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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4시 15분 국사봉(해발 542m)에 도 착했다. 감격에 겨워 눈물이 날 것 같다. 일행들 모두 비슷한 표정이다. 증명사진을 찍어야 할 것 같은데 무리지어 올라온 사람들이 표지석을 점령하고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은 시몽에게 기다렸노라면서 사진을 부탁한다. 저 사람들 기다리다가 날 새겠네그려. 그냥 이정표에 셔터 한번 눌러주고 이제는 이수봉을 향한다.
이제부터는 어떻게 하든 가겠지. 예정시간보다는 늦어지겠지만 말이다. 생각해 보니 운중동까지 내려갔다 오는 동안 적어도 1시간 30분, 3km 가까이 허비한 것 같다. 국사봉에서 이수봉까지는 거리가 제법 멀다. 여기가 관건이다. 힘이 다 빠진 상태라 오르막이 나오면 지옥에 끌려가는 느낌이다. 시몽은 발에 물집이 잡혔다더니 어떻게 되었는지 입을 꾹 다물고 있고, 영가는 자신의 평소 체력이 고갈되었단다. 땡칠이는 자기 생전 이렇게 오래 걸은 일이 없다나? 표정은 멀쩡한데 속으로 지쳤나 보다. 나도 발가락 10개에 아무런 감각이 없다. 3년 전 생각해서 양말도 두꺼운 것으로 골라 신었고 등산화도 목이 긴 것을 신었는데 이제 한계상황인 모양이지.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오가는 사람들은 모두 즐거워 보이는데 나는 지금 무슨 짓이람? 머리와 다리가 따로 놀도록 하는 약을 개발하면 좋겠다고 농담을 하더니만 저절로 다리가 움직이는 것 같다. 마라톤을 할 때도 10km가 넘으면 다리가 습관적으로 달리고 있더니만 비슷한 상황이네. 하지만 속으로는 더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다. 여기까지 왔으니 종주 마무리를 해야 할테고 바닥난 체력 때문에 혹 넘어지기라도 하면 심각한 부상을 입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젖 먹던 힘까지 내어 걷는다. 검은등뻐꾸기는 여기저기서 울어대는데 이렇게 땅으로 꺼질 듯한 몸을 끌며 걷고 있는 나를 비웃기라도 하는 것 같다. 고글도 집어 넣고, 모자도 벗어서 넣고, 땀에 쓰라려 무릎보호대도 풀었다. 종일 산에서 헤맨 내 몰골이 어떨지 짐작도 안 되는데 다른 사람 얼굴을 보니 눈이 풀렸다. 꼭 내 모습이겠지. 땀을 닦을 기력도 없이 중간에 잠깐씩 쉬면서 물만 마신다.
다리를 질질 끌면서 걷다 보니 오후 4시 55분 이수봉(해발 547m)에 도착했다. 지도상에 나와 있는 시간과 똑같은 시간이 걸렸다. 그 정도만 해도 잘 걸은 거겠지. 남은 코스는 그리 어렵지 않으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사람들이 꽤 눈에 띈다. 사진을 찍으려고 하다가 사람들 무리에 밀려 다시 발길을 옮긴다. 여기서부터 갈림길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으니 발을 더 빨리 움직여보자. 스스로 최면을 걸어본다. 5시를 넘기니 초여름 날씨를 보이기는 하지만 산속이라 어둑하게 느껴진다. 조금씩 마음이 바빠진다. 고문님은 옥녀봉에서 기다리다 지루해 매봉까지 오시지 않았을까?
갈림길에서 물이 부족한 시몽에게 아직도 갈 길이 꽤 남았으니 혹시나 물을 살 수 있으면 사라 하는데 여기저기 물이 없단다. 하기는 시간적으로 팔려고 가지고 온 물도 동날 시간이다.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꾼 후 헬기장을 지나고 오르막에서 잠시 쉰다. 망경대를 향해서 가야 하는데 편한 포장도로로 갈 것인지 아니면 산길로 갈 것인지 잠깐 고민을 한다. 그러다가 제대로 산길을 걷는 쪽으로 정하고 몸을 일으켜는데 한번 주저앉은 영가와 시몽, 땡칠이는 허기가 졌는지 우적우적 간식을 먹느라 바쁘다. 하기는 오늘 행군을 칼로리 소모로 계산한다면 어마어마할 것이다. 배를 채워야 다시 힘을 내어 걷지. 이쪽 능선으로 옮겨타고 나니 이제 정말 갈 수 있으리라는 마음이 든다.
