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의 '안단테 파보리'다. 긴 글, 리듬 맞춰 보폭 경쾌하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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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풍광에 차창 밖으로 눈을 고정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딜까? 대전~통영간 고속도로다. 우측으로 무주구천동 이정표가 보인다.
잠깐~~! 갓길에 세우고 찍었다. 위험천만,,,말도 않된다며 난리들이다. 내가 좀 이렇다,2010년 호랑이 새해에는 몸조심 해야겠다.
가을은 이미 갔다. 그래도 한번 상상해 보라. 맨 언굴에도 저리 수려한데 단풍 옷을 입는다면? 실제로 옛 사람들은 바위 상하로 붉은 옷을 입혀주고는 이름도 지어주었다.
적상산(赤裳山,1034),,, 붉은 치마(赤裳)를 두른 산이다. 가을에는 하얗게 탈색된 단애 주변으로 울긋불긋 단풍이 환상이다. 단애는 산의 3면을 빙 두르고 있고 붉은 단풍나무도 많다.
적상산 좌측으로는 무주읍이 있고,정상 너머로 덕유산이다. 우측 너머로는 전북과 경남의 경계인 육십령이 나온다. 6ㅇ명은 있어야 안전하게 넘을 수 있었다 해서 육십령이다.
우리내 산 이름은 불교,도교적이다. 왜 일까? 명명하는 자들의 반영이어서이다. 조선 사대부들 정치는 성리학적으로 했고 삶은 도교적으로 살았다. 권력서 피튀기고는 일상에서 신선타령으로 보상받았던 것이다.
정철,윤선도,,,,등등 한 이름 하는 문필가 치고 당쟁 중심에 서지 않은 자 없었다. 와중에 매월당 김시습,서포 김만중,반계 유형원,다산 정약용 같은 이들은 유배길서 명저를 남기고.
조선시대 최고 권력투쟁 피바람은 선조 때의 '기축옥사'였다. 전주産 정여립등 동인 계열 1천여명이 죽거나 유배를 떠났다. 조선조 4대사화 보다 이때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 이때 호남사림의 씨가 말랐다. (정여립이 대동 세상을 꿈꾸며 은둔한 곳이 무주 바로 옆 진안이다)
선조는 조선조 27명의 왕 중 시기,질투,무능의 일인자였다. 분활통치,,,以夷制夷,,,Divide and rule,,,, 선조의 묵인 하에 혹은 공모하에, 서인들에 의한 정여립 등 동인을 축출하기 위한 조작극이 기축옥사였다. 선조는 중종의 9번째 서자로 애초 왕 위하곤 멀어도 한참 멀었다. 로또 당첨이다 보니 왕권이 약했고 이를 비정상으로 만회했다.
즉,기축옥사를 가져온 모반 조작의 총 연출자는 선조요, 행동대장이 바로 관동별곡,속미인곡의 정철이였다.
의병장 김덕령은 모반 누명으로 전쟁 중 죽임을 당했다. 이순신은 죽음 문턱에서 백의종군했다. 학습효과란게 있는지라, 노량진 해전이 끝나고는 죽음을 위장, 초야에 숨어들었다는 說이 허구는 아니다. 홍의장군 곽재우도 전쟁이 끝나자 마자 산으로 숨었다. 적군이 아닌 아군이 무서워서다.
성리학은 송나라 유학이다. 간난신고(艱難辛苦)의 시대,,,성리학은 바로 공생의 필요성에서 나왔다. 인간의 내면적 욕구를 억제해 함께 살자는 내적 성찰이었다.
그러나 조선 권력에 성리학은 교조였고 권력의 수단이였다. 수단으로써 성리학,,,,조선이 망할 때 까지 계속되었다. 조선 후기 북학파는 문체반정의 구실로,재야 남인은 천주교 탄압으로 숙청했다.
바로 이런 저들이 이름을 지었다. 그것도 자신들과의 연관 속에서. 중(僧)들은 옆에서 거들고.
동해시의 진산 두타산은 금강산이 안부럽다. 그 두타산엔 무릉계곡이 있다. 무릉계곡은 사시 사철 언제나 그들의 차지였고,승경처엔 죄다 그들의 자취를 남겼다. 송시열의 별서(별장) 속리산 화양계곡은 숫재 '사대부 놀이 테마공원'이였다. 이땅 유명 계곡,승경처는 어딜 가나 뭐뭐팔경!이다.
적상산은 보물섬이다. 지식의 보물창고다. 밖은 단애로 범접을 금하지만 정상 안은 넓은 분지로 안온하다.
