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단순한 떠남이 아니다. 다른 생에서의 삶을 이생에서 한 번 살아 보는 것, 그것이 진정한 여행이다.’ 유성룡 여행작가의 말처럼 무엇을 즐기기 위해 여행을 계획한다면 그건 여행이 아니라 관광일지도 모르겠다. 다른 생에서의 삶을 살아보는 것, 그것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는 것일 게다. 흔히 우리는 역사의 흔적이 문화재에만 또렷이 남아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연도 역사의 한순간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에 위치한 봉곡사 숲은 시대의 한 지점으로 방문객을 인도한다. 역사의 아픔을 이겨낸 훈장마냥 저마다 몸에 상처를 지닌 채 봉곡사 소나무는 말 없는 증인처럼 묵묵히 숲을 지키고 있다. | |
충남 아산 봉곡사 지도 보기
숨겨진 아름다운 한국을 찾아
“제가 정말 좋은 곳 소개 해드릴게요. 아, 저희가 이런 취재는 정말 잘 알고 있다니까요. 봉곡사라고 절이 있는데, 거기 숲이 정말 아름답습니다. 일제가 수탈했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고요” 아산시청을 나서려는데 유선종 공보담당관이 팔을 붙잡는다. 숨겨진 ‘아름다운 한국’을 소개해달란다. 하지만 이미 창밖에는 작은 눈발이 흩날리고 있다. 추위 속 ‘겨울숲’ 산행이라니 선뜻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무심코 대답을 한 뒤 39번 국도를 향해 차를 몰았다. 저 멀리 고색창연한 외암민속마을이 시신경을 자극하면서 외지인을 유혹한다. 사시사철 그 자리에 있는 숲이 뭐가 다를까하는 속 좁은 생각이 슬며시 고개를 내민다. 한적한 시골길을 지나 봉곡사 숲 입구에 다다랐다. 아스팔트가 깔린 널찍한 산책로를 보자 차로 오를 수 있을 것 같다는 도둑놈 심보가 스멀스멀 마음을 간질인다. 하지만 이런 고얀 마음을 가진 이가 많았는지 산책로 입구에는 ‘신선한 송림숲을 걸어 다닙시다’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사람 한 명 보이지 않는 고요한 숲에서의 시간 여행이 시작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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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하트모양으로 보이지만, 일제강점기 송진을 채취한 흔적이다. <이윤정기자>
- 2 높이 15m 가량, 평균 수령 100여년의 소나무가 길 양옆으로 멋들어지게 서 있다. <이윤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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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트 모양으로 보이시나요? 일제의 수탈현장입니다
발을 내딛는 순간 걷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멋들어진 송림의 자태가 마치 패션 잡지에서 매끄러운 몸매와 독보적인 포즈로 독자를 유혹하는 모델 같다. 하지만 봉곡사 숲의 소나무는 다른 곳에서 보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밑동에 V자로 움푹 팬 자국이 나무마다 새겨져 있다. 어림잡아도 성인 머리 크기 정도는 된다. 어떤 나무는 V자가 변해 우리가 흔히 하트모양으로 부르는 ♥자로 변해있다. 자연적으로 생겼다고 하기엔 그 모양이 인위적이고 흔적 또한 깊다. 봉곡사 소나무가 세계 최고 모델이었다면 치명적인 상처다.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아산시청 산림과 이낙원계장을 찾았다. 이계장은 “아마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대 초반에 일제가 석유 대신 쓰려고 송진을 채취했던 모양입니다. 그 숲이 봉곡사 소유라 밑동을 다 베진 못하고 나무에 생채기를 내서 송진을 받아갔던 것 같습니다”라고 설명한다. 일제는 한반도의 소나무 숲에서 마구잡이로 송진을 채취하거나 나무를 벌채해 갔다. 그래도 봉곡사 숲은 벌채의 위기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다. 숲이 봉곡사를 감싸 안고 지켜주듯이 사찰도 숲을 지키기 위해 애썼기 때문이다. 이계장은 “봉곡사 숲은 우리나라 토종 소나무 천연림입니다. 평균 높이 15m에 수령은 아마 100여 년쯤 됐을 거예요. 누군가는 송진 채취 흔적을 보고 훈장 같다고 하대요. 저도 일제 강점기는 겪지 못한 세대니까, 이 숲이 역사의 증인인 셈입니다”라며 숙연해진다. |
사색의 숲길 700m를 지나 호젓한 봉곡사까지
봉곡사를 찾았을 때 스님은 계시지 않았다. 대신 한 보살이 이것저것 설명해준다. “동안거 기간이라 스님들은 다른 절에 가셨죠. 저희는 정월 보름까지 100일 기도를 올리기 위해 이곳에 왔고요” 한 낱 보살의 이름은 알아서 무엇하냐며 이름도 밝히지 않은 채 말을 잇는다. “봉곡사 숲은 봄, 여름에 방문객이 많아요. 기도하러 오는 사람도 있고 그냥 산책하러 오는 사람도 있고요. 봉곡사는 조용하고 때 묻지 않아서 다들 좋아 합디다”라며 불공을 드리러 간다. 숲 입구에서부터 700m, 약 20~30분을 걸으면 봉곡사가 나타난다. 한 보살의 말처럼 봉곡사는 호젓하다 못해 고요하다. 신라 진성여왕 원년(887)에 도선국사가 지은 이 절은 고려시대 ‘석암사’로 불리다 조선 정조 때 ‘봉곡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사찰은 임진왜란 때 폐허가 돼 인조 24년에 고쳐진 것이다. 오래된 역사만큼 절 안에서는 구수한 소박함이 묻어나온다. 사찰 앞으로는 하늘을 찌를 듯 전나무가 솟아 있고 뒤편으로는 대나무 숲이 푸근하게 감쌌다. 장마를 대비해 파놓은 연못에는 물이 빠지고 대신 낙엽이 수북이 쌓였다. 이렇게 고즈넉한 봉곡사에서 다산 정약용(1762~1836)은 1795년 실학자들과 함께 공자를 논하고 성호 이익의 유고를 정리하는 강학회를 열었다. 또 만공(1871~1946)스님은 1895년 이곳에서 ‘세상의 모든 것이 한 송이 꽃’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봉곡사 숲길을 걸으며 일제강점기 역사의 아픔을 느끼고 시대의 교훈을 배워가고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