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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망해간다고 느껴질 때, 사람들은 무엇을 붙잡는가. 무기를 들거나, 상소를 올리거나, 망명을 떠난다.
신채호는 붓을 들었다. 그것도 아무 글이나 쓴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 민족이 누구이고, 어디서 왔으며,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는가를 역사 속에서 끄집어냈다. 그 역사의 출발점에 단군이 있었다.
1905년 을사늑약, 1907년 정미7조약.
외교권이 박탈되고 통치권이 무너지는 과정에서, 신채호는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의 논설 지면을 통해 전혀 다른 물음을 던졌다.
우리는 왜 싸워야 하는가가 아니라, 우리는 도대체 누구인가였다.
그리고 그 답을 그는 단군에서 찾았다.
'단군민족주의'라는 개념은 학술용어로서 신용하가 처음 사용하고, 정영훈의 박사논문(1993)을 통해 개념적으로 정의된 말이다. 단군을 국조(國祖)로 인식하고, 그 자손으로서의 민족 정체성에 기초해 자주독립과 통합·발전을 추구하는 의식·사상·실천운동 전체를 가리킨다. 단순한 신화 숭배가 아니다. '우리가 한 뿌리에서 나왔다'는 인식을 역사적·학문적 근거 위에 세우려 한 치열한 지적 작업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단군혈족주의라는 말을 더 즐겨쓴다.
단군에 관한 최초의 문헌 기록은 고려 후기 일연의 『삼국유사』(1281)와 이승휴의 『제왕운기』(1287)이다. 일제 역사학자들은 이를 몽골 침략이라는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13세기에 창작된 신화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주장에는 근거가 없다. 고구려 초기 비류국의 송양왕이 주몽과 권위 다툼을 벌이며 스스로를 선인(仙人)의 후손이라 칭했다는 기록이 『구삼국사』에 전하고, 5세기 초 집안 지역 고구려 고분벽화인 각저총과 장천1호분에는 단군사화의 곰 모티브가 분명히 나타난다. 단군 인식의 연원은 고려 이전, 고구려 건국 초기까지 소급된다.
『삼국유사』 · 『제왕운기』 이후 단군을 역사의 공동 출발점으로 삼는 인식은 조선조 초 『동국통감』(1484)을 통해 국가 차원의 공식 역사서로 자리를 잡았다. 조선 왕조 자체가 단군을 국조로, 기자를 교화의 시조로 모시는 제례를 국가 공식 제사로 거행했다.
태조 때부터 세조 때까지 단군 사당과 제사가 반복 확인된다. 세종은 황해도 구월산에 삼성당을 세워 환인·환웅·단군 삼신에 대한 국가 제사를 지냈다. 영조는 단군을 가리켜 "실로 우리나라의 천황"이라고 표현했다.
조선 중기 사림파가 득세하면서 기자 숭배가 강해지고 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 '소중화' 의식이 팽배해지며 단군에 대한 인식이 약해지는 시기가 있었다. 명나라가 망한 이후에도 명 마지막 황제의 연호 '숭정제'를 계속 쓸 정도였다. 그러나 조선 말기 서구 침탈과 일제 침략이 본격화되자 단군민족주의는 다시 불꽃을 내뿜으며 되살아났다. 위기가 닥칠 때마다 단군민족주의는 민중 마음 깊은 곳에서 저항의 기제로 작동하는 역사적 패턴을 반복해 왔다.
1880년 충남 공주에서 태어난 신채호는 1897년 성균관에 들어가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됐다. 고전 공부를 마치기도 전에 을사늑약이 터졌고, 그는 관직 대신 언론을 택했다.
《황성신문》에서 장지연의 초청으로 일하다가 이후 《대한매일신보》에서 양기탁과 함께 활동했다. 당시 《대한매일신보》는 영국인 베델이 발행인으로 등록되어 통감부 검열 없이 기사를 실을 수 있었던 사실상 항일 언론의 중심이었다.
