시아 초기 상징주의자들은 보들레르의 교감(Correspondance)의 이론을 받아들였고 자연의 말은 상징의 숲(le foret de symbole)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시인했다. 또한 프랑스 상징주의 대가들처럼 러시아 상징주의자들은 시와 음악의 유사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음악을(de la musigue avant toute chose)’이란 베를레느의 말이 상징주의의 슬로건이 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우리는 러시아 상징주의가 프랑스에서 받은 심대한 영향의 일단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 상징주의는 프랑스의 그것과 복합된 것이었으면서도 또다른 비동질적인 현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점점 국가적 운동으로 성장해 갔다. 그런 집착 속에는 하나의 논쟁이―특히 1910년에 더욱 가열해졌다―있었는데, 그 논쟁은 상징주의는 순수한 문학 운동이라고 고집한 브류소프 일파와, 뱌체슬라브 이바노프, 벨르이, 블록 등과 같이 그것은 문학 운동이면서도 시인이 높이 신봉할 만한 신비한 종교의 어떤 형식이라고 주장한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상징주의 시인들 개개인의 시 스타일과 기법도 상당히 달랐다. ‘교감’에 관한 공통된 수용 이외에는, 그리고 가시와 불가시의 세계 사이의 연결을 표현하는 데는 다양한 의미를 지닌 이미저리를 사용해야 한다는 통념 이외에는 그랬던 것이다.
이 세대의 러시아 시인 중에 가장 위대한 시인은 블록(1880~1921)이었다. 그는 일관성 있는 상징주의자로서 정신과 육체의 체험을 은유적 언어를 사용하여 시에 연결시켰다. 그러나 그의 종교적인 시와 사랑에 관한 시의 대부분은 낭만적이라는 평가를 받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의 초기 시의 리듬과 이미저리는 펫뜨나 뽈론스끼나 쏠로비요프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후기의 『소피아』, 『신성한 왕국』의 신비의 철학은 『아름다운 귀부인에 관한 시편』(1940)으로 시적인 구체성을 확보한다.
1905년에 블록은 혁명을 향한 정열적인 물결에 휩싸여갔다. 당시의 시인들 대부분과 함께 혁명의 실패, 그리고 뒤따라온 정치적인 반작용이 그를 어둡고 비극적인 절망의 분위기 속에 몰아넣었다. 그러나 그런 ‘정체의 수년’ 속에 그는 그의 나라를 변형시키려고 다가서는 어떤 사건의 소문을 듣는다. 닥쳐오는 격변에의 묵시적인 기대, 그리고 러시아의 사명과 운명에 대한 느낌―이것은 그의 시의 테마이기도 하다―은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표면화된 것 같았다. 블록은 처음엔 그것을 두 손을 들어 환영했다. 그는 그 혁명을 마르크시즘의 승리자로서가 아니라(그는 마르크시즘에는 무관심했다) 다 죽어가는 낡은 서구 휴머니즘의 붕괴와 음악의 정령의 승리를 확신시키는 크나큰 불기둥으로 본 것이다. 그는 1918년에 발표한 장시 「12」에서 힘차게, 이 신념을 표현했으나 오래잖아 그 신념은 산산조각이 났다. 그는 박살이 난 인간으로, 영감이 텅텅 비어서, 음악의 정령이 국가를 버리듯 그를 버렸다는 생각에 사무쳐서 죽어버렸다.
세월은 모든 것을 재로 만드느니
그대 미치거나 희망의 기별을 갖고 오는가
전쟁의 세월, 자유의 세월은
우리들 얼굴을 붉게 비추더니
우리는 벙어리가 되었다
경종소리는 우리 입을 다물게 하고
우리 마음은 한때 열정으로 가득했지만
치명적인 공허밖에 남지 않았다
우리들 죽음의 침대 위에 까마귀를 까악까악 울게 하라
더욱 훌륭한 자들에게 오 주여 오 주여
그대 왕국을 보게 하라!
―「침체된 세월에 태어난 자들은」
유언과도 같은 블록의 이 시는 볼셰비키 혁명의 거칠고 무자비한 악마의 잔치에 대한 좌절과 고뇌의 상징적 표현이었다. 그는 ‘희망의 기별’로 혁명을 기다렸으나 그것은 ‘미치광이 놀음’이었으며, 결국엔 그가 사랑하는 러시아는 불길한 공허 속에서 죽어버렸다는 것이 이 시가 알려주는 비통한 내용이다. 마지막으로 「오 주여 그대 왕국을 보게 하라」에서 그 왕국은 러시아이며 블록 자신이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나온 부르짖음인 것이다.