아는 만큼 보이고,보인 만큼 느끼는 게 여행이다. 둔내를 아시는지?? 내 좋아하는 음식이 막국수인데 막국수 하면 '둔내 막국수'다. 조선시대 양곡 대여 창고인 둔고(屯庫)가 있어서 둔내다. 영동고속도로 원주를 지나면 둔내가 나온다. 여기부턴 고도가 거의 900미터를 육박하고 이는 대관령까지 계속된다. 영동1,2,3 터널이 연이은데 제1터널이 둔내터널이고, 제2터널은 봉평터널이다.
봉평터널이라! 감이 오시는지?? 봉평터널 위 산줄기를 따라 남으로 가면 평창 대화면이요,북으로 가면 평창 봉평면이다.
허생원,조선달,동이는 대화장에서 재미를 못보았다. 봉평장에선 한목 기대하며 야심 산허리를 넘는다. '매밀꽃 필무렵'은 이들 장돌뱅이들의 한여름밤 달빛 소나타요,달빛 로맨스다.
우리는 그들이 가던 길을 터널로 가로 질러 차로 가지만, 그들은 터널 위를 남에서 북으로 걸어서 갔다. 모르면 창문 버튼 눌러야하는 귀찮은 터널이다. 그러나 알고 지나면 플라톤의 시커먼 동굴에서도 행복이다.
지금, 바로 지금,,,, 저리 보이는 적상산이 그렇다. 안에는 인문적 풍요가,역사가 있다.
훈민정음,조선왕조실록,승정원 일기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다. 한세기 전만 하더라도 세계적 보물 조선왕조실록과 왕실 족보가 저 안에 있었다. 한 왕조의 통치 근간인 실록이 있고,최고 권력의 족보가 있으니 지키는 건 당연. 적상산성이 있다. 저 단애를 방패 삼아서이다.
나는 지금 적상산엘 간다. 나들목을 나와 적상산 밑으로 난 터널 지나면 곧바로 무주리조트다. 나는 그 길을 버린다. 무주읍을 지나 꼬부랑 길을 따라 여인네 붉은 적삼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무주읍을 지나 적상산 초입에 들어서니 이내 구절양장이다. 적상산(1034)은 높다. 9부 능선 까지 난 길은 드라이브 코스로 인기 높다. 아직 가을의 흔적은 있었다. 은행은 나목이 되었고 빨간 단풍은 여전하다. 역시나 적상산엔 단풍나무가 많나 보다.
적상산의 유일한 출입구인 동북사면. V자 계곡을 막아 인공호수를 만들었다.
놀랍게도, 정상 내부로 들어가니 분지가 있고 물이 있다. 남한산성처럼 우리나라 산성의 특징이 바로 이런 거다.
//외부로는 차단되었지만 내부엔 물,농사가 가능한 분지가 있다는 것//
멀리 조선왕조실록이 보관되었던 '적상산사고'가 보인다. 사고 바로 너머에 안국사가 있다. 적상호는 양수발전을 위한 인공호수다. 양수(揚水)발전은 높이 차이가 나는 두 저수지를 두고,물을 떨어뜨려 전력을 생산한다. 남은 전력을 이용해 물을 끌어올리는 재활용 시스템이다.
산 아래 초입에는 무주호가 있다. 여기서 물을 지하터널로 떨어뜨려 전력을 생산한다. 적상호~무주호,,,물은 위아래로 돌고돈다.
적상산 사고.
원래 사고(史庫) 터는 적상호가 만들어지면서 수몰되었고 당시 주춧돌을 옮겨 복원한 것이다.
조선 권력의 기록 정신은 특별했다. 실록은 역사요,한 왕조 정통의 상징이다. 사마천의 사기처럼 후대 인문 정신의 기저가 된다. 정사를 펴면서 필요할 경우 일정 절차를 거쳐 열람했다.
사고의 흔적은 찾으면 팔도 곳곳에 있다. 강화도,오대산,묘향산,태백산,적상산,내장산,마니산,,,,,등등.
(여행 시 자주 접하는 지라 정리해본다.)
사고는 두개의 주요 기능이 있다. 실록과 선원록(璿源錄)을 보관하는 것이다. 선원록(璿源錄)은 왕실의 족보로 '璿'은 '아름다운 옥'이라는 뜻이다. '王 = 玉'이다.
중요하기에,중심 건물은 둘이다. 화재 방지를 위해 건물 사이에는 담을 쌓고,방습을 위해 2층 누각을 올리고 서적은 2층에 보관했다. 실록은 쉽게 열람할 수 는 없다. 누가,무슨 이유로,또한 열람 후에는 실록 보존상태를 기록해야했다. 이 기록 책자를 형지기 (形止記)라 한다. 좀이나 습기 방지로 몇년마다 꺼내 햇볕에 말렸는데 이를 포쇄(曝曬)라 한다.