1908년 신채호는 《대한매일신보》에 「독사신론(讀史新論)」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우리 역사학사에서 최초로 민족을 역사 서술의 기본 단위로 설정한 글이었다. 기존의 단군-기자-위만으로 이어지던 고대사 체계를 부정하고, 단군-부여-고구려로 이어지는 새로운 역사 계보를 제시했다.
왕조 중심의 사건 기술에서 벗어나 민족의 흥망성쇠를 중심으로 인과관계를 서술하는 방법론도 이때 제기됐다. 그가 말하는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기록"이었다. 주체인 민족이 어떻게 외부와 경쟁하며 발전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역사의 본질이었다.
이 작업이 단순한 학문적 탐구가 아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신채호는 "나라가 망해도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일깨워 애국심을 불러일으킨다면, 국권을 상실해도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라고 썼다. 역사 연구는 그에게 독립운동의 또 다른 방식이었다.
1905년 4월 1일, 《황성신문》이 제호 아래 제일 첫 연호를 '단군개국 4238년'으로 표기하기 시작했다. 이후 《대한매일신보》, 《만세보》, 《경남일보》 등이 잇따라 단기를 사용했다. 연호는 단순한 날짜 표기가 아니다. 그것은 세계관이다. 중국 황제의 연호를 쓰는 것이 사대모화의 표현이었다면, 단기를 쓰는 것은 우리 민족이 스스로의 역사를 가진 독립적 존재임을 선언하는 행위였다.
신채호는 1908년 직접 글로 밝혔다.
우리나라를 건국한 성조 단군에서 기원하는 연호를 사용하면, 역사를 대할 때 "같은 조상을 가진 같은 민족"이라는 관념이 생겨나 애국심을 고취하는 데 유익하다고 말이다. 단순해 보이지만 이 주장 안에는 민족 정체성 형성의 정치적 논리 전체가 압축되어 있다.
3.1운동 때 발표된 16종의 독립선언서 가운데 7종이 단기연호를 사용했다. '조선건국 4252년'이라는 표기가 그 대표적 예다. 전국 218개 군 중 211개 군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난 당시, 대부분의 독립선언서가 '반만년 역사', '단군배달겨레'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단군민족주의가 이미 대중적 언어로 자리잡았다는 증거였다. 일제는 단기연호 사용을 금지하고 일본 연호 사용을 강제했다. 겁이 났던 것이다.
개천절에 대해서도 신채호는 분명한 입장을 밝혔다.
10월 3일이 단군 탄신일로 민간에 유행하는 것은 역사상 고사(古事)에 근거한 것이며, 마한·예·고구려·가락 등이 모두 10월에 대제를 행했다는 『문헌비고』의 기록이 뒷받침한다고 했다. 고구려의 동맹회(東盟會)가 그 원류이며, 이것이 고려의 팔관회로 계승되었다는 계보도 제시했다. 개천절은 나철이 1909년 대종교 중광 행사에서 처음 기념한 이후, 상해 임시정부에서도 '건국기원절'이라는 이름으로 기렸다.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가 양력 10월 3일을 국경일로 제정해 오늘에 이른다.
단군민족주의가 사상과 역사의 흐름 두 줄기로 나뉜다면, 역사의 흐름을 이끈 것이 신채호와 박은식이고, 종교의 흐름을 이끈 것이 나철과 대종교였다. 그런데 신채호는 이 두 흐름이 교차하는 지점에 서 있었다.
신채호가 대종교와 맺은 인연은 《대한매일신보》에서 시작됐다. 당시 총무였던 양기탁은 신민회 지도자이기도 했고, 신민회의 실질적 본부 역할을 하던 상동청년학원 출신 중 대다수가 대종교인이었다. 신채호 역시 신민회 회원으로 이 네트워크 안에 있었다.