운동으로서의 상징주의는 1910년을 고비로 그 창의력을 상실해 버렸다. 심미적이며 형이상학적인 면모의 주역들 사이에 생겨난 알력은 붕괴를 가속화시키는 신호였다. 안넨스끼가 사후에 끼친 영향은 젊은 세대의 시인들에게 더욱 억제된 서정시를 쓰도록 하였다. 그와 같은 무렵에 시인 꾸즈민에 의해 「아름다운 명료성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글이 나왔는데, 그 글은 젊은 시인들에게 정확한 간결, 그리고 언어의 절약을 강요하다시피 했다. 이 계획은 상징주의의 신비와 형태적인 애매함에 반기를 들게 한 본질이 되었고, 종내엔 아크메이즘(Acmeism)그룹으로 발전되고 조직화했다. 이 그룹은 1912년에 생성해서 1917년까지 러시아 시의 주류 비슷하게 자리를 잡았다. 아크메이스트들은 상징주의자들의 「교감」이론을 배격하고 음악적 효과에 대한 시의 관련을 비판했다. 말하자면 그들 자신의 시의 신조는 말의 사용에서의 정확성, 논리적 의미, 구체성, 견고한 이미저리, 선명함, 스타일의 간결 등을 요구했다. 상징주의와 비교해 보면 그들의 시는 가시적 세계에 연결되어 있고 고전주의에로 되돌아 가는 것같이 보였다.
문학 운동으로서 아크메이즘은 상징주의나 미래파보다 짧게 끝났으나 이 유파의 중요성은 세 사람의 주목할 만한 시인, 구밀료프, 안나 아흐마또바, 만젤쉬땀을 배출했다는 사실이다. 리더격인 구밀료프(1886~1921)는 그의 시적 스타일이 프랑스 고답파(Parnassian School) 시인들과 가장 비슷하다고 알려졌다. 그는 아프리카의 남성적이며 원색에 가까운 분위기를, 정복자라든가 전쟁 따위를 시의 소재로 삼았던 때문이었다. 이런 테마 위에 쓴 그의 시 일부는 싱싱함과 일상적인 구체성을 포괄하고 있었다. 그러나 1918년과 1921년에 씌어진 후기의 시들이 보다 중요한데, 그 속에서 그는 비범한 감정의 긴장과 환상적인 힘을 성취하고 있다. 안나 아흐마또바(1889~1966)의 시도 마찬가지로 두 가지 면모를 갖고 있다. 대부분이 연애시인 그녀의 초기 작품은 시인의 슬픔과 행복을 단순하고 직접적인 표현으로 친밀한 일기와 같이 읽혔다.
사람의 친교에는 숨은 한계가 있다
사랑의 경험도 정열도 이것을 넘을 수 없다
입술끼리 지극한 침묵으로 교접되고
사랑으로 가슴이 산산히 찢긴다 해도
―「사람의 친교에는…」
그 스타일은 회화풍이며 경구적이어서 메타포와 멜로디의 억양을 피하고 있으며 간결과 표현력을 분별하여 드러내 놓고 있다. 아무튼 점점 그녀는 시 속에 새로운 방법, 다양성, 장엄함을 나타냈고, 이미 나온 무게있는 연작시 「1914년 7월」에서, 그리고 1921년 1922년 사이에 나온 시들에서 완벽하게 발전시켜 선보였다. 그것은 그녀의 국가가 지나쳐야 했던 전쟁과 혁명의 시련을 환기시키는 데 아주 적절했다.
불타는 냄새가 난다 4주 동안
마른 이탄은 늪에서 탄다
오늘은 새마저 노래부르지 않고
독사도 더이상 전율하지 않는다
태양은 주의 냉대를 받게 되었다
부활절 이후 대지에 비 한 방울 뿌리지 않았으므로
어느 외다리 행인이 와서
홀로 뜨락에서 말했다
―「1917년 7월」
아크메이즘 시인 가운데 제3자인 만젤쉬땀(1891~1938)은 주제 선택이나 스타일에서 철저한 고전주의자였다. 그리스와 로마는 그가 좋아한 테마였으며, 그의 장중하고 비개성적인 시들은 첫 시집 『돌』(1913)이란 제목에서 그런 암시가 역력하다. 러시아 고전주의자는 네바강가에 자리잡은 수도 성뻬쩨르부르그에 대하여, 그 옛날의 영광에의 노스탤지어와 ‘자유의 깜빡임’으로 굶주려 죽어가는 거대한 도시에의 절망을 준열하고도 아름다운, 불멸의 노래로 적었던 것이다.
우리 뻬쩨르부르그에서 다시 만나리
거기 태양을 묻어둔 듯이
처음으로
행복하고 무의미한 말을 입밖에 내리
소비에트의 밤 검은 비로도에서
세계의 공허함 그 비로도 속에서
행복한 여인들의 사랑스런 눈은 아직 노래하고
불멸의 꽃은 아직도 피고 있다
―「우리 뻬쩨르부르그에서…」
최후의 작품에서 그는 수밀료프처럼 아크메이즘 대열에서 멀어져갔고, 그리하여 만젤쉬땀의 은유적 언어와 초현실적 이미저리의 시는 미래파로 접근해 갔다.