산길은 바위가 턱 버티고 있는 것이 적당한 긴장을 요구한다. 전 같으면 바위능선으로 기어오르련만 그건 나도 사양하고 바위 아랫길로 묵묵히 걷는다. 한참 걷는데 영가가 "이제 좀 산 같네." 한다. 영가도 바위가 있는 산이 산다워서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얼른 릿지화 하나 장만해야겠구만. 처음에는 바위만 보면 벌벌 떨던 사람들도 바위의 매력에 빠지면 헤어나지 못한다니까. 잘 나 있는 길을 터벅터벅 걷는 것보다 약간 오르막이기는 하지만 이런 길을 걸으면 느낌이 다르다.
엉금엉금 기다시피 하다가 밧줄에 매달리기도 하고, 있는 힘껏 기어오르기도 하면서 오른쪽으로 망경대(해발 615m)를 지났다. 그러면 바로 혈읍재이다. 잠깐 쉬면서 나도 연료 보충 삼아 가져온 쑥개떡을 두 개나 먹는다. 길이 뻔하니 일행은 먼저 매봉을 향해 걷고 있다. 오가는 사람이 드물어졌다. 매봉 근처 막걸리를 파는 곳은 전보다 화려하다. 온갖 꽃들이 피어 한창 제 자랑에 바쁘다. 막걸리를 파는 사람이 오가는 사람들을 위해 심기 시작한 모양인데 점점 다양한 종류의 꽃이 핀 꽃밭으로 변했다. 보기 좋다.
발바닥에 아무런 느낌이 없는 상태가 지속된다. 가능하면 살살 딛으려 노력하는데 그래도 발바닥은 불이 나는 것처럼 뜨끈뜨끈하다. 이상하게 나만 유독 오래 걸으면 발바닥이 아프니 아무래도 내 발바닥에 문제가 있는게지. 물론 오늘 같은 경우는 苦行을 사서 하는 경우이니 각오를 했지만 말이다. 오후 6시 5분, 드디어 매봉(해발 582m)에 도착했다. '혹시나' 하면서 두리번거리며 고문님을 찾았는데 안 계시다. 옥녀봉에서 옥녀랑 계속 놀고 계시는가?
발을 이제 옥녀봉 방향으로 돌린다. 지도상에 50분 걸린다고 되어 있다. 가다가 시몽이 고문님 전화를 받았다. 잘 오고 있느냐는 말씀이겠지. 계단이 많기는 하지만 막판 빼 놓으면 주로 내리막길이니 잘 갈 수 있겠지. 매바위를 지나고 헬기장에서 제각각 의자에 앉아서 쉰다. 새삼스럽게 힘들다는 말도 없이 따로따로 앉아 있는 모습을 누가 보면 싸운 줄 알겠다. 세 사람을 한꺼번에 화면에 넣고 사진을 찍는다. 드문 인물 사진이다. 이 정도 몸을 혹사하고 나면 눈에 보이는 것도 없고, 들리는 것도 없고,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니다. 통증은 느껴지지. 그때 어디선가 아카시향이 날아와 내 코를 간지럽힌다. 청계산으로 접어 들어 걷는 동안 찔레와 아카시향이 풍겼을 법도 한데 아무런 자극이 되지 못 했다. 이제 몸이 제대로 작동을 하는 건가?
계단을 따라 한동안 내려가다가 갈림길에서 갑자기 방향감각을 잃고 헤맨다. 여러 번 다닌 길인데도 이렇다. 지도를 확인해 보건대 원터골 방향으로 가다가 우회전하지 말고 직진하는 것이 맞겠다. 다시 줄을 서서 내려간다. 계단을 다 내려가서 옥녀봉 방향으로 접어 들었다 싶었더니 시몽이' 쌩' 하고 사라졌다. 갑자기 어디서 저런 힘이 났지? 나는 같은 속도로 뚜벅뚜벅 걷는다. 옥녀봉이 나타날 때가 되었는데 생각보다 멀게 느껴진다. 옥녀봉이 아니라 '악녀봉'이라고 구시렁거리며 걷는다.
다리를 질질 끌며 걷다 보니 오전 6시 45분 옥녀봉(해발 376m)에 도착했다. 옥녀봉에 도착하자마자 눈에 띄는 의자에 널브러지듯 앉으니 고문님께서 조금만 더 기운을 내라 하신다. 숲속 자리에 완전히 한 상을 차려놓고 기다리셨나 보다. 긴장이 풀리면서 온몸이 가라앉는 듯 싶다. 아무 생각이 없다. 그래도 남정네들은 맥주를 보자마자 즐거운 표정이다. 의자에 앉기 위해 움직이면서 땡칠이가 말한다. "아직도 다리가 움직이네." 푸훗, 다리가 말을 할 줄 알면 할 말이 무척이나 많겠지.