1914년 신채호는 대종교 3대 교주가 되는 윤세복 형제의 초청으로 서간도 봉천성 환인현 흥도천에 머물렀다. 이곳 동창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면서 고구려와 고조선의 유적들을 직접 발로 답사했다. 박은식도 3년 전 같은 장소에서 1년을 머물렀다. 이 서간도 시절이 신채호에게 고대사 연구의 결정적 전환점이 됐다. 유물과 지리를 눈으로 확인하면서, 그의 역사 인식은 더 깊고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나철이 1916년 8월 15일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서 일본 정부에 장문의 항의문을 남기고 자결했을 때, 신채호는 그를 추도하는 「도제사언문(悼祭四言文)」을 지었다. 당시 그와 함께 상해에 있던 정인보는 후일 이 글을 가리켜 "웅기하고 심오한 경지를 다한 대가의 작품"이라고 했다. 이 글은 북한에 소장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현재 공개된 적은 없다.
대종교의 핵심 인물들 대부분이 상해 임시정부의 요인들이었다.
이시영·박은식·이동녕·신규식·이상룡·조완구·박찬익·조성환 등 국무위원급 20여 명이 대종교인이었다. 1919년 39인이 서명한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도 서명자 대부분이 대종교인이었다. 그 선언은 이후 2·8독립선언과 3·1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청산리전투의 주력인 북로군정서 역시 대종교 조직을 기반으로 했다. 만주 무장투쟁의 상당 부분이 대종교라는 조직 네트워크 없이는 성립하지 않았다.
신채호의 역사학에서 가장 독창적인 부분은 고조선과 삼조선론이다. 그는 단군조선을 신조선(辰), 말조선(莫), 불조선(番)의 셋으로 분립한 연방 체제로 파악했다. 가운데 신조선에 대왕이 있고, 말조선·불조선에 부왕(副王)이 있는 3경 체제였다. 이 분립 체제가 후대의 삼한(마한·진한·변한)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그의 논지다.
기자조선에 대해서도 신채호는 강한 의문을 제기했다. 단군·기자·위만의 3왕 계보는 억지 해석이며, 기자가 조선에 와서 교화를 베풀었다는 이른바 '기자동래설'은 중국 중심의 사관이 만들어낸 허구라고 봤다. 임나일본부설도 부정했다.
강역 인식도 파격적이었다. 전삼한의 위치를 요하 이서와 개원 이북으로 보았고, 말조선은 요동반도에서 압록강 동쪽까지를 관할했다고 했다. 단군이 영토를 확장하며 심양(길림성), 요동(봉천)을 거쳐 한반도로 천도했다는 구도다. 고조선의 강역을 한반도에만 가두지 않고 만주 일대를 포괄하는 시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신채호의 역사 서술이 주목받는 또 하나의 이유는 낭가사상론이다.
그는 우리 역사 속에 불교·유교와는 다른, 단군을 신선으로 보는 선가(仙家) 사상의 흐름이 면면히 이어져 왔다고 주장했다. 최치원이 「난랑비기」에서 언급한 '풍류도(風流道)'가 그 흔적이다. 신채호는 이를 '낭가(郎家)'라 이름 붙이고, 화랑도의 원류가 이 선가 전통에서 나왔다고 봤다. 외래 사상인 불교·유교가 들어오기 전, 우리 민족 고유의 정신적 전통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민족 고유 문화론'이고, '국수보전론'의 핵심이다. 낡은 것은 버리되, 민족 문화의 정수는 지켜야 한다는 원칙이었다.
신채호 연구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부분이 그의 말년 아나키즘이다.
1923년 의열단 단장 김원봉의 요청으로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하면서 무정부주의 이론가 유자명과 한 달간 함께 지내며 아나키즘에 접한 것이 계기였다. 이후 1928년 국제위폐 사건으로 체포되어 대련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36년 옥사했다.
일각에서는 이 시기를 '아나키즘으로의 전환'으로 보지만, 이 해석은 설득력이 약하다. 아나키즘의 핵심은 모든 제도화된 정치조직·권력·사회적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채호는 일본인 무산자조차 "조선의 적노"로 보았다. 계급이 아닌 민족을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 임시정부를 비판하면서도 통일 민족 정부 수립을 포기하지 않았다. 정당을 인정하고 임시정부에 참여했던 한국 아나키스트들의 행동 자체가 서구 무정부주의의 원칙과 이미 달랐다.