미래파는 금세기에 들어 러시아 시에 세번째로 중요한 경향이었다. 그것은 이탈리아의 그런 이름의 운동과 거의 비슷한 것이었다. 그 근원은, 일부는 상징주의 속에 포함되어 있었지만, 미래파들이 아주 배격했던 토착적인 데에 있었다. 그들의 최초의 선언은 1912년에 흘레브니꼬프와 마야꼽스끼를 포함한 4명의 작가들의 서명으로 나왔다. 선언문은 ‘사회의 속인적인 취미에 도전한다’였다. 그 선언문은 확실히 잘 선택된 것이었다. 보다 온화하게 작성된 강령 가운데 하나는 ‘현대의 기선에서 뿌쉬낀, 도스또옙스끼, 똘스또이를 내던져야 한다’였다. 미래파들의 공격적인 반전통의 선언은 세 개의 주된 목표가 있었다. 첫째 시를 상징주의의 형이상학적 모호함에서 분리시켜 현세의 산업과 정치의 실체를 시에 반영토록 했고(마야꼽스끼 같은 시인은 시를 ‘하늘’에서 지상으로 끌어내리지 않으면 안된다고 역설하였다), 둘째 시에서 통상적으로 ‘아름답다’든가 특히 ‘시적’이라든가 하는 말들을 씻어버리자는 것이다. 이런 말들은 그들의 안목에선 구역질나게 진부하고 썩은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하나의 목표는 새로운 시어를 창조하자는 것이었다.
1917년의 볼셰비키 혁명 전후에도 미래파들은 자유와 저항의 분위기 속에서 진부한 문화적 관습을 배격하면서 활동을 계속했다. 자유는 시인에게 내면의 창조력을 밝혀내는 것으로 느껴졌으며, 인간성을 새롭고 기이한 시대로 변질시켜 가는 것같은 사회적·정치적 변화 과정에 스스로 동화시켜 가려 했었다. 이런 사이에 미래파는 마야꼽스끼(1893~1930)라는 재능 있는 시인을 한 사람 배출하게 된다. 그는 두 개의 장르, 즉 정치적이고 애국적인 시와 애정시를 번갈아 썼었다. 그의 정치시는 한때 혁명을 찬미하고 새로운 소비에트 공산 정권을 추켜세웠다. 「우리들의 행진」같은 시에서 마야꼽스끼는 ‘10월 혁명의 북치기’로 자처하기도 한다. 그의 애정시는 정열과 자기 연민과 부드러움을 혼합시켜서 러시아어 속에 이토록 효과적인 것이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마야꼽스끼 시의 대부분은 수사에 치중되어 있고 소리 높여 읽을 수 있도록 씌어져 있다. 그는 시에 농짓거리와 만화, 그리고 익살들을 섞어 코믹한 효과를 자아 냈다. 그의 이미저리는 독창적이며 통념의 시들이 빠뜨린 메타포를 공들인 초상화처럼 그려냈다. 마야꼽스끼는 1925년에 미국을 여행하는 등 해외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그는 1930년에 자살해 버렸는데, 혁명 다음에 오는 저 속박과 부자유의 허망한 실체에 대한 절망 때문이었다.
문학의 한 유파로서의 미래파는 1917년 이후 일관성을 잃어 버렸다 해도 그 영향력은 1930년까지 강하게 남는다. 정열과 낙천주의와 모더니즘은 소비에트 초기 문학을 폭풍과 노도 속으로 휘몰아 넣었다. 마야꼽스끼나 흘레브니꼬프로부터 영향을 받은 많은 시인들이 배출되었다. 문학 운동으로서의 미래파는 이미지스트 운동에도 서서히 전양해 갔는데, 이 운동은 한때 거기에 몰두했던 예세닌과 같은 대시인을 탄생시켰다.
예세닌(1895~1926)은 서른살에 자살했으나 그가 남긴 훌륭한 시들은 성실하고 기지에 가득차 있으며, 러시아의 시골을 묘사하면서 그 평화스럽고 단순함을 환기시키고 산업화의 영향을 슬퍼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자연에 대한 사랑은 그가 어렸을 때 오까 강변에서의 체험의 산물이었기 때문에 자랄수록 그것은 실감을 띠고 나타난 것 같았다. 10월혁명이 일어났을 때, 그리고 그 후에 그의 감정을 사로잡았던 것은 오직 ‘러시아의 시골’ 그것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으리라. 그는 블록에 의해 비로소 인정을 받았고, 대시인의 자리를 그의 탁월한 작품으로 구축했으나, ‘혁명’의 획일주의는 이 재능있고 리버럴한 젊은이를 끝내 압살시키고 말았다. 그는 레닌그라드의 호텔방에서 목매어 자살했다.
지금도 우리는 모두 조금씩 조금씩
고요와 안락이 있는 곳으로 가고 있다
이제 나는 조그만 짐을 꾸려
길 떠나게 되겠지
사랑하는 자작나무숲이여!
대지여! 모래밭이여!
이 엄청난 친구들과의 작별에
내 슬픔 감출 길 없구나
―「지금도 우리는…」
자살 1년 전에 씌어진 것인데, 미리 자신의 죽음을 각오라도 했듯이, 스스로 사랑했던 사물과 사람들에게, 사랑했던 러시아에게 작별을 고하고 있다. 그의 유서에는 ‘내 시는 필요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 또한 필요 없게 되었다’고 씌어져 있었다.