사고의 관리는 종9품인 두명의 참봉이였다. 지키는 책임자는 실록수호총섭(總攝)이 맞았는데,해당 수호사찰 주지가 임명되었다. 참고로,왕릉 묘지기도 참봉이였는데 한때 퇴계도 참봉 벼슬로 왕릉 묘지기였다.
사고는 고려 말기에도 있었다. 그 때는 실록을 두곳에 보관했다. 개경 수창궁에 한부,만약을 대비해 충주에 한부,,,이리 두부.
조선 세종 초기 때는 태조,정종,태종 실록을 각각 한부만 제작해 충주사고에 보관했다. 왜 한부만일까,그것도 지방에다? 당시는 정권 교체기로 새 왕조의 치부가 드러나는 걸 피하기 위해서다. 권력 안정기에 접어드는 세종 말기에는 궁궐 춘추관에 한질, 전주,충주,상주에 각각 한 질 총 4질을 보관했다.
큰 일 났다. 조일전쟁이 터졌다. 부산 동래성이 함락되고, 왜군의 진격 일정 따라 상주,충주,춘추관 사고가 차례로 불탔다. 남은 건 전주 사고뿐.
어찌할고. 전주 사고본은 내장산 내 여러 암자에 옮기고 또 옮겼다. 해주,강화도,영변을 거처 결국 묘향산에 정착했다.
전쟁이 끝나고 이 전주본을 저본으로 해 총4부를 인쇄했다. 그리고 한양 춘추관,묘향산,태백산 ,강화 전등사,오대산에 보관했다. 4사고가 5사고 체재로, 읍성 보관서 산성 보관으로 바뀐 것이다. 이후 후금(청나라)등으로 북방이 혼란스러워지자, 광해군 때 묘향산 사고를 무주 적상산으로 옮기니 바로 적상산 사고본이다.
적상산 사고 지나 안국사 진입로.
묘향산 사고는 보현사가, 태백산 사고는 각화사가, 강화 정족산 사고는 전등사가, 오대산 사고는 월정사가, 적상산 사고는 호국사가 책임 사찰이였다.
사고는 주로 승병들이 지켰다. 그래서 사고가 들어선 곳에는 사찰도 많았다. 권력의 혜택이 많아서이다.
사고가 들어선 이후 적상산에도 많은 사찰이 들어섰으나 현재는 안국사만 남아있다. 안국사는 이전에는 지금의 적상호 자리에 있었다. 수몰되고 이곳 호국사 터로 옮겨왔다.
호국사는 해방 직 후 추석 날 송편 해먹다 불탔다. 유일한 목조탑이였던 화순 쌍봉사 3층목조탑(국보)은 80년대 초 설날 떡국해 먹으려고 탁발나간 사이 불탔다.
安國,護國,,,, 권력의 내음이 나는 호칭이다. 안국사 천불전은 적상산 사고 선원보각을 옮겨놓은 것이다.
안국사 중심 전각인 극락전~
안국사 영산회 괘불탱ㅡ의겸作
안국사에는 미술사적으로 눈여겨볼 만한 문화재 한 점이 있다. 화승 의겸(?~?)이 그린 괘불이다. 의겸은 조선 후기 3대 화승이다. 18세기 전기 전라 지역을 중심으로 해 경남까지 활약했는데 현재 30여점이 전해지고 있다 그 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최고 단청장 만봉스님(1910~2007)도 그 화맥이다.
정식 명칭은 영산회 괘불탱(靈山會 掛佛撑)이다. 영산회(靈山會)란 영축산에서 석가의 제자들에 대한 설법 모임이다. 괘불탱은 법회 때 앞 뜰에 걸어놓은 대형 그림이다. 저 극락전 앞 석조물에 깃대(당간)를 세우고 걸었다.
길이 10m,폭 7m 크기로 7명이 그려진 칠존도(七尊圖)다. 석가를 중심으로 오른쪽에 다보여래,문수,보현보살이 왼쪽에는 아미타불, 관음, 대세지보살이 서있는 대칭 구조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엄격 대칭은 종교화의 기본 교본이다.
중앙의 석가모니는 크고 건장하다. 보는 이를 압도해 마치 독존도(獨尊圖)처럼 보인다. 각진 어깨, 드러난 가슴, 유난히 긴 팔에 비해 하체는 너무 짧다. 긴 팔은 중생의 제도를 상징한다.
녹색과 주황색이 돋보인다. 회색,분홍 등 중간색을 넣어 은은한 분위기를 나타냈다. 구름,연꽃,단청 문양 등을 넣어 화려한 느낌도 준다. 서양화의 천사처럼, 석가 머리 양 옆으로는 구름을 타고있는 선녀가 사선(斜線)으로 그려져있다. 동적인 파격을 준 것이다.
