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결혼식이 열렸던 팍딩의 천변에 있는 로지에 도착하였다. 올라갈 때 보았던 그 많던 결혼식장의 하객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우리만이 식당을 지키는데, 밖에서는 쿰부 빙하가 녹은 물이 세찬 소리를 내고 흐른다.
간혹 지게를 진 짐꾼들이 창밖을 지나는 모습이 보인다. 히말라야의 지게는 광주리 형태이다. 광주리에 끈을 묶고 그 끈을 이마에 두름으로써 짐 무게를 지지한다. 영양가 있는 음식을 많이 섭취하지 않아 키도 작고 연약해 보이지만 20~40kg의 짐을 지고 산악지대를 잘도 걷는다.
특별히 그들은 나무로 만든 T자 형태의 지팡이를 사용한다. 쉼터에는 계단식으로 돌을 쌓아 짐을 올리도록 배려가 되어 있으나 쉼터가 아닌 곳에서 쉴 때는 선 채로 지팡이를 광주리 밑에 받쳐서 무게를 던다.
| | ▲ 히말라야 산간의 짐꾼이 선 채로 휴식하는 모습 | | ⓒ 강경원 | |
| | ▲ T자형 지팡이와 등에 지는 광주리 | | ⓒ 강경원 | | 다음날 오전에는 날씨가 맑았으나 점차 흐려진다. 오후에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내려올수록 인구밀도가 높아지고 농토와 참나무가 증가한다. 루클라에 오니 전화, 스캐닝, 인터넷 통신이 가능하다는 상점이 많이 보이고 잡화점, 기념품상, 식당, 식료품상, 등산장비점 등 없는 것이 없다. 드디어 문명세계로 복귀한 것이다.
비행장 옆에 있는 히말라야 로지(Himalaya lodge & Restaurant)에서 가장 값이 비싼 방을 잡았다. 평소 25달러인데 비수기라 10달러만 받았다. 좌변기, 사워꼭지, 깨끗한 침대. 얼마 만에 보는 것인가! 그러나 루클라에서 시설이 최고수준인 이 호텔도 기대 이하의 수준이었다. 사워꼭지에서는 찬물만 흐른다. 카트만두에 가서나 부랑자 꼴을 면할 것 같다.
그러나 식당은 깨끗하고 벽에는 각국에서 다녀갔던 등반대가 기념으로 남긴 팬던트들로 가득 차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네팔의 전 국왕일가 사진이었다. 왕위 찬탈을 노린 음모론의 의혹을 낳아온 네팔 왕실 몰살사건(2001년 6월 1일)은 디펜드라 왕세자 개인의 우발적 범행이라고 일단락되었으나 그 사건으로 왕위를 물려받은 가넨드라 현 국왕은 여전히 국민들로부터 의심을 받고 있다.
가넨드라 왕은 절대왕권을 포기하고 입헌군주제로 바꾸어 민심을 수습하고자 했으나, 사실상 왕정 붕괴의 시간을 연장하는 데 불과할 것이다. 지금도 국민들은 가넨드라 국왕의 하야를 요구하며 지속적으로 번다(총파업)를 실시하면서 민주화운동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전 국왕일가의 사진을 걸어두는 것이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닐 듯하다.
식당에는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앉아 있는 몇 사람뿐이다. 산에서 몇 번 보았던 것 같은 매우 인상적인 여자가 나처럼 계속 기침을 하기에 말을 붙여보았다. 이탈리아에서 온 이 여자는 기상학자인데 로부제에 있는 기상연구센터에서 두 달 동안 근무하다가 심한 감기 때문에 휴가를 얻어 고향인 밀라노로 가는 길이란다.
네팔과 이탈리아가 상호 협력하는 프로젝트를 위해 파견 근무를 하는데, 해발 5000m의 고산에서는 오래 버티기 힘들어 교대로 근무를 한다고 한다. 지금 돌아가면 4월에 다시 온다고 했다. 작고 아담하지만 강단 있게 생긴 이 학자가 꼭 건강을 회복하길 바란다.
이 여자를 보면서 한국과 네팔 간의 국제협력도 강화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해본다. 지금은 한국의 기독교 선교단체가 많은 활동을 하고 있으나 정부 차원에서 네팔 경제개발에 참여하는 것이 네팔에는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수많은 계곡을 바라보면서 내 눈에는 저것이 모두 에너지 자원으로도 보이는데, 아직도 촛불을 켜는 농가가 많을 뿐만 아니라 수도에서조차 전기부족과 정전사태가 자주 일어나고 있으므로 소수력발전사업을 통한 교류관계를 맺었으면 하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물론 심각한 환경훼손을 일으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생각해 볼 일이다.
| | ▲ 감자를 파종하는 모습 | | ⓒ 강경원 | | 할 일이 없으니까 거리를 자꾸 배회하게 된다. 길가에서는 여러 명이 괭이로 밭을 쫀다. 한 남자는 땅이 파인 부분에 무엇인가를 던져 넣는다. 협동작업이 기가 막히게 척척 들어맞는다. 무엇이냐고 영어로 물으니까 이미 의미를 파악하고 ‘알루’라고 한다. 감자를 파종하는 것이다.