블록, 마야꼽스끼, 예세닌의 시적인 가치는 물론 러시아 시문학사상 굵은 획을 긋고 있는 바 이들은 일단은 볼셰비키 혁명에 찬동했다는 데 공통적이다. 그러나 이어서 그 혁명의 걷잡을 수 없는 획일주의와 혼란과, 체포, 숙청 따위, 이른바 공산 혁명의 가공할 만한 정치적·폭력주의 앞에 그들은 다같이 절망하고 마야꼽스끼나 예세닌의 경우는 ‘사랑하는 러시아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던 것이다.
미래파적 소망은 소비에트 시대에 나온 가장 재능 있는 시인 중의 한 사람인 자볼로쯔끼(1903~1958)의 초기 작품에서도 파악된다. 그의 첫 시집 『원주』(1929)는 흘레브니꼬프의 강력한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그 시집은 낭만적인 것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레닌그라드에 관한 일련의 더러운 그림이다. 말하자면 그 곳의 술집, 축구 경기장, 서커스, 매음론이 아이러니칼하고 그로테스크하게 일그러진 형태로 묘사되어 있다. 자볼로쯔끼의 후기 시들은 스타일에서는 매우 다르다. 그것은 그의 실험적인 방법이 보다 고전적이며 전통적인 방향으로 기울어졌음을 알려 준다. 초기의 환상적이며 음산했던 세계는 자연과 인간에 투영된 생명의 아름다움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탈바꿈된다. 이 후기 시들은 1948년에 책으로 출판되었는데, 『원주』에서와 같은 신랄한 일면은 결여되었으나 매우 사실적인 서정성을 담고 있다. 그의 만년의 시들은 네끄라소프를 생각게 한다. 그만큼 그의 만년의 시들은 인간의 동정과 고뇌의 풍부한 기록을 보여주고 있다. 자볼로쯔끼는 1930년 이후 소비에트의 일반적인 경향을 보다 직접적이고 고전적 방법으로 반영해 왔다고 평할 수 있을 것이다.
만젤쉬땀이나 아흐마또바의 시와는 달리 쯔베따예바(1891~1941)의 시는 20세기 러시아 문학에서 특별한 자리를 차지한다. 교양있는 환경에서 성장한 그녀는 1910년에 처녀시집 『저녁의 앨범』을 발표한데 이어 시집 『마법의 등불』(1912)을 출간하여 시인으로서 탄탄한 출발을 보였다. 1912년 이후에 쯔베따예바는 자신의 정열적인 기질과 놀라운 원숙한 기교를 반영한 훌륭한 시들을 썼다. 그녀의 시는 음의 효과를 중시하여 단음을 조합한, 복잡하고 힘있는 리듬을 유지하고 있으며, 그의 시어는 고전적 어휘와 속어가 혼합된 독특한 것이다. 대부분 단시로서 그 가운데는 전보문과 같은 것도 있지만 정열이 넘쳐 흐른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모더니스트 시인이었으나 구비 문학에 제재를 빌린 작품도 많이 썼으며, 또 독일 낭만주의 시인 괴테의 영향도 받았다. 모더니스트이면서 낭만주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그녀는 「블록에게 바치는 시」, 「이별」(1922), 「러시아 이후에」 등의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모든 진실한 시인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현실을 승화시키고 하찮은 일을 감동적인 사건으로 변형시키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는 모든 것을 강렬하게 표현한다. 그녀의 문체는 정확하고 명료하며, 그녀의 정신은 격렬하고 활력에 넘친다. 문학의 적들로부터 아마존의 시인이라 불렸던 그녀는 타인을 대할 때 만큼이나 자신에게도 엄격했다. 그녀는 미숙한 아마추어와 부정확성을 싫어했고, 올바른 낱말과 적합한 억양을 찾는 데 공을 들였다. 그녀는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라고 비난받았을 때 ‘지상에 있는 인간의 유일한 임무는 자아의 진실이다. 진실한 시인은 항상 자아의 포로이게 마련이다. 이 요새는 뻬뜨로빠블로프스끄 요새보다 강하다’라고 대답했다. 이렇게 매사에 철저했던 시인은, 스딸린 체제 하에서 남편과 딸이 체포되어 옥사하고 아들도 독소전 쟁에서 전사하자 스스로 목을 매어 세상을 등졌다.
4. 소비에트 시
마야꼽스끼가 자살을 단행했던 그 해는 다음의 4년 동안에 완성되어진 소비에트 문학의 시작이며 또한 합리적인 전환점이었다. 마야꼽스끼의 시인으로서의 위치는 그대로였으나 혁명적 낭만주의는 괄시를 받았으며 일반적 시도까지도 용납되지 않았다. ‘이상주의’나 ‘형식주의’에 속박된 시인들은 짐승처럼 침묵을 강요당하거나 소위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공식적인 교리를 받아들이도록 압박받았다. 1934년에 공표된 이 교리는 2년 전에 상이한 문학 그룹들을 어용 단체인 ‘소비에트 작가동맹’ 속에 몰아넣고 난 다음의 ‘속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른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시행은 19세기의 시 전통을 부분적으로 왜곡시키고, 단순하며 새로운 고전주의적인 어떤 특정의 스타일을 사용하도록 주도한 것이었다. 포름과 내용의 그런 굴레와 같은 제한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소비에트의 시인들은 20년대엔 좋은 시들을 발표했으며 대전의 분위기도 보다 문학적으로 승화시킬 수가 있었다. 그러나 제 조건은 러시아 시의 어떤 흐름도 용납하지 않았으며, 창조적인 시를 위한 어떠한 시도도 허용치 않았다. 2차세계대전 후의 몇 년 동안, 특히 1946년 여름 이후부터 소비에트 문학은 당과 국가를 위해 헌신하도록 새롭고 강력한 압력을 받고 짓눌려 있어야만 했다. 이 극단적인 암흑 시대는 1953년 스탈린의 죽음으로 종말을 고하고 해빙을 맞는 듯했다. 이 해빙기를 틈타서 나온 작가가 빠스쩨르나끄를 비롯한 일련의 반체제 작가들이었다.