어스름녘 맥주에, 과일에, 치즈가 어우러진 환상적인 산중파티다. 나는 운중동에서 맥주를 마시고 질린 탓에 남은 물로 대신한다. 남은 거리는 정말 기어서라도 갈 수 있을테니까, 게다가 이제 책임감에서 벗어나도 되니까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온다. 의자에 앉아 있기도 힘들어 어딘가에 눕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다행한 것은 고생시켰다는 말 대신 고생스러웠지만 덕분에 종주를 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중간에 포기하게 될까 봐, 체력이 좋은 사람들이지만 누군가 탈이 날까 봐 얼마나 마음을 졸였나. 진짜 여기까지 내가 걸어서 왔나 스스로 의심스럽기도 하고, 잘 참아준 몸이 대견하기도 하다. 늘 그렇지. 산행은 사서 하는 고생이지만 하산 후에는 뿌듯하지 않던가.
이제 살았다 싶고 스스로도 대견한지 이야기가 많다. 확실하게 종주를 마치니 산행기도 그렇게 쓰라고 시몽에게 다시 한번 확인을 하는데 시몽 왈, " 고행성사를 하고 나니 머리가 하얗게 비어서 생각이 하나도 안 나는데요." 아이고, 이유가 많군요. 음주와 흡연으로 녹스는 머리 그렇게라도 해야 현상 유지되지 않나요.
다시 자리를 정리한 후 마지막 힘을 낸다. 일하던 소가 힘들어 하면 막걸리를 먹이고 다시 밭을 간다더니만 맥주 몇 잔에 기운이 났는지 세 사람은 씩씩하게 눈 앞에서 사라졌다. 나만 내리막길에 쏠리는 발가락들을 달래며 절룩절룩 걷는다. 사방은 이제 어둑신하다. 푸드득 날개를 접는 산새 소리가 울리는 산길에 힘겹게 발을 옮기는 나와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시며 뒤따라오시는 고문님의 발자국 소리가 퍼진다.
고통스럽게 내딛는 발 아래 아카시 꽃이 밟힌다. 아카시 향기 너머로 여름이 오고 있겠지. 어둠이 자드락자드락 깔리는 시간, 하얀 눈처럼 깔린 꽃잎이 우리를 맞아주고 있는가. 자신과 쟁투를 벌이고 개선장군이 되어 도시로 돌아오는 사람들을.
뉘가 눈이 소리없이 내린다더뇨
이렇게 쟁쟁쟁
무수한 종소리 울림하여 내리는 낙화
이 길이었다
손 하나 마주 잡지 못한 채
어쩌지 못한 젊음의 안타까운 입김 같은
퍼얼펄 내리는 하이얀 속을
오직 말없이 나란히 걷기만 걷기만 하던
아아 진홍 장미였던가
그리고 너는 가고
무수한 종소리 울림하는 육체 없는 낙화 속을
나만 남아 가노니
뉘가 눈이 소리없이 내린다더뇨
유치환의 < 落花 > 전문
오후 7시 55분 양재동 화물터미널에 도착했다. 발가락에 물집 하나와 발톱이 빠질 것 같은 통증을 훈장으로 남기고. 有終之美를 거두기는 했지만 다시는 하지 않을 것 같은 광교, 청계 종주를 마무리하며 생각이 많다. 갑자기 내 고집에 스스로도 웃음이 난다. 푸하하!
( 총 12시간 35분 걸렸음. 점심 식사 1시간, 운중동과 옥녀봉 맥주 파티 합해 1시간 정도.
거리는 정해진 길로 갔을 때 28km라 했으니 적어도 30km 이상 걸었음.)
첫댓글 지도와 같이 보며 산행길 파악했습니다~작년 가을 저도 갔던 코스에 비하면 거의 3배는 넘을 것 같은 거리인데요~여하튼 긴 산행에 기~나긴 산행기 쓰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저로 인한 알바로 한시간 이상 큰 고생시켜드린 점 재차 사과드립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나면 고생 때문에 더 기억이 나는 산행이 되겠지요.
30km! 아주 긴거리를 거침없이? 날듯이? 걸었습니다. 한뫼들 앞에 호를 한번만 붙여보겠습니다. '無障空飛' ㅎㅎ
누구는 날았는지 모르는데 저는 아직까지 후유증으로 헤매고 있습니다. ㅠ ㅠ
국사봉 아래 길을 잃고 허덕였던 건 산할아버지의 벌이었던 것 같네요. 감히 인간들이 종주란 이름을 붙여 산을 농락하니 노하셨던 게지요. 증명사진은 웬간하면 찍지말아야겠어요 내가봐도 내 얼굴이 왜이리 큰거야...
친구는 내 옆에만 서지 않는다면 키도 크니 별 문제가 안 될 것 같은데...