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리고성이 무너졌습니까..............
수 6:20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들을 때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하나님은 출애급한 이스라엘 백성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정착시키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면 성벽이 이중으로 축조된 그야 말로 철옹성 같은 여리고성을 지나야 합니다. 그 여리고성은 가나안땅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가로막고 있어서 그 성을 점령하지 못하면 가나안땅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그 철옹성을 함락시킬 비책을 말씀하십니다. 엿새 동안 성 주위를 매일 한 바퀴씩 돌고 7일째는 일곱 바퀴 돌고 난 후 성을 향하여 큰소리로 외치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황당한 비책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이 황당한 말씀에 순종하여 매일 한 바퀴씩 그리고 일곱째 날에 일곱 바퀴를 돌고 나팔을 불고 큰소리로 외치니 여리고성이 무너졌습니다............ 이는 역사적인 사실로 많은 고고학자들이 현장을 발굴하고 밖으로 부터가 아닌 안으로부터 무너진 것을 고증하고있습니다.
수 6:20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들을 때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그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점령하고.....
이렇게 여리고 성이 무너짐은 무기를 사용하여 전쟁한 것이 아니고 순전히 하나님이 행하신 기적의 일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행하신 이 기적적인 일이 오늘날을 사는 우리에게 과연 어떤 의미와 교훈이 있는지를 보고자 하는 것이 오늘의 주제입니다.
우선 오늘 날 거의 대부분의 교회에서 여리고성 함락 사건의 의미를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은 반듯이 우리에게 승리를 안겨준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전쟁에서 무기를 들고 치밀한 작전으로 공격하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성 주위를 빙빙 돌아 라는 비합리적인 명령이라도 순종하기만하면 그리고 상당기간 어떤 조그만한 징조도 보이지 않더라도 끝까지 믿음을 버리지 말아라...그러면 반듯이 일곱째 날에 기적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그러니 믿음으로 밀고 나가라 그러면 하나님이 결과를 주실 것이다...... 라고 회중에게 믿음을 강요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믿음으로 끝까지 인내하는 것이 맞습니다. 틀린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여리고성 함락의 사건을 그렇게 보는 것은 상당한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여리고 성 함락의 영적 의미를 바로 알려면 출애굽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서 그때부터 이스라엘이 어떤 여정을 거쳐 여기 여리고 성까지 왔는지를 더듬어 보아야 합니다.
애급에서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여 40년의 광야 생활을 함께한 지도자 모세가 죽고 하나님은 그 대를 이은 여호수아에게 가나안 땅을 정벌하라고 명하십니다. 너희 발로 밟는 모든 땅을 너희에게 주리라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노예로 살던 애굽은 이 세상 나라를 상징하지요. 세상 임금의 상징인 바로의 치하에서 그들은 오직 자기 힘과 능력으로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출애굽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손길을 알기 시작하였지만, 아직 그들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광야 40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훈련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광야 40년의 생활동안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알았지만,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사사건건이 하나님의 말씀과 충돌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가치관을 벗어나지 못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에 둔한 초기 1세대들은 다 죽고 2세들만 남았습니다.
이러한 성경의 기록이 의미하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과 광야 40년의 세월은 노예에서 하루아침에 자유를 얻은 민족의 혼란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세상 힘과 권력에 순응하든 가치관에서 하나님 통치의 가치관으로 이행하는 훈련과정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한 민족이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어가는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또 우리는 흔히 이렇게 오해합니다. 출에굽의 역사를 일으키시고 광야 40년의 훈련을 시키신 것은 노예의 피폐한 삶을 살았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제 드디어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땅을 주셔서 풍요한 삶을 살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이 크시고 원대하신가.... 그러니 우리도 광야 같은 이 세상의 험한 파도를 참고 이겨내면 젖과 꿀이 흐르는 현실이 받듯이 올 것이다. 그러니 열심히 기도하고 신앙생활을 잘하자고 독려합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여야 할지를 가늠하는 매우 중요한 갈림길을 만납니다. 무엇인고하면 성경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풍요를 누릴 수 있는, 그야말로 젖과 꿀이 풍성한 기회의 땅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내용은 하나님의 의도를 알 수 있는 참으로 중요한 내용임에도 많은 교회에서 그냥 지나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완전히 잘못된 반대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신명기 11장에 가나안 땅이 어떤 땅인가에 대한 안내가 나옵니다.