불화 하면 서양 종교화에 비해 옹색함을 느끼곤 하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그리 교육받은 선입견 때문이다. 고려말 불화는 세계적이다. 쇼더비,크리스티 경매에서도 가격이 쌔다. 총 100여점이 있는데 90점은 일본에 있다. 고려말 왜구들이 가져갔다.
안국사 괘불은 기우제 효염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뒷 면에는 당시 축원문등이 여러 장 붙어있다. 사찰 마당에 걸어놓고 기우재를 지냈다.
그러면 안국사 영산회 괘불탱은 정말 소문대로 영험했을까? 그랬을 것이다. 인디안들의 기우재는 100% 적중이다. 왜? 비가 올 때 까지 제를 올리니까.
그럼 안국사는? 안국사는 1천미터가 넘는 적상산 정상 부근에 있다. 바로 앞 산인 덕유산은 남한서 4번째로 높은 1614미터나 된다.
적상산 인근은 무주,진안,장수군으로 보통 앞자를 따 무/진/장이라 부른다. 선거구도 한묶음이다.
이 무진장엔 눈이 무진장 온다. 이유는 바로 드높이 솓은 덕유산 줄기 때문이다. 서해에서 밀려오는 습기 먹은 공기가 찬 덕유산에 부딛치면서 응결한다. 남쪽임에도 무주리조트가 성황을 이룬 이유이기도 하다. 무주 리조트는 국내 스키장 중 가장 긴 슬로프를 가지고 있다.
덕유산 동내는 설천면이다. 雪川面 ~. 당연 적상산도 훨 많은 눈,비가 내린다. 기우재를 올리고 있을 때 타 지역은 안와도 적상산엔 올 확률은 훨 커진다.
실제로 경험했다. 다음날,,,,일기가 나빠 덕유산 향적봉 행 곤도라는 운행도 못했다. 정상엔 상고대로 하얗고,새찬 바람이 불고 하늘엔 먹구름이 가득했다. 탑승을 포기하고 덕유산을 벗어나 무주 읍내에 들어서니 하늘엔 해가 있었다.
아쉬워 무주리조트에 전화했다. 혹 운행이 가능해지면 문자 찍어달라고. 오후 3시경 마니산에 들어와 있는 데 전화가 왔다. 일기가 여전해 오늘 하루 운행이 불가능하다고.
금어(金魚) 의겸은 조선 후기 3대 화승이다. 고성 운흥사,청곡사,개암사에 있는 그의 불화가 특히 유명하다.
金魚란? 음악의 비르투오조,마스터 처럼 최고 화승에 붙는 존칭이다. 다빈치는 베로키오,미켈란젤로는 기를린다요,라파엘로는 페루지오를 스승으로 모셨다. 그리고 스승 공방에서 도제(徒弟)를 거쳤다.
동서고금 화가들의 도제 시스템은 비슷하다.
출가 후 명화승의 초(抄)를 연마한 하고, 스승 문하에 들어가 10여년 본격적인 수업을 받고, 이후 스승과 함께 단청 등 불사에 동참하고, 필력이 늘면 탱화 작업에 참여 하고, 스승은 화기에 제자의 이름을 올려 주고, 다른 문하에서 참여한 화승들과 함께 더 큰 불사에서 화풍을 체득하고,,, 그리고 독자적인 화풍을 펼치는 명화승에 이르면 스승은 '금어'라는 존칭을 준다.
앉아서 근심걱정을 다 덜고 나 문밖을 보면, 향적봉에서 정점을 이룬 소백 줄기는 지리산으로 줄달음친다.
안국사 마당 앞 호국사 비,,, 애초 호국사가 있던 터에 안국사가 들어섰다.
우리나라는 읍성의 나라요,산성의 나라다. 조선조 읍성은 3백여개나 있었으나 일제 때 신작로 구실로 철거되었다. 군현이 있는 곳은 거의가 있었다고 보면 된다.
적상산엔 적상산성이 있다. 사고를 지키는 산성이다. 산성이 들어선 시기는 오래다. 고려 거란 침입 때는 인근 주민이 대피해 안전했다. 고려말 최영이 산성을 쌓았다는 말도 전해진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옛 사람들이 험준함을 이용하여 성을 만드니 겨우 두줄기 길로 오를 수있을 따름이요, 그 안은 평탄하고 너르며 냇물이 사방에서 솟으니 참으로 하늘이 만든 요새이다./
1627년 비변사에서는 왕에 이리 보고했다. /형세는 나라 안에서 으뜸이오니 성을 수리 곡식을 저장하면 족히 삼남(三南)이 안전할 것입니다/
고려말 40년은 왜구 침입이 잦았던 시기다. 특히 서남 해안, 곡식을 쌓아두었던 조창(租倉)에 집중되었다.
그런 왜구들의 준동이 사그라진 계기가 둘 있었다. 1) 바다에서 최무선이 화포를 이용해 수백척을 불사른 진포(군산)해전과 2) 육지에서 남원 운봉의 황산 전투 대승이였다.