소비에트 시에서 빠스쩨르나끄(1890~1960)의 위치는 이색적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첫 시집은 1914년에 출판되었으며, 시인으로서의 가장 활발했던 때는 1917년과 1922년 사이였다. 그 때 몇 가지 시 운동에 접촉하고 있었으면서도 그는 아무 운동에도 관계없다고 자처했기 때문데 종종 사회적·정치적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흘레브니꼬프 이후로 그는 가장 영향력 있는 시인으로 부상하였다. 빠스쩨르나끄의 초기 시들은 『내 누이―인생』과 『주제와 변조』라는 두 권의 시집에 모두 수록되었는데, 상징주의·이미지즘·미래파 등이 혼합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상징주의자들, 특히 블록으로부터 그는 자신의 시의 독특한 일면인 음악성을 배웠던 것 같다. 희귀한 것을 좋아하고 메타포를 불어넣는 것은 그의 이미저리에 관한 기호와 연결되어 있다. 한때 그가 관계했던 미래파들은 그에게 일상적으로 ‘아름다운’ 이미저리를 피하고 개인적 언어의 표현력에 집중하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빠스쩨르나끄의 시는 당시의 그런 운동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자서전적인 에세이 속에서 그는 너무나 매혹당한 마야꼽스끼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에 얼마나 고심했는지를 적고 있다.
빠스쩨르나끄의 초기 시는 시적 정열의 긴장과 안목의 예리함에 의해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들이다. 레르몬또프와도 관련된 이들 특징은 첫째, 사랑과 예술이라는 주제를 통해서 나타나는데, 그것은 『내 누이―인생』의 기본적 테마로서 둘 다 우주에 숨어 있는 힘과, 삶 그 자체를 변형시킬 힘이 그에 의해 동질화된 것이다. 둘째, 안목의 예리함과 이미저리의 명료함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매우 새로운 느낌을 줄 뿐 아니라 거의 어린 아이와 같은 순수한 솔직성을 보여준다. 빠스쩨르나끄는 커다란 술잔을 들고 새로운 발견을 생각하느라고 방 안을 서성대는 사람으로 비유된다. 주목할 것은 그의 초기 시의 근원이었던 자연의 세계에서 사랑과 예술 속에 숨어 있는 창조적인 힘을 보았다는, 그 새로운 발견이라는 점이다. 그의 서정시는 러시아의 시골, 한밤중의 관목나무숲의 원시적 경이와 숲 속의 뜨거운 여름날, 가을의 슬픈 조락, 눈보라, 그리고 봄의 갑작스러운 도취에 관한 기막힌 묘사를 수없이 지니고 있다. 자연은 인간의 내면 세계와 친숙하게 맺어져 있으며, 인간처럼 자연도 움직이며 흐르는 상태에 있는 것으로 그는 본 것이다. 그가 즐겨 보았던 풍경은 소나기와 강풍, 우뢰, 눈보라, 봄의 해빙이었다.
이 정적 속의 돌입은 얼마나 멋진가
끝없는 초원은 바다의 풍경화 같다
나래새풀은 한숨 쉬고 개미는 살랑대고
모기들의 울음이 공중에 떠다닌다
건초더미가 구름과 나란히 섰다가
어둠 속에 사라진다 잇단 화산 불처럼
끝없는 초원은 침묵과 습기에 잠겨
흔들리고 표류하고 시달린다
―「대초원」
초기 빠스쩨르나끄의 미래파와의 관련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 형태는 전적으로 전통적인 형식이었다. 더욱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는 모더니즘과 뿌쉬낀, 쮸쩨프, 레르몬또프, 블록으로 이어지는 시의 실험에서 점차 동떨어지게 되었다. 1930년경 후의 빠스쩨르나끄의 시는 날카로운 이미지나 음악적인 어구를 살린 채로 보다 더 큰 단순성을 향한 의도적인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의사 지바고』의 마지막 장에 수록된 25편의 시들은 그의 새로운 시작 방법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대부분이 사랑과 자연과 종교에 관한 시들이다. 종교적인 시는 확실히 러시아에선 괄목할 만한 것이다. 성경에서 시의 주제의 대부분과 어법의 다소를 끄집어내면서 그의 시들은 러시아 정교회의 예배의 드라마틱한 서정과 신약성서에 있는 언어의 단순 솔직함을 혼합시켜 놓고 있다. 종교시는, 죽음은 그리스도의 부활로써 극복된다는 신념을 통해 구원이라는 기독교적 개념을 심화시키고 있다. 이런 범주의 시 가운데 가장 적격인 「햄리트」라는 시 속에서 빠스쩨르나끄는 삶에서 시인의 임무와 신념을 표현하고 있다.