8.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모든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너희가 강성할 것이요 너희가 건너가 차지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할 것이며 9. 또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여 그들과 그들의 후손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10. 네가 들어가 차지하려 하는 땅은 네가 나온 애굽 땅과 같지 아니하니 거기에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 대기를 채소밭에 댐처럼 하였거니와 11.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1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이라 연초부터 연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13.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내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섬기면 14.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15. 또 가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
이 말씀을 현대판으로 요약해보면 수리시설이 잘되었던 에굽 땅에서 뛰쳐나와 하늘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천수답인 가나안땅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리시설이 있으면 인간의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많은 수확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너희는 많은 수확을 얻기 위하여 너희의 힘으로 채소밭에 물 주려고 무진 고생하였지만, 이제는 전적으로 하나님이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실 것이니 그런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섬기면 이른 비와 늦은 비로 젖과 꿀이 풍성히 흐르는 그런 상황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젖과 꿀이 흐른다는 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올바르게 잘 유지할 때 그 결과로 일어나는 상황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야기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전심으로 사랑하고 섬기는 곳은 구체적으로 어디입니까......사람의 마음이지요...사람들의 마음과 마음들이 모여서 민족이 되고 나라가 되어 순종하고 사랑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마음으로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세부적으로 말하면 이러한 인간 마음을 다스리고 방향을 정하는 것이 자신을 스스로 가치 있는 존재로 인식하는 “자아”입니다. 우리의 “자아”가 나를 보호하고 다스리고 살아갈 방향을 제시합니다. 우리가 조용히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하나님을 섬기면서 그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가장 큰 요인이 다른 사람 때문이 아닌 자기 자신(자아)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경은 이것을 속사람(영의 생각)과 겉 사람(육신의 생각)의 관계로 설명합니다.
롬 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7: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속사람인 영의 생각으로는 말씀에 순종하고 싶지만, 겉 사람인 육신의 생각(자아)의 지배를 받아 영의 생각은 죽고 육신의 생각을 따라 진리가 아닌 현실적인 유익을 따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으로 설명하면 속사람인 가나안땅을 에워싸고 있는, 겉 사람에 해당하는 여리고 성은 무너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겉 사람의 무너짐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체험입니다. 우리 겉 사람(자아)이 무너질 때 비로소 우리 속사람이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생명을 어떻게 얻을 것인가가 아니고 얻어진 그 생명을 어떻게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느냐 입니다.
요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겉 사람인 자기의 좋은 감정과 좋은 생각에만 심취하고 있다면...그러한 겉 사람은 자기를 살리지 못할 뿐 아니라 남도 살리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초입에서 일어난 여리고성이 함락된 이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우리 인생에서 일어나는 어떤 큰 난관을 헤쳐 나가는 방법으로 제시된 사건이 아닙니다. 인간이 가진 자기애와 자존심이 무너지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의 통치 안으로 들어 갈수 없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자리 잡으려면 자기 자존심이 허물어져야합니다. 자아가 무너지지 않으면 말씀이 자기 자존심을 새우기 위한 수단이 되어 내가 떳떳하고 내가 근사하고 내가 칭송을 받기 위하여 말씀으로 치장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자존심이란 놈은 여간 단단한 것이 아닙니다. 이중성벽으로 구축된 여리고성 같아서 사람의 힘으로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무너뜨려 주셔야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첫발은 이렇게 강력한 자기숭배의 신념이 나에게 강하게 남아 있구나를 인식하는 것부터 시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합니다. 여리고 성을 나팔 불며 돌기만 한 것처럼 우리도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티끌과 먼지)인 나에게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재하게 하여 주소서....기도한다는 것은 내 소원을 이루어 주소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 내안에 이루어지게 하소서입니다.
죽어지지 않으면 부활이 없듯이 여리고성이 무너지지 않으면 가나안땅에 들어갈 수 없고 자기숭배의 자아가 무너지지 않으면 진리가 거처할 자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여리고성은 사람의 노력으로 무너지지 않고 하나님이 무너뜨려야 무너지듯이 우리가 가진 자기숭배의 자존심도 하나님이 무너트려야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마음을 열어 오직 주님 앞에 나아갈 따름입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