바로 황산(荒山) 전투의 지휘자가 이성계였다. 계백의 논산 황산벌(黃山)이 아니다. 운봉 황산은 지리산 변이라 황무지 荒이다. 이성계란 이름이 중앙 정계에 알려진 계기가 되었다.
이성게 직속 상관은 총사령관 최영이였다. 최영은 왜구토벌을 위해 야전사령관으로서 전국을 누볐다. 적상산에 그가 성을 쌓았다는 전설, 또 적상산에 오르다 장도로 바위들을 처 길을 냈다는 전설은 그래서 신빙성이 있다. 전설,설화,신화 속에는 역사의 DNA가 잔존하는 법이다.
적상산은 천예의 산성 조건을 지니고 있다. 3면에 걸처 바위 절벽이 허리띠를 두르듯 빙 둘렀다. 북사면만 계곡으로 이어저 이곳만 방비하면 완벽해진다.
현대인은 이를 이용 그곳에 댐을 쌓아 전력을 생산하고 있다. 입지 효용의 시대적 변용이다.
적상산성은 총길이만 8키로가 넘는다. 산성은 높지 않치만 성 너머는 바로 절벽이라 방위가 쉽다. 동서남북 네곳에 문루도 있었는데 지금은 서문과 북문터만 남아있다. 지금은 계곡을 따라 지그재그로 난 자동차 길이 안국사 앞마당까지 이어저있다.
시집 '북한강'을 내면서 한강을 거슬러 올라 영월,정선까지 훑었던 신경림이다. 그는 80년대 초 적상산 북사면 조도(鳥道)를 따라 올랐다.
/물거리들이 담장 안에 가득 쌓여있는 10여집을 지나니 오르막 길이다. 바위와 절벽에 취해 한시간 반쯤 오르니 성벽이 나온다. 바위틈도 지나고 벼랑도 기다시피 올랐다. 성을 지나니 길은 눈속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안국사 경내 앞 산성서 바라본 괴목리 마을 전경이 빛을 받아 희고 정겹다. 한폭의 그림이다. 맞은 편은 덕유산이다.
위 두 사진에서 보이듯 가까이 우측으로 솟은 바위가 장군바위다. 최영이 적상산을 오르다 길이 막혀 장도(長刀)를 내리쳐 길을 내고 올랐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장도바위라고도 한다.
저게 장군바위란 걸 집에 와서 알았다. 미리 알았다면 신경림 처럼 기여서라도 다가가 앵글을 맞췄을 것이다. 역시나 아는 만큼 보이는 게 여행이다.
장군은 칼로 먹고산다. 강감찬이 태어난 곳은 관악산 줄기 낙성대다. 관악산에는 칡 넝쿨은 없으나 벼락은 많다. 바위산이어서 그럴게다.
강감찬이 하늘의 벼락방망이를 없애려고 관악산에 올랐다. 칡넝쿨에 자주 발이 걸려 넘어졌다. 화가난 강감찬은 벼락방망이에 앞서 장도로 칡을 모두 베어 버렸다.
안국사 로케이션이 환상이다. 산사 앞뜰에 서면 소백 등줄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앞산이 덕유산 줄기다. 적상산과 덕유산 사이엔 저리 사람이 모여 사는데 참 정겹다. 가을걷이 논밭은 빛을 박아 더욱 희다. 그림이든 사진이든 원경은 정적인 법인데 생기가 돈다.
사람(人)이 산(山)에 살면 선(仙),곧 신선이 된다. 사람(人)이 곡(谷)에 살면 속(俗),곧 속인이 된다.
그러면 저 아래 계곡 사람들은??? 내 눈엔 신선과 학이 사는 청학동처럼 보인다.
적상산은 소백 등줄기에서 한발 물러서있다. 그래서 적상산은 덕유산 소백 등줄기를 조망하기 최적이다. 덕유산은 보통 북덕유(향적봉),남덕유산로 나눠 부른다. 덕이 넘치는 산이여서일까,육산으로 멀리서 보면 어머니 젓가슴 같다.
멀리 우측 능선 따라 흰 띠 같은 길이 보인다. 무주리조트 곤도라 종착인 설천봉에서 향적봉(香積峰)에 이르는 길이다.
장군바위 인근 서문(西門)터,,,<가져온 사진>
서문 밖에는 서창(西倉)과 고경사라는 절이 있었다. 서창은 군사용 쌀을 저장하는 곳으로 무기를 저장하는 군기창도 있었다. 그래서 이곳 아랫 마을 이름이 서창리다. 북창리도 있다. 북문에 있었던 북창에서 연유한다
안렴대 정상,,,<가저온 사진>
정상 남쪽 층암 절벽 위에 위치한 안렴대는 사방이 천길 낭떠러지다. 고려 때 거란의 침입이 있었을 때다. 삼도 안렴사가 군사들을 이끌고 이곳으로 들어와 진을 쳤다해서 안렴대가 되었다. 또한 병자호란 때는 적상산 사고 실록을 안렴대 바위 밑에 있는 석실로 옮겼다.