더 직접적인 증거가 있다. 1929년 대련지방법원 공판에서 재판장이 위폐 사기의 이유를 묻자 신채호는 답했다. "우리 동포가 나라를 찾기 위하여 취하는 수단은 모두 정당한 것이니,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는 도둑질을 할지라도 양심에 거리낌이 없소." 그리고 일본 연호를 쓰지 않겠다고 끝까지 버텼다. 죽음이 가까워지자 일제는 친일파 고관의 보증을 받아오면 석방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단호히 거부했다.
수감 중 그는 틈틈이 역사책을 읽었다. 『국조보감』과 『조야집요』 차입을 부탁했고, 이미 신문에 연재 중이던 자신의 『조선상고사』 연재를 중단해달라고 요청했다. 출감 후 더 완성된 버전으로 새로 발표하겠다는 이유였다. 감옥에서도 민족사 집필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이 진짜 신채호였다.
신채호가 뿌린 씨앗은 그 후로도 계속 자랐다. 정인보는 1920년대부터 '홍익인간' 정신을 발굴해 독립운동의 사상적 기반으로 다듬었다. 조소앙의 삼균주의(정치·경제·교육의 균등), 안재홍의 신민족주의, 안호상의 일민주의 모두 신채호 류의 단군민족주의에서 뻗어나간 가지들이었다.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는 개천절을 국경일로, '홍익인간'을 교육 이념으로 공식화했다. 단기 연호는 1961년 군사정부에 의해 서기로 대체됐지만, 개천절과 홍익인간 정신은 지금도 살아있다.
이 대목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신채호의 역사 서술에 대한 학계의 비판도 존재한다. 문헌 해석에만 의존하고 고고학적 접근이 빠졌다는 점, 민족주의적 목적의식이 과하게 앞서면서 사료 비판이 소홀해졌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신채호 본인도 수감 중 조선일보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건 단정적 연구가 되어 도저히 자신이 없고, 완벽한 것이라 믿지 않는다. 10년 고역을 마치고 나가면 다시 정정해 발표하겠다." 스스로 한계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비판이 그의 공헌을 지우지는 않는다. 조선총독부가 식민사관을 공식 교육으로 가르치던 시대, 왕조 중심으로만 기술되던 시대에 신채호는 민족을 역사의 주체로 세웠다. 그것은 단순한 학문적 제안이 아니라, 나라가 사라진 상황에서 민족이 살아남기 위한 최후의 진지였다. 그 진지 위에 독립운동의 군병들이 모여들었다.
단군민족주의는 종종 오해를 받는다. 과도한 민족주의, 역사 신화화, 종교적 믿음과 역사의 혼용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북한의 1993년 단군릉 발굴과 재건은 이 개념이 정치적으로 어떻게 악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했다.
하지만 신채호가 제기한 핵심 물음은 지금도 유효하다.
- 우리는 누구인가.
- 이 민족의 역사적 정체성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 타자의 시선이 아닌, 우리 스스로의 언어와 논리로 우리 역사를 서술할 수 있는가.
신채호가 두려워한 것은 칼이 아니었다. 그가 가장 경계한 것은 스스로를 업신여기는 민족이었다. 소중화를 자처하고 사대주의에 빠져 스스로를 하찮게 여기는 나라는 반드시 망한다고 그는 썼다. 반면, 나라가 망해도 민족의 정체성이 살아있다면 독립은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었다.
나라를 찾기 위해 위폐를 만들고, 만주 벌판을 누비고, 감옥에서 죽어가면서도 역사 원고를 다듬던 사람. 그는 자신의 삶 전체를 증거로 제출했다. 단군의 자손이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줬다.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이다.
그 투쟁에서 우리가 '아'임을 잊지 않는 것,
그것이 신채호가 지금 우리에게 남긴 숙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