나는 당신의 완고한 계획을 사랑하고
이 역할을 하는 데 이의가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연극이 상연 중
그러니 이번만은 날 면하게 해 주십시오
―「햄리트」
그 자신과 동일시된 햄리트는 겟세마네 언덕에서의 그리스도의 말을 하고 있다. 그리스도, 햄리트, 그리고 시인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 보내졌고, 꼭같이 악에 의해 희생되는 것으로 동질화시켜 놓았다. 허위와 위선에 둘러싸인 시인은 이 세계에 던져진 임무를 엄숙하게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임무는 스스로 필요로 하는 삶을 정직하게 살고 타인들이 그의 시와 모범에 따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빠스쩨르나끄의 인간과 문학적 영향력은 1953년 스딸린 사후 갑자기 나타난 첫 징조인 얼마 동안의 ‘시의 재생’ 속에서 찾아질 수 있다. 이 재생은 소비에트에선 새로운 시 운동의 생성과 관련되어진다. 개중에는 전후 세대도 있지만, 이 주역들은 수많은 상식적인 특성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그들은 시의 주제를 선택하고 처리함에 있어 인간 관계의 가치에 대한 신념, 실체를 보는 개인적 안목에 대한 믿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 시인 그룹의 주도적 인물은 둘 다 1933년생인 예프게니 옙뚜센꼬와 안드레이 보즈네센스끼다.
옙뚜센꼬(1933~ )는 1949년에 문단에 등단하여 첫 시집 『지마 역』(1955)을 발표한 후, 유대인 학살을 다룬 「바비 야르」(1961), 독재자 스딸린 부활의 위협을 호소하는 「스딸린의 후계자들」(1962)을 차례로 발표하여 한때 젊은이들의 인기를 독점하였다. 「지마 역」은 격렬한 열정으로 자기 세대의 모순과 새로운 세계를 향한 포부를 토한 시로 전체적인 면에서 강한 애국적 감성을 함축하고 있다. 옙뚜센꼬는 화자의 영혼의 고백을 빌려 ‘러시아는 새로운 세대에게 나약한 회의가 영광스런 도전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자아적 독립성이 강한 새 세대의 젊은 시인의 세계 인식이 전통적 서정성의 세계와는 다르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는 것이다. 「바비 야르」는 반유대인적 운동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로 여겨져 문학계 및 사회 전체에 상당한 반항을 일으켰다. 옙뚜센꼬는 이 시의 마지막 행에서 웅변적인 어조로 자신의 서정적 감성을 토로했다. ‘맥맥히 뛰는 내 혈관 속에는 단 한 방울의 유대 혈통의 피도 흐르지 않는다. 하지만 격분에 찬 반유대주의자들은 내가 유대인양 증오하고 있다. 바로 그 까닭에 나는 진정한 러시아인이다.’ 이러한 아이러니칼한 웅변은 공산주의 사회의 감추어진 실상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것이었다. 「바비 야르」에 관한 격렬한 공방이 잠잠해질 때 나온 작품이 「스딸린의 후계자들」이다. 이 작품은 독재자의 부활을 경계하여 새로운 사회 질서를 건설하자는 주제를 제시함으로써 공산당의 노선에 부합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암묵적인 타협을 이룸으로써 옙뚜센꼬는 잡지 『청년』의 편집진에 들어갈 수 있었다.
옙뚜센꼬는 사회적 테마와 정치시로 종종 빗나간 적이 있긴 하지만, 근본적으로 서정시인이다. 그러나 대중과 개인이라는 모티프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한때 그의 작품 속에도 깊게 침투되어 나타나 있었다. 그의 자연스런 웅변과 절도 있는 충일, 유연한 리듬은 번역으로는 전달이 어렵다. 그러나 그의 시 속에는 유머와 부드러움이라는 그의 시 특유의 개성이 있으며, 그 속에서 그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진술하고 일상을 그리고 있다. 옙뚜센꼬의 작품에서 시인의 역할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진실한 것들과 영원한 진리를 서로 연결시키는 고리로 나타난다. 하지만 시어의 선택에 있어서 그는 비교적 보수적인 입장을 취해 보즈네센스끼의 언어 실험과 같은 시도를 하지 않는다. 그는 아흐마둘리나처럼 언어의 예술적 효과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이미지의 포착과 시어의 배열에 있어 예세닌의 서술 기법과 유사한 방법을 사용한다.