안렴사(按廉使)는 지금의 도지사,조선 조 관찰사를 지칭한다. 고려는 초기 이래 절도사(節度使) ·안무사(按撫使) ·안찰사(按察使) 등으로 부르다가 안렴사로 고쳤다.
안렴대서 바라본 대전~통양간 고속도로.<가져온 사진>
겨우살이.
적상호 변 전망대 가는 길 옆이다. 뭘까? 겨우살이다.
말그대로 겨울을 나기에 겨우살이다. 황량한데 겨우살이만 푸르다. 겨우살이는 나무가지에 뿌리를 내리는 기생식물이다. 겨우살이 열매를 먹은 새의 똥을 통해 번식한다. 겨우살이는 씨 외부에 달콤한 젤리 같은 거를 지니고있다.
하여,새들이 좋아한다. 새들은 열매를 물고 나뭇가지에 올라가 먹는데, 먹은 씨앗이 배설물로 나와 나뭇가지에 뿌리를 내린다. 혹은 부리로 쪼개진 씨앗이 젤리와 함게 나무에 붙혀져서.
그런데, 겨우살이 주변 가지들은 왜 저리 부풀어 올랐을까? 겨우살이는 나뭇가지에 '흡기'라는 빨대 모양의 뿌리를 박는다. 그러면 줄기는 흡기로 인해 물 공급하는 관이 막혀 그 부분이 부풀어 오른 것이다. 심하면 가지가 말라 죽는다.
전망대서 바라본 북동사면에도 저리 바위 띠를 두르고 있다.
전망대서 바라본 덕유산. 양수발전소 옥상이 곧 전망대다.
찻길이 이리 전망대 까지 이어진다.
아래 호수가 무주호.
적상호서 지하 수로로 흘러간 물은 저기에 모인다. 길 따라 내려가면 무주읍이다. 무주읍 앞을 흐르는 하천이 남대천이니 무주호는 남대천의 지류이다. 남대천은 흘러흘러 금강으로 간다. 그러니 남대천은 금강의 최상류다.
우측 멀리 백두대간 연봉들이 아련하다.
적상산 소재지는 괴목리(槐木里)다. 느티나무가 많아서이다. 괴목은 느티나무를 뜻한다. 하산 후 숙소인 무주리조트로 향하는 길,기괴한 괴목(怪木)같은 고목이 보여 내렸다.
할머니 한분이 옆에서 일하고 계신다. 마을과 괴목과의 연관성을 일러줄 요량으로 여쭸다.
/할머니,이 나무 뭔지 아세요?/ /괴목이지 뭐겠오,그래서 괴목리요!/
'척'하는 내가 멋쩍다.
무주리조트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니 온몸에 한기가 밀려든다. 무주는 고도가 높은 분지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고 향적봉을 먼저 보았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정상엔 운무요,운무 밑으로 히끗히끗 눈이 보여서다.
무척이나 춥다. 방한 자켓에 모자 장갑까지,,갖출 것 다 갖추고 서둘러 곤도라 탑승장으로 향했다. 곤도라는 덕유산 정상 향적봉 바로 아래 설천봉까지 오른다. 설천봉서 10여분 걸으면 향적봉이다.
아뿔사! 심하게 바람이 불어 곤도라 운행이 불가능 하다는 것이다.
정상은 여전히 운무에 쌓였고 운무 바로 아래로 하얀 눈이 보인다. 실은 눈이 아니라 '상고대'다. 상고대란 액체 상태의 물방울이 같은 영하 상태에 있는 물체와 만나서 눈같이 되는 것을 말한다. 쉽게 말해, 찬 습기가 영하의 나무가지에 얼어 붙은 것이다.
아쉬워 한시간을 서성이다 결국 회군했다. 후회가 밀려온다. /일찍 일어나 홀로라도 새벽 등산하는 건데...../
차선으로 덕유산 중턱 백련사로 향했다. 무주구천동은 백제와 신라의 경계선이였던 나재통문에서 백련사 까지 장장 총 24키로다. 백련사는 변변한 문화재 하나 없다. 한국전 때 다 탔다. 향적봉에 오르는 가장 일반적인 코스라 등산객들이 붐빈다.
지금 내가 가는 이유는 따로 있다. 거기엔 이땅 지성사의 빛나는 한 발자취가 찍혀있기 때문이다.
묘향산 보현사,지리산 화엄사,가야산 해인사,속라산 법주사,,, 명산엔 명찰이 있다.