극히 한정된 척박한 농토에서 네팔 사람들은 필요한 만큼 최소한을 거두는 것 같다. 사실상 네팔의 토지부족은 심각하다. 그나마 대부분의 땅을 지주계급(대체로 브라만과 샤트리 계급)이 갖고 있으므로 자영농은 극히 드물고 농민은 주로 소작농이란다. 이것이 오늘날 마오이스트의 반란을 가져오게 한 원인 중에 하나이다.
다음날 아침의 날씨는 대단히 좋았으나 내가 탈 비행기는 오지 않는다. 오전 7시 50분발 비행기이므로 일찍 일어나서 기다렸는데 무심한 비행기는 소식이 없다. 갈 때 산에서 자주 만났던 독일 사람들도 같은 형편이다. 그들도 칼라파타르를 오를 목적으로 온 것인데 고산증으로 모두 포기했다고 한다. “다음에 오면 되지 뭐!”하면서 자위한다.
실상 칼라파타르에 오르려는 사람의 성공 확률은 반 정도에 불과하다. 고산증이 주된 이유이나 다른 이유도 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남제 바자르 마을에서 만났던 대구에서 온 한의사는 가이드 없이 포터만을 대동하고 갔었는데 언어소통이 안 되는 데다 포터가 도무지 말을 듣지 않고 잠만 자서 포기했단다.
비행기는 오후 1시나 되어서 경사진 활주로를 박차고 이륙하였다. 오후 1시 40분에 도착한 카트만두에는 총파업이 끝나고 평온을 되찾은 듯 보인다. 그러나 여름처럼 더운 봄의 열기 속에 혁명의 불씨는 남아 있다.
| | ▲ 북적대는 타멜의 거리 | | ⓒ 강경원 | | 관광객의 메카인 타멜(Thamel) 거리는 이 년 전보다 신축 건물이 많이 늘기는 하였으나 관광객으로 북적이던 활기는 없어졌다. 네팔의 정치 불안정이 가장 큰 원인이다. 카트만두 관광 명소 중에 흔히 제일로 꼽는 곳은 힌두교의 4대 성지이자 화장터인 파쉬파트 나트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꼭 가봐야 인생을 안다”고는 하지만 왠지 내키지 않는다.
덜발(Durbar) 광장은 어떨까? 2월이지만 우리의 여름 땡볕 같은 태양 아래 옛 왕궁, 쿠마리 사원, 비쉬누 사원, 시바 사원 등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고적들은 이 분야에 대해 무지한 나를 노곤하게만 만들었다. 걸어서 돌아오면서 보는 아선 시장의 북적임, 수를 헤아리기 힘든 비둘기들, 구석구석에 자리 잡은 불탑과 힌두 사원, 그 모든 것이 바뀌지 않았다.
| | ▲ 덜발 광장의 힌두교 사원들 | | ⓒ 강경원 | |
| | ▲ 덜발 광장의 파고다와 사원 | | ⓒ 강경원 | | 이때 제링 셰르파가 다음날 집에 초대를 하고 싶다기에 수락하였다. 평소에도 네팔의 가정생활에 관심을 갖고 있던 터라 잘된 일이다. 타멜에서 서쪽으로 골목을 빠져 나와 넓은 도로를 만난다. 비포장도로이므로 60년대 우리나라의 읍내처럼 길가 집의 창틀에는 먼지가 수북하다. 길에는 하수도가 따로 없고 갓길에 파놓은 수채에는 쓰레기가 쌓여 있다. 먼지를 마시며 한참을 가니 외관은 그럴싸한 3층의 공동주택이다.
주택 내부에 들어서니 ㅁ자형 구조의 비좁은 건물이었다. 아직 비어 있는 호실도 보인다. 2층에 방 두 칸과 부엌이 딸린 한 가구는 화장실을 다른 가구와 공동으로 사용한다. 제링이 초대한 집은 제링의 형이 사는 집이었다.
식구는 형의 가족과 처제, 그리고 제링이었다. 무엇보다 이상했던 것은 제링이 형수의 여동생과 한 집에 산다는 점이었다. 아직도 끈끈한 가족관계가 유지되고 있고 개인주의라는 것은 생소한가 보다. 지금도 네팔에는 우리나라가 70년대까지 그랬듯이 형편에 따라 가족의 학업과 부양을 책임지면서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일반적이다.
그의 형인 응앙 푸리 셰르파는 주로 7천m급 히말라야 봉우리를 정복하려는 프랑스 등반대의 가이드 일을 담당한다고 한다. 그 때문에 프랑스어가 유창하단다. 깡마르고 키가 비교적 큰 응앙 푸리는 그래도 돈을 제법 많이 버는지 오디오와 DVD 장치를 가지고 있었으며 CD에 수록한 등반 기념사진들을 특별히 보여주면서 산사나이의 자긍심을 나타내 보이고자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점심을 먹기 전에 미리 준비한 똥바를 대접하였다. 빨대로 술을 마시자마자 온수를 채워 주었고 그러기를 두세 번 하면 새로운 똥바 잔을 다시 가져 왔다. 음식은 예상했던 대로 달밭이었다. 식당과 차이가 있다면 양이 더 많은 것이다. 그들은 가급적 융숭한 대접을 하려했고 그것에 비한다면 나의 식욕은 형편없었지만 가정방문에 대해서는 만족하였다.
네팔은 가난하고 정치적으로 불안하며 길거리는 더럽다. 그래도 일 없이 길거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늘 웃고 있다. 쿰중에서 보았던 히말라야 연봉의 보석 같은 빛깔이 그들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그 때문에 나는 또 네팔을 그리워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