옙뚜센꼬와 마찬가지로 1933년에 모스끄바에서 태어난 보즈네센스끼(1933~ )는 1958년에 시단에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초기 시집 『포물선』(1961), 『모자이크』(1960)를 발표한 이래, 『‘삼각형의 배’에서 40의 서정적 일탈』(1962)을 내놓아 시인으로서 단단한 기반을 구축하였다. 이어서 그는 『아킬레스의 심장』(1966), 『소리의 그림자』(1970), 『시선』(1970), 『유혹』(1978) 등 일련의 뛰어난 작품들을 발표했다. 『포물선』에서 그는 현실과 인간에 대한 독창적인 인식을 묘사한다. ‘어두운 하늘 아래에서 로켓과 같은 인간의 숙명은, 무지개 너머 땅을 꿈꾸어 보다가 그만 포물선을 그리며 추락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내면적 진실을 향해 간다. (……) 예술, 사랑, 인간의 역사도 포물선의 궤도를 따라 흘러만 간다.’ 존재와 영원 사이의 간극 속에서 비상을 꿈꾸다 추락하는 인간 영혼의 운명을 보즈네센스끼는 특출한 심리적 공간 의식으로 형상화해 내었다. 『‘삼각형의 배’에서 40의 서정적 일탈』은 시인의 주관적인 심상과 다양한 경험을 통한 자아의 탐구가 대조를 이루며 구성되어 있다. 그는 현대 문명의 중심인 미국의 여러 단면들을 자신의 상상력을 통해 구체적인 이미지로 변형시키고 있다. 과학과 기술에 의한 ‘원자 시대’와 예술적 가치 창조를 향한 공상의 세계 사이에는 아무런 장벽이 없다는 것을 보즈네센스끼는 확신한다. 『소리의 그림자』와 『시선』에서 보즈네센스끼의 시 세계는 더욱 광범위한 시어의 배열과 서술 기법의 실험적 태도를 선보인다. 그는 부적절한 리듬을 아주 치밀하게 배열하기도 하고, 거의 해독이 불가능한 추상적인 은유를 사용하여 독자를 의도적으로 혼란스럽게 하기도 한다. 과거의 역사와 현대적 삶과의 대조적 결합, 기술 문명과 인간 문화의 공존, 사회에서 처한 시인의 불안정한 운명 등이 그의 작품에서 가장 두드러진 주제이다. 서정적 이미지와 아이러니를 혼합해 자신의 사상을 비밀스럽고 애매하게 하는 경향도 엿보이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시의 예술성에 대한 민감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다. 그는 현대시의 과제를 인간의 내면 의식의 투시라고 보는 점에서 옙뚜센꼬보다 보즈네센스끼가 작품에 더 지적으로 접근하고 있으며, 언어와 리듬과 이미지의 실험에도 더욱 대담하다. 그의 의식은 현상의 내면 관계와 내면 침투를 환기시키는 데 사용하고, 그의 초현실적 기법은 러시아 미래파 전통에서 옙뚜센꼬보다 깊이 뿌리박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두 사람은 현대 소비에트 시에서 가장 생생한 요소를 제시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1960년대의 다른 재능있는 시인들 중에는 스멜랴꼬프(1912/13~ 1972), 마뜨바예바(1934~ ), 로즈제스뜨벤스끼(1932~ ) 등이 있는데, 이들은 화가, 음악가, 무용가, 배우, 연극·영화 제작자와 더불어 아방가르드 예술을 형성한다. 아방가르드 예술은 젊은 지식인들, 특히 과학자들 사이에서 많은 숭배자를 갖고 있었다.
젊은 여류 시인 가운데, 가장 재능 있는 사람은 아흐마둘리나(1937~ )이다. 1962년 첫 시집에 이어, 1963년 두 개의 장시 「비에 관한 이야기」, 「나의 계보」가 발표되었다. 이 시들에서 그녀는 자신의 특질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아흐마둘리나에 있어, 내용은 곧 형식이며 이 세계의 모든 것은 낱말로 이루어져 있다. 언어는 시에 있어 수단이나 도구가 아니라 독자적인 개체가 된다. 그런 창조성을 지닌 언어의 조립은 시인의 세계 인식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녀의 시는 사물과 인간, 심지어 그녀 자신의 영감과도 시험적 관계를 반영한다. 그녀의 연애시는 부드럽고, 상처를 입기 쉽고, 그리고 이별의 예감과 공포로 채색되어 있다. 이러한 분위기는 다른 시에도 감염된다. 동시에 그녀는 시골의 결혼, 북녘의 풍경, 청량 음료의 자동 판매기, 처녀지로서의 여행 등을 신선한 언어와 상징적 암시로 표현했다. 아흐마들리나는 후에 나온 「한기」(1968)에서 더욱 사변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 작품에서 그녀는 창조의 행위라는 것을 생명이 있는 것과 없는 것에 관한 명상, 또는 과거와 현재에 대한, 혹은 자연과 인간 사회에 대한 진지한 탐구라고 정의한다.