세상사 예외 있기 마련이다. 예외 없는 원칙 없다.
그럼 덕유산은? 어,떠오르는 사찰이 없다. 남한서 4번 째 높은 산이요, '한국의산하' 접속 횟수로도 지리,설악,북한산에 이어 4위인 명산 중 명산 아니던가. 이름도 덕이 넘치는 德裕山이다.
명찰은 없었어도 명수행자들이 득실했다. 조선조 최고봉은 서산대사 휴정이다. 휴정은 고려말 태고 보우~환암 혼수~귀곡 각운~벽계 정심~벽송 지엄~부용 영관으로 이어지는 중심 맥이다.
바로 서산대사의 스승 부용 영관(1485~1571)이 덕유산서 출가했다. 부용 영관엔 두명의 걸출한 스타가 있었으니 서산대사와 부휴 선수(1543~1615)다. 둘은 당대 불교의 쌍벽이였다. 오늘날 조계종 법통을 거슬러 오르면 예외 없이 서산대사와 부휴대사를 만난다. 부휴 또한 덕유산에 머물렀다. 서산대사의 4대 제자인 정관 일선도.(이하 생략)
다음날 신문에 실린 향적봉 상고대 풍광. 으흐 저걸 놓치다니.....-_-
어제 저녁은 무주 리조트 입구 **식당에서 한잔 곁들이며 무주 한우로 먹었다. 고산지대 한우가 좋다. 횡성,정읍 내장산,영주 소백산,합천 가야산,무주 덕유산,,,등등 옆 테이블을 보니 청국장이 맛나 보인다. 낼 아침을 기대하며 나왔다.
바로 그 식당으로 갔다. 청국장을 시켰다. 맛도 있고 웰빙인데 어제 저녁 포식인지라 남겼다.
식당 안은 영화 브로마이드로 도배를 했다. '국가대표' 포스터들이다. 안결판 포함 두번 본 영화이다. 그러고 보니 식당이 영화 속 배경 같아서 물었다. 촬영지는 아니고,촬영 기간 중 스텝들의 전용 식당이였단다. 촬영 끝나고 오면,모두들 허겁지겁 많이도 먹더라나.
무주서 일정은 끝났다. 다음 행선지는 진안 마이산이다. 적상산 밑으로 난 터널을 지나 고속도로를 타면 빠르다. 그러나 무주구천동 길 따라 내려간 후 무주 읍내로 우회,국도를 타기로 했다. 차는 무주구천동 계곡을 따라 달린다.
무주 구천동은 길다. 백련사에서 나제통문까지 무려 24키로. 중간 중간 승경이 펼쳐지는데 사람들은 이를 33경이라 부른다. 나제통문 다다를 무렵 37번 국도를 타니 무주읍이 지척이다.
좌로 반디랜드가 보이고 태권도 공원 공사가 한창이다. 반디랜드는 반딧불이 축제가 열리는 곳이다. 태권도 공원은 세계 태권도인들의 요람으로 수천억원이 들어가는 대공사이다.
우로 설천고등학교가 보인다. 설정상,영화 '국가대표' 주인공들은 설천고 출신이다.
雪川,,, 눈 많고 천도 많은. 맞춤한 지명이다.
무주읍 앞을 흐르는 하천이 남대천이다. 남대천의 상류가 무주구천동이니 우린 남대천을 끼고 내려온 셈이다.
남대천이 참 많다. 남대천은 배산임수의 풍수적인 지명이다. 남쪽의 큰 하천이니 큰 산도 있기 마련이다.
남설악서 발원하는 양양 남대천, 대관령의 강릉 남대천, 복주산에서 발원해 한탕강 지류가 되는 철원 남대천, 백암온천의 백암산에서의 발원하는 울진 평해의 남대천, 그리고 덕유산의 남대천,,,,,등등
산이 많은 북한은 더 많다. 안변에도,단천에도,북청 물장수의 북청에도 있다.
마을 앞 큰 내이니 만큼 남대천은 마을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가 된다. 무주 남대천에선 반딧불이 축제가 열리고, 양양 남대천에서 연어와 송이축제가 열리고, 강능 남대천과 평해 남대천에선 강능 단오제,평해 단오제가 열리고, 철원 남대천 쉬리마을에선 다술기 축제가 열린다.
8월 8일 중양절과 더불어 음력 5월 5일 단오날은 일년 중 가장 양기가 왕성하다. 수릿날,천중절이라고도 불린다. 단오날이면 남자들은 씨름판을 벌리고 여자들은 창포물에 머리를 감고 그네를 뛰었다. 문밖 출입이 자유롭지 못했던 시절, 하루 무한자유를 맛볼 수 있었으니 여인네들에 남대천은 특별하다.
공자 등등을 제사지낸 대성전.
내삼문(內三門)
강학 공간인 명륜당,,,앞에 있어야할 외삼문(外三門)은 신작로로 잘려나갔다.
무주읍내를 지나다 아쉬움에 무주향교를 들렀다. 향교는 국가 교육기관이다. 현재의 중,고등학교로 양민 이상이면 입학할 수 있었다. 명륜당이라는 배움의 터전 외에,대성전을 세워 중국과 조선의 선현들에 제사를 지냈다. 대개는 군에서는 50명,현에서는 30명 정도가 정원이였다.
향교의 건물 배치는 엄격성이 존재한다. 앞에 학교가 있고 뒤에 제사 공간이 있는,소위 전학후묘(前學 後廟)를 따른다. 외삼문(外三門)을 들어서면 학생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를 두고 공부하는 명륜당을 세운다.
그 뒤로 단을 쌓아 높인 후 내삼문을 세우고, 안으로 공자와 4성인 안자, 자사, 중자, 맹자를 모신 대성전과, 공자의 제자 및 우리나라의 18 현인을 모시는 동무와 서무를 배치한다.
그런데 말이다. 향교가 좀 괘씸하다. 자주 가는 관악산 입구에도 향교가 있어 언젠가 문을 열고 들어가 보았다. 열 받았다. 공자를 중심으로 애제자인 안회,자사를 앞 좌우로 세우고,,, 손자인 증자와 맹자를 좌우로 세우고,,, 다음에 수십명 중국 대유(大儒)가 빙두르고,,, 끄트머리에 퇴계,율곡 등 조선 18성현이 알현하고 있지 않은가....
순간 느꼈다. 조선조 對中 사대주의를 시각화 한다면 저런 형태일거라고. 중국 보다 더 유교적인 조선이다. 중국 유림들이 원형이 잘 보존되어있다며 향교,서원,문묘등을 찾으곤한다.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무주 향교는 무주읍 중심도로 변에 있다. 사실 시각적으로 특별한 게 없다. 길을 내면서 잘리였는지,내삼문은 있는 데 향교 입구인 외삼문은 잘려 나갔다. 그래지 명륜당이 길가 담벽에 붙어있다(사진)
랜드 마크는 지명을 만든다. 서빙고가 있어 서빙고동,원(院)이 있어 이태원, 광주로 넘어가는 나루터가 있어 광나루 광진구(예전 송파등 강남은 모두가 광주군이였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 능 행차를 위해 세운 만안교(萬安橋)가 있어 만안구(안양), '몽실언니'의 권정생 선생이 평생 머물렀던 '의성 5층탑'이 있어 의성 탑리, 김영랑의 생가로 역시 탑이 있어 강진읍 탑동, 이태조 어진을 모시는 경기전이 있어 전동(전주의 유명한 한옥마을이 있는)이다.
많은 백성이 편히 건너라는 뜻에서 萬安橋로 정조의 애민정신을 읽을수있다. 화성행차 때 지었다.
우리나라서 가정 많은 동명은 뭘까? 교동(敎洞)일 게다. 향교가 있어서 교동이다. 삼척,밀양,수원,강릉,속초,김천,춘천,울산,제천,나주,대구,조치원,양산,옥천,공주,증평,영암,익산,진도,,, 도시든 군이든 끝이 없다.
차는 남대천을 넘으니 적상산이 좌로 보인다. 어제 빠저나왔던 고속도로 아래를 터널로 지나니 무주~진안 간 30번 국도다. 40여분 달리면 난 진안 마이산 인근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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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뭔가가 보인다. 말 귀 같기도 하고, 나비 날개짓 같기도 하고, 아니면 하늘을 도화지 삼아 붓점을 두번 찍었나,,,,,,,,,,,,,,,,,,,,,,,,,,계속,,,,,,
베토벤 - 안단테 파보리 Alfred Brendel, Pia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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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산행 속에 역사가 있고, 예술이 있고... 잘 읽었습니다.
잘 보고, 읽고, 겨우살이 욕심납니다.
부조화스러우면서도 불안해 보이지 않는 괘불탱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산자락의 위엄을 짤라버리는 듯한 하앟게 띠를 두른 길들이 적상산에도...
긴 여정 보물 창고에 든 알찬 내용들 편안하게 읽고 갑니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우리들은 자연앞에 그저 한 점입니다. 부와 권력도 명예도...............
한 권의 단편을 읽고 갑니다.
현재의 실록이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적상산 사고본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여러 번 적상산 사고지에 올라보길 원했지만 때마다 어긋났었어요.언제 인연을 지어 볼래나...
글을 읽고나서 여행의 묘미란 이런것이구나 무릎을 칩니다. 적상산을 1000개의 눈으로 고찰하시는 회장님의 글에 감탄 이란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네요. 좋은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