또 1960~70년대는 자기 시에 곡을 붙여 기타 반주로 노래하는 음유 시인이 활약했던 시기이기도 한데, 그 대표적 시인이 오꾸자바, 갈리치, 뵈소쯔끼 등이다. 오꾸자바(1924~ )는 『즐거운 고수』(1964)에서 인간의 근원적 고독, 전쟁의 잔혹성들을 서정적인 음조를 빌려 묘사하고 있다. 이후 그는 주관적 서정에 보다 예술적인 요소를 가미함으로써 작품의 균형을 이룩한다. 특히 그의 시의 주제는 현대 도시 생활을 신비스런 관점에서 묘사하는 경향을 차차 띠게 되며, 시의 구성에 있어서도 균형과 안정성을 추구하기 보다는 급격한 전환, 예측 불가능한 배열 등을 시도한다. 갈리치(1918~1977)는 서정적인 시의 창작에서 탁월한 재능을 나타내기도 했지만, 오꾸자바처럼 낭만적인 발라드 가수로서 더 관심을 끌었다. 그는 소비에트 체제의 이면에 감추어진 허위와 모순들을 풍자적인 은유로서 묘사하였다. 특히 1968년에 발표된 체코슬로바키아 사태에 관한 그의 풍자적인 발라드들은 인간의 영적 자유에 대한 탄압을 직설적으로 비판함으로써 소비에트 정부는 그의 모든 창작 행위와 공연을 금지시켜 버렸다. 뵈소쯔끼(1938 ~1980) 역시 오꾸자바, 갈리치와 더불어 1960년대부터 대표적인 음유 시인으로 불렸다. 그는 풍자와 서정성을 탁월하게 결합하는 특이한 시적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뵈소쯔끼의 시에 나오는 화자들은 대부분 하층 계급 출신이며, 그들은 거의 모든 존재의 자유를 갈구하고 있다. 직접적인 표현은 안 되었지만 그들이 맞서 대항하려는 것은 전체주의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며, 인간의 존재 여건이 여러 관점에서 상징적인 비유로써 그의 시 속에 표현되어 있다.
사회적이며 반항적인 옙뚜센꼬나 보즈네센스끼와는 달리 브로드스끼(1940~1996)는 외부 세계와는 초연한, 내적인 환상에 몰두해 있다. 신, 죽음, 사랑, 고독, 이별, 우주, 시간에 관한 테마가 시의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또한 이상한 세계와 황폐한 방, 버림받고 패배한 인간들이 자주 나타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감정을 이성적인 과정과 분리할 줄 알며 그것을 통해서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접근한다. 그러므로 철인으로서 그는 냉정하고 논리정연하고 구체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기법면에서도 독특한 시어와 고도의 상징성, 때때로 형식을 무시한 듯한 혁신성, 다양한 운율 등을 채택함으로써 일반 독자들에게 난해하다는 인상을 준다.
그의 첫 시집 『단시와 장시』(1965)에 수록된 「존 던에게 바치는 위대한 비가」 「아브라함과 이삭」 「행진」 등은 구체적인 세부 묘사를 담고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몽상적이고 환상적이며 거의 초현실적이다. 두 번째 시집 『황야의 정거장』(1970)은 사랑의 테마가 두르러지게 나타나고 있는데 이 속에서 시인은 이별과 상실의 아픔을 노래한다.
우리가 포옹하던 아가씨들
우리가 데리고 자던 아가씨들
우리와 함께 술 마시던 친구들
우리에게 먹을 걸 주고 아무 것이나 사 주던 친척들
우리가 그다지도 사랑하던 형제 자매
우리의 지기, 위층에 사는 이웃들
우리의 동창, 우리 선생님들―그렇다,
그들은 모두 왜 보이지 않는가
그들은 다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가
―「7월의 간주곡」
이 무렵에 쓰여진 몇 편의 장시는 문화에 대한 광범한 이야기다. 「황야의 정거장」이라는 타이틀 시는 레닌그라드에 있는 희랍 정교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지금 레닌그라드에서 희랍인을 찾아 보기는 어렵다
우리는 희랍인 성당을 부셔버렸다
그 빈터에 콘서트홀을 짓기 위하여
희랍인 교회의 건축 양식엔
어딘가 절망적인 요소가 깃들어 있다
그러나 수많은 빈터에 세워진 콘서트홀에는
이미 절망적인 데라곤 없다―이것은 하나의 전당, 예술의 전당이다.
모든 문화는 문명을 위해 필연적으로 희생될 수밖에 없는 숙명을 지녔음을 시인은 아픈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망명 후 브로드스끼는 두 권의 중요한 시집을 내 놓았다. 『아름다운 시대의 종말』은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 메마른 황무지와 같은 인상을 준다. 회의가 더욱 깊어지고, 초기 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간의 온정에 대한 진한 향수같은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타이틀 시에서 시인의 세계를 이루고 있는 언어들은 비전없는 잔인함을 보여 준다. 희망 역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대부분이 망명 후에 쓰어진 『연설의 일부분』은 동적인 면을 반영하고 있으나 기쁨을 찾아볼 수 없다. 서구 문명은 여러 가지로 편리하지만 방향을 잃고 외롭게 방황하고 있다.
존재의 본질과 현존 인식에 관한 탁월한 그의 분석과 제시는 1987년 노벨문학상이라는 큰 평가로 보상을 받았다.◑ (한국외국어대 노어과교수)
쪻이 글은 『러시아 시집』에 수록된 필자의 졸고를 부분적으로 수정·보완한 것임을
밝혀두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